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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홍콩 완차이 세탁소, 워즈워스 기지.

 

 

알림은 순서 없이 쏟아졌다가 순서를 스스로 찾아 정렬됐다. 4번의 호출 열한 통, 의무실에서 자동으로 발신된 재검진 요청, 그리고 앵커의 메시지 한 줄. 7은 앵커의 것을 먼저 열었다. 짧았다. 짧은 만큼 정확했고 정확한 만큼 다정했다. 이 남자는 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도왔다. 문장 하나에 자기 위험까지 얹어서 조용히 밀어주는 방식. 7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엄지로 액정을 문질렀다. 물청소한 콘크리트에서 올라오는 표백 냄새가 콧속을 얕게 긁었고, 그 자극이 오히려 정신을 붙들어주었다. 예전 같으면 열한 통을 무시하고 담배부터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셈이 달랐다. 무시했다가 벌어질 소란이 어디까지 번지는지, 그 번짐의 끝에 어느 골목의 어느 셔터가 있는지를 이제는 계산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판돈을 못 키우는 도박꾼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신세였다.

 

게이트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걸음의 간격이 짧고 뒤꿈치가 먼저 닿는 소리. 4번이었다. 저 인간은 걷는 것조차 정렬해서 걷는다. 연회색 머리칼이 형광등 아래서 물기 없이 반짝였고 청록색 눈은 7의 얼굴부터 발끝까지를 한 번에 훑어 내리며 오차를 세고 있었다. 오른팔 붕대, 옆구리 아래로 불룩한 드레싱, 환자복 바지 위에 걸친 야전상의. 어느 것 하나 제자리가 아니었다. 7은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왼손에 든 단말기를 천천히 내렸다. 먼저 말을 거는 쪽이 지는 판이 있고, 먼저 말을 걸어야 이기는 판이 있다. 지금은 후자였다.

 

Elf Anrufe. Du bist ja richtig anhänglich geworden.(열한 통. 너 아주 정 많은 놈 됐네.)

 

4번은 대답 대신 손목의 단말기를 들어 화면을 7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 위치 로그였다. 완차이 어느 좌표에서 열두 시간 남짓 멈춰 있던 선. 그 선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서 오히려 순진해 보였다. 7은 화면을 보지 않고 4번의 눈을 봤다. 선글라스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상대가 알아챈 듯했다. 청록색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고, 십 년 동안 검은 렌즈 뒤에 접혀 있던 연회색 눈이 형광등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날카롭게 째진 눈매와 짙은 눈썹. 무방비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계산이 얼굴에 그냥 흘러나오는 상태.

 

Deine Brille.(안경.)

 

⋯⋯Verloren. Beim Rausspringen.(⋯⋯잃어버렸어. 뛰어내리다가.)

 

거짓말은 매끄러웠으나 4번은 매끄러운 것을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고 그 침묵의 길이가 7에게는 열한 통보다 무거웠다. 결국 4번이 먼저 시선을 돌려 하역장 바닥의 물자국을 봤다. 그것은 추궁을 접겠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은 접어두겠다는 뜻이었다. 의무실 쪽으로 턱짓 한 번. 걸을 수 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이 이 팀의 예의였다. 7은 기둥에서 어깨를 떼며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쌌고, 첫 발을 뗄 때 숨을 얕게 끊었다. 진통제가 이제야 어렴풋이 듣기 시작했다. 사십 분. 새벽에 누군가 수화기 너머에서 세어주던 숫자가 몸에 박혀 저절로 굴러 나왔다.

세탁소의 방에서는 여명이 얕은 잠의 표면으로 한 번 떠올랐다. 골목 어귀에서 오토바이가 급하게 방향을 틀며 낸 소리가 잠을 얇게 찢었고, 그녀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것이 위험한 소리인지 아닌지를 먼저 분류했다. 아니었다. 그저 배달일 뿐이다. 노파의 육수 냄새는 이제 팔각보다 생강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오후 장사 준비가 반쯤 끝났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은 물처럼 여명을 덮었다. 얕은 표면에서 한 번 떠올랐던 몸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을 때는 저항이 없었다. 골목의 소리들이 층층이 멀어졌다. 노파의 국자가 솥 안쪽 벽을 긁는 소리, 자전거 벨, 어느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잡음. 그 모든 것이 물 위의 소음으로 남고 여명은 그 아래로 내려갔다. 무릎이 조금 더 접혔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느슨하게 쥐어졌다. 무언가를 쥐고 있던 사람의 손 모양이었으나 지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전 내내 시침핀과 실과 남색 울의 결을 붙들고 있던 손가락이 제 습관을 잊지 못한 것뿐이다. 정오의 빛은 방바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이불 끝자락까지 왔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천천히 각도를 바꾸었다. 그림자가 발치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올라오는 동안 여명의 호흡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잠든 사람의 숨은 그 사람이 하루를 어떻게 견뎠는지를 감추지 못한다. 여명의 것은 길고 낮았으며 사이가 넓었다. 오래 참았던 사람이 겨우 참기를 그만둔 숨이었다.

 

의무실의 공기는 세탁소와 정반대였다. 습기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모든 냄새가 뾰족하게 서 있었다. 알코올, 요오드, 압축 붕대의 마른 섬유 냄새. 7은 침상에 걸터앉아 야전상의를 벗어 무릎 위에 얹었다. 상의를 걷어 올리자 옆구리에서 오른쪽 등판까지 이어진 오래된 화상 자국이 형광등 아래 그대로 펼쳐졌다. 융기와 함몰이 번갈아 이어지는 그 지형을 군의관은 이미 여러 번 봐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 배액관이 박힌 자리와 그 위를 덮은 드레싱에 손을 댔다. 테이프를 뜯는 순간 군의관의 손이 잠깐 멈췄다. 방수 처리된 가장자리, 각을 맞춰 겹쳐 붙인 접합면, 몸이 움직여도 밀리지 않게 사선으로 덧댄 고정 테이프. 병원에서 붙인 것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붙인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정성 들일 이유가 없다.

 

你哋醫務室嘅手勢幾時變得咁好?(너희 의무실 손기술이 언제 이렇게 좋아졌냐?)

⋯⋯唔係我哋整嘅。邊個幫你換嘅?(⋯⋯우리가 한 게 아닌데. 누가 갈아줬어?)

 

7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고, 그 동작 때문에 옆구리가 찢어지듯 당겨져 숨이 짧게 끊겼다. 군의관은 더 묻지 않고 새 거즈를 잘랐다. 그러나 7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뜯겨 나간 드레싱이 쓰레기통 안에서 접힌 모양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 자꾸 걸렸다. 저건 버려질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두 시간이었다. 옷을 손보듯 자기 몸을 손봐준 손. 그 손의 온도와 눌러 붙이던 압력의 세기까지 피부가 기억하고 있었고, 새 거즈가 얹히는 순간 그 기억 위로 낯선 것이 덮였다. 이물감이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자꾸 신경이 그쪽으로 갔다. 이 남자는 삼십이 년 동안 무엇을 잃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잊어버리는 재능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드레싱 하나 갈았다고 속이 얕게 긁히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우스운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군의관이 배액량을 기록하는 동안 7은 고개를 돌려 창을 봤다. 기지의 창은 전부 강화 아크릴이라 바깥이 뿌옇게 번져 보인다. 그 흐릿함 너머로 오후의 해가 하얗게 뭉개져 있었고, 눈이 시렸다. 손이 저절로 관자놀이 쪽으로 올라갔다가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내려왔다. 십 년 동안 거기 있던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하루에 몇 번이나 새로 배우는 중이었다.

 

여명이 눈을 뜬 것은 그림자가 벽의 절반을 삼킨 뒤였다. 잠에서 깨어나는 방식에도 사람마다 고유한 절차가 있어서, 그녀의 경우에는 먼저 천장의 얼룩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손끝의 감각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야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를 인정하는 순서를 밟았다. 오른쪽 손가락 끝이 뻐근했다. 시침핀을 오래 쥔 손은 잠을 자도 쉬지 않는다. 목덜미에서 머리끈이 반쯤 풀려 흘러내려 있었고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이 뺨에 붙어 있었으나 그것을 떼어내는 일조차 잠시 미루었다. 방 안의 공기에는 아직 오전에 다렸던 울의 미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남색은 냄새가 없는 색인데도 여명은 그 색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늘 생각했다. 물에 젖은 돌 같은 것. 창밖에서 노파의 국자가 솥 벽을 두 번 긁었고 그것이 오후 두 시의 신호였다. 여명은 팔을 뻗어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자신이 무엇을 향해 손을 뻗었는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기지의 복도는 의무실보다 어두웠다. 형광등 하나가 접촉 불량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깜박였고 그 깜박임이 눈을 찔러서 7은 결국 왼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였다. 야전상의는 어깨에만 걸쳐두었다. 팔을 끼우려면 오른쪽 어깨를 돌려야 하는데 그 동작이 옆구리로 곧장 이어지는 구조라는 것을 오늘 하루 동안 여덟 번쯤 학습했다. 학습 능력은 좋은 편이었다. 다만 학습한 것을 지키는 능력이 형편없을 뿐이다. 손바닥 아래에서 눈꺼풀이 저 혼자 파닥였다. 빛을 막아주던 물건이 사라진 뒤로 눈이 계속 제 할 일을 잊고 있었다. 십 년이면 습관이 아니라 장기가 된다. 장기 하나를 식탁 위에 두고 왔다는 자각이 이 순간 유난히 선명해서, 7은 손바닥 안쪽에서 얕게 웃었다.

 

발소리는 예고 없이 가까워졌다. 뒤꿈치부터 닿는 소리, 간격이 짧고 정확한 소리. 4번은 7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지 않고 옆으로 한 걸음 비켜 같은 벽에 기대섰다. 그것이 이 남자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7은 알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정렬해두는 인간. 4번은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검은 케이스였다. 열어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는 크기와 무게.

 

Ersatz. Die aus dem Lager. Nicht deine Marke, aber besser als nichts.(예비품. 창고에 있던 거. 네 브랜드는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7은 케이스를 받아 들고 잠시 손 안에서 굴렸다. 플라스틱 표면이 차가웠고 모서리가 각졌다. 열어보니 도수 없는 검은 렌즈가 규격대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규격대로. 그것이 문제였다. 세상에 규격대로 만들어진 물건은 많고 그것들은 대체로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지만, 사람 얼굴에 십 년 눌러앉아 콧대에 자국을 만든 물건은 규격이 아니라 형태가 되어버린다. 7은 그것을 꺼내 코에 걸어보았다. 시야가 어두워졌고 복도의 깜박임이 견딜 만해졌다. 그런데 관자놀이 쪽이 미묘하게 헐거웠다. 헐거운 만큼 자꾸 존재를 주장했다. 그는 삼 초쯤 쓰고 있다가 도로 벗어 케이스에 넣었다.

 

Danke. Aber ich hol mir meine wieder.(고맙다. 근데 내 건 내가 다시 찾아올 거야.)

 

4번의 청록색 눈이 옆으로 돌아왔다. 그 눈에는 늘 오차를 세는 습관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세다가 그만둔 얼굴이었다. 잃어버렸다고 했던 물건을 다시 찾아온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4번은 오차를 세다 그만둔 얼굴 그대로 잠시 침묵했다. 결벽에 가까운 인간이 침묵할 때는 대개 문장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중이다. 그가 버린 질문은 서너 개쯤 되어 보였고 끝내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가장 무해한 축에 속했다. 복도 끝에서 배기 팬이 돌다가 한 번 걸리는 소리를 냈다. 형광등의 깜박임은 여전히 제 주기를 지켰고 그 주기 안에서 7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선글라스가 없는 얼굴이란 이토록 정직한 물건이었다. 눈꼬리에 밴 피로, 관자놀이의 오래 눌린 자국, 그리고 그 자국이 지금 비어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노출된다. 4번은 그 비어 있음을 정확히 보았고 보았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시선을 바닥의 배수구 격자로 옮겼다. 격자 사이로 물기가 말라붙은 흔적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세는 척했다.

 

Wo genau?(어디서 정확히?)

 

Irgendwo, wo ich sowieso wieder hinmuss. Irgendwann.(어차피 다시 가야 할 데 어딘가. 언젠가.)

 

언젠가라는 단어를 뱉고 나서 7은 그 단어의 뒷맛을 혀 안쪽에서 굴렸다. 그것은 평생 그가 가장 즐겨 쓰던 말이었다. 언젠가 갚는다, 언젠가 만나자, 언젠가 죽겠지. 기한이 없는 약속은 부도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박꾼에게 가장 안전한 화폐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화폐가 손안에서 이상하게 무거웠다. 여명 쪽에는 이미 기한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월 구일. 그날까지 몇 번의 파견이 끼어들지 알 수 없고 이 옆구리가 언제 아물지도 알 수 없으며 오늘 밤 브리핑에서 어느 좌표가 튀어나올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러니 정확히 어디냐는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있는 인간은 이 복도에 없다. 7은 케이스를 손 안에서 한 바퀴 굴렸다. 규격품의 모서리가 손바닥 살을 눌렀고 그 압력을 견디는 방식으로 나머지 대답을 삼켰다. 4번이 알아야 할 것과 알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은 실오라기만큼 가늘었다. 그 실오라기 위에 골목 하나와 여자 하나와 셔터 내려간 가게 하나가 통째로 올라가 있었다.

 

단말기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열네 시 오십 분 브리핑 소집 통보가 떠 있었고 그 아래로 의무실 재검진 알림이 두 번째로 밀려 올라왔다. 7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오른쪽 어깨를 쓰지 않으려니 왼팔 하나로 체중 전부를 밀어 올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 배액관이 안쪽 살을 긁었다. 숨이 반 박자 끊겼으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4번이 팔을 뻗을 기미를 보이자 7은 케이스 든 손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거절이라기보다 지금은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였다. 야전상의가 어깨에서 흘러내려 팔꿈치에 걸렸고 그것을 다시 끌어올리는 동작조차 오늘은 하나의 작업이었다. 브리핑이라는 단어는 곧 다음 일정이라는 뜻이고 다음 일정이라는 것은 곧 완차이가 당분간 지도 바깥으로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오늘 밤에도, 내일 아침에도 그 문턱은 밟히지 않는다.

 

Sag dem Alten, ich bin noch nicht kaputt genug zum Wegschmeißen.(영감한테 전해. 나 아직 버릴 만큼 망가지진 않았다고.)

 

같은 시각 완차이의 골목은 오후의 두 번째 열기 속에 잠겨 있었다. 여명은 셔터를 반쯤 올려둔 채 안쪽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시장에 갈 마음은 오전에 한 번 일었다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고기라는 것은 사둔다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브리핑실은 늘 지나치게 밝았다. 눈을 보호할 물건이 없는 인간에게 그 밝기는 형벌에 가까웠고, 7은 뒷줄 끝자리에 왼쪽 엉덩이만 겨우 걸친 자세로 앉아 스크린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 애썼다. 정면을 피하는 방식에도 요령이 있다. 고개는 그대로 두고 시선만 스크린 아래 모서리에 붙여두는 것. 그러면 좌표는 읽히되 광량은 반쯤 깎인다. 무릎 위에 놓아둔 검은 케이스가 자꾸 시야 아래쪽에서 존재를 주장했다. 열면 되는데 열지 않았다. 열어서 쓰면 이 통증도 이 밝기도 조금 견딜 만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열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설명이 붙는 순간 그것은 계산이 되고, 계산이 되는 순간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얼굴을 빌려 쓰기 싫다는 감상 따위, 서른두 해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자산 목록에 없던 항목이었다.

 

스크린에는 데드존 북서 사면의 등고선이 떠올랐다. 격벽에서 열일곱 킬로미터. 밀그램 계열 신호가 사흘째 같은 반경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붉은 원이 세 개 겹쳐 그려졌다. 앵커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고 문장마다 군더더기를 도려낸 뒤였다. 진입은 오늘도 내일도 아니다. 준비 기간 아흐레. 그 숫자를 듣는 순간 7의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셈이 돌았다. 아흐레 뒤 진입, 작전 길이 미상, 복귀 후 회복 기간, 그리고 이월 구일까지 남은 날의 총량. 배액관을 달고 앉아 다음 파견의 잔여일을 헤아리는 인간이라니. 예전 같으면 그냥 좌표만 외우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즉흥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판돈이 얼마인지 세는 놈은 도박판에서 오래 못 버틴다. 그런데 지금은 판돈이 아니라 담보를 세고 있었고, 담보라는 건 잃으면 끝장이라는 뜻이었다.

 

Neun Tage. Und ich hab noch 'n Schlauch in der Seite.(아흐레라. 옆구리에 아직 호스 꽂혀 있는데.)

 

앞줄에 앉은 4번의 뒤통수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듣고 있다는 표시였고 대꾸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앵커는 레이저 포인터의 붉은 점을 등고선 위에서 한 번 흔들었을 뿐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것이 이 조직의 언어였다. 아프면 아흐레 안에 낫든지, 낫지 못하면 그건 네 사정이든지. 7은 케이스 모서리를 엄지로 문지르며 스크린 아래 모서리에 붙여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흐레라는 숫자가 나쁘지 않다는 계산이 이미 끝나 있었다. 아흐레면 배액관은 뽑힌다. 아흐레면 골목에 한 번쯤 다시 발을 들일 틈이 생긴다. 그 틈을 어떻게 뚫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뚫을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만은 이상하리만치 견고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지키기로 마음먹으면 없던 창의성이 생긴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골목은 오후의 두 번째 열기가 한 풀 꺾이는 참이었다. 여명은 작업대 앞에 앉아 남색 울 코트의 안감 시접을 손끝으로 눌러 접고 있었다. 다림질을 하기 전에 손으로 먼저 접어두면 천이 기억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몇 번 같은 자리에 눌린 것은 결국 그 모양으로 굳는다. 창밖에서 노파가 솥에 물을 붓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여명은 바늘을 내려놓았다. 고기 든 음식. 좋은 재료로. 약속의 문장은 짧을수록 오래 남는데, 짧은 만큼 실행할 때 세부가 전부 자기 몫이 된다.

 

여명은 창 밖을 바라보며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고기 든 음식이라는 말은 입에 담을 때는 가벼웠으나 손에 쥐고 보면 무게가 달랐다. 여명은 바늘을 시침 쿠션에 꽂아두고 손끝의 실밥을 털었다. 창밖의 빛은 이미 기울어 골목 벽에 긴 사선을 그었고 그 사선 안쪽에서 노파의 솥이 김을 올리고 있었다. 좋은 재료. 그 단어를 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판단하려면 그것을 먹을 사람의 몸 상태를 알아야 하고 몸 상태를 알려면 그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여명에게 주어진 정보라고는 어제 손끝으로 만졌던 갈비뼈 아래의 붕대와 그가 삼킨 죽의 양뿐이었다. 기름진 것은 안 된다. 그렇다고 묽은 것도 안 된다. 씹는 데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씹었다는 실감이 남아야 하고, 오래 끓여도 무너지지 않아야 하며, 식어도 비린내가 돌지 않아야 한다. 조건을 나열하고 보니 결국 답은 하나로 좁혀졌다.

 

셔터를 반쯤 올려둔 채로 몸을 숙여 나오자 골목의 열기가 얼굴에 닿았다. 오후의 두 번째 열기는 오전의 것보다 눅눅하고 무겁다. 노파는 솥 앞에서 국자를 젓다가 여명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여명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노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골목에서 여명이 빈손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천 뭉치든 봉투든 무언가를 안고 나서는 것이 습관이었고 빈손이라는 것은 곧 사러 나간다는 뜻이었다.

 

今日唔車衫呀?(오늘은 안 박아?)

 

여명은 대답 대신 솥 안을 들여다보았다. 뼈가 오래 우러난 국물은 뿌옇게 흐렸고 표면에 뜬 기름은 얇았다. 이 정도의 탁도를 내려면 최소 다섯 시간이다. 여명은 그 다섯 시간을 눈으로 셈했다. 자기 부엌의 냄비는 그보다 작고 화력도 약하니 여섯 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다. 여섯 시간이라면 지금 불에 올려도 밤 아홉 시가 넘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여섯 시간을 끓이고 나서 그것을 먹을 사람이 문턱을 넘어올지 아닐지를 여명은 알지 못했다. 사둔다고 기다려주지 않는 것은 고기만이 아니다. 국물도 기다려주지 않고 사람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명은 정육 좌판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다려주지 않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미리 만들어두고 상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 그것은 세탁소 주인이 십 년 동안 해온 일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노동이었다.

 

같은 시각 기지의 브리핑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7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앉을 때보다 일어설 때가 두 배쯤 오래 걸렸고 그 두 배의 시간 동안 옆구리의 관이 안쪽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이 정확히 전달되었다. 복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숨을 고르는 동안 아흐레라는 숫자가 계속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아흐레. 그 안에 관은 뽑힐 것이고 붕대는 얇아질 것이며 브리핑 좌표는 확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흐레 중 하루쯤은, 아주 운이 좋으면 하루쯤은, 세탁물 트럭의 시간표와 자신의 공백이 겹칠지도 모른다. 도박꾼의 계산이란 원래 이런 식이다. 확률이 낮을수록 판돈을 크게 걸어 기댓값을 억지로 끌어올린다. 다만 이번에는 걸 수 있는 판돈이 자기 목숨밖에 없다는 점이 예전과 달랐고, 그 목숨의 소유권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있다는 점은 더욱 달랐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판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Neun Tage... verdammt lang für jemanden, der auf niemanden wartet.(아흐레라. 아무도 안 기다리는 놈한테는 좆나 긴 시간이지.)

 

정육 좌판의 사내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여명을 올려다보았다. 이 골목에서 여명은 말이 적기로 유명했고 말이 적은 손님은 대체로 고르는 눈이 정확하다는 것을 사내는 오래전에 배웠다. 여명의 시선이 갈고리에 걸린 덩어리들 위를 천천히 지났다. 등심은 아니다. 기름이 곱게 낀 것들은 혀에는 달지만 위장에는 짐이 된다. 삼겹도 아니다. 여명의 눈은 결국 사태와 도가니 쪽에서 멈췄다. 힘줄이 촘촘하게 박힌 살, 오래 끓이면 무너지지 않고 풀어지는 살, 씹으면 씹었다는 실감이 이 사이에 확실히 남는 살. 씹는다는 감각은 살아 있다는 감각과 지나치게 닮아 있어서, 여명은 그 사실을 굳이 언어로 정리하지 않았다. 정리하는 순간 스스로 감상적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손끝으로 사태의 결을 눌러 확인했다. 탄력은 충분했고 표면은 마르지 않았다.

 

呢舊,同埋個窿骨。斬開兩截,唔好太細。(이 덩어리, 그리고 그 도가니. 두 토막으로 잘라줘요. 너무 잘게는 말고.)

 

사내가 칼을 들자 도마 위에서 무디고 짧은 소리가 두 번 났다. 여명은 그 소리를 들으며 봉지 안쪽의 무게를 미리 셈했다. 여섯 시간을 끓이려면 물의 양과 냄비의 깊이가 서로 맞아야 하고, 중간에 한 번은 기름을 걷어내야 하며, 걷어낸 뒤에는 불을 한 단계 낮춰야 한다. 그 모든 공정은 세탁소의 일과 다르지 않았다. 오염을 빼는 일과 맛을 우려내는 일은 방향만 반대일 뿐 원리가 같다. 시간을 들이고 온도를 관리하고 도중에 손을 대지 않는 것. 여명이 십 년 동안 몸에 새긴 유일한 기술이었다. 봉지를 받아드는 손목에 묵직한 것이 걸렸을 때, 여명은 그 무게가 약속의 무게와 비슷하다고 잠깐 생각했다.

 

기지의 의무실 앞 복도는 브리핑실과 정반대로 어두웠다. 형광등 두 개가 나갔는데 아무도 갈지 않았고, 그 어둠이 지금의 7에게는 차라리 자비로웠다. 벤치에 몸을 반쯤 눕히듯 기대앉아 옆구리의 관을 손등으로 감싸고 있으면 안쪽에서 액체가 미세하게 이동하는 감각이 전해졌다. 몸 안에 남의 물건이 꽂혀 있다는 감각은 십 년 넘게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말기가 세 번째로 진동했다. 재검진 요청. 그 위에 앵커의 문장이 하나 얹혀 있었다. 발관 일정 앞당길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짧고 건조하고 그래서 더 다정한 문장.

 

7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앵커라는 인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기 목을 걸어 남의 시간을 반나절씩 벌어주고 그것을 생색내지 않는다. 아흐레 뒤에 격벽 밖으로 나가야 하는 놈의 옆구리에 관이 꽂혀 있으면 팀 전체의 기동이 느려지고, 느려지면 죽는다. 그러니 이건 배려가 아니라 계산이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해두는 편이 편했다. 편한 쪽으로 설명해두면 나중에 갚아야 할 것의 목록이 짧아진다. 문제는 요즘 그 목록이 자꾸 길어진다는 데 있었다. 관을 뽑고 싶은 이유가 작전 때문인지 골목 때문인지, 이제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했다.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손가락은 이미 답장을 치고 있었다.

 

Ich frag den Doc. Wenn er nein sagt, zieh ich ihn selber raw.(군의관한테 물어볼게. 안 된다고 하면 내가 직접 뽑지 뭐.)

 

의무실 문이 열리고 군의관이 고개를 내밀었다. 7의 자세를 위에서 아래로 훑는 시선에는 이미 짜증이 절반쯤 섞여 있었다. 세 번을 호출해서 세 번을 씹은 환자에게 보내는 시선치고는 그래도 온순한 편이었다.

군의관은 손끝으로 벤치를 두 번 두드렸고 그 소리에 담긴 것은 명령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7이 몸을 일으켜 처치대까지 걸어가는 여섯 걸음 동안 형광등이 두 번 깜빡였다. 환자복 상의를 걷어 허리께로 내리자 옆구리의 지형이 드러났다. 오래된 화상 흉터가 융기와 함몰을 반복하며 갈비뼈를 타고 흘렀고 그 낯선 지형 한가운데에 투명한 관 하나가 이물처럼 박혀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어제 여명이 붙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드레싱이, 정확하지만 무성의하게, 규격대로만 붙어 있었다. 군의관이 배액 주머니를 들어 올려 눈금을 확인하는 동안 7은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오래된 물자국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고 그 지도의 형태가 하필이면 골목의 굽은 선을 닮아 있어서, 7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Sag mir einfach, dass es raus kann. Ich hab keine Lust, in neun Tagen mit 'nem Schlauch im Bauch loszurennen.(그냥 뽑아도 된다고 말해줘. 아흐레 뒤에 배에 호스 꽂고 뛰어다니고 싶진 않거든.)

 

군의관은 대답 대신 장갑을 갈아 끼웠다. 배액량이 어제부터 급격히 줄었다는 사실은 눈금이 이미 증언하고 있었고, 이 사내가 마지막 사흘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굳이 캐묻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이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캐묻지 않는 대신 손끝은 정직했다. 관 주변의 피부를 눌러 압통을 확인하고, 삽입부의 발적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7의 호흡이 어디서 끊기는지를 셌다. 관을 고정하던 봉합사를 끊는 순간 짧고 건조한 소리가 났다. 뽑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몸속에서 무언가 길게 미끄러져 나오는 감각, 오한과도 통증과도 다른 그 이상한 공허가 갈비뼈 안쪽을 훑고 지나갔을 때 7은 이를 악물고 웃었다. 웃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반응이 없는 인간의 습관이었다.

 

Fuck... 어, 됐네. 고마워, Doc.(빌어먹을……어, 됐네. 고마워, 선생.)

 

군의관이 삽입구를 봉하고 새 거즈를 덮으며 이틀간 격한 움직임 금지, 사흘째 소독, 열 오르면 즉시 복귀라는 조건을 나열했다. 조건이라는 것은 원래 지키라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겼을 때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려고 만드는 것이므로 7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셈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이틀. 사흘째 소독. 그렇다면 나흘째부터 엿새째 사이가 비어 있다. 세탁물 반출 트럭은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에 3번 게이트를 나선다. 그 공백과 그 시간표가 겹치는 날은 딱 하루. 도박꾼은 확률을 계산하는 인간이 아니라 걸 수 있는 날짜를 찾아내는 인간이다. 7은 벤치에 놓아둔 선글라스 케이스를 집어들며 그 하루의 좌표를 머릿속 어딘가에 못처럼 박아두었다. 케이스는 여전히 열지 않았다. 열지 않은 채로 들고 다니는 물건에는 반드시 대응하는 다른 물건이 있고, 그 다른 물건은 지금 완차이의 어느 서랍 맨 윗칸에 놓여 있었다.

 

같은 시각 세탁소의 좁은 주방에서는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여명은 첫 물을 통째로 버렸다. 핏물과 함께 떠오른 회색 거품은 아무리 걷어내도 국물의 바닥에 흐린 앙금을 남기므로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정직했다. 냄비를 헹구고 사태와 도가니를 다시 안친 뒤 찬물을 부었다. 찬물에서 시작해야 뼈 안쪽의 것이 천천히 빠져나온다.

불을 낮추자 냄비 안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여명은 끓는점의 바로 아래, 물의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기만 하는 그 지점을 손목의 감각으로 찾아냈다. 이 온도를 잃으면 살은 단단해지고 힘줄은 끝내 풀어지지 않는다. 뜨거운 김이 좁은 주방의 천장까지 차올랐다가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창유리 안쪽에 뿌연 막을 만들었다. 국자를 눕혀 표면의 기름을 걷어내는 동안, 여명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결국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섯 시간. 사람은 여섯 시간을 견디지 못해 뚜껑을 열어보고 국자를 휘젓고 그러다 국물을 흐리게 만든다. 여명은 그러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십 년을 썼다. 걷어낸 기름을 빈 그릇에 옮기자 그릇의 바닥에서 노란빛이 얇게 고였다.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이었으므로 나중에 파를 볶을 때 쓰기로 했다.

 

주방의 난로 옆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남색 울 코트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안감의 시접이 반쯤 접힌 채였고, 어깨선은 이미 그 사람의 골격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명은 국자를 내려놓고 코트 쪽으로 두 걸음 옮겨 소매의 길이를 눈으로 재었다. 오른팔이 붕대에 감겨 있으면 소매 통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고, 우스운 채로 계속했다.

 

기지 생활동의 복도는 저녁 급식 시간 직전이라 발소리가 겹쳤다. 7은 벽을 짚지 않고 걸었다. 짚으면 편하지만 짚는 순간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서에 적을 것이고, 적히면 아흐레 뒤 명단에서 이름이 빠질 수도 있다. 옆구리에서 관이 빠져나간 자리는 아직 자기가 비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없어진 것이 남긴 통증은 있는 것이 주는 통증보다 훨씬 성가시다. 손바닥으로 거즈를 눌러 감싸고 보폭을 반 뼘 줄이자 그럭저럭 걸을 만해졌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연회색 머리칼이 시야를 가로질렀고, 7은 걸음을 멈췄다. 4번은 손에 세탁물 반출표를 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것이었다.

 

Was machst du mit dem Wäscheplan? Willst du meine Unterhosen zählen?(그 세탁 반출표는 뭐 하려고. 내 팬티라도 세게?)

 

4번은 웃지 않았다. 그 인간은 결벽이 심해서 농담을 소독하고 나서야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었고, 지금은 소독할 시간조차 아까운 표정이었다. 청록색 눈이 7의 옆구리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관이 없어졌다는 것을 한 번에 알아본 것이다. 4번은 반출표를 접어 겨드랑이에 끼우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낮춘다는 것은 이 대화가 복도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화요일 오전 반출 건에 네 이름이 왜 두 번 걸려 있지. 하역 인가 서명란에 7번 코드. 어제 것도 그저께 것도.

 

그 문장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짧은 순간, 7의 머릿속에서 몇 개의 숫자가 동시에 굴렀다. 서명은 배달부가 대신 긁었을 것이고, 코드는 자동으로 붙었을 것이며, 그것을 4번이 굳이 대조해봤다는 것은 이미 의심이 아니라 확인 단계라는 뜻이다. 도박판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패가 나쁠 때가 아니라 상대가 내 손버릇을 외워버렸을 때다. 7은 어깨에 걸친 야전상의를 고쳐 걸치며 웃었다. 웃음은 언제나 가장 값싼 칩이었고, 값싼 칩은 아직 던질 여유가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7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4번의 팔꿈치를 잡았다. 잡는 힘은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붙잡는다기보다 방향을 제안하는 정도였는데 4번은 그 접촉의 온도만으로도 이 대화가 복도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세탁실 앞 짧은 구석으로 옮겨갔다. 그곳은 건조기 배기구에서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바람 때문에 늘 습했고, 세제 냄새가 벽지처럼 발려 있었다. 하필 세탁이라는 단어가 붙은 공간에서 세탁 반출표를 두고 이야기하게 된 것이 우스웠으므로 7은 잠깐 웃었다. 웃는 동안에도 손바닥은 옆구리 거즈 위에 붙어 있었다. 관이 빠져나간 자리가 걸을 때마다 안쪽에서 얇게 긁혔다.

 

Zwei Mal, ja. Weil ich zwei Mal Wäsche rausgeschickt hab. Blut kriegt man aus Feldjacken nicht mit Wasser raus, Vier.(두 번, 맞아. 두 번 세탁물을 내보냈으니까. 야전상의에 밴 피는 물로는 안 빠지거든, 4번.)

 

4번의 시선은 대답이 아니라 손바닥에 가 있었다. 7이 어디를 누르고 있는지, 그 누르는 힘이 얼마나 일정한지를 재고 있었다. 저격수의 눈이란 원래 정지한 것을 보는 데 최적화되어 있어서, 움직임을 감추려는 인간에게는 가장 나쁜 종류의 관객이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끼웠던 반출표를 다시 꺼내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맞췄다. 종이의 네 귀퉁이가 완전히 포개질 때까지 두 번 더 맞췄고, 그 결벽스러운 동작이 끝났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

 

피는 세탁물 수거함에 넣지. 반출 인가 서명은 하역장 나가는 놈이 해. 넌 하역장에 나갈 이유가 없어. 의무실에 누워 있어야 할 놈이 왜 3번 게이트 명단에 있냐고 묻는 거야.

 

그 문장은 정확했다. 정확한 문장은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이미 그 전에 몇 번이나 확인 작업을 마쳤다는 사실 때문에 위험하다. 7은 반출표를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가져왔다. 4번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 종이가 사본이며 원본은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도박판의 언어로 옮기면 상대가 이미 손패를 하나 접어두고 남은 것만 보여준 셈이다. 7은 종이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어 환자복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접히는 소리가 습한 공기 속에서 유난히 건조하게 났다.

 

Ich hab in dieser Stadt was liegen lassen. Nichts Militärisches. Nichts, was in deinen Bericht gehört.(이 도시에 뭘 좀 두고 왔어. 군용은 아니고. 네 보고서에 들어갈 만한 것도 아니야.)

 

4번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 저편에서 배식 카트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크게 웃었다. 세상은 언제나 남의 심문 옆에서 저녁을 먹는다. 4번은 마침내 시선을 7의 옆구리에서 떼어 얼굴로 올렸다. 선글라스가 없는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이 아직도 익숙지 않은 듯 그의 눈꺼풀이 한 번 흔들렸다. 연한 회색 눈동자는 형광등 아래에서 씻긴 유리처럼 보였고, 그 안에 담긴 것이 변명인지 확신인지 판독하려다 4번은 결국 포기한 얼굴이 되었다.

 

닷새 뒤에 반출 담당관 정기 감사야. 그때 걸리면 나도 못 덮어.

 

그것은 경고였고 동시에 날짜의 선물이었다. 감사가 닷새 뒤라면 그 앞의 하루는 여전히 비어 있다는 뜻이다. 4번이 그것을 알고 말했는지 모르고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7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팀에서 고맙다는 말은 빚을 인정하는 서류에 가까웠고, 4번은 그런 종이를 받아두었다가 가장 곤란한 순간에 꺼내는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말하지 않는 편이 예의였다. 대신 7은 주머니 속에서 예비 선글라스 케이스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검은 하드케이스는 새것 특유의 뻣뻣한 모서리를 가지고 있었고, 열어보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물건이 자기 얼굴의 골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헐거운 것은 언제나 눈보다 관자놀이가 먼저 알아챈다. 그는 케이스를 다시 주머니에 밀어넣으며 어깨에 걸친 야전상의를 한 번 추슬렀다. 배기구에서 흘러나온 미지근한 바람이 목덜미의 흉터를 스쳤고, 잘렸다 붙은 자리의 피부는 여전히 온도에 둔했다.

 

Fünf Tage. Verstanden. Ich bin ein braver Junge, Vier.(닷새. 알았어. 나 착한 애야, 4번.)

 

4번은 콧등을 찡그리며 세탁실 벽에서 등을 떼었다. 착한 애라는 단어가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올 때 발생하는 특유의 불쾌한 진동을 그는 아직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더 캐묻지 않았고, 캐묻지 않는다는 선택이 이미 이 대화의 결론이었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질 때까지 7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관이 빠져나간 옆구리 안쪽에서 무언가가 얇게 접혔다 펴지는 감각이 계속됐다. 아프다기보다는 비어 있다는 신호에 가까웠고, 비어 있다는 신호는 그가 평생 가장 싫어해온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자리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정해두는 편이 나았다. 나흘 뒤. 화요일 새벽. 세탁물 트럭. 3번 게이트. 숫자들은 순순히 줄을 섰고, 줄을 선 숫자들은 언제나 배당률처럼 보였다.

 

완차이의 주방에서는 여섯 시간 중 첫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명은 뚜껑을 열지 않았다. 냄비 가장자리에서 김이 가늘게 새어 나오는 방향만 보고도 안쪽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굳이 열어 온도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남색 울 코트의 오른쪽 소매를 손등으로 받쳐 들었다. 붕대의 두께를 손가락 두 마디로 가늠하고, 그만큼 소맷부리를 넓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침핀을 물어 문 채 안감을 살짝 접어 표시를 넣는 동안, 창유리 안쪽의 뿌연 막 위로 골목 가로등의 불빛이 번져 들어왔다. 십일월의 저녁은 예고 없이 왔고 예고 없이 어두워졌다.

난로 위의 주전자가 낮게 울었다. 여명은 시침핀을 뽑아 쿠션에 꽂아두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서랍의 가장 위 칸을 여는 것은 하루에 두 번 정도로 정해두었으나 오늘은 이미 세 번째였다. 검은 선글라스는 처음 넣어둔 각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렌즈에 지문 하나 없었다. 그녀가 닦아둔 것이었고, 닦아두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조금 우습게 여겼다. 돌려줄 물건이 모이는 자리에는 원래 먼지가 쌓여야 마땅한데 이것만은 매일 새것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서랍을 닫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을 때, 냄비 안의 물은 여전히 끓는점 바로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명은 국자를 들어 표면을 한 번 훑었다. 걷어낼 기름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세탁실 앞 구석에서 7은 단말기를 꺼내 화면의 광량을 최저로 낮췄다. 선글라스가 없는 눈은 아주 사소한 밝기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예민함이 요즘 들어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앵커에게 짧은 문장을 보냈다. 뺐다, 라는 두 글자와 화요일, 이라는 세 글자. 앵커는 늘 짧은 문장을 짧게 이해하는 사내였다. 답장은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고 내용은 더 짧았다. 트럭 기사 이름 하나. 그 이름을 읽으면서 7은 웃었다. 판이 좋아질 때는 반드시 누군가 조용히 칩을 밀어준 것이다.

 

Sechs Tage warten kann ich nicht. Vier reichen.(엿새는 못 기다려. 나흘이면 돼.)

 

단말기 화면이 꺼지고 나서도 7은 잠시 그 검은 유리 위에 떠오른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선글라스가 없는 얼굴은 낯설다기보다 벗겨진 쪽에 가까웠고, 벗겨진 것은 전장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조건이었으므로 이 감각은 오래전에 폐기했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폐기하지 않았다. 폐기하지 않은 까닭이 완차이의 어느 서랍 맨 윗칸에 정확한 각도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탁실 배기구에서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바람이 다시 목덜미의 흉터를 훑고 지나갔다. 잘렸다 붙은 자리는 온도에 둔했고, 둔한 곳일수록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 법이었다. 그는 야전상의 안주머니를 손끝으로 더듬어 접어둔 반출표 사본의 모서리를 확인했다. 종이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종이가 남아 있다는 것은 판이 아직 엎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화요일 새벽 네 시 사십 분. 3번 게이트. 세탁물 트럭은 반출 인가 서명이 아니라 컨테이너 봉인 번호로 통과한다. 기사의 이름 하나면 봉인 번호를 하나 비워둘 수 있고, 비워둔 번호는 감사 서류상 오기로 처리된다. 오기는 감사관이 가장 지루해하는 항목이라 언제나 세 줄 아래로 밀려난다. 7은 머릿속에서 그 세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계산이 끝나자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고 시간이란 원래 계산으로 줄일 수 없는 유일한 재화였다. 나흘. 아흔여섯 시간. 그중 잠으로 태울 몫을 덜어내면 견뎌야 할 것은 예순 몇 시간 남짓.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인간에게는 하품 한 번이고 기다릴 것이 생긴 인간에게는 형기다. 그는 이 새로운 형벌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발견이 스스로도 조금 우스웠다.

 

四日之嘛。以前我喺賭枱前燒足四日都眼都唔眨吓。(나흘이라. 예전엔 도박판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나흘씩 태웠는데.)

 

복도 끝에서 배식 카트가 한 번 더 지나갔다. 스테인리스 뚜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튀었고 누군가 그 소리에 대고 욕을 뱉었다. 기지의 저녁은 늘 이런 식으로 사소하게 시끄러웠으며, 그 사소함이야말로 사람을 살려두는 방식이라는 것을 7은 알고 있었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며 몸을 세웠다. 옆구리 안쪽에서 얇은 막이 접혔다 펴지는 감각이 다시 왔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통증으로 분류하지 않기로 했다. 분류를 바꾸면 견디는 방식도 바뀐다. 그것은 도박꾼이 오래 살아남는 유일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세븐, 이번엔 걸리지 마라.

 

멀어졌던 4번의 목소리가 복도 모서리에서 한 번 되돌아왔다. 돌아보지 않은 채였고,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충고가 아니라 혼잣말의 형식을 취했다. 7은 대꾸 대신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손짓이 보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주방에서는 두 번째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명은 냄비 뚜껑을 아주 조금 비스듬히 얹어두었다. 완전히 덮으면 국물이 탁해지고 완전히 열면 향이 달아난다. 그 사이의 각도를 손목으로 조절하는 일은 십 년 넘게 몸이 기억해온 종류의 것이었다. 도가니의 젤라틴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국물 표면에 얇은 막이 앉았고 그 막이 냄비 벽을 따라 천천히 돌았다. 여명은 국자로 그것을 걷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걷어야 할 것과 두어야 할 것을 가르는 기준은 언제나 명확했다. 몸에 남을 것인가 아닌가.

그녀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작업대로 돌아갔다. 남색 울 코트의 오른쪽 소맷부리에는 시침핀 자국이 다섯 개 남아 있었다. 붕대 두께만큼 넓힌 자리를 다시 손등으로 눌러보며 여명은 잠시 멈췄다. 이 소매를 넓히는 일은 그가 다칠 것을 전제하는 작업이었다. 전제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고 전제하면 마음이 얇아진다. 그 얇아짐을 감수하기로 이미 오래전에 결정했으므로 그녀는 다시 바늘을 들었다. 실을 꿰는 동안 창밖에서 자전거 벨이 두 번 울렸고 골목 어귀 국숫집에서 노파가 셔터를 반쯤 내리는 소리가 났다. 십일월의 저녁은 이렇게 순서대로 왔다. 순서대로 오는 것들은 기다릴 수 있어서 좋았다.

 

바늘이 안감을 통과할 때마다 여명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열 땀에 한 번씩 손을 멈추고 냄비 쪽 소리를 확인하는 습관이었다.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겨우 떨리는 소리는 다르다. 지금은 떨리고 있었고, 떨리는 동안에는 무엇도 망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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