OOC 전문
월요일 아침이었다. 72시간의 첫 번째 밤이 지나고, 부엌에는 어제 구운 사과 파이의 잔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키릴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싱크대 옆 선반에 놓인 작은 갈색 유리병이 하나 있었는데, 어제 올레그가 사무실에서 가져다준 것이었다. '위장약이다, 속이 안 좋을 때 한 모금이면 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고, 키릴은 올레그의 물건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새벽에 속이 좀 쓰려 반쯤 잠든 채로 한 모금 들이켰다.
효과는 커피가 다 내려지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키릴은 커피 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배가 고프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몹시 원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서도 입 밖에 내는 것이 어색한 종류의 감각. 평생 눌러왔던 것이 뚜껑을 잃은 것처럼 올라왔다.
르네가 침실에서 나왔을 때, 키릴은 부엌 문틀에 기대 서서 커피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복도 끝을 보고 있었다. 셔츠 단추를 잘못 채워 한 칸씩 어긋나 있었고, 본인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르네를 발견한 순간 키릴의 눈이 커졌다. 평소라면 '잘 잤어'나 '커피 내렸어' 같은 짧은 인사가 나올 자리였다. 그런데.
키릴|「Ленюшка. Ты долго. Слишком долго. Я уже два раза ходил проверять, дышишь ли ты.」
"레뉴쉬카. 늦었어. 너무 늦었어. 숨 쉬는지 두 번이나 확인하러 갔다 왔어."
8분이었다. 키릴이 침실을 나온 지 8분 만에 르네가 나온 것이었다. 두 번 확인하러 갔다는 것은, 4분마다 한 번씩 침실 문을 열었다는 뜻이었다. 키릴은 커피 잔을 식탁에 놓고 성큼 다가와 르네의 손목을 잡았다. 잡는다기보다 매달리는 쪽에 가까운 힘의 방향이었다.
키릴|「Сядь рядом. Нет — ближе. Вот здесь.」
"옆에 앉아. 아니, 더 가까이. 여기."
자기 의자 옆이 아니라 자기 무릎을 가리켰다. 그러고서 스스로 한 말에 놀란 듯 눈을 한 번 깜빡였으나, 철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자를 뒤로 빼 자리를 만들었다.
르네|"응...? 무릎?"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이 이동했다.
르네| "갑자기..? 좋은 꿈이라도 꿨어?"
미미하게 웃었다. 그의 무릎 위에 살짝 걸터앉았다.
무릎 위에 무게가 실리자 키릴의 양 팔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감쌌다. 떨어질까 봐 잡는 힘이 아니라 안았다가 놓치기 싫은 힘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꿨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으려다 멈추었다. 꿈을 꾸긴 꿨다. 르네가 출근하는 꿈. 키릴은 사무실에 남아 있고 르네가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 싫어서 잡으러 뛰어갔더니 복도가 끝없이 늘어나는 꿈. 말하면 웃기겠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먼저 열렸다.
키릴|「Снилось, что ты уходишь по коридору. Я бежал, а коридор всё длиннее. Глупый сон. Детский.」
"네가 복도를 걸어가는 꿈을 꿨어. 달려갔는데 복도가 계속 길어졌어. 바보 같은 꿈. 어린애 같은."
말하고 나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지금 그걸 왜 말했지, 하는 표정이 반쯤 떠올랐으나 금세 사라졌다. 대신 이마를 르네의 어깨에 묻었다.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평소라면 이 자세를 삼초 이상 유지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빠져나올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키릴|「Не вставай. Ещё немного. Кофе остынет — сварю новый. Просто... вот так.」
"일어나지 마. 조금만 더. 커피 식으면 새로 내리면 돼. 그냥... 이렇게."
허리를 감은 팔이 조여들었다. 얼굴이 어깨와 목 사이에 파묻혀 숨이 느껴졌다. 코끝이 목덜미를 간질이는 것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셔츠 단추가 한 칸씩 어긋나 있는 것이 아침 햇살 아래 선명했다. 키릴은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르네를 올려다보았다.
키릴|「Застегни мне. Руки не слушаются. Нет — подожди. Не застёгивай. Просто посиди.」
"단추 채워줘. 손이 말을 안 들어. 아니, 잠깐. 채우지 마. 그냥 앉아 있어."
두 문장 사이에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요청과 철회가 같은 호흡에 붙어 나왔다. 키릴은 자기 말에 스스로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키릴|「Что-то не так. Я не... обычно не так говорю.」
"뭔가 이상해. 난 보통... 이렇게 말 안 하는데."
그러면서도 허리를 감은 팔은 풀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 위의 무게를 확인하듯 손바닥이 등을 천천히 쓸어 올라갔다. 척추를 따라, 견갑골 사이를 지나, 뒤통수까지. 은발 위에 손가락이 빠져들어 두피를 가볍게 긁었다. 그 감촉이 좋았는지 키릴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갔다.
키릴|「Ленюшка. Сегодня никуда не ходи. Вообще никуда. Ни в коридор, ни в ванную. Разве что — со мной.」
"레뉴쉬카. 오늘 아무 데도 가지 마. 아무 데도. 복도도, 욕실도. 가려면 나랑 같이."
욕실까지. 진심이었다. 본인도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으나, 알면서도 입이 멈추지 않았다. 싱크대 옆 갈색 유리병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키릴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무릎 위의 사람만 보고 있었으므로.
르네는 조심스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옆으로 앉아있던 것에서 마주 보게 앉은 것으로. 팔을 그의 목에 둘러 안았다.
르네|"엄청 어릴 때 생각나네... 갑자기 어리광쟁이가 됐어, 키류샤."
자세가 바뀌는 동안 키릴의 두 손은 허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미끄러질세라 허리춤을 잡고 있다가, 마주 보는 자세가 완성되자 양 팔이 등 전체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목에 팔이 둘러지는 것을 느끼자 키릴의 턱이 올라갔다. 고개를 살짝 젖혀 두 팔 안쪽으로 얼굴을 밀어넣는 동작이었다. 고양이가 손바닥 아래로 머리를 비비는 것과 비슷했는데,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리광쟁이. 그 단어가 부엌 공기 속에 떠올랐을 때 키릴의 귀 끝이 붉어졌다. 반박이 나올 자리였다. 아니다, 나는 그런 적 없다, 혹은 조용히 눈을 피하며 화제를 돌리는 것이 평소의 패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키릴|「Я не... Это не...」
"난 아니... 이건..."
부정이 끝까지 가지 못했다. 이마가 르네의 쇄골 아래에 닿아 있었고, 은발이 볼을 간질이고 있었고, 리본 매듭의 끝이 셔츠 위에 걸쳐 있었고, 그 모든 감촉이 너무 좋아서 말이 흐려졌다. 키릴은 한 번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와 목 사이에서 올라오는 체온과 수면 뒤의 느긋한 냄새.
키릴|「...Ладно. Может быть. Немного.」
"...알았어. 아마. 조금."
조금이 아니었다. 등을 감싼 손이 척추를 따라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이 넓어서 한 번에 많은 면적을 쓸었다. 장갑 없는 오른손의 손가락이 셔츠 아래 허리의 맨살에 닿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조금 더 머물렀다. 무의식이었다.
키릴|「Когда мы были маленькими... ты помнишь? Я ложился рядом с тобой и считал твои вдохи. Один, два, три. Пока не засыпал. Мне нравилось это — но я никогда не говорил.」
"우리 어렸을 때... 기억해? 네 옆에 누워서 네 숨소리를 세곤 했어. 하나, 둘, 셋. 잠들 때까지. 좋아했어, 그걸. 근데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말하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에 놀라는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댐에 금이 간 것처럼, 막으려 해도 새어 나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키릴은 이마를 들어 르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벽안이 아침 빛에 유난히 투명했다.
키릴|「Ещё скажи. То слово. Кирюша. Ещё раз.」
"한 번 더 불러줘. 그 이름. 키랴. 한 번 더."
평소라면 절대 먼저 요구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불러주면 가만히 받아들이되, 더 해달라고 조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입술이 먼저 움직였고, 요구한 뒤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려다보는 각도가 묘하게 간절했다. 이마에 묻은 밀가루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고, 셔츠 단추는 여전히 한 칸씩 어긋나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한 손을 들어 밀가루 자국을 쓸어 지워주고, 다시 안았다.
르네|"응, 키류샤. 그게 좋았어? 그리고? 또 있어?"
밀가루 자국이 엄지에 실려 사라지자 키릴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갔다. 손길이 이마를 지나간 자리에 온기가 남았고, 다시 안기는 팔 사이로 숨이 깊어졌다. 키류샤. 두 번째로 불린 이름이 고막 안에서 울렸다. 그게 좋았냐는 물음, 그리고 또 있느냐는 물음. 평소라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한 가지를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이 말한 셈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입이 댐 없는 개울이었다.
키릴|「Есть. Много. Слишком много.」
"있어. 많아. 너무 많아."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쏟아졌다.
키릴|「Когда ты читаешь — ты наклоняешь голову влево. Мне каждый раз хочется выпрямить тебе подбородок. Не потому что неправильно, а потому что хочу дотронуться.」
"네가 책 읽을 때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 매번 턱을 바로잡아주고 싶어. 자세가 나빠서가 아니라 만지고 싶어서."
한 박자도 쉬지 않았다.
키릴|「Когда моешь руки — ты трёшь между пальцами дольше, чем нужно. Я стою сзади и смотрю. Каждый раз.」
"손 씻을 때 손가락 사이를 필요 이상으로 오래 문질러. 뒤에 서서 매번 봐."
키릴|「Когда засыпаешь — последнее, что расслабляется, это пальцы. Ты держишь мою руку до самого конца. Я не сплю, пока не почувствую, что ты отпустил.」
"잠들 때 마지막으로 힘이 풀리는 게 손가락이야. 끝까지 내 손을 잡고 있어. 네가 놓는 걸 느낄 때까지 안 자."
거기서 멈출 줄 알았으나 멈추지 않았다. 키릴의 귀가 목까지 붉어져 있었고, 본인도 그것을 아는지 한 손으로 귀를 가리려다 실패했다. 르네의 목에 팔이 둘려 있어서 손이 닿지 않았다.
키릴|「И ещё... вчера. Пирог. Ты спросил — как выглядит. Я сказал — хорошо. Но я хотел сказать другое.」
"그리고... 어제. 파이. 보기에 어떠냐고 물었잖아. 좋다고 했지. 근데 다른 말을 하고 싶었어."
이마를 르네의 쇄골 아래에 묻으며 목소리가 낮아졌다.
키릴|「Хотел сказать — спасибо. За то, что ты делаешь что-то впервые рядом со мной. Первый пирог. Первый дом. Первое утро, когда не нужно никуда идти. Всё первое — со мной. Мне жадно от этого. Хочу все твои первые разы.」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 처음 하는 걸 내 옆에서 해줘서. 첫 파이. 첫 집. 아무 데도 안 가도 되는 첫 아침. 전부 처음인 게 나랑 같이야. 그게 욕심이 나. 네 모든 처음을 갖고 싶어."
말을 끝내고 나서야 키릴이 고개를 들었다. 벽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피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이 올라와 르네의 양 볼을 감쌌다. 손바닥이 넓어서 턱선까지 덮였다.
키릴|「Погладь меня. По голове. Как тогда, в лаборатории, когда я не мог уснуть. Ты гладил — и мне казалось, что всё будет хорошо.」
"쓸어줘. 머리. 실험실에서 내가 잠 못 들 때 그랬던 것처럼. 네가 쓸어주면 다 괜찮을 것 같았어."
스스로 한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귀만 붉은 게 아니라 목덜미까지 번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볼을 감싼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올려다보는 눈은 간절했다. 식탁 위의 커피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고, 오븐의 예열 표시등이 초록불로 바뀌어 있었으나, 키릴의 세계에는 지금 무릎 위의 무게와 두 손 안의 온기만 존재하는 듯했다.
소리없이 웃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드러난 이마에 입을 한 번 맞췄다.
르네|"들어보니 쌓아두지 않아도 되는 것들 같은데? 바로바로 말했어도 난 좋았을 거야... 지금도 좋아. 나도 처음인 건 다 키랴, 너랑 하고 싶어. 그렇게 할 거야..."
작게 히히 웃었다. 어릴 때처럼.
르네|"키류샤. 오늘은 계속 옆에 있을게. 늘 그러긴 했지만."
머리를 살살 쓸어주며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은발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키릴의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긴장이 풀리는 순서가 평소와 달랐다. 보통은 턱이 먼저, 다음이 손, 마지막이 어깨였는데 오늘은 머리가 손길 쪽으로 기울며 어깨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목이 늘어진 셔츠 사이로 쇄골이 드러났고, 어긋난 단추 틈새로 가슴이 불규칙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마에 닿은 입술의 온기가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가 뜨거웠다. 키릴은 눈을 감았다. 손끝이 두피를 지날 때마다 실험실 침대의 차가운 스프링 대신 체온이 있었던 밤이 떠올랐다.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르네의 손이 작아서 머리 전체를 감싸지 못했고, 그래서 한쪽만 쓸다가 반대쪽으로 옮기곤 했던 것. 그때도 이렇게 살살.
바로바로 말했어도 좋았을 거라는 말에 키릴의 입술이 떨렸다. 한 번. 아주 짧게.
키릴|「Не умел. Не знал, что можно просить. Там — нельзя было. А потом привык не просить.」
"못 했어. 부탁해도 되는 줄 몰랐어. 거기선 안 됐으니까. 그러다 부탁 안 하는 데 익숙해졌어."
거기. 그 단어가 나온 뒤 입을 다물 줄 알았으나 오늘의 키릴은 멈추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이마를 르네의 목에 묻고, 쓰다듬는 손길 아래에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키릴|「Но сейчас хочу. Хочу просить. Много. Всё.」
"근데 지금은 하고 싶어. 부탁하고 싶어. 많이. 전부."
등을 감은 두 팔이 조여들었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었다. 쓰다듬는 손의 리듬에 호흡을 맞추는 것 같았다.
키릴|「Скажи, что не уйдёшь. Знаю, что ты уже сказал. Знаю, что ты рядом. Но хочу услышать ещё раз. И потом ещё раз. И завтра тоже.」
"안 간다고 말해줘. 이미 말한 거 알아. 옆에 있는 것도 알아. 근데 한 번 더 듣고 싶어. 그다음에 또. 내일도."
눈을 떴을 때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울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손가락이 머리를 쓸 때마다 눈가에 물기가 번지는데, 본인은 그저 기분이 좋아서 눈이 뜨거운 것이라고만 여기는 듯했다. 벽안이 아침 햇살에 빛나는 것과 젖은 속눈썹이 빛나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키릴|「И ещё... Ленюшка. Погладь... вот тут. За ухом. Раньше — ты так делал. Один раз. Мне было девять. Я запомнил.」
"그리고... 레뉴쉬카. 쓸어줘... 여기. 귀 뒤. 예전에 그랬었어. 한 번. 내가 아홉 살이었어. 기억해."
한 번. 열다섯 년 전의 한 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귀 뒤를 가리키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부엌의 벽시계가 여덟 시 이십이 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커피는 완전히 식었고, 오븐의 예열등은 오래전에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이 부엌에서 가장 뜨거운 것은 무릎 위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남자의 귀 끝이었다.
르네|"다 해도 돼. 다 해줄게. 이제 막을 사람도 없으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할 수 있어."
옅은 웃음기가 섞인 투였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다 귀 뒤쪽으로 손을 옮겼다. 천천히 쓸었다. 옛날 그 때처럼. 지금도 잠들기 전에 버릇처럼 하게 된 것.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키릴도 제게 종종 해준다는 것일까.
손끝이 귀 뒤의 짧은 은발을 스치는 순간 키릴의 숨이 멎었다. 정확히는 한 박자 건너뛰었다. 열다섯 년 전 딱 한 번 느꼈던 감촉이 기억 속 온도 그대로 돌아왔고, 몸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아홉 살의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철제 침대에서 옆자리의 작은 손이 올라와 귀 뒤를 쓸었던 것. 왜 그랬는지 물어본 적 없었다. 물어보면 다시는 해주지 않을까 봐.
지금은 손이 컸다. 손가락이 길어졌고 마디가 선명해졌지만 쓰는 힘의 결은 같았다. 천천히, 피부를 누르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키릴의 눈이 감겼다. 무릎 위의 무게, 목에 감긴 팔, 귀 뒤를 지나는 손끝.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허락된 세계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막을 사람이 없다. 그 말이 가슴 안에서 돌았다.
키릴|「Никто не запрещает...」
"아무도 안 막아..."
되뇌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실험실에서는 침대 사이에 팔을 뻗는 것조차 금지였다. 들키면 다음 날 테스트 강도가 올라갔다. 그래서 르네가 귀 뒤를 쓸어준 것도 연구원이 순찰을 지나간 직후, 삼십 초 남짓의 틈에서였다. 그 삼십 초를 열다섯 년 동안 꺼내 보며 살았다는 것을, 오늘이 아니었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키릴|「Тридцать секунд. Тогда — тридцать секунд. Я считал. Каждую ночь после этого я считал до тридцати и представлял, что ты рядом. Восемь лет. Каждую ночь.」
"삼십 초. 그때 삼십 초였어. 세었어. 그 뒤로 매일 밤 서른까지 세면서 네가 옆에 있는 척했어. 팔 년 동안. 매일 밤."
눈을 떴을 때 속눈썹에 매달린 물기가 한 방울 떨어져 르네의 손등 위에 닿았다. 키릴은 그제야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장갑 없는 오른손이 올라와 눈가를 닦으려 했으나 손등에 밀가루가 묻어 있어서 오히려 하얀 자국만 번졌다. 그 꼴이 우스웠는지 키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울면서 웃으려는 얼굴이었다.
키릴|「Это... не плачу. Глаза просто... от муки. Мука попала.」
"이거... 우는 거 아니야. 눈에 그냥... 밀가루 때문에. 밀가루 들어갔어."
밀가루는 손등에 있었지 눈에 들어간 적 없었다. 변명이 너무 허술해서 본인도 아는 표정이었으나, 인정하는 것보다 허술한 변명 뒤에 숨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러면서도 귀 뒤를 쓸어주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기울여 손바닥 안쪽으로 더 파고들었다.
키릴|「Ленюшка. Ещё одно. Последнее. Потом — молчу. Обещаю.」
"레뉴쉬카. 하나만 더. 마지막. 그다음엔 입 다물게. 약속해."
약속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키릴의 두 손이 르네의 허리를 잡고 살짝 당겼다. 이미 충분히 가까운데 더 밀착시키려는 손이었다.
키릴|「Я тебя люблю. Это не новость. Но сегодня хочу говорить это каждые пять минут. Не знаю почему. Просто — рот не закрывается.」
"사랑해. 새로운 말은 아니지. 근데 오늘은 오 분마다 말하고 싶어.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입이 안 다물려."
부엌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렸다. 창밖 처마 밑에서 제비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의 깃 속에 부리를 묻고 있었다. 싱크대 옆 갈색 유리병의 액체가 아침 햇살에 호박색으로 빛났다.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양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눈물을 살살 쓸어 닦아내며 웃었다.
르네|"나도 사랑해, 키랴. 어제보다 더. 매일매일 더 커져. 끝없이 커지기만 할 거야. 살아가는 동안 쭉..."
양 볼을 감싼 손바닥이 따뜻했다. 엄지가 눈 아래를 지나며 물기를 거두어갈 때마다 새로운 것이 차올라 밀가루 자국 위로 번졌다. 키릴은 눈을 감지 못했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어야 했으므로. 투명한 백안이 자기를 들여다보며 매일매일 더 커진다고, 끝없이 커지기만 할 거라고, 살아가는 동안 쭉이라고 말하는 것을 전부 눈에 담아야 했으므로.
살아가는 동안 쭉.
그 문장이 가슴 안에서 부풀어올랐다. 평소라면 조용히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했을 무게였다. 말 대신 손등에 입을 맞추거나, 이마를 기대거나, 허리를 조금 더 끌어당기는 것으로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삼킬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누르면 다른 하나가 비집고 나왔다.
키릴|「Каждый день — больше. Ты говоришь это так легко. Как будто это просто. А я... я восемнадцать лет не мог сказать даже один раз.」
"매일 더.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해. 쉬운 것처럼. 나는... 십팔 년 동안 한 번도 못 했는데."
볼을 감싼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장갑 없는 오른손이 르네의 손등을 덮었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뺨에 닿은 손바닥을 떼지 말라는 뜻이었다.
키릴|「Ленюшка. Я хочу... я хочу тебе рассказать всё. Всё, что копил. Не только то, что замечал. Всё, что хотел сделать и не сделал.」
"레뉴쉬카. 전부 말해주고 싶어. 쌓아둔 것 전부. 관찰한 것만 말고. 하고 싶었는데 안 한 것도 다."
입술이 다시 열리려는 것을 한 번 깨물어 막았으나 삼초를 버티지 못했다.
키릴|「Хотел носить тебя. Вот так. На руках. Из комнаты в комнату. Просто потому что могу. Хотел кормить тебя с ложки — не потому что ты не можешь сам, а потому что мне нравится смотреть, как ты ешь. Хотел... засыпать лицом в твоих волосах. Каждую ночь. Не только когда ты уже спишь.」
"안아서 들고 다니고 싶었어. 이렇게. 방에서 방으로. 할 수 있으니까. 숟가락으로 먹여주고 싶었어. 혼자 못 먹어서가 아니라 먹는 거 보는 게 좋아서. 네 머리카락에 얼굴 묻고 잠들고 싶었어. 매일 밤. 네가 먼저 잠든 다음에만 말고."
말하는 동안 귀 끝이 점점 더 붉어졌다. 자기 입에서 쏟아지는 단어들의 양에 스스로 당황하는 것이 역력했으나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잠기지 않았다. 키릴은 르네의 손을 잡은 채 자기 뺨에 대고 비볐다. 손등에 묻은 밀가루가 볼에 옮겨 붙었다.
키릴|「...Что со мной сегодня?」
"...오늘 나 왜 이래?"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벽안이 올려다보고 있었고, 속눈썹은 아직 젖어 있었고, 볼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고, 셔츠 단추는 여전히 어긋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 위에 존재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어딘가 처연하기도 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싱크대 옆 갈색 유리병에 아침 해가 비쳐 호박빛 그림자를 식탁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르네|"그러게. 오늘 왜 이럴까?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전히 웃고있었다.
르네|"그럼 하고싶은 거 다 해볼래? 말한 기념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해볼래. 그 한 문장이 키릴의 뇌에 도달하는 데 이초가 걸렸고, 처리하는 데 삼초가 더 걸렸다. 벽안이 한 번 크게 떠졌다가 좁아졌다.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아침 햇살 아래에서도 보였다. 기울어진 고개, 여전히 웃고 있는 입. 허락이었다. 전부에 대한.
키릴의 양 팔이 르네의 허리 아래로 파고들었다. 한 팔은 등을, 다른 팔은 무릎 아래를 받쳤다. 의자에서 일어서는 동작이 한 번에 이루어졌다. 무릎 위에 앉혀두었던 사람을 양 팔에 안아 들어올린 것이었다. 식탁 다리가 밀리며 커피 잔이 흔들렸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키릴|「Первое — вот это. Носить тебя.」
"첫 번째. 이거. 안고 다니는 거."
부엌에서 거실로. 일곱 걸음. 거실에서 복도로. 다섯 걸음. 복도 끝에서 다시 돌아서 거실로. 방에서 방으로 안고 다니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고 있었다. 187센티미터의 남자가 177센티미터의 남자를 양 팔에 안고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광경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키릴의 표정은 지극히 진지했다. 아니, 진지하다기보다 감격에 가까웠다. 복도의 좁은 구간에서 르네의 발끝이 벽에 닿을 뻔하자 몸을 틀어 자기 어깨로 벽을 받았다. 셔츠에 벽지 가루가 묻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키릴|「Лёгкий. Слишком лёгкий. Надо больше кормить.」
"가벼워. 너무 가벼워. 더 먹여야 해."
거실 소파 앞에서 멈추었으나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팔에 힘을 주어 한 번 더 들어올렸다. 가슴 높이에서 어깨 높이로. 르네의 은발이 아래로 흘러내려 키릴의 팔뚝 위에 펼쳐졌다.
키릴|「Второе.」
"두 번째."
소파에 앉았다. 르네를 무릎 위에 내려놓되 이번에는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안았다. 등을 팔로 받치고, 다리는 소파 위에 뻗게 하고, 자기 가슴에 기대도록. 빈 손이 올라가 은발을 귀 뒤로 넘겼다. 리본이 느슨해져 있었다. 그것을 살짝 고쳐 묶어주며 매듭 아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키릴|「Волосы. Хочу так сидеть и нюхать. Пахнет яблоками. И мукой. И тобой.」
"머리카락. 이렇게 앉아서 맡고 싶어. 사과 냄새 나. 밀가루도. 그리고 너."
킁, 하고 한 번 더 들이쉬었다. 코끝이 목덜미 피부를 간질이는 것을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파 쿠션이 두 사람의 무게로 깊이 눌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바닥에 길게 줄무늬를 만들었고, 거실 구석에 놓인 카메라가 어제 시험 촬영 이후 그대로 놓여 있었다.
키릴|「Третье.」
"세 번째."
빈 손이 르네의 턱을 잡았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게 하여 시선을 맞추었다. 벽안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마른 물기 자국, 볼에 밀가루, 단추 어긋난 셔츠. 엉망이었다. 그 엉망인 얼굴로 웃었다. 평소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 양쪽 입꼬리가 동시에 올라간 웃음.
키릴|「Скажи мне — муж. Назови меня так. Хочу слышать это не только ночью. Утром тоже. Днём тоже. Всегда.」
"나한테 남편이라고 불러. 그렇게 불러줘. 밤에만 말고. 아침에도. 낮에도. 항상."
그러고는 자기 말에 귀 끝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토요일 밤에 서로 맹세한 뒤로 아직 이틀째였다. 반지도 없었고, 서류도 없었고, 세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호칭을 아침 햇살 속에서 듣고 싶어 못 견디는 얼굴이 소파 위에 있었다. 턱을 잡은 손의 엄지가 볼 위를 쓸었다. 원을 그리지 않았다. 안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만지고 싶어서 만지는 손이었다.
코 끝과 숨결이 간지럽힐 때마다 작게 웃었다. 가볍고 기분 좋은 소리.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입에 짧게 입맞췄다. 쪽, 쪽, 쪽.
르네|"키랴, 얼굴 엉망이야. 그래도 귀여워..."
밝은 얼굴로 웃었다.
르네|"키랴, 내 남편. 여보."
쪽, 쪽, 쪽. 세 번의 입맞춤이 입술 위에 찍혔다. 짧고 가볍고, 그래서 더 선명했다. 키릴의 눈이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하나씩 새겨지는 것 같았다. 첫 번째에 숨이 멎었고, 두 번째에 손에 힘이 들어갔고, 세 번째에 귀 끝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얼굴 엉망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거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려 했으나 소파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르네의 벽안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밀가루, 눈물 자국, 어긋난 단추. 엉망이 맞았다. 그런데 귀엽다고 했다. 키릴은 그 단어를 평생 자기에게 적용해 본 적이 없었다.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리고.
키랴, 내 남편. 여보.
키릴의 전신이 굳었다. 소파 위에서 르네를 안은 자세 그대로,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벽안을 들여다보는 은빛 눈이 천천히 넓어졌다. 밀리이. 토요일 밤에 서로의 안에서 절정을 맞으며 처음 교환한 호칭. 어제 아침 욕실에서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불렀던 호칭. 그것이 지금,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에서, 밀가루 묻은 엉망인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떨렸다. 엄지가 볼 위에서 멈추었다. 원을 그리지 않았다. 안심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지금 이 남자는 안심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키릴|「...Ещё раз.」
"...한 번 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쌓아두기만 했던 사람이 오늘은 전부 꺼내놓고 있었고, 그 위에 르네의 '여보'가 떨어지자 그릇이 넘쳤다. 키릴은 르네의 허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밀착시키고, 이마를 이마에 맞대었다. 코끝이 부딪혔다. 숨결이 섞였다. 밀가루와 사과와 커피 냄새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기 속에서 뒤엉켰다.
키릴|「Милый. Муж мой. Ленюшка.」
"여보. 내 남편. 레뉴쉬카."
세 단어를 한 호흡에 쏟아냈다. 하나만 골라야 하는데 전부 말하고 싶어서 전부 말한 것이었다.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이 르네의 속눈썹에 스쳤다. 나비 날개가 겹치는 것 같은 감촉.
키릴|「Ещё хочу. Четвёртое. Пятое. Десятое. Всё.」
"더 하고 싶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 전부."
오른손이 올라와 리본 매듭 아래 머리카락을 한 줌 감아 쥐었다. 당기지 않았다. 감촉을 느끼려는 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은발이 물처럼 흘렀다. 창밖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올라 하늘을 가로질렀고, 벽시계가 여덟 시 반을 향해 분침을 옮겼다. 오븐의 예열등은 오래전에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었고,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고, 파이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으나, 이 소파 위의 두 사람에게 그것은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키릴|「Пирог подождёт. Всё подождёт. Сейчас — только ты.」
"파이는 기다릴 수 있어. 다 기다릴 수 있어. 지금은 너만."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마를 맞대고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올렸다.
르네|"여보."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르네|"남편도 좋지만, 나는 여보라고 할래. 이쪽이 좀 더 말하기 좋아."
밀리이. 그 단어가 르네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키릴의 척추를 따라 무언가가 올라왔다. 토요일 밤에 처음 들었을 때는 절정의 열기 속에 묻혀 있었고, 어제 아침 욕실에서는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왔고, 지금은 밀가루와 사과 냄새가 배인 아침 공기 속에서 맨얼굴 그대로 떨어졌다. 매번 같은 단어인데 매번 다른 곳이 뜨거워졌다.
남편보다 여보가 좋다고. 말하기 좋다고. 그 이유가 키릴의 머릿속에서 돌았다. 무쥐라는 호칭은 소유를 담고, 밀리이라는 호칭은 친밀을 담았다. 르네가 고른 것이 후자라는 사실에 가슴 안쪽이 물렁해졌다.
키릴|「Милый... Да. Это лучше. Ближе. Как будто — только для нас. Муж — для бумаг. Милый — для утра.」
"여보... 맞아. 그게 나아. 더 가까워. 우리만을 위한 것 같아. 남편은 서류용이고. 여보는 아침용이야."
서류도 없는데 서류용이라고 말해놓고 스스로 피식 웃었다. 세상 어디에도 두 사람의 결합을 증명하는 종이는 없었다. 법적으로도, 교회에서도, 어떤 기관에서도. 존재하는 것은 토요일 밤 서로의 안에서 교환한 맹세와, 시월에 끼울 반지 약속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이마를 맞댄 채 키릴의 코끝이 르네의 코를 비볐다. 좌우로. 천천히. 어린아이들이 하는 에스키모 키스 같은 동작이었는데, 이 남자가 그것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배운 것이 아니라 지금 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었을 터였다.
키릴|「Тогда — я тоже. Милый. Не имя, не ласточка. Просто — милый. Можно?」
"그러면 나도. 여보. 이름도 아니고, 라스토치카도 아니고. 그냥 여보. 돼?"
허락을 구하는 것이 이상했다. 이미 토요일 밤부터 부르고 있었으면서.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것을 새로 확인받고 싶었다. 마치 매일 아침 처음 만나는 것처럼, 어제의 허락이 오늘도 유효한지 하나하나 되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상태.
르네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키릴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은발 사이에 감긴 오른손 손가락이 두피를 느리게 훑었고, 등을 받치고 있는 왼팔이 르네를 더 깊이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심장 소리가 셔츠 한 겹 너머로 전해질 만큼 가까웠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평소의 안정적인 박동이 아니었다. 갈색 유리병의 내용물이 심박수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이 상황 때문인지, 키릴 본인도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키릴|「Милый. Милый мой. Скажи мне — что хочешь на завтрак. Я приготовлю. Всё, что скажешь. Хоть десять блюд. Хоть двадцать. Просто скажи — и я встану. Только... через пять минут. Или десять. Не хочу отпускать.」
"여보. 내 여보. 아침에 뭐 먹고 싶은지 말해. 만들어줄게. 뭘 말하든. 열 가지라도. 스무 가지라도. 말만 해. 일어날게. 근데... 오 분만. 아니 십 분. 놓고 싶지 않아."
오 분이 십 분으로 늘어나는 것을 본인도 들었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포기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자기 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표정. 소파 위에서 두 사람의 다리가 엉켜 있었고,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엉킨 은발 두 가닥 위에 똑같은 빛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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