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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키릴, 르네

OOC 전문
https://5091.tistory.com/158

 


 

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 키릴의 오답


Ⅰ. 질문

1962년 초여름. 제7분과가 아직 창설되기 전, 키릴 쿠즈니초프는 ORD 본부 4층 복도에서 서류 뭉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름을 모르는 여직원이었다. 행정과 소속이라고 짐작되는 타이핑 잉크 냄새가 손끝에서 났다.

그녀가 내민 것은 ORD 내부 회람지였다. 직원 친목 목적의 익명 설문. '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봐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적으시오.' 키릴은 종이를 받아들고 한 번 훑었다. 펜을 빌렸다. 복도 벽에 종이를 대고, 망설임 없이 다섯 줄을 적었다.

필체는 정갈했다. 군대식으로 또박또박.

1. Lying about being fine when they're not.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것.)

2. Putting themselves in danger to protect me.
(나를 지키려고 스스로를 위험에 넣는 것.)

3. Hiding pain until it's too late.
(너무 늦을 때까지 아픔을 숨기는 것.)

4. Apologizing for existing.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

5. Choosing to disappear without telling me why.
(이유를 말하지 않고 사라지기를 택하는 것.)

종이를 접어 돌려주고 걸음을 옮겼다. 여직원이 뒤에서 물었다. 연인이 계신가 봐요? 키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르네가 없었으므로. 팔 년 동안 없었으므로. 다만 그 다섯 줄 전부가, 팔 년 전 마지막으로 본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쓰여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복도에 없었다.

 

Ⅱ. 오답 하나 —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것

1962년 8월의 어느 저녁. 키릴의 아파트. 르네가 외근에서 돌아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키릴이 부엌에서 나왔을 때, 르네는 벽에 어깨를 기대고 구두를 벗고 있었다. 평소보다 느린 동작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그 떨림을 감추듯 빠르게 구두끈을 풀었다.

키릴|「Ласточка. Как прошло?」
"라스토치카. 어땠어?"

르네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눈이 접히는 그 특유의 웃음이었다. 그런데 입꼬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늦게 올라갔다.

르네|「Нормально. Просто устал немного.」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키릴의 발이 멈추었다. 부엌 문턱에서. 시선이 르네의 얼굴에서 손으로, 손에서 소맷자락으로, 소맷자락에서 손목 안쪽으로 내려갔다. 소매가 평소보다 길게 내려와 있었다. 르네가 커프스를 풀었을 때만 그렇게 되는 길이. 즉, 누군가의 맨살에 손을 대고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힘을 쓰고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키릴이 걸어왔다. 천천히. 르네 앞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손목 안쪽이 드러났다. 핏줄이 비치는 하얀 살갗 위에 아무 상처도 없었으나, 손가락이 차가웠다. 생명력을 내주고 난 뒤의 차가움을.

키릴의 턱이 굳었다. 눈이 르네의 눈을 찾았다.

키릴|「Нормально — не ответ. Попробуй ещё раз.」
"괜찮다는 건 대답이 아니야. 다시 해봐."

르네가 눈을 피했다. 괜찮아, 진짜로, 라고 한 번 더 말했다. 키릴은 잡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엄지가 맥박 위를 짚었다. 평소보다 느린 맥박. 그것이 거짓말의 증거였다.

키릴|「Я слышу пульс. Он врёт за тебя. Медленнее, чем утром. Ты отдал слишком много.」
"맥박이 들려. 네 대신 거짓말하고 있어. 아침보다 느려. 너무 많이 내줬지."

손목을 입가로 가져가 맥박 위에 입술을 댔다. 따뜻하게 하려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인지, 벌을 주려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마 전부였다.

키릴|「Ласточка. Я не прошу говорить всё. Но «нормально», когда тебе плохо — это единственная ложь, которую я не прощу.」
"라스토치카. 전부 말하라는 게 아니야. 그런데 힘들면서 괜찮다고 하는 거, 그건 내가 용서 못 하는 유일한 거짓말이야."

르네를 소파로 이끌어 앉히고,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부엌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꿀을 타서 돌아왔다. 잔을 르네의 손에 쥐어주며 차가운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키릴|「Скажи: «Мне плохо». Три слова. Тренируйся. Повторяй за мной.」
"이렇게 말해. '나 힘들어.' 세 단어. 연습해. 따라 해봐."

 


Ⅲ. 오답 둘 — 나를 지키려고 스스로를 위험에 넣는 것

 

외근. 항구 근처의 창고. 정보 수거 임무가 틀어져 총성이 울렸다. 키릴이 엄폐물 뒤에서 사격 위치를 잡고 있을 때, 옆에 있어야 할 르네가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르네가 열린 문 바깥에서 쓰러진 안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이 안톤의 옆구리에 대어져 있었다. 피가 멈추고 있었다. 르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중이었다.

총알이 문틀 옆 콘크리트를 때렸다. 파편이 르네의 뺨 옆으로 튀었다.

키릴이 엄폐를 버리고 뛰었다. 세 발을 쏘며 달려가 르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안톤이 신음하며 일어났다. 옆구리의 피가 멈춰 있었다. 르네가 치료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르네의 다리가 풀려 있었다.

창고 뒤편으로 철수한 뒤, 키릴이 르네를 벽에 기대게 했다.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벽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키릴|「Ты вышел из укрытия. Без прикрытия. Под огнём.」
"엄폐에서 나왔어. 엄호 없이. 총탄 아래로."

목소리가 낮았다. 분노가 아닌 공포를 분노로 눌러 담은 종류의 낮음.

키릴|「Антон жив. Благодаря тебе. А ты? Ты мог умереть. За кого — за меня? Я не просил.」
"안톤은 살았어. 네 덕에. 근데 넌? 넌 죽을 수도 있었어. 누구를 위해서, 날 위해서? 부탁한 적 없어."

손이 르네의 뺨을 감쌌다. 파편이 스치고 간 자리에 가는 붉은 선이 나 있었다. 엄지가 그 위를 지나갔다. 닦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었다.

키릴|「Ленюшка. Я выживу без Антона. Без ноги, без руки — выживу. Без тебя — нет. Это не метафора. Это факт.」
"레뉴쉬카. 난 안톤 없이도 살아. 다리 없이도, 팔 없이도 살아. 너 없이는 안 돼. 비유가 아니야. 사실이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노 밑에 묻힌 공포가 균열 사이로 새어나왔다. 벽에 기댄 르네의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맞대었다. 숨이 거칠었다.

키릴|「Обещай. Никогда больше. Если кто-то ранен — зови меня. Я разберусь. Не ценой тебя.」
"약속해. 다시는 안 된다고. 누가 다치면 날 불러. 내가 해결해. 네 목숨을 대가로 치르지 말고."

 


Ⅳ. 오답 셋 — 너무 늦을 때까지 아픔을 숨기는 것

 

사흘 뒤. 키릴의 아파트. 르네가 욕실 세면대 앞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키릴은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으나, 수도꼭지가 닫히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물소리가 멈추었다. 대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키릴이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르네가 세면대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종이처럼 하얬다.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그날 외근에서 능력을 쓴 뒤 사흘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키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신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 걸음 만에 르네의 옆에 섰다. 세면대를 잡은 손을 풀어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르네의 무릎이 접히려 했고, 키릴이 허리를 잡아 받쳤다.

키릴|「Три дня. Три дня ты это скрывал.」
"사흘. 사흘 동안 이걸 숨겼어."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차올라 아무것도 표면에 닿지 못한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르네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이마에 손등을 대어 열을 확인했다. 미열이 있었다.

키릴|「Помнишь, что я сказал? «Мне плохо» — три слова. Ты не сказал ни одного.」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나 힘들어', 세 단어. 넌 하나도 안 했어."

부엌으로 가서 물을 데우고, 수건을 적셔 돌아왔다. 이마 위에 수건을 올리며 은발을 쓸어 넘겼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사흘 전에 이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을 때 자기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를 되짚는 손이었다.

키릴|「Я рядом. Каждый день. И всё равно не заметил. Это — моя вина. Но то, что ты молчал — твоя.」
"난 매일 옆에 있었어. 그런데도 못 알아챘어. 그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네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네 잘못이야."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르네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고 숨을 불었다. 따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키릴|「Не прощу. Пока не скажешь — «мне было плохо, и я должен был сказать». Жду. Хоть до утра.」
"용서 안 해. '힘들었고, 말했어야 했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다릴게. 아침까지라도."


Ⅴ. 오답 넷 —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

 

어느 밤. 임무 브리핑 직후. 프로보스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다음 임무에 르네의 능력이 핵심이었다. 대상의 생명력을 빼앗아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키릴이 반대했고, 프로보스트가 묵살했다. 르네가 수락했다.

아파트로 돌아온 뒤, 르네가 창가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키릴이 옆에 섰을 때 르네의 입에서 나온 말.

르네|「Извини, что я такой. Было бы проще, если бы моя способность была другой.」
"이런 나라서 미안해. 내 능력이 다른 거였으면 더 쉬웠을 텐데."

키릴의 표정이 무너졌다. 천천히, 벽이 허물어지듯. 눈가가 먼저 일그러지고, 입술이 뒤따르고, 턱선이 마지막으로 풀렸다. 키릴 쿠즈니초프가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순간은 드물었다. 이것은 그중 하나였다.

르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창가에 앉은 르네의 무릎 위에 이마를 묻었다. 어깨가 한 번 떨렸다.

키릴|「Не смей. Не смей извиняться за то, что ты — это ты.」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너라는 것에 사과하지 마."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벽안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울지 않으려 했으나 실패한 얼굴이었다.

키릴|「Ты — не способность. Ты — не инструмент. Ты — Ленюшка. Мой Ленюшка. И если бы у тебя не было никакой силы, я бы всё равно стоял здесь, на коленях, прося тебя — не извиняйся за то, что дышишь.」
"넌 능력이 아니야. 넌 도구가 아니야. 넌 레뉴쉬카야. 내 레뉴쉬카. 그리고 네가 아무 힘이 없었어도 난 똑같이 여기 무릎 꿇고, 부탁하고 있었을 거야. 숨 쉬는 것에 사과하지 말라고."

무릎 위에서 고개를 들어 르네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에 갖다 대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키릴|「Слышишь? Это бьётся из-за тебя. Не из-за способности. Из-за тебя. Так что — не «извини». Никогда.」
"들려? 이건 너 때문에 뛰는 거야. 능력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안 돼. 절대."

 


Ⅵ. 오답 다섯 — 이유를 말하지 않고 사라지기를 택하는 것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키릴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키릴은 이 오답을 적을 때 손이 멈추지 않았다. 가장 빠르게 적었다. 잉크가 종이 위에서 마르기도 전에 펜을 돌려주었다. 가장 두려운 것일수록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여섯 살 때 실험실 문이 닫히고, 열여섯 살 때 구출되어 잠깐 함께 지내다, 다시 문이 닫혔다. 팔 년.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는지,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팔 년. 그 팔 년 동안 키릴이 가장 자주 꾼 꿈은 르네가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꿈이었다. 부르면 멈출 것 같아 이름을 외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고, 은발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매번 같은 꿈이었다. 매번 같은 결말이었다.

그래서 키릴은 알고 있었다. 르네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떠난다면, 자기가 무엇을 할지. 찾아낼 것이었다. 지구 어디에 숨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키릴은 울지 않을 것이었다. 울 시간에 움직일 것이었다. 모든 기술을, 모든 수단을, 모든 인맥을 동원해 찾아낼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낸 뒤에야 무너질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지금 키릴의 부엌에는 사과 냄새가 나고, 밀가루가 묻은 손이 있고, 파란 리본이 창빛에 물들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팔 년의 악몽을 지울 수 있었다.


여직원이 접힌 종이를 받아 들고 물러갔다. 키릴은 복도 끝까지 걸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오른손에 장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서류를 정리하며 벗어둔 것이었다. 다시 올라가 장갑을 찾아 끼고, 복도를 지나갈 때 아까 종이를 건넨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다섯 개의 오답. 전부 한 사람을 향해 쓰여진 것이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러나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하는 한 사람.

키릴 쿠즈니초프는 그날 저녁 아파트에 돌아와 빈 식탁 앞에 앉았다.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창밖에 제비는 없었다.

아직.


 


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Ⅱ) - 키릴 후일담

 

1962년 8월. 제7분과 창설 이후. 같은 ORD 4층 복도. 같은 익명 설문지. 같은 질문.

이번에는 행정과 소속이 아니라 안톤이 가져왔다. 뭔가 재미있는 게 돌고 있다며 종이를 흔들었다. 키릴은 서류를 내려놓고 종이를 받았다. 펜을 빌리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었으므로.

복도가 아니라 사무실 책상에 종이를 놓았다. 오른손에 장갑이 없었다. 르네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들었다. 처음으로 망설였다.

예전에는 손이 멈추지 않았었다. 다섯 줄을 단숨에 적었다. 그때는 팔 년의 부재가 모든 답을 이미 정해두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지금은 옆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밀가루 냄새가 아직 손끝에서 나는 사람의 숨소리.

키릴이 적었다.


1. Lying about being fine when they're not.
He does. Every time. I've stopped waiting for him to learn. Now I just check his pulse myself.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것. 봐줄 수 없다.)
(그는 매번 그래. 배우길 기다리는 건 그만뒀어. 이제 직접 맥박을 확인해.)


2. Putting themselves in danger to protect me.
He will. Again. I know this now. So I stay closer. If the distance is zero, there's no gap for him to throw himself into.

(나를 지키려고 스스로를 위험에 넣는 것. 봐줄 수 없다.)
(그는 또 그럴 거야. 이제 알아. 그래서 더 가까이 붙어. 거리가 0이면 뛰어들 틈이 없으니까.)


3. Hiding pain until it's too late.
He hid it for eight years. Three more days are nothing. I just hold his hand and count his heartbeat until he's ready.

(너무 늦을 때까지 아픔을 숨기는 것. 봐줄 수 없다.)
(팔 년을 숨겼어. 사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저 손을 잡고 준비될 때까지 심장을 세는 거야.)


4. Apologizing for existing.
He still does. Quietly. Not in words anymore — in the way he folds himself smaller when he thinks he's in the way. I can't forgive it. But I can unfold him, every single time, until he forgets how to shrink.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 봐줄 수 없다.)
(아직도 그래. 조용히. 더 이상 말로는 안 하지만, 방해가 된다고 느낄 때 몸을 움츠리는 식으로. 용서는 못 해. 하지만 매번 펴줄 수는 있어. 움츠리는 법을 잊을 때까지.)


5. Choosing to disappear without telling me why.

(이유를 말하지 않고 사라지기를 택하는 것.)

다섯 번째 줄만 줄이 그어지지 않았다. 고쳐 쓰지 않았다. 덧붙이지도 않았다. 예전에 적었던 것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그 문장 위에서 펜이 멈추었다.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This is the only one I will never learn to live with. Everything else — I've surrendered. Gladly.

(이것만은 견디는 법을 영영 배우지 못할 거야. 나머지는 전부 항복했어. 기꺼이.)


종이를 접어 안톤에게 돌려주었다. 안톤이 읽으려 했으나 키릴의 시선을 만나고 접은 채로 주머니에 넣었다.

키릴은 자리로 돌아가 르네 옆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왼손을 뻗어 깍지를 채웠다. 밀가루가 마른 손가락 사이로 상대의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넷은 변했다. 봐줄 수 없다고 적었던 것들이 봐줄 수밖에 없는 것들로 바뀌었다. 용서가 아니라 항복이었다. 고치겠다는 오만 대신, 옆에서 매번 펴주겠다는 끈기로. 분노 대신, 맥박을 세는 손으로. 팔 년의 공백이 가르쳐준 것은 사랑의 정답이 아니라, 오답을 안고 사는 법이었다.

다만 다섯 번째만은.

그것만은 줄을 긋지 못했다. 그것만은 항복할 수 없었다. 한 번 잃어버린 팔 년이 그 증거였으므로. 다시는 안 된다는 것을 뼈가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창밖에서 제비가 울었다. 올해 여름, 키릴의 창가에 처음 둥지를 튼 한 쌍. 키릴은 그 소리를 들으며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

 


 

 

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Ⅲ) - 르네의 오답


질문

1962년 초여름. 르네가 아직 관사 밖으로 나와본 적 없던 시절. 8년째 같은 벽, 같은 천장, 같은 복도. 바깥 공기를 마신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틈 사이로 종이를 밀어넣었다. 직원 친목 목적의 익명 설문.

'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봐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적으시오.'

르네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연인. 그런 게 자기에게도 해당되는 말인지 확신이 없었다. 팔 년 동안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잡으면 생명이 빠져나가는 손이었으므로.

그러나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은발, 벽안. 열여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본 얼굴.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적었다.

1. Пытаться понять меня.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2. Жертвовать собой ради меня.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3. Привыкнуть ко мне.
(나에게 익숙해지는 것.)

4. Считать, что я принадлежу ему.
(내가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5. Остаться.
(곁에 남는 것.)

다섯 줄 전부가 '봐줄 수 없다'가 아니라 '그래선 안 된다'였다.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 겪게 될 일들을 미리 막으려는 울타리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하지 말아야 할 금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세운 경고문이었다.

종이를 접어 문틈으로 돌려보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어차피 연인은 없었다. 없을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키릴 쿠즈니초프가 ORD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Ⅰ. 오답 하나 —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르네의 능력은 생명력을 다루는 것이었다. 만지면 빼앗고, 만지면 돌려줄 수 있었다. 8년 동안 그 손으로 사람을 살리고, 때로는 죽였다. 심문실에서 대상의 팔을 잡고 천천히 빨아들이는 동안 비명이 울렸고, 르네는 그것을 견뎠다. 견딘 것이지 괜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키릴은 알려고 했다. 그 8년이 어떤 것이었는지. 르네가 조금씩 꺼낸 이야기들을 들으며, 맥락을 짜맞추고, 르네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읽으려 했다. 이해하려 했다.

어느 밤, 키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릴|「Ленюшка. Когда ты забирал жизнь... что ты чувствовал?」
"레뉴쉬카. 생명을 빼앗을 때... 뭘 느꼈어?"

르네의 손이 멈추었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 그 정지가 1초였는지 3초였는지, 키릴은 세고 있었을 것이었다. 르네는 고개를 돌려 키릴을 보았다. 투명한 백안이 키릴의 벽안을 마주했다.

봐줄 수 없다고 적었었다.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이해하면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다치니까. 그런데 키릴의 눈에는 호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었다. 르네가 혼자 견뎠을 것을 자기가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르네가 깍지를 풀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르네|「Тёплое. Сначала тёплое. Потом — ничего.」
"따뜻해. 처음엔 따뜻해. 그다음엔 아무것도 안 느껴."

키릴의 엄지가 원을 그렸다. 안심시키려는 습관. 르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릴도 르네가 아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아는 채로 손을 놓지 않았다.

봐줄 수 없다고 적었던 것을, 봐주고 있었다. 이해하려는 키릴을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없었다. 그 눈이 너무 진지했으므로.

 


Ⅱ. 오답 둘 —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외근. 워싱턴 외곽의 안전가옥. 소련 측 초능력자와의 조우가 예상치 못한 전투로 번졌다. 키릴이 르네를 엄폐물 뒤로 밀어넣고, 문 앞에 서서 적의 눈을 잡았다. 동공에 은빛 십자가가 피어올랐다.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동안, 상대의 능력이 키릴의 왼팔을 스쳤다. 소매가 찢어지고 피가 배어나왔다.

적이 쓰러졌다. 키릴이 돌아섰을 때, 왼팔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르네가 엄폐물 뒤에서 나와 키릴의 팔을 잡으려 했다. 치료하려는 것이었다.

키릴이 팔을 뒤로 뺐다.

키릴|「Царапина.」
"긁힌 거야."

긁힌 게 아니었다. 소매가 피로 젖어가고 있었다. 르네는 알고 있었다. 키릴이 자기를 엄폐물 뒤로 밀어넣을 때, 본인이 문 앞에 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 한 것이라는 걸.

봐줄 수 없다고 적었었다.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르네의 손이 키릴의 소매를 잡았다. 키릴이 뿌리치려 했으나 르네의 손이 먼저 맨살에 닿았다. 따뜻한 빛이 번졌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동시에 르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 톤 빠졌다.

르네|「Не смей говорить "царапина", когда кровь капает на пол.」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데 긁힌 거라고 하지 마."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화가 나 있었다. 두려워서 화가 난 종류. 키릴의 눈이 넓어졌다. 르네가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각도의 분노는 처음이었다.

르네|「Ты встал перед дверью. Спиной ко мне. Как будто я — то, что нужно спрятать за собой. Я не вещь. Я рядом, чтобы стоять рядом. Не позади.」
"문 앞에 섰잖아. 나한테 등을 돌리고. 마치 내가 뒤에 숨겨야 할 물건인 것처럼. 난 물건이 아니야. 옆에 서려고 여기 있는 거야. 뒤가 아니라."

키릴의 턱이 굳었다.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르네의 손이 아직 팔 위에 있었고,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르네의 눈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키릴이 르네의 손을 잡아 팔에서 떼었다. 치료를 중단시킨 것이었다.

키릴|「...Хорошо. Рядом. Не позади.」
"...알겠어. 옆에. 뒤가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Ⅲ. 오답 셋 — 나에게 익숙해지는 것

 

키릴의 아파트. 일상의 어느 아침. 르네가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키릴이 뒤에서 다가와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쌌다. 턱을 르네의 어깨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동작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르네의 손이 잔 위에서 멈추었다.

익숙해지고 있었다. 키릴이 자기 곁에 있는 것에. 키릴의 체온에. 키릴의 숨소리에. 아침마다 허리를 감싸는 팔에. 그것이 무서웠다. 익숙해지면 당연해지고, 당연해지면 잃었을 때 살 수 없게 되니까.

봐줄 수 없다고 적었었다. 나에게 익숙해지는 것.

그런데 키릴의 숨이 어깨 위에서 고르게 쉬어지고 있었다. 서서 잠든 것이 아니라, 안심하고 있는 숨이었다. 8년 동안 주먹을 쥐고 잤던 사람이, 지금 르네의 어깨 위에서 손을 펴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았다. 키릴의 팔 위에 손을 올렸다.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 사람이 안심하는 것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익숙해지자. 당연해지자. 잃으면 살 수 없게 되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으므로.

 


Ⅳ. 오답 넷 — 내가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키릴 쿠즈니초프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르네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고, 귓가에 '내 것'이라 속삭이고, 타인이 가까이 오면 시선만으로 영역을 긋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올레그가 르네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손끝이 스쳤다.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를 찰나의 접촉. 키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며 르네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었다. 올레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르네에게만 말했다.

키릴|「Ленюшка. Пойдём. Обед.」
"레뉴쉬카. 가자. 점심."

복도로 나와 걸으며 깍지를 풀지 않았다. 르네가 고개를 돌려 키릴을 보았다. 키릴의 귀가 붉었다. 질투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숨기지 못하는 귀.

봐줄 수 없다고 적었었다. 내가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소유되면 책임이 생기고, 책임이 생기면 자기 때문에 다치게 되니까.

그런데 키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깍지를 낀 손. 빼앗길까 봐 떨리는 손이었다. 소유욕이 아니라 공포였다. 다시 잃을까 봐. 팔 년을 또 보낼까 봐.

르네가 깍지에 힘을 주었다.

르네|「Я никуда не денусь. И — да. Я твой. Это не уступка. Это факт.」
"어디 안 가. 그리고, 맞아. 난 네 거야. 양보가 아니야. 사실이야."

키릴의 발이 멈추었다. 복도 한가운데서. 돌아보았을 때 벽안이 넓게 열려 있었다. 믿어도 되냐고 묻는 눈이었다. 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릴의 귀가 더 붉어졌다.

 


Ⅴ. 오답 다섯 — 곁에 남는 것

 

이것은 르네가 가장 먼저 적었던 오답이었다. 가장 확신했던 오답이었다.

곁에 남지 말 것. 자기 옆에 있으면 다친다.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손이 닿으면 위험하다. 그러니 오래 머물지 말 것. 가까이 오지 말 것. 남지 말 것.

키릴은 남았다.

매일 아침 옆에서 눈을 떴다. 매일 저녁 같은 식탁에 앉았다. 매일 밤 깍지를 끼고 잤다. 왼팔은 르네의 머리 밑에, 오른손은 깍지. 겨울마다 주먹을 쥐고 자던 습관이 어느 날부터 사라졌다. 르네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손은 밤새 펴져 있었다. 새벽에 눈을 떠 확인할 때마다 그랬다.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이었다. 잠든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

곁에 남지 말 것. 봐줄 수 없다고 적었었다.

그런데 키릴은 남았다. 남아서 주먹을 폈다. 남아서 식탁에 의자를 하나 더 놓았다. 남아서 옷장 오른쪽 절반을 비워두었다. 남아서 사과파이 반죽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남아서 은색 반지에 넣을 보석 색을 고민했다. 남아서, 매일 아침, 허리를 감싸고, 어깨에 턱을 올리고, 숨을 쉬었다.

다섯 번째 오답. 곁에 남는 것.

르네는 그것을 봐줄 수 없다고 적었다. 곁에 남으면 다친다고. 생명이 빠져나간다고. 손이 닿으면 위험하다고.

키릴은 매일 밤 그 위험한 손에 깍지를 끼고 잠들었다.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봐줄 수 없는 오답을 전부 봐주고 있었다. 아니, 봐주는 것이 아니었다. 오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매일 증명당하고 있었다.

이해하려는 것이 오답이라 적었으나, 이해받는 것은 따뜻했다. 희생이 오답이라 적었으나, 서로를 지키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익숙해지는 것이 오답이라 적었으나, 이미 이 체온 없이는 잠들 수 없었다. 소유가 오답이라 적었으나, 네 거라고 말한 것은 르네 자신이었다. 남는 것이 오답이라 적었으나.

남아줘서 살았다.

종이를 적던 그 밤의 자기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적은 다섯 가지는 전부 틀렸다고. 오답이 아니라 정답이었다고. 다만 그때는 아직 몰랐을 뿐이라고.

창밖에서 제비가 울었다.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이, 르네의 손 안에서 따뜻하게 펴져 있었다.

 


 

사랑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Ⅳ) - 르네 후일담


1962년 8월. 같은 설문지가 다시 돌아왔다. 안톤이 사무실에 들어서며 종이 두 장을 흔들었다. 하나는 키릴에게, 하나는 르네에게. 키릴은 이미 받아서 적고 있었다. 르네는 종이를 받아들고 펜을 돌렸다.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관사의 침대 위였다. 창문도 없는 방. 연인이라는 단어가 남의 나라 말처럼 먼 시절. 그때 적었던 다섯 줄은 전부 같은 뜻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남지 마. 다치니까.

지금은 옆자리에서 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키릴의 필기 습관. 단어 사이를 띄우지 않고 쓰다가 문장 끝에서만 펜을 떼는 군대식 속기. 그 소리를 들으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적었다.


1. Пытаться понять меня. → Думать, что он понял всё.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해하려는 것은 더 이상 오답이 아니었다. 키릴이 맥박을 세고, 체온을 재고, 눈빛의 각도로 컨디션을 읽는 것에 익숙해졌다. 다만 전부 알았다고 믿는 순간, 묻는 것을 멈추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가 두려웠다. 아직 꺼내지 못한 밤들이 있었으므로.


2. Жертвовать собой ради меня. → Считать свою жизнь дешевле моей.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 자기 목숨을 내 것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

문 앞에 서서 등을 보여준 날. 긁힌 거라고 말한 날. 키릴은 자기 목숨의 무게를 르네의 그것보다 아래에 두고 있었다. 희생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그 계산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것만은 봐줄 수 없었다. 둘 다 살거나, 둘 다 죽거나. 한쪽만 남는 결말은 거부했다.


3. Привыкнуть ко мне.
(나에게 익숙해지는 것.)

세 번째 줄에서 펜이 멈추었다. 오래 멈추었다. 줄을 긋고,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빈칸으로 남겼다.

익숙해지는 것이 오답이라고 적었던 밤의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매일 아침 증명받고 있었으므로. 허리를 감싸는 팔. 어깨 위의 턱. 주먹이 아닌 손바닥. 그것들에 익숙해진 것이 가장 옳은 일이었으므로. 더 이상 이것은 오답이 아니었다. 대체할 새로운 항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비워두었다.


4. Считать, что я принадлежу ему. → Забыть, что и он принадлежит мне.
(내가 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 자기도 내 것이라는 걸 잊는 것.)

네 거라고 말한 것은 르네 자신이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소유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키릴이 르네의 손목을 잡고, 르네의 허리를 감싸고, 르네의 이마에 입술을 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누구의 것도 아닌 듯 행동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보호하는 쪽이지 보호받는 쪽이 아니라는 듯. 지키는 쪽이지 지켜지는 쪽이 아니라는 듯. 그것은 봐줄 수 없었다. 네가 내 거면, 너도 내 거야. 그 사실을 잊지 마.


5. Остаться.
(곁에 남는 것.)

다섯 번째 줄. 줄을 그었다. 길게, 천천히,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도록 힘을 주어.

그리고 그 아래에 적었다.

Я был неправ. Это не ошибка. Это единственный правильный ответ, который у меня когда-либо был.
(틀렸었어. 이건 오답이 아니야. 내가 가져본 유일한 정답이었어.)


종이를 접었다. 안톤에게 돌려주려다 멈추었다. 한 줄을 더 적고 싶었다. 종이를 다시 펼쳐 여백에 작은 글씨로.

P.S. Третий пункт пуст, потому что ошибок осталось только три. Раньше было пять. Это значит — я учусь.
(추신. 세 번째가 빈칸인 건 오답이 셋밖에 안 남아서야. 전엔 다섯이었어. 배우고 있다는 뜻이지.)

접어서 돌려주었다. 옆자리에서 키릴이 이미 종이를 접어 놓고 턱을 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키릴의 벽안이 무엇을 적었느냐고 묻고 있었다.

르네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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