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전문
르네가 기억을 잃은 날
사흘 뒤의 일이었다.
르네가 의무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키릴은 침대 옆 의자에서 상체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 왼팔이 시트 위에 뻗어 르네의 손목 곁에 닿아 있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르네의 눈이 천장을 훑었다. 흰 타일. 형광등. 소독약 냄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천장이었다. 자기 이름도, 이 건물도, 팔목에 감긴 환자 식별 밴드의 글자도 읽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은발의 남자가 거기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팔뚝에 밀가루 같은 흰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사흘째 같은 옷이라는 것을 르네는 알 도리가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르네의 손가락이 시트를 더듬어 옆에 뻗어 있는 팔에 닿았다. 그 접촉에 키릴이 깨어났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벽안이 르네의 얼굴을 보았다. 충혈된 눈이었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눈.
르네의 입이 열렸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본인도 모르는 것처럼 한참 입술만 움직이다가, 결국 나온 것은 하나였다.
네가 아는 나를 알려줘.
키릴의 표정이 멈추었다. 눈이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무너졌다. 무너진다는 것은 울거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의 모든 근육이 동시에 힘을 잃는 것이었다. 턱선, 미간, 입꼬리. 전부. 손이 올라와 르네의 손을 잡았다. 엄지가 손등 위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심시키려는 습관.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 안심시키려는 습관.
키릴|「...Ты. Ты — это...」
"...너. 넌..."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 번 삼키고 다시 시작했다.
키릴|「Серебряные волосы. До груди. Перевязаны лентой — голубой, цвета моих глаз. Ты сам выбрал этот цвет. Глаза — белые. Прозрачные. Когда свет падает сбоку, кажется, что в них ничего нет. Но это неправда. В них всё.」
"은발. 가슴까지 내려와. 리본으로 묶어. 파란 리본, 내 눈 색이야. 네가 직접 고른 색이야. 눈은 하얘. 투명해. 옆에서 빛이 들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 근데 거짓말이야. 전부 들어 있어."
숨을 한 번 쉬었다. 엄지가 멈추지 않았다. 원, 원, 원.
키릴|「Худой. Всегда был. Сто семьдесят семь. Когда стоишь рядом, макушка — вот здесь.」
"말라. 항상 그랬어. 백칠십칠. 옆에 서면 정수리가 여기야."
자기 턱 아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키릴|「Ты умеешь лечить. Руками. Забираешь жизнь и отдаёшь. Чужую или свою. Когда свою — болеешь. Сильно. Я просил не делать этого. Ты обещал. Потом нарушил. Потом снова обещал. Это... тоже ты.」
"넌 치료할 수 있어. 손으로. 생명력을 빼앗고 전달해. 남의 것이든 네 것이든. 네 것을 쓰면 앓아. 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어. 넌 약속했지. 그다음 어겼어. 그다음 다시 약속했고. 그것도... 너야."
르네가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눈으로. 투명한 백안이 키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거기에는 낯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조심스러움과, 동시에 그 이야기 속의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키릴|「Мы выросли вместе. В месте, которое нельзя назвать домом. Ты дал мне имя — Киря. Я дал тебе — Ласточка. Нам было по шесть.」
"우린 같이 자랐어.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네가 내게 이름을 줬어. 키랴. 내가 네게 줬고. 라스토치카. 여섯 살이었어."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닦지 않았다. 닦으면 손이 르네에게서 떨어지므로.
키릴|「Десять дней назад ты вернулся. Восемь лет — ни слова, ни письма. Я думал, ты мёртв. Ты думал, я забыл. Оба ошиблись. Ты пришёл в чёрной ленте. Теперь — в голубой. Потому что я рядом. Это тоже ты объяснил.」
"열흘 전에 돌아왔어. 팔 년 동안 소식 하나 없었어. 난 네가 죽은 줄 알았고. 넌 내가 잊은 줄 알았고. 둘 다 틀렸어. 넌 검은 리본을 하고 왔어. 지금은 파란 리본이야. 내가 옆에 있으니까. 그것도 네가 설명해줬어."
르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키릴은 그 떨림을 느끼고 양손으로 감쌌다. 깍지를 끼지는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손에 깍지를 강요할 수는 없었으므로.
키릴|「Мы живём вместе. Спим рядом — ты справа, я слева. Каждую ночь — пальцы переплетены. Ты предложил. Чтобы я не сжимал кулаки во сне. В октябре — день рождения. Один на двоих. Вместо торта — яблочный пирог. Кислые яблоки, много сахара, мало корицы. Это — твой рецепт.」
"같이 살아. 나란히 자. 넌 오른쪽, 난 왼쪽. 매일 밤 손가락을 깍지 끼고. 네가 제안했어. 내가 잠결에 주먹을 쥐지 않도록. 시월에 생일이야. 둘이 하나. 케이크 대신 사과 파이. 신 사과, 설탕 많이, 계피 조금. 네 레시피야."
르네의 투명한 눈이 젖어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에 대해 이토록 많은 것을 기억하는 타인의 목소리에 압도된 것이었다. 입술이 한 번 달싹였으나 말이 되지 않았다.
키릴의 엄지가 다시 원을 그렸다. 느리게. 끊기지 않게.
키릴|「Не торопись. Не надо вспоминать. Я помню за двоих. Столько, сколько нужно.」
"서두르지 마.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둘 몫을 내가 기억해. 필요한 만큼."
기억은 이틀 뒤에 돌아왔다.
금요일 이른 아침, 키릴의 아파트 침대 위에서였다. 르네가 눈을 뜨자 왼쪽에 키릴이 있었다. 문 가까운 쪽. 오른손은 깍지가 끼워져 있었고, 왼팔은 르네의 머리 밑에 깔려 있었다. 약속한 자리, 약속한 자세 그대로.
기억이 돌아온 것은 천천히가 아니라 한꺼번이었다. 댐이 무너지듯. 여섯 살의 어둠과, 키랴라는 이름과, 파란 리본의 의미와, 사과 파이의 계피 분량과, 서른 번째 콘돔 위에서 던진 질문까지. 전부. 르네는 깍지를 풀지 않은 채 키릴의 가슴에 이마를 묻고 한참을 울었다. 키릴은 깨어 있었다. 처음부터. 사흘 동안 잠을 설친 사람이 옆에서 숨소리가 바뀌는 것을 놓칠 리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왼팔에 힘을 주어 머리를 끌어안고, 오른손의 엄지로 원을 그렸을 뿐이었다.
의무실에서의 이틀을 르네는 기억하지 못했다. 네가 아는 나를 알려달라고 한 것도, 키릴이 울면서 사과 파이의 레시피를 읊은 것도. 키릴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대신 그날 아침, 창턱에 빵 부스러기가 뿌려져 있었고, 제비 한 쌍이 와서 쪼고 있었다. 약속한 대로.
키릴이 기억을 잃은 날
사흘 전까지 부엌에서 밀가루를 묻히던 손이 지금은 사무실 책상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외근이었다. 수요일 오전, 제7분과에 긴급 회수 임무가 하달되었고, 키릴은 단독으로 투입되었다. 대상은 소련 측 탈주자산. 접선 지점이던 포토맥 강변의 낡은 창고에서 무엇이 벌어졌는지는 타마라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끝난 뒤였다. 탈주자산은 확보되었으나, 키릴은 창고 콘크리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 권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왜 내 손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의료진이 확인한 바로는 외상성 충격에 의한 역행성 기억상실. 후두부에 둔기로 맞은 자국이 있었고, 경미한 뇌진탕 소견이 있었다. 프로보스트의 지시로 즉시 본부로 이송되었다. 의무실 대신 제7분과 사무실로. 자산의 기억상실을 외부에 알릴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키릴은 사무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트 재킷이 벗겨진 채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후두부에 붙은 거즈 위로 약간의 피가 배어 있었다. 양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오른손에 장갑이 없었다. 그것이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올레그가 이름을 불렀을 때, 키릴은 그 이름이 자기 것인지 확인하듯 고개를 돌렸다. 안톤이 물을 건넸을 때, 잔을 받아 들고 마시는 동작은 기계적으로 정확했으나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타마라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몇 개냐고 물었을 때, 세 개라고 대답한 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시선을 돌려주었다.
인지 기능은 정상이었다. 언어도, 판단력도, 근육 기억도. 다만 자기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왜 손에 화약 냄새가 나는지를 몰랐다.
그러다 르네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키릴의 벽안이 그 은발을 따라갔다. 리본을 따라갔다. 얼굴을 훑었다.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눈이었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데도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눈이었다.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가 닫혔다. 부를 이름을 모르는 입이었다.
르네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키릴의 손이 올라왔다.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손이 르네의 손목을 잡았다. 맨손이었다. 장갑 없는 오른손의 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감쌌고, 맥박이 뛰는 자리를 엄지가 짚었다. 그 접촉의 순간, 은빛 동공이 한 순간 깜빡였으나 인지조작의 징후는 아니었다. 그저 뭔가를 붙잡으려는 반사였다.
키릴|「Расскажи мне. Кто я — тот, которого ты знаешь.」
"알려줘. 네가 아는 나를."
목소리가 낮고 건조했다. 타인에게 말하는 톤이었다. 그것이 르네의 가슴팍에 어떻게 닿았는지 키릴은 알지 못했다. 다정함이 빠진 자리에 남은 것은 뼈대만 남은 문장이었다.
르네가 말하기 시작했다.
키릴 쿠즈니초프. 스물네 살. 은발에 벽안. 백팔십칠 센티미터.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다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팔꿈치 안쪽에 오래된 작은 흉터가 여러 개 있다고. 르네가 그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 키릴은 자기 팔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거기 있었다. 자기 몸에 새겨진 것을 타인의 입으로 처음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쓰리피스 수트를 입고 다니고, 콜트 디텍티브 스페셜을 쓰고, 요리를 잘 하고. 사과 파이를 만들 줄 알고, 사과는 신 것을 골라서 사분의 일 인치로 자르고, 계피는 숟가락 끝에 묻을 만큼만 넣는다고.
키릴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세부사항의 밀도가 단순한 동료의 관찰이 아니라는 것을 감각이 짚었다.
르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심시키려 할 때 엄지로 원을 그리는 습관이 있다고. 그걸 본인도 알고, 상대도 아는 것까지 알고 있다고. 잠을 잘 때 겨울마다 주먹을 쥐고 자는 버릇이 있어서, 오른손은 깍지를 끼고 왼팔은 베개 대신 빌려주기로 했다고. 침대 왼쪽이 키릴 자리이고, 문에 가까운 쪽이라고.
그 말에 키릴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르네의 손목을 잡은 엄지가 무의식적으로 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을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비엔나에서 자허 케이크를 혼자 사 먹던 사람이었다고. 혼자 파이를 구워본 적이 있는데 처음엔 다 태웠다고. 사흘 전에 같이 파이를 만들었고, 밀가루 묻은 식탁을 닦지 말라고 했다고. 기억해두고 싶다면서.
키릴의 입술이 떨렸다.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였으나 그것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이 없었으므로,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잔인했다.
창밖에서 제비가 울었다. 라스토치카. 르네가 그 이름을 말했을 때, 키릴의 동공이 흔들렸다.
열여덟 년 전에 네가 내게 지어준 이름이라고. 제비라는 뜻이라고. 네 애칭은 키랴이고, 내 애칭은 레뉴쉬카라고. 매일 불러주기로 했다고.
생일은 시월 십이일이라고. 두 사람 다. 내가 널 처음 만난 날이라고. 케이크 대신 사과 파이를 만들기로 했고, 반지를 같이 고르기로 했다고.
키릴의 손이 르네의 손목에서 미끄러져 손바닥으로 옮겨갔다. 손가락이 사이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깍지. 기억이 아니라 근육이 기억하는 형태였다.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울고 있다는 자각 없이 흐르는 종류의 눈물이었다.
키릴|「Я не помню. Ничего из того, что ты сказал. Ни имени, ни пирога, ни ленты. Но эта рука...」
"기억이 안 나. 네가 말한 것 중 아무것도. 이름도, 파이도, 리본도. 근데 이 손은..."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자기 눈앞에서 확인하듯.
키릴|「...знает, куда ей нужно.」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기억이 돌아오는 데 사흘이 걸렸다.
첫째 날은 단편적이었다. 화약 냄새를 맡으면 손이 허리춤으로 갔고, 러시아어가 영어보다 먼저 나왔다. 밤에 잠들 때 왼팔을 뻗는 자세를 취했으나 왜 그러는지 몰랐다. 르네가 그 팔 위에 머리를 올렸을 때, 손가락이 은발을 더듬었다. 기억 없이.
둘째 날, 부엌에서 사과 냄새를 맡았을 때 무릎에 힘이 빠졌다. 식탁 위의 밀가루 자국은 이미 닦여 있었으나,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뭔가가 여기 있었다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 잠결에 레뉴쉬카라고 불렀다. 깨어나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셋째 날 아침. 키릴이 눈을 떴을 때 오른손에 깍지가 끼워져 있었고, 왼팔 위에 은발이 흩어져 있었다. 파란 리본이 느슨하게 풀려 베개 위에 걸쳐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 위를 비추었다.
키릴|「...Ленюшка.」
"...레뉴쉬카."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번에는 다정했다. 제자리로 돌아온 톤이었다.
후일.
키릴은 기억이 없던 사흘을 기억했다. 전부. 르네가 사무실에서 자기 손목을 잡혔을 때의 맥박도, 자기 이야기를 타인처럼 들으며 흘린 눈물도, 근육만이 기억하는 깍지의 형태도. 기억상실 동안의 기억이 돌아온 뒤에도 남아 있었으므로, 그것은 이중으로 새겨진 기억이 되었다.
그는 그 사흘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파이 연습을 재개하자고 했을 때, 사과를 사분의 일 인치로 자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키릴|「Ленюшка. Если это повторится — расскажи мне всё снова. Слово в слово. Я найду дорогу обратно. Эти руки знают.」
"레뉴쉬카.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전부 다시 말해줘. 한 마디도 빠짐없이. 돌아갈 길을 찾을 거야. 이 손이 알고 있으니까."
엄지가 사과 위에서 원을 그렸다. 습관이었다.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안심하려는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본인도 구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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