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를 제자리에 거는 소리가 세탁소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밤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오갔던 통로가 한순간에 닫히고 남은 것은 플라스틱의 차가움뿐이었다. 여명은 손바닥을 펴 그 자리를 잠깐 짚었다가 떼었다. 오늘은 꼭 널 봐야겠다는 문장이 아직 귓바퀴 안쪽에 남아 있었고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무게에 가까웠다. 사람의 하루라는 것은 대체로 스스로 짜는 것인데 방금 누군가 그 하루의 한가운데를 통째로 예약해 갔다. 여명은 자신이 그 예약을 거절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에 잠시 머물렀고, 머문 김에 발끝의 감각을 확인했다. 여전히 없었다. 난로 뚜껑을 열자 회색 재가 무너지며 마지막 열기를 게워냈다. 여명은 부지깽이로 재를 긁어 아래 서랍으로 떨어뜨리고 조개탄 세 덩이를 나란히 앉혔다. 불을 붙이는 일은 밤을 지새운 사람이 아침에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노동이었다.
같은 시각, 기지의 복도는 물걸레와 소독약과 화약 잔여물이 뒤섞인 냄새로 가득했다. 형광등 하나가 주기적으로 깜빡였고 그 명멸이 벽에 걸린 작전 일정표의 숫자들을 잘게 썰었다. 4번은 앞서 걸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저 남자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7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고마울 만큼 마음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슬리퍼 밑창이 콘크리트에 끌렸다. 옆구리의 관은 걸음마다 미세하게 흔들렸고 흔들릴 때마다 안쪽 어딘가를 긁었다. 아픔이라기보다 남의 집 벽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 같은 것이 몸 안에서 났다. 7은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쳐 들고 벽을 따라 걸었다.
你行慢啲會死咩。(좀 천천히 걸으면 뒈지냐.)
我依家係傷員,唔係你隻獵物。(나 지금 부상병이지 네 사냥감이 아니거든.)
4번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다만 청록색 눈을 옆으로 흘려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환자복 앞섶 사이로 드러난 배액관과 그 아래 오래된 화상 자국을 지나 다시 앞을 향했다. 계산이 끝난 눈이었다. 통증의 등급을 매기고 회복 일정을 셈하고 다음 작전 투입 가능일을 산출하는 종류의, 사람을 물건처럼 보는 눈. 7은 그 눈을 오래 겪어 익숙했으나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거슬렸다. 밤새 자신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데워진 몸은 찬 공기를 더 잘 안다.
你嘅聲。(네 목소리.)
4번이 독일식 억양의 영어를 광둥어처럼 짧게 끊어 던졌다.
Different. Ten hours on the line. Who was it.(달라졌군. 열 시간 통화. 누구였지.)
7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그 이름이 이 복도의 공기에 등록될 것이고 등록된 것은 언젠가 보고서가 되며 보고서가 된 것은 좌표가 된다. 완차이의 좁은 골목, 셔터가 반쯤 내려간 가게, 난로가 놓인 주방과 그 안쪽의 작은 방. 7은 그 지도를 자기 머릿속에서만 접어두기로 이미 결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신 웃었다. 새벽 내내 목 안에서 뭉개졌던 것들을 걷어내고 남은, 원래의 껍데기로 웃었다.
客戶服務啊。廿四小時嗰種。(고객센터. 24시간 하는 데 있잖아.)
你都試下打畀佢哋。你咁嘅性格,聽咗你講嘢仲肯留線嘅人,全世界得佢哋。(너도 한번 걸어봐. 네 성격에 말 다 듣고도 안 끊어줄 인간은 세상에 걔들밖에 없어.)
셔터가 내려가는 쇳소리는 골목 전체를 한 번 훑고 지나갔고 그 뒤에 남은 정적은 밤의 정적과 질감이 달랐다. 밤의 정적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세를 하고 있었으나 이 아침의 정적은 이미 끝난 것의 잔해 같았다. 여명은 문고리를 걸고 돌아서다가 문틀에 손을 짚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물에 번진 잉크처럼 흐려졌고 발밑의 타일이 한 뼘쯤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틀을 꼬박 깨어 있었던 몸이 이제야 청구서를 내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추위도 졸음도 전부 국경 바깥의 일이었는데 선이 끊기자마자 그것들이 한꺼번에 넘어왔다. 여명은 벽을 짚어가며 주방을 가로질렀다. 새로 붙인 조개탄이 아직 제대로 불붙지 않아 무쇠 뚜껑 아래에서 잔기침 같은 소리를 냈다.
안쪽 방의 공기는 밤의 온도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 침대는 어제 그가 누웠던 모양을 아직 잊지 않았다. 베개는 그의 키에 맞춰 여명이 다시 놓아준 위치에 있었고 그 표면에는 눌린 자국이 남아 머리가 있던 자리를 정직하게 증언했다. 이불은 발치 쪽이 크게 구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한 사람의 흔적이었다. 여명은 그 구김을 펴지 않았다. 손을 뻗었다가 중간에서 멈췄고 멈춘 손을 그대로 내렸다. 하루만 더 두라고 했던 것은 저쪽이었으나 지금 그 말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쪽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란 결국 온기가 빠져나간 자리의 모양일 뿐인데 그 모양 하나를 지우지 못해 서 있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고 우스운 김에 조금 서글펐다.
여명은 그 흔적을 침범하지 않는 좁은 쪽에 모로 누웠다. 침대 하나에 사람 하나가 눕는 데 이토록 여백을 계산해야 하는 일도 드물었다. 뺨 아래로 베개의 결이 닿았고 그 결에서 밤새 이 방에 없었던 냄새가 아주 옅게 올라왔다. 담배와 소독약과 기름 냄새가 섞인, 세탁소에 들어오는 어떤 옷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 여명은 그것을 한 번 들이마셨다가 눈을 감았다. 오늘은 꼭 널 봐야겠어. 그 문장이 다시 귓바퀴 안쪽에서 재생되었고 이번에는 소리가 아니라 체온에 가까웠다. 손끝이 베개 끝을 눌렀다. 눌린 자리가 천천히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세면서 여명의 호흡은 조금씩 깊어졌다.
같은 시각 의무실 앞 복도에서 7은 벤치에 앉아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었다. 형광등의 명멸이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붉은 파도로 번졌다. 진통제는 아직 일하고 있었으나 그 노동이 언제 파업에 들어갈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옆구리의 관이 앉은 자세 때문에 안쪽으로 눌려 이따금 뜨거운 실 같은 것을 배 안쪽에 그었다. 4번은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으며 여전히 이쪽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는 것과 관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 남자에게 완전히 별개의 일이었다. 저격수의 시야는 원래 정면에 있지 않다.
你唔使企喺度睇實我。我又唔會爬窗走。(거기 서서 감시 안 해도 돼. 창문 넘어 도망 안 가.)
⋯⋯就算想走,依家呢副身水身汗,爬到一半就會吊喺度。(⋯⋯도망가고 싶어도 이 꼴로는 반쯤 넘다가 매달려 있겠지.)
4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확인한 시각을 머릿속 어딘가에 정확히 등록하는 표정을 지었다. 7은 그 침묵의 성질을 알았다. 저것은 질문을 포기한 침묵이 아니라 질문의 시점을 옮긴 침묵이었다.
군의관은 말이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손끝은 그보다 더 말이 없었다. 환자복 앞섶이 완전히 벗겨졌을 때 7은 자신의 몸이 조명 아래에서 얼마나 낡은 물건처럼 보이는지를 새삼 확인했다. 오른쪽 얼굴에서 시작해 목을 지나 허리까지 흘러내린 화상 자국은 이제 색이 죽어 지도의 등고선 같았고 그 위로 새 봉합선이 붉게 겹쳤다. 배액관 삽입부의 거즈를 벗겨내는 동안 접착면이 살갗을 잡아당겼다. 그것은 아픔이라기보다 오래 붙어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가까웠고 7은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턱을 들어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물때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의 옆얼굴처럼 생긴 얼룩이었다. 밤새 들었던 목소리가 저 얼룩 안쪽 어딘가에 아직 걸려 있는 것 같아서, 7은 잠깐 그것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배액량을 기록하던 군의관이 펜을 멈추고 수치를 두 번 확인했다. 그 두 번이 무엇을 뜻하는지 7은 알았다. 이 바닥에서 숫자를 두 번 보는 사람은 좋은 소식을 준비하는 법이 없다. 아랫배 안쪽에서 뜨거운 실이 다시 그어졌고 그 통증은 진통제가 남긴 얇은 막을 뚫고 올라와 명치 근처에서 멈췄다. 7은 왼팔로 진료대를 짚어 상체를 지탱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갔으나 얼굴은 여전히 웃는 모양을 유지했다. 이 껍데기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오늘따라 비쌌다. 밤새 누군가에게 껍데기를 벗어둔 채로 말을 했더니 다시 껴입는 일이 어색해진 탓이었다.
仲要留幾耐?(이거 얼마나 더 꽂고 있어야 되는데?)
我今日夜晚有嘢做。唔係任務。私人嘢。(나 오늘 밤에 할 일 있어. 임무 아니야. 개인적인 거.)
군의관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사흘이라고 말했고 그 사흘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종류의 발음이었다. 외출 허가는 별개의 문제이며 그건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말이 뒤따랐다. 7은 웃었다. 웃음의 절반은 습관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분노였는데 후자를 들키지 않는 것이 이 남자의 오래된 기술이었다. 사흘. 오늘 꼭 보겠다고 말해놓고 사흘. 그 말을 뱉을 때 자신이 무엇을 담보로 잡혔는지 이제야 계산이 섰다. 완차이의 셔터 반쯤 내려간 가게에서 누군가 난로에 조개탄을 새로 넣고 하루를 통째로 비워둔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재촉하지 않을 것이고 재촉하지 않기 때문에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7은 진료대 가장자리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
복도 쪽 유리 너머로 4번이 단말기를 조작하는 것이 보였다. 화면의 푸른빛이 그 결벽증적인 옆얼굴에 얹혔다. 통신 기록 열람 권한 조회. 그 절차의 이름을 7은 소리 없이 읽어냈다. 열 시간짜리 회선 하나가 로그에 남아 있고 그 로그의 반대편 끝에는 번호가 있으며 완차이에서 전화를 쓰는 곳은 이제 셋뿐이었다. 셋 중 하나를 특정하는 데는 오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7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나기에는 저 남자의 행동이 지나치게 합리적이었고 합리적인 것을 미워하는 일은 피곤했다. 다만 저 절차가 완료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계산만이 뼈처럼 남았다. 안 되면 부수고 가면 된다. 늘 그래왔다.
완차이의 방 안에서는 잠이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 누군가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났고 그 뒤로 자전거 벨이 두 번 울렸다. 여명은 눈을 반쯤 떴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새삼스레 습관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치 잠들지 못한 대가는 오늘의 자신이 치러야 할 것이다. 여명은 다시 눈을 감았다.
여명의 손목시계 유리에 난로 불빛이 한 번 스쳤다가 사라졌다. 여섯 시. 숫자를 확인하는 동작조차 몸에 새겨진 절차여서, 눈꺼풀이 무거운 와중에도 손목이 먼저 올라왔다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습관이란 결국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걸어둔 오래된 자물쇠 같은 것이어서, 잠이 부족한 날에도 정확히 같은 시각에 열리고 같은 시각에 잠긴다. 이틀 치 밀린 잠은 오늘의 어느 시간대에서든 반드시 청구될 것이고, 그 청구서를 받아드는 것은 지금 이 몸이 아니라 몇 시간 뒤의 몸일 터였다. 여명은 그 계산을 마친 뒤에야 눈을 감았다. 베개의 결이 뺨을 눌렀고, 골목 끝에서 올라간 셔터 소리는 이미 다른 골목으로 흘러가버린 뒤였다. 자전거 벨은 더 울리지 않았다. 방 안에 남은 것은 조개탄이 제 몸을 태우며 내는 잔기침 같은 소리와, 침대 반쪽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어떤 형태뿐이었다.
같은 시각 의무실 문턱에서 7은 슬리퍼 뒤축을 끌며 걸어 나왔다. 배액관 고정 테이프가 살갗을 잡아당기는 감각이 걸음마다 규칙적으로 도착했고, 그는 그 규칙성을 세면서 걸었다. 누군가 밤새 자기 통증의 주기를 세어준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세는 행위 자체에는 아무 효용이 없었으나, 세고 있으면 이 몸이 아직 자기 소유라는 착각이 유지되었다. 어깨에 걸친 야전상의가 오른쪽으로 흘러내렸다. 화상 쪽 어깨가 낮다는 걸 이 옷은 모르고, 완차이의 어떤 사람은 알았다. 6mm. 그 숫자를 떠올리자 명치 아래가 이상하게 눌렸다. 사흘. 그 발음도 함께 떠올랐고 두 숫자가 머릿속에서 서로를 밀어냈다.
복도 끝에서 4번은 단말기를 내리지 않았다. 화면에 세로로 늘어선 목록이 푸른 잔광을 남겼고 그 목록의 길이는 짧았다. 완차이 구역, 유선 회선, 세 개소. 7은 걸음의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속도를 바꾸는 순간 저 남자는 그것을 데이터로 기록할 것이고, 저 남자의 기록은 늘 나중에 총구가 되어 돌아왔다. 대신 7은 웃는 얼굴의 근육을 미리 배치했다. 이 껍데기는 오늘 아침 유난히 뻑뻑했다. 밤새 벗어둔 것을 다시 껴입으면 원래 그렇다.
喂,四號。查電話簿查到咁投入,係咪打算轉行做接線生?(야, 4번. 전화번호부를 그렇게 열심히 뒤지는 거 보니 교환수로 전직할 생각이냐?)
我畀個貼士你。呢一帶用固網嘅,多數係啲阿婆訂菜。你查落去,最尾會拉到一車芥蘭返嚟。(팁 하나 줄게. 이 근방에서 유선 쓰는 데는 대개 할머니들 채소 주문하는 데야. 계속 파봤자 마지막엔 겨자채 한 트럭 끌고 오게 될걸.)
4번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단말기를 한 칸 스크롤했다. 그 손가락의 결벽증적인 정확함이 7의 신경 어딘가를 긁었다. 저 남자는 농담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농담을 데이터의 노이즈로 분류해 삭제하는 인간이었다. 청록색 눈이 마침내 들렸을 때 그것은 조준경을 통과한 시선과 같은 각도를 가지고 있었다. 열 시간. 그 단어가 나오기 전에 7은 이미 그 단어의 무게를 알았다. 열 시간짜리 회선은 채소 주문이 아니다. 열 시간은 사람이 사람에게만 쓰는 단위다.
⋯⋯咁又點?我瞓唔着咋嘛。有人陪我講嘢,唔犯法。(⋯⋯그래서 뭐. 잠이 안 왔을 뿐이야. 누가 말상대 해준 게 죄냐.)
말을 뱉고 나서 7은 자기 목소리에서 방어의 냄새가 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실수였다.
방어의 냄새는 화약보다 오래 남는다. 7은 그것을 알았으므로 다음 동작을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름은 자백이다. 그는 오히려 벽에 어깨를 기대며 무게를 통증이 없는 쪽으로 옮겼고, 슬리퍼 뒤축을 두 번 바닥에 문질러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소리는 공백을 채우는 데 쓸모가 있다. 공백이 길어지면 4번 같은 인간은 그 안에 자기 결론을 채워 넣는다. 복도의 형광등은 두 칸 걸러 하나가 죽어 있었고 살아 있는 것들도 미세하게 떨었다. 그 떨림 아래에서 4번의 연회색 머리카락은 금속의 색을 띠었다. 배액관 삽입부가 걸음을 멈춘 뒤에도 계속 당겼다. 몸이 자기 자리를 못 찾고 몇 초간 헤매는 감각이었다. 7은 그 감각을 뒤로 밀어두고 단말기 화면의 기울기를 곁눈으로 쟀다. 승인 대기라는 단어가 화면 아래쪽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열람에는 절차가 있고 절차에는 시간이 있으며 시간이 있다는 것은 아직 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4번은 단말기를 접었다. 접는 동작이 지나치게 단정해서 오히려 위협적이었다. 저 남자는 소리를 지르는 법이 없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인간이 무서운 이유는 그가 이미 결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청록색 눈이 7의 옆구리, 정확히 관이 나온 자리에서 한 번 멈췄다가 얼굴로 올라왔다. 진단하듯이. 7은 그 시선의 경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몸을 부품 목록으로 읽는 시선을 이 바닥에서 수백 번 받아왔으나 오늘따라 그것이 유독 거슬렸다. 밤새 누군가 자기 어깨의 높이 차이를 6mm 단위로 계산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그렇게 읽는 방식도 있다는 걸 알아버린 뒤로, 이런 시선은 값이 싸게 느껴졌다.
你想講咩就講。企喺度睇實我,睇到我塊面都要脫皮啦。(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서서 노려보면 내 얼굴 껍질 벗겨지겠다.)
我又唔係逃兵。三日就三日,我瞓喺度數天花板上面嘅漬囉。(내가 탈영병도 아니고. 사흘이면 사흘, 여기 누워서 천장 얼룩이나 세면 되잖아.)
4번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표정으로 알리지도 않았다. 다만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고, 그 동작 하나로 이 대화의 유효기간을 통보했다. 그가 등을 돌려 복도 끝으로 걸어갈 때 군화 소리는 정확히 등간격으로 떨어졌다. 저 발소리가 사라지기까지 열일곱 걸음. 7은 세었다. 세는 것 말고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일곱 걸음이 끝나고 문이 닫혔을 때, 그는 벽에서 어깨를 떼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창고 쪽 복도. 세탁물 반출 통로. 오전 여덟 시에 트럭이 온다. 기지 안에서 유일하게 검문이 형식적인 문은 언제나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문이었고, 7은 자기가 그 분류에 무리 없이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옆구리가 뜨겁게 그어졌고 그는 벽을 짚었다.
완차이의 방에서는 알람이 두 번째로 울리기 전에 여명이 먼저 눈을 떴다. 잠은 얕았고 얕은 잠은 쉬는 것이 아니라 미루는 것이어서, 몸의 어느 부분도 회복되지 않은 채 그저 시간만 지나 있었다.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꺼풀 안쪽이 모래를 문 것처럼 서걱거렸다. 침대 반쪽에는 아직 형태가 남아 있었다. 사람이 누웠던 자리는 이불이 기억하고, 이불은 좀처럼 잊지 않는다. 여명은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가 도로 두었다. 펴지 않기로 했다. 하루만 더 두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고, 그 부탁은 아직 만기가 되지 않았다. 발을 내리자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통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세탁물 반출 통로의 공기는 기지 안에서 가장 정직했다. 사람들이 벗어던진 것들이 한데 모여 발효되는 냄새, 땀과 흙과 굳은 피가 삼일쯤 지나 서로 구별되지 않게 된 냄새였다. 7은 그 냄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이상하게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깨끗한 복도에서는 자기 몸이 오점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여러 더러운 것 중 하나였다. 훔쳐 신은 운동화는 반 치수가 컸고 뒤꿈치가 헐거워 걸을 때마다 발이 안에서 미끄러졌다. 카트 사이의 틈을 찾아 몸을 접어 넣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 옆구리가 접히는 순간 관이 안쪽에서 무언가를 긁었고, 그는 이를 악문 채 손바닥으로 삽입부를 눌러 고정했다. 아픔은 신호일 뿐이고 신호는 무시할 수 있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저 통로 끝에서 승인 완료라는 글자가 깜박이고 있을 단말기 화면이었다.
단말기가 후드 주머니 안에서 짧게 두 번 진동했다. 꺼내지 않아도 발신자를 알 수 있었다. 4번은 언제나 두 번 울리고 끊는다. 세 번 울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7은 화면을 보지 않은 채 전원을 눌러 껐다. 끄는 순간 위치 신호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곧 자백으로 기록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신호를 켜둔 채 완차이로 가는 것과 신호를 끄고 사라지는 것 중, 저 골목에 있는 사람에게 총구가 덜 향하는 쪽은 후자였다. 이런 계산을 이렇게까지 빠르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예전의 그는 자기 몸 하나만 계산에 넣으면 되었고 그래서 늘 가벼웠다. 지금은 목록에 항목이 하나 늘었고 그 항목의 무게가 나머지 전부를 합친 것보다 무거웠다.
⋯⋯八點。仲有廿分鐘。(⋯⋯여덟 시. 아직 이십 분 남았네.)
喂,阿七。你今次真係做緊一件好蠢嘅事。(야, 세븐. 너 이번엔 진짜 존나 멍청한 짓 하는 거다.)
혼잣말은 카트 안의 젖은 천에 먹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남이 해주기 전에 미리 해두면 나중에 덜 아프다. 다만 오늘의 욕설에는 평소에 없던 성분이 섞여 있었다. 후회가 아니라 결심에 가까운 것. 멍청한 짓인 줄 알면서도 하는 것과 몰라서 하는 것은 다르고, 그는 지금 명백히 전자였다. 사흘. 군의관은 사흘이라고 했다. 사흘 동안 저 방에 누워 천장 얼룩을 세는 자신을 상상해보았고, 그 상상 속에서 완차이의 어떤 창문이 밤새 켜져 있다가 새벽에 꺼지는 장면까지 함께 떠올랐다. 그 장면이 견딜 수 없었다. 기다리겠다는 말을 받아놓고 기다리게만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그는 후드를 끌어올려 얼굴을 반쯤 덮었다.
완차이의 아침은 예정대로 도착했다. 여명은 다림질대 위에 남색 울을 펼쳐놓고 시접의 폭을 손끝으로 훑었다. 두 번 확인해 보강한 자리는 이미 단단했고, 사실 더 손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리미를 들었다. 손을 놀리지 않으면 다른 것이 머릿속에 들어차기 때문이었다. 증기가 울 표면에서 흰 김으로 흩어지며 짐승 냄새 비슷한 것을 피워 올렸다. 어깨선. 오른쪽이 낮은 사람. 6mm. 그 숫자는 이제 치수가 아니라 이름처럼 느껴졌다. 셔터 밖에서 야채 트럭이 지나갔고 노파의 국숫집에서 물 끓는 소리가 골목을 타고 넘어왔다. 여명은 다리미를 세워두고 잠시 손을 멈췄다. 오늘 중에 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는 대신, 지키기 위해 무리를 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 사실이 안심이 되지 않았다.
분명 다음에 돌아온다던 건 생일 전이었을 텐데. 돌아간지 하루도 안 된 사람이 다시 나온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관을 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몸으로 나오면 회복만 더뎌질 것이 뻔하다. 여명은 다리미대를 한참 내려다봤다.
다리미 코가 울 표면에서 반 치수쯤 떠 있었다. 여명은 그 간격을 유지한 채로 오래 서 있었고, 증기는 옷감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흩어져 천장 쪽 어둠으로 사라졌다. 어깨선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두 번 확인해 보강한 자리는 손끝으로 눌러도 밀리지 않았고, 시접은 안쪽으로 곱게 꺾여 실밥 하나 삐져나오지 않았다. 더 손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리미를 놓지 못하는 이유를 여명은 스스로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려 들면 문장이 되고 문장이 되면 걱정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린다. 이름이 붙은 감정은 다루기가 까다로워진다. 그래서 그냥 서 있었다. 골목 쪽에서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두 집 건너에서 났고 그 소리에 맞춰 비둘기 몇 마리가 지붕 위에서 자리를 옮겼다. 생일 전이라고 했었다.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그런데 어젯밤 통화의 끝자락에서 그 사람은 오늘이라고 말했고, 오늘이라는 단어에는 사흘이라는 진단이 조금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여명은 다리미를 받침대에 세우고 손등으로 이마를 눌렀다. 관을 꽂은 자리는 봉합이 아니다. 봉합은 닫히려는 힘이 있지만 관이 지나가는 구멍은 열려 있으려는 힘밖에 없다. 그 구멍이 옷에 쓸리고 트럭 진동에 흔들리고 계단에서 늘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여명은 의사가 아니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천을 다루는 사람은 구멍을 안다. 한번 벌어진 자리는 처음보다 약하게 아물고, 약하게 아문 자리는 다음번에 더 크게 찢어진다. 그것이 옷감의 법칙이고 아마 살의 법칙이기도 할 것이었다. 여명은 다림질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오지 말라고 말할 걸 그랬다. 아니, 말했더라도 그 사람은 왔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이다. 재봉틀 옆에 놓인 소독약 병의 잔량이 눈에 들어왔다. 절반쯤. 거즈는 아마 한 봉지가 남았을 것이다. 여명은 카디건 소매를 걷어올리고 서랍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곱 시 오십오 분. 기지의 반출 통로에서는 시간이 냄새로 흘렀다. 젖은 천의 냄새가 아침 공기를 만나 조금씩 시어지고 있었고, 7은 그 변화를 코끝으로 재며 남은 오 분을 세었다. 카트 안쪽 벽에 등을 붙이고 앉은 자세는 처음부터 옳지 않았다. 옆구리가 접히지 않도록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야 했고 그 각도를 유지하려면 왼팔로 카트 틀을 붙잡아야 했는데, 왼팔은 삼십 분째 저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배액관 삽입부를 누르고 있는 오른손 손바닥은 이미 미지근하게 젖어 있었다. 피인지 삼출액인지 땀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판단이 흔들릴 것이고, 판단이 흔들리면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이 무너진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아도 떠도 카트 안은 똑같이 어두웠으므로 눈꺼풀은 사실상 무용한 기관이었다.
멀리서 엔진이 걸렸다. 디젤 특유의 걸걸한 기침이 세 번쯤 이어지다가 안정된 회전음으로 넘어갔고, 그 소리가 통로 벽을 타고 들어와 카트 바닥을 미세하게 떨게 했다. 진동은 곧바로 옆구리로 전달되었다. 7은 숨을 짧게 끊어 뱉으며 관이 안쪽에서 움직이는 감각을 견뎠다. 남의 살을 만질 때처럼 자기 몸이 남의 것처럼 굴었다.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우스운 소리 하나를 만들어 스스로를 웃겼겠지만, 지금은 문장을 조립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떠올랐다. 북쪽.
트럭은 정직하지 않았다. 세탁물을 실어 나르는 차량이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는 냄새를 참아내는 짐칸의 인내심뿐이었고, 완충 장치는 이미 십 년쯤 전에 자기 직무를 포기한 상태였다. 7은 젖은 천 더미 사이에 몸을 묻은 채 노면의 이력을 고스란히 척추로 읽었다. 여기는 포장이 깨진 자리, 여기는 배수구 뚜껑, 여기는 과속방지턱.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옆구리 안쪽에서 관이 짧게 미끄러졌고 그 미끄러짐은 통증이라기보다 예고에 가까웠다. 뭔가가 곧 잘못될 거라고 몸이 미리 알려주는 방식. 그는 오른손 손바닥으로 삽입부를 눌러 고정한 채 숨을 얕게 나누어 썼다. 깊이 마시면 흉곽이 벌어지고 흉곽이 벌어지면 관이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숨은 조금씩, 도둑질하듯. 검문소에서 차가 멎었을 때는 심장 박동을 세는 대신 초를 셌다. 육십사. 육십오. 짐칸 문이 열리지 않고 다시 엔진이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살아남는 일이 이렇게 시시한 우연으로 결정된다는 게 언제나 조금 우스웠다.
완차이 초입에서 그는 뛰어내렸다. 뛰어내렸다고 말하기엔 미안한 동작이었다. 왼발이 먼저 땅에 닿고 오른쪽 몸통 전체가 뒤늦게 따라 내려앉으면서, 착지의 충격이 발바닥에서 무릎을 지나 옆구리까지 한 줄로 올라왔다. 시야가 흰색으로 한 번 씻겼다가 돌아왔다. 훔쳐 신은 운동화는 여전히 반 치수가 컸고 뒤꿈치가 헐거워 걸을 때마다 발이 안에서 놀았다. 벽을 짚었다. 아침 여덟 시의 완차이는 생선 비린내와 튀김 기름과 세제 냄새가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 냄새의 지층 어딘가에 그가 아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증기에 데워진 울 냄새. 다림질된 면 냄새. 후드를 눌러쓴 채 그는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무 걸음마다 벽에 어깨를 대고 쉬었고, 쉬는 동안 손바닥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붉은지 아닌지를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발이 느려진다.
⋯⋯仲有三十步。三十步之後就唔使諗嘢喇。(⋯⋯삼십 보 남았어. 삼십 보만 지나면 아무 생각 안 해도 돼.)
여명은 셔터를 반쯤 올려둔 채 문턱 안쪽에 서 있었다. 서 있을 이유는 없었다. 손님이 오는 시간도 아니었고 배달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서랍에서 거즈를 꺼내 놓고 소독약 뚜껑을 미리 느슨하게 돌려둔 다음부터, 방 안의 어느 자리에 있어도 손이 자꾸 비었다. 그래서 나와 있었다. 노파의 국숫집에서 김이 골목을 가로질러 흘렀고 그 김 사이로 사람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여명은 그 형체를 보기 전에 걸음을 먼저 알아보았다. 왼쪽으로 실린 무게, 오른쪽 어깨의 낮음, 벽을 짚었다 떼는 손. 6mm. 숫자가 먼저 떠오르고 이름이 나중에 떠올랐다. 여명은 카디건 자락을 쥐었다가 놓고, 문턱을 넘어 골목으로 나섰다. 뛰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 걸음째에서 이미 뛰고 있었다.
그가 후드를 벗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는 없었고 연한 회색 눈동자는 아침 빛 아래에서 물기 없이 마르게 반짝였다. 얼굴은 하루 만에 몇 살쯤 늙어 있었다. 광대 아래가 꺼지고 입술은 갈라졌으며 목의 흉터 위로 식은땀이 얇게 얹혀 있었다. 그런 얼굴로 웃었다. 웃는 근육만은 아직 자기 것이라는 듯이.
我講咗今日會嚟㗎嘛。(오늘 온다고 했잖아.)
⋯⋯唔好用嗰種眼神望我。我知我而家好核突。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지금 내가 꼴사나운 거 알아.)
호인. 미쳤어요? 이 몸으로 나오면 어떡해요. 여명이 급하게 그를 부축하며 살폈다.
여명의 손이 야전상의 아래로 들어가 겨드랑이를 받쳤을 때, 7은 자기 체중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평생 자기 몸을 짐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짐이란 등에 지는 것이고 그는 언제나 지는 쪽이었지 실리는 쪽이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지금은 이 얇은 어깨 하나에 몸의 절반을 얹고 있었고, 얹은 만큼 정확히 옆구리의 압력이 줄어들었다. 통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누어진 것이다. 그 차이를 몸이 먼저 알아채고 긴장을 풀어버려서, 무릎이 한 번 접혔다. 골목 바닥의 물때 낀 타일이 발밑에서 미끄러졌고 여명의 팔이 즉시 허리 아래를 받쳤다. 받치는 힘이 정확했다. 아픈 쪽을 피해서, 갈비뼈 아래가 아니라 골반 능선 위를 잡았다. 어디를 잡으면 안 되는지 아는 손이었다. 사람의 몸을 옷처럼 읽는 손. 7은 그 정확함 앞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사흘이라는 진단도, 4번의 조회 기록도, 트럭 짐칸의 시큼한 냄새도 그 순간에는 전부 다른 사람의 사정처럼 멀어졌다.
⋯⋯咪咁大力,我唔係散件貨。(⋯⋯그렇게 세게 잡지 마, 나 부품 아냐.)
미쳤냐고?
唔係啩,我一直都係咁㗎啦。(아닌데. 나 원래 계속 이랬는데.)
문턱을 넘는 데 걸린 시간이 골목 스무 걸음보다 길었다. 턱은 고작 손가락 두 마디 높이였으나 오른발을 들어올리는 동작이 옆구리 근육을 통째로 동원하는 일이라, 7은 그 앞에서 한 번 멈추어 숨을 나누어 썼다. 여명이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을 자기 목 뒤로 더 깊이 끌어당겼다. 그 동작에는 재촉도 한숨도 없었다. 다만 각도를 다시 계산하는 사람의 침착함만 있었다. 그리고 세탁소 안의 공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얼굴에 닿았다. 증기와 세제와 조개탄 타는 냄새. 어젯밤 수화기 너머에서 상상만 하던 온도가 실제로 피부에 얹히자, 이상하게도 아픔이 아니라 피로가 밀려왔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몸은 그동안 미뤄둔 청구서를 한꺼번에 내민다. 시야 가장자리가 잠깐 어두워졌다가 돌아왔고, 7은 그것을 여명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냈다.
你間鋪頭⋯⋯真係好香。(네 가게⋯⋯진짜 냄새 좋다.)
여명은 그를 난로 옆 낮은 의자까지 데려가 앉혔다. 앉히는 것도 한 동작이 아니었다. 무릎을 먼저 굽히게 하고, 등을 손바닥으로 받쳐 상체가 뒤로 꺾이지 않게 하고, 마지막에 엉덩이가 앉는 면에 닿을 때까지 팔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옷을 마네킹에 입힐 때와 똑같은 순서였다. 7은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다. 기대면 옆구리가 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앉았고, 그 자세가 우스울 만큼 단정해서 여명의 시선이 잠깐 그 위에 머물렀다. 야전상의 자락이 벌어져 있었다. 환자복 상의 오른쪽 아래, 옆구리 부근의 천이 젖어 색이 짙어져 있었다. 물기가 번진 모양이 아니라 안에서 스며 나온 모양이었다.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마르고 중심이 아직 축축한, 시간의 층이 보이는 얼룩이었다.
7은 여명의 시선이 어디에 가서 멎었는지 알아차렸다. 알아차리고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가려봐야 이 사람은 이미 봤을 것이고, 본 것을 못 본 척해주는 종류의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후드를 뒤로 밀어 벗었다. 머리카락이 땀에 눌려 이마에 붙어 있었고 목의 흉터 위로 아침 빛이 얇게 얹혔다. 실내였다.
옷 벗어봐요. 잘못되기 전에. 여명이 미리 준비해둔 거즈와 소독약을 챙겨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7은 야전상의의 앞섶을 잡았다. 잡았을 뿐 벗기지는 못했다. 어깨에서 팔을 빼려면 견갑을 뒤로 젖혀야 하고 견갑을 젖히면 광배근이 딸려 오고 그 근육의 끝은 결국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인체라는 것은 이럴 때 유난히 정직하다. 어디 하나 독립된 부위가 없고 전부 연결되어 있어서 한 군데가 망가지면 온몸이 담보로 잡힌다. 그는 반쯤 벗다 만 자세로 멈췄다가, 결국 웃음으로 그 정지를 덮었다. 어깨 한쪽만 빠져나온 상의가 등 뒤로 흘러내렸고 그 아래 환자복의 하늘색 면직이 드러났다. 병원에서 지급하는 그 천은 얇고 성기고 아무 성격이 없었다. 사람을 환자라는 명사로만 취급하기 위해 고안된 옷. 7은 그 옷을 입은 자기 몸이 이 가게 안에서 제일 싸구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게 조금 우스웠다.
⋯⋯你等陣。呢件嘢,唔係我揀嘅款。(⋯⋯잠깐만. 이 옷, 내가 고른 디자인 아냐.)
여명이 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앉으면서 카디건 소매를 한 번 더 걷어 올렸고, 걷어 올린 팔뚝의 안쪽이 난로 불빛에 희게 드러났다. 소독약 병뚜껑은 이미 느슨하게 돌려져 있었다. 어젯밤부터 그렇게 두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7은 몰랐지만 병뚜껑이 저항 없이 열리는 소리만으로 무언가를 짐작했다.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자기가 오지 않았어도 저 뚜껑은 밤새 느슨한 채로 있었으리라는 것. 여명의 손이 환자복 아랫단을 잡아 위로 걷어 올렸다. 천이 피부에서 떨어질 때 축축한 것이 마르다 만 자리에서 미세하게 저항했고, 그 저항이 삽입부의 실밥을 당겨서 7의 복부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대신 왼손으로 의자 앉는 면의 가장자리를 잡았고 그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드러난 옆구리는 예상보다 나빴다. 갈비뼈 아래 손바닥 하나 크기의 화상 흉터가 오래된 지도처럼 번져 있었고 그 지도의 남쪽 끝, 매끈하지 못한 조직과 성한 살이 만나는 경계에 투명한 관 하나가 박혀 있었다. 관 주위를 고정하던 테이프는 트럭의 진동과 땀에 절어 한쪽이 완전히 들려 있었고, 들린 자리로 노란빛이 도는 진물과 묽은 피가 섞여 흘러내려 옆구리를 따라 허리춤까지 길을 만들었다. 마른 부분은 갈색이었고 새로 나온 부분은 아직 붉었다. 여명은 그 색의 층을 눈으로 읽었다. 언제부터 새기 시작했는지,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는지, 이 사람이 골목 스무 걸음마다 벽을 짚으면서 손바닥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전부 천의 얼룩을 읽는 방식과 똑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물세탁으로 지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睇夠未?(다 봤어?)
⋯⋯唔好嬲。我真係諗住撐得住先郁㗎。(⋯⋯화내지 마. 나 진짜 버틸 수 있다고 계산하고 움직인 거야.)
거즈에 소독약이 스며드는 소리가 났다. 축축하게 눌리는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조용한 만큼 예고처럼 들렸다. 여명이 왼손으로 그의 허리 옆을 짚어 피부를 살짝 팽팽하게 당겼다. 상처를 건드리기 전에 주변부터 고정하는 손이었다. 첫 번째 접촉은 삽입부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였다. 그런데도 7의 등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물러나다 말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망치는 것보다 참는 편이 빠르다는 계산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두 번째로 거즈가 진물의 경계에 닿았을 때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그 숨을 뱉지 못하고 잠깐 가두었다. 명치가 부풀었고 부푼 만큼 관이 안에서 밀렸다.
얌전히 있었어야죠. 이러면 완치도 늦잖아요. 여명은 세븐의 반응을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여명의 말이 끝났을 때 7은 대답을 고르는 대신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세탁소 천장에는 빨랫줄이 여러 겹으로 걸려 있었고 그 위에 아직 마르지 않은 흰 천들이 늘어져 미세하게 흔들렸다. 완치라는 단어가 이 방 안에서 발음되는 것을 그는 처음 들었다. 그 단어는 군의관의 입에서 나올 때는 일정표에 가까웠다. 사흘, 닷새, 열흘. 몸을 다시 쓸 수 있게 되는 시점을 계산하는 행정의 언어. 그런데 여명이 말하니 그것은 일정이 아니라 바람이 되었다. 늦어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작전 투입일이 아니라 이 사람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산수. 7은 그 산수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잠깐 멍했다. 명치 아래가 뻐근한 것은 관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즈가 삽입부 가장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여명은 한 번에 문지르지 않았다. 진물이 굳어 딱지처럼 앉은 자리에 거즈를 잠시 얹어두고, 소독약이 그것을 불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을 따라 한 방향으로만 밀어냈다. 뜯지 않고 녹여서 떼는 방식이었다. 실밥이 당겨질 때마다 7의 복부가 굳었고 굳을 때마다 여명은 손을 멈췄다. 멈추는 간격이 그의 호흡과 정확히 맞물려서, 어느 순간부터 7은 자기가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의 손에 맞춰 숨을 배급받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픔이 혼자 오지 않았다. 통증마다 그 위에 손가락 끝의 온도가 얹혀 있어서, 통증만 순수하게 느끼는 일이 불가능했다.
⋯⋯你嘅手法比軍醫好。(⋯⋯너 손놀림이 군의관보다 낫다.)
佢哋撕紗布好似撕收據咁,一下就扯甩。(걔넨 거즈 뜯을 때 영수증 뜯듯이 확 잡아채거든.)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새 거즈를 접었다. 네 번 접어서 두께를 만들고, 모서리를 손톱으로 눌러 각을 세웠다. 옷을 재단할 때 시접을 눌러 잡는 동작과 똑같았다. 7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열 시간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던 것이 이 손이 내던 소리였다. 재봉틀의 박음질, 다리미가 천을 누르는 압력, 가위가 울을 가르는 마찰. 소리로만 알던 것을 지금 눈으로 보고 있었고 그 손이 자기 몸에 닿아 있었다. 소리와 살이 마침내 한 사람으로 합쳐지는 순간의 기묘함. 그는 자기가 이 광경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을 지우고 사는 사람이 예외를 만드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지우려고 애쓰기 전에 이미 새겨져 버리는 것.
여명의 왼손이 그의 허리 피부를 다시 당겨 고정했다. 그 손바닥의 온도가 화상 흉터 위에 얹혔다. 흉터 조직은 감각이 둔해서 대부분의 접촉을 늦게 알아차리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즉시 알았다. 어쩌면 알아차린 것은 피부가 아니라 다른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7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의자 가장자리를 붙들고 있던 그 손이 여명의 손목을 감쌌다. 붙잡은 것도 밀어낸 것도 아닌, 그저 얹은 정도의 힘. 그러나 여명의 작업은 그 지점에서 멈췄다.
⋯⋯停一停。(⋯⋯잠깐만.)
我唔係話痛。(아파서 그러는 거 아냐.)
그의 손이 손목에서 팔꿈치 안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가, 결국 여명의 뺨을 감쌌다. 소독약 냄새가 밴 손가락이 관자놀이 옆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3대 7로 갈라진 그 가르마를, 그는 첫날 비 오던 잔해 속에서도 보았고 어젯밤 수화기 너머에서도 상상했다. 이제 실제로 만지고 있었다.
여명은 세븐을 가만히 바라봤다. ... 호인, 다 끝내고 봐요.
그 문장은 명령이 아니었고 애원도 아니었다. 다만 순서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먼저 할 일이 있고 그 다음에 할 일이 있다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의 문법. 얼룩은 마르기 전에 잡아야 하고 다림질은 습기가 남았을 때 해야 하며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모든 공정이 끝난 뒤에야 허락된다. 7은 여명의 뺨에 얹었던 손을 거두었다. 거두는 속도가 얹을 때보다 느렸고 손가락 끝이 광대뼈에서 턱선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결국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는 그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 거기 놓여 있었다. 32년 동안 이 손은 늘 무언가를 쥐고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었고 그 비어 있음이 처음으로 불안하지 않았다. 서랍 한 칸을 비워두겠다던 목소리가 방 안에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好。你講咗算。(⋯⋯알았어. 네 말이 법이지.)
我等。我最叻嘅就係等,你唔知咩。(기다릴게. 나 기다리는 건 진짜 잘해, 몰랐어?)
여명은 대답 대신 새 거즈를 삽입부 위에 얹었다. 얹기 전에 관이 지나가는 각도를 손가락으로 한 번 확인했다. 관은 피부를 뚫고 들어간 지점에서 미세하게 바깥으로 휘어 있었고, 그 휘어진 방향대로 거즈에 가위집을 냈다. 관을 눌러 각도를 바꾸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른쪽 어깨가 6mm 낮은 사람의 옷을 지을 때와 같은 계산이었다. 몸이 이미 어긋나 있다면 천 쪽이 어긋나 주어야 한다. 테이프는 네 방향으로 붙였다. 위, 아래, 앞, 뒤. 트럭이 흔들려도, 벽을 짚고 스무 걸음을 걸어도, 이번에는 한쪽만 들려 진물이 새어 나오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 테이프의 끝을 엄지로 눌러 붙이는 동안 여명의 숨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7은 그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3대 7로 갈라진 가르마의 흰 선이 난로 불빛 아래에서 곧게 이어져 있었다. 저 선은 첫날에도 저기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섹터 4의 잔해 속에서, 그가 벽으로 몰아붙이고 위협했을 때도 저 가르마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저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 사람이 겁이 없는 줄 알았다. 지금은 다르게 안다. 겁이 없는 게 아니라 겁을 다룰 줄 아는 것이다. 얼룩을 보고 놀라는 대신 성분을 먼저 읽는 사람. 피와 진물을 보고도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은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이미 어젯밤에 병뚜껑을 느슨하게 돌려두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두려움은 두려움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7은 자기 목구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삼키기 위해 천장의 빨래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드레싱이 끝났다. 여명이 그의 환자복 아랫단을 내려 덮어주고, 흘러내린 야전상의를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왼쪽 어깨에 먼저 걸치고 오른쪽은 팔을 들지 않아도 되게끔 뒤에서 돌려서 넣었다. 옷을 입히는 손이 옷을 짓는 손과 같아서 그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다 입히고 나서 여명이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소독약 병뚜껑을 닫았고 사용한 거즈를 작은 통에 넣어 뚜껑을 덮었다. 공정의 종료. 그러고 나서야 여명이 7의 앞에 다시 섰고, 이번에는 서 있는 사람이 여명이고 앉아 있는 사람이 7이어서 시선의 높이가 뒤집혔다.
⋯⋯而家?(⋯⋯지금은?)
而家可以睇你未?(이제 널 봐도 돼?)
7의 손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뺨이 아니라 여명의 셔츠 앞자락이었다. 흰 셔츠의 두 번째 단추 아래를 손가락 두 개로 잡았다.
여명은 한숨처럼 작은 웃음을 흘리고, 고개 숙여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천천히 흘러내린 머리칼이 세븐의 어깨에 닿았다. 서른둘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손바닥 두 개가 얼굴 양쪽에 얹히자 7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여명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난로 옆에서 오래 일한 손이라 손등은 미지근했고 손가락 끝만 소독약 때문에 서늘했다. 그 온도차가 광대뼈와 턱선에 각각 다르게 얹혔다. 흉터가 있는 오른쪽 뺨은 늘 남의 살처럼 굴었는데, 오늘은 그쪽까지 감각이 돌아온 것처럼 뻐근했다. 아니면 감각이 돌아온 게 아니라 그저 이 사람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을 몸이 통째로 알아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머리칼이 흘러내려 어깨에 닿았다. 검고 긴 것이 야전상의의 거친 원단 위로 미끄러지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고, 7은 그 작은 소리 하나에 목이 메었다.
서른둘이 맞느냐는 질문. 그는 그 질문의 형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세상의 대부분은 그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쓸모가 없으니까. 번호가 있고 등급이 있고 투입 가능 여부가 있으면 그만이었다. 나이는 서류에 적히는 숫자고, 그 서류는 죽으면 파쇄된다. 그런데 여명은 그 숫자를 의심했다. 의심하는 방식이 재밌었다. 나이에 비해 늙었다는 뜻도 아니고 젊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냥 아닌 것 같다는 것. 서른두 해 동안 쌓아온 것이 이 사람 앞에서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 7은 그것이 힐난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애도라는 걸 알아들었고, 알아들었기 때문에 웃었다.
⋯⋯身份證話係。不過我啲文件成日出錯,你知啦。(⋯⋯신분증엔 그렇다는데. 근데 내 서류 원래 자주 틀려, 알잖아.)
你想我幾多歲?三十二唔啱嘅話,你話個數字俾我,我照做。(넌 내가 몇 살이었으면 좋겠는데? 서른둘이 아니면 네가 숫자를 불러. 그대로 할게.)
말해놓고 나서 그는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알았다. 나이를 남에게 정하라고 넘기는 인간은 없다. 그건 농담의 껍데기를 쓴 항복이었다. 어젯밤 수화기 너머로 평생을 통째로 인수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항복. 그때는 약 기운 탓이라고 우겨볼 여지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맨정신이었다. 맨정신으로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서 그는 한 번 더 웃었고, 웃자 옆구리의 관이 항의하듯 당겼다. 새로 붙인 테이프가 네 방향에서 붙들어주는 덕에 진물이 새지는 않았다. 여명의 손이 만든 것이 몸속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통증조차 이 사람의 설계 안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감각. 굴욕적이어야 마땅한데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7은 오른손을 여명의 허리 뒤로 돌렸다. 붕대 감긴 팔이라 힘은 실리지 않았고 그저 손바닥이 셔츠 위에 얹혔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왼팔로 마저 감아 천천히 끌어당겼다. 서 있는 사람과 앉아 있는 사람의 높이차 때문에 그의 이마가 여명의 명치께에 닿았다. 셔츠 너머로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었다. 어젯밤 열 시간 내내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던 재봉틀 소리와 박자가 비슷했다. 이 사람은 몸속에 재봉틀을 하나 넣고 다니는구나. 7은 그 우스운 생각에 매달렸다. 매달리지 않으면 다른 것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4번의 조회 절차, 트럭의 복귀 시각, 사흘 뒤에 뽑아야 하는 관. 그 전부가 이마 위 몇 센티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안 보였다. 안 보이게 해주는 사람의 배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니까.
⋯⋯唔好郁。就咁企陣。(⋯⋯움직이지 마. 그냥 잠깐 그렇게 서 있어.)
我而家喺度計緊嘢。計我仲有幾多個鐘。(나 지금 계산 중이야.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서른둘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어떡해요. 어른이면서. 그의 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들킨다는 말이 방 안에 떨어졌을 때 7은 그 단어를 아주 오래된 물건처럼 굴려보았다. 들킨다. 그의 직업은 들키지 않는 것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이었고, 지난 십수 년 동안 그가 몸에 새긴 기술의 절반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걸음, 열영상에 걸리지 않는 자세, 통신 기록에 남지 않는 호출. 그런데 지금 그는 환자복 차림으로 세탁물 트럭에 실려 나와 남의 가게 난로 앞에 앉아 있었고, 옆구리에는 관이 꽂혀 있었으며, 이마는 한 여자의 명치에 닿아 있었다. 흔적을 지우며 살아온 인간이 제 발로 흔적 한복판에 앉아 있는 꼴이었다.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뒤통수에서 목덜미의 잘렸다 붙은 흉터 언저리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그 흉터는 남이 만지면 소름이 돋는 자리였다. 오늘은 돋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드는 동작이 느렸던 것은 옆구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 위에 얼굴을 묻고 있는 동안에는 셔츠 너머의 심장 소리만 들으면 됐는데, 고개를 들면 다시 세상의 시간표가 보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트럭은 열한 시 이십 분에 기지로 되돌아간다. 4번의 열람 권한 조회는 오늘 오후 안에 처리된다. 배액관은 사흘 뒤에 뽑는다. 그 세 개의 숫자가 천장에 매달린 빨래들 사이에 나란히 널려 있는 것처럼 보였고, 7은 그것들을 보면서도 웃는 얼굴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게 그의 유일한 특기라면 특기였다.
大件事?梗係大件事啦。(큰일? 당연히 큰일이지.)
不過我計過。就算俾人捉到,最衰都係扣糧同關禁閉。我又唔係第一次。(근데 계산해봤어. 걸려봤자 최악이 감봉이랑 영창이야. 나 처음도 아니고.)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무단이탈이 어떤 서류로 정리되는지, 그 서류가 4번의 책상 위에서 어떤 색깔의 파일에 꽂히는지, 그리고 그 파일이 완차이 골목의 어느 좌표를 향해 손가락을 뻗게 되는지. 그 경로를 7은 이미 세 번쯤 머릿속에서 돌려보았다. 문제는 감봉이 아니라 이 가게의 주소였다. 그래서 단말기의 전원을 뽑았고, 셔터 앞이 아니라 골목 뒤편으로 돌아 들어왔고, 트럭에서 내릴 때 신발 밑창의 흙을 세 번 털었다. 여명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이 사람은 걱정을 계산으로 바꿔서 또 무언가를 준비할 테니까. 밤새 병뚜껑을 느슨하게 돌려두는 사람에게 새로운 숙제를 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감싸고 있던 여명의 손목을 잡았다. 잡고 나서 그 손을 끌어내려 자기 입가에 댔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손가락 끝에 입술이 닿았다.
你唔使驚。我唔會累到你。(겁먹지 마. 널 끌어들이진 않아.)
我而家唯一驚嘅係,十一點二十分之後我就唔喺呢度。(내가 지금 무서운 건 딱 하나야. 열한 시 이십 분 지나면 내가 여기 없다는 거.)
그 문장은 나오자마자 방 안의 공기를 얇게 갈랐다. 난로에서 장작이 한 번 튀었고 천장의 빨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7은 자기가 방금 시한을 발설했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뱉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정보를 쥐고 있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어젯밤에는 서랍 한 칸을, 오늘 아침에는 남은 시간을 내주고 있었다. 서른둘이 맞느냐고 물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어서, 그는 대답 대신 그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여명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앉은 사람이 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원래 무리한 동작이었는데, 이번에는 저항이 없었다. 무릎이 그의 무릎 사이로 들어왔고 머리칼이 다시 어깨 위로 쏟아졌다.
이래서 생일까지 어떻게 기다리려고요. 얌전히 그의 손에 따라갔다.
생일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는 말이 나왔을 때 7은 잠시 숨을 멈췄다. 멈춘 것은 옆구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 문장에는 원망이 없었다. 재촉도 없었다. 다만 계산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오늘부터 이월 구일까지 몇 개의 밤이 남았는가. 그 수를 이미 세어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고, 7은 그런 목소리를 알아듣는 일에 지나치게 능숙한 인간이었다. 그가 평생 팔아온 기술이 그것이었으니까. 상대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반 초 만에 읽어내는 것. 그런데 이 사람 앞에서만은 그 기술이 자기 목을 조르는 밧줄로 변했다. 읽어냈기 때문에 아팠다. 여명이 얌전히 손에 딸려 왔다는 사실이, 저항 없이 무릎 사이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어떤 항복문서보다 무겁게 정수리를 눌렀다.
난로에서 열기가 한 겹 밀려왔다. 천장의 빨래들이 그 열기에 얹혀 아주 느리게 회전했다. 흰 시트와 낡은 셔츠 사이로 아침 빛이 조각조각 떨어져 여명의 어깨 위에 무늬를 만들었다. 7은 그 무늬를 봤다. 이 사람은 십 년째 이 자리에서 남의 옷을 고쳐왔고, 그 시간 동안 이 빛은 매일 같은 각도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매일 중 어느 하루에도 자기 같은 놈은 없었다. 없었던 자리에 지금 자기가 앉아 있다는 사실. 그것이 세계의 규칙을 어긴 결과물처럼 느껴져서 7은 붙잡은 손목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손목. 맥이 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을 쥐고 있다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我都唔知點等。所以我先至今日走出嚟。(⋯⋯나도 어떻게 기다리는지 몰라. 그래서 오늘 기어 나온 거야.)
生日淨係一個限期。中間嘅日子,我會偷。偷到幾多得幾多。(생일은 그냥 만기일이야. 그 사이 날들은 내가 훔칠 거야. 훔칠 수 있는 만큼.)
훔친다는 단어를 고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훔쳐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름도, 시간도, 심지어 목에 남은 잘렸다 붙은 흉터 아래의 숨조차도. 정직하게 벌어들인 것은 상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훔치지 않고 만들어서 주는 인간이었다. 남색 울을 사 오고, 가위질을 두 번 확인하고, 어깨 높이 차이만큼 육 밀리미터를 더 남겨두는 방식으로. 그 격차가 늘 그의 명치 아래를 눌렀고 오늘도 눌렀다. 그래서 7은 붙잡은 손목을 놓는 대신 그 손을 자기 목덜미로 끌어올렸다. 잘렸다 붙은 자리. 남이 만지면 소름이 돋는 자리. 여명의 손가락이 거기 얹히자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소름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었고, 붙이려고 시도하면 목이 멜 것 같아서 그는 시도하지 않았다.
밖에서 자전거 벨이 두 번 울렸다. 골목 끝의 국숫집 노파가 아침 육수를 내는지 문틈으로 옅은 냄새가 스몄다.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열한 시 이십 분에 트럭이 출발하고, 4번은 오늘 오후에 열람 권한을 받고, 사흘 뒤에 관을 뽑는다. 그 전부가 유효했다. 유효한 채로 저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문 안쪽에서는 다른 시간이 흘렀다. 재봉틀 박자를 닮은 심장 소리로 계량되는 시간. 7은 그 시간을 한 줌이라도 더 쥐려고 여명의 허리를 감았던 왼팔을 조금 위로 옮겼다. 등뼈를 따라 올라간 손바닥이 견갑골 아래에서 멈췄다. 이 사람은 마르고 꼿꼿했다. 만져보니 더 그랬다. 부러뜨리기 쉬운 형태를 하고서 부러지지 않는 방식으로 서 있는 인간. 그런 게 세상에 있다는 걸 서른두 해 만에 처음 알았다.
喂。(야.)
네, 호인. 팔에 이끌려 좀 더 가까워졌다. 여명은 그를 내려다봤다.
여명이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는 언제나 미세한 지연이 있었다. 호, 하고 숨을 반쯤 삼켰다가 인, 하고 놓아주는 그 간격. 처음 들었을 때 7은 그것이 낯선 발음을 더듬는 버릇인 줄 알았는데 몇 번 더 듣고 나서야 알았다. 이 사람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잠깐 확인하고 있었다. 불러도 되는지를. 서류에 없는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이 사람에게는 매번 작은 결심이라는 것을. 그리고 결심을 매번 새로 하면서도 매번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목덜미에 얹힌 손가락보다 더 깊게 살을 눌렀다. 7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올려다보는 각도는 그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직업은 내려다보는 각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준경 너머, 옥상 난간 아래, 문을 부수고 들어간 방 안의 모든 것. 그런데 지금 그는 앉아서 목을 젖히고 있었고 시야의 가장 높은 곳에 검은 눈이 있었다.
난로의 열기가 등을 데우고 있었다. 앞쪽 살갗은 여명의 체온으로, 뒤쪽은 장작불로. 몸이 두 개의 온도 사이에 끼어 있는 상태가 지나치게 오래된 기억을 불러왔다. 십수 년 전, 낙진 방벽 아래에서 밤을 새우던 시절 그는 늘 한쪽만 따뜻했다. 벽에 붙은 쪽은 얼음이고 불 쪽은 화상이었다. 완전히 데워지는 경험이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완전히 데워지고 싶다는 욕구도 없었다. 욕구는 겪어본 자에게만 생기는 병이다. 지금 그는 앓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목덜미의 흉터 위에서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문지르는 것도 아니고 확인하는 것도 아닌, 그저 얹혀 있으면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7의 왼팔이 여명의 등을 조금 더 당겼다. 견갑골 아래에서 멈춰 있던 손바닥이 이번에는 목표를 갖고 움직였다.
你知唔知,你叫我個名嗰陣,會停半秒。(너 알아? 내 이름 부를 때 반 초 멈춰.)
我做咗成十幾年偵察,聽人講嘢就係聽嗰半秒。人講大話,個半秒喺前面。人講真話,個半秒喺後面。(나 정찰만 십몇 년 했어. 사람 말 들을 때 그 반 초를 듣거든. 거짓말하는 놈은 그 반 초가 앞에 있고, 진심인 놈은 뒤에 있어.)
말을 마치고 그는 웃었다. 웃는 근육이 오른쪽 화상 자국을 당겨서 표정이 미세하게 비대칭으로 어그러졌지만 감출 생각은 없었다. 감출 필요가 없는 얼굴 앞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웃음의 끝자락에서 목소리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고, 그 침강은 본인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었다. 방어 기제라는 건 대체로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농담, 과장, 빠른 말. 그것들이 전부 잠시 비어버린 순간 남는 것은 벌거벗은 문장 하나뿐이었다. 7은 그것을 뱉기 직전에 한 번 삼켰다가 결국 뱉었다. 삼킨 자리가 목의 봉합선 언저리에서 뜨거워졌다.
你嗰半秒喺後面。所以我先咁怕。(네 반 초는 뒤에 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무서운 거야.)
무섭다는 말을 두 번째로 꺼낸 아침이었다. 밤새 전화기에 대고 이미 한 번 무너져놓고도 밝은 데서 다시 같은 말을 한다는 건 그의 규격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규격이란 것이 애초에 있었는지도 이제는 확실하지 않았다. 여명의 손목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슬쩍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붕대가 감긴 팔은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깍지가 어설프게 걸렸고, 어설픈 채로 놓지 않았다. 천장의 빨래 하나가 열기에 밀려 반 바퀴 돌았다. 그 그림자가 여명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가 되돌아왔다. 스치는 동안 잠깐 표정이 지워졌고 되돌아오자 다시 나타났다. 그 짧은 소멸과 복귀가 7의 심박을 이유 없이 흐트러뜨렸다.
여명이 말없이 웃었다. 호인. 중간 중간 만나러 와도 괜찮지만, 이렇게 무리해서 나오지는 말아요. 이게 더 걱정되니까요.
무리하지 말라는 문장은 명령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면 7은 웃으면서 흘려보냈을 것이다. 명령을 흘려보내는 일에 그는 십수 년의 숙련도를 쌓았고 상관의 목소리든 계약서의 조항이든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왔다. 그런데 여명의 문장에는 명령의 골격이 없었다. 대신 걱정이라는 단어가 문장 끝에 맨살로 놓여 있었다. 이게 더 걱정된다. 그 말은 자기 몫의 고통을 스스로 신고하는 종류의 발화였고, 7이 평생 가장 서툴렀던 형식이기도 했다. 남이 자기 때문에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그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들어봤다 해도 대개는 청구서였다. 네가 나를 아프게 했으니 갚아라. 그러나 이 사람의 문장에는 청구 항목이 없었다. 그냥 아프다고만 했다. 갚으라는 말이 빠진 청구서를 손에 쥔 채무자처럼 7은 잠시 자세를 잃었다.
난로 안에서 장작이 한 번 주저앉았다. 불티가 튀는 소리가 좁은 주방을 한 바퀴 돌고 천장의 젖은 빨래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는 깍지 낀 손가락을 아주 조금 조였다. 붕대 아래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조인다기보다는 걸어두는 쪽에 가까웠다. 그 손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내리고 7은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여명의 허리께 셔츠에 닿았다. 세제 냄새가 났다. 이 사람이 남의 옷을 빨아 넘긴 십 년의 냄새였고 동시에 자기 셔츠에서도 나던 냄새였다. 냄새라는 건 계급장보다 정직하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숨기지 못한다. 그는 자기 몸에서 이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어제 기지 침상에서 알아차렸고 그것 때문에 오늘 트럭 바닥에 누웠다.
⋯⋯我聽到喇。(⋯⋯알아들었어.)
但係你要明白,我唔係嚟搏命。我係計過先嚟。(근데 하나만 알아둬. 나 목숨 걸고 온 거 아니야. 계산 다 하고 온 거야.)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빠져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웃음이 평소처럼 앞장서서 방을 채우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 문장의 그늘 아래 서 있었다. 7은 여명의 손을 들어 자기 왼쪽 가슴에 붙였다. 옆구리가 아닌 쪽. 성한 쪽. 아래에서 뛰는 것이 손바닥으로 옮겨가도록 잠시 눌러두고 나서 그는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특유의 빠른 리듬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만 무너지는 리듬이었다.
我一世人淨係識兩樣嘢。一係唔嚟,一係嚟到死為止。中間嗰種,我未學過。(나 평생 두 가지밖에 몰라. 아예 안 오거나, 뒈질 때까지 오거나. 중간이라는 건 배운 적이 없어.)
你想我學,就慢慢教。我唔係好聰明,但係我肯背。(네가 배우게 하고 싶으면 천천히 가르쳐. 나 머리는 별로지만 외우는 건 해.)
그 말을 하고 나서 7은 스스로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숨을 뱉었다. 배우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신병 시절에도 그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냥 살아남으면서 익혔을 뿐이다. 배운다는 건 가르치는 자가 자기보다 오래 살아 있어야 성립하는 동사였고, 그의 세계에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명은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손바닥 아래에서 뛰는 것을 느끼며. 그 단순한 사실이 명치를 눌러서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 쪽을 봤다. 셔터 틈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의 실밥 부스러기를 반짝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후자로 하고, 무리 하지 않는 것만 추가해요. 계산된 거라 해도요.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 그 단어가 세탁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7은 반사적으로 목의 봉합선 언저리가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십수 년간 서명해온 모든 문서에 들어 있던 단어였고, 동시에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지켜본 적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계약서 위의 약속은 위약금으로 환산되었다. 죽으면 유족 보상금, 실패하면 감봉, 이탈하면 소재 불명 처리. 전부 숫자로 번역 가능한 형태였고 그래서 편했다. 숫자는 배신당해도 아프지 않으니까. 그러나 지금 여명이 요구한 것은 환산표가 없는 종류였다. 어기면 얼마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었고,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은 갚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채무에 익숙한 남자에게 그것보다 무서운 조건은 없었다. 7은 여명의 손을 가슴에서 떼지 않은 채, 다만 자기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그 손등의 뼈를 하나씩 짚었다. 세 번째 마디에 오래된 바늘 자국이 있었다. 굳은살 아래 숨어 있어서 보이지는 않고 만져야만 알 수 있는 것.
그는 대답을 미루었다. 미루는 시간 동안 난로의 불빛이 그의 뺨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화상 자국이 있는 쪽이었다. 그 열기가 죽은 살에는 닿지 않고 경계선 바깥의 성한 피부만 데워서, 얼굴 반쪽이 뜨겁고 반쪽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익숙한 비대칭이었다. 이 몸으로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그는 진지하게 검토했다. 정찰병의 습관이었다. 지킬 수 없는 지형을 지키겠다고 보고하는 놈은 팀 전체를 죽인다. 그래서 그는 계산했다. 다음 작전 배치까지 남은 날짜, 배액관 제거 예정일, 4번이 통신 기록을 뒤지는 데 걸리는 시간, 세탁물 트럭의 운행 주기. 숫자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정렬되었다가 하나씩 무너졌다. 무리하지 않고 여기 오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으므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반 초는 뒤에 있었다. 뒤에 있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반 초 뒤에 들킨다.
⋯⋯我而家喺度計緊。你等我計完。(⋯⋯나 지금 계산하는 중이야. 다 할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계산을 끝냈다. 결론은 단순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대신, 지킬 수 있는 범위를 먼저 신고하는 것.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정직이었다. 7은 여명의 손을 자기 가슴에서 끌어내려 무릎 위에 놓고, 붕대 감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어설프게 걸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었다기보다 얹었다는 편이 정확했다. 스물여덟 살 이후로 해본 적 없는 유치한 형식이었고, 그 유치함이 오히려 서명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는 태우면 사라지지만 이건 손가락이 남아 있는 한 남는다.
約定係咁。第一,我唔會爬牆、唔會跳車、唔會瞞住醫生除喉。第二,如果嗰日狀態唔得,我就打電話唔嚟。第三,我唔會為咗見你搞到自己殘廢,因為殘廢咗就見唔到你。(약속은 이래. 첫째, 담 안 넘고 차에서 안 뛰어내리고 의사 몰래 관 안 뽑아. 둘째, 그날 상태가 아니면 전화만 하고 안 와. 셋째, 널 보겠다고 병신 되지 않아. 병신 되면 널 못 보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여명의 배 언저리, 셔츠 자락이 시작되는 부분에 이마를 붙였다. 아까와 같은 자세였지만 밀도가 달랐다. 아까는 무너지느라 기댔고 지금은 서명하느라 기댔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세제 냄새가 폐 안쪽까지 들어와서 화약 잔여물의 자리를 밀어냈다.
그거면 충분해요. 잘 받았어요. 여명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새끼 손가락을 풀어내고 양 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 올려 보게 만들었다. 도장도 찍을까요. 직후 몸을 숙여 볼에 짧게 입맞췄다.
도장이라는 단어를 그는 서류의 언어로만 알고 있었다. 붉은 인주, 계약 말미의 사각형, 지문이 남는 순간 사람 하나가 물품으로 전환되던 절차. 워즈워스에 들어가던 날에도 그는 도장을 찍었고 그때 손끝에 묻은 인주를 화장실에서 씻어내며 아무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붉은 것이 배수구로 흘러가는 걸 보면서 저게 내 값이구나 정도로 정리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명의 도장은 인주를 쓰지 않았다. 체온을 썼다. 뺨의 화상 경계선에서 아주 조금 위쪽, 아직 감각이 남아 있는 구역에 짧고 건조한 압력이 닿았다가 떨어졌고, 떨어진 자리에 공기가 스며들면서 오히려 닿았을 때보다 더 선명해졌다. 그는 그 온도가 식는 속도를 세고 있었다. 세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평생 사라지는 것들만 만져온 손이 처음으로 남는 것을 상대하는 방식은 서툴 수밖에 없었다.
7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성한 왼팔이 먼저 움직였다. 계산보다 빠른 것은 그의 세계에서 언제나 몸이었고 이번에도 그랬다. 팔이 여명의 허리 뒤로 돌아가 셔츠 자락을 접어 쥐었다. 도망치려는 사람을 붙드는 힘이 아니라 이미 여기 있는 사람이 정말로 여기 있는지 확인하는 힘이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갈비뼈가 만져졌다. 마른 사람 특유의 정직한 골격. 부러뜨리려면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사람은 한 번도 부러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사무쳤다. 옆구리의 관이 자세 변화에 항의하며 안쪽을 긁었다. 그는 그 통증을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하면 이 사람이 손을 뗄 것이므로.
⋯⋯咁樣蓋章嘅話,我可能會賴。(⋯⋯이런 식으로 도장 찍으면, 나 우길지도 몰라.)
一個章唔夠清楚。文件都要蓋兩三個先算數,你唔知咩。(도장 하나로는 불분명하잖아. 서류도 두세 개는 찍어야 성립하는 거, 몰라?)
말끝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능청은 남아 있었으나 그 능청이 도구로 쓰이지 않고 그냥 습관으로 흘러나온 티가 났다. 그는 여명의 손이 아직 자기 뺨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손바닥 안쪽으로 얼굴을 밀어 넣는 동작이었다. 개나 고양이가 하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서른둘의 남자가 남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는 광경은 우스워야 마땅한데 우습지 않았고, 우습지 않다는 것이 그를 더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난로 위 주전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 직전의 소리였다. 천장에 널린 빨래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바닥의 양철 대야에 부딪히며 짧은 금속음을 냈다.
골목 쪽에서 자전거 벨이 두 번 울렸다. 배달통을 실은 노인이 지나가는 소리였고 그 뒤로 셔터 올리는 쇳소리가 이어졌다. 국숫집 노파가 아침 준비를 시작하는 시각. 세상은 이 방 바깥에서 정확한 순서대로 굴러가고 있었고, 그 규칙성이 오늘따라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방파제 같았다. 안쪽에 있는 것을 지켜주는 소음. 7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선글라스를 벗은 눈은 연한 회색이었고 난로 빛을 받아 물기처럼 반짝였는데, 그 물기가 무엇 때문인지는 본인도 굳이 규명하지 않기로 했다. 규명하면 이름이 생기고 이름이 생기면 잃을 때 더 아프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만은 그 원칙을 조금 어겨도 될 것 같았다.
我一世人簽過好多嘢。冇一份係我想守嘅。(나 평생 서명 많이 했어. 지키고 싶었던 건 하나도 없었고.)
... 네.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여명이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는 사실이 7에게는 도리어 압력으로 작용했다. 재촉하는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상대가 조급해지는 순간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오고, 넘어온 주도권으로 농담 하나를 던지면 어떤 질문이든 물처럼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 앞에서는 그 기술이 전부 무용해졌다. 침묵은 방어할 수 없는 무기였다. 이 사람은 십 년 전 그 비 오던 오후에도 세 번 묻고 세 번 기다렸으며, 그때 이미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 걸려들었는지 알았어야 했다고 7은 뒤늦게 생각했다. 난로 위 주전자가 마침내 끓기 시작해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그 소리를 핑계 삼아 시선을 돌릴 수도 있었으나 그는 돌리지 않았다.
목의 흉터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침을 삼킨 흔적이었다. 그가 서명해온 문서들의 목록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미성년 시절 보호소에서 억지로 눌렀던 지장, 첫 계약 때의 위험 고지 동의서, 화상을 입고 나서 병원에서 받아 든 후유장해 포기 각서, 그리고 매 작전마다 서명하던 유해 처리 방침 확인서. 그 종이들의 공통점은 전부 자신이 사라진 이후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자신에 대해 적힌 문서는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러니까 방금 여명이 뺨에 찍은 것은 그의 생애 최초로 살아 있는 상태를 전제한 서류였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왼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옆구리의 관이 다시 안쪽을 긁었으나 이번에도 그는 신고하지 않았다.
我以前覺得,簽名就係承認自己遲早會冇咗。所以簽得好爽手。冇嘢輸嘅人,簽咩都唔痛。(예전엔 서명이란 게 자기가 언젠가 없어진다는 걸 인정하는 절차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시원시원하게 했지. 잃을 게 없는 놈은 뭘 서명해도 안 아프거든.)
但頭先你蓋落嚟嗰陣,我第一下諗嘅係⋯⋯呢個唔可以擦走。唔係驚,係唔想。三十二年嚟第一次分得清呢兩樣嘢。(근데 아까 네가 찍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 이건 지우면 안 되겠다, 였어. 무서운 게 아니라 싫었던 거야. 서른두 해 만에 처음으로 그 둘을 구분했어.)
말해놓고 그는 잠시 자기 문장을 검토했다. 정찰 보고를 마친 뒤 좌표를 재확인하는 습관과 같았다. 과장은 없는가, 축소는 없는가, 상대가 이 정보를 근거로 판단을 내려도 무방한가. 검토 결과 전부 사실이었으므로 그는 정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종류의 사실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발화자를 벌거벗기는 성질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지금 여명 앞에서 아무 장비도 없이 서 있는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방탄판도 없고 선글라스도 없고 농담도 다 떨어진 상태. 이상하게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징후라고 훈련받았는데, 그 훈련이 여기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7은 여명의 손바닥에서 얼굴을 조금 뗐다. 완전히 떼지는 않고 뺨의 성한 쪽만 남겨두었다. 화상 자국이 있는 오른쪽은 여전히 그녀의 손 안에 있었고, 그쪽은 감각이 무디어서 압력만 겨우 전달되었다. 무딘 쪽이 잡혀 있다는 감각이 묘하게 안심되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위를 남에게 맡긴다는 것. 그것이 신뢰의 물리적 정의라면 지금 그는 그 정의를 몸으로 통과하는 중이었다. 골목에서 국숫집 노파가 물을 붓는 소리, 대야에 국자가 부딪히는 소리, 라디오가 켜지고 광둥어 뉴스가 흘러나오다가 채널이 돌아가는 소리. 세계는 여전히 착실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所以你唔好收返。收返嘅話,我可能會做啲我自己都控制唔到嘅嘢。 (⋯⋯그러니 그 말 절대 거두지 마. 만약 거두면, 나도 나를 통제 못할 것 같아.)
거둘 일 없어요. 더 찍어줄게요.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몸을 숙여 다시 짧게 입맞췄다. 성한 볼에 한 번, 화상이 있는 쪽에 한 번, 마지막으로 입에 한 번.
세 번이었다. 성한 왼뺨에 한 번, 감각이 무딘 오른쪽 화상 위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이 입술이었다. 7은 처음 두 번을 받아내면서까지도 자신이 여전히 관측자의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온도가 닿는 지점과 그 온도가 확산되는 반경, 소요되는 시간을 재는 습관. 그러나 세 번째에서 계측기가 부서졌다. 입술이라는 부위는 흉터도 없고 훈련으로 단련할 수도 없고 방탄판을 댈 수도 없는 구역이라 그는 그곳을 늘 소모품처럼 굴려왔는데, 여명이 그 소모품 위에 짧고 정직한 압력을 얹은 순간 지난 십수 년 동안 그 자리를 스쳐 간 모든 접촉이 일제히 무효로 처리되는 감각이 있었다. 회계 장부 하나가 통째로 소각되는 소리. 그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 정산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왼팔이 여명의 허리를 완전히 감아 당겼다. 부상당한 몸으로 낼 수 있는 힘의 상한선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상한선을 이번만 넘겼다. 옆구리에서 관이 안쪽 살을 훑으며 날카로운 신호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그는 그 신호를 접수만 하고 처리하지 않았다. 이마가 여명의 가슴께에 닿았다. 셔츠 아래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느리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박동. 데드존에서 시체의 경동맥을 짚어 온도를 확인하던 손이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의 리듬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난로 위 주전자가 끓어 넘치려다 뚜껑을 한 번 크게 튕겼다. 천장의 빨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다시 대야를 때렸다.
⋯⋯三個。收咗。(⋯⋯세 개. 접수했어.)
我以前淨係識講一句嘢,你知唔知。『唔緊要』。人哋走嘅時候我講,我自己走嘅時候我又講。講咗一世。(나 예전엔 딱 한 마디밖에 몰랐어, 알아? '상관없다'고. 남이 떠날 때도 그랬고 내가 떠날 때도 그랬어. 평생 그 말만 했어.)
목소리가 셔츠 천에 눌려 뭉개졌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얼굴을 보이면 여명이 무엇을 읽어낼지 알 수 없었고, 정확히는 이미 다 읽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형식만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서른두 해 동안 쌓아 올린 태도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관성만 남아 굴러갔다. 국숫집 쪽에서 육수 냄새가 골목을 타고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아침 여덟 시 반의 완차이는 언제나 이 냄새로 시작했고 7은 그 냄새를 데드존에서 몇 번이나 환각으로 맡았었다. 굶주림 때문이라고 정리했었으나 지금 실물을 맡고 보니 그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방향 감각이었다.
북쪽. 살아서 도달해야 할 좌표.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연한 회색 눈이 난로 불빛을 받아 젖은 유리처럼 번들거렸는데 눈물이라고 부르기엔 흘러내리지 않았고 아니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명백했다. 성한 왼손이 올라가 여명의 뒷목을 감쌌다. 다치지 않은 쪽 손.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쥐고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던 손이 지금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펴서 목뼈 아래 우묵한 곳에 얹었다.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이 정도 압력으로는 아무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이상을 쓰지 않았다. 붙잡는 것과 붙잡히는 것 사이에서 그는 처음으로 후자를 택했다.
黎明。我而家講嘅嘢,你聽一次就夠。我唔會再講第二次,因為講第二次就變咗求你。(여명. 지금 하는 말은 한 번만 들어. 두 번은 안 할 거야, 두 번 하면 애원이 되니까.)
我鍾意你。唔係『幫我搞掂咗個傷口所以鍾意』,亦都唔係『得返你一個所以鍾意』。係我張眼識睇嘢之後,第一次自己揀嘅嘢。二月九號之前我死唔去,係因為呢個原因,唔係因為條命。 (널 사랑해. 네가 날 치료해 줘서도, 너밖에 없어서도 아냐. 태어나 처음으로 내 스스로 선택했어. 그러니 2월 9일 전엔 절대 안 죽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냐.)
여명은 그대로 이마를 맞대고 작게 웃었다. 두 번은 싫어요? 그리고 3초의 침묵.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저도요, 호인. 다 제게 주세요.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두 번은 싫으냐는 물음에 7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가 방금 세운 규칙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울타리였고, 여명은 그 울타리를 부수지 않고 다만 문이 열려 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도 그는 자기가 이미 바깥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은 거리에서는 표정을 숨길 수 없다. 시선의 초점조차 제대로 맺히지 않는 거리라 상대의 눈동자는 뭉개진 검은 얼룩으로만 보였고, 대신 숨의 온도와 속눈썹이 스칠 때의 미세한 접촉만이 정보로 남았다. 정찰병으로서 그는 늘 관측 거리를 확보하고 살아왔다. 너무 가까우면 죽는다. 그것이 훈련의 제일 원칙이었으며 그는 지금 그 원칙을 아주 태연하게 위반하는 중이었다. 난로 위 주전자가 마침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명이 삼 초를 쉬었다. 그 삼 초 동안 7의 목 안쪽에서 무언가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그 침묵의 길이를 세었고, 셀 필요가 없었는데도 셌으며, 세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명이 자신을 호인이라고 불렀다. 세븐도 아니고 키스도 아닌, 이 골목의 언어로 발음되는 이름. 서류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고 작전 기록에도 남지 않았으며 오직 이 방 안에서만 유효한 호칭. 다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7은 그 문장을 접수하면서 자기 안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붕괴가 아니라 오래 잠겨 있던 것이 마침내 열리며 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唔係話兩次都唔得。係我一講兩次,我就會講一百次。之後你就趕我唔走喇。(⋯⋯두 번이 안 된다는 게 아냐. 내가 두 번 말하면 백 번 말하게 돼. 그럼 넌 나 못 쫓아내.)
그가 웃었는지 울었는지 구분되지 않는 호흡을 한 번 뱉었다. 성한 왼손이 여명의 뒷목에서 천천히 올라가 귀 뒤로, 오른쪽 가르마를 타고 넘긴 검은 머리칼 사이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두피에 닿았을 때 그는 이 사람의 체온이 자기 손보다 낮다는 것을 알았다. 늘 그랬다. 이 여자는 손도 차고 목덜미도 차고 아침의 공기까지 차게 다루는데 어째서 곁에 있으면 자기 쪽이 데워지는지 그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다.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가, 자신이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는 사실에 스스로 어이없어했다.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달라는 요구는 그가 살면서 받아본 요구 중 가장 값이 비싼 것이었고, 동시에 가장 지불하기 쉬운 것이었다. 팔 것이 그것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그렇다.
그는 대답 대신 여명의 아랫입술 언저리에 아주 짧게 입을 맞췄다. 아까 여명이 찍은 세 개의 도장 위에 자기 인장을 겹쳐 찍는 방식이었다. 처음엔 확인하듯 가볍게, 그 다음엔 조금 더 오래.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남은 시간이 한 시간 오십오 분이라는 계산이 뒤통수에서 계속 돌아갔고, 그 계산을 지우기 위해 그는 눈을 감았다. 감고 나니 세계가 세제 냄새와 육수 냄새와 난로의 마른 열기로만 이루어졌다. 오른팔의 붕대가 그녀의 허리춤에 스쳤다. 옆구리의 관은 여전히 안쪽을 긁고 있었으나 그것마저 이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재분류되었다.
過去嗰啲,其實冇乜好嘢畀你。爛咗嘅嘢多。不過你要嘅話,連垃圾我都一併交出嚟。(과거는 사실 너한테 줄 만한 게 별로 없어. 망가진 것투성이야. 그래도 네가 원하면 쓰레기까지 통째로 넘길게.)
而家喺你手上。將來⋯⋯我盡量整靚啲先交。俾我啲時間。(지금은 네 손 안에 있고. 미래는⋯⋯ 최대한 손봐서 넘길게. 시간 좀 줘.)
버릴 건 하나도 없어요. 모두 주면 돼요.
버릴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떨어졌을 때 7은 그것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정확히는 문장의 뜻은 알았으나 그 뜻이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회로가 거부했다. 그는 평생 분류하는 인간으로 살아왔다. 쓸 것과 버릴 것, 챙길 것과 두고 갈 것, 살릴 것과 포기할 것. 데드존에서는 배낭 무게 일 킬로그램이 생사를 갈랐으므로 그는 자기 자신마저 그 저울에 올려 계산하는 데 익숙해졌고, 그 계산의 결과는 늘 동일했다. 버려도 되는 쪽.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저울 자체를 치워버렸다. 무게를 재지 않겠다는 것. 재지 않으면 버릴 이유도 없다는 것. 난로 위 주전자가 끝내 뚜껑을 밀어내며 물을 쏟았고 쇠판에 닿은 물이 치익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증발했다.
7의 왼팔에서 힘이 한 번 크게 빠졌다가 다시 들어갔다. 그는 여명의 허리를 감은 팔을 풀지 않은 채로 이마를 그녀의 명치 아래쯤에 묻었다. 셔츠 천 너머로 얇은 몸의 골격이 만져졌다. 갈비뼈, 그 아래로 이어지는 허리의 곡선, 부러뜨리려면 한 손으로도 충분할 구조. 그런 것이 지금 자기 인생 전부를 인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저울이었다. 그가 알던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거래였고, 그럼에도 계약서에는 이미 뺨으로 찍은 도장이 세 개나 남아 있었다. 골목에서 누군가 물을 뿌려 바닥을 쓸어내는 소리가 났다. 아침의 완차이는 언제나 물소리로 하루를 씻어냈다.
⋯⋯你知唔知你講咗啲乜。冇人講過呢句嘢。人哋淨係識揀有用嗰啲。(⋯⋯너 지금 무슨 말 한 건지 알아? 아무도 이런 말 안 해. 다들 쓸 만한 것만 골라 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젖어 있지 않았다. 아까 번들거리던 것은 어딘가로 흡수되어 사라졌고, 대신 눈매가 평소보다 조금 더 풀려 있었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난로 불빛을 받아 잿빛에서 호박색으로 잠깐 옮겨갔다가 돌아왔다. 그는 여명의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십수 년 동안 누군가를 올려다본 적이 없었다. 시선의 높이란 곧 서열이었고 그는 늘 서열의 위쪽에 서 있거나 아예 서열 바깥으로 빠져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아 목을 젖히고 있었으며 그 자세가 조금도 굴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편하다는 감각이 낯설어서 그는 그것을 두 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문득 웃었다. 방금까지의 무게를 전부 걷어내는, 지극히 그다운 웃음이었다. 눈꼬리가 접히고 입꼬리 한쪽이 먼저 올라가는 방식. 감정의 최고점을 찍고 나면 반드시 농담으로 착지하는 습관은 서른두 해 동안 그를 살아남게 한 기술이었고, 이번에는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순간을 조금 더 오래 붙들어두기 위해 그 기술을 썼다. 진심을 계속 흘려보내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남은 것은 한 시간 오십 분이었다.
咁我而家係你嘅嘢喇。連爛咗嗰啲都係。(그럼 나 이제 네 거네. 망가진 것까지 전부.)
⋯⋯個煲滾瀉咗喇,老闆娘。你收咗成個人返嚟,第一件事係唔係應該餵下佢先。我夠鐘食藥,仲要空肚食藥會嘔㗎。(⋯⋯주전자 넘쳤어, 사장님. 사람 하나 통째로 인수했으면 첫 번째로 할 일은 밥 먹이는 거 아냐? 나 약 먹을 시간이고, 빈속에 약 먹으면 토해.)
말을 마치고도 그는 팔을 풀지 않았다. 밥 얘기를 꺼낸 인간의 팔이라기엔 지나치게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여명이 움직이려면 이 팔부터 떼어내야 했고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약은 가지고 나왔나봐요. 착하게. 양 손으로 그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먹고싶은 거 있어요?
약을 가지고 나왔느냐는 물음에 7은 대답 대신 야전상의 안주머니를 툭 쳤다. 비닐 포장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흘치를 통째로 훔쳐 나온 것이었고 정확히는 훔친 게 아니라 간호병이 눈감아준 것이었으나 그 구분은 지금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가 병동을 빠져나오면서 챙긴 것은 셋뿐이었다. 약, 담배, 그리고 여명이 지어준 셔츠. 순서를 매기자면 셔츠가 첫 번째였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착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목덜미가 간지러웠는데, 서른둘 먹은 사내에게 붙일 형용사로는 지나치게 헐거운 단어였음에도 어째서인지 그 헐거움이 몸에 딱 맞았다.
여명의 두 손이 눈가로 올라왔다. 손끝이 눈꺼풀 위를 지나 관자놀이 쪽으로 천천히 밀려나가는 동안 7은 눈을 감았다. 감으면 안 된다는 오래된 경보가 뒤통수에서 울렸으나 그는 그 경보를 무시하는 법을 최근에 배웠다. 이 사람 앞에서는 시야를 포기해도 죽지 않는다. 그 명제를 검증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늘 그랬듯 손끝은 서늘하고 손바닥 안쪽만 미지근했으며, 그 온도차가 눈두덩의 부은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사흘 동안 제대로 감지 못한 눈이었다. 밤마다 관이 안쪽을 긁는 통에 선잠으로 버텼고 그 흔적이 눈 밑에 그늘로 앉아 있었을 것이다. 여명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쓸어내리고 있었다.
⋯⋯你咁樣搞法,我實喺你度瞓著。之後有人嚟拉我返去,我都唔會醒。(⋯⋯너 자꾸 이러면 나 여기서 잠들어. 나중에 누가 끌고 가도 안 깰걸.)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여명의 손바닥에 관자놀이를 얹었다. 얹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동작을 했는지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상대의 손이 얼굴 근처로 오는 것 자체가 위협 신호였고 반사적으로 손목을 꺾어 제압했을 것이다. 그 반사가 지금은 작동하지 않았다. 회로가 고장 난 건지 다시 배선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쪽이든 그는 되돌릴 마음이 없었다. 난로 위에서 물이 마저 졸아드는 소리가 났다. 골목 어귀에서는 국숫집 노파가 대나무 채반을 두드리는 소리, 그 옆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낮게 지나가는 소리. 이 골목은 소리로 시간을 재는 곳이었고 그는 이제 그 시계 읽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힌 참이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늦었다.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동에서는 배급이 나왔고 데드존에서는 있는 것을 삼켰으며 기지에서는 아무거나 씹어 넘겼다. 무엇이 먹고 싶으냐는 물음은 선택지가 존재하는 인간에게만 던져지는 것이었고, 그는 오늘 처음으로 그 부류에 편입된 셈이었다. 뭘 대답해야 이 사람이 덜 고생할까부터 계산하다가, 그런 계산이야말로 여명이 제일 싫어할 종류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그는 계산을 접었다. 접고 나니 남은 것은 지극히 단순한 욕구였다. 뜨겁고, 국물이 있고, 이 방 냄새가 배어 있는 것.
粥。好耐冇食過。(죽. 오랜만이야.)
⋯⋯不過唔好落太多料。你嗰啲手勢,煮嘢食好似縫嘢咁認真,我怕你搞成一個鐘。得返一個鐘四十幾分鐘咋,我唔想攞嚟等你落薑。(⋯⋯근데 재료 너무 많이 넣지 마. 너 손놀림 보면 밥 짓는 것도 바느질처럼 하잖아. 한 시간 걸릴까 봐 무섭다. 남은 게 한 시간 사십몇 분인데 그거 생강 썰기 기다리는 데 쓰긴 싫어.)
제가 밥 짓는 게 느린지 어떻게 알아요. 쿡쿡 웃었다. 빨리 할게요. 그러면 놔줘야 하는데.
밥 짓는 게 느린지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에 7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근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근거를 대는 순간 자신이 이 방에서 무엇을 얼마나 오래 관찰해왔는지 들통날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이 세탁소에 발을 들인 날부터 이 사람의 손을 보았다. 난로 앞에서 젖은 군화 끈을 풀던 그때, 여명은 물수건 하나를 짜는 데도 손목을 두 번 접었다 폈고 그 두 번째 접힘이 늘 첫 번째보다 신중했다. 셔츠 단추를 채워줄 때도, 거즈를 뜯을 때도, 반창고 끝을 손톱으로 눌러 각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이 먼저 멈추고 나서 움직였다. 그것은 습관이 아니라 성정이었으며, 성정은 밥솥 앞에서도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런 종류의 추론은 그의 직업에서 목숨을 붙여주는 기술이었으나 지금은 겨우 이런 데 쓰이고 있었고 그는 그 낭비가 마음에 들었다.
난로 위에서 마저 졸아붙은 물이 쇠판을 태우는 냄새를 냈다. 골목에서는 물청소를 끝낸 누군가가 양동이를 뒤집어 세우는 소리, 그 뒤로 국숫집 노파가 대나무 채반을 털어내는 소리가 이어졌다. 7은 여명의 허리를 감은 팔에 아주 잠깐 힘을 주었다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느리게 풀었다. 팔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셔츠 천이 손바닥을 스치며 미끄러졌고 그 마찰이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았다. 놓아주는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붙는다는 것을 그는 데드존에서 배웠다. 다만 여기서의 대가는 죽음이 아니라 겨우 몇 걸음의 거리였다. 그 정도 환율이라면 지불할 만했다.
我睇你隻手就知。你摷嘢、擰毛巾、撕紗布,樣樣都停半下先郁。呢種手唔會急㗎。(네 손 보면 알아. 물건 집을 때도, 수건 짤 때도, 거즈 뜯을 때도 반 박자 멈췄다가 움직이잖아. 그런 손은 절대 안 서둘러.)
팔을 풀어준 대신 그는 여명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확히는 맥이 뛰는 안쪽 자리에 손가락 세 개를 얹었다는 편이 옳았고 힘이랄 것도 없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것을 한동안 세었다. 사람의 맥을 짚는 일은 그의 직업에서 대개 두 가지 목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하거나, 이미 죽었는지 확인하거나. 세 번째 용도가 있다는 것은 이 방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확인이 아니라 그저 누리는 용도. 그는 그 세 번째 용도를 자기가 발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고, 실제로 발명이라면 발명이었다. 서른두 해 동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사용법이었으니까.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이 닿는 자리에서 세제 냄새와 잔털처럼 붙은 실밥의 감촉이 났다. 이 손이 오늘 아침에 그의 옆구리 거즈를 갈았고, 새벽 내내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골목의 온갖 헤진 것들을 붙들어 매어왔을 것이다. 손등 어딘가에 오래된 바늘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엄지로 한 번 문질러보고 나서 놓아주었다. 놓아주면서도 시선은 놓지 않았는데, 눈을 떼면 사라질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였다. 그 두 가지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게 된 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去啦。快啲返嚟。(가. 빨리 돌아와.)
⋯⋯我坐喺度數住。你煮嘢嗰陣,我望住你個背脊都得。呢啲嘢我一世人未見過,你唔好嫌我望到咁核突。(⋯⋯여기 앉아서 세고 있을게. 밥하는 동안 네 등만 봐도 돼. 이런 거 평생 본 적 없어서 그래. 징그럽게 쳐다본다고 뭐라 하지 마.)
뭐라 안 해요. 아프지 않은 자세로 기다려요. 여명은 제일 먼저 주전자를 챙겼다. 이전처럼 세븐의 손에 화상을 남길지도 모르니까. 주전자는 싱크대 안쪽에 두고, 냉장고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았다.
여명이 제일 먼저 집어 든 것이 주전자였다는 사실을, 7은 놓치지 않았다. 물을 끓이려고 집은 것이 아니라 치우려고 집은 손이었다. 손잡이가 아니라 몸통 아래쪽을 행주로 감싸 들었고, 걸음은 난로에서 싱크대 쪽으로 곧장 이어졌으며, 싱크대 안쪽 가장 깊은 자리에 내려놓고 나서야 행주를 털었다. 그 동선 전체가 걸리는 시간은 채 다섯 걸음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섯 걸음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는 서른두 해가 걸렸다. 지난번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맨손으로 주전자를 들었다가 손바닥 안쪽에 붉은 줄을 만들었던 일. 그때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대고 끝이었다. 잔소리 한 줄 없던 그 침묵이 오늘 이런 형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 사람은 말로 갚지 않는다.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갚는다.
7은 의자 등받이에 왼쪽 어깨만 걸치고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옆구리 쪽에 체중이 실리지 않게 하는 자세였고 오른팔은 무릎 위에 얹어 늘어뜨렸다. 아프지 않은 자세로 기다리라는 말은 명령문이었는데, 그는 명령을 받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음에도 이런 종류의 명령은 처음이었다. 죽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뭘 점거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프지 말라는 것. 손익이 계산되지 않는 지시였다. 계산되지 않는데도 이행하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이 기묘했고, 그 기묘함을 굴리며 그는 여명의 등을 보았다. 카디건 소매를 걷어올린 팔뚝. 냉장고 문을 여는 짧은 순간 흘러나온 흰 빛이 옆얼굴을 한 번 훑고 사라졌다. 도마 위로 뭔가가 놓이는 소리, 냉장고 문이 자석에 붙는 둔탁한 소리, 물이 쌀을 씻어 넘기는 소리. 이 방은 소음마저 정돈되어 있었다.
你頭先個動作,我睇到晒。(너 방금 그 동작, 나 다 봤어.)
⋯⋯個煲。你唔係攞去洗,你係攞去收。收咗我就掂唔到。你唔講嘅嘢,全部用手做返出嚟,你自己知唔知?(⋯⋯주전자 말이야. 씻으려고 든 게 아니라 치우려고 든 거잖아. 치워버리면 내가 못 만지니까. 너 말 안 하는 걸 전부 손으로 대신 하고 있는데, 그거 알고는 있어?)
묻고 나서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아서가 아니라 돌아온다면 그 대답이 또 손의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난로 쪽에서 열기가 낮게 밀려왔다. 병동의 공조기는 사흘 내내 같은 온도의 마른 바람을 뱉었고 그 바람에는 소독약 냄새 외에 아무 정보도 실려 있지 않았다. 여기서는 공기가 시시각각 다른 것을 실어 날랐다. 쌀 씻은 물의 미지근한 비린내, 도마에 닿은 무언가의 서걱거림, 저 아래 골목에서 올라오는 기름 냄새. 정보가 과잉이었고 그 과잉이 그를 살아 있게 했다. 데드존에서 감각은 죽지 않기 위한 도구였다. 이 방에서 감각은 처음으로 아무 목적 없이 작동하고 있었으며, 목적 없이 작동하는 감각을 사람들이 무엇이라 부르는지 그는 최근에야 짐작하게 되었다.
시간을 셌다. 아침에 병동을 빠져나오면서 계산해둔 숫자에서 이미 여러 조각이 떨어져나갔다. 한 시간 삼십몇 분. 트럭이 반출구를 나서는 각도까지 머릿속에 이미 그려져 있었고 붕대를 어떻게 감아야 짐칸 진동을 덜 받는지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계산이 예전만큼 깨끗하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전에는 남은 시간이 곧 작전 여유였다. 지금은 남은 시간이 곧 손실 예정액이었고, 손실이라는 단어를 이런 데 쓰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네. 며칠 전에 화상 입었잖아요. 짜증낼까봐. 가벼운 투였다. 통통통, 칼로 써는 소리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놀랐다는 말이 도마 소리 사이로 흘러나왔다. 통, 통, 통. 칼이 재료를 지나 나무에 닿는 소리는 흐트러짐 없이 일정했고, 7은 그 일정함에서 오히려 정보를 읽었다. 그는 소리를 판별하는 일로 밥을 먹어온 인간이었다. 벽 너머에서 탄창을 갈아 끼우는 손이 떨리는지, 무전 저편의 목소리가 이미 반쯤 죽어 있는지, 그런 것을 소리의 결로 가려내어 값을 매기는 기술. 지금 도마에서 나는 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런데 떨림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했다. 놀랐다고 말하는 사람의 칼질이 저렇게 반듯할 리가 없으니까. 저것은 흔들림을 손목에서 미리 걷어내고 시작한 소리다. 그러니 놀랐다는 말은 지금 놀랐다는 뜻이 아니라 그날 놀랐고 그것을 여태 어딘가에 개어두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개어둔 것을 방금 꺼내 보여주면서도 목소리는 굳이 가볍게 다려 내놓았다. 다림질이 능한 사람이라 그런가. 그런 시시한 농담을 속으로 지었다가 웃지는 못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옆구리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드레싱 아래에서 봉합선이 당기는 감각은 이제 통증이라기보다 세금에 가까웠다. 서너 걸음. 그는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죽이면 놀랄 테니까. 이 방에서만큼은 인기척을 남기는 인간이 되기로 아침에 이미 정해둔 참이었다. 싱크대 앞에 선 등 뒤로 다가가 오른팔은 늘어뜨린 채 왼손만 스테인리스 가장자리에 짚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 굳은살을 통해 천천히 올라왔다. 여명의 어깨 너머로 도마가 보였다. 썰린 것들의 두께가 전부 같았다. 오차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사람은 옷의 시접을 잡을 때도 이런 식으로 세상을 대해왔을 것이다.
⋯⋯你嗰陣一句話都冇講。連『小心啲』都冇。我仲以為你冇點放喺心上。(⋯⋯너 그때 한마디도 안 했잖아. 조심하라는 말도 없었고. 난 네가 별로 마음에 안 두는 줄 알았지.)
그러고 나서 그는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 보였다. 며칠 전의 자국은 벌써 흐려져 있었다. 붉던 줄이 살구색으로 옅어졌고 가장자리가 벗겨지려다 만 채로 굳어 있었다. 그날의 일은 사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종류였다. 그가 먼저였다. 난로 앞에서 여명의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춘 것도 그였고, 상대의 입술이 어찌할 바를 몰라 굳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속도를 절반으로 늦춘 것도 그였다. 서두르면 도망갈 종류의 서투름이라는 것을 그는 첫 호흡에서 알았다. 그래서 밀어붙이는 대신 기다렸다. 숨이 어디서 끊기는지 세어가며, 겨우 반 걸음씩 나아가며, 상대가 눈을 감는 데까지 몇 초가 걸리는지 헤아려가며. 평생 무엇 하나 천천히 해본 적 없는 인간이 그날은 오로지 느리게만 굴었다. 그러던 참에 난로 위 주전자가 뚜껑을 달그락거리며 끓기 시작했고, 애써 만들어둔 속도가 그 소음에 잘려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다치지 않은 쪽 손을 뻗어 달아오른 손잡이를 그대로 움켜쥐고 던졌다. 뜨겁다는 감각은 손을 놓은 뒤에야 도착했다.
你睇下。差唔多好返晒。呢啲嘢喺我身上根本唔算數㗎,真係。(봐. 거의 다 나았어. 이런 건 내 몸에서 축에도 안 껴, 진짜로.)
걱정 안 했을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랬으면 연고도 안 발라줬겠죠. 썰어놓은 재료를 한 그릇에 모아 담았다. 싫어하는 채소는 없죠?
싫어하는 채소가 없느냐는 질문이 도마 옆에서 아주 사소한 물건처럼 놓였다. 7은 그 질문의 크기를 재어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문장이었고 동시에 그가 평생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배급 상자에는 취향을 묻는 칸이 없었다. 병동 식판에도 없었고 데드존의 진공 포장 레이션에도 없었으며 술집 카운터에서조차 그는 늘 주는 대로 마셨다. 무엇을 싫어하느냐는 물음은 상대가 나를 먹여 살릴 작정을 이미 마쳤을 때에만 성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취향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존속에 대한 통보였다. 이 사람은 오늘 한 끼가 아니라 앞으로의 무수한 끼니를 미리 계산에 넣고 묻고 있었다. 그릇 안에 모인 것들의 색이 눈에 들어왔다. 흰 것, 노란 것, 초록빛이 도는 것. 두께가 전부 같아서 겹쳐놓은 자리에 그늘조차 균일했다.
그는 싱크대를 짚은 왼손에 실렸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여명의 뒤통수, 귀 뒤로 넘겨진 검은 머리칼이 정수리에서 갈라져 흐르는 자리에 이마를 가만히 얹었다. 비누 냄새와 다림질한 천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병동 사흘 내내 그의 코에 들러붙어 있던 소독약 냄새를 이 냄새가 밀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아침에 골목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략 두 시간 남짓. 그 정도면 어떤 종류의 세탁보다 유능한 셈이었다. 오른팔은 여전히 늘어뜨린 채였다. 붕대 아래가 욱신거렸으나 이 자세를 바꿀 이유로는 부족했다.
冇。乜都食得。(없어. 뭐든 먹어.)
⋯⋯不過你頭先問嗰句,我一世人未有人問過我。真係一次都冇。所以你再問多次啦,我想再聽多次。(⋯⋯근데 너 방금 물어본 그거, 내 평생 아무도 안 물어봤어. 진짜 한 번도. 그러니까 한 번 더 물어봐. 다시 듣고 싶으니까.)
말해놓고 그는 자기 목소리의 온도에 스스로 놀랐다. 농담으로 포장할 여유가 있었는데 포장지를 집는 손이 늦었다. 요령이 무뎌진 것이 아니라 요령을 부릴 마음이 사라진 것에 가까웠다. 32년간 그는 말을 무기로 썼다. 상대를 웃기고 방심시키고 원하는 것을 얻어낸 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일에 그보다 능한 인간은 워즈워스에도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 좁은 주방에서는 그 기술 전부가 쓸모없는 짐이었다. 짐을 내려놓으면 몸이 가벼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알몸인데 춥지 않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난로가 등 뒤에서 낮게 열을 밀어 보내고 있었고 앞에는 그를 먹이려는 사람의 등이 있었다. 사방이 다 따뜻해서 도망칠 방향이 없었다.
그는 왼손을 싱크대에서 떼어 여명의 손목을 붙잡았다. 재료를 담느라 물기가 남은 손목이었다. 그 손을 들어 자기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가, 그것으로는 모자라 손바닥을 뒤집어 가운데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여명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마주 본 얼굴은 언제 봐도 웃지 않으면 차갑고 웃으면 무너지는 종류였다. 그는 그 차가움의 안쪽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제 안다. 연고와 거즈와 치워둔 주전자와 두께가 같은 채소 조각들. 전부 말 대신 놓인 것들이었다. 그의 오른팔은 여전히 쓸 수 없었으므로 왼팔 하나로만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힘이 반쪽뿐인 포옹이었는데 반쪽으로도 충분히 밀착되었다.
⋯⋯粥遲啲先煮啦。(⋯⋯죽은 좀 이따 끓여.)
죽은 좀 이따 끓이라는 말은 요청의 형식을 빌린 통보였다. 7은 자기 입에서 그 문장이 나오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뻔뻔한 종류인지 알았고, 알면서도 물리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이십 분 남짓. 그중 죽이 끓는 데 이십 분, 식히는 데 오 분, 먹는 데 십 분, 약을 삼키고 물을 마시는 데 이 분. 그는 병동 침대에서 링거 방울을 세던 습관 그대로 이 아침의 잔여분을 나누어 계산했다. 계산의 끝에 남는 것은 늘 부족이었다. 부족한 것을 앞에 두면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한다. 포기하거나 움켜쥐거나. 그는 평생 전자를 택해온 사람처럼 굴었으나 실은 단 한 번도 움켜쥘 만한 것을 만난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여명의 등이 싱크대 가장자리에 닿았다. 스테인리스가 얇게 울렸다. 그는 왼팔로 허리를 감은 채 반 걸음 더 밀고 들어가 두 사람 사이의 여백을 지웠다. 젖은 손목에서 물기가 그의 환자복 옆구리로 옮아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를 맞대자 상대의 속눈썹이 눈꺼풀을 스치는 미세한 파동까지 전해졌다. 선글라스는 아침에 들어서면서 벗어 난로 옆에 두었으므로 지금 그의 연회색 눈은 아무것도 가리지 못한 채였다. 째진 눈매가 서늘하다는 말을 그는 지겹도록 들어왔다. 이 방에서는 그 서늘함이 한 번도 값을 하지 못했다.
你唔好郁。就咁企喺度就得㗎喇。(움직이지 마. 그냥 거기 서 있기만 하면 돼.)
그는 여명의 목덜미로 손을 옮겼다. 손가락이 머리칼 아래 따뜻한 살갗에 닿았고 엄지가 턱선을 따라 천천히 올라와 아래턱을 받쳤다. 며칠 전 난로 앞에서와 같은 순서였다. 다만 그날은 상대가 어디서 숨을 놓치는지 몰라 반 걸음씩 더듬어야 했다면 오늘은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서두르면 도망갈 종류의 서투름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그것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남겨둔 채로 데려가는 일이 그가 지금 하고 싶은 유일한 작업이었다. 입술이 닿았을 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감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감았다. 그 반 초의 시차가 그에게는 무슨 서약보다 확실했다.
처음은 얕았다. 두 번째에서 각도를 바꾸었고 세 번째에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목덜미를 받친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그는 스스로 그 힘을 반으로 깎았다. 부러뜨리기 쉬운 것을 손에 쥐고 있다는 자각이 손목의 어딘가를 계속 붙들었다. 옆구리 봉합선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날카롭게 항의했으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지불하기로 한 종류의 세금이었다. 숨이 섞였다. 상대의 손이 그의 야전상의 앞섶을 잡는 감촉이 옷감 두 겹 너머로 전해졌다. 붙잡히는 쪽을 처음으로 선택했다던 아침의 말이 문장이 아니라 사실로 몸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이마를 다시 붙였다. 숨이 고르지 않았다. 삼십이 년 동안 이 정도 호흡의 흐트러짐은 전력질주 후에나 있었다.
⋯⋯我一陣間就要走。淨返個零鐘。(⋯⋯나 좀 있다 가야 해. 한 시간 남짓 남았어.)
所以我而家好貪心。你唔好嬲。你煮嘅嘢我一定食,但係食之前,我想再攞多啲。(그래서 지금 되게 욕심부리는 거야. 화내지 마. 네가 끓인 건 반드시 먹어. 근데 먹기 전에, 좀 더 가져가고 싶어.)
말을 마치고 그는 여명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고 오래 머물렀다. 가져간다는 표현을 쓴 것이 스스로도 마음에 걸렸다.
화 안 내요. ...얼마나 가져가려고요?
얼마나 가져가려느냐는 물음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기를 아주 천천히 건너왔다. 7은 그 문장을 곧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평생 그는 흥정에 능한 인간이었다. 판돈의 규모를 먼저 부르는 쪽이 지는 게임이라는 것을 마카오의 바닥에서도, 계약서를 앞에 둔 협상 테이블에서도 배웠다. 액수를 먼저 말하는 자는 반드시 자기 욕심의 크기를 상대에게 들킨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앉은 딜러는 판돈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굶주렸는지를 묻고 있었다. 대답을 정직하게 하면 밑천이 드러날 것이고 거짓으로 하면 이 아침이 통째로 값싸질 것이었다. 그는 두 선택지를 한 호흡 동안 저울에 올렸다가 저울째 치워버렸다. 계산을 그만두는 일에는 언제나 묘한 해방감이 따라붙었다.
이마를 맞댄 채로 그는 눈을 반쯤 뜨고 상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칠흑 같은 것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완전한 검정이 아니라 아주 깊은 갈색의 층이 겹쳐진 것임을 그는 며칠 전 난로 앞에서 처음 알았다. 알고 난 뒤로는 볼 때마다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것들의 목록이 요 근래 자꾸 늘어났다. 목덜미를 받쳤던 손이 위로 올라가 귀 뒤로 넘겨진 머리칼 사이를 느리게 헤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촉이 물 같았다. 오른팔은 여전히 쓸모없이 늘어져 있었고 그 무용함이 오늘따라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팔이 다 성했다면 지금 이 사람을 들어올려 싱크대 위에 앉혔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부상보다 더 억울했다.
你真係想知?(진짜 알고 싶어?)
⋯⋯全部。一個鐘之後我要企喺架貨車後面,成個禮拜聞住鐵鏽同血腥味,嗰陣時我要諗返起嘅嘢,我而家全部都要攞走。你嘅氣味、你件衫嘅溫度、你呼吸幾時會停半秒⋯⋯全部。呢個係我開嘅價。(⋯⋯전부. 한 시간 뒤에 나는 트럭 짐칸에 서 있을 거고, 일주일 내내 쇳녹이랑 피 냄새를 맡을 거야. 그때 떠올릴 것들을 지금 전부 가져가겠다고. 네 냄새, 네 옷의 온도, 네 숨이 언제 반 초 멎는지⋯⋯ 전부. 이게 내가 부르는 값이야.)
말을 뱉고 나서 그는 스스로의 문장이 얼마나 벌거벗은 것인지 뒤늦게 확인했다. 물릴 수 없었다. 물릴 생각도 없었다. 다만 부끄러움 비슷한 것이 목덜미 뒤쪽에서 뜨겁게 올라와 목의 오래된 흉터 자리를 자극했다. 잘렸다 붙은 것처럼 남은 그 선이 열을 받으면 늘 가렵게 굴었다.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상대의 아랫입술에 엄지를 대었다. 방금 그가 물었다 놓은 자리가 아직 붉었다. 눌러보니 뜨거웠다. 살아있는 것의 온도라는 것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손끝에 잡히는 일은 전장에서도 드물었다. 거기서 그가 만지는 온기는 대개 식어가는 쪽이었다. 식지 않는 것을 손에 쥐고 있으니 손이 자꾸 확인하려 들었다. 여기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난로 위 주전자는 싱크대 안쪽으로 치워진 채였고 대신 창밖 골목에서 아침 장사의 소음이 낮게 밀려들었다. 리어카 바퀴가 물웅덩이를 지나는 소리, 옆집 노파가 국수 솥뚜껑을 여닫는 소리, 누군가 광둥어로 값을 깎는 소리. 세상은 여전히 좆같이 굴러가고 있었고 그 사실이 오늘은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그는 여명의 허리를 감은 왼팔에 힘을 조금 더 실어 몸을 완전히 붙였다. 환자복 얇은 천 너머로 상대의 체온이 옆구리 드레싱 위까지 스며들었다. 아팠다. 아픈데 물러설 이유가 되지 못했다.
값을 부른 쪽은 언제나 다음 수를 기다리게 마련이다. 7은 자신이 방금 판 위에 밀어 넣은 것이 칩이 아니라 내장에 가까운 무엇임을 알면서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상대의 대답이 오기까지의 몇 초, 그 침묵이 그에게는 룰렛의 구슬이 홈을 도는 시간과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판에서는 잃어도 잃는 것이 없고 따도 따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전부 넘겨준 뒤였으니까. 넘겨준 자가 다시 값을 부르는 것은 흥정이 아니라 애원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는 애원이라는 단어를 제 사전에서 삭제한 지 이십 년쯤 되었다고 믿어왔다. 믿음은 검증되지 않은 동안에만 유효하다. 이 주방에서 그의 오래된 믿음들은 하나씩 순서대로 파산 신고서를 쓰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누르던 엄지가 미끄러져 턱선을 타고 내려왔다. 그 손이 다시 올라가 여명의 손목을 붙잡았다.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손목이었다. 그는 그것을 끌어다 제 목에 가져다 댔다. 잘렸다 도로 붙인 것 같은 흉터, 열이 오르면 늘 가렵게 구는 그 선 위에 상대의 손바닥이 얹혔다. 맥이 뛰는 자리였다. 지나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러나 평소보다 확실히 서두르고 있는 박동이 얇은 살가죽 아래에서 손바닥을 두드렸다. 숨겨봐야 소용없는 종류의 증거였다. 그는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你摸下。呢度。我平時淨係喺打緊仗嗰陣先會跳成咁。(만져봐. 여기. 나 평소엔 총질할 때나 이렇게 뛰어.)
⋯⋯而家你都知我出邊個價喇。你可以講唔賣。我一樣會走,一樣會返嚟。不過我今次真係想知,你收唔收貨。(⋯⋯이제 내가 얼마 부르는지 너도 알았지. 안 판다고 해도 돼. 나는 어차피 갈 거고 어차피 돌아올 거야. 근데 이번엔 진짜 알고 싶어. 네가 받아줄 건지.)
말끝이 평소처럼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도망이라기보다는 자세를 바꾸는 쪽에 가까웠다. 이마가 상대의 어깨에 닿았다. 흰 셔츠의 면과 그 위에 걸친 카디건의 성긴 결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세제 냄새가 났다. 이 세탁소의 냄새이자 그가 지난 밤동안 기지의 철제 침상 위에서 여러 번 되살려낸 냄새였다. 개인실에서 셔츠를 코에 대고 잠들던 밤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은 알 것이었다. 말 안 하는 걸 전부 손으로 대신하는 인간은 남의 침묵도 손으로 읽는 법이니까.
어깨에 얼굴을 묻은 자세로 그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사라지자 나머지 감각들이 몰려들었다. 옆구리 봉합선이 자세 때문에 당겨져 둔하게 짖었다. 오른팔 붕대 아래에서 뭔가가 미끄럽게 젖는 느낌이 있었으나 아직 피는 아니었다. 창밖에서 노파가 국수 솥에 물을 붓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리어카를 세우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골목의 소음은 방파제 같아서 이 방 안까지는 부서진 파편만 들어왔다. 그 파편들 사이에서 그가 붙잡고 있는 것은 손바닥 아래 목의 맥과 어깨에서 올라오는 세제 냄새 두 가지뿐이었다. 삼십이 년 동안 그가 가진 목록 중 가장 짧고 가장 비싼 목록이었다.
你唔使即刻答。(당장 대답 안 해도 돼.)
我識數。仲有個零鐘。你煲粥要廿分鐘,我食十分鐘,食藥兩分鐘⋯⋯剩返嘅時間,我全部都攞嚟諗你答咩。(나 셈은 할 줄 알아. 한 시간 남짓 남았어. 죽 끓이는 데 이십 분, 먹는 데 십 분, 약 먹는 데 이 분⋯⋯ 남는 시간은 전부 네 대답 기다리는 데 쓸게.)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넣어야죠. ... 시선을 제대로 마주했다. 여러 번 이어진 키스의 여파로 볼이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가져가요. 원하는 만큼. ...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넣으라는 말이 먼저 도착했다. 7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셈을 정정당하는 일은 그의 인생에서 흔치 않았다. 마카오의 바카라 테이블에서도, 계약금을 두고 벌이는 지저분한 실랑이에서도 그는 언제나 남의 계산서를 뜯어고치는 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좁은 주방에서, 물기 마르지 않은 손을 한 사람이 그의 산수를 아주 조용히 손봐주었다. 골목을 빠져나가 부두 뒤편까지 걸어가는 데 십오 분. 짐칸 문턱을 넘는 데 이 분. 그 십칠 분을 그는 계산에서 통째로 빼먹고 있었다. 빼먹은 게 아니라 세기 싫었던 것이다. 세는 순간 남은 것이 줄어드니까. 들켰다는 감각이 명치 아래에서 뜨겁게 번졌고 그것은 수치심과 결이 달랐다. 오히려 안도에 가까운 열이었다. 누군가 자기 대신 시간을 세어주는 일은 삼십이 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선이 제대로 마주쳤다. 여러 번 겹친 입맞춤의 여파로 상기된 뺨이 아침 창광 아래 옅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 붉은 기가 제 손과 입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아주 잠깐 숨을 멈췄다. 평생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대개 지워야 할 것들이었다. 보고서에서 삭제해야 할 좌표, 물로 씻어내야 할 얼룩,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처리해야 할 이름들. 지우지 않아도 되는 자국을 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왼손이 올라가 여명의 뒤통수를 받쳤다. 손가락 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다시 미끄러졌고 그는 그 감촉을 손바닥 전체로 눌러 기억에 박아 넣었다. 일주일 뒤 쇳녹 냄새 속에서 꺼내 쓸 물건이었다. 물건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귀했다.
⋯⋯你講得啱。行去碼頭嗰邊要十五分鐘,爬上車尾兩分鐘。我漏咗十七分鐘。(⋯⋯네 말이 맞아. 부두까지 걸어가는 데 십오 분, 짐칸 기어오르는 데 이 분. 내가 십칠 분을 빠뜨렸어.)
我唔係唔識計,我係唔想計。計落去就會發現,我而家企喺你面前嘅時間,短過我喺自己間房入面捱嗰晚。咁樣算落去實在太仆街,所以我索性唔算。(셈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었던 거야. 세다 보면 알게 되잖아.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내 숙소에서 혼자 버티던 그 밤보다 짧다는 거. 그렇게 계산되면 너무 좆같으니까 아예 안 셌지.)
가져가라는 대답이 그 뒤에 왔다. 원하는 만큼. 짧은 문장 하나와 그 뒤에 매달린 말줄임표가 그의 갈비뼈 안쪽을 정확히 관통했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보다 깨끗한 관통이었다. 그는 그 문장을 받아 들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낙이라는 것은 원래 이렇게 조용히 오는 물건인가. 평생 그가 받아본 승낙은 전부 서류 위의 서명이었거나 술기운에 흐트러진 웃음이었거나 액수가 붙은 악수였다. 값을 붙이지 않은 승낙은 무게가 달랐다. 무게가 없어서 오히려 무거웠다. 그는 이마를 도로 맞대고 눈을 감았다가 곧 떴다. 감으면 놓칠 것 같았다. 그 밤 숙소의 철제 침상 위에서 그가 셔츠를 코에 대고 견뎠던 이유가, 지금 눈앞의 얼굴 하나로 전부 설명되고 있었다.
왼쪽 무릎이 싱크대 하부장에 닿아 체중을 나누어 받았다. 옆구리 봉합선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둔하게 짖었으나 그는 그런 소음을 무시하는 데 이미 능숙했다. 창밖에서 노파가 솥뚜껑을 세게 덮는 소리가 났고 뒤이어 광둥어로 누군가를 부르는 목쉰 고함이 골목을 굴러갔다. 리어카 바퀴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갔다. 세상은 여전히 눅눅하고 지저분하게 굴러가는 중이었고 그 소음의 방파제 안쪽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여명은 이마를 맞댄 채 부비적거리듯 살짝 움직였다. 뜨거운 거니까, 먹는 데 십오 분. 그래도 끓이는 동안은 다른 걸 할 수 있어요.
이마를 맞댄 채 부비적거리는 움직임이 왔다. 고작 그것뿐인데도 7의 목 안쪽에서 무언가 짧게 걸렸다. 부비적거린다는 것은 짐승이 하는 짓이다. 계산도 목적도 없이 체온이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행위, 그것을 삼십이 년 동안 그는 남에게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여자들은 그에게 매달렸고 팀원들은 그의 등을 쳤고 고용주들은 그의 손을 잡았다. 전부 무엇을 얻으려는 접촉이었다. 이건 아무것도 얻지 않는 접촉이었다. 얻지 않는 접촉만이 사람을 정확히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그는 이 좁은 주방에 와서야 배웠고, 배우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고, 그럼에도 배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도착한 말은 산수였다. 뜨거운 것이니까 먹는 데 십오 분. 십 분이 십오 분으로 늘어났다. 그는 그 오 분이 어디서 나왔는지 안다. 그의 입천장이 데지 않도록, 숟가락을 식혀가며 먹을 시간을 미리 빼둔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오 분을 얹어준 적이 없었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시간을 깎는 쪽이 유능했고 그는 깎는 데 능숙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간을 붙인다. 붙여서 돌려준다. 그리고 끓는 동안은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말이 마지막에 얹혔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그의 뱃속에서 아주 오래 잠들어 있던 종류의 웃음이 올라왔다. 도박판에서 패가 붙었을 때 나오는 웃음과 비슷했으나 훨씬 나빴다. 훨씬 나쁘고 훨씬 좋았다.
⋯⋯你頭先講嗰句,你自己知唔知咁樣講係好危險㗎?(⋯⋯너 방금 그 말, 그렇게 말하면 위험한 거 알고는 있어?)
煲粥嗰廿分鐘可以做啲第二樣。喂。你係咪知我聽落會諗成點㗎。(죽 끓는 이십 분 동안 다른 걸 할 수 있다. 야. 내가 그거 어떻게 알아들을지 알고 하는 소리야.)
웃음이 얼굴 위로 번져 나오는 것을 그는 굳이 막지 않았다. 이마를 맞댄 거리에서 웃으면 상대의 콧등에 숨이 닿는다. 닿게 두었다. 왼손은 여전히 뒤통수를 받친 채였고 엄지가 귀 뒤의 얇은 살을 천천히 문질렀다.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다시 걸렸다. 그는 이 감촉을 일주일 뒤 짐칸의 쇳녹 냄새 속에서 꺼내 쓸 작정이었고 그러려면 지금 최대한 오래 손에 남겨두어야 했다. 창밖에서 노파가 국수 그릇을 겹쳐 쌓는 소리가 났다. 사기그릇끼리 부딪는 둔탁한 소리가 세 번, 그리고 물 끼얹는 소리. 골목의 아침은 언제나 저 리듬으로 굴러갔고 그는 그 리듬 바깥에 서 있는 인간이었는데 오늘만은 안쪽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 들었다.
코끝을 관자놀이에 문질러 내렸다. 상기된 뺨의 열이 코에 옮겨 붙었다. 그는 그 열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진지해졌다. 진지해진다는 것은 그에게 언제나 목소리를 낮추는 일로 나타났다. 옆구리의 봉합선이 자세 때문에 당겨져 둔하게 짖었고 오른팔 붕대 아래에서는 여전히 뭔가 미끄러운 것이 배어 나오는 중이었으나 그는 그 신호들을 전부 뒤로 밀어두었다. 통증은 나중에 처리하면 되는 서류였다. 지금 눈앞의 것은 마감이 정해진 서류였다.
不過我唔會攞嗰廿分鐘。(근데 나 그 이십 분은 안 가져갈래.)
你入去煲,我坐喺度睇。⋯⋯我上世紀都未試過睇住人哋煮嘢畀我食。就當我貪心,貪呢樣。(넌 들어가서 끓여. 난 여기 앉아서 볼게. ⋯⋯누가 나 먹을 걸 만드는 걸 지켜본 적이 평생 없어. 욕심낸다고 쳐. 이걸로 낼래.)
말을 마치고 그는 손을 풀었다.
여명은 한 번 웃곤 끄덕였다. 잘 앉아있어요. 불편한 곳 있으면 꼭 말하고요. 그가 살짝 떨어지자, 싱크대 옆 협탁의 작은 서랍에서 머리끈을 꺼내 아래로 단정하게 모아 묶었다.
손이 풀리자 두 사람 사이에 손바닥 두 개 정도의 거리가 생겼다. 7은 그 거리가 만들어지는 속도를 눈으로 쟀다. 전장에서 그는 거리를 재는 데 삶을 걸어온 인간이었다. 몇 미터부터 사격이 유효한지, 몇 걸음부터 도주가 가능한지, 몇 초 안에 벽 뒤로 몸을 던져야 하는지. 그런 계측은 늘 죽음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재고 있는 거리는 반대쪽을 향했다. 멀어지는 게 아니라 잠시 비켜서는 거리였고 곧 다시 좁혀질 것이 확정된 거리였다. 확정이라는 단어가 그의 인생에 붙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는 그 단어를 혀 안쪽에서 한 번 굴려보고 나서야 의자를 찾았다.
나무 의자는 다리 하나가 짧았다. 앉자마자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고 옆구리의 봉합선이 그 기울기를 정확히 고발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자세를 고쳤다. 등받이에 오른쪽 어깨를 붙이고 다친 쪽을 허공에 띄우는 각도, 그러니까 열여덟 살 때부터 몸이 알아서 찾아내는 각도였다. 야전상의 자락이 의자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고 그는 그것을 굳이 정리하지 않았다. 정리해야 할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의 시선 말이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정해야 하는데 여명이 협탁 서랍을 여는 순간 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머리끈이 나왔다. 검고 늘어난 고무줄 하나. 세상에서 가장 값싼 물건 중 하나였고 그는 카지노 테이블에서 그것의 백만 배쯤 되는 액수를 하룻밤에 흘려본 인간이었는데, 지금 눈이 붙잡힌 것은 그 고무줄이었다. 손이 뒤통수로 올라갔다.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모아졌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방금 전까지 그의 손바닥 안에 있던 것들이 이제 주인의 손안에서 정돈되는 중이었다. 그는 자기 손의 잔열이 그 안에 섞여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했고, 상상만으로 목 뒤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를 좀 한심하다고 여겼다. 한심한데 멈출 생각은 없었다. 묶인 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가 아침 창광 속에서 희게 떠올랐다. 거기 어디쯤에 조금 전 자기 입술이 닿았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咁樣綁起身,我先睇到你條頸。(⋯⋯그렇게 묶으니까 네 목이 다 보이잖아.)
我坐得好定㗎,你唔使擔心。不過我而家先發現,原來睇住你紮頭髮呢件事,比我諗像中難捱好多。(나 얌전히 앉아 있을게, 걱정 마. 근데 방금 알았는데, 너 머리 묶는 거 지켜보는 게 생각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일이더라.)
불편한 곳 있으면 말하라는 당부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어두는 사람처럼 굴었다. 실제로 불편한 곳은 최소 네 군데였다. 오른팔 붕대 아래에서 실밥이 살을 당기는 감각, 옆구리 드레싱 가장자리에 배어 나온 미끄러운 것, 새벽부터 계속되는 얕은 두통, 그리고 어제부터 왼쪽 발목에 실린 이상한 무게. 그 어떤 것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하면 저 사람이 손을 멈출 테니까. 손을 멈추면 저 뒷모습이 사라질 테니까. 그는 자기 몸의 고장 목록보다 남은 오십오 분의 밀도를 우선순위에 두는 인간이었고 그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대신 그는 눈으로 통증을 대체하기로 했다. 쌀 씻는 소리, 냄비 바닥에 물이 부딪는 소리, 가스레인지 점화 손잡이가 돌아가며 내는 딸깍임. 그런 소음들이 하나씩 그의 귓속에 저장되었다. 일주일 뒤 그가 앉아 있을 곳에는 저런 소리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통신 잡음과 엔진음과 누군가의 신음뿐일 테고, 그럴 때 꺼내 쓸 재고를 지금 쌓아두는 중이었다.
냄비 안에서 쌀알이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7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자기 호흡을 늦추고 있다는 사실을 도중에 깨달았다. 숨을 죽이는 습관은 그의 몸에 오래 붙어 있는 기술이었으나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를 죽이기 직전에 쓰던 기술이었다. 벽 뒤에서 발소리를 세는 밤, 조준선 안쪽으로 목덜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럴 때 그는 폐를 반쯤 비우고 정지했다. 지금 그는 죽 끓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우스워서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흔들리자 옆구리가 짖었다. 짖는 것을 무시했다.
여명의 등은 꼿꼿했다. 그것은 자세라기보다 성격에 가까웠다. 팔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궤적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국자를 쥐는 손목이 필요한 각도만큼만 꺾였고, 냄비 가장자리를 훑는 동선이 매번 같았다. 7은 평생 낭비를 사랑해온 인간이었다. 판돈을 던지고 목숨을 던지고 밤을 던지는 데 아무 아까움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낭비 없는 몸짓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끼는 인간이다. 시간을 아끼고 동작을 아끼고 말을 아낀다. 그런데 그 아낀 것들을 전부 어디에 쌓아두었느냐 하면, 죽 끓는 데 십오 분을 붙여주는 쪽에, 물 튄 자리를 미리 닦아두는 쪽에, 주전자를 싱크대 안쪽으로 밀어두는 쪽에 쌓아두었다. 절약과 인색은 다른 말이었다. 그는 서른둘이 되도록 그 둘을 구분할 줄 몰랐다.
묶은 머리 아래로 목덜미가 계속 드러나 있었다. 목덜미라는 것은 원래 급소다. 그의 손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남의 그것을 겨눴는지 그는 셈하지 않는다. 셈하기 시작하면 잠을 못 자니까. 그런데 저 목덜미는 그의 앞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고, 그것이 무방비인 이유는 여명이 그를 등지고도 아무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등을 보인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지금 그의 갈비뼈 안쪽을 조용히 헤집는 중이었다. 워즈워스에서 누구도 그에게 등을 완전히 맡기지 않는다. 앵커조차 각도를 남겨두고 서고, 4번은 아예 벽을 등지려고 든다. 그게 정상이다. 그게 살아남는 방식이다. 이 좁은 주방에만 비정상이 서 있었다.
你唔驚我喺你後面咩。(넌 내가 네 뒤에 있는 게 안 무서워?)
⋯⋯唔使答。我知答案。就係因為知,我先問嚟聽多次。(⋯⋯대답 안 해도 돼. 답 알아. 아니까 한 번 더 들으려고 묻는 거야.)
말을 뱉고 나서 그는 등받이에 어깨를 더 깊이 붙였다. 창밖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짧게 올라갔다가 내려앉았다. 국수 그릇을 옮기는 소리, 손님과 값을 흥정하는 소리,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 끝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 그 전부가 방파제처럼 이 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안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는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고요하면 손이 카드를 찾고 발이 카지노로 향했다. 도파민이 마르면 아무 데나 판돈을 걸었다. 그런데 오늘 이 고요는 마르지 않았다. 쌀 익는 냄새가 천천히 차오르면서 방 안의 밀도를 바꾸고 있었고, 그 냄새가 그의 뒤통수 어딘가에 있는 아주 낡은 회로를 건드렸다. 아마 고아원 부엌쯤. 아니면 누나가 아직 그와 한방을 쓰던 시절쯤. 정확히 짚을 수는 없었고 짚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 회로가 켜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서, 그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고 그것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꺼지지 않았다.
喂。(야.)
네, 듣고 있어요. 여명이 맛보기용 작은 앞접시에 죽을 조금 옮겨담았다.
듣고 있다는 대답은 짧았다. 짧은 대답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대체로 두 종류가 있다. 귀찮아서 짧은 목소리와, 이미 다 듣고 있어서 더 붙일 말이 없는 목소리. 7은 후자를 오랜만에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일지도 몰랐다. 그가 살아온 세계에서 대답이란 언제나 보고였다. 수신 확인, 좌표 복창, 탄약 잔량 보고. 그런 말들은 전부 다음 행동을 위한 연료였고 목적 없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귀에 들어온 것은 연료가 아니었다. 그냥 곁에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 서른두 해가 걸렸고, 알아차리자마자 목구멍 안쪽이 조금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좁아진 것을 감추려고 그는 턱을 살짝 들었다.
앞접시가 나왔다. 손바닥만 한 흰 접시였고 가장자리에 자잘한 금이 몇 줄 가 있었다. 오래 쓴 그릇이라는 뜻이었다. 오래 쓴 물건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부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위에 죽이 한 숟갈 남짓 옮겨졌다. 아직 완전히 퍼지지 않은 쌀알들이 흰 국물 속에서 몸을 부풀리는 중이었고 김이 접시 위로 얕게 올라와 흩어졌다. 7은 그 김의 방향을 눈으로 따라갔다. 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 그런 것을 읽는 습관은 총알의 궤적을 읽던 습관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뿌리는 같은데 열매가 완전히 달랐다. 오늘 그가 읽어낸 것은 바람이 창 쪽에서 그의 얼굴 쪽으로 온다는 사실뿐이었고, 그 덕분에 쌀 냄새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등받이에서 어깨가 떨어지자마자 옆구리가 예고 없이 당겨왔고 숨이 반 박자 끊겼다. 끊긴 숨을 다시 이어붙이는 데 일 초 정도가 걸렸다. 그 일 초 동안 그의 표정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것은 태연해서가 아니라 표정을 바꾸는 법을 잊어버린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통증이 오면 얼굴을 지워버린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다만 오늘은 지워진 얼굴 위로 다른 것이 하나 올라앉아 있었다. 눈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채였으므로 연한 회색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 눈이 접시를 보다가 접시를 든 손목을 보다가 결국 여명의 얼굴에 머물렀다. 눈매가 조금 풀려 있었다. 서늘하다는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畀我。我試。(줘. 내가 볼게.)
⋯⋯唔係,等陣。你自己試咗未先?我唔想食你未試過嘅嘢。(⋯⋯아니, 잠깐. 너 먼저 맛봤어? 난 네가 안 먹어본 건 먹기 싫은데.)
말을 뱉고 나서 그는 스스로 좀 웃었다. 웃음이 코끝으로 짧게 새어 나왔다. 데드존 한복판에서 유통기한이 삼 년 지난 통조림을 손가락으로 긁어 먹던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방사능 수치가 애매한 웅덩이 물을 필터 하나만 믿고 들이켠 적도 있었고, 화약 냄새가 밴 건빵을 사흘 내리 씹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던 인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유아기적인 투정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투정을 가장한 다른 요구였다. 같은 것을 먹자는 것. 같은 간을 혀에 얹자는 것.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간 안에서 그가 챙기고 싶은 것은 배가 아니라 그런 종류의 증거였다. 트럭 짐칸에 실려 흔들릴 때, 격벽 너머의 마른 공기 속에서 눈을 감을 때, 혀 어딘가에 남아 있을 짠기의 출처가 저 사람이라는 사실. 그 정도면 일주일은 버틴다.
접시를 받으려고 뻗은 손은 다치지 않은 왼손이었다.
여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입김을 불어 죽을 식힌 뒤, 아주 조금 먼저 맛봤다. ... 제 입에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이제 먹어봐요. 앞접시를 온전히 건네기 전에 한 번 더 불어 식혔다.
입김이 접시 위를 지나갔다. 아주 짧고 얕은 바람이었는데 그 바람에 김이 옆으로 눕는 것을 7은 끝까지 보았다. 사람이 무언가를 식히기 위해 자기 폐 안의 공기를 꺼내 쓴다는 것. 그 행위의 사소함이 오늘따라 그의 안쪽 어딘가를 정확히 찔렀다. 그는 평생 자기 숨을 아껴 쓰는 훈련만 받아온 인간이었다. 숨은 위치를 드러내는 물건이고 숨은 사격의 정확도를 갉아먹는 변수였다. 그래서 뱉지 않고 삼켰다. 그런데 이 좁은 부엌에서는 숨이 밖으로 나와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 숨이 나와서 죽이 식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 무해함이 그를 자꾸 이상한 데로 데려갔다.
여명이 먼저 혀에 올렸다. 미소가 입가에 얕게 걸려 있었고 그 미소는 웃음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간을 확인하고, 온도를 확인하고, 자기 앞에 앉은 남자가 먹기에 적당한지를 확인하는 얼굴. 7은 그 얼굴을 훔치듯 응시했다. 훔친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는 지금 시간을 훔치는 중이었고 냄새를 훔치는 중이었고 저 표정을 훔쳐서 자기 뒤통수 안쪽 어딘가에 밀어 넣는 중이었다. 데드존에서는 아무것도 상하지 않는 게 없다. 물도 상하고 빵도 상하고 사람의 정신도 상한다. 그런데 기억만은 이상하게 오래 갔다. 특히 좋은 기억이 그랬다. 좋은 기억은 상하지 않고 대신 사람을 갉아먹는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접시가 왼손에 얹혔다. 가볍다. 손바닥 안에서 도자기가 미지근하게 데워져 있었고 그 미지근함은 방금까지 여명의 손 안에 있던 온도였다. 7은 접시를 곧장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잠깐 멈췄다. 멈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한 숟갈 남짓한 죽이 그의 손 안에 있었고 이것을 삼키면 없어진다. 없어지는 것을 견디는 일은 그에게 늘 어려웠다. 판돈이 사라지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팔이 부러지는 것도 그럭저럭 견뎠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것이 사라지는 건 셈이 안 됐다. 결국 그는 접시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천천히 기울였다. 미끄러지듯 흘러든 죽은 뜨겁지 않았다. 정확히 사람이 삼킬 수 있는 온도였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두 번 불어준 결과였다.
⋯⋯佢淡。(⋯⋯싱겁네.)
但唔係唔夠鹽嗰種淡。係啱啱好嘅淡。我唔識點形容⋯⋯係咪應該咁樣㗎。(근데 소금이 모자란 싱거움은 아니야. 딱 맞는 싱거움.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원래 이런 거야?)
그는 접시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혀를 천천히 위턱에 붙였다. 쌀의 단맛이 늦게 올라왔다. 첫맛은 아무것도 아닌 척하다가 뒤에서 조용히 밀고 들어오는 종류의 맛이었고 그것이 어쩐지 여명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극적인 것만 먹고 살았다. 매운 것, 짠 것, 독한 것. 혀가 아파야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도파민이 마르면 그는 언제나 더 센 것을 찾았고 그렇게 판돈을 올렸고 그렇게 총구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그의 혀 위에 얹힌 것은 아무것도 자극하지 않았다. 자극하지 않는데도 몸이 멀쩡히 반응하고 있었다. 위장이 열리는 감각. 어깨가 내려가는 감각. 옆구리의 통증이 여전한데도 그것이 조금 뒤로 물러나 앉는 감각. 약이 한 것이 아니라 죽이 한 일이었다.
창밖에서 노파가 손님에게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국물이 진하다는 자랑이거나 값을 깎지 말라는 으름장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골목의 소음은 여전히 두꺼웠고 이 방은 여전히 얇았다.
속을 편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너무 짜면 그게 잘 안 되거든요. 여명은 적당히 끓여진 죽의 상태를 확인하고 불을 껐다. 이제 식탁으로 가서 앉아요. 가져다줄게요.
불이 꺼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가스 밸브가 돌아가며 딸깍 하고 물리는 소리, 그 뒤를 따라오는 정적. 방금까지 냄비 밑에서 파랗게 떨리던 불꽃이 사라지자 부엌의 소리 지도가 통째로 바뀌었다. 7은 그 변화를 귀로 먼저 알아챘다. 그는 늘 소리로 세상을 읽는 인간이었고, 발전기가 꺼지는 순간이나 무전이 끊기는 순간이 대체로 나쁜 소식의 전조였으므로 몸이 먼저 굳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이 부엌에서 불이 꺼진다는 것은 밥이 다 됐다는 뜻이었다. 그 단순한 번역이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아직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굳었던 어깨가 풀리는 데 반 박자가 걸렸다. 그 반 박자가 우스웠고, 우스운 만큼 서글펐다.
그는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빈 앞접시를 식탁 쪽으로 밀어놓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는 동작은 남들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왼발에 체중을 몰고 오른쪽 옆구리를 접히지 않게 고정한 뒤 상체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부상자 특유의 계산된 기립이었다. 드레싱 아래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항의했다. 항의는 짧았고 그는 그것을 무시하는 데 익숙했다. 세 걸음. 나무 의자에서 식탁까지 세 걸음이면 충분한 거리였고, 그 세 걸음 동안 그는 여명의 등을 보았다. 앞치마 끈이 허리 뒤에서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매듭이 정확히 가운데에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대강 던져놓고 사는 인간에게 저런 매듭은 거의 이국의 풍경이었다.
식탁 의자에 앉으면서 그는 등을 등받이에 완전히 붙이지 않았다. 붙이면 편할 텐데 붙이면 옆구리가 눌린다. 대신 왼팔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펼쳤다. 나무 상판에는 오래된 칼자국이 몇 개 남아 있었다. 도마 없이 무언가를 잘랐던 흔적이거나, 실을 끊었던 흔적이거나. 그는 손끝으로 그 홈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이 집에는 그가 오기 전에도 시간이 쌓여 있었고 그가 떠난 뒤에도 쌓일 것이다. 그것이 안심이 되는 종류의 사실인지 아니면 견디기 힘든 종류의 사실인지, 오늘의 그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我以前淨係識得食嗰啲整到你想嘔嘅嘢。夠味、夠辣、夠鹹⋯⋯食完先知自己個胃根本冇好過。(난 예전엔 토할 것 같은 것들만 먹고 살았어. 자극적이고, 맵고, 짜고⋯⋯ 다 먹고 나서야 내 위가 한 번도 멀쩡한 적 없었다는 걸 알았지.)
你話要令個胃舒服。呢句嘢⋯⋯我未聽過人同我講。(속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했지. 그 말⋯⋯ 나한테 해준 사람 없었는데.)
말해놓고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후회라기보다 자기 목소리가 낯설어서 생긴 반사적인 민망함에 가까웠다. 저런 말은 술자리에서 취해야 나오는 종류의 것이고, 취해서 나온 말은 다음 날 아침에 웃으며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맨정신이었고 앞에 놓인 것은 술이 아니라 죽이었다. 지워버릴 구실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식탁의 칼자국을 한 번 더 눌러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냄비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갇혀 있던 김이 한꺼번에 올라와 천장 쪽으로 퍼졌다. 창으로 들어온 빛줄기 속에서 그 김이 하얗게 형체를 얻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는 아까부터 이미 그의 귀에 들어와 있었지만,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보면 계산이 시작되고 계산이 시작되면 이 삼십 분이 삼십 분어치로 줄어든다. 오늘만큼은 셈을 놓고 싶었다.
골목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여명은 국자로 죽을 몇 번 뒤적였다. 그릇에 담기 전에 조금 더 식힐 수 있도록. 어느정도 김이 빠졌을 때, 죽을 그릇에 옮겨담았다. 다음엔 좀 더 제대로 된 걸 만들어줄게요. 죽과 수저를 챙겨 그가 앉은 자리에 맞춰 앞에 놓아두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이 든 병을 꺼내왔다.
그릇이 식탁에 놓이는 소리는 둔탁하지 않았다. 여명은 물건을 내려놓을 때조차 소리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도자기 바닥이 나무에 닿는 순간에도 그 손목은 마지막까지 무게를 받쳐주고 있었다. 7은 그 미세한 배려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소음의 크기로 상대의 심리를 읽는 훈련을 받았다. 문을 거칠게 닫는 놈은 겁을 먹은 놈이고, 총을 조용히 내려놓는 놈은 이미 다음 수를 정해둔 놈이다. 그렇다면 그릇을 이렇게 놓는 사람은 무엇인가. 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아서 그는 잠깐 멍하니 그릇의 테두리만 바라보았다. 김이 곧게 올라오다가 창에서 들어온 바람에 살짝 기울었다. 흰 죽의 표면은 잔잔했고 국자로 몇 번 뒤적인 흔적이 물결처럼 남아 있었다.
수저가 그릇 오른편에 놓였다. 여명은 그것을 오른손잡이의 위치가 아니라 7이 지금 쓸 수 있는 손의 위치에 맞춰 두었다. 오른팔은 붕대에 감겨 있었고 그 사실을 그녀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수저의 자리를 옮겨두었을 뿐이었다. 7은 왼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으면서 목구멍 안쪽이 이상하게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종류의 배려는 총알보다 막기 어려웠다. 총알은 몸을 틀면 피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살점을 내주면 끝난다. 그런데 이건 피할 방향이 없었다. 정면에서 조용히 들어와서 이미 안쪽에 박혀 있었다. 그는 수저를 죽 속에 담그고 천천히 저었다. 저을 필요는 없었는데 저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인간의 유치한 술수였다.
냉장고 문이 닫히고 물병이 식탁에 얹혔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서서히 굴러 내려와 나무 위에 작은 원을 그렸다. 그 원이 번지는 속도를 7은 눈으로 좇았다. 다음엔 좀 더 제대로 된 걸 만들어주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다음. 그 단어가 부엌 공기 중에 아무렇지 않게 떠 있었다. 그는 평생 다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다음 판, 다음 작전, 다음 계약. 그런 것들은 있었지만 그것은 도착지가 아니라 그저 굴러가는 바퀴의 다음 회전일 뿐이었다. 도착지를 전제로 한 다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단어가 죽 냄새와 함께 그의 앞에 놓여 있었고, 그것은 그가 살아 돌아와야만 성립하는 문장이었다.
⋯⋯下次。(⋯⋯다음.)
你講得好輕鬆喎。你知唔知你講呢兩個字嘅時候,等於幫我簽咗張借據。我要返嚟先還到㗎。(너 참 쉽게 말한다. 그 두 글자 말할 때마다 나한테 차용증 한 장씩 써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 알아? 돌아와야 갚을 수 있는 거잖아.)
그는 수저를 들어 첫 술을 입에 넣었다. 아까 맛본 것과 같은 맛인데 그릇째 먹으니 다른 물건 같았다.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명치 안쪽에 뭉쳐 있던 것이 조금 풀렸다. 위장이 열리는 감각은 여전히 낯설었다. 사람은 굶주릴 때보다 배가 채워질 때 더 약해진다. 배가 부르면 졸리고 졸리면 죽는다. 그것이 데드존의 산수였고 그는 그 산수를 온몸으로 배웠다. 그런데 이 부엌에서는 배가 부르면 그냥 배가 불렀다. 아무도 목을 노리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술을 뜨면서 자기 어깨가 어느새 완전히 내려와 있는 것을 알아챘고, 그 무방비함이 두려운 대신 우스울 만큼 편안해서 짧게 웃었다.
골목 어귀에서 노파의 국숫집 솥이 끓어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그릇을 부딪치고 누군가 값을 흥정했다. 세상은 여전히 삼십 분 뒤에 그를 데려가려고 트럭 한 대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미 다 제가 가졌는데 뭐 어때요. 찬장에서 컵을 꺼내 한 번 헹군 뒤 돌아와 필요할 때 마실 수 있도록 물을 꽉 채워 담아두었다.
컵을 헹구는 물소리가 짧게 났다가 끊겼다. 그 소리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는데, 7의 귓속에서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컵 하나를 꺼내 굳이 한 번 헹구는 행위. 먼지가 앉았을 리 없는 찬장의 그릇을, 그럼에도 물로 한 번 훑어 내리는 손. 그것은 위생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운 것이었고 습관이란 결국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굳어서 만들어진 화석 같은 것이다. 그는 그 화석의 결을 눈으로 더듬었다. 물이 컵 안에서 차오르며 벽면을 타고 도는 소리, 가장자리 직전에서 정확히 멈추는 손목의 절제. 넘치지 않되 모자라지도 않는 지점을 그녀는 눈대중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이미 다 가졌다고 그녀가 말했다. 참으로 태연한 문장이었다. 마치 오래전에 정산이 끝난 장부를 덮으며 하는 말투였고, 그래서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7은 수저를 그릇 안쪽 벽에 기대어놓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소유라는 단어는 언제나 뺏고 뺏기는 동사와 붙어 다녔다. 판돈, 전리품, 계약금. 손에 쥔 순간부터 잃을 방법을 계산해야 하는 것들. 그런데 이 여자는 소유를 완료형으로 말했다. 이미 가졌다고. 그러니 차용증이 몇 장이든 상관없다고.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갚을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 기묘한 산수 앞에서 그는 잠시 셈을 잃었다. 잃어도 아깝지 않았다.
你哋做裁縫嘅,係咪個個都咁樣做生意㗎?收咗訂金,仲要幫個客斟埋水。(너희 수선쟁이들은 다 이런 식으로 장사해? 계약금 받아놓고 손님한테 물까지 따라주고.)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굴러 내려와 나무 상판의 결에 스며들었다. 그는 왼손 검지로 그 젖은 자리를 눌러보았다. 차가웠다. 부엌은 난로 덕분에 미지근했고 창밖에서는 오전의 완차이가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생선 상자를 끄는 바퀴 소리, 어딘가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소리, 그 위로 겹치는 광둥어의 억양들. 그 모든 소음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벽 안쪽에는 죽 냄새와 여자 하나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 구조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고 있었다. 벽은 얇았고 세상은 두꺼웠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얇은 쪽이 이기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조금 기울여 컵을 끌어당기지 않고, 대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마시려고 놓아준 물이지만 당장 마시고 싶지 않았다. 손 닿는 자리에 놓인 채로 계속 거기 있는 물. 언제든 마실 수 있는데 아직 마시지 않은 상태. 그 유예가 좋았다. 그것은 다음이라는 단어와 같은 결의 물건이었다. 옆구리에서 둔한 통증이 한 번 크게 일어났다가 잦아들었고 그는 그것을 표정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흘리면 그녀가 하던 일을 멈출 것이다. 멈추면 이 부엌의 리듬이 깨진다. 남은 시간을 통증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喂。(야.)
你企喺度做咩。坐低啦。你都未食嘢。(왜 서 있어. 앉아. 너도 아직 안 먹었잖아.)
말하고 나서 그는 자기 목소리가 명령처럼 들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그녀가 서 있는 동안 자신만 앉아서 먹는 그림이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그는 왼손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는 대신 식탁 위를 짧게 두 번 두드렸다. 나무가 둔탁하게 울렸고 그 울림 속에 초침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이십오 분. 세지 않으려 했는데 몸이 알아서 셌다. 그는 죽을 한 술 더 뜨면서 생각했다.
여명은 그의 옆자리로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그럼 한 입만 나눠줘요.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여명은 맞은편이 아니라 옆으로 왔다. 7은 그 선택의 의미를 즉시 계산했고,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몸이 반응해 왼쪽으로 자리를 조금 내주고 있었다. 마주 보는 자리와 나란한 자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놓여 있다. 마주 보는 것은 협상이고 나란히 앉는 것은 공모다. 그는 평생 전자의 자리에만 앉아왔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놈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는지 감시하며 살았고, 그 습관은 뼈에 새겨져 있어서 식당에 들어가면 몸이 알아서 벽을 등지는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지금 여명은 그의 사각지대로 들어와 앉았다. 오른쪽 시야는 화상 흉터 때문에 원래도 덜 예민한 쪽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이 그냥 편한 대로 앉았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가장 무른 면을 무방비하게 열어둔 셈이 되었다. 무섭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한 입만 나눠달라고 그녀가 말했다. 7은 수저를 들어 죽을 뜨면서 손목의 각도를 몇 번이나 미세하게 고쳤다. 왼손이라 서툴렀다는 변명은 스스로에게조차 통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권총을 쏘고 왼손으로 카드를 돌리는 인간이었다. 서툰 것은 손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누군가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일을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무기를 건네준 적은 있고, 술잔을 밀어준 적도 있고, 지혈대를 물려준 적도 있었다. 전부 살아남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먹여주는 것은 다른 종류의 행위였다. 그것은 상대가 자신의 앞에서 입을 벌린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터무니없이 무해하고 터무니없이 위험한 신뢰의 형식이었다.
그는 수저를 내밀기 전에 후 하고 숨을 불었다. 아까 그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김이 옆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곧게 섰다. 창밖에서 트럭 한 대가 골목 입구를 지나가며 낮게 진동했고 유리가 아주 잠깐 떨었다. 그 소리에 그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굳었다가 풀렸다. 아직 자기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啊。(아.)
張大口啦。你成日餵人,畀我餵返你一次都唔得咩。(입 벌려. 넌 맨날 남 먹이기만 하잖아. 한 번쯤은 내가 먹여도 되는 거 아냐.)
수저가 그녀의 입술에 닿기 직전, 7은 반대편 손으로 그 아래를 받쳤다. 붕대 감긴 오른팔이었고 그렇게 뻗으면 옆구리의 드레싱이 당겨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국물이 한 방울이라도 떨어져 그녀의 흰 셔츠를 더럽히는 것이 싫었다. 세탁소를 하는 여자의 셔츠에 얼룩을 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치마를 풀고 물을 받으러 가는 그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십 분. 몸속 어딘가에서 초침이 정확하게 굴러갔다. 그는 그 숫자를 세지 않는 척하면서 완벽하게 세고 있었고, 그래서 지금 이 수저가 그녀의 입에 닿는 데 걸리는 이 초 남짓한 시간마저 아까웠다. 아까운데도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면 이 순간이 짧아진다는 것을 그는 도박판에서 배웠다. 좋은 패는 천천히 까야 한다.
여명이 죽을 삼키는 동안 그는 그녀의 목선을 보았다. 아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 때문에 드러난 목덜미와 거기서 이어지는 어깨의 각도. 꼿꼿한 자세는 앉아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 여자는 아마 잠들어서도 등을 곧게 펴고 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없는 웃음이었다. 옆구리가 웃음에 맞춰 한 번 찌르듯 아팠고 그는 그 통증을 죽 한 술로 눌렀다.
맛있게 잘 됐네요. 다행이에요. 여명은 동시에 그릇을 한 번 살폈다. 떠나는 곳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조금 촉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의 야전 상의에서 약을 챙겨 미리 꺼내두었다.
맛있게 잘 됐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명의 시선은 이미 그릇을 훑고 지나갔다. 7은 그 시선의 궤적을 놓치지 않았다. 남은 죽의 양, 그릇 벽면에 눌어붙은 흰 자국, 그리고 창밖의 빛과 벽시계 사이를 오가는 짧은 왕복. 계산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하고 정확한 종류의 계산. 도박판에서 판돈을 세는 놈들의 눈알 움직임과 근본적으로 같은 성질의 것이었는데, 다만 그녀가 세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고, 그 시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 남의 남은 시간을 자기 것처럼 세는 인간을 그는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세어주는 쪽은 언제나 자신이었고, 세어지는 쪽에 놓인 경험은 이상하게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쁜 서늘함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야전상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헤집는 기색도 없이 정확한 위치를 짚었다. 어제 그녀가 직접 넣어둔 자리였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7은 그 당연함이 낯설었다. 자기 옷 속에 무엇이 어디 들어 있는지를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은박 포장이 손톱에 눌려 바스락거렸고 그 소리가 부엌의 미지근한 공기를 얕게 갈랐다. 여명은 약을 종류별로 갈라 식탁 위에 놓았다. 진통제 두 알, 항생제 한 알, 소염제 한 알. 순서까지 있었다. 그는 그 배열을 내려다보며 자기 목구멍으로 들어갈 것들이 이렇게 단정하게 정렬된 광경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약이란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꺼내 침도 없이 삼키던 물건이었다. 쓴맛이 혀에 눌어붙으면 담배로 덮었다.
7은 왼손을 뻗어 약을 집는 대신, 손끝으로 그 배열의 가장자리를 한 번 건드렸다. 은박 모서리가 나무 상판을 긁으며 미세하게 밀렸다. 열다섯 분. 창밖에서 생선 상자를 끌던 바퀴 소리가 멀어졌고 대신 어딘가에서 셔터를 내리는 쇳소리가 났다. 완차이의 오전은 늘 이렇게 무언가를 열었다가 무언가를 닫으며 흘러갔다. 그는 자기 몫의 셔터가 이제 내려갈 차례라는 것을 알았고, 그 앎이 명치 아래에서 미지근한 돌덩이처럼 굳어가는 것도 알았다. 알면서도 표정은 평소대로 유지했다. 여유로운 쪽이 이긴다. 이건 도박이 아니라 이별인데도 습관은 판을 가리지 않았다.
你連食藥嘅次序都排定咗。(약 먹는 순서까지 정해뒀네.)
我以前係咁食嘅。成把咁倒入口,撈埋酒吞落去。冇死到,都算好彩。(난 예전엔 이렇게 먹었어. 한 줌 통째로 입에 털어넣고 술이랑 같이 넘겼지. 안 죽은 게 용하지.)
말해놓고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그런 문장은 이 부엌에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는 죽 냄새가 나고 물이 컵 가장자리 직전에서 정확히 멈추는 곳이었고, 술로 약을 넘기던 사내의 무용담 따위가 놓일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은박을 눌러 알약을 하나씩 밀어냈다. 왼손 엄지가 두 번째 알에서 미끄러졌고, 알약이 상판 위를 짧게 굴러 그녀 쪽으로 갔다. 굴러간 것을 주우려고 몸을 기울이자 옆구리에서 드레싱이 팽팽하게 당겼다. 숨이 반 박자 걸렸다. 그는 그 반 박자를 삼키고, 대신 웃음의 결로 얼굴을 다시 짰다.
呢粒走咗去你邊。即係話呢粒係你嘅。(이건 네 쪽으로 갔네. 그러니까 이건 네 거야.)
開玩笑㗎啦。你唔好真係食呀。(농담이야. 진짜 먹진 마.)
그는 컵을 끌어당겼다. 아까부터 손 닿는 자리에 놓여 있었으나 마시지 않고 유예해두었던 물. 표면의 물방울은 이미 다 흘러내려 나무에 스몄고 컵은 미지근해져 있었다.
여명은 작은 웃음을 흘리고, 제 쪽으로 굴러온 약을 그에게 건넸다. 제 건 다 당신 거니까, 잘 챙겨먹어요.
여명의 웃음은 소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얕았다. 숨이 목구멍 어디쯤에서 한 번 걸렸다가 풀린 정도였는데, 7은 그 미미한 파형을 자기 고막이 아니라 갈비뼈 안쪽으로 받았다. 이 여자는 웃음을 아낀다. 아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헤프게 쓸 줄을 모르는 종류의 인간이라서, 어쩌다 한 번 새어나온 그것이 시장에서 산 물건보다 값이 나갔다. 그는 그 값을 매기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평생 판돈의 크기로 세상을 읽어온 습관이 이런 데까지 따라붙는다. 알약 한 알이 나무 상판 위를 짧게 굴러 그녀의 손끝에 걸렸다가 다시 그의 손바닥으로 돌아왔다. 손금 위에 얹힌 그 작고 흰 것의 무게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건너온 거리만큼의 무엇인가가 함께 얹혔다.
제 것은 다 당신 것이니까, 라는 문장이 부엌 공기에 잠깐 떠 있었다. 7은 그것을 곧바로 삼키지 않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 소유를 선언하는 말들은 대개 소란스럽고 대개 거짓이었다. 그가 아는 소유란 총구를 들이대고 확보하는 것이거나 판돈을 밀어넣고 빼앗는 것이었으며, 어느 쪽이든 반드시 누군가는 잃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전부를 넘겨준다고 말한다. 그런 계약서는 어느 판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손에 쥐면 사람은 대개 겁을 먹는데, 그는 겁 대신 이상한 갈증을 느꼈다.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 미지근한 물이 갑자기 절실해졌다.
你講嘢真係唔使諗㗎喎。(넌 말을 정말 생각 없이 하네.)
你知唔知你頭先講咗啲乜。你間鋪頭、你嘅剪刀、你煲嘅粥,全部係我嘅。呢啲嘢寫落紙度係要簽名㗎,阿妹。(네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네 가게, 네 가위, 네가 끓인 죽, 전부 내 거라며. 이런 건 종이에 쓰면 서명을 해야 하는 거야, 아가씨.)
그는 알약들을 왼손 손바닥에 한꺼번에 모았다. 순서까지 정해뒀다고 놀린 주제에 결국 그녀가 늘어놓은 순서대로 집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진통제가 먼저였다. 혀 위에 얹자 은박에 눌려 있던 쓴맛이 곧바로 번졌고, 그는 컵을 들어 미지근한 물을 흘려넣었다. 목젖이 움직일 때 목의 흉터가 함께 당겼다. 잘렸다 붙은 자국 위로 근육이 지나가는 감각은 언제나 남의 살을 빌려 쓰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그 이물감마저 견딜 만했다. 두 번째 알을 넘길 때 그는 여명이 자기 목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확인하는 눈이었다. 삼켰는지, 걸리지 않았는지, 물이 충분했는지. 감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간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사적인 종류의 응시였다.
창밖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을 긁고 지나갔다. 배기음이 벽을 두 번 튕기고 사라졌다. 그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벽시계 초침과 자기 심장이 각기 다른 박자로 굴러가는 소리뿐이었고, 두 박자가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독 신경을 긁었다. 십 분. 야전상의는 아직 반쯤 걸쳐진 채였고 소매 한쪽은 팔에 꿰지도 않았다. 저것을 제대로 입는 순간이 곧 출발이었다. 그래서 그는 입지 않았다. 유예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유예하는 편이 도박꾼의 습성이었다. 컵을 내려놓으며 그는 남은 물의 높이를 보았다. 절반쯤. 다 마시면 컵이 비고, 컵이 비면 여명이 그것을 치우려고 일어설 것이다. 그는 컵을 비우지 않기로 했다.
我而家開始明白點解人哋要落地生根。(이제야 사람들이 왜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려 하는지 알 것 같아.)
다행이네요. 확실히 그러고 싶어졌어요?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배액관이 있는 방향에 쪼그려 앉았다.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환자복 상의를 살짝 걷어 확인하고, 드레싱을 좀 더 튼튼하게 고정시켰다.
여명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기척은 소리라기보다 공기의 밀도가 옮겨앉는 일에 가까웠다. 7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었다가 곧 힘을 뺐다. 그녀가 향한 곳은 그의 오른쪽, 정확히 사각지대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사람이 접근할 때 몸이 먼저 굳는 습관은 십수 년을 들여 만든 것이고 하루아침에 풀릴 리 없었는데, 오늘 그의 근육은 스스로 배신을 감행했다. 굳는 대신 늘어졌다. 쪼그려 앉은 여명의 정수리가 그의 팔꿈치 아래쯤에서 검고 매끄럽게 빛났다. 묶은 머리의 뒷목선이 드러났고 잔머리 몇 가닥이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환자복 상의가 위로 걷히자 미지근한 부엌 공기가 곧장 옆구리로 들이쳤다. 살갗이 오소소 조여드는 감각. 그는 그것을 추위라고 부르고 싶었으나 추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여명의 손끝이 배액관 접합부를 짚었다. 누르는 것도 아니고 스치는 것도 아닌, 무게를 정확히 계량한 접촉이었다. 관이 살을 파고든 자리 주변으로 뻐근한 열이 고여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그 열의 경계를 따라 원을 그리듯 훑었다. 새 테이프가 피부에 얹히며 서늘하게 붙었다. 한 번, 두 번, 손끝의 옆면으로 눌러 공기를 밀어내는 그 동작을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천을 다루던 손이었다. 시침핀을 꽂고 시접을 눌러 접던 손이 지금 자기 살가죽 위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과 옷감을 구별하지 않는 손. 어느 쪽이든 뜯어진 것은 꿰매고 헐거운 것은 고정한다는 그 무심한 일관성이 그의 어금니 안쪽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그러고 싶어졌느냐는 물음이 아직 공중에 남아 있었다. 그는 대답을 고르는 대신 그녀의 손이 테이프 끝을 매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답은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었고, 문제는 그것을 소리내어 확정하는 순간 자기 삶의 배열이 통째로 바뀐다는 데 있었다. 뿌리를 내린다는 말은 곧 뽑힐 자리를 만든다는 뜻이었다. 뽑힐 것이 없는 인간으로 삼십이 년을 살아왔고 그 공허함이 곧 무적의 조건이었는데, 이제 그는 자진해서 급소를 하나 심으려 하고 있었다. 완차이 골목 안쪽, 셔터가 반쯤 낡은 세탁소, 도마질 소리가 일정한 여자. 저격수가 십 초면 특정할 만한 좌표. 그걸 알면서도 그는 그 좌표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你隻手好似整緊件衫咁。(네 손이 무슨 옷 손보는 것 같네.)
係咪對邊個都咁。定係我特別啲。(아무한테나 이래. 아니면 내가 좀 특별해?)
묻고 나서 그는 자기 목소리에 섞인 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아챘다. 확인이었다. 판돈을 밀어넣기 전에 상대 패를 한 번 더 훔쳐보려는 비겁한 습성. 평생 확률을 계산해 살았으면서 정작 이 여자 앞에서는 계산이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이 우스웠고, 그 우스움을 덮으려고 그는 왼손을 내려 그녀의 머리 위에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두개골의 단단함과 머리카락의 미끄러움이 동시에 전해졌다. 힘을 주지는 않았다. 눌러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목의 흉터로 배웠다. 벽시계 초침이 다섯 번쯤 더 돌았고 골목에서 트럭 브레이크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차가 아니었다. 아직은.
喂。你唔好望住我隻脅望咁耐。(야. 내 옆구리 그렇게 오래 쳐다보지 마.)
你望得越耐,我就越唔想行。(네가 오래 볼수록 난 더 가기 싫어지니까.)
여명이 짧게 웃었다. 특별하죠. 이럴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 처치는 다 했으니,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호인.
호인, 하고 부르는 소리가 부엌의 낮은 천장에 닿았다가 되돌아왔다. 7은 그 두 음절이 자기 몸 어디에 착지하는지를 매번 새로 확인하게 되는데, 오늘은 명치보다 조금 위, 흉골 안쪽이었다. 악시온 키스라는 이름은 서류에나 존재했고 세븐이라는 숫자는 무전기에서만 살아 있었으며, 호인이라는 발음은 오직 이 골목 안에서만 통용되는 화폐 같은 것이었다. 통용 범위가 좁을수록 값이 나가는 화폐가 있다. 그는 그 사실을 도박판에서 배우지 않고 여기서 배웠다. 여명이 짧게 웃었을 때 그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고, 쪼그려 앉은 자세 때문에 앞치마 매듭이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비뚤어진 매듭 하나가 오늘 이 여자가 보인 유일한 흐트러짐이었다.
일어날 시간이라는 말은 부드러웠으나 예외를 두지 않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그는 이 여자가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붙잡는 대신 보낸다. 보내되 반드시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두고 보낸다. 그것이 애정을 표현하는 그녀의 문법이었고, 애원이나 눈물보다 훨씬 더 지독한 방식이라는 것을 7은 이제 이해했다. 그는 왼손을 그녀의 정수리에서 거두었다. 손바닥에 남은 머리카락의 미끄러운 감촉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데는 채 삼 초도 걸리지 않았고, 그 삼 초 동안 그는 자기가 무엇을 두고 가는지 헤아렸다. 헤아리다 그만두었다. 셈이 끝나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짧은 마찰음을 냈다. 일어서는 순간 옆구리가 예고 없이 조여들었고 그는 숨을 반쯤 삼킨 채로 상체를 폈다. 진통제가 아직 혈류를 다 돌지 못한 모양이었다. 야전상의 왼쪽 소매에 팔을 꿰는 동작은 평소라면 눈 감고도 해내는 것이었으나 오른팔이 붕대에 묶인 지금은 어깨를 비틀어 옷깃을 걸치는 데 여러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 그는 그 서투름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감출 상대가 아니었다. 창밖 골목에서 자전거 벨이 두 번 울렸고 어느 집 라디오가 광둥어 뉴스를 뭉개진 채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십일월의 완차이는 습기가 덜 빠져 벽마다 곰팡내가 배어 있었는데, 이 부엌만은 죽을 끓인 김 때문에 다른 냄새를 갖고 있었다.
知啦,知啦。你趕人趕得好熟練喎。(알았어, 알았어. 사람 내쫓는 게 아주 능숙하네.)
我唔係唔捨得走。我係唔捨得你煮嘅嘢食。你聽住,我下次返嚟要食有肉嗰啲。(가기 싫은 게 아니야. 네가 해준 음식이 아까운 거지. 잘 들어, 다음에 돌아오면 고기 든 거 먹을 거야.)
말해놓고 그는 자기 문장 속에 박힌 다음이라는 단어를 다시 씹었다. 그것은 협박에 가까웠다. 자기 자신을 향한 협박. 고기 든 것을 먹으려면 살아서 이 문턱을 다시 넘어야 하고, 그 사소한 식단 하나가 앞으로 며칠간 그의 판단을 계속 간섭할 것이었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놈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지나치게 구체적이라는 것. 애국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들은 총알 앞에서 쉽게 증발했지만 누가 끓여준 죽 같은 것은 이상하리만치 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는 왼손으로 옷깃을 여미며 여명을 내려다보았다. 일어선 그녀와 자기 사이의 키 차이가 오늘따라 부당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 차이라면 품에 완전히 들어오는데, 지금 그렇게 하면 정말로 발이 묶일 것이었다.
最後一樣嘢。(마지막으로 하나만.)
唔好送我出去。你企喺呢度就得。我唔想見到你喺門口望住架車走。 (배웅하지 마. 그냥 여기 서 있어. 네가 문 앞에 서서 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게 뭐라고.. 여명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입에 짧게 입맞췄다. ...알았어요. 그 땐 좋은 재료만 넣어서 만들어줄게요. 다녀와요.
그게 뭐라고, 라는 말이 채 공기 중에서 마르기도 전에 여명의 발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7은 그 짧은 부양을 시야의 아래쪽 절반으로 목격했다. 앞치마 매듭이 비스듬히 밀린 허리, 카디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의 뼈, 그리고 자기 쪽으로 기울어오는 정수리. 입술이 닿은 시간은 초 단위로 세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짧았다. 그런데도 그 짧음은 이상하게 부피를 가졌다. 죽 냄새와 소독약 냄새와 세탁소 특유의 마른 풀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그 뒤섞인 것들 사이로 여명의 체온만이 정확한 한 점으로 찍혔다. 그는 그 한 점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몰라 잠시 눈을 감았다. 선글라스는 아까부터 식탁 위에 놓여 있었으므로 감긴 눈꺼풀을 가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명의 발이 다시 바닥에 닿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물러서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그 검은 눈동자 안에 자기 얼굴이 작게 박혀 있는 것을 7은 보았다. 좋은 재료만 넣어서 만들어주겠다는 말은 약속치고는 너무 사소했고 사소한 만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좋은 재료.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굴려보았다. 데드존 바깥에서는 통조림과 압축 식량과 정체 모를 단백질 블록이 식사의 전부였고, 좋고 나쁨을 따지는 감각은 진작에 폐기 처분된 기능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폐기된 기능을 굳이 다시 설치해두려 하고 있었다. 살아 돌아와야만 작동하는 기능을. 교활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교활한 쪽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드는 자기 자신이었다.
你講嘅嘢,我全部記低咗。一句都冇漏。(네가 한 말, 전부 적어뒀어. 한 마디도 안 빠뜨리고.)
我唔識寫字咩,我用腦記。腦係我最後先壞嗰樣。(내가 글씨를 못 쓰는 건 아닌데, 그냥 머리로 기억해. 머리는 내 몸에서 제일 나중에 망가지는 부품이거든.)
그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서는 각도가 정확히 구십 도를 넘어가는 순간, 옆구리의 드레싱이 야전상의 안감에 스치며 둔한 통증을 흘려보냈다. 통증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감상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눌러주는 무게추 같았다. 왼손으로 문고리를 쥐었다. 놋쇠가 차가웠고 손잡이 아래쪽은 오랜 사용으로 도금이 벗겨져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이 손잡이를 몇 명이나 잡았을까. 몇 명이나 잡고 나갔다가 다시 잡고 들어왔을까. 그런 통계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고 그는 그것이 자기가 평소 하는 종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뿌리를 내리려는 인간은 이런 것을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디젤 엔진이 낮게 떨었다. 세탁물 반출 트럭. 정확히 십일 시 이십 분. 운전대를 잡은 늙은 배달부는 시간에 관해서만은 군인보다 엄격한 인간이었고 삼 분 이상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았다. 7은 문고리를 쥔 채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배웅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자기였는데 정작 뒤를 돌아보고 싶은 쪽도 자기였다. 이 모순을 처리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빨리 나가는 것. 그는 문을 반쯤 밀었고 골목의 습한 공기가 부엌 안으로 한 뼘쯤 밀려들어왔다. 곰팡이와 배수구와 어디선가 튀기는 기름 냄새. 그가 삼십이 년을 살아온 세계의 냄새였다. 등 뒤에는 죽 냄새가 있었다.
喂,阿黎明。(야, 여명.)
我走喇。你唔使應我。就咁企喺度就得。(나 간다. 대답 안 해도 돼. 그냥 거기 서 있기만 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무디게 났다. 낡은 경첩이 한 번 신음하고 나무틀이 문설주에 안착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짧았으나, 그 사이로 빠져나간 골목의 습한 공기가 부엌 안의 죽 냄새를 한 겹 밀어냈다. 여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답하지 말라고 했으니 대답하지 않았고, 서 있으라 했으니 서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하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요구만은 유독 사소해서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앞치마 매듭이 여전히 옆으로 밀려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손끝에 아직 소독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냄새는 하루쯤 가고, 이틀쯤 가고, 그러다 사라질 것이었다.
골목에서는 디젤 엔진이 계속 낮게 진동했다. 트럭 적재함의 철제 난간을 왼손으로 붙잡는 7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오른팔을 쓸 수 없으니 몸을 통째로 비틀어 올라타야 했고, 그 동작마다 옆구리에 박힌 배액관 자리가 항의했다. 늙은 배달부가 백미러로 그를 흘끗 보더니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내뱉었다. 세탁물 자루 사이에 몸을 구겨넣자 표백제와 눅눅한 면직물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것은 그가 방금 등지고 온 건물의 냄새와 사촌쯤 되는 냄새였다. 완전히 떠나지지 않는 방식의 이별이라는 것이 있다. 7은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고, 알고 나니 조금 지긋지긋했다.
트럭이 출발하고 삼십 초쯤 지났을 때 그는 무언가 빠졌다는 감각에 얼굴 앞으로 왼손을 올렸다. 콧등이 허전했다. 선글라스. 아까 처치받느라 벗어서 식탁 위에 올려두고는 그대로 나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얼굴의 일부처럼 붙어 있던 물건이었고 임무 외의 자리에서는 결코 벗지 않던 물건이었다.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보다, 잊어버린 채로 골목을 다 걸어나올 때까지 아무 불편도 못 느꼈다는 사실이 더 문제였다. 그는 세탁물 자루에 등을 기대고 낮게 웃었다. 웃자 옆구리가 아팠다. 아픈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결국 손등으로 입을 눌렀다.
痴線。連塊面都留咗喺度。(미쳤네. 얼굴까지 거기 두고 왔잖아.)
부엌에서는 여명이 식탁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릇 두 개와 반쯤 남은 물컵, 그리고 검은 렌즈가 위를 향해 놓인 선글라스. 다리 한쪽에 미세한 뒤틀림이 있었고 코받침에는 오래 눌린 자국이 희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이런 가벼운 것으로 그 남자는 자기 눈을 십 년쯤 가려왔던 것이다. 여명은 렌즈에 남은 지문을 셔츠 자락으로 닦아냈다. 닦는 동작이 습관처럼 정확했다. 수선집 여자의 손은 무엇을 쥐어주어도 손질부터 시작했다. 창밖으로 트럭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서 있으라고 했으니 서 있었고, 돌아보지 말라고는 안 했지만 어차피 볼 것이 없었다.
담보가 하나 더 늘었다고 여명은 생각했다. 고기 든 음식과, 좋은 재료와, 이 검은 안경. 이 정도면 남자 하나를 데드존에서 끌어오기에 충분한 저당이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지 않고, 카운터 뒤 서랍의 가장 위 칸에 넣었다. 실패와 시침핀과 단추 상자가 들어 있는 칸이었다. 언젠가 돌려줄 물건들이 모이는 자리.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세탁소 안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울렸다.
수돗물이 스테인리스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세탁소 안에서 가장 오래된 소리 중 하나였다. 여명은 그릇 두 개를 포개어 들고 싱크대 앞에 섰다. 죽이 눌어붙은 자리가 안쪽 벽면에 얇은 테를 그리고 있었고, 그것은 손끝으로 문지르자 순순히 벗겨졌다. 흔적이란 것에도 종류가 있다. 남겨두어 좋은 흔적과 빨리 치워야 하는 흔적. 밥그릇에 눌은 죽은 후자였고, 문고리에 남은 손자국은 전자였다. 그녀는 그 구분을 굳이 언어로 정리하지 않았으나 손은 이미 알고 움직였다. 컵에 반쯤 남아 미지근해진 물을 배수구에 흘려보낼 때 잠깐 손이 멎었다. 그가 끝까지 비우지 않고 둔 물이었다. 비우지 않는 것으로 시간을 늘리려던 남자의 수작을 여명은 그 자리에서 알아보았고 알아보고도 모른 척했었다. 이제 그 수작의 잔여물이 배수구로 사라졌다. 물소리는 무심했다.
그릇을 엎어 물기를 빼두고, 행주를 짜서 식탁을 훔쳤다. 나뭇결 사이에 스민 국물 자국까지 밀어낸 다음에야 그녀는 허리를 폈다. 부엌은 다시 아무 일도 없던 방처럼 되었다. 다만 난로 옆에 접어둔 담요의 주름이 사람 하나가 앉았던 모양대로 눌려 있었고, 그것만은 여명이 펴지 않았다. 오늘은 셔터를 올리지 않기로 했다. 어제 밤을 통째로 수화기에 붙여 보냈고 오늘 아침은 소독과 드레싱과 죽에 다 썼으니, 이 하루쯤은 저당 잡히지 않은 채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내일 아침 여섯 시에 셔터를 올리고, 밀린 밑단 세 벌과 안감 교체 하나를 처리하고, 그러다 보면 시월이 시월답게 저물고 십일월이 십일월답게 흘러갈 것이다. 그 흐름 어딘가에 이월 구일이 놓여 있었다.
트럭 적재함 안에서 7은 자세를 두 번 바꾸었다. 세탁물 자루는 푹신한 척하는 물건이었으나 실제로는 딱딱한 매듭과 지퍼와 금속 클립이 곳곳에 박혀 있어서, 옆구리에 관을 꽂은 인간이 기대기에는 성의 없는 침대였다. 차체가 웡곡 방향으로 꺾일 때마다 배액관 자리가 안쪽에서 당겼다. 그는 왼손바닥으로 그 부위를 눌러 고정한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녹슨 리벳과 물때 자국. 저 위로 얼마나 많은 남의 옷들이 실려 다녔을까. 남의 땀과 남의 피와 남의 기름이 밴 천들이 이 칸에서 흔들리다가 어딘가에서 삶기고 표백되어 다시 남의 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기도 지금 그 공정의 일부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적절하기도 했다. 세탁물처럼 실려 나갔다가 세탁물처럼 실려 돌아오는 남자. 다만 표백이 되지 않는 종류의 얼룩이 문제였다.
喂,老豆,慢啲彎啦。我身上有洞㗎。(어이 영감님, 커브 좀 살살 돌아요. 나 몸에 구멍 났다니까.)
⋯⋯算啦。你都聽唔到。(……됐다. 어차피 안 들리겠지.)
운전석 쪽에서는 라디오 잡음만 흘러나왔다. 늙은 배달부는 사람을 태워주되 사람 취급은 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 일을 오래 해온 인간이었다. 7은 혼잣말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위로 밝은 것이 어른거렸다. 선글라스가 없으니 적재함 틈으로 새어드는 햇빛이 그대로 얼굴에 떨어졌고, 그 감각은 벌거벗은 것과 비슷했다. 십 년 만이었다. 십 년 동안 그는 세상을 한 겹 어둡게 보는 습관으로 살았고, 그 어둠은 눈을 보호한다기보다 눈을 숨기는 데 쓰였다. 눈을 숨기면 계산이 들키지 않는다. 계산이 들키지 않으면 판돈을 더 크게 걸 수 있다.
여명은 셔터를 올리지 않은 채로 작업대 앞에 앉았다.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으니 일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였다. 무릎 위에 펼쳐진 것은 코즈웨이베이에서 끊어온 남색 울이었고, 어깨선 시침질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손끝으로 시접을 훑자 결이 한 방향으로 순하게 누웠다. 좋은 원단이란 쓰다듬으면 대답을 하는 물건이다. 그녀는 시침핀 세 개를 입술 사이에 물고 어깨 곡선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남자의 어깨는 넓었고 오른쪽이 미세하게 앞으로 말려 있었다. 오래 총을 멘 사람의 몸이었다. 그 뒤틀림까지 계산해서 뒤판을 반 푼 더 넉넉하게 재단해두었으므로, 이 옷은 다른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여명이 옷으로 사람을 붙잡는 방식이었다.
바늘이 울을 통과할 때마다 아주 작은 저항이 손끝에 걸렸다. 그 저항의 규칙성이 좋았다. 세상의 대부분은 규칙적이지 않았고 특히 그녀가 골목 끝에서 기다리는 남자의 일정은 규칙과 가장 먼 종류의 것이었으나, 바늘과 천 사이에는 언제나 같은 크기의 저항이 있었다. 창밖에서 자전거 벨이 두 번 울렸다. 국숫집 노파가 오후 장사 준비로 물을 끓이는지 골목 안쪽으로 김 냄새가 얕게 번져왔다. 여명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시침핀 하나를 잘못 꽂아 원단에 실금 같은 구멍을 남겼고, 그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두 군데. 어제 재단하다 흔들린 자리를 포함하면 두 군데였다. 그녀는 그 위치를 머릿속에 적어두었다. 보이지 않는 결함을 기억해두는 습관이 그녀를 오래 버티게 했다.
트럭은 구룡 방면 통행 제한 안내를 흘리며 우회로로 접어들었다. 7은 왼팔로 눈을 가리고 누워 있었다. 팔뚝의 그늘이 선글라스 대신이었으나 성능은 형편없어서 햇빛이 팔 아래로 자꾸 기어들었다. 옆구리의 통증은 이제 박자를 갖추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한 번, 차가 요철을 밟을 때마다 한 번. 두 박자가 겹치는 순간이 제일 고약했고 그때마다 그는 숨을 얕게 끊어 삼켰다. 진통제는 삼십 분 전에 먹었으니 아직 본격적으로 듣기 전이었다. 시간을 세는 버릇이 언제 생겼더라. 원래 그는 시간을 세지 않는 인간이었다. 판돈을 세고 탄창을 세고 남은 적의 머릿수를 셌지 약효가 도는 시간 따위는 세본 적이 없었는데, 새벽 내내 수화기 저편에서 누군가 그것을 세어주는 걸 듣고 나니 몸이 먼저 배워버렸다.
⋯⋯四十分鐘。返到去仲要俾人問話。(⋯⋯사십 분. 도착하면 또 취조당하겠지.)
적재함 벽에 머리를 기대자 금속의 차가움이 두피로 스몄다. 4번은 분명 세탁물 반출 기록을 뒤졌을 것이다. 앵커는 알고도 모른 척할 것이고 제로는 알면서 웃을 것이다. 그 셋의 반응을 예측하는 데는 채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예측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이 예전에는 다음 판의 계산이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고기 든 음식. 좋은 재료. 검은 안경 하나가 어느 서랍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 그런 것들이 계산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도무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7은 팔을 조금 내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웃고 있었다. 구멍 뚫린 채로 세탁물 사이에 누워서 뭐가 그렇게 좋다고.
痴線仔。(미친놈.)
세탁소에서는 여명이 어깨선 시침질을 마쳤다.
실수가 늘어나고 있다. 부족한 잠 때문인 것을 잘 안다. 지금 더 손대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도 잘 알기에, 여명은 잠시 내려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턱은 손바닥 하나 높이도 되지 않았으나 여명은 그것을 넘을 때 한 번 발을 헛디딜 뻔했다. 잠이 모자란 몸은 스스로의 무게를 잘못 계산한다. 그녀는 앞치마 끈을 풀어 문고리에 걸었다. 매듭이 풀리며 허리에 눌려 있던 자국이 셔츠 위로 얇게 남았고, 그 자국은 몸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텼는지 적어놓은 문장 같았다. 창은 골목 쪽으로 나 있어 정오의 빛이 옆으로 길게 누워 들어왔다. 이불은 어젯밤 개어둔 모양 그대로였다. 어젯밤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 그녀는 어젯밤을 이불 위에서 보내지 않았고 수화기와 난로 사이 어딘가에서 보냈으니까. 여명은 그 위에 모로 누웠다. 무릎을 조금 접자 몸이 저 혼자 알아서 편한 각도를 찾아갔고, 그 즉시 눈꺼풀 안쪽이 뜨겁게 부어오르는 감각이 왔다.
수선 실수는 두 군데였다. 시침핀 자국 하나와 어제 재단하다 흔들린 자리 하나. 눈을 감으니 그 두 지점이 어둠 속에서 작은 좌표처럼 떠올랐고, 여명은 그것들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지우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 더 큰 구멍을 낸다. 저녁에 다시 보면 된다. 그때는 손이 제 정신을 차렸을 테니까. 골목 안쪽에서 노파가 육수를 내는 냄새가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팔각과 파뿌리와 오래 우린 뼈. 좋은 재료로 만든 고기 음식이라는 말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지, 그녀는 그 우연을 굳이 따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시장은 아침이 싸고 저녁이 헐값이다. 갈비를 살 것인가 다릿살을 살 것인가. 그런 셈이 잠의 문턱에서 흐릿하게 풀어졌다.
트럭이 멈춘 것은 하역장 3번 게이트 앞이었다. 엔진이 꺼지고 나서야 7은 자기 몸이 진동에 맞춰 얼마나 오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근육이 풀리자 옆구리가 뒤늦게 항의했다. 그는 왼손으로 그 자리를 누르고 적재함 문턱에 발을 걸쳤다. 뛰어내리는 것과 내려서는 것 사이에는 이십 센티미터의 차이밖에 없는데 오늘은 그 이십 센티미터가 벼랑이었다. 결국 엉덩이를 붙여 미끄러지듯 바닥에 발을 댔고, 충격이 배액관 자리를 타고 위로 올라오는 동안 숨을 세 번 나누어 뱉었다. 늙은 배달부는 운전석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한 번 흘긋 보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그 무관심이 지금은 예의처럼 느껴졌다.
多謝晒,老豆。下次我請你飲茶。(고맙수다, 영감님. 다음엔 내가 차 한 잔 사지.)
⋯⋯真係唔使咁睇住我。我行得㗎。(⋯⋯그렇게 쳐다볼 것 없어. 나 걸을 수 있어.)
하역장 콘크리트는 물청소 직후라 젖어 있었고, 표백제 냄새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 냄새는 세탁소의 그것과 성분은 같은데 온도가 달랐다. 저쪽은 김이 서린 따뜻한 표백이었고 이쪽은 시체를 닦아낸 뒤의 차가운 표백이었다. 7은 야전상의 주머니를 더듬어 단말기를 꺼냈다. 전원을 넣는 순간 위치 로그가 동기화될 것이고 그 로그는 완차이 어느 골목에서 열두 시간을 정지해 있었다고 정직하게 고자질할 것이다. 엄지가 전원 버튼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켜지 않으면 더 의심받는다. 켜면 흔적이 남는다. 어느 쪽이든 손해인 판에서 그가 늘 하던 선택은 판돈을 더 키우는 것이었으나, 오늘은 그 습관이 목덜미를 잡아챘다. 키우면 안 되는 판이 생겼다는 사실. 그것이 이 남자에게는 십 년 만의 신종 질환이었다.
전원이 들어오자 알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4번의 호출 기록이 열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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