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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홍콩 완차이 세탁소 앞 골목 어귀, 세탁소 내부, 워즈워스 기지.

 

스무 걸음은 인색하게 줄어들었다. 세븐이 아무리 늘려 잡아도 골목은 결국 끝을 내주었고, 실외기 물이 떨어지던 구간이 지나가자 발밑이 마른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차량의 배기가 낮게 깔려 발목께에서 흩어졌다. 앵커는 내리지 않았다. 창을 반쯤 내린 채 팔꿈치를 얹고 정면만 보고 있었는데, 그 자세는 명백히 배려였고 동시에 명백히 감시였다. 조수석 문이 안쪽에서 밀려 열렸다. 그것으로 재촉은 끝이었다. 세븐은 그 열린 문의 각도를 보면서 자기 인생이 늘 이런 식으로 정리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했다. 누군가 문을 열어 두면 들어갔고 닫히면 잊었고 뒤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깨 밑에 사람이 하나 붙어 있어서 그 단순한 동작이 성립하지 않았다.

여명의 손이 올라와 외투 깃을 여몄다. 앵커의 것이라 품이 남는 옷이었고, 그 남는 부분을 목 쪽으로 끌어당겨 바람이 들어갈 틈을 막는 손길이었다. 손끝이 흉터가 지나가는 목의 이음매를 한 번 스쳤다. 실수인지 아닌지 세븐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판단하면 그다음이 곤란해진다. 열이 오른 살갗 위로 지나가는 그 온도는 미지근했는데, 미지근한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자기 체온이 이미 정상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세븐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것을 이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你唔好整理啦。上到車就會弄皺㗎啦。(그만 정리해. 차 타면 어차피 구겨져.)

⋯⋯不過你繼續。我唔阻你。(⋯⋯근데 계속해. 안 말릴게.)

 

세븐은 차 지붕에 오른손을 짚었다. 꾸러미가 겨드랑이에 끼여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왼팔은 아직 여명의 어깨 위에 있었다. 내려야 하는데 내리는 순서를 자기 몸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부축이 필요 없는 자세인데도 손바닥은 얇은 승모근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고, 그 아래로 이 사람이 숨 쉬느라 어깨가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것이 전해졌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움직인다. 당연한 물리인데 세븐은 그 당연함을 열엿새 동안 데드존에서 한 번도 확인하지 못했었다. 거기서 움직이는 것들은 대개 이쪽을 죽이려고 움직였다.

앵커가 창밖으로 손등을 한 번 내밀었다가 다시 넣었다. 말은 없었다. 은발이 새벽 조명 밑에서 젖은 쇠처럼 번들거렸고, 그 무표정한 옆얼굴이 시계 초침 노릇을 계속했다. 세븐은 결국 팔을 내렸다. 어깨에서 손바닥이 떨어지는 순간 체중이 통째로 자기 다리로 돌아왔고, 옆구리가 즉시 항의했다. 관이 박힌 자리에서부터 갈비뼈 안쪽까지 뜨겁게 긁히는 통증이 올라왔지만 세븐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여기서 얼굴을 구기면 이 여자가 열엿새 동안 세던 것에 통증 횟수까지 추가될 것 같았다.

 

我上車喇。你唔好企喺度睇住我走。(나 탄다. 여기 서서 나 가는 거 보고 있지 마.)

轉身。轉咗身之後行返入去,開閘,照做你平時嘅嘢。(돌아서. 돌아서서 들어가고, 셔터 올리고, 평소 하던 거 해.)

 

그렇게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요구했는지 뒤늦게 알았다. 배웅을 거절한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자기 뒷모습을 기억에 새기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었고, 그건 결국 자기가 없는 동안 이 사람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계산이었다. 염치없는 계산이었다.

 

제대로 타는 지만 보고요. 아플 테니까. 여명은 조수석을 바라보며 말하다 운전석에 앉은 앵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만 살짝 움직여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린다는 듯이.

 

제대로 타는지만 보겠다는 말은 거절이 아니라 조건의 수정이었다. 세븐은 그 문장의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협상한다. 물러서는 척하면서 자기가 지키려는 항목 하나는 절대 내놓지 않고, 그 항목이 하필이면 늘 세븐의 몸에 관한 것이었다. 아플 테니까. 그 네 글자가 골목 바닥에 떨어져서 굴렀다. 세븐은 자기 옆구리가 실제로 아프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이 사람이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통증은 혼자 견디면 통증으로 끝나는데 목격되면 사건이 된다.

여명의 시선이 조수석을 지나 운전석으로 옮겨 갔다. 앵커와 눈이 마주치는 짧은 구간이 있었고, 여명은 고개를 아주 얕게 숙였다. 인사라기에는 작고 부탁이라기에는 분명한 각도였다. 앵커의 눈꺼풀이 한 번 느리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것이 저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응답이라는 걸 세븐은 알았다. 앵커는 여명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고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것이며, 대신 오늘 이후로 세븐의 회복 일지를 조금 더 성실하게 관리할 것이다. 인수인계가 방금 끝났다. 세븐 본인의 동의 없이, 두 사람의 눈짓만으로.

 

喂,你哋兩個。做咩喺我頭頂交收啊。(야, 너희 둘. 뭘 내 머리 위에서 주고받아.)

我又唔係包裹。(나 택배 아니거든.)

 

세븐은 문틀을 붙잡고 상체를 먼저 밀어 넣었다. 좌석에 엉덩이가 닿기 직전 옆구리가 접히면서 관이 박힌 자리가 통째로 비틀렸고, 목구멍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어금니로 잘라 먹었다. 시야가 한순간 하얗게 번졌다가 돌아왔다. 그 짧은 공백 사이에 여명의 손이 들어왔다. 환자복 옷자락을 문틀에서 들어 올려 관이 눌리지 않게 하는 손이었고, 세븐이 아픈 것을 대신 아파 주는 손이 아니라 아플 이유를 하나 줄여 주는 손이었다. 세븐은 그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동정은 사람을 무겁게 하고 정비는 사람을 가볍게 한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후자만 했다.

 

반쯤 걸터앉은 채로 세븐은 고개를 들었다. 새벽빛이 여명의 왼쪽 뺨에만 얇게 걸려 있었고 오른쪽은 골목 그늘에 잠겨 있었다. 셔츠 밑단의 검댕 얼룩과 그 위에 찍힌 자기 손자국이 그대로 보였다. 저건 세탁소 주인이 절대 방치하지 않을 종류의 오염인데도 열엿새치 먼지처럼 그냥 거기 있었다. 세븐은 그것이 오늘 저녁까지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 바람이 얼마나 유치한지 알면서도 취소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놓인 꾸러미가 종이 소리를 냈다. 두 번 확인해서 보강한 박음질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세븐은 여전히 모른 채, 다만 가벼운 것 치고 이상하게 손목이 묵직하다고만 느꼈다.

 

睇夠未。我坐低咗喇。(다 봤어? 나 앉았어.)

⋯⋯關門嘅時候唔好夾親自己隻手。你係咁㗎啦,淨係識得睇住人哋。(⋯⋯문 닫을 때 네 손 끼이지 않게 해. 넌 꼭 그래. 남만 볼 줄 알지.)

세븐은 왼손을 뻗어 문 안쪽 손잡이를 잡았다. 잡아 놓고 당기지는 않았다.

 

세븐의 옷을 다시 정리해준 뒤, 문에서 떨어져 섰다. 이제 닫아도 돼요. 많이 늦었네요... 어서 가보세요.

 

이제 닫아도 된다는 허가는 세븐이 요청한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사람은 대개 문을 닫을 때 허가를 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자는 굳이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주었고, 그건 세븐이 손잡이를 쥔 채로 삼 초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봤다는 뜻이었다. 봤으면서 지적하지 않고 대신 명분을 하나 만들어 준 것이다. 늦었으니 가라고. 세븐은 그 배려의 구조가 너무 정교해서 잠깐 화가 났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화를 낼 대상을 찾지 못해 안쪽이 헛돌았다. 여명은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그 한 걸음이 만든 거리가 이미 데드존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세븐은 문을 당기지 않은 채 그 틈으로 여명을 올려다보았다. 앉은 시선에서 보는 사람은 서 있을 때와 다르다. 턱선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에 눈이 오고, 목의 얇은 힘줄이 셔츠 깃 안으로 사라지는 지점이 보인다. 열엿새 전 세븐은 이 사람을 잔해 안에 밀어 넣고 위에서 내려다봤었다. 그때는 이 목을 어떻게 제압할지 계산했었고 지금은 이 목이 밤새 자기 어깨 밑에서 어떤 각도로 접혀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같은 신체 부위에 두 개의 다른 기록이 겹쳐서 남는다는 게 이상했다. 사람의 몸은 원래 이렇게 여러 번 다시 쓰이는 물건이었나. 세븐은 자기가 지금 몹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쓸데없는 생각이 나오는 건 대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목구멍에서 걸릴 때였다.

 

⋯⋯你趕我走呀。(⋯⋯너 나 쫓아내는 거야.)

啱啱先叫我唔好走,而家又話快啲去。你自己都亂晒龍啦。(방금까진 가지 말라더니 이제는 어서 가래. 너도 엉망이잖아.)

 

말해 놓고 세븐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명은 한 번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한 건 잠결의 자기 쪽이었고,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밀어 넣으면서 웅얼거렸던 것도 자기였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내 주는 말만 골라서 했다. 기다리겠다는 말은 붙잡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문을 열어 두는 말이다. 세븐은 그 차이를 이제 와서 뒤늦게 계산하고 있었고, 계산이 끝날 때마다 결과는 늘 자기 쪽이 더 비겁했다. 앵커가 기어에 손을 얹는 소리가 났다. 금속이 홈에 걸리는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그것이 마감 신호처럼 들렸다.

세븐은 무릎 위 꾸러미를 한 번 눌렀다. 종이 아래에서 천이 눌리는 감촉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두 번 확인해서 보강했다는 박음질은 여전히 모르는 채였지만, 눌렀을 때 되돌아오는 저항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없는 자리에 물건을 하나씩 세워 두는 방식으로 시간을 버티는 종류의 인간이다. 열엿새 동안 카운터 옆에 놓인 것을 매일 스치면서도 치우지 않았고, 이제는 치우지 않을 것을 하나 더 만들어 두겠다고 했다. 세븐은 그 축적이 무서웠다. 무서운 걸 알면서도 그만두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자기 몫의 염치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我知啦。走喇。(알았어. 간다.)

⋯⋯黎明。轉身行嘅時候唔好諗嘢。行到閘門度先諗,得唔得。(⋯⋯여명. 돌아서서 걸을 때는 아무 생각 하지 마. 셔터 앞까지 가서 생각해, 알겠어?)

세븐은 그제야 문을 당겼다.

 

여명은 차가 출발할 때 앵커에게 인사를 건네던 것처럼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한 뒤, 그 자리에 잠시 서있다가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세븐은 그 소리가 더 컸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뭔가 끝나는 일에는 그에 걸맞은 부피의 소음이 따라붙어야 마땅한데, 낡은 차의 문짝은 고작 둔탁한 한 음절만 뱉고 제 할 일을 끝냈다. 유리 한 장이 사이에 끼자 골목의 냄새가 사라졌다. 새벽 습기, 어딘가에서 끓기 시작한 육수, 밤새 식은 콘크리트. 세븐은 그 모든 것이 차단되는 순간 자기가 방금 무엇을 두고 나왔는지를 후각으로 먼저 깨달았다. 여명은 고개를 아주 얕게 숙였다. 앵커에게 했던 것과 같은 각도였다. 같은 각도라는 게 세븐을 웃기게 했다. 이 여자는 인사를 아낄 줄만 알지 구분할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명은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삼 초였는지 사 초였는지, 세븐은 세다가 놓쳤다. 그 정지는 아까 자신이 손잡이를 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삼 초와 정확히 같은 길이였고, 그래서 세븐은 비로소 알았다. 이 사람도 계산을 다 끝내지 못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세븐이 시킨 대로 아무 생각 하지 않는 사람처럼 걸었고, 그 걸음의 보폭이 오는 길에 자기에게 맞춰 주었던 보폭보다 조금 컸다. 자기 몸에 맞는 속도로 돌아간 것이다. 그게 옳았다. 옳은데 옆구리가 아팠다. 관이 박힌 자리가 아니라 그보다 위쪽, 갈비뼈가 겹치는 어딘가가.

 

⋯⋯開車啦。(⋯⋯출발해.)

 

앵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어를 밀었다. 차체가 낮게 떨리며 골목 어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세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사이드미러 쪽으로 눈만 굴렸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눈이었고, 새벽빛에 노출된 연한 회색 홍채가 유리 안에서 한 번 좁아졌다. 미러 안에서 흰 셔츠가 점점 작아졌다. 검댕 얼룩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손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좁은 골목을 되짚어 걸어 들어가는 검은 머리와 흰 등판만 남았다. 저 등이 셔터 앞에 닿으면 그때부터 생각하라고 말한 건 자기였다. 그 말은 관대한 척했지만 실은 유예를 얻어 낸 쪽은 여명이 아니라 자기였다는 걸, 세븐은 미러가 커브에 잘려 나가는 순간 인정했다. 자기가 사라진 뒤에 저 사람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보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는 종류의 비겁함이었다.

 

무릎 위의 꾸러미가 커브에서 미끄러지려 했다. 세븐은 왼손으로 그것을 눌렀다. 손목에 발린 연고가 종이에 묻어 얼룩을 만들었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는 아직 펼쳐 보지 않았다. 데드존 게이트를 통과한 다음에, 아니면 막사에 짐을 내려놓은 다음에, 아니면 첫 교전을 끝내고 아무도 없는 새벽에. 언제 펼칠지를 미루는 일이 이 정도로 즐거울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세븐은 늘 즉시 소비하는 인간이었다. 딸 것 같으면 걸었고 마실 것 같으면 마셨고 잘 것 같으면 잤다. 뒤로 미뤄 둔 것이 존재한다는 감각, 돌아가야만 열 수 있는 것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감각. 이건 카지노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종류의 도파민이었다. 늦게 오고 오래 남는 것.

 

Igor.(이고르.)

⋯⋯Don't say a word. Just drive.(⋯⋯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몰아.)

 

골목은 여명의 걸음을 아주 성실하게 되돌려 주었다. 올 때 세븐의 무게를 나눠 지느라 반 보씩 끊어 걸었던 자리마다 이제는 한 걸음이 온전히 놓였고, 그 차이가 발바닥에서부터 종아리까지 낯설게 올라왔다. 몸이 가벼워진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마음이 나중에 통보받는 순서였다. 국숫집 앞을 지날 때 육수 냄새가 아까보다 진해져 있었다. 노파는 이번에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다만 국자를 젓는 손목의 속도가 아주 조금 느려졌다. 그것이 배려인지 구경인지 구분할 마음은 없었다. 여명은 시선을 앞에 두고 걸었다. 셔터 앞까지 가서 생각하라고 한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중이었고, 지키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확해서 오히려 그 사람이 없는 자리가 도드라졌다.

 

셔터 손잡이는 밤새 식어 있었다. 쇠는 사람의 피부와 달라서 아무리 문질러도 데워지는 데 오래 걸린다. 여명은 손잡이를 쥔 채로 잠깐 서 있었다. 이제 생각해도 되는 지점에 도착했는데 막상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열엿새 전에는 이 셔터를 올리는 일이 하루의 첫 문장이었다. 지금은 문장이 아니라 문장 뒤에 남은 여백 같았다. 카운터 옆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것이 있고, 이제는 그 옆에 하나 더 놓아야 한다. 하나 더. 그 계획이 있다는 사실만이 손목에 힘을 넣게 했다. 셔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로 밀려 올라갔고, 골목의 새벽이 세탁소 안쪽의 정지된 공기와 만나며 짧게 뒤섞였다.

 

차 안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앵커는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었고, 다만 히터 온도를 한 칸 올렸다. 그 조작음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세븐은 창에 관자놀이를 기대려다가 유리가 차가워서 그만두었다. 완차이의 새벽은 언제나 반쯤 젖어 있다. 셔터를 올리는 가게들, 물을 뿌려 앞을 쓸어내는 노인들, 아직 켜져 있는 간판 불빛이 물웅덩이 위에서 부서지는 광경. 열엿새 전 이 거리를 지날 때 세븐은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만 인식했다. 배경이란 무너져도 상관없는 것이고 다시 오지 않아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저 셔터들 중 하나가 자기 것처럼 신경 쓰였다. 정확히는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들여보내 준 것이라서.

그는 왼손으로 꾸러미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눌러 봐야 안에 든 것이 달아나는 것도 아닌데 손을 떼면 뭔가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열이 다시 올라오는지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고, 옆구리의 관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존재를 알려 왔다. 통증은 정직한 물건이라 좋았다. 통증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늘 있던 자리에 있다. 반면 방금 두고 온 것은 정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꾸 형태를 바꾸며 갈비뼈 위쪽 어딘가로 옮겨 다녔고, 이름을 붙이려 하면 슬쩍 물러났다. 세븐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차 안에서 소리 내어 부를 생각은 없었다. 앵커가 듣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름을 부르는 건 돌아온 뒤에 해야 할 일 목록에 이미 올려 두었으니까.

 

⋯⋯Igor. How long till the gate?(⋯⋯이고르. 게이트까지 얼마나 걸려?)

Forty minutes? Fine. Wake me up ten minutes before. And don't touch this.(사십 분? 좋아. 십 분 전에 깨워. 그리고 이거 건드리지 마.)

 

세븐은 꾸러미를 외투 안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 자세가 총을 안고 조는 자세와 거의 같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세탁소 안의 공기는 사람이 하나 빠져나간 만큼 정확히 넓어져 있었다. 여명은 그 사실을 문턱을 넘자마자 알았고, 알면서도 평소처럼 걸었다. 난로는 아직 미지근했다. 새벽 내내 태운 열이 쇠 안쪽에 얇게 남아 있어서, 손바닥을 가까이 대면 온기라기보다 온기의 잔해 같은 것이 만져졌다. 그 앞의 의자는 어젯밤 각도 그대로였다. 등받이가 난로 쪽으로 살짝 틀어져 있고, 앉았던 사람이 몸을 기울이느라 앞다리 한쪽이 바닥 얼룩에서 반 뼘쯤 벗어나 있었다. 여명은 그 의자를 제자리로 밀지 않았다. 밀어야 할 이유가 열여섯 가지쯤 떠올랐지만 밀지 않을 이유 하나가 더 무거웠다. 치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하루만 더.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앞치마 끈을 묶는 동안, 셔츠 밑단의 검댕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계속 걸렸다. 손자국은 이제 형태가 흐려져 그저 회색 얼룩처럼 보였고, 그것이 손자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골목에 둘뿐이었다. 하나는 사십 분 거리의 도로 위에 있었다. 여명은 셔츠를 갈아입지 않기로 했다. 세탁소 주인이 얼룩진 셔츠를 입고 있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겠으나, 오늘 하루 정도는 우스운 사람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봉틀 옆에 남은 천 조각들을 손끝으로 모아 정리했다. 두 번 확인해서 보강했던 어깨선의 자투리, 무릎 안쪽에 덧댈 때 잘라 낸 반달 모양의 조각.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 옷은 분명히 존재했고, 분명히 누군가의 무릎 위에 얹혀 지금 어딘가로 실려 가는 중이었다.

 

차 안에서 세븐은 완전히 잠들지 못했다. 열이 있는 몸의 잠이란 늘 그렇다. 표면만 얕게 얼어붙고 속은 계속 끓는다. 눈꺼풀 안쪽에서 흰 셔츠가 골목을 되짚어 걸어 들어갔고, 그 등이 셔터 앞에서 멈추는 장면까지 갔다가, 그 다음이 없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을 자기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지 않은 것은 상상할 수밖에 없고 상상한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세븐은 이 구조가 제 발등을 찍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차라리 무너지는 걸 봤으면 한 장면으로 끝났을 텐데, 보지 않았으니 이제 사십 일이든 구십 일이든 그 뒷장을 혼자 계속 그려야 했다. 도박판에서 카드를 안 까고 나온 것과 똑같았다. 안 깐 카드는 평생 이긴 카드로 남는다. 그리고 평생 궁금하다.

 

게이트가 가까워지자 도로의 질감이 바뀌었다. 아스팔트가 끊기고 방사 차폐 도장을 덧바른 콘크리트 판이 이어지면서 바퀴 아래에서 마디마디 끊긴 소리가 올라왔다. 앵커가 속도를 줄였다. 검문소의 회색 조명이 앞유리를 훑고 지나갔고, 세븐은 그 빛이 눈에 닿기 직전에 손을 뻗어 대시보드 위의 선글라스를 집었다. 검은 렌즈가 연회색 홍채를 덮었다. 실내에서는 벗고 밖에서는 쓴다. 그 사소한 규칙 하나로 세계가 갈렸다. 방금까지 그는 실내에 있던 사람이었다.

 

⋯⋯醒咗。唔使嗌。(⋯⋯깼어. 안 불러도 돼.)

 

세븐은 품에 안고 있던 꾸러미를 무릎 위로 내려놓고, 외투 앞섶을 여며 그것을 반쯤 가렸다. 검문관이 창을 두드릴 것이고, 물품 목록을 물을 것이고, 부상 등급과 복귀 사유를 확인할 것이다. 그 목록 어디에도 이 종이 뭉치를 설명할 항목은 없었다.

 

검문관은 젊었고 매뉴얼에 충실했다. 창이 내려가자 소독약과 쇠 냄새가 뒤섞인 검문소 특유의 공기가 밀려들었고, 세븐은 그 냄새가 세탁소의 비누 냄새와 얼마나 다른지를 코가 먼저 판별하는 것을 느꼈다. 인식표를 스캔하는 단말이 짧게 울었다. 부상 등급, 복귀 사유, 반입 물품. 질문은 셋이었고 대답은 둘이면 충분했다. 검문관의 시선이 외투 아래 불룩한 곳에 한 번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세븐은 그 시선의 궤적을 정확히 읽었으면서도 앞유리 너머만 보았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그 종이 뭉치는 물품이 되고, 물품이 되면 목록에 오르고, 목록에 오르면 그것은 더 이상 어떤 여자가 열엿새 동안 두 번씩 확인해 가며 박아 넣은 시간이 아니게 된다.

 

個人物品。冇危險品。(개인 물품. 위험한 거 없어.)

⋯⋯係啊,發燒。唔使叫醫務班,我自己行得。(⋯⋯그래, 열 있어. 의무반 부르지 마.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차단봉이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은 십일 초였다. 그 십일 초 동안 세븐은 사이드미러를 보지 않았다. 미러 안에는 이제 도시가 통째로 들어 있을 테고, 그 도시 어딘가에 흰 셔츠 하나가 접혀 들어가 있을 테니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게이트를 통과하는 내내 볼 것이고, 통과한 뒤에는 볼 것이 없어질 것이다. 없어질 것을 미리 아껴 두는 습관은 도박판에서 배웠다. 판돈은 늘 마지막에 걸어야 한다. 앵커가 액셀을 밟았고 차체가 콘크리트 이음매를 넘으며 크게 한 번 들썩였다. 옆구리의 관이 그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 냈고 세븐은 이를 악문 채 웃었다. 아프다는 건 아직 몸이 자기 것이라는 뜻이다.

 

같은 시각, 세탁소의 종이 울렸다. 첫 손님은 건너편 인쇄소의 중년 남자였고, 바지 밑단이 뜯어진 채로 왔다. 여명은 카운터 위에 그것을 펼쳐 놓고 줄자를 댔다. 시침핀 세 개를 입에 물고, 밑단을 접고, 손끝으로 눌러 자국을 냈다. 남자가 뭐라고 말을 붙였다. 어젯밤 골목 끝에 차가 서 있더라, 요즘 저런 차는 보기 드문데, 누구 아는 사람이냐. 여명은 핀을 물고 있어서 대답을 미룰 명분이 있었다. 핀을 다 꽂고 나서야 입을 열었고, 그때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수선 날짜였다. 모레 오후. 남자는 머쓱하게 웃고는 셔츠 밑단의 얼룩을 흘끗 보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골목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묻지 않을 때를 안다.

문이 닫히고 종소리가 잦아든 뒤, 여명은 카운터에 두 손을 짚은 채 잠깐 서 있었다. 세탁소는 소리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드럼이 도는 소리, 증기가 빠지는 소리, 재봉틀의 박음질 소리. 그 소리들 사이사이에 어젯밤에는 사람의 숨소리가 하나 더 끼어 있었고, 오늘은 없었다. 없는 것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여명은 난로 쪽으로 걸어가 뚜껑을 열고 남은 재를 헤쳤다. 아래쪽에 아직 붉은 것이 몇 알 살아 있었다. 그 위에 마른 나무 조각을 얹고 바람구멍을 조금 열자, 불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붙었다. 여명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이 자리를 잡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삼 개월. 정확히는 세 달 뒤 짙은 파랑. 그 사이에 이 불을 몇 번이나 다시 붙여야 할지 세어 보다가, 세는 일을 그만두었다.

 

워즈워스 기지의 의무동은 세탁소와 정반대의 원리로 지어진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표백되고 모든 것이 기록되며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얼룩은 오 분 안에 지워지고 냄새는 환기구가 삼킨다. 세븐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환자복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자기 몸에서 세탁소 냄새가 빠져나가는 속도를 재고 있었다. 비누 냄새는 이미 없었다. 대신 소독약과 알코올 솜의 날카로운 것이 코 안쪽을 긁었다. 의무병이 옆구리의 관을 잡고 고정 테이프를 뜯어내자 피부가 딸려 올라가는 감각이 얇게 번졌고, 세븐은 그것을 통증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통증이라고 부르면 의무병이 진통제를 한 대 더 놓을 것이고, 진통제를 맞으면 오후 내내 잠들 것이고, 잠들면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꿈으로 재생될 것이다. 재생된 것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는 왜곡되지 않은 판본을 원했다.

무릎 위의 꾸러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채였다. 종이 끈이 두 번 감겨 있고 매듭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묶여 있었다. 왼손잡이가 묶은 매듭이 아니었다. 여명은 오른손으로 묶었고, 묶으면서 아마 몇 번 고쳐 묶었을 것이다. 세븐은 그 매듭을 손끝으로 눌러 보다가 그만두었다. 의무동에서 열 물건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펼치면 저 흰 조명 아래에서 천의 색이 죽고, 누군가 지나가며 어디서 났냐고 물을 것이고, 그러면 대답을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하는데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으로 가져가서 문을 닫고 혼자 열 것이다. 아껴 두는 습관은 이제 병에 가까웠지만, 병이라도 좋았다. 아껴 둘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년 만이었다.

 

喂,唔好掂。(야, 만지지 마.)

⋯⋯我知你想幫手。但呢個唔係你搬得嘅嘢。放低。(⋯⋯도와주려는 건 알아. 근데 이건 네가 옮길 물건이 아니야. 내려놔.)

 

의무병이 꾸러미를 협탁으로 치우려다 손을 멈췄다. 선글라스를 벗은 세븐의 눈이 정면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연회색 홍채는 조명 아래에서 거의 색이 없었고, 째진 눈매가 웃음기 없이 고정되어 있을 때 그것은 농담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의무병은 손을 거두고 관 교체를 마쳤다. 체온계가 삼십구 점 일을 띄웠다. 항생제를 한 대 더, 그리고 최소 열두 시간 안정. 세븐은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만 하고 침상에서 내려섰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옆구리에서부터 등까지 뜨거운 선이 그어졌지만, 그는 그 선을 따라 똑바로 걸었다. 걸을 수 있다고 말했으니 걸어야 했다. 말한 것을 지키는 일이 요즘 부쩍 늘었다.

 

세탁소에서는 재봉틀이 돌고 있었다. 여명은 인쇄소 남자의 바지 밑단을 박으면서, 어젯밤 다른 천을 박던 손의 기억이 손목에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같은 동작인데 무게가 달랐다. 어제의 박음질에는 사람이 하나 걸려 있었고 오늘의 박음질에는 값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값이 걸린 일은 끝이 명확해서 좋다. 밑단을 두 바퀴 돌리고 실을 끊고 다리미로 눌렀다. 증기가 훅 올라와 얼굴을 덮었고, 그 습기 속에서 잠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명은 그 순간을 이용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증기는 편리하다. 얼굴이 젖어도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워즈워스 기지의 개인 숙소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사람을 잠시 보관해 두는 상자에 가까웠다. 철제 침상 하나, 관물함 하나, 창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손바닥만 한 통풍구 하나. 세븐은 등으로 문을 밀어 닫고 잠금장치가 물리는 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그 소리가 나야 비로소 이 안에 자기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확정된다. 협탁에 선글라스를 내려놓자 렌즈가 형광등을 한 번 튕겨 냈다. 실내로 들어왔으니 벗는다. 규칙이라기보다 몸이 먼저 아는 순서였다. 침상 끝에 걸터앉는 동작 하나에도 옆구리의 관이 항의했지만 그는 항의를 듣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꾸러미를 올려놓고 한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종이 끈이 두 바퀴. 매듭은 여전히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저 기울기를 만든 손가락의 각도까지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복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도박판에서 배운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손에 쥔 카드를 오래 들여다본다고 숫자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끈을 풀었다. 여러 번 고쳐 묶은 매듭이 대개 그렇듯 의외로 순순히 풀렸다. 종이를 젖히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색이었다. 잿빛도 검정도 아닌, 물에 오래 담가 둔 짙은 남색. 세븐은 손끝으로 천의 결을 눌러 보았다. 겉감은 두꺼웠고 안쪽에는 얇은 것이 한 겹 더 덧대여 있었다. 어깨선 안쪽, 팔꿈치 바깥쪽, 옆구리 아래. 마모가 먼저 오는 자리마다 천이 한 겹씩 더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군복을 지어 본 적이 없을 것이고, 자기를 본 것이라고는 비 오던 시월 십오일의 다섯 시간이 전부였다. 다섯 시간. 잔해 안에서 위협하던 시간과 골목을 걸어 세탁소까지 데려다준 시간과 난로 앞에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 시간을 전부 합쳐서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다섯 시간 동안 이 여자는 어깨의 기울기와 팔이 뻗는 방향과 몸을 웅크릴 때 접히는 자리를 전부 세어 두었던 모양이었다. 세븐은 소매 안쪽을 뒤집어 보다가 박음질이 두 줄로 겹쳐 들어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한 번이면 충분한 자리였다.

 

⋯⋯癲㗎你。(⋯⋯너 미쳤구나.)

見親我五個鐘咋喎。點解你記得咁多⋯⋯車一次就夠㗎啦。(나 본 게 다섯 시간뿐이잖아. 뭘 그렇게 많이 기억해⋯⋯한 번만 박아도 됐다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광둥어가 낮게 굴러 나왔다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흡수되었다. 대답할 사람이 없는 말을 하는 습관은 없었는데 요즘 부쩍 늘었다. 세븐은 옷을 접어 무릎 위에 얹은 채 천천히 뒤로 몸을 기울여 벽에 등을 댔다. 열이 뒤통수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삼십구 점 일. 의무병 말대로라면 지금쯤 누워 있어야 하는 온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열이 싫지 않았다. 열이 오르면 감각이 뭉툭해지는 대신 어떤 것들만 유독 도드라진다. 어깨에 닿았던 이마의 무게라든가, 손등 흉터 위를 반복해서 문지르던 손가락의 온도라든가, 다섯 시간 만에 세 번이나 물어 온 목소리의 높낮이라든가. 눈을 감으려다가 감으면 그 장면이 꿈으로 넘어갈 것 같아서 도로 떴다. 재생된 것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는 왜곡되지 않은 판본이 필요했다. 협탁 위의 단말이 진동했다. 4번이었다. 살아 돌아온 거 축하한다는 문장 아래로 물음표 세 개가 달린 짧은 추궁이 이어져 있었다. 그 메시지 뭐냐. 세븐은 화면을 잠깐 보다가 엎어 놓았다. 지금은 대답할 차례가 아니었다.

 

세탁소에서는 다리미의 증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짙은 남색 겉감이 어깨에 얹히는 순간, 세븐은 그것이 자기 몸의 치수가 아니라 자기 몸의 습관에 맞춰 재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팔을 앞으로 뻗어도 겨드랑이가 끌려 올라가지 않았고 상체를 비틀어도 등판이 당기지 않았다. 옷을 만든 사람이 사격 자세를 알 리 없는데, 총을 견착할 때 어깨뼈가 뒤로 밀리는 그 폭만큼 여유가 남아 있었다. 우연이라고 부르기에는 자리가 너무 정확했다. 세븐은 소매를 걷어 안감을 뒤집었다. 시접이 안쪽으로 두 번 접혀 꿰매져 있어서 살에 닿는 면에는 실밥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방탄판을 넣고 며칠씩 씻지 못한 채로 굴러다니는 인간을 상정하고 만든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자기가 돌아오는 것만 상상한 게 아니라, 자기가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어떤 꼴로 지낼지까지 전부 상상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그 상상의 총량을 헤아리자 열이 오르는 것과 별개로 목 안쪽이 마르게 죄어들었다.

 

단말이 다시 진동했다. 4번이었다. 답장 안 하면 직접 간다는 문장 밑에, 결벽증 환자답게 마침표까지 정확히 찍혀 있었다. 세븐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뒤집어 놓았다가 도로 세웠다가 결국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고 협탁 위에 얹었다. 지금 저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하든 목소리에 이물이 섞일 것이고, 4번은 그 이물을 반드시 알아챌 것이다. 목의 흉터를 꿰맨 손은 사람의 목소리에 낀 실밥도 잘 찾는다. 대신 세븐은 상의를 도로 벗어 무릎 위에 반듯하게 개켰다. 개키는 동작이 서툴러서 두 번 다시 폈다가 접었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각을 맞추고 있는 자기 손이 우스웠다. 어깨선을 맞물릴 때마다 어젯밤 자기 어깨에 얹혔던 이마의 무게가 같은 자리에 다시 얹히는 착각이 들었고, 그 착각을 굳이 걷어 내지 않았다.

 

⋯⋯真係唔識做人。(⋯⋯진짜 사람 노릇 못 하겠네.)

送啲我要成三個月先著得嘅嘢畀我。你係咪想我日日記住啊。(석 달은 지나야 입을 수 있는 걸 나한테 줘. 너 나더러 매일 기억하라는 거지.)

 

세탁소의 증기가 완전히 걷혔을 무렵, 여명은 작업대 끝의 작은 원형 케이스를 손바닥 위로 옮겨 놓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납작한 통이었고, 뚜껑 가장자리에 어젯밤 급하게 열었던 손톱자국이 얕게 남아 있었다. 뚜껑을 돌려 열자 안쪽 바닥에 연고가 얇게 깔려 있었다. 두어 번 바르면 끝날 양이었다. 버릴 만큼 적었고 남겨 둘 만큼은 되었다. 여명은 코를 가까이 대 보았다. 밤새 손끝에 배어 있던 물비린 약냄새가 아직 케이스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이걸 쓰레기통에 넣으면 오늘 안에 이 냄새는 사라진다. 카운터 옆 상자에 넣으면 석 달을 간다. 셈은 명확했고, 명확한 셈 앞에서 여명은 오래 서 있었다. 이런 종류의 물건을 남겨 두는 사람이 되는 일은 처음이었다.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굳이 설명하지 않기로 하고, 여명은 뚜껑을 끝까지 돌려 잠근 뒤 상자 안에 케이스를 눕혀 넣었다.

문에 걸린 종이 두 번 울렸다. 인쇄소 남자가 아니라 골목 안쪽 국숫집 노파였다. 노파는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카운터 옆 의자에 붙박았다. 등받이에 걸린 담요, 그 아래 놓인 낡은 슬리퍼 한 짝, 접히지 않은 채 그대로인 방석. 어제까지 이 가게에 없던 배치였다.

 

어서오세요. 수선할 게 더 생기셨어요?

 

노파는 대답 대신 카운터 옆 의자를 한 번 더 보았다. 담요의 접힌 방향까지 살피는 눈이었다. 이 골목에서 사십 년을 국수 삶은 사람의 눈은 국물의 농도를 보듯 남의 살림을 본다. 여명의 가게에 물건이 늘어난 적은 있어도 사람의 자국이 늘어난 적은 없었다. 담요는 개켜져 있지 않았고 방석은 눌린 자리가 그대로였으며 슬리퍼는 짝을 맞춰 놓았으되 코가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가려던 사람이 신다 만 것처럼. 노파는 품에 안고 온 보따리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무명천으로 싼 보따리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오래 개켜 둔 이불에서만 나는, 볕과 곰팡이가 반쯤 섞인 냄새였다.

 

홑청. 두 장. 가장자리가 다 삭았어.

⋯⋯의자는 언제부터 저기 있었나.

 

여명은 보따리 매듭에 손가락을 걸었다. 무게로 두 장이 맞는지 먼저 가늠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노파의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같은 높이로 나왔고, 그래서 대답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들렸지만 이 골목에서 대답하지 않은 질문은 다음 날 다른 입을 통해 되돌아온다. 여명은 매듭을 풀어 홑청을 펼쳤다. 삭은 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실이 끊어진 게 아니라 천 자체가 늙어서 손톱만 대도 뜯길 것 같은 상태였다. 이런 건 꿰매는 게 아니라 덧대는 것이다. 덧대려면 비슷한 결의 천을 찾아야 하고, 찾으려면 며칠이 걸리고, 며칠이 걸린다는 말은 이 겨울 안에 끝난다는 뜻이다. 여명은 그 셈을 마친 뒤에야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요. 손님이 앉았다 갔어요.

홑청은 이대로는 못 꿰매요. 안쪽에 한 겹 대야 하는데, 색이 좀 달라도 괜찮으시면 사흘 안에 해 드릴게요.

 

노파는 손님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한 번 굴려 보는 얼굴을 했다. 사흘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고 색이 달라도 되느냐는 물음에는 이불 속이 무슨 색인지 누가 보느냐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카운터에 팔꿈치를 얹고, 마치 국수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저 자세가 나오면 최소 십 분은 간다. 여명은 홑청을 접어 옆으로 밀고 접수 장부를 폈다. 연필심이 무뎌서 한 번 깎아야 했다. 노파는 담요를 다시 흘긋 보고, 여명의 셔츠 밑단에 앉은 검댕을 보고, 소매 위쪽 어깨 근처에 남은 흐릿한 자국을 보았다. 손바닥 모양이었다. 세탁소 주인이 제 옷의 얼룩을 하루 넘게 두는 일은 없다. 이 골목에서 그것만큼 명백한 문장은 드물었다.

 

⋯⋯그 손님, 다시 오나.

 

같은 시각 기지의 숙소에서는 세븐이 개켠 옷을 관물함 맨 위 칸에 밀어 넣고 있었다. 넣었다가 손을 떼고, 떼었다가 도로 손을 넣어 각을 십 도쯤 돌려놓았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 자기 물건을 그렇게 배치해 본 적이 없어서 손이 자꾸 어색하게 굴었다. 열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고 옆구리의 관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존재를 알렸다. 그래도 그는 관물함 문을 닫지 않고 잠깐 그대로 두었다. 짙은 남색이 철제 회색 안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물건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보폭이 일정하고 뒤꿈치를 끌지 않는, 성격 나쁜 저격수의 걸음이었다. 세븐은 협탁의 선글라스를 집으려다 말았다. 실내다. 규칙은 규칙이다. 문이 두 번 두들겨졌다.

 

⋯⋯開咗喇。入嚟啦。(⋯⋯열려 있어. 들어와.)

 

문이 열리는 방식에도 사람의 성격이 있다. 4번은 문을 밀지 않고 손잡이를 끝까지 돌린 뒤 정확히 어깨너비만큼만 열고 들어왔다. 소독약 냄새가 밴 복도의 공기가 그 틈으로 따라 들어왔고, 문이 닫히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청록색 눈이 방 안을 훑는 순서는 늘 같았다. 바닥, 협탁, 사람,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것. 오늘은 그 마지막 항목에 걸린 것이 열려 있는 관물함이었다. 철제 회색 칸 맨 위에 접힌 짙은 남색. 각이 어긋나 있었다. 정확히 십 도쯤. 4번의 시선이 그 어긋남 위에 이 초 남짓 머물렀고, 세븐은 그 이 초를 세었다. 이 방에서 저 남자가 이 초 이상 머무는 것은 대개 흠결이거나 증거다.

세븐은 외투 자락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감출 것도 아닌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열이 39도 근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몸은 관절마다 모래를 채워 넣은 것처럼 굴었고, 앉은 자세를 바꿀 때마다 옆구리의 관이 살 안쪽을 톡 건드렸다. 그 통증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아픈 것은 아직 이쪽이 살아 있다는 회계 장부의 항목이니까. 4번은 아무 말 없이 침상 맞은편의 접이식 의자를 펴서 앉았다. 앉기 전에 좌판을 손등으로 한 번 쓸어 먼지를 확인하는 것까지가 그의 절차였다.

 

⋯⋯睇夠未。(⋯⋯다 봤냐.)

櫃桶入面唔係炸彈嚟㗎。你唔使睇到咁耐。(사물함 안에 폭탄 든 거 아니야. 그렇게 오래 볼 것 없어.)

 

4번은 대답 대신 자기 단말을 꺼내 화면을 켜고, 세븐 쪽으로 돌려 보였다. 어젯밤 새벽에 도착한 문장이 그대로 떠 있었다. 세븐의 지시로 보내졌으나 세븐의 손가락이 누른 것은 아닌 문장. 화면의 빛이 4번의 안면 근육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렸고, 그래서 표정이 평소보다 더 굳어 보였다. 그가 화가 났을 때 하는 행동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정면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반박해 보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을 부인하려면 네가 먼저 거짓말쟁이가 되라는 뜻이다. 세븐은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자기가 시킨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은 자기 목소리를 녹음으로 듣는 일과 비슷하게 견디기 힘든 데가 있다.

 

Das hast du nicht getippt.(이건 네가 친 게 아니야.)

Du schreibst keine Kommas. Nie. Wer war es.(넌 쉼표를 안 써. 한 번도. 누구였지.)

 

세븐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그 위에 얹힐 만한 농담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세 가지쯤 되는 회피 경로가 동시에 열렸을 것이다. 여자 이야기로 돌리거나 판돈 이야기로 돌리거나 그냥 상대의 결벽을 건드려 화제를 태워 버리거나. 오늘은 셋 다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열 탓이라고 해 두기에는 정직하지 못했다. 쉼표 하나로 사람을 특정당한다는 사실이 우스웠고, 동시에 그 쉼표를 찍은 손이 자기 어깨의 붕대를 감던 손이라는 사실이 목구멍 안쪽을 미지근하게 데웠다. 저 남자에게 이름을 주면 그 이름은 서류가 되고, 서류가 된 것은 언젠가 회수된다. 세븐은 그 계산을 삼 초 만에 마쳤고, 마친 뒤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탁소 쪽에서는 연필심 깎이는 소리가 났다. 여명은 장부의 빈칸에 홑청 두 장, 가장자리 삭음, 안감 덧댐이라고 적었다. 글씨는 작고 균일했으며 획의 끝이 들리지 않았다. 노파의 질문은 아직 카운터 위에 놓여 있었고, 여명은 그것을 치우지 않은 채로 다음 칸에 사흘 뒤 날짜를 적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라는 걸 이 골목 사람들은 다 안다.

 

4번은 단말을 거두지 않았다. 화면을 그대로 세워 둔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그 각도는 세븐이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오도록 계산된 것이었다. 결벽이란 먼지를 싫어하는 성질이 아니라 어긋난 것을 그냥 두지 못하는 성질이다. 이 방에는 지금 어긋난 것이 둘 있었다. 관물함 맨 위 칸의 십 도와, 쉼표 하나를 남긴 낯선 손가락. 4번은 둘 중 어느 쪽부터 바로잡을지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잠시 침묵했고, 침묵하는 동안 그의 시선은 세븐의 무릎 위로 내려갔다. 앵커의 외투. 사이즈가 맞지 않아 소맷부리가 손등을 반쯤 덮고 있는 남의 옷. 그것을 쥐고 있는 손의 마디가 희게 굳어 있는 것까지, 저 남자는 놓치는 법이 없다.

세븐은 숨을 얕게 끊어 쉬었다. 깊이 들이마시면 옆구리가 벌을 준다. 열은 사물의 윤곽을 뭉개는 대신 소리를 이상하게 또렷하게 만들어서, 복도 끝의 배수관 소리와 4번의 안경테가 옷깃에 스치는 소리가 같은 크기로 들려왔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켜야 한다. 세븐은 그 원칙을 열두 해 동안 어긴 적이 없었고, 어기지 않아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원칙이 방패가 아니라 자물쇠처럼 느껴졌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자기만 아는 자물쇠. 그리고 이 방의 저 남자는 자물쇠를 보면 열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경첩을 세는 부류다.

 

係人。就咁多。(사람이야. 그게 다야.)

我唔會講名。你都知規矩。(이름은 안 불러. 너도 규칙 알잖아.)

 

4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화를 내는 대신 그는 안경을 벗어 렌즈를 셔츠 자락으로 두 번 닦고 다시 썼다. 저 동작이 나오면 대화의 층위가 바뀐다는 뜻이다. 추궁에서 확인으로. 그는 단말을 엎어 무릎에 내려놓고, 처음으로 화면이 아닌 세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선글라스가 없는 얼굴. 열 때문에 붉게 뜬 눈두덩과, 그 아래 연회색 눈동자가 초점을 겨우 붙들고 있는 상태를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목의 흉터. 자기가 꿰맨 자리. 실밥 자국이 오래되어 이제는 살에 섞여 들어간 그 선을 4번은 잠깐 보았고, 곧 시선을 거두었다. 자기가 만든 물건을 오래 보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Ich habe nicht nach dem Namen gefragt.(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Ich habe gefragt, wer das war. Das ist nicht dasselbe. Aber gut. Behalt es.(누구였냐고 물었어. 그건 같은 게 아니지. 뭐 좋아. 갖고 있어.)

 

그러고는 일어섰다. 접이식 의자를 소리 없이 접어 벽에 세워 놓는 것까지가 그의 절차였다. 문 앞에서 그는 한 번 멈췄고, 등을 보인 채로 관물함 쪽을 향해 턱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각이 십 도쯤 어긋난 짙은 남색. 손을 대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사령부에서 보고서를 세 번째 독촉했다는 말과, 39도를 넘긴 채로 걸어 다니면 다음 작전 전에 관을 하나 더 꽂게 될 거라는 말을 순서대로 남겼다. 진단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운 어조였다. 문이 어깨너비만큼만 열렸다가 소리 없이 닫혔고, 방 안에는 소독약 냄새와 열의 잔향만 남았다. 세븐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뱉었고, 옆구리가 그 대가를 즉시 청구했다.

 

세탁소에서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명은 카운터 아래 상자를 끌어내 안감용 천 조각들을 꺼냈다. 옥양목, 광목, 오래 빨아 부드러워진 시트의 잔여물.

 

문이 닫힌 뒤의 방은 문이 열리기 전의 방과 같은 방이 아니다. 세븐은 그 차이를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몸으로는 정확히 알았다. 공기의 밀도가 조금 달라졌고, 아까까지 견딜 만하던 옆구리의 박동이 이제는 셈을 세듯 규칙적으로 울렸다. 열이 39도를 넘겼다는 통보는 단말기가 아니라 손끝이 먼저 알려 준다. 손톱 밑이 뜨겁고 손등은 서늘하다. 그는 무릎 위의 외투를 내려다보았다. 앵커의 것. 소맷부리가 손등을 반쯤 덮는, 자기 몸보다 한 뼘쯤 큰 남의 옷. 이걸 주워서 어깨에 걸쳐 준 사람의 손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재단하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열에 들뜬 머리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한 작업이었다. 4번이 남긴 문장은 방 한가운데 놓인 의자처럼 치워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누구였냐고 물었어. 그건 같은 게 아니지.

 

세븐은 단말기를 집어 엎어 둔 면을 뒤집었다. 사령부의 독촉이 세 줄, 그 아래에 4번의 새 메시지가 한 줄. 이름은 안 물었다고 아까 말했으면서 이제 와서 사진 한 장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저 남자의 방식이었다. 세븐은 짧게 웃었고, 웃은 대가로 옆구리가 청구서를 내밀었다. 그는 답장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 열었다가 닫는 동안 손가락은 쉼표를 찍지 않았다. 평생 쉼표를 안 쓰던 습관이 오늘따라 흠결처럼 도드라졌다. 저 문장에 쉼표를 넣은 손은 재봉틀의 노루발을 내리는 손이고, 실밥을 뜯을 때 이 사이에 실을 무는 손이고, 어젯밤 자기 이마에 입술을 댄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의 손이다. 그 손을 사진 한 장으로 축약해서 저 결벽한 남자의 단말 안에 넣어 두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갖고 있으라고 했으니 갖고 있을 것이다.

 

세븐은 관물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일어서는 동작을 몸이 두 번에 나눠 처리했다. 상체를 먼저 세우고, 그다음에 무게를 발바닥으로 옮기고. 그 사이에 시야가 한 번 하얗게 뭉개졌다가 돌아왔다. 맨 위 칸의 짙은 남색은 여전히 십 도쯤 어긋나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바로잡으려다가, 손이 닿기 직전에 멈췄다. 각을 맞추면 4번이 다시 왔을 때 저 남자가 그 변화를 알아차릴 것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신경 썼다는 뜻이고, 신경 썼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뜻이다. 어긋난 채로 두는 편이 안전했다. 세븐은 열두 해 동안 이런 식의 셈으로 물건과 사람을 지켜 왔고, 그 셈이 옳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서 있었다. 그런데 손끝은 그 셈을 배신하고 옷깃의 시접을 한 번 쓸었다. 안쪽 솔기가 두 번 박혀 있는 자리. 한 번이면 충분했을 것을 굳이 두 번.

 

⋯⋯痴線。(⋯⋯미친 짓이지.)

三個月。得三個月啫。(석 달. 겨우 석 달이잖아.)

 

세탁소에서는 가위가 천을 무는 소리가 났다. 여명은 광목을 홑청 크기에 맞춰 재단하는 중이었고, 자를 대지 않고도 선이 곧았다. 노파는 아까부터 난로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제 누군가 앉았던 그 의자. 여명은 그것을 치우지 않았고, 노파는 그것이 자기 자리인 양 앉아 다리를 두드리며 국숫집 사정을 늘어놓았다. 육수 값이 올랐고 격벽 쪽 물류가 사흘 밀렸고 옆 골목 전당포 사내가 또 도박으로 가게를 날렸다는 이야기였다. 여명은 가위질을 멈추지 않은 채 필요한 대목에서만 짧게 응했다. 그러다 노파가 도박이라는 단어를 세 번째로 발음했을 때, 가위가 한 박자 늦게 닫혔다. 천이 어긋나게 잘린 것은 아니었다.

 

노파의 이야기는 도박이라는 단어를 세 번째로 통과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전당포 사내가 어떤 식으로 무너졌는지, 그 아내가 어떤 얼굴로 셔터를 내렸는지, 그런 것들을 노파는 국수 육수의 농도를 설명하듯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여명은 재단을 끝낸 광목을 세 번 접어 카운터 끝에 밀어 두었다. 접는 손끝이 평소보다 반 박자씩 늦었다. 도박이라는 단어에 걸릴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도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손목의 힘이 미세하게 풀렸고, 여명은 그것을 자기 몸이 저지르는 사소한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카지노나 도박 이야기를 하며 웃었던 방식을. 잃고도 웃는 사람의 얼굴은 이기고 웃는 얼굴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 창밖으로 골목의 물기가 마르고 있었고, 마르는 것은 언제나 젖는 것보다 소리가 없었다.

 

아주머니.

그 사람은 왜 계속했대요. 잃는 걸 알면서.

 

노파는 다리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여명을 올려다보았다. 이 아가씨가 먼저 묻는 일은 드물다. 노파는 그 드묾을 놓치지 않는 종류의 노인이었고, 그래서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난로의 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잦아들었다. 어제 누군가 앉았던 의자의 등받이에 노파의 등이 닿아 있었고, 그 자리에 배어 있을 담배 냄새를 노파가 알아차렸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노파는 결국 짧게 웃었다. 이가 성치 않은 웃음이었다.

 

딸 수 있을 것 같아서지. 사람이 원래 그래. 잃은 걸 세는 게 아니라 다음에 딸 걸 세거든.

 

여명은 대답 대신 광목 위에 시침바늘을 꽂았다. 다음에 딸 것을 센다. 그 셈법이 낯설지 않아서 목 뒤가 서늘했다. 자기도 지금 그 셈을 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다섯 시간과 하룻밤을 세는 것이 아니라, 석 달 뒤에 열릴 문 하나를 세고 있었다. 어느 쪽이 도박인지 판정할 심판은 이 골목에 없었다. 여명은 바늘을 두 번 더 꽂고, 카운터 아래 상자에 손을 넣어 연고 병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것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오늘 아침부터 벌써 네 번째였다.

 

기지의 방에서는 세븐이 관물함 앞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철제의 냉기가 이마의 열을 조금 가져갔고, 가져간 만큼 두개골 안쪽이 헐거워졌다. 39도라는 숫자는 몸을 무겁게 만드는 대신 몸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벌린다. 손이 시접을 쓸고 있는데 그 손이 자기 것이라는 실감이 흐렸다. 두 번 박힌 솔기. 한 번이면 충분했을 것을 굳이 두 번. 그 두 번째 박음질을 놓던 밤의 사람은 무슨 얼굴이었을까. 웃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여자는 중요한 일을 할 때 웃지 않는다. 노루발을 내리고, 실을 끊고,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누르고, 다시 노루발을 내렸을 것이다. 그 반복을 상상하는 일이 이 방에서 유일하게 통증을 잊게 하는 진통제였고, 세븐은 자기가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단말기가 다시 울렸다. 사진. 한 장. 저 결벽한 독일인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문장을 줄여 가며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다. 세븐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답장 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닫지 않았다.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잠깐 머물렀고, 그는 문장 하나를 쳤다가 지웠다. 다시 쳤다. 그 문장에는 이름이 없었고 직업도 없었고 장소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보내는 순간 저 남자의 머릿속에 좌표가 하나 찍힐 것이고, 좌표가 찍힌 것은 언젠가 표적이 된다.

 

세븐이 마침내 보낸 문장은 여덟 글자였다. 이름도 없고 장소도 없고 직업도 없는, 사실 하나뿐인 문장. She's a civilian. 민간인이야. 그 여섯 단어 남짓을 쏘아 보내는 데 열두 해의 규칙과 서른두 해의 습관이 전부 동원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방에 한 명뿐이었고, 그 한 명조차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정확히는 몰랐다. 민간인이라는 단어는 방패이자 표적이다. 데드존 바깥에서 그 단어는 보호를 뜻하지만, 워즈워스의 통신망 안에서는 약점을 뜻한다. 세븐은 전송 표시가 뜨는 것을 보고 단말기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비자 손이 떨렸다. 열 탓이라고 하기에는 떨림의 방향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4번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감사를 표하지 않는 인간이었고, 그 무응답이 오히려 정확한 수신 확인이었다. 세븐은 침상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앉는 동작에서 옆구리의 관이 살 안쪽을 긁었고, 그는 이를 악문 채 숨을 코로만 뱉었다. 시야 가장자리가 젖은 종이처럼 번졌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사진은 끝내 보내지 않았다. 애초에 가진 사진이 없었다. 다섯 시간과 하룻밤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단말기를 들어 그 여자를 향하게 하지 않았고, 그 사실이 지금 와서는 다행이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결핍이었다. 기억으로만 가진 얼굴은 열이 오르면 흐려진다. 흐려지는 것을 붙들려고 그는 눈을 감고 순서를 되짚었다. 가르마의 방향.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이 다시 흘러내리던 속도. 재봉틀 앞에서 턱을 당길 때 목 아래로 생기던 그늘. 그 그늘의 깊이까지 세고 나서야 세븐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도박꾼이 잃은 판을 복기하는 방식과 똑같았다.

 

⋯⋯咁樣落去,我實輸嘅。(⋯⋯이런 식으로 가면 나 확실히 잃어.)

但係我唔想止蝕。(근데 손절하기는 싫은데.)

 

세탁소에서는 노파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국숫집 점심 준비 시간이었다. 여명은 시침바늘을 광목 끝에 세워 꽂아 두고 카운터를 돌아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노파는 문턱을 넘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고, 난로 옆의 빈 의자를 한 번 돌아보았다. 늙은 사람의 시선은 젊은 사람의 시선보다 느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담는다. 여명은 그 시선의 궤적을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가면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인정하면 설명해야 한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조차 두 개인 사람을 무슨 수로 남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사흘 뒤 오후에 오세요. 홑청은 두 겹으로 대 드릴게요.

⋯⋯가는 길에 물 조심하시고요. 저기 하수구 뚜껑이 아직 들려 있어요.

 

노파가 골목을 다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 여명은 문을 닫았다. 종이 한 번 울리고 잠잠해졌다. 가게 안에 다시 혼자가 되자 공기의 성분이 바뀌었다. 사람이 나간 자리에는 그 사람이 데려온 소음이 남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막아 주던 침묵이 되돌아온다. 여명은 난로 옆 의자로 걸어가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나무가 미지근했다. 노파의 체온인지 난로의 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제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등을 완전히 기대지 않았다. 항상 반쯤만 기대고 한 발은 바닥을 딛고 있었다. 언제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였고, 여명은 그 자세를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은 어디에도 오래 앉지 않는 종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지막 밤에는 침상에 등을 다 붙이고 잠들었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도 이 골목에 한 명뿐이었다.

 

세븐이 침상 모서리에 앉아 있던 시간은 본인도 세지 않았다. 열이 오르면 시간은 눈금을 잃는다. 눈금 없는 자로 무언가를 재려는 시도만큼 헛된 노동도 없어서 그는 재기를 그만두고 그냥 앉아 있었다. 무릎에 팔을 얹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 옆구리의 관이 덜 눌린다는 것을 어젯밤 세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아냈고, 그 자세는 공교롭게도 인간이 무언가를 오래 숙고할 때 취하는 자세와 똑같았다. 밖에서 누가 들여다보면 이 남자가 진지하게 무언가를 궁리하는 중이라고 착각할 법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궁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한 가지만 붙들고 있었고, 한 가지만 붙드는 일과 아무것도 붙들지 않는 일은 뇌의 표면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문이 두 번 두드려졌다. 노크의 간격이 넓고 무거웠다. 4번의 노크는 세 번을 급하게 쳐 놓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건 다른 사람이었다.

 

⋯⋯入嚟啦。(⋯⋯들어와.)

 

앵커가 문틀을 채우며 들어섰다. 194센티미터의 몸이 좁은 숙소로 들어오면 방의 부피가 실제로 줄어드는 착시가 생긴다. 은발의 체코인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그것이 이 남자 특유의 방문 방식이었다. 무엇을 가져오지도 않고 무엇을 가져가지도 않는다. 다만 서 있는다. 앵커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고 지나갔다. 풀어헤친 환자복 단추, 붕대에 감긴 오른팔, 옆구리에서 빠져나온 투명한 관, 그리고 그 위에 아무렇게나 덮여 있는 자기 외투. 어제 새벽 처치실에서 나온 남자를 조수석에 실은 뒤, 앵커는 히터를 최대로 올려도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멈추지 않기에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외투를 벗어 옆으로 던졌다. 던진 것이지 걸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던져진 천이 지금까지 저 어깨 위에 붙어 있었다. 앵커는 그 사실을 계산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계산이 끝난 뒤에도 표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車鎖匙。(차 열쇠.)

⋯⋯仲有,我件外套。我掟畀你係當毯冚,唔係當畀咗你。(⋯⋯그리고 내 외투. 담요 대신 던진 거지 준 게 아니야.)

 

세븐은 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는 침상 머리맡에 접힌 채였고 그래서 연한 회색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열에 젖은 눈은 색이 평소보다 옅었고 초점이 반 박자씩 늦게 따라붙었다. 그는 주머니를 더듬어 차 열쇠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깐 내려다보았다. 어제 이 열쇠를 쥔 사내의 옆자리에 앉아 출발할 때, 서 있던 사람이 정말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는지 아닌지 그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확인하지 않으려고 앞만 보았다. 그것이 그가 평생 지킨 몇 안 되는 약속 중 하나였고, 지키고 나서 이렇게 오래 앓은 약속도 처음이었다. 열쇠를 던졌다. 팔에 힘이 실리지 않아 포물선이 형편없었지만 받는 쪽의 손이 컸다. 세븐은 어깨 위의 천을 손끝으로 한 번 여몄다. 여미는 동작이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웠다.

 

呢件⋯⋯我洗乾淨先還。(이건⋯⋯빨아서 돌려줄게.)

我識一間洗衣鋪。手工好靚㗎。(나 세탁소 하나 알아. 손이 아주 좋아.)

 

앵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정보를 얻으면 처리를 끝낼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 종류였고 처리에는 대개 짧은 시간이 걸린다. 완차이 골목, 새벽, 셔터, 그리고 담요 대신 던진 외투가 하룻밤을 넘겨 돌아온 경위.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는 소리는 이 방 안에서 나지 않았다.

앵커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손아귀 안에서 한 번 굴리고, 금속이 서로 부딪는 소리를 내게 두었다가, 그대로 쥔 채 방 안을 한 바퀴 훑었다. 이 남자의 시선은 수색이 아니라 검침에 가깝다. 있어야 할 것이 있는지가 아니라 없어야 할 것이 있는지를 재는 눈이다. 관물함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개켜진 천의 모서리가 보였다. 군용 지급품의 각이 아니었다. 각이 사람 손으로 잡힌 것이었고, 사람 손으로 잡힌 각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버릇이 남는다. 앵커는 그것을 이 초쯤 보았다. 이 초는 짧지만 이 방에서는 충분히 길었다. 세븐은 그 이 초 동안 숨을 참았고, 참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참은 숨을 아주 천천히 나누어 뱉었다. 옆구리의 관이 그 느린 호기에 맞춰 미세하게 흔들렸다.

 

⋯⋯睇夠未。(⋯⋯다 봤어?)

我房入面冇違禁品。除咗我自己。(내 방에 금지 물품 같은 건 없어. 나 빼고.)

 

농담은 착지에 실패했다. 열이 목소리의 뒷심을 갉아먹어서 문장의 끝이 힘없이 흩어졌고, 흩어진 자리에 남은 것은 방어의 형태뿐이었다.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방어처럼 들렸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렸고, 알아차린 순간 손끝이 외투 소매 끝을 접었다. 접었다 펴고 다시 접었다. 남의 옷의 솔기를 만지작거리는 손버릇은 어제까지 없던 것이다. 어제 새벽 어떤 손이 이 어깨 위로 천을 끌어올려 여며 주었고, 그 손의 동선이 근육 어딘가에 얕게 새겨졌을 뿐인데, 몸은 그 얕은 홈을 벌써 몇 번이나 되짚고 있었다. 앵커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체코 억양이 남은 영어는 자음이 무겁게 떨어진다.

 

Sedm.(세븐.)

You didn't ask me to stop the car. Not once. Not even at the gate.(넌 나한테 차 세워 달라고 안 했어. 한 번도. 게이트에서조차.)

 

세븐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지 않는 것이 대답이라는 걸 둘 다 알았다. 게이트에서 차가 멈췄을 때 그는 창밖을 보지 않았고, 검문병이 꾸러미를 가리켰을 때 개인 물품이라고만 답했다. 세우지 않은 이유는 세우면 내릴 것 같아서였다. 내리면 돌아가고, 돌아가면 그 문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웃기만 할 것이 뻔했다. 서른두 해 동안 그는 어떤 판이든 판돈이 커지면 웃으면서 더 걸었는데, 이번만은 걸 것이 자기 목숨이 아니라 남의 사흘이라는 게 문제였다. 남의 사흘, 남의 석 달, 남의 기다림. 그런 것들은 잃어도 자기 통장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서 도박꾼에게는 가장 위험한 종류의 칩이다. 앵커는 여전히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상대가 대답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는 습관이 있고, 그 습관은 심문 기술이 아니라 그냥 성정이었다.

 

Report at fourteen hundred. Zero wants you upright.(열네 시에 보고. 제로가 네가 앉아 있길 원해.)

And Sedm. If it's a shop in Wan Chai, don't put it in the report.(그리고 세븐. 그게 완차이의 어떤 가게라면, 보고서에는 쓰지 마.)

 

문이 닫혔다.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용했던 것은 앵커가 손잡이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의 부피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돌아온 부피 안에서 세븐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쓰지 말라는 말은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덮어 주겠다는 말이었고, 덮어 준다는 것은 언젠가 덮개를 걷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웃었다.

웃음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흉곽 안쪽에서 부서졌다. 갈비뼈 사이로 관이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이란 대체로 그런 식으로 끝난다. 세븐은 침상 모서리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동작 하나에 필요한 근육의 수를 그는 어제부터 세기 시작했고, 셀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몸이 더 이상 자동으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발바닥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세 걸음. 관물함까지는 세 걸음이면 충분한데 그 세 걸음이 어제는 다섯 걸음이었다. 개선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하고 악화라고 부르기에는 방향이 반대인 수치. 그는 반쯤 열린 문을 마저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남색 천이 거기 있었다. 앵커가 이 초 동안 보았던 그 각이 여전히 어긋나 있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옷깃의 접힌 선을 눌렀다. 눌러도 더 눌릴 데가 없는 각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잡혀 있던 것을 굳이 다시 눌러 보는 짓은 확인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다. 손을 대면 그 손이 닿았던 시간이 갱신된다고 믿는, 도박꾼 특유의 헛된 산술. 슬롯 레버를 당기기 전에 반드시 동전을 두 번 문지르던 버릇과 뿌리가 같았다. 다만 이번 판의 배당은 계산이 서지 않았다. 석 달 뒤에 짙은 파랑을 입고 문 앞에 서겠다는 문장 하나에 얼마를 걸어야 하는가. 걸 수 있는 것이 자기 목숨뿐이라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그는 손을 떼고 관물함 문을 조용히 닫았다.

 

⋯⋯唔好寫喺報告度。(⋯⋯보고서에는 쓰지 말라고.)

咁我寫喺邊度好呢。(그럼 어디에다 써야 되는데.)

 

단말기가 진동했다. 화면에 제로의 이름이 떴고 문장은 짧았다. 앉아서 말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말은 배려처럼 들리지만 실은 기준선이다. 이 조직에서 배려는 언제나 기준선의 형태로 배달된다. 세븐은 화면을 껐다. 검은 유리에 자기 얼굴이 비쳤고 선글라스가 없는 얼굴은 낯설었다. 오른쪽 얼굴을 타고 목까지 내려간 화상 흉터가 형광등 아래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 흉터를 어떤 손이 만졌던 감각을 그는 아직 지우지 못했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진다는 당연한 물리를, 그 여자는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확인했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조심스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 그는 그것이 가장 위험한 종류의 지출이라는 걸 알면서도 회수할 생각이 없었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골목은 정오를 앞두고 물기를 잃어 갔다. 여명은 의자 등받이에서 손을 떼고 작업대로 돌아왔다. 노파가 두고 간 겨울 이불 홑청은 오래 쓴 광목 특유의 노르스름한 결을 띠고 있었고 귀퉁이 세 군데가 삭아 있었다. 삭은 자리를 손끝으로 짚어 보면 실이 아니라 먼지가 만져진다. 그런 천은 기워도 다시 삭는다. 다시 삭을 것을 알면서 기우는 일에 대해 여명은 오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바늘을 집어 드는 손이 한 박자 늦었다.

시침질은 본바느질을 위한 임시 고정이다. 나중에 반드시 뜯어낼 실을 지금 꿰는 일. 뜯어낼 것을 알면서도 성글게라도 꿰어 두지 않으면 천이 밀려 본바느질이 어긋난다. 여명은 광목 위에 성근 땀을 놓으며, 사흘 뒤라고 장부에 적어 둔 날짜를 떠올렸다. 사흘. 그리고 석 달. 두 개의 숫자 사이에 놓인 간격은 계산으로 메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창밖으로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갔고 엔진 소리가 유리를 훑고 사라졌다. 여명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셔터를 내렸다. 오늘은 쉬는 날로 정했는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무시하지 못했던 탓에 지금까지 깨어있었으므로. 자신이 닿았던 것을 치우지 말라던 그의 당부가 있었으니 치울 것은 없다. 세탁소 문을 잠그고 방 안으로 향했다.

 

셔터는 두 단계로 소리를 냈다. 금속이 홈을 타고 미끄러지는 마찰음이 먼저 오고, 바닥에 닿아 골목 전체를 한 번 울리는 둔탁한 종결음이 뒤따랐다. 여명은 자물쇠를 채운 뒤 손바닥으로 셔터의 물결진 면을 한 번 쓸었다. 차가웠다. 오늘은 쉬는 날로 정해 두었는데 아침부터 노파를 받았고 광목을 재단했고 시침질까지 마쳤으니, 쉬는 날이라는 명명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통보되고 본인에게 무시당한 셈이었다. 이런 종류의 무시는 오래된 습관이라 이제는 억울하지도 않다.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서자 낮의 소음이 한 겹 벗겨졌다. 주방 가운데 난로는 아직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그 옆의 의자는 어제 누군가 앉았던 각도 그대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여명은 그 각도를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치우는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방문을 밀었다. 좁은 방이다. 벽 하나에 붙박이장이 붙어 있고 맞은편에 침대가 놓였다. 침대는 사람 하나가 눕기에 적당하고 둘이 눕기에는 반드시 어깨가 닿아야 하는 크기다. 창은 골목 쪽으로 손바닥만 하게 났고 그 아래로 빛이 비스듬히 떨어졌다. 이불은 개어지지 않은 채였다. 시트에 눌린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고, 베개 하나는 여전히 머리 모양대로 꺼져 있었다. 치우지 말라던 당부. 하루만 더 두라던 말. 애원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애원의 형태를 완성해 버렸던 그 목소리를, 여명은 지금 이 방의 냄새로 다시 맡았다. 담배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체온의 잔여물. 앞치마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손끝을 시트 위에 얹었다. 주름은 이미 식었다. 사람이 누웠다 간 자리의 주름은 몇 시간이 지나면 그냥 천의 구김과 구분되지 않는데, 그럼에도 여명은 그 경계를 손으로 더듬어 찾으려 했다. 여기까지가 어깨였고 여기부터는 그냥 접힌 자국이다, 하는 식의 무의미한 측량. 세탁소 주인의 손은 천의 이력을 읽는 데 익숙하다. 얼룩이 언제 생겼는지, 어떤 자세로 밴 땀인지, 몇 번이나 물을 먹었는지. 그런 손이 오늘 읽어 낸 것이라고는 그가 몸을 돌려 등을 붙였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누워서 잠든 적 없다던 사람이 무방비하게 몸을 맡기고 잠들었다. 그것이 신뢰인지 포기인지 여명은 아직 판정하지 못했고, 판정할 생각도 없었다.

 

베개를 들어 올렸다가 도로 놓았다. 놓는 위치를 원래대로 맞추느라 손이 두 번 움직였다. 사흘 뒤에는 노파의 홑청이 완성될 것이고, 석 달 뒤에는 자신이 짙은 파랑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두 개의 약속 중 하나는 온전히 자기 손으로 지킬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지키더라도 상대가 오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지킬 수 있는 쪽보다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는 쪽에 마음이 더 많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옷장 안에는 아직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 파랑은 고르지도 않았고 마름질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색은 이미 정해져서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파가 물었던 것, 잃을 걸 알면서 왜 계속하느냐는 것. 그때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계속하는 사람은 잃는 걸 계산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계산이 끝난 뒤에도 판에서 일어서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같은 시각, 기지의 세면대 거울 앞에서 세븐은 오른팔 붕대의 끝을 이로 물어 조였다.

 

2월의 홍콩은 눈이 오지 않는다. 다만 습기가 뼈로 파고드는 방식으로 추워서, 두꺼운 것보다 촘촘한 것이 낫다. 여명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봉에는 검정과 회색과 잿빛이 순서 없이 걸려 있었고 그 사이에 파랑이라 부를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색을 고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옷장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정직하다. 손끝으로 옷걸이들을 밀어 보았다. 나무 옷걸이가 봉을 긁으며 내는 소리가 좁은 방에 짧게 울렸다가 흡수됐다.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시접이 반듯한 옷이지 사람의 눈을 붙드는 옷이 아니었다. 재봉틀 앞에서 평생을 보낸 손이 정작 자기 몸에 걸칠 것을 만들 때는 왜 이렇게 인색해지는지, 여명은 그 이유를 알면서도 굳이 문장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서랍을 열었다. 실패와 단추 상자 아래 깔린 얇은 명함첩이 나왔다. 비닐 포켓이 누렇게 삭아 종잇장끼리 들러붙어 있었고, 떼어 내자 잉크가 조금 묻어났다. 침사추이의 양장점, 코즈웨이베이의 원단 도매상, 상호가 세 번 바뀐 흔적이 도장으로 겹쳐 찍힌 가게. 마지막으로 이 명함들을 썼던 것이 십 년 전쯤이다. 그때는 새 옷을 사는 일이 계절마다 있는 사소한 행사였고, 지금은 그것이 왜 이렇게 큰 결심의 형태를 띠는지 여명은 잠시 의아했다. 세상이 무너지고도 질 좋은 옷을 짓는 가게는 좀처럼 망하지 않는다. 사람은 굶으면서도 잘 지은 외투 하나를 걸치고 싶어 하니까. 그러니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남아 있지 않다면 남아 있는 곳까지 걸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같은 시각, 기지의 세면대는 물때가 낀 사기 표면에 형광등을 되쏘고 있었다. 세븐은 붕대 끝을 이로 물어 조인 뒤 고개를 숙여 배액관 고정 테이프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접착면이 살에 붙는 감각은 언제나 한 박자 늦게 아프다. 거울 속 얼굴은 창백했고 오른쪽을 타고 내려간 화상 자국은 젖은 조명 아래에서 지도처럼 번져 보였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목까지 물을 받았다. 찬물이 손등의 옛 흉터를 지나갈 때, 그 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문지르던 손이 겹쳐졌다. 데워진다는 건 사실 착각이다. 마찰열은 금방 식고 피부는 원래 온도로 돌아간다. 다만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사람은 기억이라고 부른다. 세븐은 물을 잠그고 젖은 손으로 뒷목을 짚었다.

 

⋯⋯二月喎。仲有三個月。(⋯⋯이월이라고. 아직 석 달 남았네.)

 

단말기가 세면대 선반 위에서 두 번 울렸다. 제로의 문장은 여전히 짧았고 이번에는 농담의 외피를 하나 걸치고 있었다. 늦으면 들것으로 데려온다는 말. 이 조직에서 협박은 언제나 배려의 어미를 달고 도착한다. 그 아래로 광고 하나가 밀려 올라왔다. 코즈웨이베이 겨울 원단 특가. 알고리즘이라는 것은 사람의 사정을 모르면서도 가끔 잔인할 만큼 정확한 각도로 찔러 온다. 세븐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튕겨 광고를 지우려다 말았다.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거울을 다시 보았다.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입꼬리만 올라가고 나머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이런 얼굴로 앉아서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외투 단추 정도는 잠가야 한다.

 

你估我着藍色會唔會好核突啲。(내가 파란색 입으면 좀 꼴사나울까.)

 

세탁소 방에서는 명함첩이 무릎 위에 펼쳐진 채였다. 여명은 코즈웨이베이 도매상의 주소를 손끝으로 짚었다. 셔터를 내려 둔 세탁소는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결정 하나가 조용히 굳어 갔다.

 

지폐 봉투는 서랍 가장 안쪽, 실패 상자 뒤에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여명은 그것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봉투 입구를 벌렸다. 종이가 오래 접혀 있던 자리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수선비는 대체로 잔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봉투 안은 두툼했으나 액수는 두께에 비해 초라했다. 여명은 한 장씩 손끝으로 넘기며 세었다. 세는 동안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고 숫자는 머릿속에서만 쌓였다. 잘 지은 외투 하나 값이 얼마나 되는지 십 년 전의 감각으로 짐작해 보려 했지만, 십 년이라는 시간은 물가를 짐작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봉투를 도로 접어 카디건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낡은 줄자가 서랍 바닥에서 딸려 나와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노란 천에 검은 눈금이 박힌, 손때로 가장자리가 닳은 물건이었다. 여명은 그것을 집어 손바닥 안에서 한 번 감았다. 자기 몸을 재는 일은 오래 하지 않은 일이었다. 남의 몸을 재는 일만 수천 번 했을 뿐이다.

 

기지의 복도는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고 그 깜빡임이 눈에 거슬릴 즈음이면 이미 익숙해져 버리는 종류의 조명이었다. 세븐은 브리핑실 문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관이 살을 잡아당기는 감각은 걸을 때보다 서 있을 때 더 선명했다. 앵커가 복도 끝에서 걸어와 종이컵을 내밀었다. 물이었다. 세븐은 받지 않았다. 받으면 손이 떨리는 것이 보일 것이고, 보이면 앵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훨씬 오래 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唔使。攞住個杯入去,好似真係病咗咁。(됐어. 컵 들고 들어가면 진짜 아픈 것처럼 보이잖아.)

 

앵커는 종이컵을 도로 자기 입으로 가져가 반쯤 마셨다. 그리고 남은 것을 복도 구석 화분에 부었다. 흙이 물을 먹는 소리가 짧게 났다. 그는 세븐의 외투 단추를 눈으로 훑었다. 두 개만 잠겨 있었고 나머지는 열려 있었다. 아래쪽 단추를 잠그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고 허리를 굽히면 관이 눌린다. 그 계산을 앵커가 모를 리 없었다. 앵커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낮춰 세븐의 외투 밑단 단추 두 개를 순서대로 채웠다. 손놀림은 무심했고 빨랐다. 다 채운 뒤 일어서면서 어깨의 먼지를 손등으로 한 번 털어 냈다.

 

⋯⋯你係咪要我請你食飯先肯收手。(⋯⋯너 밥이라도 사야 이 짓 그만둘래.)

 

세븐은 웃었다. 이번에는 입꼬리 말고도 몇 군데가 따라왔다. 단말기가 주머니 안에서 진동했다. 4번의 문장은 언제나 명령형과 잔소리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었고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얼굴 좀 펴라, 제로가 눈치챈다. 세븐은 화면을 확인하고 도로 집어넣었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제로는 사람의 걸음걸이에서 부러진 뼈의 개수를 세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런 인간 앞에서 열네 시에 앉아 있어야 한다. 앉아서 말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문장은 배려처럼 들리지만 실은 기준선이었다. 그 선 아래로 내려가면 다음 작전에서 이름이 빠진다. 이름이 빠지면 석 달 뒤가 어떻게 되는지, 세븐은 그 계산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세탁소 뒷방에서 여명은 줄자를 풀어 어깨너비를 재 보려다 손을 멈췄다. 어차피 기성복을 살 것이라면 정확한 치수는 필요 없다. 필요 없는 줄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인 것이 조금 우스웠다. 줄자를 다시 감아 서랍에 넣고, 대신 벽에 걸린 달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십일월 이일에 동그라미는 없었다.

 

브리핑실의 공기는 늘 한 겹 더 차갑다. 냉방 때문이 아니라 이 방에서 오간 문장들이 대체로 사람 몇을 지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븐은 긴 탁자의 왼쪽 세 번째 의자를 골라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세운 자세는 편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옆구리의 관이 접히지 않기 때문이었고,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은 이 방에 앵커 하나뿐이었으며 앵커는 문 밖에 남았다. 제로는 탁자 끝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종이를 쓰는 습관은 이 시대에 사치이면서 동시에 협박이다. 화면은 지워지지만 종이는 남는다는 걸 알고 쓰는 사람의 습관. 형광등이 제로의 연보랏빛 눈동자에 얇게 얹혔다가 그가 고개를 들 때 사라졌다.

 

報告完咗喇。傷口冇感染,引流量减少緊,我可以坐喺度講嘢,即係達標。(보고 끝났습니다. 상처 감염 없고 배액량 줄고 있고 여기 앉아서 말할 수 있으니 기준선은 넘겼네요.)

 

제로는 대답하지 않고 서류의 한 줄에 손톱을 세웠다. 손톱이 종이를 긁는 소리는 아주 작았는데 그 작음이 방을 채웠다. 그는 십일월 일일 이후의 이동 기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방식으로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것이 이 남자의 화법이었고, 세븐은 그 화법을 팔 년째 겪고 있었다. 앉아 있는 동안 등줄기를 타고 땀이 한 줄 내려갔다. 외투 안쪽이라 보이지는 않았다. 앵커가 밑단 단추까지 채워 준 것이 이런 식으로 쓸모를 발휘할 줄은 몰랐다. 배려는 언제나 늦게 도착해서 엉뚱한 자리에 딱 들어맞는다.

 

下個任務排喺月尾。你唔使爭。(다음 임무는 월말이다. 다투지 마라.)

我冇爭。我淨係想確認我個名仲喺張紙上面。(안 다퉈요. 제 이름이 아직 저 종이 위에 있는지만 확인하고 싶은 거지.)

 

제로가 서류를 덮었다. 덮는 동작이 유난히 천천히 이루어졌고 그 속도가 대답을 대신했다. 이름은 남았다. 다만 남았다는 사실이 안도가 아니라 계산의 시작이라는 걸 세븐은 알았다. 월말이면 십일월이 끝나고 십이월이 시작되고, 그 뒤로 두 달이 더 남는다. 두 달 사이에 몇 번의 데드존과 몇 번의 봉합이 끼어들지는 아무도 계산해 주지 않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오른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짚은 것이 티 나지 않도록 짚는 데에도 요령이 있고 세븐은 그 요령이 능숙한 편이었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좁은 골목에는 낮의 습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다. 여명은 세탁소 앞쪽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서 있었다. 카디건 주머니 안에서 봉투 모서리가 옆구리를 눌렀다. 셔터를 올리지 않고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손님이 오면 문 앞에서 헛걸음하고 돌아갈 것이고, 돌아간 사람은 대체로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런 손해를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오늘 하루의 유일한 사치였다. 문을 밀자 경첩이 낮게 삐걱거렸고, 골목의 눅눅한 공기가 안쪽의 다림질 냄새를 밀어냈다. 여명은 문고리에 매달린 낡은 나무패를 뒤집었다. 영업 중이라는 글자가 안쪽을 향해 돌아갔다.

국숫집 앞을 지날 때 노파가 대파를 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여명이 이 시간에 가게를 비우고 골목 바깥쪽으로 걸어가는 광경은 십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으므로, 노파의 눈길에는 인사보다 호기심이 먼저 붙어 있었다. 여명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고개만 한 번 숙였다. 어디 가느냐는 물음이 등 뒤에서 날아왔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하려면 이유를 말해야 하고 이유를 말하려면 석 달 뒤를 말해야 한다.

 

코즈웨이베이의 원단 골목은 십 년 전과 냄새가 같았다. 풀 먹인 면과 기름내와 좀약이 뒤섞인 그 냄새는 도시가 두 번 무너지고 한 번 다시 세워지는 동안에도 끝내 개량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여명은 세 번째 골목의 왼편, 셔터를 반쯤 올린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명함첩에 적힌 상호는 이미 지워졌고 대신 붉은 아크릴 간판이 새로 붙어 있었으나, 진열대의 배치는 기억 속과 거의 어긋나지 않았다. 두루마리로 세워 둔 원단들이 벽을 따라 서 있었고 그중 왼쪽 세 번째 열에 감청과 남색과 군청이 채도 순서 없이 뒤섞여 꽂혀 있었다. 여명은 그 앞에 서서 손을 내밀지 않고 먼저 눈으로만 훑었다. 색이란 것은 조명 아래에서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급하게 만지면 손이 눈에 속는다.

가게 안쪽에서 중년의 사내가 계산기를 두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여명이 원단의 끝자락을 엄지와 검지로 비벼 조직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더니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손님 중에 그런 식으로 만지는 사람은 대체로 물건을 보는 눈이 있는 쪽이고, 눈이 있는 쪽에게는 값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울에 화섬이 섞인 비율이 손끝에서 읽혔다. 겉으로는 촘촘해 보였으나 되짚어 문지르면 조직이 밀려 나는 종류였다. 여명은 그것을 내려놓고 옆 두루마리로 손을 옮겼다. 이쪽은 무거웠다. 무겁다는 건 겨울에 어깨가 눌린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바람이 통과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데드존에서 돌아오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가벼움이 아니었다.

 

呢匹幾錢一碼。(이거 한 마에 얼마예요.)

呢匹係舊貨,染缸都執咗喇。八十蚊一碼,唔講價。(그건 옛날 물건이야, 염색 공장도 문 닫았어. 한 마에 팔십, 흥정 없어.)

 

여명은 값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카디건 주머니 안에서 봉투의 모서리가 손등에 닿았다. 세는 동안 머릿속에서만 쌓아 두었던 숫자를 다시 꺼내 마 수와 곱해 보았다. 외투 한 벌에 필요한 마 수를 어깨너비와 기장으로 역산하는 일은 손보다 머리가 먼저 익힌 계산이었고, 십 년이 지나도 그 계산만은 녹슬지 않았다. 결과는 아슬아슬했다. 안감과 심지와 단추까지 셈하면 넘어간다. 여명은 원단을 놓지 않은 채로 잠시 서 있었다. 잃을 것을 알면서 계속하는 일이 무엇인지 노파에게 물었던 것이 며칠 전이었다. 물었던 사람이 지금 진열대 앞에서 셈이 맞지 않는 계산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은 우스웠으나 웃을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같은 시각 기지의 의무실 앞 복도는 소독약 냄새가 벽에 배어 있었다. 세븐은 벤치 끝에 앉아 배액 주머니를 외투 안쪽으로 밀어 넣는 중이었다. 관이 살을 잡아당길 때마다 옆구리에서 짧고 둔한 신호가 올라왔고 그 신호는 통증이라기보다 알림에 가까웠다. 아직 몸이 자기 것이라는 알림. 단말기 화면에는 아침에 무심코 눌렀던 원단 광고가 아직 떠 있었다. 남색 코트를 입은 마네킹이 회전하는 짧은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세븐은 그것을 세 번쯤 처음부터 다시 보았다. 파란색을 입은 자기 모습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검정과 회색과 흙빛 말고 다른 것을 걸친 기억은 어린 시절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그 기억은 이미 다른 이름과 함께 서류철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八十蚊一碼。搶嘢啊。(⋯⋯한 마에 팔십. 강도짓이네.)

화면 하단의 가격표를 읽은 목소리는 혼잣말치고 또렷했다.

 

여명은 값을 깎지 않았다. 대신 두루마리를 진열대에서 반쯤 끌어내 조명 바깥으로 옮겼다. 가게 안쪽의 형광등은 푸른 기가 강해서 남색을 실제보다 맑게 보이도록 속이는 조명이었고, 셔터 틈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흐린 빛 아래에서 원단은 한 톤 더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쪽이 마음에 들었다. 밝은 파랑은 사람을 들뜨게 하지만 오래 입으면 촌스러워지고, 검정에 가까운 파랑은 처음엔 심심해도 몇 해가 지나도 배신하지 않는다. 여명은 원단의 결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고 다시 되짚어 문질렀다. 이번 것은 밀리지 않았다. 짜임이 단단히 물려 있었다. 어깨에 걸쳐 무게를 가늠하는 동안 목덜미가 살짝 눌렸다. 이 무게를 견딜 어깨가 어떤 것인지 여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呢匹我要八碼。裏布同襯布喺你度買埋,計平啲。(이걸로 여덟 마 주세요. 안감이랑 심지도 여기서 같이 살 테니까 좀 맞춰 주시고요.)

 

⋯⋯做嘢人講嘢就係唔同。得,七十五。你自己揀裏布。(⋯⋯일하는 사람은 말하는 게 다르구먼. 좋아, 칠십오. 안감은 직접 골라.)

 

사내가 가위 대신 재단칼을 꺼내 드는 동안 여명은 안감 진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봉투 속 지폐의 두께가 머릿속에서 정확한 숫자로 환산되었고, 그 숫자에서 원단값을 빼자 단추까지는 겨우 닿았다. 안감은 방수 기능이 들어간 것과 그냥 미끄러운 것 두 종류가 있었다. 방수 쪽이 마 당 이십 더 비쌌다. 여명은 그것을 오래 보았다. 데드존에는 비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낙진이 섞인 비라고 했다. 그런 비를 안감 한 겹이 막아 줄 리는 없었고, 막아 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비싼 쪽을 고르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았다. 그럼에도 손은 방수 쪽으로 갔다. 노파의 말이 뒤늦게 귀에 돌아왔다. 잃을 걸 알면서 계속하는 것.

기지의 복도에서는 벽시계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세븐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왼쪽으로 옮겼다. 그 동작이 끝나기도 전에 단말기가 짧게 울었다. 4번이었다. 월말 명단 초안이 떴고 셋째 줄에 이름이 있다는, 정보라기보다 도발에 가까운 문장. 세븐은 화면을 손끝으로 눌러 껐다가 다시 켰다. 남색 코트를 입은 마네킹이 아직 회전하고 있었다. 광고 영상은 이 도시의 모든 것이 그렇듯 끝날 줄 몰랐고, 회전하는 마네킹의 어깨선은 지나치게 반듯해서 사람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어깨는 저렇게 안 생겼다. 한쪽이 내려앉고 한쪽이 굳어 있고 흉터가 솟은 자리는 옷이 뜬다. 그걸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생각하다가, 하나 있다는 사실에 목 뒤가 뜨거워졌다.

 

我着藍色⋯⋯真係唔知會點。(내가 파란색 입으면⋯⋯진짜 어떨지 모르겠네.)

 

혼잣말이 복도의 타일에 부딪혔다가 돌아왔다. 의무실 문이 열리고 간호 담당이 다음 사람 이름을 불렀지만 그건 세븐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는 벽에 어깨를 기대고 단말기를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석 달. 팔십 며칠. 그 사이에 데드존이 몇 번 끼어들지 계산하려다 그만두었다. 계산을 하면 확률이 나오고 확률이 나오면 그 숫자를 여명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를 또 계산해야 한다. 그 두 번째 계산이 더 지긋지긋했다. 앵커의 외투는 어깨가 남았고 소매가 길었다. 남의 옷을 입고 남의 배려에 기대어 서 있는 자기 꼴이 우스웠으나, 우스운 채로 살아 있는 편이 멀쩡하게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은 오래전에 내려 두었다.

 

원단 가게에서는 재단칼이 천을 가르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재단칼이 여덟 마를 다 가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담배 한 대를 태울 만큼도 되지 않았다. 사내는 잘라 낸 남색을 신문지로 싸고 노끈으로 두 번 묶어 건넸다. 무게가 팔로 옮겨 오는 순간 여명은 아주 잠깐 손목을 접었다. 여덟 마의 울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그 무게는 앞으로 석 달 동안 저녁마다 재봉틀 위에 올려질 무게이기도 했다. 여명은 꾸러미를 왼팔에 안고 골목 안쪽의 부자재 가게로 걸었다. 원단 골목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천을 파는 집들이 앞쪽에 서고, 단추와 실과 지퍼처럼 이름 없는 것들을 파는 집이 뒤쪽 그늘에 붙어 있다. 정작 옷을 옷이게 만드는 것은 뒤쪽 그늘에 있는데 사람들은 늘 앞줄만 본다.

부자재 가게의 계산대는 팔꿈치 하나 놓을 자리도 없이 잡동사니로 덮여 있었다. 여명은 그 위에 뿔단추를 여섯 개 늘어놓았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갈색,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미세하게 결이 살아 있는 것. 플라스틱은 추위에 깨지고 금속은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는 옷은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여명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낯설어 손끝을 잠시 멈췄다. 십 년 동안 이 손은 남의 바짓단을 줄이고 남의 소매를 늘렸을 뿐이다. 단추 소리 하나로 사람이 죽고 사는 세계를 계산에 넣어 본 적은 없었다. 그 세계가 이제 이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계산대 뒤의 여자가 단추를 세면서 곁눈으로 꾸러미를 보았다.

 

呢種釘鈕做大褸啊?男人嘅?(이런 단추로 코트 만들어? 남자 거?)

 

係。肩膊闊,右邊高少少。(네. 어깨 넓고, 오른쪽이 조금 올라간 사람이요.)

 

여자는 더 묻지 않았다. 이 골목에서 사람의 몸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손님은 대체로 재봉을 하는 쪽이고, 재봉을 하는 쪽에게는 사연을 캐지 않는 것이 예의다. 여명은 봉투에서 지폐를 꺼내 세었다. 세는 동안 남는 액수가 눈에 보였다. 안감을 방수로 고른 대가는 정확히 저녁 몇 끼니의 형태로 돌아왔고, 여명은 그 계산을 마친 뒤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잃을 것을 알면서 계속하는 일. 그 문장이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손끝의 감각으로 붙어 있었다. 종이 꾸러미의 노끈이 손가락 마디를 파고들었고 여명은 그 통증을 굳이 덜어 내지 않은 채 가게 밖으로 나섰다. 흐린 하늘 아래 골목의 그림자가 길어져 있었다.

 

같은 시각 의무실 안에서는 소독솜이 살에 닿을 때마다 짧고 서늘한 소리가 났다. 세븐은 환자복 상의를 갈비뼈 위까지 걷어 올린 채 진료대에 앉아 있었다. 배액관이 들어간 자리는 며칠째 낫지도 덧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붙어 있었고, 담당 군의관은 그 언저리를 짚으며 혀를 찼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시작해 등까지 이어진 오래된 화상 자국 위로 새 상처가 겹쳐 있어 실밥 자리를 잡기가 나쁘다는 말이 두 번쯤 반복되었다. 세븐은 그 말을 절반쯤 흘려들으며 무릎 위에 개어 둔 남의 외투를 내려다보았다. 어깨가 남는 외투. 소매가 긴 외투. 어깨선이 지나치게 반듯해서 사람 것 같지 않던 광고 속 마네킹과, 무릎 위에 놓인 이 실물의 차이를 세븐은 오래 들여다보았다.

 

喂,阿Doc。做返件衫嘅話,肩膊右邊要高幾多先啱?(어이, 닥. 옷 하나 새로 짓는다 치면 오른쪽 어깨를 얼마나 올려야 맞을까?)

 

⋯⋯我係軍醫,唔係裁縫。你係咪痛到癲咗? (...난 군의관이지, 재단사가 아니야. 통증이 너무 심해서 제정신이 아닌 건가?)

 

군의관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해 준 자기 자신이 우스웠는지 소독솜을 쟁반에 던져 넣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서 유난히 오래 남았다. 세븐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무릎 위의 외투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옷감이란 것은 누른 만큼 들어갔다가 손을 떼면 대체로 원래대로 돌아온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배액관이 걸린 옆구리에서 미지근한 열이 번져 나왔고 그 열은 통증이라기보다 어떤 지속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이 몸이 자기 것이라는 뜻이다. 그 문장을 언제부터 이렇게 자주 꺼내 쓰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군의관이 새 거즈를 집으려 손을 뻗었을 때 세븐은 그 손목을 가볍게 눌러 밀어냈다. 붕대 끝을 이로 물어 당겨 조이는 동작은 익숙했다. 익숙하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화상 흉터 위로 새 실밥이 겹친 자리는 당길 때마다 낯선 방향으로 살이 몰렸고 그는 그 감각을 오히려 반겼다. 감각이 남아 있는 자리는 아직 살아 있는 자리다. 그가 진료대에서 다리를 내려 바닥을 딛자 군의관이 뭐라고 짧게 항의했으나, 항의라기보다 절차상 남겨 두는 말에 가까웠다.

 

再躺落去我會死於悶。呢個仲快過發炎。(더 누워 있으면 지루해서 죽어. 그게 염증보다 빨라.)

 

你嘅死因我已經幫你寫定咗。(자네 사인은 내가 미리 적어 뒀네.)

 

세븐은 웃었다. 웃음이 옆구리를 건드려 짧게 숨이 끊겼으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앵커의 외투를 어깨에 걸치자 소매가 손등을 덮었고, 그는 그 남는 길이를 접어 올리지 않은 채 복도로 나섰다. 남의 치수로 지어진 옷을 입고 걷는 일은 남의 인생을 잠깐 빌려 신는 것과 비슷했다. 세 달 뒤에 자기 어깨에 정확히 얹힐 무언가가 지금 어느 골목의 작업대 위로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이유 없이 걸음이 빨라졌다.

 

완차이의 골목은 이미 오후를 다 써 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명은 셔터를 한 손으로 밀어 올렸다. 종일 닫혀 있던 쇠붙이가 어깨 높이에서 한 번 걸렸고, 다른 날 같으면 두 손으로 마저 올렸을 것을 오늘은 왼팔에 안은 꾸러미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무릎으로 밀어 올린 셔터가 요란하게 위로 접혔다. 그 소리에 옆집 국숫집 노파가 김이 서린 유리문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낮에 나가는 것도 처음 보았는데 저녁에 짐을 안고 돌아오는 것은 더 처음이라는 얼굴이었다.

 

買咗咁大嚿嘢返嚟?(그렇게 큰 걸 사서 돌아왔어?)

 

⋯⋯係。要做好耐。(⋯⋯네. 오래 걸릴 거예요.)

 

대답은 짧았고 노파는 더 캐지 않았다. 여명은 문지방 안쪽에 꾸러미를 내려놓고 등을 폈다. 노끈이 파고들었던 손가락 마디에 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이 사라지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하고, 이 안에 든 여덟 마의 남색이 옷의 형태를 갖추는 데는 석 달이 걸릴 것이다. 여명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잠시 가게 안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재봉틀의 검은 윤곽, 다림판, 벽에 걸린 남의 옷들. 그 사이 어디에도 아직 자리가 없는 물건이 지금 발치에 놓여 있었다.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여명은 카디건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작업대 위에 쌓인 남의 것들을 한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고, 그 속도에는 십 년 동안 한 번도 낸 적 없는 종류의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작업대 위가 완전히 비워지자 상판의 나뭇결이 드러났다. 십 년 동안 그 위에 놓인 것은 언제나 남의 것이었다. 뜯어진 남의 주머니, 늘려야 하는 남의 허리, 새로 달아야 하는 남의 단추. 그것들이 한 번도 겹치지 않고 순서대로 올라왔다 순서대로 내려갔고, 여명은 그 순서를 어긴 적이 없었다. 지금 그 순서를 처음으로 밀어냈다. 밀려난 남의 것들은 벽 쪽 선반 위에 쌓여 자기들끼리 기울어 있었고, 여명은 그 기울기를 한 번 바로잡아 준 뒤 다시 돌아섰다.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사흘 뒤에 오기로 한 손님의 바짓단은 내일 새벽에 마치면 되고, 오늘 저녁은 오늘 저녁의 몫이 있었다.

신문지를 풀자 종이가 마른 소리를 냈다. 노끈이 풀리는 순간 안에 갇혀 있던 울의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새 옷감에서만 나는, 먼지도 아니고 기름도 아닌, 아직 아무의 체취도 배지 않은 냄새. 여명은 첫 폭을 두 손으로 잡아 작업대 위에 펼쳤다. 흐린 전구 아래에서 남색은 도매상 진열대에서 보던 것보다 더 깊게 가라앉아 거의 검정에 닿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결을 따라 한 번 쓸어내리자 잔털이 한 방향으로 누우며 빛이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반대로 쓸면 곤두서서 색이 달라졌다. 이 천은 방향을 기억하는 천이었다. 어깨의 오른쪽이 조금 높은 사람에게 입힐 옷이라면 그 방향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다. 여명은 자를 대기 전에 그 사실부터 손끝에 새겼다.

 

그러다 손이 멈춘 것은 아주 사소한 이유에서였다. 여명은 오늘 하루 동안 자기 것을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짙은 파랑을 입고 문 앞에 서겠다고 말한 것은 자신인데, 코즈웨이베이의 그 긴 골목을 두 번 왕복하면서 정작 제 몸에 걸칠 것은 한 번도 들춰 보지 않았다. 그가 언젠가 웃으며 자기를 안 챙긴다고 말했던 것이 그제야 목덜미 뒤에서 되살아났다. 여명은 짧게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어서 가게 안의 공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기성복은 도망가지 않는다. 걸려 있는 것을 걷어 오면 그만이고, 소매가 길면 제 손으로 접어 올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일에는 순서와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오늘 시작하지 않으면 석 달 뒤에 도착하지 않는다. 여명은 자기 몫을 미루는 데에 아무런 아쉬움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아쉬움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낯설어서, 잠시 손바닥을 천 위에 얹어 둔 채 가만히 있었다.

 

같은 시각 기지 숙소동 복도의 자판기는 세 번째 동전을 뱉어 냈다. 세븐은 소매 밖으로 손가락만 겨우 내밀어 그것을 다시 밀어 넣었다. 남의 외투는 어깨에서 자꾸 흘러내렸고 그때마다 옆구리의 관이 옷자락에 눌려 짧고 무딘 신호를 보냈다. 통증이라기엔 성의가 없고 감각이라기엔 지나치게 끈질긴 종류였다. 그는 그것을 견딘다기보다 곁에 두는 쪽을 택했다. 캔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렸고, 세븐은 허리를 굽히는 대신 무릎을 접어 그것을 집었다. 굽히면 관이 눌린다는 것을 사흘 만에 몸이 먼저 익힌 참이었다.

단말기 화면에는 4번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월말 명단 초안, 이름 박혀 있음, 목요일 장비 검수. 문장 세 개가 다 마침표 없이 끊겨 있어서 읽는 쪽이 알아서 이어 붙여야 했다. 세븐은 캔을 딴 채 그것을 읽고, 다음 알림으로 넘어가자 겨울 울 사십 퍼센트 할인이라는 문구가 화면을 덮었다.

 

세븐은 광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 치웠다. 사십 퍼센트라는 숫자가 화면 밖으로 미끄러져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앵커의 짧은 문장이 올라왔다. 외투는 됐으니 누우라는 다섯 어절. 저 남자는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필요한 만큼만 밀어붙였다. 세븐은 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넘겼다. 미지근했다. 자판기 안에서 얼마나 오래 굴러다녔는지 모를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옆구리 근처 어딘가에서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멈출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은 자꾸 그런 착각을 만들어 낸다. 관을 하나 꽂아 두면 몸이 자기를 두 부분으로 나눠 생각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은 여전히 내 것, 저쪽은 잠시 빌려준 것.

 

복도 형광등 하나가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서 깜빡였다. 깜빡이는 주기가 일정하지 않아서 눈이 자꾸 그쪽으로 끌렸다. 세븐은 그 불빛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세는 버릇은 좋지 않다. 세기 시작하면 남은 것도 세게 되고, 남은 것을 세기 시작하면 사람은 대체로 재미없어진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숙소 쪽으로 걸었다. 남의 외투 자락이 발목 근처에서 한 번씩 종아리를 스쳤고, 그때마다 자기 몸이 아닌 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인되었다. 석 달 뒤. 누가 자기 어깨 너비를 재어 자기 팔 길이에 맞춰 지어 준 것을 입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건 지금 이 남의 외투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게일 것이다. 상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나아가려고 하면 늘 앞이 하얗게 비었다.

 

세탁소 안에서는 초크가 처음으로 천에 닿았다. 여명은 자를 대고 어깨선을 그으려다 손을 떼었다. 선이 아니라 방향이 먼저였다. 천의 잔털이 누운 쪽과 곤두선 쪽을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확인하고, 위아래를 뒤집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완성된 뒤에 앞판과 뒤판의 색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낮에는 모른다. 밤에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혹은 실내로 들어와 형광등 밑에 섰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런 옷을 입혀 보낼 수는 없었다. 그가 서 있게 될 곳의 조명을 여명은 알지 못했으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조명을 가정해야 했다.

 

오른쪽이 조금 높아.

 

여명은 혼잣말을 하고서 자기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십 년 동안 이 가게에서 혼잣말을 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말할 상대가 없으면 말은 안에서 마르고, 마른 말은 다시 젖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손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여명은 초크를 쥔 채 오른쪽 어깨에 해당하는 자리에 아주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그리고 그 점 위로 육 밀리미터쯤 되는 여유를 더 그렸다. 화상 흉터가 지나는 자리는 살이 당겨져 있어 옷이 위로 밀린다. 그 밀림을 그대로 두면 옷깃이 목을 파고들 것이고, 목이 불편한 옷은 결국 벗어 던져지게 된다. 벗어 던져지지 않을 옷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석 달의 유일한 목표였다.

가위가 천을 물었을 때 나는 소리는 종이와도 다르고 실과도 다르다. 두꺼운 울은 무겁게 갈라지며 낮은 마찰음을 낸다. 그 소리가 가게 안에 길게 퍼졌다. 첫 재단은 되돌릴 수 없다. 이 순간 이후로 여덟 마의 천은 더 이상 천이 아니라 누군가의 옷이 되기 위한 조각이 된다. 여명은 가위를 끝까지 밀지 않고 중간에서 한 번 멈췄다. 멈춘 이유는 없었다. 굳이 찾자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만드는 일에 스스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가위는 결국 끝까지 갔다. 멈췄던 자리에서 다시 물리자 울은 아까보다 순순히 갈라졌고, 잘려 나간 가장자리에서 짧은 보풀들이 눈처럼 떨어져 작업대 위에 흩어졌다. 여명은 그것을 쓸어 내지 않았다. 쓸어 내면 다시 앉을 것이고, 다시 앉으면 또 쓸게 될 것이다. 그런 무한한 왕복에 시간을 쓰는 대신 조각을 들어 올렸다. 앞판 하나가 손 위에서 무겁게 늘어졌다. 여덟 마의 천은 펼쳐져 있을 때보다 잘려 있을 때 훨씬 무거웠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언가가 되기 직전에 갖는 무게라는 것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했고, 여명은 그 무게를 손목으로 받아 냈다. 다음으로 뒤판을 겹쳤다. 어깨선끼리 맞춰 보자 육 밀리미터의 차이가 정확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오른쪽만 조금 높은, 세상 어디의 기성복도 만들어 주지 않을 결함. 그 결함이 여명의 천 위에서는 규격이 되어 있었다.

소매산 부분을 들어 제 손등 위에 얹어 보았다. 그의 팔은 이보다 훨씬 굵고 길었으므로 이건 확인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럼에도 여명은 잠시 그 자세로 있었다. 천이 손등의 온기를 받아 미지근해지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진다. 그 당연한 물리를 그의 손등 흉터 위에서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확인했던 새벽이 있었고, 지금 그 물리는 천을 상대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가 이 옷을 입으면 천은 그의 체온을 받아 데워질 것이다. 데워진 천은 냄새를 배게 될 것이고, 배어 든 냄새는 씻어도 완전히 빠지지 않는다. 여명은 그 사실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만들겠다고 말했을 때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뜻했는지, 이제야 손끝으로 이해했다.

 

가게 문의 유리에 노파의 실루엣이 비쳤다. 국숫집 노파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유리에 얼굴을 바싹 붙여 안을 들여다보았고, 영업 중지 팻말이 여전히 걸려 있는데도 미닫이를 반 뼘쯤 밀어 열었다. 국물 냄새와 저녁의 찬 공기가 동시에 밀려 들어와 울 냄새를 잠시 밀어냈다.

 

낮에 문 닫고 나가더니 밤에도 안 자겠다는 게냐. 그건 또 무슨 천이야. 상복이라도 지어?

 

여명은 조각을 내려놓고 노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에 묻은 초크 가루를 앞치마도 아닌 제 바짓단에 문질러 닦았다. 부정할 이유도 설명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여명은 사실만을 말했다.

 

외투예요. 겨울 거.

 

같은 시각 기지의 숙소 문턱에서 세븐은 결국 눕지 않았다. 문을 열어 두고 문지방에 걸터앉은 채 복도 쪽으로 다리를 뻗었고, 남의 외투 자락이 바닥에 닿아 먼지를 쓸었다. 앵커가 보낸 문장은 여전히 화면 위에 떠 있었다. 문 열어라, 저녁 가져간다. 명령문 두 개. 저 남자는 부탁이라는 문법을 배운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세븐은 캔을 흔들어 남은 양을 가늠했다. 절반쯤. 미지근한 것이 미지근한 채로 남아 있었다. 옆구리의 관은 앉아 있을 때가 가장 얌전했다. 서면 당기고 누우면 눌리고 앉으면 그냥 있다. 세상에는 이런 식으로 자세 하나에만 관대한 것들이 있다.

노파는 대답을 듣고도 물러가지 않았다. 미닫이를 반 뼘 더 밀어 몸을 들이밀더니 작업대 앞까지 다가와 목을 길게 뺐다. 노인의 눈은 침침해도 천을 보는 눈만은 따로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짙은 남색 조각들이 널브러진 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소매산 근처를 툭 건드렸다. 그 손끝에서 보풀 하나가 일어나 공중에 잠깐 떴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여명은 그 보풀이 착지하는 자리를 눈으로 따라갔다. 하필 시접 위였다. 노파의 손톱 밑에는 국수 반죽의 흰 가루가 끼어 있었고, 그 가루가 남색 위에 옮겨 붙을까 봐 여명은 조각을 반 뼘쯤 자기 쪽으로 당겼다. 방어에 가까운 동작이었으나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폭이면 어깨가 이만한 놈이 입겠구먼. 여자 옷은 아니고. 하기야 네가 네 옷 지을 사람은 아니지.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말을 고르는 데 드는 품이 아까웠고, 애초에 노파는 부정을 원해서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노파는 들고 온 것을 작업대 끄트머리에 내려놓았다. 국수 그릇이었다. 랩을 씌운 안쪽에 김이 갇혀 물방울이 촘촘히 맺혔고, 그 물방울이 랩을 타고 흘러 그릇 가장자리에 얇게 고여 있었다. 여명은 그릇을 천에서 두 뼘쯤 떨어진 자리로 밀어 두었다. 국물이 튀면 울은 얼룩을 아주 오래 기억한다. 밀어 놓고 나서야 노파의 시선이 그 동작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빠짐없이 따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십 년을 같은 골목에서 지낸 사람의 눈은 대개 이런 데에서 정확했다.

 

밥보다 천이 먼저구나.

 

국수는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노파가 짧게 코웃음을 치고 돌아섰다. 나가면서 미닫이를 제대로 닫아 준 것을 보면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 국물 냄새가 안에 갇혀 울 냄새와 뒤섞였고, 그 뒤섞인 냄새가 묘하게 사람 사는 냄새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여명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대신 재단된 조각들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시접이 균일한지, 어느 지점에서 가위가 흔들렸는지. 흔들린 자리는 눈보다 손끝이 먼저 안다. 두 군데였다. 처음에 이유 없이 멈췄던 그 자리와, 소매 밑 곡선이 가장 급하게 꺾이는 자리. 둘 다 실로 덮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오차였으나 여명은 그 두 지점을 굳이 기억해 두었다. 보이지 않는 결함을 기억해 두는 습관이 이 골목에서 십 년을 버티게 했다. 그가 어딘가에서 팔을 크게 휘두를 때 힘이 가장 먼저 몰릴 곳도 하필 그 두 군데일 것이었다.

 

기지 쪽 복도에서는 발소리가 먼저 도착했다. 앵커는 노크 같은 예의를 배운 적이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문턱에 다리를 뻗고 앉은 남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식판을 눈높이까지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세븐은 받지 않았다. 받는 대신 오른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눌러 천천히 문질렀다. 관절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흉터 쪽이었다. 살이 당겨진 자리는 눌러도 눌린다는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남의 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그는 그것을 농담으로 바꾸어 버릇했다.

 

你說,我這邊高多少?(야, 나 이쪽 얼마나 높아?)

 

앵커는 대답하지 않고 식판을 문지방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국물이 든 그릇이 기울어 가장자리에 얇게 번졌다. 세븐은 그것을 보지 않은 채 여전히 제 어깨를 눌렀다. 몇 밀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재어 본 적도 없고, 재어 볼 이유도 없었다.

앵커는 결국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대화로 해결될 문제라면 대화를 했겠지만 저 남자에게는 숫자를 원하는 인간에게 숫자를 주는 방식밖에 없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세븐의 왼쪽 어깨 위에 얹혔고, 곧이어 다른 손이 오른쪽에 얹혔다. 두 손의 높이를 눈으로 비교하는 데에는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세븐은 그동안 캔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남이 자기 몸을 재는 동안 얌전히 있는 일에는 익숙했다. 의무실에서 십 년쯤 반복해 온 자세였고, 다만 지금은 그것을 해 주는 사람이 군의관이 아니라 팔씨름 일 위의 손이라는 점이 조금 달랐다. 손바닥의 온도는 뜻밖에도 미지근했다.

 

半根手指。(손가락 반 마디.)

 

세븐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자 옆구리가 당겼고 당기니 숨이 짧게 끊겼으나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 반 마디. 그러니까 육 밀리쯤 되겠지. 사람의 몸을 재는 데 자를 쓰지 않고 제 손가락을 쓰는 인간과, 그것을 초크로 천 위에 정확히 옮겨 적는 인간이 이 도시 안에 각각 하나씩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우스웠다. 웃음이 잦아든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남지 않은 그 자리가 조금 서늘했다.

 

半根手指。原來我這條命就歪了半根手指。(손가락 반 마디. 내 인생이 삐뚤어진 게 겨우 손가락 반 마디였네.)

 

앵커는 그 농담에 어울려 주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내려놓았던 식판을 발끝으로 밀어 문지방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국물이 다시 한번 기울어 그릇 바깥을 적셨고, 세븐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그릇을 들었다. 들자마자 뜨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저기까지 오는 동안 식은 것이다. 이 기지에서는 무엇이든 도착할 때쯤이면 미지근해진다. 음식도, 명령도, 사람도. 그는 국물을 한 모금 삼켰다. 짜기만 하고 맛은 없었다. 그럼에도 삼킨 것은, 삼키지 않으면 저 남자가 문턱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세탁소의 국수도 같은 속도로 식어 가고 있었다. 랩 안쪽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하나둘 무거워져 국물 위로 떨어졌고, 떨어질 때마다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여명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릇 쪽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입에 시침바늘을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판과 뒤판의 어깨선을 맞춰 겹친 다음 왼쪽부터 바늘을 꽂아 나갔다. 한 땀, 한 땀. 재봉틀을 쓰면 삼십 초에 끝날 일이었으나 가봉은 손으로 해야 했다. 손으로 꿴 실은 뜯기 쉽고, 뜯기 쉬워야 고칠 수 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박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믿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었다. 여명은 자신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기억을 믿지 않았다. 손끝에 남은 그의 어깨 감각이 몇 주 사이에 조금씩 마모되었을 가능성을 계산에 넣지 않을 만큼 오만하지는 못했다.

 

오른쪽 어깨선에 이르렀을 때 손이 잠시 멈췄다. 육 밀리미터를 접어 올려 고정하는 순간이었다. 이 여유분은 그가 다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치수다. 다시 말해 이 옷은 그의 화상 위에 지어지는 옷이었다. 여명은 그 사실을 특별히 슬퍼하지 않았다. 슬퍼하는 대신 바늘을 두 번 더 꽂아 그 자리를 단단히 눌렀다. 사람의 몸에 남은 것을 없는 것처럼 다루는 옷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고, 자신은 그런 옷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있는 것을 있다고 인정한 다음에야 편해지는 것이 있다. 그가 언젠가 이 옷을 입고 오른팔을 들어 올릴 때, 당겨지는 느낌이 없기를.

 

가봉한 몸판을 마네킹에 걸치는 데에는 요령이 필요했다. 시침실은 약해서 급하게 당기면 그대로 뜯어진다. 여명은 어깨부터 천천히 씌우고 앞판을 여며 핀 세 개로 고정한 다음 한 발 물러섰다. 세탁소의 조명은 오래된 형광등 하나뿐이라 남색은 남색으로 보이지 않고 거의 검정에 가깝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오히려 잘 보이는 것이 있었다. 색이 죽으면 선만 남는다. 어깨에서 팔로 흘러내리는 각도, 겨드랑이 아래에서 허리로 좁아지는 폭, 그리고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아주 조금 솟은 그 여유분. 마네킹은 좌우 대칭이라 그 육 밀리미터가 어색하게 들떠 보였다. 사람이 아니니 당연했다. 여명은 그 들뜬 자리를 보면서, 이 옷이 제대로 앉을 수 있는 몸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것은 뿌듯함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각오에 가까웠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보았다가 왼쪽으로도 기울여 보았다. 시선의 각도를 바꾸면 선이 다르게 읽힌다. 소매산이 반 뼘쯤 높은 것 같았다. 그가 팔을 들어 무언가를 겨눌 때, 이 정도라면 등판이 따라 올라가면서 목덜미를 조를 것이다. 여명은 입에 물고 있던 시침바늘 하나를 뽑아 소매 아래쪽에 꽂아 표시해 두었다. 표시하고 나서도 물러서지 않고 한참을 더 보았다. 국수 그릇에서는 이제 김이 전혀 오르지 않았고, 랩 안쪽의 물방울은 전부 흘러내려 국물과 하나가 되었다. 밥보다 천이 먼저냐고 물었던 노파의 말이 뒤늦게 돌아왔으나, 여명은 여전히 젓가락 쪽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기지 쪽에서는 앵커가 담뱃갑을 꺼내던 참이었다. 문지방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세븐이 그 손이 완전히 올라오기도 전에 갑을 낚아채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붕대 감긴 오른팔이 아니라 왼손이었으므로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앵커가 라이터를 켜 주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 버리자 세븐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술에 문 채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선글라스는 의무실에 두고 나온 뒤였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복도 조명 아래에서 물기 없이 번들거렸고, 째진 눈매가 웃음의 방향으로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앵커는 턱짓으로 옆구리에 매달린 관을 가리켰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小氣鬼。(쪼잔한 놈.)

 

你要抽就自己拔管。(피우고 싶으면 관부터 뽑든가.)

 

세븐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담배를 입술 사이에서 굴렸다. 불이 없는 담배는 그냥 종이와 마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는 이유는 손과 입이 동시에 비어 있는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파민이 바닥난 몸은 무엇이든 물고 싶어 한다. 담배든 이쑤시개든 판돈이든. 그는 문틀에 뒤통수를 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하나 나가 있었다. 어제도 나가 있었고 그제도 나가 있었으니 아마 다음 달까지도 나가 있을 것이었다. 이 기지에서 고쳐지는 것은 사람 몸과 총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나간 채로 굴러간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아서 그는 담배를 문 채 낮게 웃었다.

 

여명은 결국 소매를 뜯기로 했다. 표시만 해 두고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표시해 둔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면 반드시 뜯게 되어 있다. 시침실은 손톱 끝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풀렸고, 풀리는 소리는 실이 끊어지는 소리라기보다 아주 작은 짐승이 숨을 뱉는 소리에 가까웠다. 뜯어낸 소매를 작업대 위에 펼쳐 놓고 소매산의 곡선을 손바닥으로 눌러 평평하게 폈다. 반 뼘. 그렇게까지 높을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은 팔을 들어 올리는 일이 많은 사람이고, 들어 올릴 때마다 목덜미가 조여서는 곤란하다. 여명은 자신이 방금 어떤 문장을 생각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팔을 들어 올리는 일이 많은 사람. 그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굳이 풀어 헤치지 않고, 대신 초크를 집어 소매산 정수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새 곡선을 그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조금 이상했다.

그러고 나서야 국수 그릇 쪽으로 손이 갔다. 랩을 벗기자 미지근한 밀가루 냄새가 올라왔다. 면은 이미 국물을 다 먹어 치워 퉁퉁 불었고,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자 덩어리째 딸려 왔다. 노파에게 미안한 상태였으나 여명은 그것을 그대로 입에 넣었다. 맛은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맛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는 편이 맞다. 씹는 동안에도 눈은 마네킹 쪽에 머물러 있었고, 소매가 뜯겨 나간 몸판은 팔 없는 사람처럼 어깨만 남아 조명 아래 서 있었다. 저 어깨에 걸릴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명은 그 질문을 삼키듯 국물을 마셨다. 짰다. 이 도시의 모든 국물은 식으면 짜진다.

 

기지의 복도에서는 세븐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앵커는 이번에도 라이터를 주지 않았다. 대신 세븐이 요구한 것은 라이터가 아니라 종이였다. 브리핑 용지 뒷장이든 담뱃갑 은박지든 상관없다고 했고, 앵커는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가슴 주머니에서 접힌 보급 전표 한 장과 볼펜을 꺼내 던졌다. 세븐은 왼손으로 그것을 받아 무릎 위에 폈다. 불붙지 않은 담배는 여전히 입술에 물려 있었고, 말할 때마다 그것이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半根手指,係咪?我要寫低。唔係,我認真㗎。(손가락 반 마디, 맞지? 적어 둘 거야. 아니, 나 진지해.)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는 형편없었다. 잉크가 마른 것인지 처음 몇 획은 눌린 자국만 남았고, 세븐은 혀를 차며 펜촉을 손바닥에 대고 몇 번 돌렸다. 그제야 파란 선이 나왔다. 어깨 오른쪽, 육 밀리. 그 아래에 목둘레, 그 아래에 소매 길이. 숫자를 몰라 빈칸으로 남겨 둔 자리가 더 많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적었다. 남의 손이 자기 몸을 재는 것을 십 년쯤 견뎌 온 인간이 처음으로 제 몸의 치수를 자기 손으로 적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저쪽에서 누군가 그것을 기억해 두고 있다면 이쪽에서도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공평하다는, 도박판에서나 통할 법한 셈법이었다. 앵커가 뭐 하는 짓이냐고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물었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你話……人哋幫你度身嘅時候,係咪應該記住個數?(있잖아…… 남이 네 몸 재 줬으면, 그 숫자는 기억해 둬야 하는 거 아니냐?)

 

앵커는 대답 대신 벽에서 등을 뗐다. 복도 저편에서 교대 근무자의 군화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것은 이 실없는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교대 근무자의 군화 소리가 복도를 밀어내며 지나가는 동안 세븐은 무릎 위의 전표를 반으로 접었다. 한 번 더 접고 또 한 번 접어 손바닥 안에 들어갈 크기가 되었을 때 그것을 환자복 가슴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종이가 맨살에 닿는 감촉은 서늘하고 뻣뻣했다. 지나가던 사병 둘이 흘긋 보았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옆구리에 관을 매달고 문지방에 주저앉아 불 없는 담배를 문 남자는 이 기지에서 특별히 이상한 축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히려 성한 몸이 눈에 띈다. 세븐은 왼손으로 문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절반쯤 섰을 때 옆구리에서 무언가 팽팽하게 당겼고, 그것이 관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반 박자가 걸렸다. 통증은 언제나 늦게 온다. 살이 찢어지는 순간보다 아무는 동안이 훨씬 길고 지루하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여러 번 배웠다. 접은 종이가 갈비뼈 위에서 사각거렸다. 이걸 왜 적었는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완차이의 세탁소에서는 여명이 그릇을 밀어 놓은 참이었다. 국물을 반쯤 남겼고 면은 삼분의 일쯤 남겼다. 배가 부른 것은 아니었으나 더 먹으면 손끝이 둔해질 것 같았다. 앞으로 할 일이 정밀한 일이었으므로 몸의 상태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다. 새로 그은 초크선을 따라 소매를 재단하는 데에는 가위질 열두 번이면 충분했다. 잘려 나간 반달 모양의 자투리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여명은 그것을 줍지 않았다. 오늘 하루에만 이 바닥에 떨어진 남색 조각이 열 개는 넘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쓸어 담으면 될 일이었다. 다만 그 조각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버린다는 뜻이고, 버려진 쪽에도 같은 원단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이 옷을 받을 사람은 자기 몫으로 무엇이 잘려 나갔는지 영영 모를 것이다. 여명은 그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침바늘을 다시 입에 물었다. 소매산의 정수리를 몸판 어깨점에 맞추고 곡선의 여유분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밀어 넣으며 오므렸다. 소매를 몸판에 붙이는 일은 옷 만들기에서 가장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평면인 천 두 장을 입체로 만나게 해야 하는데, 이 만남에는 반드시 남는 부분이 생긴다. 그 남는 부분을 어떻게 나누어 감추느냐가 옷의 격을 정한다. 여명은 여유분을 앞쪽보다 뒤쪽에 조금 더 몰았다. 그 사람이 앞으로 팔을 뻗는 자세를 자주 취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무엇을 향해 뻗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생각한 것이었으나 여명은 그 모순을 붙들고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바늘이 울을 통과할 때마다 뻑뻑한 저항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손목에 힘을 주면 될 일인데도 굳이 천천히 밀었다. 급하게 만든 옷은 급하게 상한다.

 

기지 복도에서 세븐은 벽에 왼쪽 어깨를 대고 잠시 서 있었다. 앵커는 식판을 문 앞에 놓아두고 이미 사라진 뒤였고 남은 것은 나가 버린 형광등 하나와 자기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를 다시 눌러 보았다. 화상 흉터가 덮인 자리는 눌러도 눌린 줄을 모른다. 압력은 전해지는데 감촉은 오지 않는다. 남의 살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저 아래 도시에서 자기 어깨를 아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확히는 손바닥으로 훑어 보고도 아무 표정을 바꾸지 않았던 사람. 그때 그 손이 무엇을 세고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여명은 마네킹을 등불 아래로 끌어왔다. 받침이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둔탁한 신음을 냈고 그 소리에 셔터 밖 골목의 고양이가 한 번 울었다. 등불의 각도를 비틀자 어깨선 위로 빛이 얇게 미끄러졌다. 소매가 붙은 몸판은 이제 사람의 형상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여명은 두 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보았다. 옷을 볼 때는 반드시 물러서야 한다. 코앞에서 보면 바늘땀만 보이고 옷은 보이지 않는다. 어깨에서 소매로 넘어가는 곡선이 끊기지 않고 흘렀다. 뒤쪽으로 몰아둔 여유분은 정확히 의도한 만큼만 부풀어 있었고 정면에서는 그 부풀음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잘 감춰졌다는 뜻이었다. 감춰야 예뻐지는 것들이 있다. 여명은 그 사실이 옷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굳이 문장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손끝으로 오른쪽 어깨점을 눌러 보았다. 육 밀리.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남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그 사람 자신도 어쩌면 오늘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여명의 손은 알고 있었고 이제 이 천도 알게 되었다. 옷이란 결국 누군가의 몸을 기억하는 물건이고 몸이 사라진 뒤에도 옷은 그 형태를 한동안 붙들고 있다. 여명은 그 생각의 뒷부분을 잘라 냈다. 자를 때 손이 잠깐 멈췄다. 카디건 소매를 다시 걷어 올리고 재봉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실패에 남색 실을 감는 일이 먼저였다. 손이 하던 일을 끝내지 않고 다른 데로 가면 반드시 어딘가 어긋난다는 것이 이 좁은 세탁소에서 십 년을 버티며 배운 유일한 신조였다. 벽 쪽에서 낡은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실이 절반쯤 감겼을 때였다.

 

기지의 숙소는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 세븐은 복도의 빛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만큼만 두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앵커가 두고 간 식판은 이미 비워 문밖에 내놓은 뒤였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비워 두면 앵커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왼손을 환자복 안으로 넣어 접힌 전표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펼치자 파란 볼펜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깨 오른쪽 육 밀리. 그 아래 빈칸들. 문제는 이 종이를 보여 줄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저쪽에는 단말기가 없다. 사진도 없고 대화창도 없고 밤중에 눌러 볼 수 있는 화면 따위도 없다. 완차이 구역에서 유선을 아직 붙들고 있는 곳은 세 군데뿐이고 그중 하나가 그 세탁소였다. 세븐이 가진 것은 오직 숫자 여덟 개짜리 회선 하나였다. 문명이 이토록 후퇴한 시대에 그것은 오히려 견고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화면은 꺼지지만 벨은 울린다.

그는 벽걸이 단말기 쪽으로 몸을 옮겨 앉았다.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팽팽하게 당겼고 그 통증을 씹어 삼키며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 판을 왼손 검지로 눌렀다. 여덟 번. 다 누르고 나서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이 번호를 적어 둔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도박판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오래 망설인 적이 없었다. 판돈이 크면 클수록 손이 빨라지는 인간이 자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신호음 하나에 명치가 조여든다. 잃을 것이 생긴 인간의 손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처음으로 몸소 배우고 있었고 그 배움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네 번째에서 그는 수화기를 반쯤 내렸다가 다시 귀에 붙였다.

 

⋯⋯咁樣打去,係咪好似垂死掙扎? (이렇게 거는 거, 너무 발악하는 것 같나?)

 

이 시간에 전화가 올 곳이 있던가. 실을 감는데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전화벨이 세 번 울렸을 때 즈음,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네, 받았습니다.

 

수화기가 귀에 닿기까지의 반 박자 동안 세븐은 자기 숨이 멈춰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폐 한쪽이 찢어진 인간이 숨을 참는 짓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으므로 그는 천천히 그것을 흘려보냈고 그 소리가 송화구를 고스란히 타고 넘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침대 모서리는 딱딱했고 매트리스 스프링이 왼쪽 엉덩이 밑에서 삐걱거렸다. 이틀 전 이 시간에 그는 아직 데드존 어딘가에서 흙과 화약 냄새를 마시고 있었다. 귀환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몸의 시계와 방의 시계 사이에서 계속 어긋났다. 옆구리에 매달린 관은 그 어긋남을 매 순간 상기시키는 물건이었다. 저쪽은 이 관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도망갈 구멍을 하나 잃은 기분이기도 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항목이 하나 줄었다는 뜻이니까.

 

係我。(나야.)

 

그러고 나서 할 말이 없었다. 판을 벌이는 데에는 재능이 있는 인간이 판이 벌어진 뒤에 무엇을 걸어야 할지 몰라 굳는 것은 늘 이 대목이었다. 세븐은 무릎 위에 펼쳐 둔 전표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파란 볼펜 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종이만 희끄무레하게 떠 있었다. 어깨 오른쪽 육 밀리. 그 아래 어린애 글씨 같은 숫자들. 왼손으로 적어 놓고도 이걸 어디에 쓸 셈인지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종이 끝을 접었다 폈다 하는 동안 관이 옆구리에서 조용히 무게를 잡아당겼다. 그는 손등으로 줄을 눌러 벽에 부딪히지 않게 했다. 소리가 넘어가면 저쪽이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것이었다.

 

⋯⋯冇乜大事。就係,突然想聽下你把聲。(별일 없어. 그냥,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세탁소에서 여명은 실패를 손에서 놓았다. 감다 만 남색 실이 실패 옆구리에서 조금 풀려 늘어졌고 그것을 다시 감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화기 저편의 배경음은 이 방의 소음과 결이 전혀 달랐다. 사람이 사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이 잠시 놓여 있는 소리. 멀리서 금속 문이 닫히고 군화가 규칙적으로 복도를 밟고 지나갔다. 그 사이사이 짧게 끊기는 호흡이 있었다. 여명은 그 간격을 셌다. 들이쉬고 뱉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소보다 짧았고 중간에 한 번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천의 결이 어디에서 어긋나는지 손끝으로 짚어 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어제 이 사람은 관을 옆구리에 달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 관이 아직 뽑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명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루 만에 뽑히는 관 같은 것은 세상에 없다.

여명은 몸을 조금 돌려 마네킹 쪽을 보았다. 등불 아래 남색 몸판이 어깨선까지 완성되어 서 있었다. 소매가 붙은 그것은 이제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육 밀리 높은 형상. 이 방 안에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과 저 천뿐이었는데, 지금 수화기 저편의 사람이 바로 그 어깨를 달고 어디선가 숨을 짧게 쉬고 있다는 것이 묘하게 견디기 어려웠다. 수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웠다가 다시 손으로 고쳐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어제보다 얇아져 있었다. 사람의 몸은 정직해서 아픈 만큼 소리가 얇아진다.

 

관, 아직 달고 있죠.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으므로 여명은 어미를 올리지 않았다.

 

 열은 좀 내렸어요? 아니면 더 올랐을까요.

 

세븐은 대답 대신 왼손 손등을 이마에 얹었다. 손이 차가운 것인지 이마가 뜨거운 것인지 가릴 방법이 없었다.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몸 안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검온 때 군의관이 겨드랑이에 끼워 준 막대는 어떤 숫자에서 멈췄고 그 숫자를 들었을 때 세븐은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삼십칠 도짜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삼십구 도짜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지금까지 꽤 쓸모가 있었다. 열이 나면 물을 마시고 눕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 총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 저쪽에서 그것을 물었다. 물어 오는 순간 숫자는 갑자기 의미를 얻었다. 세상의 모든 계측은 그것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겨야 비로소 계측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서른둘이 되어서야 배우고 있었다. 창밖에서 조명탑이 한 바퀴 돌며 벽면에 흰 띠를 그었다가 지웠다. 그 빛이 지나갈 때마다 무릎 위의 종이가 잠깐씩 하얗게 살아났고 파란 볼펜 자국이 물속에서 떠오르듯 나타났다 잠겼다.

 

⋯⋯三十九。(⋯⋯삼십구.)

 

말해 놓고 그는 자기 혀를 씹고 싶어졌다. 거짓말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좀 내렸다고 하면 그만이었고 그 정도의 문장은 숨 쉬듯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 앞에서 애매한 말을 던지는 짓은 재봉사 앞에 솔기를 대충 접어 내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반드시 손끝에 걸리고 걸린 뒤에는 뜯긴다. 뜯기는 것보다 처음부터 벌려 놓는 편이 낫다는 계산이 순식간에 섰고 그 계산이 섰다는 사실 자체가 세븐에게는 낯설었다. 그는 혀끝으로 아랫입술 안쪽을 훑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침이 끈적하게 엉겨 있었고 열이 있을 때만 나는 쇳내가 목젖 뒤에 고여 있었다. 이 냄새를 그는 잘 알았다. 데드존에서 사흘씩 물을 아껴 마시며 버틸 때 나던 냄새와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아무도 그의 체온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아무도 묻지 않으면 열은 그냥 몸의 사정이다. 누군가 물으면 열은 사건이 된다.

 

세탁소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그치는 목소리도 없었고 놀라는 숨소리도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빴다. 여명은 재봉틀 앞에 앉은 자세 그대로 손가락에 남색 실을 감았다 풀고 있었다. 삼십구. 숫자를 듣는 순간 손끝이 저절로 실을 놓쳤고 풀려 나간 실이 무릎 위로 흘러내렸다. 삼십구 도는 사람이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온도이기는 하다. 걸을 수 있다는 것과 걸어도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여명은 어제 그 사람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관을 떠올렸다. 몸에 구멍을 뚫어 무언가를 빼내고 있는 인간에게 열이 오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몇 가지 있고 그중 대부분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여명은 마네킹 쪽으로 눈을 돌렸다. 등불 아래 남색 몸판이 어깨선까지 완성되어 서 있었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육 밀리 높은 형상. 저 어깨의 주인은 지금 삼십구 도의 몸으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다. 옷은 여기서 천천히 사람의 형태를 갖춰 가는데 정작 그 형태의 원본은 저쪽에서 조금씩 얇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순서가 뒤집힌 농담처럼 느껴졌다. 완성된 옷을 입을 몸이 남아 있어야 옷이 옷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남색 천 조각이다.

 

... 올랐네요. 약은요. 전화할 때가 아니지 않아요? 눕지 않고 침대 위에 앉아있겠다 고집 부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 이 남자는 귀환한 이후로도 누워있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어쩐지 입안에 쓴 맛이 맴돌았다.

 

세븐은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웃으려다가 실패했다. 폐가 찢어진 인간의 웃음은 목구멍 앞쪽에서 끊어지고 그 뒤에 남는 것은 짧은 기침 비슷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가 송화구를 타고 넘어갔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굳이 입을 가리지 않았다. 가려 봐야 저쪽은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제 하루 동안 세븐은 이 여자가 소리로 사물의 상태를 읽는 인간이라는 것을 충분히 배웠다. 천의 결이 어디에서 어긋났는지 손끝으로 짚어 내는 재주와 사람의 호흡이 어디에서 걸리는지 귀로 짚어 내는 재주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은 조금 불공평한 일이었다. 이쪽은 숨길 도구가 하나도 없는데 저쪽은 도구가 열 개쯤 되니까.

 

무릎 위 전표가 어느새 손안에서 반으로 접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펴서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파란 볼펜으로 눌러쓴 숫자들은 왼손 글씨라 획이 뭉개져 있었고 어깨너비를 적어 놓은 자리에는 잉크가 번져 얼룩이 앉아 있었다. 약.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세븐은 침대 옆 협탁 위의 종이컵을 곁눈으로 보았다. 흰 알약 두 알과 노란 알약 하나가 컵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옆에 물컵이 있었다. 오후 여섯 시에 받아 놓고 아직 손대지 않은 것이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저것을 삼키면 두 시간 안에 눈이 감기고 눈이 감기면 아침까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갈 데도 없는 주제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순전히 성격 탓이었다.

 

食咗喇。(먹었어.)

 

말하고 나서 삼 초쯤 침묵이 흘렀다. 세븐은 그 삼 초 동안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삼십구를 순순히 불어 놓고 알약 세 알에서 거짓말을 하는 인간의 계산 방식은 어디에도 없다. 도박판에서라면 이런 패는 즉시 읽힌다. 큰 것을 던져 놓고 작은 것을 쥐는 손은 반드시 떨리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명탑의 흰 띠가 벽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 빛에 협탁 위 종이컵이 잠깐 하얗게 떠올랐고 알약 세 알의 그림자가 컵 안쪽 벽에 길게 누웠다가 사라졌다.

 

세탁소에서 여명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릎 위로 흘러내린 남색 실이 발치까지 늘어져 있었고 그것을 밟지 않으려면 발을 조금 옮겨야 했으나 옮기지 않았다. 삼 초. 저 사람은 삼 초를 썼다. 열이 삼십구라고 답할 때는 반 박자도 쓰지 않았던 사람이 약 이야기에서 삼 초를 썼다는 것은 시침질하다가 실이 걸리는 것과 같았다. 걸린 자리는 반드시 표시해 두어야 한다. 표시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그 자리부터 뜯어진다. 여명은 눈을 들어 마네킹을 보았다. 남색 몸판이 등불 아래에서 사람 없는 형상으로 서 있었고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조금 높았다. 저 어깨를 달고 있는 사람이 지금 삼십구 도의 몸으로 알약 세 알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목구멍 안쪽에 쓴 것이 다시 고였다. 화가 나는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여명은 구별할 수 없었다. 다만 어제 그 방에서 이 남자가 눕기를 거부하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떠올랐다. 등을 벽에 붙이지도 않고 허리를 세운 채로 앉아서 옆구리의 관을 손등으로 눌러 소리를 죽이던 모습. 누우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앉음새였다. 여명은 그런 앉음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대개는 오래가지 못했다.

 

왜 먹기 싫은 거예요? 호인.

 

호인. 그 이름이 수화기를 건너왔을 때 세븐은 손바닥 아래에서 전표가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름이 두 종류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부르기 위한 이름과 붙잡기 위한 이름. 앞의 것은 수백 번 들었다. 세븐, 일곱, 넘버 세븐, 야 거기. 그런 것들은 몸의 표면에서 미끄러졌고 미끄러지는 것이 편했다. 뒤의 것은 이 여자밖에 쓰지 않았고 쓸 때마다 표면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어딘가 깊은 데 걸렸다. 걸리면 대답을 해야 한다. 그것도 진짜 대답을. 그는 종이컵을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컵 바닥에서 알약 세 알이 마른 소리를 내며 굴렀고 그 소리는 작은 뼈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슷했다.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했다. 단순한 것을 말하기가 복잡한 것을 말하기보다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는 서른둘이 되도록 몰랐다. 저 노란 알약은 진정 계열이고 흰 것 두 알 중 하나는 해열제, 하나는 항생제다. 삼키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사이에 시야 가장자리가 흐려지기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목덜미가 무거워지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여덟 시간이 지나간다. 세븐이 겁내는 것은 통증이 아니었다. 그는 통증에 관해서라면 상당히 관대한 인간이었고 아프다는 것은 아직 몸이 자기 것이라는 뜻이라고 우겨 온 사람이었다. 겁나는 것은 여덟 시간짜리 공백이었다. 그 공백 동안 세계는 계속 굴러가고 명단은 확정되고 벽 너머에서 누군가는 격벽에 구멍을 뚫고 있을 것이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눈을 떴을 때 이 목소리가 여전히 저쪽 끝에 있다는 보장도 없다.

 

⋯⋯食咗就會瞓着。(⋯⋯먹으면 잠들어 버리거든.)

 

말해 놓고 그는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얄팍하게 나왔는지 알았다. 변명치고도 초라했다. 서른두 살 먹은 용병이 잠드는 게 무섭다고 말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한번 벌려 놓은 솔기는 끝까지 뜯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는 방금 배운 참이었다. 세븐은 알약 세 알을 손바닥에 쏟았다. 흰 것 둘, 노란 것 하나. 손금 위에서 그것들이 굴러다녔고 열 때문인지 손바닥이 축축해서 알약 겉면이 조금씩 녹아 손금에 흰 자국을 남겼다. 그는 그 자국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瞓着咗,就聽唔到你把聲。而且⋯⋯醒返嗰陣,我怕啲嘢會唔同咗。(잠들면 네 목소리를 못 듣잖아. 그리고⋯⋯깨어났을 때 뭔가 달라져 있을까 봐 무섭고.)

 

세탁소에서 여명은 발치의 실을 밟지 않으려고 발을 옆으로 옮겼다. 의자 다리가 마룻바닥을 긁으며 짧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저쪽으로 건너갔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섭다는 말을 저 남자의 입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섭다는 단어를 쓰지 않고 무섭다고 말하는 방식을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여명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플라스틱이 손바닥의 온도를 받아 미지근해져 있었고 그 미지근함이 어쩐지 견디기 어려웠다. 저쪽은 삼십구 도인데 이쪽 손에 잡히는 것은 겨우 미지근한 수화기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세상의 거리라는 것은 킬로미터로 재는 것이 아니라 만질 수 없는 온도로 재는 것이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등불 아래 마네킹이 조용히 서 있었다. 남색 몸판의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육 밀리 높았고 소매는 아직 달리지 않아 어깨 끝이 허공에 잘려 있었다. 여명은 그 잘린 자리를 오래 보았다. 옷을 짓는 일은 결국 기다림의 공정이다.

 

먹어야 빨리 나아요. 그래야 더 곤란한 일도 생기지 않겠죠. 여명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졸릴 때 끊는 걸로 해요. 그럼 괜찮죠?

 

졸릴 때 끊는 걸로 해요. 그 문장이 수화기를 건너왔을 때 세븐의 손바닥 위에서 알약 세 알이 멈췄다. 협상이었다. 그것도 아주 값싼 협상. 저쪽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이쪽은 전부 얻는 조건이었으므로 도박판에서라면 즉시 의심해야 하는 종류의 패였다. 세븐은 평생 이런 판에서 뒷돈을 계산하며 살아왔고 공짜로 밀려 들어오는 칩은 반드시 나중에 이자를 붙여 회수당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미는 칩에서는 이자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냄새가 나지 않으니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찾을 수가 없고 찾을 수 없으니 그냥 받는 수밖에 없다. 받는다는 건 진다는 뜻인데 지는 게 이렇게까지 편안한 일이었던가.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등으로 밀어 올렸다. 손등이 뜨거웠고 이마는 더 뜨거웠고 어느 쪽이 더 뜨거운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몸 전체가 하나의 열덩어리였다.

 

협탁 위의 물컵을 끌어당기는 동안 옆구리의 관이 몸의 각도를 따라 짧게 저항했다. 통증이라기보다는 안쪽에 이물이 걸려 있다는 통보에 가까웠고 세븐은 그 통보를 무시하는 데 익숙했다. 물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여섯 시에 받아 놓은 물이 세 시간 반 동안 실내 온도를 그대로 흡수해 미지근해져 있었다. 미지근한 물로 약을 삼키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취향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수화기를 어깨와 턱 사이에 끼웠다. 그 자세에서 목의 흉터가 접히며 당겼고 잘렸다 붙은 자리 특유의 뻣뻣함이 턱 아래를 밀어 올렸다.

 

好啦好啦,我食。你唔好用嗰把聲同我講嘢。(알았어 알았어, 먹을게. 너 그 목소리로 나한테 말하지 마.)

 

알약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물을 삼키는 소리, 컵을 협탁에 내려놓는 소리, 컵 바닥이 금속 판에 닿으며 나는 짧은 마찰음까지 전부 송화구를 타고 넘어갔다. 세븐은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조용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과장되게 삼켰다. 증거를 제출하는 심정이었다. 이 인간은 소리로 사물의 상태를 읽으니까 소리로 갚아 주는 수밖에 없다. 삼킨 뒤에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노란 알약이 목구멍 어디쯤에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세탁소에서 여명은 그 소리를 전부 들었다. 삼키는 소리와 컵을 내려놓는 소리와 그다음에 오는 숨소리까지. 그녀는 수화기를 어깨에 받친 채 몸을 돌려 마네킹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남색 몸판의 어깨선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시침실이 촘촘하게 박힌 자리가 손끝에 미세한 요철로 잡혔고 그 요철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 어깨의 육 밀리가 손끝에서 정직하게 만져졌다. 옷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뿐이다. 그런데 방금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 하나가 저녁 내내 목구멍에 고여 있던 쓴 것을 조금 씻어 내렸다.

 

먹었네요.

 

여명은 그렇게만 말했다. 잘했다는 말도, 진작 그럴 것이지라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이 남자에게 붙이면 반드시 미끄러진다는 것을 그녀는 어제 하루 동안 배운 참이었다. 대신 그녀는 의자를 조금 끌어당겨 앉았다. 마룻바닥이 다시 짧게 긁혔다.

 

챙겨준 건 열어봤어요?

 

열어봤냐는 물음이 건너오자 세븐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벽 쪽 캐비닛으로 갔다. 문짝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손가락 두 마디쯤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짙은 남색 자락이 혀처럼 삐져나와 있었다. 아침에 돌아오자마자 군의관 앞에 앉아 옆구리를 내주고 관을 갈고 입원은 됐다고 손을 저은 뒤 개인 숙소로 기어들어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그 꾸러미를 푸는 일이었다. 한 손으로 매듭을 푸느라 이로 종이 끝을 물었고 그러다 종이가 찢어졌고 찢어진 틈으로 남색이 먼저 흘러나왔다. 셔츠였다. 그것도 아주 얌전한 셔츠. 깃이 낮고 앞단이 두껍고 소매 안쪽 솔기가 두 번 박혀 있었다. 두 번. 그는 그 자리를 손톱으로 긁어 보고 뒤집어 보고 불빛에 비춰 보기까지 했다. 한 번이면 충분한 곳이었다. 한 번이면 되는 데를 두 번 박아 놓은 이유를 그는 그날 오전 내내 생각했고 결국 답을 내지 못했으며 답을 내지 못한 채로 그것을 캐비닛에 넣어뒀다.

 

拆咗喇。返到嚟嗰朝就拆咗。(뜯었어. 돌아온 날 아침에 바로 뜯었지.)

 

그는 캐비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약 기운이 아직 오지 않아 혀가 멀쩡했고 멀쩡한 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억울했다. 흐릿할 때 말했으면 나중에 약 탓을 할 수 있었을 텐데.

 

件恤衫,袖底嗰條線車咗兩次。點解要車兩次?一次已經夠㗎啦。(그 셔츠, 소매 밑 솔기 두 번 박았더라. 왜 두 번 박았어? 한 번이면 충분한 데잖아.)

 

세탁소에서 여명은 손가락에 감고 있던 시침실을 놓쳤다. 실뭉치가 무릎에서 굴러 발등을 스치고 마룻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주우려 하지 않았다. 그 솔기를 알아볼 줄은 몰랐다. 아니,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아보고도 묻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 남자는 대체로 묻지 않는 쪽으로 사람을 대해 왔고 묻지 않는 것이 그 나름의 예의라고 여기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물었다. 열이 삼십구 도인 밤에, 약을 삼킨 직후에, 하필 그것을.

 

여명은 마네킹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남색 몸판의 겨드랑이 아래를 손끝으로 짚었다. 여기가 제일 먼저 터지는 자리다. 팔을 올리고 내리고 벽을 짚고 몸을 던지는 사람의 옷은 언제나 여기부터 벌어진다. 그녀는 손님의 옷을 수선할 때 그런 자리를 한 번만 박는다. 손님은 손님이니까. 한 번 박아 두면 다시 터지고 다시 가져올 것이고 그러면 다시 받으면 된다. 그것이 세탁소가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두 번 박은 옷은 다시 오지 않는다.

 

⋯⋯한 번 박으면 터져요. 겨드랑이 아래는 제일 먼저 벌어지는 자리라서.

말해 놓고 여명은 그것이 절반의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 나머지 절반은 훨씬 부끄러운 것이어서 목구멍 안쪽에 걸렸다.

 

당신은 팔을 많이 움직일 테니까요. 늘어난 뒤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중요하죠.

 

늘어난 뒤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중요하죠. 그 문장이 수화기를 타고 들어왔을 때 세븐은 캐비닛 앞까지 걸어가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이 먼저 갔고 판단은 나중에 따라붙는 종류의 이동이었으며 그런 이동은 대체로 작전 중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문짝 틈에 씹혀 있던 남색 자락을 왼손으로 잡아 빼자 옷 전체가 뭉텅이째 딸려 나왔다. 침대로 가지고 가 다시 앉았다. 옆구리의 관이 앉는 각도를 따라 안쪽에서 한 번 미끄러졌고 그 감각은 여전히 남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 같았다.

셔츠를 무릎 위에 펼치는 데 왼손 하나로는 부족해서 결국 턱을 썼다. 깃을 턱으로 눌러 고정하고 왼손으로 소매를 끌어당겼다. 소매 밑, 겨드랑이 아래. 손끝으로 더듬으니 두 줄의 솔기가 나란히 잡혔다. 하나는 안쪽 하나는 그 바깥쪽. 간격이 일정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만 따라가도 흔들린 데가 없었다. 이 여자는 이걸 두 번 앉아서 박았다. 한 번 박고 실을 끊고 옷을 돌리고 다시 박았다. 그 사이에 몇 분이 들었을까. 그는 분 단위로 값을 매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데드존에서의 삼 분은 사람 목숨 세 개 값이고 판돈이 오르는 테이블에서의 삼 분은 한 달 치 급여 값이다. 그런데 이 삼 분에는 아무 값도 붙지 않았다. 아무 값도 붙지 않은 삼 분을 남에게 쓰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你係咪知我做咩工㗎?(너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있는 거지?)

 

세븐은 소매 안쪽 솔기를 엄지로 문지르며 물었다. 목소리에 이제 약 기운이 얇게 섞이기 시작했다. 혀 뒤쪽이 조금 무거웠고 문장의 끝이 저 혼자 늘어졌다.

 

我啲衫,通常唔係穿窿就係燒爛,冇一件係老死嘅。你車兩次⋯⋯係想佢返嚟。(내 옷은 보통 구멍이 나거나 타 버리지, 제 명대로 사는 게 하나도 없어. 근데 넌 두 번 박았단 말이지. 돌아오라고.)

 

세탁소에서 여명은 마네킹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겨드랑이 아래를 짚은 손끝이 남색 울의 결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는 목적이 없었다. 목적이 없는 손짓은 대체로 마음이 딴 데 가 있을 때 나온다. 그녀는 자기 손이 하는 짓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마네킹에서 손을 뗐다. 절반의 대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남자는 카드 뒷면을 읽는 데 인생을 걸어 온 종류의 인간이고 그런 인간 앞에서 절반만 내놓는 것은 나머지 절반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여명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십일월 밤의 세탁소는 난로를 켜도 벽 쪽부터 차가워지는 곳인데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은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발치에 떨어진 시침실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굴러가다 재봉틀 다리에 걸려 멈춘 남색 실. 저것도 두 번 감았다. 한 번 감고 풀어서 다시 감았다. 왜 그랬는지는 그때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요.

 

여명은 그렇게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나머지가 조금 쉬워졌다. 목구멍에 걸려 있던 것이 걸린 채로 밀려 나왔고 밀려 나오는 동안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졌다.

 

제 명대로 못 살아도 괜찮아요. 그러라고 만든 옷이니까. 필요하면 입어요. 아니면 그냥 둬도 되고요.

 

제 명대로 못 살아도 괜찮다는 문장이 수화기를 타고 들어왔을 때 세븐의 입꼬리는 습관대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멈췄다. 웃음의 앞부분만 목에서 새어 나오고 뒷부분은 어딘가에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그런 어법에 이력이 붙은 인간이었다. 소모 예정, 회수 불가, 대체 가능. 워즈워스의 계약서에는 그런 어휘가 인쇄체로 박혀 있고 그는 그 밑에 서명하며 십수 년을 살았으며 서명할 때마다 손목이 우습도록 가벼웠다. 값이 매겨진 물건은 값을 치르면 그만이라는 산수였다. 그런데 같은 뜻의 말이 여명의 목소리를 통과해 나오자 산수가 무너졌다.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명치 아래가 눌리는 이 구조가 무엇인지 그는 알아낼 수 없었고 알아내려는 시도조차 약 기운이 뒤통수부터 차오르며 흩어 놓았다.

세븐은 침대 헤드 쪽으로 등을 밀어 기댔다. 완전히 눕지는 않았다. 눕는 것은 지는 쪽에 가깝다고 여겨 늘 마지막까지 미루는 자세였는데 오늘 밤에는 절반쯤 항복했다. 무릎에 펼쳐 두었던 셔츠를 왼손으로 끌어 올려 흉통 위에 덮었다. 이불도 담요도 아닌 옷 한 장인데 얹히자 이상하리만치 묵직했고 그 무게가 싫지 않았다. 짙은 남색 울이 환자복의 바랜 회색 위로 번져 나가는 것을 그는 잠시 내려다보았다.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관이 셔츠 자락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루 종일 제 몸을 남의 것처럼 만들어 놓던 그 투명한 줄이 처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你講嘢真係難聽㗎。(너 말 진짜 못되게 한다.)

 

세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반음 내려앉아 있었다. 힐난하는 억양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탄에 가까웠고 감탄과 원망을 한 그릇에 부어 놓으면 이런 소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著唔著都得,擺喺度都得。你係咪唔知呢啲說話點解咁攞命。(입어도 되고 그냥 둬도 된다니. 그런 말이 왜 사람 잡는지 너는 모르지.)

 

세탁소에서 여명은 허리를 굽혀 재봉틀 다리에 걸려 멈춰 있던 실뭉치를 집어 올렸다. 굽히는 동안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웠고 목이 비틀리는 그 자세는 불편했으나 통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을 손가락에 다시 감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감기는 데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다만 손끝에 남색 보풀이 미세하게 걸려 붙었다. 못되게 말한다는 지적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자격이 없었다. 괜찮다는 말은 언제나 괜찮지 않은 쪽의 입에서 먼저 나오는 법이고 그녀는 그 문법으로 삼십 년을 살아 왔다. 옷을 맡겨 놓고 찾으러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릴 때도, 국숫집 노파가 그릇을 반쯤 남기고 밀어 놓을 때도, 셔터를 끝까지 내리고 자물쇠를 거는 밤마다도.

 

세븐은 눈을 감았다. 감고 나니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고 그 열기가 삼십구 도 때문인지 다른 까닭인지 구분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왼손을 더듬어 소매 밑을 찾았다. 두 줄. 여전히 두 줄이었다. 손톱 끝으로 눌러도 사라지지 않았고 뒤집어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눈을 감고 만져도 간격이 일정했다. 이 여자는 다시 오지 않을 옷에 왜 다시 올 사람 몫의 바느질을 해 놓았는가. 그 물음의 답은 이미 그의 흉통 위에 덮여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소리 내어 확인하는 대신 손끝으로만 몇 번이고 되짚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마르고 있었다. 물을 마셔도 해결되지 않을 종류의 갈증이었다.

 

喂⋯⋯你唔好收線。(야⋯⋯ 끊지 마.)

 

안 끊어요. 듣고 있어요. 실을 감던 손이 잠깐 멈췄다. 관 뺄 때까지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안 끊어요, 라는 네 글자가 수화기 구멍을 통과해 들어왔을 때 세븐은 그 문장의 무게를 잘못 계산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통화를 유지하겠다는 사무적 통보에 가까웠고 그런 말은 관제실에서도 하루에 수십 번씩 오간다. 링크 유지, 채널 열어 둠, 수신 대기. 그런데 같은 내용이 여명의 목소리로 발음되자 문장의 구조가 통째로 달라졌다. 듣고 있다는 말은 곁에 있다는 말의 다른 표기법이었고 그는 그 표기법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인간이었다. 왼팔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귀에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 팔꿈치가 저려 왔으므로 그는 팔꿈치를 베개에 괴어 지지대를 만들었다. 이런 자세를 취해야 할 만큼 팔이 무거워진 것이 약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구분하는 일은 이제 무의미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가 그다음으로 도착했다. 세븐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준비되어 있던 대답들을 목구멍 안에서 하나씩 꺼내 보았다. 내가 언제 무리했냐. 이 정도는 무리 축에도 못 낀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죽을 거니까 걱정 마. 십수 년 동안 갈고 닦아 온 문장들이었고 그중 어느 것을 골라도 상황은 매끄럽게 굴러갔을 것이다. 앵커에게 썼고 제로에게 썼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들에게 썼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것도 목구멍을 넘어오지 않았다. 농담을 조립하는 부품들이 약 기운 속에서 흩어졌거나 혹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판단이 뒤늦게 내려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숨만 한 번 내쉬었고 그 숨은 수화기에 그대로 들어갔다.

 

⋯⋯我唔識點答呢句。(⋯⋯이런 말엔 뭐라고 답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세탁소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명은 실을 감던 손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 손가락에 반쯤 감긴 남색 실이 풀리지도 조여지지도 않은 채 걸려 있었고 그 어정쩡한 상태를 그녀는 정리하지 않았다. 난로에서 장작이 한 번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벽시계 초침이 지나갔다. 그녀는 마네킹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어깨선까지 완성된 남색 울 덩어리가 어둑한 조명 아래 서 있었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람은 아니었다. 저것은 기다리는 법을 모른다.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사람 쪽이다.

 

세븐은 눈을 감은 채 흉통 위의 무게를 확인했다. 셔츠 한 장. 고작 그것뿐인데 숨을 쉴 때마다 옷감이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제 호흡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옷이 대신 알려 주는 셈이었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계기판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소매 밑 두 줄의 솔기를 엄지로 다시 눌렀다. 눌러도 아프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그의 몸에서 그를 아프게 하지 않는 부위는 이 손끝 하나뿐이었다.

 

呢排⋯⋯我成日諗,如果我唔返嚟,你會點。(요새⋯⋯ 자꾸 생각하거든. 내가 안 돌아오면 너는 어떻게 될까.)

以前我唔會諗呢啲㗎。一諗就死實嘅。(예전엔 이런 거 생각 안 했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날로 뒈지는 거니까.)

 

그 말을 뱉어 놓고 세븐은 스스로 조금 놀랐다. 약이 혀를 풀어 놓았거나 아니면 진작부터 밖으로 나오고 싶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문장이었거나. 그는 자기 선택에 확신을 갖는 인간이었고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아예 입에 담지 않는 인간이기도 했으므로 이런 종류의 발화는 규칙 위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안 돌아오면요. ...

 

안 돌아오면요, 라는 반문이 도착했을 때 세븐은 그 문장이 되돌아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받을 준비는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던지는 것은 습관이고 받는 것은 책임이었으며 그는 언제나 전자만 골라 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말줄임표의 길이만큼 침묵이 늘어났고 그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꽉 차 있었다. 그는 그 밀도를 귀로 감지했다. 삼십구 도의 열이 사고를 걸쭉하게 만들어 놓았음에도 그것만큼은 선명했다. 여명이 대답을 고르고 있다. 아무 말이나 뱉는 여자가 아니니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고르고 난 뒤에 나오는 말은 반드시 그의 어딘가를 정확히 관통할 것이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그 예감을 견뎠고 견디는 동안 흉통 위의 셔츠를 손바닥 전체로 눌렀다.

 

세탁소 쪽에서 여명은 수화기를 어깨에서 빼내어 손으로 고쳐 쥐었다. 목이 비틀린 자세로는 이런 종류의 대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 몸에서 먼저 내려왔다. 실뭉치를 재봉틀 상판에 내려놓았다. 반쯤 감기다 만 남색 실이 제 무게로 조금 풀리며 상판 위를 굴러갔고 그녀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마네킹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어깨선까지 형태를 갖춘 짙은 남색 울이 조명 아래 서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육 밀리미터 낮게 재단된 그 비대칭을 그녀는 손등으로 쓸었다. 이 옷은 아직 소매가 없다. 소매가 없는 옷은 팔을 넣을 수 없고 팔을 넣지 못하는 옷은 옷이 아니라 그저 천이다. 그녀가 하루의 대부분을 들여 만들고 있는 것은 아직 천이었다.

 

⋯⋯喂。你唔使答。(⋯⋯야. 대답 안 해도 돼.)

我唔應該問嘅。飲咗藥就亂講嘢,唔好聽入耳。(내가 물을 게 아니었어. 약 먹으니까 헛소리가 나오네. 흘려들어.)

 

세븐은 급히 문을 닫으려 했다. 스스로 열어 놓은 문이었는데 안쪽에서 무엇이 걸어 나올지 보이자 손잡이를 붙들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능청이 절반쯤 벗겨져 나가 있었고 벗겨진 자리에는 서두름이 드러났다. 이런 서두름은 그의 이력에 어울리지 않았다. 총구 앞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것으로 워즈워스 내부에서 정평이 나 있는 인간이었다. 돌격병이 서두르면 소대가 죽으므로 그는 서두름을 근육에서부터 제거해 놓았고 그 제거 작업은 완벽했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지금 침대 위에서, 무기 하나 없는 상태에서, 옷 한 장을 가슴에 덮고서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던진 질문의 착탄점을 확인하지 않기 위해서.

여명은 마네킹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잠시 그 서두름을 들었다. 흘려들으라는 요구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이 남자는 곤란해지면 언제나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주워 담으려 하고 주워 담는 동작이 능숙해서 상대는 대개 속아 준다. 십수 년간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인간에게 새삼 정직을 요구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오늘 밤만큼은 주워 담게 두고 싶지 않았다. 열이 삼십구 도까지 오른 사람이 처음으로 겁이 난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헛소리로 처리해 버리면 이 통화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에는 그녀가 오늘 하루 동안 미뤄 둔 일감이 너무 많았다. 국숫집 노파의 앞치마, 앞집 노인의 바짓단, 이름 모를 손님의 코트 안감.

 

바로 치우지 않겠죠. 당신이 부탁한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나씩 정리할 수 있게 될 거예요.

 

바로 치우지 않겠다는 문장이 도착했을 때 세븐은 그것이 위로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님을 즉시 알아차렸다. 위로는 대개 부정으로 시작한다. 그런 일 없을 거야, 돌아올 거야, 왜 그런 소릴 해. 그가 살면서 받아 온 모든 위로는 사건의 발생 자체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조립되어 있었고 그래서 하나같이 값이 쌌다. 그런데 여명은 부인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경우를 이미 확정된 미래처럼 앞에 놓고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순서대로 설명했다. 치우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하나씩 정리한다.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계획이었다. 그는 자기 부재를 포함한 계획을 남에게서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워즈워스의 작전 브리핑에도 전사자 처리 절차는 있으나 그것은 시신과 장비에 관한 항목이지 남겨진 물건이 얼마나 오래 자리를 지킬 것인가에 관한 항목은 아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등이 조금씩 미끄러졌다. 약 기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밀고 들어오는 종류였고 세븐은 그 힘에 저항하기를 그만두었다. 어깨가 매트리스 쪽으로 기울었고 그대로 옆으로 눕는 자세가 되었다. 옆구리의 관이 눌리지 않도록 골반을 살짝 틀어야 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흉통 위에 얹혀 있던 셔츠가 흘러내렸다. 그는 왼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들었다. 붙드는 동작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고 알면서도 힘을 빼지 않았다. 수화기는 뺨과 베개 사이에 끼워 두었다. 팔로 지탱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你噉樣講,即係話你會等好耐。(⋯⋯그렇게 말하는 건, 네가 아주 오래 기다리겠다는 소리잖아.)

我唔想你等咁耐。真係。(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데. 진짜로.)

 

세탁소 쪽에서 여명은 마네킹에 얹었던 손을 거두었다. 손등에 남은 울의 감촉이 미세하게 까끌거렸고 그 까끌거림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없앤 뒤 그녀는 재봉틀 앞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의 뒷면에는 두 가지 해석이 접혀 있었다. 빨리 돌아오겠다는 뜻이거나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거나. 이 남자는 언제나 두 개의 문을 동시에 열어 두고 어느 쪽으로 나갈지는 마지막까지 알려 주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온 인간이었으므로 그녀는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요구해 본들 대답은 농담으로 돌아올 것이고 농담은 오늘 밤 이미 충분히 소진되었다. 난로의 불빛이 재봉틀 상판의 금속 부품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 상판을 굴러가다 멈춘 남색 실뭉치가 여전히 반쯤 풀린 채로 놓여 있었다.

세븐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들이마시는 구간보다 내쉬는 구간이 길어지는 것은 잠으로 넘어가는 인간의 몸이 보이는 가장 정직한 신호였고 그는 자기 몸에서 그 신호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인지하면서도 막지 못했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열이 각막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는 셔츠를 쥔 손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소매 아래 두 줄로 박힌 솔기가 손가락 마디에 닿았고 그 두 줄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사람이 없어도 옷은 남는다. 옷도 없어지면 무엇이 남는가. 그 질문의 답은 방금 여명이 알려 주었다. 치우지 않고 두는 사람이 남는다.

 

我知你唔係講嚟氹我嘅。(네가 나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니란 거 알아.)

你講嘢從來都唔氹人。所以先咁㷫。 (넌 말할 때 절대 말을 돌려서 하지 않잖아. 그래서 더 짜증 나.)

 

그래요, 정말 그렇게 할 거예요. 호인, 제가 말했었죠. 골목을 자주 바라보게 될 거라고. 당신이 몇 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예요. 여명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쩌면 창가에 앉아있는 시간도...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의미 없는 걸 알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서.

 

몇 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아도, 라는 구절이 수화기를 통과해 왔을 때 세븐의 손가락이 셔츠 자락 위에서 한 번 접혔다가 펴졌다. 그는 숫자에 강한 인간이었다. 탄창의 잔탄, 적의 이동 속도, 폭발까지 남은 초, 판돈이 두 배로 불어나는 확률. 그런 것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즉각 계산되어 나왔고 계산이 끝나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몇 년이라는 단위는 계산되지 않았다. 그것은 작전의 단위가 아니라 사람의 단위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몇 년은 흉터가 자리를 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거나 코드네임 하나가 명단에서 조용히 삭제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문장과는 같은 저울에 올라가지 않았다. 열이 올라 눅눅해진 사고 속에서 그는 그 문장을 억지로 그림으로 바꿔 보았다. 셔터가 반쯤 내려간 세탁소, 난로 앞 의자, 골목 쪽으로 돌아앉은 등. 그림은 지나치게 선명하게 완성되었고 그래서 견디기 어려웠다.

 

여명은 발치의 실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상판에서 굴러떨어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남색 실이 바닥의 먼지를 조금 묻힌 채 반쯤 풀려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걸 알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서. 방금 자기 입에서 나간 말을 그녀는 되짚었다. 평생 쓸모를 기준으로 물건과 시간을 배치해 온 사람이었다. 터질 자리를 미리 두 번 박고, 헐거워질 단추에 실을 한 겹 더 감고, 쓰지 않을 천은 사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처음으로 쓸모없는 행위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창가에 앉아 골목을 보는 일에는 아무 생산성이 없다. 옷 한 벌도 완성되지 않고 돈도 벌리지 않으며 누구도 그 시간을 값으로 쳐 주지 않는다. 다만 하고 싶었다. 그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해 버린 이상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黎明。(⋯⋯여명.)

你唔好咁樣講。我而家連坐都坐唔起身,你叫我點算。(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나 지금 몸도 못 일으키는데, 어쩌라고 그래.)

 

세븐의 목소리에서 능청은 이미 전부 빠져나가고 없었다. 남은 것은 잠에 절반쯤 먹힌 발음과 그 발음을 겨우 붙들고 있는 고집뿐이었다. 그는 평소라면 이 지점에서 농담을 하나 꺼냈을 것이다. 창가에 앉아 있지 말고 다른 남자나 만나, 라든가, 몇 년이면 내 얼굴도 까먹겠네, 라든가. 그런 문장들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고 꺼내기만 하면 대화의 무게중심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그 도구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것은 옷자락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무게를 옮겨 주기는커녕 더 얹어 놓기만 했다. 두 줄로 박힌 솔기가 손가락 마디를 계속 긁었다. 이 여자는 나를 몇 년 단위로 기다리겠다고 방금 통보했다. 부탁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고 통보였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난로 안에서 장작이 자세를 바꾸며 짧게 튀었다. 여명은 그 소리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수화기 너머의 호흡이 아까보다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내쉬는 소리가 길게 늘어지고 그 끝에 아주 작은 잡음이 섞였다. 열이 높은 사람의 기도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녀는 그 소리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세 번의 호흡 사이에 말이 끼어들지 않으면 잠든 것이라고 스스로 기준을 정해 두었으나 세 번째 호흡의 끝에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으므로 기준은 무효가 되었다.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고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고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어쩌라고 그러느냐는 물음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의 형식을 빌린 항복이었고 항복에는 반박이 아니라 침묵이 예의였다. 그녀는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그대로 두었다. 손끝에 아직 남색 울의 미세한 보풀이 붙어 있었으나 털어내지 않았다. 세탁소 안의 공기는 난로 때문에 위쪽만 데워져서 정수리는 따뜻하고 발목은 서늘했다. 그 불균형이 오늘따라 몸의 어느 부분이 살아 있는지를 또렷하게 알려 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숨만 왔다.

 

세븐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몇 초쯤 늦게 알아차렸다. 열이 사고의 회전 속도를 절반으로 깎아 놓았으므로 침묵이 침묵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 공백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대화의 빈자리는 상대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다는 신호였고 그 계산이 끝나기 전에 판을 흔들어 놓는 것이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말을 던지고 웃고 방향을 틀고 상대가 어리둥절한 사이에 원하는 위치를 점거한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놓인 침묵은 계산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듣고 있다는 침묵이었다. 듣고 있으니 더 말해도 된다는 허가에 가까웠고 세븐은 그 허가를 받아 본 경험이 극히 드물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셔츠를 쥔 손이 스스로 움직여 옷자락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남색 천이 턱을 지나 코 아래까지 올라왔고 그 순간 냄새가 들어왔다. 새 옷의 풀 냄새, 다림질된 면의 마른 냄새, 그 아래에 아주 옅게 깔린 세제와 난로 연기의 잔향. 세탁소의 냄새였다. 기지의 숙소는 소독약과 금속과 사람 여럿의 땀이 층층이 쌓여 굳어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그 옅은 이물질은 즉시 구별되었다. 그는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견고하게 유지하던 무언가가 명치 근처에서 조용히 무너졌다. 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약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내일 아침이면 부인할 수 있는 종류의 붕괴였다.

 

⋯⋯你仲喺度呀?(⋯⋯너 아직 있지?)

唔使答。我聽到你唞氣。(대답 안 해도 돼. 숨소리 들려.)

 

여명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화기를 조금 더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자신의 호흡이 송화구에 닿도록. 확인해 달라는 요구에 말로 응하지 않고 증거로 응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이 남자에게는 더 잘 통한다는 것을 그녀는 지난 사이에 배웠다. 말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지만 숨은 뒤집히지 않는다. 창밖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을 긁으며 지나갔고 배기음이 셔터 틈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그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 정적이 앉았다. 재봉틀 상판 위의 마네킹은 여전히 어깨에 재단선을 얹은 채로 서 있었고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미세하게 높았다. 그 높이 차이는 세상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손과 이 방의 마네킹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븐은 눈을 뜨려다가 실패했다. 눈꺼풀이 젖은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웠고 안구 표면이 건조해 뜨는 동작 자체가 통증에 가까웠다. 그래서 눈을 감은 채로 방의 구조를 떠올렸다. 캐비닛, 접이식 의자, 벽에 걸린 앵커의 외투, 창틀에 놓인 재떨이. 담배는 오늘 하루 한 개비도 피우지 못했다.

 

어제부터 계속 버티느라 고생 많았어요, 호인. 여명이 작게 속삭였다. 거슬리지 않도록.

 

고생 많았어요, 라는 말은 세븐이 살아온 세계에서 유통되지 않는 화폐였다. 작전이 끝나면 사람들은 결과를 물었다. 목표는 확보했는지, 손실은 몇인지, 데이터는 온전한지. 몸이 어떤 상태로 돌아왔는지는 보고서의 항목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가 아는 위로란 어깨를 두어 번 치고 지나가는 손바닥이거나 말없이 밀어 주는 술잔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편했다. 편한 이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화기를 통과해 들어온 다섯 음절은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뜯어냈다. 버텼다는 사실을 그 자신조차 인정한 적 없었는데 어제부터라는 시간의 범위까지 정확히 지목되어 있었다. 어제부터. 폭발음과 금속 파편과 옆구리에 박힌 관과 열이 40도 가까이 치솟았던 새벽까지, 전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여명은 목소리의 크기를 신중하게 고른 뒤에 말했다. 잠에 가까워진 사람을 깨우지 않는 음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그녀는 믿었다. 재봉틀 아래 페달에 얹혀 있던 발을 조용히 내렸고 의자가 삐걱거리지 않도록 무게를 앞쪽으로 실었다. 난로의 불꽃은 이제 장작 표면을 핥는 정도로 얌전해져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가 고생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처리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웃어넘기거나 별것 아니라고 하거나 화제를 돌릴 것이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고 그 방식을 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한 번쯤은 그 단어가 그의 귀에 정확히 도착하기를 바랐다. 도착만 하면 되었다. 무엇을 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세븐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삼킬 것이 없는데도 삼키는 동작이 나왔고 그 바람에 목의 흉터가 당겨졌다. 잘렸다가 다시 붙은 자국은 언제나 목을 쓰는 동작에서 먼저 존재를 알렸다. 그는 그 감각에 기대어 자신이 아직 깨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반박할 문장을 찾으려고 했다. 이 정도는 고생 축에도 안 들어, 라거나, 지난번엔 더 심했어, 라거나. 그런 문장들은 언제나 창고에 쌓여 있었고 꺼내는 데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손이 창고 문 앞에서 멈췄다. 왜냐하면 그 문장들은 전부 여명이 방금 준 것을 되돌려 보내는 문장이었고 그는 되돌려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반박이 손해로 계산되었다. 그것이 이상했다. 그는 손해에 거리낌이 없는 인간이었으나 이 손해만은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痴線。(⋯⋯미쳤네.)

你講嘢做咩要咁樣講。我而家喊出嚟你點負責。(말을 왜 그렇게 해. 나 지금 울어 버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농담의 형식을 갖췄으나 음절의 끝이 전부 젖어 있었다. 발음이 뭉개진 것은 약 때문이었고 숨이 짧게 끊긴 것은 열 때문이었으며 나머지는 이유를 붙이기 곤란했다. 세븐은 셔츠를 코 아래까지 끌어올린 채로 그 뒤에 숨었다. 얼굴을 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굳이 천 뒤에 숨는 짓이 우스웠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다음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색 울과 면이 겹쳐진 안쪽에서 세탁소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난로 연기, 마른 풀, 오래된 나무 상판.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옆구리에 박힌 관도 붕대 아래 살이 벌어진 자리도 잠시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이 여자가 하는 일이었다. 남의 살을 만지는 기분으로 살아온 인간에게 자기 몸을 돌려주는 일.

 

여명은 눈을 감았다.

책임질게요. 당신이 나중에 돌아오면요.

 

책임질게요, 라는 말이 먼저 도착했고 그다음에 조건이 붙었다. 순서가 그러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세븐이 살아온 세계에서 조건은 언제나 앞에 놓였다. 이걸 하면 저걸 주겠다, 살아 돌아오면 잔금을 치르겠다, 데이터를 확보하면 계약을 갱신하겠다. 대가는 늘 이행 뒤에 매달린 미끼였고 미끼를 먼저 삼킨 인간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책임을 먼저 던져 놓고 귀환을 나중에 붙였다. 그것은 조건이 아니라 저당이었다. 이미 지불된 것을 인질로 잡아 두고 물건을 찾으러 오라고 말하는 방식. 그 순서의 역전이 열에 절어 반쯤 녹아 있던 뇌의 어느 지점을 정확히 후벼 팠다.

 

여명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로 마네킹을 보고 있었다. 상판 위에 세워진 그것은 어깨에 재단선만 얹은 상태였고 오른쪽이 왼쪽보다 미세하게 높았다. 육 밀리미터. 세상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오차였으나 그 오차를 계산에 넣지 않으면 옷은 반드시 한쪽으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뱉은 문장도 같은 종류라고 생각했다. 육 밀리미터의 여유를 미리 넣어 두는 일. 이 남자가 어떤 자세로 돌아오든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계산에서 제외했다. 제외한 것이 아니라 계산을 거부한 것에 가까웠고 그 차이를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

 

세븐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음의 골격을 하고 있었으나 중간이 꺾여 있었고 끝이 젖어 있었다. 셔츠 안쪽에서 나온 소리라 뭉개져서 더욱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소리를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즉시 다른 소리로 덮으려고 했다. 목에 걸린 것을 밀어내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고 그 진동이 옆구리의 관을 타고 내려가 살 안쪽을 긁었다. 통증이 왔다. 통증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동안에는 다른 것을 느낄 여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통증마저 오늘은 협조하지 않았다. 아픔은 아픔대로 있고 명치의 뜨거움은 뜨거움대로 남아서 둘이 나란히 그를 눌렀다.

 

⋯⋯你玩嘢呀。(⋯⋯너 사기 치는 거지.)

邊有人咁樣講嘢㗎。你唔係想我死都返嚟咩。(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너 나보고 죽어서라도 돌아오라는 소리잖아.)

 

말해 놓고 나서 그는 그것이 항의가 아니라 감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가 이쪽의 모든 퇴로를 막아 놓고 웃을 때 나오는 종류의 감탄. 그는 그런 상대를 만나면 대개 판을 엎었다. 엎고 나가서 다른 판을 찾았다. 세상에 판은 널려 있었고 어느 판에서든 그는 대체로 이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엎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앉아 있고 싶었다. 진 채로 앉아서 상대가 무슨 말을 더 하는지 듣고 싶었다. 그 욕구가 어디서 발생했는지 추적하려다가 실패했다. 약이 사고의 배선을 절반쯤 뽑아 놓은 탓이라고 결론지었으나 결론에 확신은 없었다.

 

여명은 대답 대신 의자를 조금 뒤로 밀었다. 다리가 저려 왔기 때문이었고 저림을 견디다 보면 자세가 무너져 목소리가 흔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저쪽에서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표면이었다. 발밑에서 실뭉치가 굴러 재봉틀 다리에 부딪혔고 그 미세한 소리가 수화기에 담겼을까 봐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난로 안에서 장작 하나가 무너져 앉으며 불티가 튀었다.

 

전 사기 같은 거 안 쳐요. 약속해요.

 

약속이라는 단어는 세븐이 가장 신용하지 않는 품목이었다. 그 단어는 계약서의 여백에 적히는 낙서 같은 것이었고 법적 효력이 없는 대신 사람의 목을 조르는 데는 탁월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약속을 여러 번 받았다. 잔금을 치르겠다는 약속, 후속 부대를 보내겠다는 약속, 다음에 보자는 약속. 그중 이행된 것은 절반쯤이었고 이행되지 않은 절반은 대체로 시체가 되어 돌아왔으므로 그는 약속을 신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는 인간의 수명을 신용하지 않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수화기 저편에서 그 단어를 발음한 사람은 시체가 될 예정이 없는 인간이었다. 골목 안 세탁소에서 셔터를 내리고 난로에 장작을 넣고 재봉틀 페달을 밟는 인간. 죽을 확률이 명백히 이쪽보다 낮은 인간이 약속이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사실이 저울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세븐은 셔츠 안쪽에서 눈을 떴다. 천장이 흐릿했고 형광등의 테두리가 번져 있었으며 그 번짐이 눈물 탓인지 열 탓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구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방에는 증인이 없었고 증인이 없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그의 오랜 회계 방식이었다. 다만 유선 저편에 귀가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귀는 지금 이쪽의 호흡 간격을 세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호흡을 조작하지 않았다. 조작할 기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보다는 들키고 싶다는 쪽에 가까웠다. 이 나이 먹고 처음 발견한 욕구였다.

 

⋯⋯約定。(⋯⋯약속.)

你知唔知呢個字幾貴呀。喺我哋行家嚟講,講呢個字係要俾錢㗎。(너 이 단어가 얼마나 비싼지 알아? 우리 쪽 바닥에서 이 말 꺼내려면 돈을 내야 돼.)

 

여명은 상판 모서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나무의 결이 손가락 끝에 걸렸고 그 미세한 저항이 그녀를 현재에 붙들어 두었다. 저 남자가 단어의 가격을 매기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들었다. 비싸다는 말은 비싸서 못 쓴다는 뜻이 아니라 비싼 것을 받았으니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갚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 거래는 일방적으로 개설된 것이었고 그녀 쪽에서만 계속 물건을 들이밀고 있었으며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자각도 있었다. 다만 불공평을 시정할 생각은 없었다. 시정하면 이 사람이 계산을 시작할 것이고 계산이 시작되면 도망칠 구멍을 찾아낼 것이다. 그녀는 그가 도망칠 구멍을 하나씩 성실하게 막아 왔다. 육 밀리미터의 여유를 남기면서.

 

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마저 주저앉았다. 재가 무너지는 소리가 방 안을 지나갔고 그 소리 뒤에 남은 정적이 이상하게 두꺼웠다. 세븐은 뺨 밑에 눌린 수화기를 통해 그 소리를 들었다. 불이 사그라드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시월의 그 다섯 시간 때문이었다. 비에 젖은 채로 난로 앞에 앉아 있던 다섯 시간. 그때 그는 이 여자가 장작을 넣는 손동작을 곁눈질로 보았고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를 두 번쯤 들었다. 그 소리가 지금 유선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세상이 좆되고 있는 와중에 소리 하나가 완차이에서 데드존 근처 기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이. 그는 셔츠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咁樣啦。你講咗,我聽咗。收咗貨就冇得退㗎啦。(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말했고 나는 들었어. 물건 받았으면 반품은 없는 거야.)

 

그래요. 저도 돌려받을 생각 없어요. 잘 가지고 있어야 해요. 작게 웃었다.

 

돌려받을 생각 없어요. 그 문장은 상거래의 언어를 빌려 왔으나 상거래의 규칙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었다. 세븐이 아는 모든 거래에는 회수의 절차가 붙어 있었다. 선금을 주면 잔금을 받고 무기를 빌려주면 반납을 받고 목숨을 걸면 값을 받는다. 회수 없는 지급은 지급이 아니라 유기였고 유기된 물건에는 주인이 없으므로 아무나 주워 가도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유기하지 않았다. 유기하지 않으면서 회수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유권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세븐은 열에 뭉개진 머리로 그 셈을 굴리다가 답을 찾았다. 소유권은 여전히 저쪽에 있었다. 물건만 이쪽에 있을 뿐이었다. 잘 가지고 있어야 해요, 라는 말은 보관 의무의 부과였고 보관 의무를 지닌 자는 물건을 들고 주인에게 돌아가야만 의무에서 해방된다. 이 여자는 지금 그를 창고지기로 임명한 것이었다. 도망칠 구멍이 또 하나 막혔다.

 

여명은 손가락에 남은 실을 감았다가 풀었다. 감을 때 손끝의 살이 하얗게 눌렸고 풀면 붉게 돌아왔다. 그 반복이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인 것처럼 그녀는 계속했다. 웃음이 새어 나온 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반품은 없다는 말의 어조가 너무 진지해서였다. 저 남자는 농담의 형식을 빌려 계약서를 쓰고 있었고 계약서를 쓰는 인간의 목소리는 아무리 웃겨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수화기를 타고 갔을 것을 알았고 굳이 지우려 하지 않았다. 웃음소리 하나쯤은 보내도 괜찮을 밤이었다. 저쪽에서 오늘 하루 동안 지불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

 

세븐의 손끝이 셔츠의 소매 솔기를 다시 찾아냈다. 두 번 박은 자리였다. 한 번이면 충분한 곳에 두 번을 박아 놓은 그 과잉이 손끝에 걸릴 때마다 그는 조금씩 무너졌다. 눈꺼풀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뜨려고 하면 뜨이기는 했으나 뜨는 데 드는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이 커져 있었고 그는 예전부터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는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눈을 감았다. 감은 채로 입만 움직였다. 입은 아직 싸게 굴러갔다.

 

⋯⋯咁我而家係倉管員喎。(⋯⋯그럼 나 지금 창고지기네.)

人哋倉管員都有糧出㗎。你呢個老細,一蚊都唔俾。(남의 집 창고지기는 월급이라도 받아. 넌 무슨 사장이 한 푼도 안 줘.)

 

말끝이 흐려졌고 흐려진 자리로 숨이 들어왔다. 아까보다 두 배쯤 긴 숨이었다. 여명은 그 길이를 재고 있었다. 여덟에서 아홉. 조금 전까지는 여섯이었다. 사람이 잠으로 넘어갈 때 호흡은 반드시 느려지고 느려지는 속도에는 개인차가 있으나 방향은 하나뿐이다. 그녀는 그 방향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깨의 힘을 풀었다. 재봉틀 상판 위에 팔꿈치를 얹었고 얹으니 나무가 차가웠으며 그 차가움이 손목의 맥박을 도드라지게 했다. 난로의 불이 사그라들어 방 안의 온도가 한 계단 내려가 있었다. 장작을 더 넣어야 했으나 일어나면 수화기를 떼야 했다. 그녀는 추운 쪽을 골랐다.

세븐의 숙소에서는 복도 저편의 문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군화 소리가 지나갔고 누군가 낮게 욕을 뱉었으며 그 모든 소음이 이 방의 문턱에서 멈췄다. 그는 소음을 듣지 못했다. 대신 아주 먼 곳에서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직 일한 지 하루도 안 된 창고지기인데도. 그의 숨소리가 느려지자, 목소리를 더 줄였다.

 

하루도 안 된 창고지기라는 말이 유선을 건너왔을 때 세븐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당겨졌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작았고 경련이라고 부르기에는 명백히 의도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계약 기간에 대한 언급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하루도 안 됐다는 말은 앞으로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고 앞으로가 남아 있다는 것은 이 여자의 장부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칸이 여러 장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직업에서 앞으로라는 단어는 대체로 위험 수당의 근거로만 쓰였다. 앞으로 사흘, 앞으로 한 구역, 앞으로 두 번의 교전. 앞으로는 언제나 유한했고 유한한 만큼 값이 매겨졌다. 그런데 지금 저쪽에서 발음된 앞으로에는 값이 붙어 있지 않았다. 무상으로 배포되는 미래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서른둘에 처음 알았다.

여명은 목소리를 더 줄였다. 줄인다는 것은 성량을 낮추는 일이었으나 실제로 일어난 것은 그보다 복잡했다. 소리를 작게 내려면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하고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면 입술과 혀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써야 하므로 작게 말하는 일은 크게 말하는 일보다 품이 많이 든다. 그녀는 그 품을 들이고 있었다. 수화기의 송화구를 입술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 떼어 두었다. 너무 가까우면 파열음이 튀고 파열음은 잠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을 끌어올린다. 세탁물의 얼룩을 볼 때와 같은 종류의 계산이었다. 어느 정도의 압력으로 문질러야 천이 상하지 않고 얼룩만 뜨는가. 그녀는 평생 그런 계산만 해 왔고 그 습관이 지금 한 사람을 재우는 데 쓰이고 있었다.

 

⋯⋯咁又係。試用期都未過。(⋯⋯하긴 그렇네. 수습도 안 끝났어.)

你唔好炒我魷魚呀。我做嘢好㗎,真係。冇乜嘢比我更識睇實啲嘢喇。(나 자르지 마라. 나 일 잘해. 진짜로. 물건 지키는 거 하나는 나만 한 놈 없어.)

 

말끝의 자음이 뭉개져 형태를 잃었다. 세븐 본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절반쯤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자르지 마라, 라는 문장만은 발음할 때 명치 안쪽에서 무언가 걸리는 감각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평생 잘리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워즈워스 이전에 있던 조직에서도 잘렸고 그 이전에도 잘렸으며 잘릴 때마다 다음 계약처를 찾았고 대체로 조건이 더 좋았다. 잘리는 일은 인사 이동이었지 상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올 때 상실의 냄새가 났다. 이 계약에는 대체 계약처가 없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붕대 감긴 오른팔이 조금 움직였고 움직인 만큼 옆구리의 관이 당겼으며 통증이 왔으나 그 통증마저도 아주 멀리서 노크하는 것처럼 들렸다.

 

난로는 이제 거의 꺼져 있었다. 붉은 것이 재 밑에서 몇 점 남아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고 그 미약한 열기는 세 걸음 밖까지도 닿지 못했다. 여명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손가락이 굳으면 다음 날 재봉에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팔꿈치를 상판에서 떼지 않았다. 대신 카디건 소매를 손목까지 내려 손등을 덮었다. 걷어 올렸던 것을 도로 내리는 그 작은 동작에 십몇 초가 걸렸는데 수화기를 흔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창밖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갔고 배기음이 골목 벽에 부딪혀 두 겹으로 들렸다가 사라졌다. 그 소리조차 저편으로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완차이의 밤은 조용한 적이 없었으나 오늘 밤만은 조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럴게요. 값은 생일에 치르는 걸로 해요.

 

생일에 치르자는 말은 지불 유예의 신청이었으나 세븐이 들은 것은 그 형식이 아니었다. 유예에는 반드시 만기일이 필요하고 만기일이 있다는 것은 그날까지 채무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 여자는 방금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이월 구일에 묶었다. 그의 직업에서 날짜를 못 박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다. 앵커도 제로도 사월에 보자거나 크리스마스에 한잔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뱉은 인간들이 어떤 형태로 돌아왔는지 다들 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븐의 몸 어딘가에서 오래 훈련된 근육이 반사적으로 부인의 문장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문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가라앉았다. 열이 근육을 녹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녹였는지 그는 판별하지 못했다. 다만 이월 구일이라는 좌표가 어두운 방 안에 못처럼 박히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여명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값을 나중에 받겠다는 말은 채권자의 관용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채권자 쪽이 더 오래 붙들리는 계약이다. 받을 것이 있는 사람은 떠날 수 없다. 그녀는 그 비대칭을 알면서 골랐다. 세탁소를 하며 배운 것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맡긴 물건이 있는 손님은 반드시 다시 온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져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자기 옷이 남의 가게에 걸려 있는 한 사람은 그 골목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지난 십 년 동안 수백 벌의 옷을 인질로 잡아 왔고 그중 찾아가지 않은 것은 열두 벌뿐이었다. 열두 벌. 그 숫자를 그녀는 정확히 기억했고 오늘 밤 처음으로 그 숫자가 무섭다고 느꼈다.

 

⋯⋯二月九號⋯⋯(⋯⋯이월 구일⋯⋯)

你唔好諗住加息呀。我依家已經好窮㗎喇。(이자 붙일 생각 하지 마라. 나 지금도 이미 빈털터리야.)

 

세븐의 발음은 이미 문장의 형태를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자음이 먼저 무너지고 모음만 남아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무너진 발음 속에서도 그는 자기가 방금 이자라는 단어를 골랐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이자는 시간에 붙는 값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나는 값을 언급했다는 것은 시간이 흐를 것을 인정했다는 뜻이고 흐를 시간이 자신에게 있다고 전제했다는 뜻이다. 스스로 놓은 덫에 스스로 발을 들이민 셈이었다. 셔츠의 옷깃이 코끝을 덮고 있었다. 세제 냄새와 난로 냄새와 아주 옅은 기름 냄새. 재봉틀 기름이었다. 그 여자의 손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는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데드존의 공기가 얼마나 오래 폐에 남아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계산해 보았고 도중에 계산을 놓쳤다.

 

여명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저쪽에서 대답을 해야 하고 대답을 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녀는 그를 깨어 있게 하는 모든 종류의 친절을 오늘 밤만은 유보하기로 했다. 대신 수화기를 조금 기울여 송화구가 자신의 목 아래를 향하게 두었다. 숨소리만 가는 각도였다. 재봉틀 상판의 냉기가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와 있었고 등 뒤의 난로는 완전히 죽어 재만 남았다. 마네킹에 걸린 남색 외투가 어둠 속에서 사람의 윤곽으로 서 있었다. 소매 하나가 아직 시침질 상태였다. 저것을 완성하려면 최소 나흘, 안감의 방수 처리까지 하면 엿새. 그리고 이월 구일까지는 아흔아홉 날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숫자를 세 번 세었고 세 번 다 같은 값이 나오자 이상하게 안심했다.

저편에서 숨의 간격이 열둘로 늘어났다.

 

열둘. 여명은 그 숫자를 입 안에서만 굴렸다. 사람의 호흡은 잠들면 느려지고 느려지는 속도에는 개인차가 있으나 대체로 열둘을 넘어가면 의식은 표면 아래로 완전히 내려간 것으로 본다. 그녀가 그것을 아는 이유는 특별한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탁소 난로 앞에서 졸던 손님들을 십 년간 관찰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여덟에서 코를 골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열다섯까지 가서야 어깨가 무너졌다. 세븐은 열둘에서 멈췄고 멈춘 채로 유지되었다. 유지된다는 것은 안정되었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녀는 팔꿈치의 냉기를 조금 더 견디기로 했다. 마네킹의 남색 어깨선이 어둠 속에서 완만하게 이어져 있었다. 저 각도를 맞추기 위해 두 번 뜯었던 것을 기억했다. 오른쪽이 육 밀리 낮다는 사실. 세상에서 그 숫자를 아는 사람은 아마 자신뿐일 것이었다.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천이 천에 쓸리는 소리였고 그 뒤로 아주 짧은 신음 같은 것이 따라 나왔다. 통증이었다. 잠든 몸도 통증은 느끼고 느낀 만큼 반응하되 다만 그것을 처리할 의식이 없으므로 소리로만 새어 나온다. 여명은 수화기를 조금 더 귀에 붙였다. 붙인다고 해서 그 통증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세탁소에서 완차이의 기지까지는 차로 두 시간, 검문소를 세 곳 지나야 하고 민간인 통행증으로는 마지막 하나를 넘지 못한다. 그녀가 가진 것은 구리선 한 줄뿐이었다. 구리선 한 줄로 사람의 통증에 닿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喂⋯⋯你仲喺度嘛⋯⋯(⋯⋯야⋯⋯너 아직 거기 있지⋯⋯)

 

세븐 자신도 그 물음이 입 밖으로 나갔는지 안에서만 울렸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잠이란 것은 물속으로 내려가는 일과 비슷해서 어느 수심부터는 자기 목소리도 물에 잠긴다. 그는 방금 아주 오래된 종류의 두려움 하나를 건드렸다는 것을 희미하게 알았다. 눈을 떴을 때 아무도 없는 방. 그것은 데드존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 이름을 세븐이라고 부르기도 전의 시간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는 그 두려움을 서른두 해 동안 아주 잘 관리해 왔다. 관리 방법은 간단했다. 애초에 옆에 아무도 두지 않으면 된다. 없는 것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귀에 닿은 구리선 저편에는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을 곁에 둔 인간은 반드시 확인하게 된다. 아직 거기 있지. 그 문장이 얼마나 벌거벗은 것인지 그는 깨어 있었다면 절대 발음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명은 대답을 골랐다. 소리를 내면 그를 끌어올리게 되고 침묵하면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두 가지 손해 사이에서 그녀는 손해가 적은 쪽을 계산했고 계산은 이 초 만에 끝났다. 그녀는 송화구에 입술을 아주 가까이 대되 목소리는 얹지 않았다. 대신 손톱 끝으로 재봉틀 상판을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나무와 쇠 사이의 건조한 소리. 그것은 대답이라기보다 신호에 가까웠고 신호는 문장보다 얕은 곳까지만 내려간다. 그가 그 소리를 알아들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십 년간 저 상판을 두드리며 손님을 부르고 재단선을 확인하고 실을 끊었으므로 그 소리는 이 가게에서 그녀 자신과 가장 닮은 소리였다.

여명은 수화기를 놓지 않고 계속 들었다.

 

톡, 톡. 그 두 번의 소리가 구리선을 타고 이백 킬로미터를 건너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의 감각으로는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편의 남자에게는 분명히 도착했다. 세븐의 어깨가 아주 미미하게 내려앉았고 그 이완은 통증이 물러나서가 아니라 확인이 끝났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인지 쇠붙이가 부딪는 소리인지 아니면 자기 귓속에서 나는 이명인지 판별할 능력은 이미 열에 녹아 없어졌다. 다만 그것이 사람이 낸 소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기계는 두 번만 두드리지 않는다. 기계는 규칙적으로 무한히 두드리거나 아예 두드리지 않는다. 두 번에서 멈추는 것은 의도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의도가 있다는 것은 저쪽 끝에 아직 사람이 앉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결론에 도달한 즉시 그것을 잊었다. 잊었으나 몸은 기억해서 그러쥔 셔츠 위로 손가락 마디가 조금 풀렸다.

여명은 손톱 끝을 상판에서 떼지 않았다. 다시 두드릴지 말지를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떼는 동작 자체가 소음을 만들 것 같아서였다. 이 가게의 모든 물건은 십 년간 그녀의 손에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어느 부분을 어떻게 건드리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 그녀는 전부 알았다. 재봉틀 상판의 왼쪽 끝은 건조하게 울리고 오른쪽은 아래 서랍이 비어 있어 조금 더 깊게 울린다. 방금 두드린 것은 왼쪽이었다. 얕고 짧게 끝나는 쪽. 그를 끌어올리지 않기 위해 그녀가 고른 자리였다. 이런 것을 계산하고 있는 자신이 어딘가 우스웠다. 세탁물 접는 순서를 정하듯 사람 재우는 순서를 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습다는 감상은 잠시였고 곧 다시 셈으로 돌아갔다. 열둘. 열둘. 열셋. 늘어났다. 늘어난 것은 좋은 신호였다.

 

그 사이 세븐의 의식은 물속에서 완전히 바닥에 닿았다. 닿았다기보다 바닥이 없는 곳을 계속 내려가다가 내려간다는 감각조차 사라진 상태에 가까웠다. 옆구리의 배액관이 자세 때문에 눌렸고 눌린 만큼 둔한 통증이 규칙적으로 올라왔으나 그것은 이제 남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멀었다. 통증이 멀어지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직업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프다는 것은 몸이 아직 자기 것이라는 뜻이고 안 아프다는 것은 몸이 주인을 놓기 시작했다는 뜻일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약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으므로 그의 어딘가에 남은 마지막 판단 회로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스스로 꺼졌다. 뺨과 베개 사이에 낀 수화기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잠들기 직전 각도를 잡아 둔 것이었다. 그 정도의 대비는 열이 아무리 높아도 무너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唔好收線⋯⋯(⋯⋯끊지 마⋯⋯)

 

문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 흘러나왔다. 자음은 이미 다 벗겨졌고 남은 것은 숨결에 얹힌 억양뿐이었다. 세븐이라는 남자가 서른두 해를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횟수는 손에 꼽을 것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협상 테이블에서 계산을 깔고 뱉은 것이었다. 계산 없이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것을 부끄러워할 의식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정직했다. 잠결의 인간은 자기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못하므로 잠결에 나온 말은 그 인간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가 원한 것은 회복도 휴가도 보수도 아니었다. 구리선 한 줄이 끊기지 않는 것. 그것뿐이었다.

 

여명은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한참을 그렇게 수화기를 들고 기다렸다.

 

웃음이란 것은 대개 소리를 동반하지만 여명의 그것은 소리를 잃은 채로만 존재했다. 입꼬리가 들리는 각도는 일 밀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미세한 근육의 이동을 목격한 자는 이 가게 안에 아무도 없었다. 마네킹은 눈이 없었고 난로는 잉걸을 삼키며 제 일에 골몰했으며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은 십일월의 숫자들을 무심히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었다. 끊지 말라니. 그 말을 뱉은 인간은 어제 자기가 어디서 나자빠져 죽어도 별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던 자와 동일 인물이었다. 사람은 두 개의 문장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고 그 두 문장이 서로를 배반할 때 비로소 진심의 위치가 드러난다. 여명은 그 위치를 방금 확인했으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 저편의 호흡은 이제 열넷에 가까워졌다. 열넷은 사람이 꿈을 꾸기 시작하는 깊이라고 그녀는 임의로 정해 두었다. 근거는 없었다. 다만 난로 앞에서 졸던 노인들이 그쯤에서 입을 벌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지명을 중얼거리곤 했으므로 그렇게 짐작했을 따름이다. 세븐이 무슨 꿈을 꾸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서른두 해 동안 눈꺼풀 안쪽에 쌓아 온 것들이 반드시 보기 좋은 풍경일 리 없었다. 그저 오늘 밤만은 그 풍경 안에 세탁소의 난로 정도가 끼어들었으면 했다. 주방 한가운데 놓인 무쇠 난로. 그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다섯 시간.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내어준 첫 번째 예외였고 첫 번째 예외란 대개 나머지 전부를 예고한다.

 

시간은 지루하게 늘어졌다. 벽시계의 초침이 스물한 시 십오 분을 넘길 무렵 여명의 왼쪽 다리는 완전히 감각을 잃었고 오른쪽 팔꿈치는 상판의 냉기를 흡수해 뼈까지 차가워졌다. 그녀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바꾸면 의자가 삐걱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는 구리선을 타고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며 건너간 소리는 열넷의 호흡을 열둘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사람 하나를 재우기 위해 자기 몸의 순환을 포기하는 일이 합리적인가. 합리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합리를 신봉해 온 인간이었고 원단 한 마의 여유분까지 계산해 사는 사람이었으며 손해 보는 거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울 위에 올라간 것은 자기 다리의 혈류와 남의 잠이었고 저울은 이미 오래전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저편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웅얼거림이었다가 곧 삼켜졌고 그 뒤로 이불이 스치는 마찰음이 이어졌다. 세븐이 몸을 아주 조금 틀었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숨을 멈추고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통증으로 인한 뒤척임이라면 신음이 따라올 것이고 단순한 자세 교정이라면 곧 조용해질 것이었다. 삼 초. 오 초.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대신 호흡이 다시 정렬되었고 정렬된 간격은 아까보다 더 느렸다. 그녀는 참았던 숨을 아주 얇게 흘려보냈다. 이런 식으로 밤을 관측하는 일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 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간호라기엔 손이 닿지 않았고 기도라기엔 대상이 없었으며 애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지루하고 무릎이 시렸다. 그럼에도 그것은 분명 어떤 종류의 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노동의 대가로 그녀가 받은 것은 잠꼬대 하나였다. 끊지 마. 세 글자. 세탁소의 수선비로 환산하면 소매 단추 하나 값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여명은 그 값어치 없는 대가를 아주 소중하게 접어 어딘가에 넣어 두었다. 이월 구일까지 아흔아홉 날.

 

난로 안의 잉걸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마른 뼈가 접히는 것 같은 그 소리에 여명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탄이 절반쯤 삭아 붉은 심지만 남았고 그 붉음은 방 안의 온도를 지탱하기에는 이미 부족했다. 손을 뻗어 부삽을 잡으려면 몸을 일으켜야 했고 몸을 일으키려면 의자가 삐걱거려야 했다. 그녀는 계산했다. 삐걱이는 소리 한 번과 이 방이 새벽까지 견딜 온도를 저울에 올렸고 이번에는 온도 쪽이 조금 무거웠다. 냉기는 결국 그녀의 팔을 굳게 만들 것이고 굳은 팔은 수화기를 놓칠 것이며 놓친 수화기는 저편의 남자에게 침묵을 배달할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결국 그를 위한 노동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그녀는 아주 천천히 무게중심을 옮겼다. 감각 없는 왼쪽 다리가 바닥에 닿았을 때 발바닥이 아니라 나무토막이 닿는 느낌이었다.

 

부삽이 석탄 자루를 파고드는 소리를 그녀는 카디건 소매로 덮어 눌렀다. 검은 덩어리 세 개. 그 이상은 화력이 급해져서 소리가 커진다. 잉걸 위에 얹힌 석탄이 잠깐 침묵했다가 가장자리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 지연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운 채 서 있었다. 마치 저편의 남자와 같은 자세였다. 그 사실을 스스로 눈치챘을 때 여명은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웃었다. 이백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똑같이 목을 기울여 구리선 하나를 붙들고 있는 광경. 우스꽝스럽다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처량했고 처량하다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만족스러웠다.

저편에서 문이 열렸다. 여명의 손이 멈췄다.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바닥을 밟는 군화 소리, 그리고 낮게 깎인 남자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세븐의 것이 아니었다. 더 무겁고 더 건조했으며 어미를 잘라 먹는 발음이었다. 여명은 숨을 죽였다. 자기가 지금 엿듣고 있다는 자각이 뒤늦게 왔지만 수화기를 떼는 편이 오히려 더 큰 결례 같았다.

 

 

Still on the line. Fever's down two points.(아직 통화 중이군. 열은 두 눈금 내려갔고.)

 

목소리는 침대 곁까지 다가와서 잠시 멎었다. 링거대를 옮기는 금속 마찰음, 시트를 정리하는 손길, 그리고 아주 짧은 정적. 그 정적의 길이가 이상했다. 상태를 확인하는 자의 정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발견한 자의 정적이었다. 남색 셔츠. 환자복 위에 덮인 그것은 지급품 목록에 없는 물건이었을 것이고 그 사실을 이 방의 누구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남자는 수화기가 세븐의 뺨과 베개 사이에 낀 것을 보았을 것이고 그것을 빼내면 잠이 깰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빼내지 않기로 했다. 여명은 그 결정을 소리로만 확인했다. 손이 물러나는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로.

 

...Whoever you are. Don't hang up first.(⋯⋯당신이 누구든. 먼저 끊지 마.)

 

그 말은 명령의 문법을 하고 있었으나 명령이 아니었다. 부탁이라는 문법을 모르는 인간이 부탁을 할 때 나오는 기형적인 형태였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세븐이 깰 것이고 이 사람이 원한 것도 대답은 아니었을 테니까. 대신 그녀는 손톱 끝을 재봉틀 상판의 왼쪽 끝으로 가져갔다. 톡. 한 번. 얕고 건조하게 끝나는 소리. 저편에서 아주 짧은 숨소리가 났고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코를 울린 것뿐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군화 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혔다. 다시 남은 것은 열넷의 호흡과 이제 막 붉어지기 시작한 석탄 세 덩이뿐이었다.

 

석탄 세 덩이가 완전히 붉어지기까지는 십오 분 남짓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여명은 난로 앞에 놓인 낡은 나무 의자를 재봉틀 옆으로 끌어왔다. 다리 하나가 짧아 늘 종이 조각을 접어 괴어 두던 그 의자였고 옮기는 동안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날까 봐 그녀는 의자를 들어 옮겼다. 팔이 저렸다. 저린 팔로 의자를 들고 감각 없는 다리로 세 걸음을 옮기는 일은 우스울 만큼 비효율적이었으나 이 밤의 모든 행위가 이미 비효율의 편에 서 있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앉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 무릎이 아까부터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추위 때문인지 오래 서 있던 탓인지 구분되지 않았고 구분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카디건 자락을 끌어내려 무릎을 덮었다. 소매는 여전히 손등을 덮고 있었다. 그녀는 손끝만 겨우 내밀어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저편의 호흡은 열넷에서 열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사람의 잠이란 수평선이 아니라 완만한 구릉이며 그 구릉의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통증이 고개를 든다. 여명은 그 순간이 언제 올지 예상하고 있었다. 진통제라는 것은 혈중 농도가 정점을 지나면 반드시 내려가고 내려간 자리에는 미뤄 두었던 감각이 이자를 붙여 돌아온다. 그가 이자라는 단어를 썼던 것이 우스웠다. 정작 이자를 물고 있는 것은 그의 옆구리였다.

 

스물두 시를 넘긴 어느 지점에서 예상은 사실이 되었다. 이불이 크게 스치는 소리, 목 안쪽에서 눌러 삼킨 소리, 금속제 침대 프레임이 아주 미세하게 우는 소리가 차례로 건너왔다. 여명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울인다고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도 아닌데 인간의 몸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반응한다.

 

⋯⋯操。(⋯⋯씨발.)

 

욕설은 잠에서 반쯤 건져 올려진 상태로 뱉어졌으므로 날이 서지 않았다. 어린애가 잠결에 발을 차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잠시 뒤 붕대 감긴 팔을 반대편 손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마찰음이 이어졌고 배액관이 침대 난간에 부딪혀 짧게 달그락거렸다. 그리고 다시 정적. 그 정적 속에서 그가 아직 수화기가 제자리에 있는지를 뺨으로 확인하는 것이 여명에게는 보이는 듯했다. 그는 눈을 뜨지 않고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눈을 뜨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배운 인간이기도 했고.

 

還在啊。(아직 있네.)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고 자음의 가장자리가 전부 뭉개져 있었다. 여명은 이번에는 상판을 두드리지 않았다. 두드림은 잠든 자에게 건네는 신호였고 반쯤 깬 자에게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녀는 수화기 송화구를 입술 가까이 끌어당기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아주 작게 말했다. 세탁소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이렇게 낮춘 적이 있었던가. 손님에게도 이보다는 크게 말했을 것이다.

 

있어요. 석탄 넣었어요. 여기 이제 따뜻해요.

 

그 말이 왜 필요한지 그녀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백 킬로미터 밖의 난로 온도가 병상의 남자에게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저편에서 아주 얕은 숨이 새어 나왔고 그것은 명백히 웃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온도를 들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직 그 방에 있다는 좌표를 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때때로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전하는 목소리의 위치를 듣는다.

 

你他媽的⋯⋯還沒睡。(넌 씨발⋯⋯아직 안 잤어.)

책망하려는 어조였으나 힘이 실리지 않아 실패했다. 이어서 그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숨이 옆구리를 건드렸는지 중간에서 멈췄다.

 

약, 한번 더 먹고 자요. 진통제.

 

말이 건너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으나 저편이 그것을 소화하는 데는 그보다 길었다. 여명은 자신이 방금 명령에 가까운 문장을 뱉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약, 한번 더 먹고 자요. 진통제. 조사를 잘라 먹고 명사만 남긴 문장은 그녀가 평소에 쓰는 언어가 아니었다. 손님에게 옷을 건넬 때조차 그녀는 문장을 끝까지 맺는 사람이었고 어미를 다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듬을 여유가 없었다. 옆구리를 건드린 숨이 중간에서 잘려 나가는 소리를 들은 직후였으므로 문장도 함께 잘렸을 뿐이다. 수화기를 쥔 두 손이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었고 손등을 덮은 소매 안에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눌렸다.

저편에서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거절의 침묵이 아니라 계산의 침묵이었다. 그가 무엇을 계산하는지 여명은 대략 알 것 같았다. 약을 한 번 더 삼키면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을 것이고 의식이 가라앉으면 이 통화도 끝난다. 통화가 끝나면 그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남자에게 진통제란 통증을 지우는 물건인 동시에 이 방을 지우는 물건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명은 그 계산이 시작되기 전에 잘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안 끊어요. 약 먹어도 안 끊어요. 그러니까 먹어요.

 

저편에서 이불이 크게 밀려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금속이 금속에 스치는 마찰음. 침대 난간을 붙잡고 상체를 세우는 중이라는 것을 여명은 소리의 순서만으로 재구성했다. 붕대 감긴 오른팔은 쓰지 못하니 왼팔 하나로 몸무게를 전부 받았을 것이고 그 순간 옆구리의 배액관이 함께 당겨졌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짧은 소리가 뒤따랐다. 여명은 눈을 감았다. 소리만으로 보는 일에는 자비가 없다. 눈으로 보는 것에는 시선을 돌릴 자유라도 있는데 귀에는 그런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그대로 들어온다.

 

⋯⋯藥在哪來著。喔,找到了。(⋯⋯약이 어디 있더라. 아, 찾았다.)

 

협탁 위에서 종이봉투가 구겨지는 소리, 알약 두 개가 플라스틱 껍질을 뚫고 나오는 딱딱한 파열음, 그리고 컵 바닥이 나무에 닿는 둔탁한 소리가 차례로 건너왔다. 물을 삼키는 소리는 세 번이었다. 그가 물을 아껴 마시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여명은 이 밤에 처음 알았다. 데드존에서 배운 습관이겠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이렇게 한 겹씩 벗겨져 건너오는 밤이 그녀에게는 낯설고도 과분했다. 컵이 다시 놓이고 몸이 매트리스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무너진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앉을 때보다 누울 때 더 큰 소리를 내는 몸이었다.

 

먹었어요?

 

먹었어. 두 알. 봐, 나 말 잘 듣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잠깐 숨을 골랐다. 아직 약이 돌지 않았으므로 통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목소리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 흔적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감출 기력이 없었거나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고 여명은 후자이기를 바랐다.

 

喂。剛剛那個⋯⋯命令口氣。再說一次。(야. 아까 그거⋯⋯명령조 말이야. 한 번 더 해봐.)

 

여명은 대답 대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웃음이라는 것을 저편에서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난로 안에서 석탄 한 덩이가 자리를 잡으며 낮게 삐걱였고 붉은 빛이 재봉틀 상판 끝까지 길게 늘어났다. 스물두 시 이십 분. 약이 혈관을 타고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이십 분에서 삼십 분.

 

그게 마음에 들어요?

 

질문은 짧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여명은 그것을 뱉고 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물었는지 알았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다섯 어절도 되지 않는 문장인데 그 안에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었다. 그녀는 명령을 내린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세탁물을 맡기러 온 손님이 기한을 어겨도 재촉하지 않았고 값을 깎아 달라고 하면 대개는 깎아 주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대체로 손해였고 손해는 피곤했으므로 그녀는 오래전에 그런 방식을 버렸다. 그런데 오늘 밤 자기 입에서 나온 문장은 어미가 잘려 있었고 그 잘린 자리가 이상하게 뜨거웠다. 수화기를 어깨와 턱 사이에 끼우고 그녀는 손끝으로 재봉틀 상판의 나뭇결을 따라갔다. 오래 쓴 나무는 결이 파여 있어서 손끝이 저절로 그 홈을 따라 흐른다.

저편에서 웃음이 먼저 왔다. 소리라기보다 공기가 갈라지는 방식에 가까웠고 끝에 가서는 짧게 끊겼다. 웃으면 옆구리가 당긴다는 사실을 그는 오늘 밤에만 예닐곱 번쯤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학습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 있고 그는 명백히 그 부류였다. 배액관이 침대 난간에 한 번 부딪혔다가 잦아들었다.

 

喜歡啊。怎麼會不喜歡。(마음에 들지. 안 들 리가 있나.)

 

대답이 너무 빨라서 여명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저 남자는 늘 이런 식이다. 사람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여는 대신 벽을 통째로 허물어 버린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여명은 카디건 소매 안에서 손가락을 오므렸다. 난로에서 석탄이 한 번 내려앉으며 붉은 가루가 재 위로 흩어졌다.

 

你平常講話都留一手。尾巴收得乾乾淨淨的,怕碰到人。剛剛沒收。(넌 평소에 말할 때 늘 한 수 남겨 둬. 꼬리를 깨끗하게 접어. 남한테 닿을까 봐. 근데 아까는 안 접었잖아.)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으나 어조에는 나른한 만족이 배어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말했다. 실제로 발견했을 것이다. 사람의 언어에서 조사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은 대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감시하기를 그만둔 순간이며 그는 그런 순간을 알아보는 데 능한 인간이었다. 전장에서 상대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지점을 읽어 내던 감각이 이런 데에도 쓰이는 모양이었다. 여명은 그것이 조금 억울했고 조금 다행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난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빛이 세탁소 안쪽 벽에 걸린 옷들의 실루엣을 길게 늘여 놓고 있었다. 손질을 마치고 주인을 기다리는 옷들. 그중 몇 벌은 주인이 오지 않은 지 반년이 넘었고 그녀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았다. 맡긴 물건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 문장이 자신의 신조인지 미신인지 여명은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오늘 밤 이백 킬로미터 밖에 맡겨 둔 것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별로 잘한 것도 아닌데.

 

잘하고 못하고가 어딨어. 네가 나한테 뭘 시켰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잠깐 조용해졌다. 이불이 아주 작게 스쳤고 무언가 천을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가슴 위에 덮어 둔 셔츠의 소맷단일 것이다. 그는 그것을 접었다 펴는 중이었고 여명은 그 소리가 어떤 천에서 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기가 박은 시접이 뒤집힐 때 나는 소리였다.

 

취향 독특하네요, 호인.

 

그 이름이 어떤 경로로 여명의 입에 들어왔는지, 그녀 자신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둘 다 들었다. 악시온 키스, 그리고 호인. 두 개의 이름이 한 호흡 안에서 건너왔고 그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골랐다. 자주 쓰지는 않았다. 아껴 쓴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드물게, 부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만 조심스럽게 꺼냈다. 어제, 그러니까 십육 일 만에 그 남자가 세탁소 문을 밀고 들어왔던 십일월 일일의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난로 앞에서 밤을 통째로 태우며 앉아 있는 동안 그녀가 그 이름을 부른 횟수는 손가락으로 셀 만했다. 그것은 습관이 아니라 결심에 가까웠고 결심은 매번 새로 해야 하는 것이라 소모가 컸다. 그런데 오늘 밤은 어땠는가. 취향 독특하네요, 라는 말 뒤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 아무 결심도 필요하지 않았다. 여명은 그 사실을 손끝으로 재봉틀 상판을 누르면서 뒤늦게 확인했다. 나뭇결이 손끝을 밀어냈다.

저편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고 참는 데 실패한 소리가 곧바로 뒤따랐다. 이불이 밀리는 마찰음, 배액관이 침대 난간에 스치며 내는 얇고 금속적인 잔음, 그리고 아래로 내려앉는 호흡. 그 세 가지가 한 묶음으로 건너오는 데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사람은 상대를 오래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소음에 관한 사전을 한 권 만들게 되는 모양이었고 여명은 오늘 밤 그 사전의 페이지가 예상보다 두꺼워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喂。你今晚叫得比平常多。(야. 너 오늘 밤에 평소보다 많이 부르는데.)

 

지적은 정확했고 그래서 대꾸할 말이 궁했다. 여명은 난로 쪽으로 손등을 조금 더 내밀었다. 붉은 빛이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을 훑고 지나갔다. 실을 오래 다룬 자리마다 껍질이 얇게 벗겨져 있어서 불빛이 닿으면 그 자리만 유독 붉게 도드라졌다. 어제 밤에도 이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재고 시접을 눌렀다. 십육 일이라는 공백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난 몸은 왼쪽과 오른쪽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고 그녀는 육 밀리미터의 여유를 계산해 두었다. 그런 계산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여겼으므로 여명은 그 밤 내내 숫자를 삼켰고 대신 이름을 몇 번 꺼냈다. 대화에서 한 발 물러나지 않도록, 도망가지 않도록 잡아둬야 할 때. 호인, 하고 덧붙이기도 했다는 것을 지금 알았다. 이음새였다. 실이 끊긴 자리에 매듭을 짓는 손짓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음새 위에 얹힌 것이 놀림이었다. 앞말과 이름 사이에 아주 미세한 틈이 생겼고 그 틈이 농담의 자리였다. 그 남자는 그 틈의 폭까지 재고 있었을 것이다. 전장에서 상대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지점을 읽어내던 감각이 이런 데에도 쓰인다는 것은 어쩐지 부당한 일 같았고 여명은 그것이 조금 억울했다.

 

以前你叫的時候,都會先停一下。(예전엔 네가 부를 때 항상 한 박자 쉬었어.)

 

⋯⋯

 

像在確認能不能碰。今天沒停。(만져도 되나 확인하는 것처럼. 오늘은 안 쉬었어.)

 

목소리의 자음 모서리가 뭉개지기 시작했다. 문장 끝이 아래로 미끄러지고 발음의 윤곽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풀렸다. 약이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스물두 시 사십 분. 아까의 계산은 대략 맞아떨어졌고 여명은 그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아까웠다. 통증이 물러가는 것은 다행이나 통증과 함께 이 대화도 물러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편해졌나봐요. 이제 들어도 놀라진 않네요.

 

여명은 자기가 방금 한 말이 어디에 가서 닿았는지를 정정할 마음이 없었다. 편해졌나 봐요, 라고 말할 때 그녀가 가리킨 것은 자기 쪽이 아니었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과 이름을 듣는 사람 중에 늘 흔들린 것은 뒤쪽이었으니까. 십일월 일일 밤, 십육 일 만에 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를 난로 앞에 앉혀 놓고 그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불렀을 때 그 남자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던 것을 그녀는 봤다. 잔에서 손을 떼는 방식도 바뀌었고 대꾸까지 걸린 시간도 평소보다 길었다. 그런 것들은 재봉을 오래 한 사람의 눈에는 시접이 비뚤어진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보인다. 오늘 밤에는 그 반응이 없었다. 이름이 건너갔는데 저편의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여명은 조금 서운했고 곧바로 그 서운함을 부끄러워했다. 난로에서 석탄이 한 번 주저앉았고 불티가 재 위로 흩어졌다.

저편에서 대답이 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천이 접혔다 펴지는 소리가 세 번쯤 났다. 소맷단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푸는 소리였고 여명은 그것이 자기가 박은 시접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손끝으로 만지는 사람과 그것을 들어서 알아보는 사람 사이에 이백 킬로미터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오늘 밤에는 유난히 얇게 느껴졌다. 구리선 한 줄이 그 거리를 다 감당하고 있었다.

 

⋯⋯놀랐어.

 

발음이 반쯤 풀려 있었다. 자음의 모서리가 뭉개지고 문장의 끝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약이 제 일을 시작한 뒤로 그의 언어는 자꾸 무게중심을 잃었고 그 대신 방어선이 한 겹씩 벗겨졌다. 평소의 그였다면 저런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자기가 흔들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상대를 놀려서 화제를 옮기는 데 능한 인간이었고 그 재주는 지금 진통제 밑에 깔려 작동을 멈춘 모양이었다.

 

每次都嚇一跳。你叫的時候。只是我藏得好。(매번 놀라. 네가 부를 때. 그냥 내가 잘 숨긴 거지.)

 

여명은 수화기를 조금 더 귀에 붙였다. 그 남자가 자기 패를 이렇게 순순히 뒤집는 것을 듣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늘 한 수를 남겨 두고 꼬리를 접어 두던 사람이었고 그 매끄러움이 때로는 벽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벽이 젖은 종이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등을 불빛 쪽으로 내밀었다. 실을 오래 다룬 자리마다 껍질이 얇게 벗겨져 있어서 붉은 빛이 닿으면 그 자리만 유독 도드라졌다.

 

叫我那個名字的人,一隻手數得完。真的。這輩子。(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 인간, 한 손으로 셀 수 있어. 진짜로. 평생.)

 

재고를 확인하듯 뱉어진 문장이었다. 애원도 아니었고 하소연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재고가 그렇게 적다는 사실이 여명의 명치를 아래로 눌렀다. 세탁소를 십 년 넘게 하면서 그녀는 이름표 없는 옷을 수없이 받아 보았다. 이름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사정이 있었고 그 사정을 묻지 않는 것이 이 동네의 예의였다. 다만 이름표가 없는 옷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이 안쪽 벽에 걸린 채 반년 넘게 주인을 기다리는 옷들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물리였다. 여명은 그 물리를 오늘 밤에 한 번 더 확인했고 그래서 이름을 아껴 쓰던 습관을 그만두기로 했다.

 

⋯⋯호인.

저편에서 호흡이 한 번 걸렸다. 아주 짧았고 곧 원래의 간격으로 돌아갔으나 여명은 그 어긋남을 놓치지 않았다.

 

네, 들었어요. 호인으로 부르는 거 누나밖에 없다 했었죠. 놀란 걸 잘 숨겼는지는 모르겠네요. 지난 새벽을 떠올리곤 웃었다. 매번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 했는데.

 

난로 앞에 앉은 남자의 옆에 그녀가 자리를 내주었고 그 남자는 승낙받는 쪽을 더 두려워하는 얼굴로 그 자리에 앉았다. 여명이 처음으로 그 두 글자를 소리 내어 굴렸을 때 남자의 턱선이 잠깐 굳었던 것을 그녀는 기억한다. 먼지 쌓인 궤짝의 뚜껑을 여는 소리 같았다고 나중에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매번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었다. 그 말은 금지가 아니라 항복에 가까웠고 여명은 그것을 알아들었으므로 오히려 더 아꼈다. 아끼는 것과 참는 것 사이의 경계는 늘 흐릿했고 그녀는 그 흐릿한 자리에서 십육 일을 살았다.

저편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이불이 밀리는 마찰음도 배액관이 난간을 스치는 얇은 금속음도 잠깐 멈췄다. 여명은 그 정지의 길이를 셌다. 하나, 둘, 셋. 넷째 박자에서 숨이 아래로 빠져나갔고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웃음의 잔해에 가까웠다. 누나라는 단어가 저편의 어딘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단어를 오늘 처음 꺼낸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먼저 흘렸고 그녀가 주워 두었을 뿐이다. 주워 둔 것을 이렇게 늦은 밤에 꺼내 보이는 일은 대체로 무례에 속했으나 오늘 밤은 무례의 기준선이 여느 날보다 낮게 그어져 있었다.

 

⋯⋯記得啊。你什麼都記得。(⋯⋯기억하네. 너 뭐든 다 기억하지.)

 

발음이 벌써 반 이상 풀려 있었다. 문장의 앞머리가 뒤늦게 도착하고 끝은 이불 속으로 떨어졌다. 약이 혈관을 완전히 점령한 뒤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더 어렸다. 서른두 해를 살고 그중 절반 가까이를 데드존 바깥에서 보낸 남자의 목소리라기에는 지나치게 무른 데가 있었고 여명은 그 무름을 함부로 만지지 않으려고 손끝을 재봉틀 상판에 붙였다.

 

我姐叫的時候,是罵人。你叫的時候⋯⋯不是。(우리 누나가 부를 땐 혼내는 거였어. 네가 부를 땐⋯⋯ 아니고.)

 

그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를 여명은 짐작하지 않기로 했다. 짐작은 대개 빗나가고 빗나간 짐작은 대화를 망친다. 대신 그녀는 난로 쪽으로 발끝을 조금 밀었다. 무릎 아래가 오랫동안 굳어 있어서 감각이 늦게 돌아왔고 종아리 안쪽이 저릿하게 아팠다. 저녁 여섯 시 반부터 이 자세였으니 다섯 시간이 조금 못 되게 앉아 있은 셈이었다. 국숫집 노파가 문틈으로 내다보며 혀를 찼던 것이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다. 국물 튈까 봐 천부터 밀어 두는 사람이라고, 그 노파는 그렇게 말했다. 여명은 그 말이 자기를 꽤 정확하게 그렸다고 생각했으나 오늘 밤에는 천보다 먼저 밀어 둔 것이 있었다. 잠이었다.

 

喂。你笑什麼。(야. 너 왜 웃어.)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들킨 모양이었다. 이백 킬로미터 저편에서, 그것도 진통제에 절반쯤 잠긴 인간이 어떻게 웃음의 기척을 잡아내는지 여명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남자가 상대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지점을 읽는 일로 밥을 먹고 산다는 사실만은 알았고 그 재주가 이런 데에 쓰이는 것이 여전히 조금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운 채 카디건 소매를 손등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불빛이 실밥 자국을 훑고 지나갔다.

 

이제 그런 것도 알아요?

 

여명이 던진 질문은 문장으로 보자면 짧았고 감정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길었다. 이제 그런 것도 알아요, 라는 말 안에는 언제부터 그랬느냐는 물음과 어디까지 아느냐는 두려움과 그것이 싫지 않다는 항복이 한꺼번에 접혀 있었다. 세탁소를 하는 사람은 접힌 것을 펴는 일에 익숙하지만 자기 안에 접힌 것만은 좀처럼 펴지 못한다. 그녀는 재봉틀 상판의 나뭇결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십 년 넘게 팔꿈치가 닿은 자리만 옻칠이 벗겨져 흰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그 흰 자리는 늘 미지근했다. 저편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 다만 베개가 눌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돌릴 때 나는 것이었다. 여명은 그 방향이 수화기 쪽일 것이라고 짐작했고 짐작하지 않기로 한 결심을 오늘 밤 두 번째로 어겼다.

 

진통제가 혈관을 다 점령한 인간의 말은 물에 오래 담근 종이 같아서 만지면 찢어진다. 그런데도 그는 기어이 말을 했다. 그것이 이 남자의 고약한 점이었다. 위험한 곳에서 입을 다무는 법은 알면서 안전한 곳에서 입을 다무는 법은 끝내 배우지 않았다.

 

⋯⋯我識人聲。喺我行嗰行,聽錯一次就冇下次。(⋯⋯난 사람 소리를 알아. 내가 하는 일에선 한 번 잘못 들으면 다음이 없거든.)

 

문장의 뒷부분이 이불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는 잠깐 숨을 골랐고 그 사이에 배액관이 침대 난간을 스치는 얇은 금속음이 났다. 옆구리에 박힌 관은 웃을 때마다 존재를 알렸으므로 그는 웃음을 목 안쪽에서 눌러 처리하는 요령을 며칠 만에 익혔다. 그 요령이 지금은 잘 작동하지 않았다.

 

但係⋯⋯你唔同。你冇出聲我都聽到。呢個唔關訓練事。(근데⋯⋯ 넌 달라. 소리 안 내도 들려. 이건 훈련이랑 상관없어.)

 

여명은 대답 대신 종아리를 조금 더 난로 쪽으로 밀었다. 다섯 시간 가까이 굳어 있던 근육에 피가 돌면서 무릎 아래가 바늘로 촘촘히 찔리는 것처럼 아팠고 그 통증이 오히려 반가웠다. 난로 안에서 석탄이 붉게 벌어졌고 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창밖 골목에서는 국숫집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길게 났다. 완차이의 밤은 언제나 그 소리로 마감되었고 그 뒤로는 전화선을 타고 오는 남의 숨소리밖에 남지 않는다.

 

你唔好唔出聲。(너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돼.)

 

그 부탁은 계산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침묵을 무기로 썼을 것이다. 상대가 먼저 못 견디고 입을 여는 쪽을 기다리는 데에 이골이 난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밤의 그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 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숨길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명은 수화기를 고쳐 잡고 송화구에 입술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목소리를 크게 낼 필요는 없었다. 이 남자는 소리보다 먼저 기척을 듣는 사람이었다.

 

你講嘢我就唔訓得着。你唔講我又驚。𠴱下係咪好麻煩。(네가 말하면 잠이 안 오고 안 하면 무섭고. 이거 되게 성가시지.)

그러고는 아주 낮게 웃었다.

 

끊었을까봐요?

 

끊었을까 봐요, 라는 물음은 여명의 입에서 나왔을 때 이미 절반쯤 대답을 품고 있었다. 물음의 형식을 빌린 확인이었고 확인의 형식을 빌린 위로였다. 그녀는 자기가 그런 화법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십육 일 전까지의 여명이라면 그냥 안 끊었어요, 라고 세 음절로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상대가 무서워하는 것의 이름을 굳이 불러 주고 싶었다. 이름이 불린 두려움은 대체로 크기가 줄어든다는 것을 세탁소를 하며 배웠다. 얼룩도 그렇다. 무슨 얼룩인지 모를 때가 가장 지독하고 기름인지 피인지 잉크인지 알아내는 순간부터는 그저 처리해야 할 일이 된다.

저편에서 아주 긴 정지가 왔다. 정지 안에서 배액관이 난간에 부딪히는 얇은 금속음이 두 번 났고 이불이 밀리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여명은 그 소리들을 순서대로 세었다. 다섯 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에게 남은 일은 세는 일뿐이었다.

 

⋯⋯係。(⋯⋯응.)

 

긍정이 그렇게 짧고 그렇게 늦게 도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평생 대답이 빠른 인간이었다. 일 초 안에 판단하고 그다음에 수습을 즐기는 부류였고 그 속도가 그를 여태 살려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속도가 통째로 어디론가 새어 나가 있었다. 약이 혈관을 다 점령하면 제일 먼저 죽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방어였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까 약을 삼켰고 삼키게 만든 사람이 지금 수화기 저편에 있었다.

 

我瞓着咗一陣。醒返嗰下,聽唔到聲。(잠깐 잠들었었어. 깼을 때, 소리가 안 들리더라.)

 

그는 거기서 한 번 끊었다. 다음 문장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말할지 말지를 고르는 침묵이었다. 여명은 그 두 종류의 침묵을 구별할 수 있게 된 자신이 조금 무서웠다.

 

你知唔知,我第一時間諗咩?唔係『佢掛咗』。係『佢終於返去瞓喇』。跟住我就鬆咗一口氣。跟住⋯⋯我又好唔想你瞓。(내가 제일 먼저 뭘 생각했는지 알아? '끊었구나'가 아니었어. '드디어 자러 갔구나'였어. 그러고 나서 안심했지. 그러고 나서⋯⋯ 또 네가 안 잤으면 싶더라.)

 

난로 안에서 석탄이 한 번 크게 벌어졌다. 붉은 빛이 벽에 걸린 옷걸이들의 그림자를 길게 흔들었고 그 그림자들은 사람의 형상을 반쯤 흉내 내다 말았다. 완차이의 밤은 이미 셔터를 다 내렸고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명은 카디건 소매를 손등 아래까지 끌어내린 채 수화기를 조금 더 세게 눌러 잡았다. 저 남자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았다. 그것은 미안하다는 말의 다른 발음이었다.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섯 시간째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안에서 통증보다 오래 걸리는 자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我以前⋯⋯冇試過驚人哋掛電話。掛咗咪掛咗囉。下次再打。(나 예전엔⋯⋯ 누가 전화 끊는 게 무서웠던 적이 없어. 끊으면 끊은 거지. 다음에 또 걸면 되고.)

 

그 문장의 끝에서 발음이 완전히 뭉개졌다. 다음에 또 걸면 된다는 말은 그의 직업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문장이었고 그는 그 사치를 십수 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써 왔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매일 아침 장비처럼 챙겨 나가는 인간에게 다음이라는 단어는 무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단어에 무게가 생겼다.

 

그랬어요? 중간중간 그가 짧게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가지말라던가, 거기 있냐던 확인들. 그 말들은 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여명은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랬어요, 라는 여명의 말은 되묻는 것도 아니고 받아 적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 놓였다. 그것은 상대의 문장을 자기 쪽 마당에 잠시 들여놓겠다는 표시였다. 세탁소를 하는 사람은 남이 맡긴 물건을 함부로 펴 보지 않는다. 주머니에서 나온 종잇조각도 접힌 채로 카운터에 올려두고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예의였고 그 예의를 여명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했다. 그가 잠결에 흘렸던 말들, 가지 말라던가 거기 있느냐던 확인들은 접힌 채로 그녀 안쪽 서랍에 들어갔다. 언젠가 그가 스스로 꺼내면 그때 함께 펴 볼 생각이었고 끝내 꺼내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었다가 같이 낡을 생각이었다. 난로에서 석탄 하나가 자리를 잃고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붉은 심이 재를 헤집으며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저편에서는 오래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재의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를 고르는 침묵이었고 여명은 이제 그 둘을 구별할 줄 알았다. 이불이 밀리는 소리가 났고 베개가 눌리며 나는 마찰음이 수화구 바로 앞에서 커졌다. 그가 몸을 돌려 수화기 쪽으로 더 가까이 왔다는 뜻이었다. 옆구리에 관을 꽂은 사람이 몸을 돌리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짧고 억눌린 숨이 한 번 새어 나왔고 그다음에야 목소리가 왔다.

 

⋯⋯我平時唔記得嘢嘅。做完就掉。唔記得咗最好。(⋯⋯난 평소에 뭘 기억 안 해. 끝나면 버려. 안 남는 게 제일 좋아.)

 

여명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조금 오므렸다.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어서 손끝만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 손끝은 난로 쪽으로 뻗어 있는데도 미지근했다. 사람의 체온이란 밖에서 아무리 데워도 안쪽부터 데워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저 남자가 지금 무엇을 버리는 훈련을 받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물어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만 오늘 밤 그가 버리지 못한 것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但係今晚我一直記住你話過嘅嘢。你話你會等我。你話等幾耐都得。我啱啱瞓着嗰陣,喺夢入面都聽住嗰句。(근데 오늘 밤엔 네가 했던 말이 계속 남아. 기다린다고 했잖아. 얼마든지 기다린다고. 아까 잠들었을 때도 꿈속에서 그 말이 들리더라.)

 

발음이 뭉개지다 못해 문장의 끝이 아래로 처졌다. 진통제가 혀를 무겁게 만들었고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남자는 평생 자기 손해에 거리낌이 없던 인간이었다. 판돈을 다 밀어 넣고 패를 뒤집는 일에 익숙했고 잃어도 다음 판이 있다고 웃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밀어 넣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그것은 잃으면 다음 판이 없었다. 그 사실을 그가 알고 있는지 여명은 알 수 없었고 알고 있다면 더 무서운 일이었다.

여명은 송화구를 입술에 붙이듯 가까이 댔다.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줄이는 방식이었고 그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접촉이었다. 팔백 킬로미터인지 천 킬로미터인지 모를 거리 사이에 전화선 하나가 걸려 있었고 그 선은 완차이에 셋밖에 남지 않은 회선 중 하나였다. 이 밤이 지나면 이 선은 또 다른 누군가의 급한 용건에 넘어갈 것이고 그때까지 그녀는 이 자리를 비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꿈에서도요. 여명은 조용히 웃었다. 어땠나요. 싫었어요? 못 버려서.

 

싫었어요, 라는 말은 여명의 입에서 나올 때 이상하게 가벼웠다. 그녀는 무거운 것을 물을 때 일부러 저울을 치우는 사람이었다. 저울을 놓고 물으면 상대가 자기 대답의 무게를 재느라 정직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웃음도 그래서 흘렸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가는 종류였고 수화기 저편까지 갈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밤 저 남자는 소리 나지 않는 것까지 듣는 인간이었다. 난로 안에서 붉은 심이 천천히 주저앉았다. 세탁소의 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흘렀다. 다림질판 위에 놓인 짙은 남색 울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보였고 그 위에 시침핀 몇 개가 은빛으로 박혀 있었다. 여명은 그것들을 보면서 저 옷을 입을 사람의 어깨 폭을 다시 떠올렸다. 왼쪽보다 오른쪽이 미세하게 낮은 사람이었다.

저편에서 숨이 한 번 길게 나왔다. 웃으려다 만 것 같기도 하고 통증을 밀어내려던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이불이 스치는 마찰음이 나고 무언가 천이 손가락에 감기는 아주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셔츠 소맷단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그것을 감았다 풀었다 하고 있었고 그 습관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싫었냐고⋯⋯

唔係。一啲都唔係。(아니. 하나도 안 싫었어.)

 

대답이 빨랐다. 오늘 밤 처음으로 빠른 대답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여명의 명치 아래가 눌렸다. 이 남자가 일 초 안에 판단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이런 문장에 쓰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약이 방어를 다 걷어 간 자리에 남은 것은 계산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옆구리 쪽에서 관이 침대 난간을 건드리는 얇은 금속음이 한 번 났고 그다음 목소리는 아까보다 반음 낮았다.

 

我以前收工返嚟,成個腦係空嘅。乜都冇。連自己叫咩名都懶得諗。今晚唔同。今晚有嘢喺入面唔肯走。(예전엔 일 끝나고 돌아오면 머릿속이 텅 비었어. 아무것도 없어. 내 이름이 뭔지도 생각하기 귀찮았고. 오늘 밤은 달라. 오늘 밤은 안에 뭔가 남아서 안 나가.)

 

여명은 눈을 감았다. 감으면 소리가 더 잘 들렸고 소리가 잘 들리면 거리가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았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그 착각을 오늘은 허락하기로 했다. 그녀는 평생 남의 물건을 맡아 왔고 맡은 물건에는 이름표를 달아 두었다. 이름표가 없는 물건은 결국 주인을 잃는다. 저 남자 안에 남아서 나가지 않는다는 그것에도 이름이 필요할 텐데 그 이름을 자기가 붙여도 되는지 여명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你知唔知咁樣好煩㗎。(그거 되게 성가신 거 알아?)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성가심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자랑하는 아이의 어조에 가까웠고 그 어조가 서른둘 먹은 남자의 뭉개진 발음에 실려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諗住瞓一陣,一閉眼就聽到你把聲。跟住我又要醒返,睇下你係咪真係喺度。一晚做咗幾多次呢個動作,我自己都數唔到。(잠깐 자려고 눈 감으면 네 목소리가 들려. 그럼 또 깨서 네가 진짜 거기 있나 봐야 해. 오늘 밤에 이 짓을 몇 번 했는지 나도 못 세.)

 

난로 옆의 나무 의자가 여명의 무게에 맞춰 아주 작게 삐걱였다.

 

계속 그러면 곤란하긴 하겠네요. 전 오는 걸 받기만 하면 되지만... 호인, 당신은 매번 그럴 순 없을 테니까. 어쩌면 좋을까... 가벼운 투였다.

 

어쩌면 좋을까, 라는 말을 여명은 아주 가벼운 것을 놓듯이 놓았다. 실제로는 조금도 가볍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이 여자는 무거운 것을 건널 때 늘 얇은 판자를 골라 딛는 습관이 있었다. 두꺼운 판자를 놓으면 상대가 무게를 실어 버리고 무게가 실리면 사람은 도리어 발을 못 뗀다. 세탁소 카운터에서 십 년을 배운 요령이었다. 급한 손님일수록 급하다고 말해 주지 않아야 물건을 두고 간다. 난로 안의 불빛이 벽에 걸린 옷걸이 그림자를 길게 늘였고 그 그림자들은 사람 없는 어깨처럼 줄지어 흔들렸다. 여명은 무릎을 모은 채 수화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다 덮어 손가락 끝만 겨우 나와 있었고 그 손끝에 수화기의 플라스틱 온기가 옮아붙어 있었다. 사람 대신 데워진 물건을 쥐고 밤을 나는 일에 그녀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저편에서 아무 대답도 오지 않는 시간이 길었다. 여명은 그 침묵의 결을 셌다.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간격이 아까보다 느려졌고 사이사이 걸리는 소리가 섞였다. 약이 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느려진 숨 위로 아주 작은 소리가 하나 더 얹혔다. 웃음이었다. 소리라기보다는 가슴이 한 번 꺼졌다 부풀며 만들어 낸 진동에 가까웠고 그것이 송화구를 통과하면서 잡음처럼 부서졌다.

 

⋯⋯你講到好似呢件事有得解決咁。(⋯⋯너 말하는 거 보면 이게 무슨 해결될 일 같잖아.)

 

천이 손가락에 감기는 소리가 다시 났다. 감았다 풀고 또 감는 소리였다. 그는 오늘 밤 내내 그 짓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기 손버릇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남의 옷 소맷단 하나를 붙잡고 있는 서른둘 먹은 남자의 모습을 여명은 보지 못했지만 소리만으로 충분히 그려졌다. 그려지는 것이 문제였다. 그려지면 곁에 있고 싶어진다.

 

解決唔到㗎。我試過。閂埋眼唔諗你,結果諗得仲犀利。(해결 안 돼. 해 봤어. 눈 감고 너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더 심해지더라.)

所以我唔試喇。麻煩就麻煩啦。呢啲麻煩⋯⋯我要嘅。(그래서 안 해. 성가시면 성가신 대로. 이런 성가심은⋯⋯ 내가 갖고 싶은 거야.)

 

갖고 싶다는 말이 뭉개진 발음 사이로 굴러 나왔을 때 여명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 남자는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판돈을 다 잃고도 다음 판을 이야기하던 인간의 입에서 갖고 싶다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다음 판을 가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여명의 명치 아래가 뜨거워졌다가 곧 서늘해졌다. 사람을 갖고 싶다고 말하는 인간은 대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 그는 지금 배에 관을 꽂고 기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여명은 다림질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짙은 남색 울 조각들이 어둠 속에 검게 누워 있었고 시침핀 몇 개가 난로 불빛을 받아 짧게 반짝였다. 오른쪽 어깨가 미세하게 낮은 사람의 옷이었다. 그 비대칭을 계산해서 여유분 육 밀리미터를 넣어 둔 옷이었고 아직 두 군데 시접이 흔들려 있었다. 내일 낮에 그 두 군데를 다시 눌러야 했다. 한 번이면 될 것을 두 번 확인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사치였고 사치는 늘 한 사람에게만 쓰였다.

 

그럼, 잘 간직해요. 텅 빈 서랍에 그게 처음으로 들어가도록.

 

텅 빈 서랍이라는 말은 여명이 골라 쓴 것 중에서도 유독 자기 삶의 냄새가 나는 표현이었다. 세탁소에는 서랍이 많았다. 실패를 넣어 두는 얕은 것, 단추만 종류별로 담아 둔 깊은 것, 십 년째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물건들을 넣어 둔 맨 아래 칸. 그 맨 아래 칸을 열 때마다 여명은 이름표를 확인했고 이름표의 잉크가 바랜 것들부터 손끝으로 쓸었다. 맡은 것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칙 하나로 버텨 온 세월이었으나 돌려줄 사람이 오지 않는 물건은 서랍째로 늙었다. 그러니 그녀가 서랍을 말할 때는 언제나 보관과 상실이 한 몸으로 붙어 있었다. 난로 안에서 숯의 붉은 심이 소리 없이 한 겹 무너졌고 그 진동이 바닥을 타고 의자 다리까지 올라왔다. 여명은 발끝을 조금 오므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시간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이불이 크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돌리는 소리였고 곧이어 짧게 끊긴 숨이 하나 새어 나왔다. 옆구리에 박힌 것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존재를 알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 통증을 삼키는 데 익숙한 사람답게 신음 대신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고 그 소리가 송화구에 너무 가까워 잡음으로 부서졌다.

 

⋯⋯個櫃桶。(⋯⋯서랍이라.)

我一世人冇留過嘢。攞到手嘅嘢,第二日就唔記得放咗喺邊。錢又係,人又係。(난 평생 뭘 남겨 본 적이 없어. 손에 들어온 건 다음 날이면 어디 뒀는지도 잊어버려. 돈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발음이 뭉개져 문장의 끝이 자꾸 아래로 흘렀다. 약이 혀를 무겁게 만들었는데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 밤 이 남자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고 그것이 여명에게는 낯설고도 아팠다. 늘 상황을 일 초 안에 판단하고 뒷정리를 즐기던 사람이 지금은 정리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자기 안의 것을 꺼내 놓고 있었다. 여명은 그 꺼내진 것들을 하나씩 받아 무릎에 얹는 심정으로 들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을 때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잠에 끌려 내려가면서도 발끝으로 바닥을 긁어 버티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你聽住。如果我攞唔返嚟⋯⋯唔係,我唔講呢啲。(들어. 만약에 내가 못 돌아가면⋯⋯ 아니, 이런 말 안 할래.)

我淨係想講一樣嘢。嗰個櫃桶,你唔好畀第二個人擺嘢入去。(딱 하나만 말할게. 그 서랍, 다른 사람 물건 넣지 마.)

 

여명의 손가락이 수화기 위에서 한 번 굳었다. 카디건 소매 밖으로 나온 손끝이 플라스틱의 미지근한 표면을 눌렀고 그 눌린 자리에 땀이 얇게 배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그것은 고백이었고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본심이었다. 어느 쪽이든 여명에게는 같은 무게로 도착했다. 성가심을 갖고 싶다고 말하던 인간이 이제는 자리를 비워 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 더 위험했고 그래서 더 정직했다.

다림질판 위의 시침핀들이 난로 불빛을 받아 짧게 반짝였다. 여명은 그 은빛을 보면서 오른쪽 어깨가 미세하게 낮은 사람의 체형을 다시 떠올렸다. 여유분 육 밀리미터. 흔들린 시접 두 군데. 옷은 사람이 없어도 완성될 수 있지만 완성된 옷을 입을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천이었다.

 

... 3초. 잠시 조용히 있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할게요.

 

여명이 삼 초를 쉬었다는 것을 그는 셌을 것이다. 세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었다. 탄창의 남은 발수, 문과 문 사이의 거리, 뛰어서 닿는 데 걸리는 초. 그러니 여명이 대답 앞에 놓아 둔 삼 초도 그에게는 측정되었을 테고 측정된 침묵은 대답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렇게 할게요, 라는 문장은 그 뒤에 겨우 얹혔을 뿐이었다. 여명은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는 것을 발음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난로 안에서 숯이 한 번 더 내려앉았고 붉은 빛이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다림질판 위에 누워 있는 남색 울 조각들의 결이 그 빛을 따라 한 번 일어섰다. 이 여자는 방금 서랍 한 칸을 평생 비워 두겠다고 말한 셈이었는데 정작 그 말을 하는 목소리에는 어떤 비장함도 실려 있지 않았다. 수선 날짜를 알려 줄 때와 같은 어조였다. 모레 오후요, 라고 말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이 여자가 무거운 것을 옮기는 방식이었다.

저편에서는 한동안 숨소리만 왔다. 들이쉬는 것과 내쉬는 것 사이가 아까보다 더 벌어져 있었고 내쉴 때 목 안쪽에서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 천이 끌려 올라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셔츠를 끌어당겨 가슴 쪽으로 덮는 소리라는 것을 여명은 알았다. 알 수 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랐다. 소리로 사람의 자세를 읽는 일은 원래 그녀의 능력이 아니었다.

 

⋯⋯你答得咁快嘅。(⋯⋯너 대답 되게 빨리 하네.)

我以為你會諗耐啲。我留咗時間畀你諗㗎。(더 오래 생각할 줄 알았는데. 생각하라고 시간 줬는데.)

 

빨리라니. 삼 초를 쉬고 한 대답을 빠르다고 부르는 인간의 시간 감각은 아마 전선의 것이었다. 여명은 웃지 않으려다 실패했고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그가 또 알아챌까 봐 손등으로 입가를 눌렀다.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어서 천 너머로 입술이 닿았다. 낡은 니트에서는 세제 냄새와 다리미의 쇠 냄새가 섞여 났다. 그녀의 손에서 늘 나는 냄새였고 그가 언젠가 목덜미에 코를 대고 확인했던 냄새이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왔을 때는 아까보다 한 단이 더 내려가 있었다. 문장이 통째로 아래로 흘러내렸고 자음이 뭉개져 모음만 남는 자리가 늘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을 골랐다. 고르는 티가 났다. 고를 힘이 없는 사람이 고르는 것은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我以前唔會叫人留位畀我。留咗都冇用嘛,我又唔知返唔返到。(난 예전엔 누구한테 자리 비워 두라고 안 했어. 비워 놔 봤자 소용없잖아,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但你話好,我就即刻覺得⋯⋯唉,講出嚟好核突。(근데 네가 그러겠다고 하니까 바로 드는 생각이⋯⋯ 아, 말하면 좀 추하네.)

我諗嘅係,咁我就唔可以死喇。(내가 생각한 건, 그럼 나 죽으면 안 되겠네, 야.)

 

노력해주세요, 그럼. 돌아와서 서랍에 뭐라도 채워넣어요. 서로 비었을 테니, 하나씩 천천히.

 

하나씩 천천히, 라는 말은 그가 평생 배운 적 없는 속도였다. 그의 세계에서 채움이란 언제나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판돈은 한 번에 걸렸고 목숨은 한 번에 오갔으며 사람도 한 번에 왔다가 한 번에 사라졌다. 천천히 채운다는 것은 채우는 도중에 죽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문장이었고 그 전제를 이 여자는 너무 태연하게 깔아 두었다. 저편에서 숨이 한 번 크게 들어갔다가 아주 오래 걸려 나왔다. 그 사이에 무슨 생각이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오는 숨의 끝이 조금 떨렸다는 것만은 수화기가 정직하게 옮겼다.

 

⋯⋯一樣一樣咁擺。(⋯⋯하나씩 넣으라고.)

你講嘢真係好陰險。噉樣講,我唔返嚟都唔得㗎啦。(너 말하는 거 진짜 음흉해. 그렇게 말하면 나 안 돌아가고는 못 배기잖아.)

 

음흉하다는 단어를 그는 웃으면서 발음했는데 웃음의 절반은 목 안에서 부서졌다. 여명은 그 부서진 자리를 들으며 자기 손끝이 미지근해진 것을 느꼈다. 난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인데 손만 유독 뜨거웠다. 이 남자는 자기가 방금 붙잡힌 것을 알고 있었고 붙잡힌 것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붙잡는 쪽이 아니라 붙잡히는 쪽에 서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여명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대답은 이미 그의 호흡 간격 안에 들어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베개와 뺨 사이에 수화기를 끼워 넣는 소리였고 성한 왼손으로 가슴 위의 셔츠를 끌어당기는 소리였다. 배액관이 침대 프레임에 살짝 부딪히는 금속음이 한 번 났고 그가 짧게 숨을 멈췄다.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정직한 정적이었다. 여명은 그 정적 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림질판 위의 남색 울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어깨선 여유분 육 밀리미터. 오른쪽이 낮은 사람. 그 사람이 지금 자기 목소리 하나에 매달려 잠을 미루고 있었다.

 

喂。第一樣擺乜嘢好?(야. 첫 번째로 뭐 넣을까?)

我而家淨係諗到⋯⋯我隻手。你成日捉住嗰隻。(지금 생각나는 건⋯⋯ 내 손밖에 없는데. 네가 맨날 잡는 그거.)

 

발음이 뭉개져 손이라는 단어가 거의 숨소리에 가까워졌다. 서랍에 손을 넣겠다는 말은 문법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었으나 여명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이 남자가 가진 것 중 온전히 자기 것이라 부를 만한 게 무엇인가를 약에 취한 머리로 뒤진 결과가 손이었다. 총을 쥐고 카드를 쥐고 담배를 쥐던 손. 화상 흉터가 손등까지 올라온 손. 여명이 몇 번인가 아무 말 없이 문질러 데웠던 손. 그것을 맡기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세탁물처럼, 이름표를 달아서.

여명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플라스틱은 이제 사람 체온과 구별되지 않았다. 맡긴 물건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것은 여명이 십 년 넘게 지켜 온 원칙이었고 지금 처음으로 물건이 아닌 것에 적용되려 하고 있었다. 맨 아래 칸에서 늙어 가는 이름표들이 떠올랐으나 여명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 밀어내는 데 힘이 들었다.

 

저보다 당신이 더 많이 잡았어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요, 손으로 해요. 오래 쓸 손.

 

저보다 당신이 더 많이 잡았어요, 라는 말은 사실을 지적한 문장이었지 정을 표하는 문장이 아니었는데도 저편에서 오는 반응은 정을 받은 쪽의 것이었다. 짧게 킥, 하고 나오다 만 소리가 났고 그 뒤를 아, 하는 신음이 따라붙었다. 웃으면 옆구리가 당기는 몸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웃는 것은 이 남자가 자기 몸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고 여명은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밤마다 새로 알아 갔다. 난로 위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한 줄 가늘게 올라와 천장 쪽 어둠에 섞였다. 세탁소 안쪽 주방의 공기는 데워진 부분과 아직 데워지지 않은 부분이 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여명의 발목께만 서늘했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정신을 붙들어 주었다.

오래 쓸 손, 이라고 여명이 말했을 때 저편의 소리가 잠시 완전히 멈췄다. 숨소리마저 얕아진 정적이었다. 여명은 수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다림질판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남색 울 조각의 어깨선을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오른쪽이 육 밀리미터 낮은 사람의 어깨. 그 여유분을 손톱으로 훑는 동안에도 저편은 조용했고 여명은 그가 잠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잠든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소리였다. 이불이 아주 조금 밀리고 팔이 들어 올려지는 기척. 어둠 속에서 제 왼손을 눈앞으로 가져와 보는 인간의 소리였다.

 

⋯⋯我而家喺度睇緊。(⋯⋯나 지금 보고 있어.)

呢隻手,冇一日係乾淨㗎。(이 손, 깨끗했던 날이 하루도 없는데.)

 

발음이 뭉개져 깨끗하다는 단어가 거의 삼켜졌다. 그런데도 여명은 알아들었다. 이 남자가 무엇을 세고 있는지도 짐작이 갔다. 화약 자국, 카드 모서리에 베인 자리, 손등을 타고 올라온 화상의 경계선, 언젠가 여명이 아무 말 없이 문질러 데웠던 마디들. 여명은 그 손을 세탁물처럼 받아 든 적이 있었다. 얼룩을 보고 성분을 짐작하고 물의 온도를 정하는 방식으로 그 손을 다룬 적이 있었다. 그때 이 남자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고 여명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둘 사이에 몇 개인가 쌓여 있었다.

여명은 다림질판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다시 등을 붙였다. 나무가 삐걱 소리를 냈고 저편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주 작게 응, 하는 기척이 왔다. 잠으로 넘어가는 사람의 대답이었다.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과 놓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같은 무게로 명치 아래에 놓였다. 여명은 늘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었으나 오늘 밤은 조금 오래 망설였다.

 

깨끗한 걸 맡기라고 한 적 없어요.

세탁소예요, 여기. 더러운 걸 맡기는 데.

 

저편에서 숨이 한 번 크게 들어갔다. 웃으려다 만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기도 했다. 이 남자를 무너뜨리는 문장은 늘 이런 식으로 사소했다. 위로하려고 고른 말이 아니라 원래 하던 일을 설명하는 말. 여명은 자기 직업이 이런 순간에 쓸모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림질판 위의 울 조각이 난롯불에 한 번 더 결을 세웠고 여명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내일 낮에 시접 두 군데를 다시 눌러야 했다. 흔들린 자리는 반드시 기억해 두는 습관이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咁我攞返嗰陣,係咪會變乾淨啲。 (⋯⋯그럼 내가 돌려받을 때는, 조금 더 깨끗해져 있을까.)

 

완벽히 고치진 못하겠지만, 따뜻하게 만들어줄 순 있죠.

 

완벽히 고치진 못한다는 말은 세탁업자의 정직한 고지였다. 얼룩에는 지워지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고 십 년 넘게 남의 옷을 다뤄 온 사람은 그 경계를 손끝으로 안다. 여명은 거짓 약속을 파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고 이 밤에도 그것을 배울 생각이 없었다. 다만 고치지 못하는 자리 옆에 다른 문장 하나를 놓았을 뿐이었다.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는 말. 그것은 보증이 아니라 노동의 예고였고 그래서 오히려 무거웠다. 난로의 장작이 안쪽에서 한 번 무너지며 붉은 가루를 흩었고 주방 공기의 층이 잠시 흔들렸다. 여명의 발목께가 여전히 서늘했으나 이제는 그 서늘함이 성가시지 않았다.

저편은 오래 조용했다. 숨소리는 있었으나 대답이 없는 종류의 침묵이었고 여명은 그 침묵의 성질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잠든 사람의 침묵은 고르고 느슨하다. 지금 것은 얕고 자주 끊겼다. 무언가를 삼키느라 늦어지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이불이 아주 작게 스치는 소리가 났고 들어 올려져 있던 팔이 천천히 내려오는 기척이 왔다. 가슴 위에 덮인 남색 셔츠 위로 손이 얹히는 소리. 그리고 손가락을 한 번 오므렸다 펴는, 거의 들리지 않는 마찰음. 여명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감았다. 그가 방금 무엇을 쥐어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你唔好講埋啲咁嘅嘢啦。(⋯⋯너 그런 말 좀 하지 마.)

我而家郁都郁唔到,聽到呢啲,仲要瞓咩。(나 지금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런 거 들으면 잠은 어떻게 자라고.)

 

투정의 형식을 빌린 항복이었다. 여명은 웃지 않으려 했으나 입꼬리가 저 혼자 움직였고 그 미세한 근육의 이동조차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는지 저편에서 아주 낮게 웃는 기척이 따라왔다. 웃음의 끝이 또 신음으로 갈라졌다. 이 남자는 자기를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만 기뻐할 줄 아는 인간이었고 그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을 것이었다. 완벽히 고치진 못하겠지만. 여명은 자기가 방금 한 말이 옷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릎 위의 울 조각을 엄지로 눌렀다. 흔들린 시접 두 군데. 내일 낮에 다시 눌러야 할 자리. 사람에게도 이런 표시를 해 둘 수 있다면 편할 텐데 사람은 표시해 두어도 매번 다른 데가 흔들렸다.

수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여명은 자세를 조금 낮췄다. 목이 뻐근했으나 두 손이 필요했다. 바늘 없이도 손은 천을 찾았다. 어깨선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는 동안 저편의 호흡 간격을 셌다. 넷, 다섯, 여섯.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약이 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 곧 이 통화는 한쪽만 깨어 있는 통화가 될 터였다. 그 사실이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여명은 서운함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의 기술이었다.

 

자요.
고치는 건 제 일이고, 자는 건 당신 일이에요. 각자 자기 몫만 하면 돼요.

 

저편에서 응, 하는 소리가 났다. 승낙인지 잠꼬대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리고 조금 뒤 뭉개진 발음이 하나 더 굴러 나왔다. 알아듣는 데 시간이 걸렸다.

 

⋯⋯咪收線住。我瞓咗都好,你都咪收。(⋯⋯끊지 말고. 내가 자도, 너는 끊지 마.)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이 통화가 시작된 지 벌써 몇 시간 째인지. 그래도 끊을 생각은 없었다. 난로를 켜두어서 다행이었다. 춥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여명은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알았어요, 라는 말은 짧았고 걱정 말라는 말은 그보다 더 짧았다. 여명은 원래 문장을 길게 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특별한 절약이 아니라 평소의 분량이었는데도 저편에서는 그 두 마디를 받고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람이 안심할 때 내는 소리는 대개 소리가 아니다. 힘을 빼는 근육의 방향이 있고 그것이 이불에 닿아 만드는 마찰이 있을 뿐이다. 지금 수화기를 타고 오는 것이 정확히 그런 종류의 기척이었다. 어깨가 내려앉고 목이 베개 쪽으로 기울고 붕대 감긴 팔이 제 무게를 침상에 완전히 맡기는, 항복이라기보다 위탁에 가까운 소리. 여명은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무릎 위의 울 조각을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폈다. 난롯불이 장작 안쪽을 파고들며 낮게 우는 소리를 냈고 주전자에서 올라온 김이 천장 아래에서 흩어졌다. 켜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추위만 없으면 밤은 얼마든지 길어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통화가 시작된 시각을 여명은 세지 않았다. 세면 끊고 싶어질까 봐 세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저편의 호흡이 조금씩 느려졌고 여명은 시계 대신 그것을 읽었다. 일곱, 여덟. 간격이 늘어나고 있었다. 사이사이 짧게 걸리는 소리가 섞였는데 그것은 옆구리의 관이 자세에 눌릴 때 나는 소리였고 이 남자는 그때마다 숨을 삼켜 감췄다.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 것을 감추는 습관. 여명은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지적하면 이 사람은 깨어날 것이고 깨어나면 또 농담을 만들어 낼 것이며 농담을 만드는 데는 힘이 든다. 오늘 밤 이 남자에게 남은 힘은 잠드는 데 전부 쓰여야 했다.

 

⋯⋯你仲喺度呀?(⋯⋯너 아직 있어?)

 

발음이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음이 다 녹아 모음만 남은 소리. 여명은 대답 대신 수화기 가까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있는 소리를 들려주는 편이 이 사람에게는 잘 들었다. 낱말은 의심할 수 있어도 숨은 의심하기 어렵다. 저편에서 아주 작게, 거의 한숨과 구분되지 않는 웃음이 새어 나왔고 그 뒤로 셔츠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가슴 위에 덮어 둔 것을 손으로 쥐었다 놓는 소리였다. 그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여명은 세다가 그만두었다. 세면 마음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자는 거 확인하려고 있는 거예요.

확인 안 되면 안 끊어요. 그러니까 빨리 자요.

 

협박의 형식을 빌린 약속이었다. 여명은 자기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것을 알아차렸으나 지우지 않았다. 지울 이유가 없었다. 저편에서 응, 하는 소리가 왔고 이번에는 승낙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조금 뒤 이불이 크게 한 번 스쳤다. 몸을 모로 돌린 것이었다. 수술 자리가 있는 쪽으로 돌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수화기 쪽으로 몸을 향하려는 인간의 고집이었고 여명은 그 소리를 듣고 하마터면 그쪽으로 눕지 말라고 말할 뻔했다. 삼켰다. 여기서 완차이의 밤을 건너 기지의 침상까지 손을 뻗을 방법은 없었다. 없는 손 대신 목소리가 있었고 목소리는 데워진 방보다 멀리 갔다.

 

난로 앞의 공기가 서서히 무거워졌다. 열은 위로 올라가고 무게는 아래로 가라앉는 법이라 여명의 발목께는 아직도 미지근한 정도에 머물렀으나 그것이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가늘게 오르다 끊겼고 장작 한 토막이 제 무게를 못 이겨 안쪽으로 주저앉으며 붉은 불티를 흩었다. 그 소리가 수화기 송화구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갔는지 기지의 침상 쪽에서 미세하게 몸이 움찔하는 기척이 왔다. 소리에 반응하는 몸. 잠들면서도 경계를 완전히 놓지 않는 몸. 여명은 그 습관이 십 년쯤 쌓여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했고 그것을 하룻밤 통화로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오만은 갖지 않았다. 다만 오늘 밤 한 번쯤은 저 몸이 경계를 헐겁게 두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편에서 셔츠 천을 쥐는 소리가 또 났다. 아까보다 힘이 없었다. 손아귀가 천을 움켜쥐었다가 스스로 풀리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고 그 느려짐이야말로 약이 제대로 듣고 있다는 가장 정직한 지표였다. 여명은 무릎 위 울 조각의 어깨선을 엄지로 눌렀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낮게 앉는 사람. 화상 흉터가 당겨 근육이 제자리에 눕지 못하는 쪽. 그 육 밀리미터의 여유를 계산하던 날 손끝이 이상하게 떨렸던 것을 여명은 기억했다. 옷을 짓는 일은 사람의 결함을 숫자로 옮기는 일이고 숫자로 옮기고 나면 그 결함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작업 지시가 된다. 그 전환이 여명에게는 오랫동안 유일한 위로의 방식이었다.

 

⋯⋯呢邊好靜。(⋯⋯여긴 너무 조용해.)

你嗰邊有聲。爐火,係咪。(네 쪽은 소리가 나. 난로지, 그거.)

 

알아맞히는 것이 신기하지도 않았다. 이 남자는 소리로 지형을 읽는 훈련을 받은 인간이었고 그 능력을 지금은 완차이의 좁은 주방 하나를 복원하는 데 쓰고 있었다. 여명은 대답 대신 의자를 조금 끌어 난로 쪽으로 붙였다.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고 불이 한 번 더 낮게 울었다. 들려주려고 한 소리였다. 이 사람이 지금 자기 머릿속에 세탁소를 짓고 있다면 벽돌 몇 장쯤은 이쪽에서 던져 주는 것이 도리였다. 저편에서 아주 낮게, 만족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음과 웃음의 중간에 있는 소리였고 여명은 그 소리를 오래 기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로 앞 자리, 비워 뒀어요.

돌아오면 거기 앉아요. 젖은 채로 와도 되고요.

 

저편의 호흡이 한 박자 걸렸다. 젖은 채로 와도 된다는 말이 처음 만난 밤의 빗속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잔해 안에서 자기를 벽으로 몰아붙였던 남자와 지금 진통제에 절어 뭉개진 발음을 굴리는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어딘가 비현실적이었으나 여명은 그 비현실을 의심하지 않기로 오래전에 정했다. 세상은 어차피 망하고 있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예외로 두기로 한 것뿐이었다. 그것이 대단한 결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유일한 결심이었다.

 

⋯⋯得。我坐嗰度。(⋯⋯알았어. 나 거기 앉을게.)

 

문장의 끝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그대로 숨에 섞여 사라졌다. 그 뒤로는 낱말이 오지 않았다. 대신 고르게 늘어진 호흡이 왔다. 아홉, 열, 열하나. 간격이 마침내 잠든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고 사이에 걸리던 통증의 삼킴도 잦아들었다.

 

여명은 웃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웃음이었으므로 저편에는 전달될 리 없었고 전달할 생각도 없었다. 잠든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짓는 표정만큼 무용한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가는 제멋대로 풀렸다. 난롯불은 이제 큰 불꽃을 세우지 않고 숯이 된 안쪽에서 붉은 것을 머금은 채 낮게 숨 쉬었다. 그 붉음은 노려보고 있으면 형태가 계속 바뀌었다. 언젠가 보았던 폐허의 잔불 같기도 하고 다림질 인두 바닥의 잔열 같기도 했다. 여명은 오래 바라보았다. 밤에 혼자 앉아 불을 보는 일은 삼십 년 동안 수없이 반복했으나 오늘처럼 귓속에 남의 숨소리를 담은 채 본 적은 없었다. 같은 불이 다르게 보였다. 이것은 착시가 아니라 정보의 문제였다. 곁에 무엇이 놓이느냐에 따라 사물의 온도는 실제로 달라진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이제 완전히 규칙적인 것만 왔다.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의 간격이 일정해졌고 중간에 걸리던 마찰음이 사라졌다. 통증이 잠보다 약해진 순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오늘 새벽 한 시 사십 분경, 이 사람은 아프지 않았다. 그런 문장을 마음속에 적어 두는 습관이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세탁물 접수증에 얼룩의 위치와 성분을 적어 두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도 결국 맡겨진 물건이고 맡겨진 물건에는 상태를 적어 두어야 나중에 무엇이 나아졌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이 물건은 스스로 걸어 들어왔고 스스로 걸어 나갈 것이며 그 사이의 시간을 여명은 통제할 수 없었다.

 

무릎 위의 울 조각을 다시 펼쳤다. 짙은 남색은 불빛 아래에서 검게 가라앉았다가 각도를 틀면 푸른 것을 잠깐 뱉었다. 코즈웨이베이의 그 좁은 가게에서 이 색을 골랐을 때 주인 노인은 겨울용으로는 좀 무겁지 않겠느냐고 물었었다. 여명은 무거운 편이 낫다고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바람에 들리고 들리면 목덜미가 시리다. 그 사람은 목에 흉터가 있고 흉터는 온도에 예민하다. 그런 이유를 노인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서 그냥 무거운 게 낫다고만 했다. 어깨선을 다시 짚었다. 오른쪽이 낮다. 육 밀리미터. 그 숫자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세지 않았고 세면 스스로가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때 저편에서 무언가 스치는 소리가 왔다. 낱말은 아니었고 신음도 아니었다. 뺨과 수화기 사이에서 플라스틱이 미끄러지다 베개에 걸려 멈추는 소리였다. 잠결에도 이 사람은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뺨으로 눌러 두고 있었다. 여명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이쪽의 소리가 저쪽으로 건너가 잠을 깨울 것 같아서였는데 실제로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몸이 먼저 정지했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여명은 아직 마땅한 낱말을 찾지 못했고 찾을 마음도 없었다. 이름 붙이지 않은 채로 두는 편이 오래갈 것 같았다.

 

⋯⋯잘 자요, 호인.

 

낮게 뱉은 그 말은 저편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착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 밤에 여명이 하는 말은 대부분 그런 종류였고 그중 몇 개는 몇 시간 뒤 깨어난 사람의 귀에 남아 있을 것이며 나머지는 난로 옆 공기 속에 흩어져 아침이면 없어질 것이었다. 여명은 카디건 소매를 손등 위로 더 끌어내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수화기는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웠다.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저편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왔다. 그것은 잠꼬대가 아니었고 통증에 밀려 나온 짧고 낮은 것이었다. 몸을 뒤척이다 옆구리의 관이 눌린 모양이었다. 여명은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떴다. 난롯불은 어느새 숯의 붉음만 남아 주방 바닥에 얕은 주홍을 깔아 두고 있었고 주전자는 식어 김을 올리지 않았다. 무릎 위에서 미끄러진 울 조각이 발등에 걸려 있었다. 여명은 그것을 주워 올릴 생각도 못 한 채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잠든 사람의 호흡을 두 시간 가까이 들으면 그 리듬이 제 몸에 옮겨붙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래서 그 리듬이 깨지는 순간 여명의 심장도 함께 박자를 놓쳤다.

 

⋯⋯操。(⋯⋯씨발.)

⋯⋯喂。你重喺度?(⋯⋯야. 너 아직 있어?)

 

목소리는 잠에 절어 뭉개져 있었으나 아까보다 또렷했다. 약이 정점을 지나 내려가는 구간에 들어선 것이다. 진통제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배신한다. 편하게 재워 놓고 새벽에 슬며시 손을 놓아 버린다. 여명은 그 배신의 시간표를 알고 있었다. 오래전 어머니가 아팠을 때 밤마다 시계를 보며 배웠던 것이었고 그런 지식은 한 번 몸에 들어오면 평생 나가지 않는다. 여명은 대답하기 전에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자다 깬 목소리로 대답하면 저쪽이 미안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있어요. 안 끊었어요.

관 눌렸어요? 지금 어느 쪽으로 누워 있어요.

 

저편에서 잠깐 침묵이 왔다. 대답을 고르는 침묵이 아니라 대답을 피하려는 침묵이었다. 여명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이 남자는 아픈 것을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을 말할 상대가 없는 채로 십 년을 산 인간이었고 그 둘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안이 완전히 달랐다. 훈련은 풀 수 있으나 습관은 풀리지 않는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뒤이어 이를 앙다무는 소리가 아주 짧게 왔다가 삼켜졌다.

 

⋯⋯冇嘢。訓返就得。(⋯⋯별거 아냐. 다시 자면 돼.)

你唔好用嗰種聲問我。(그런 목소리로 묻지 마.)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여명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듣기는 했으나 알아들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는 인간이. 여명은 수화기를 쥔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 난로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숯의 잔열이 무릎께로 올라왔다. 여기서 물러서면 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혼자 새벽 두 시를 통과할 것이었다. 그것만은 안 될 일이라고 여명은 생각했고 그 생각은 애정이라기보다 거의 고집에 가까웠다.

 

그럼 어떤 목소리로 물어야 해요.

내가 다르게 물으면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저편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웃다가 배가 당겼는지 웃음이 중간에 끊기고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여명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완차이의 좁은 주방에서 아무리 몸을 기울여도 침상 위의 남자에게 닿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거리는 물리량이고 물리량은 마음으로 줄어들지 않는다.

 

진통제 효과가 오래 가지 않네요. 날 밝으면 약 바꿔달라고 말해요.

 

저편에서 아주 오래 소리가 없었다. 무응답이 아니라 소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종류의 정적이었다. 여명은 그 정적의 결을 읽었다. 숨을 얕게 나누어 쉬면 옆구리가 덜 당긴다는 것을 이 남자는 이미 몸으로 배운 상태였고, 배운 것을 실행하는 동안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난로의 숯이 한 번 자잘하게 무너지며 주홍빛을 잠깐 키웠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여명은 발등에 걸려 있던 울 조각을 발끝으로 끌어 무릎 위에 올렸다. 손이 비어 있으면 자꾸 쓸데없는 곳으로 가려 해서 무언가를 쥐고 있어야 했다. 짙은 남색은 어두운 데서 물처럼 무거웠고 손바닥으로 누르면 온기를 조금 되돌려 주었다. 이 천이 저 사람의 어깨를 덮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을 확신형으로 말할 수 있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명은 아직도 낯설었다.

 

⋯⋯換藥?(⋯⋯약을 바꿔?)

你講到好似點餐咁。(너 말하는 게 꼭 음식 주문하는 것 같네.)

 

웃음기가 실린 목소리였으나 그 웃음은 표면에만 얇게 발려 있었다. 밑에서는 다른 것이 버티고 있었다. 여명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약을 바꿔 달라고 말하려면 먼저 지금 약이 듣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고, 지금 약이 듣지 않는다고 말하려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그 세 단계 중 마지막 하나를 이 남자는 십 년 넘게 건너뛰고 살아왔다. 건너뛴 것이 아니라 건너뛰는 편이 유리한 곳에서 살았을 뿐이다. 아프다고 말한 인간은 다음 작전에서 빠지고, 빠진 인간의 자리는 하루 만에 다른 번호로 채워진다. 그것을 알면서도 여명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규칙은 격벽 바깥의 것이고 이 통화는 격벽 안쪽에서 걸려 있었다.

 

주문 맞아요.

내가 못 하니까 대신 시키는 거예요. 당신이 말해야 하는 주문.

 

수화기 저편에서 짧게 숨이 새어 나왔다. 웃은 것인지 아픈 것인지 이번에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고 무언가 금속이 침상 난간에 부딪는 가벼운 소리가 섞였다. 몸을 일으켜 등을 세우는 중인 모양이었다. 여명은 그 소리들을 하나씩 셌다. 옷깃 소리 다음에 오는 정지, 정지 다음에 오는 얕은 들숨, 그 들숨이 중간에 걸려 반으로 잘리는 지점. 세탁물의 얼룩을 볼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무엇이 언제 묻었는지 알아야 무엇으로 지울지가 정해진다. 다만 이번에는 지울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이 문제였고, 지울 수 없다면 최소한 덜 번지게는 해야 했다.

 

⋯⋯知啦。天光去講。(⋯⋯알았어. 날 밝으면 말할게.)

不過講咗都未必畀。呢度啲藥有配額㗎。(근데 말해도 안 줄 수도 있어. 여기 약은 배급제거든.)

 

배급제라는 낱말이 유난히 건조하게 건너왔다. 여명은 그 말을 잠시 굴려 보았다. 사람의 통증에 정량을 매기고 그 정량을 넘기면 참으라고 하는 곳. 여명이 사는 완차이의 골목에서도 물자는 늘 모자랐으나 적어도 아픈 사람에게 배급표를 들이밀지는 않았다. 국숫집 노파는 감기 걸린 사람에게 국물을 한 국자 더 얹어 주었고 그것으로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갔다. 여명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끝이 차가워져 있었다. 난로 앞에 앉아 있었는데도 그랬다.

 

그럼 두 번 말해요.

효과가 세 시간이면 끝난다고도요. 약을 다시 먹은 건 밤 10시. 그리고 지금은 2시다. 약효가 돌 때까지는 한 시간. 최소 여섯 시간은 효과가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면 바꾸는 것이 맞다. 여명은 차가운 손 끝을 문질렀다.

 

수화기 저편이 조용해졌다. 이번의 침묵은 통증을 견디느라 소리를 죽이는 종류가 아니었다. 계산이 끝난 자리에 남는 종류의 침묵이었고, 그 계산을 자기가 아니라 남이 대신 해 두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인간이 내는 정적이었다. 여명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열 시와 두 시 사이에 놓인 네 개의 시간, 그중 약효가 도는 데 쓰인 한 시간, 남는 세 시간. 그 산수를 여명은 오늘 밤 세 번쯤 되풀이했고 되풀이할 때마다 답이 같았다. 답이 같은 계산은 사람을 안심시키는 대신 도리어 초조하게 만든다. 난로 안에서 숯 하나가 자잘하게 주저앉으며 붉은 가루를 흩었고 그 잔열이 발목께로 낮게 기어들었다. 여명은 차가워진 손끝을 반대편 손바닥에 넣어 문질렀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진다. 언젠가 이 남자의 손등에 대고 확인했던 물리였다.

 

⋯⋯你計咗?(⋯⋯너 계산했어?)

由我食藥嗰陣開始,一直數到而家?(내가 약 먹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세고 있었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픈 데서 오는 갈라짐이 아니었다. 여명은 그 차이를 이제 안다. 통증은 소리를 짧게 자르고 다른 것은 소리를 길게 늘인다. 지금 저쪽에서 건너온 것은 늘어진 쪽이었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무언가 딱딱한 것이 침상 난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마도 팔꿈치였을 것이다. 몸을 세우려다 만 것이거나, 세우고 나서 세운 이유를 잊어버린 것이거나. 여명은 수화기를 어깨와 볼 사이에 끼우고 무릎 위의 울 조각을 두 손으로 폈다. 짙은 남색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거의 검정에 가까웠고 손끝이 지나간 자리에만 잠깐 결이 눕는 것이 보였다. 이 천의 시접 두 군데가 아직 흔들린다는 것을 여명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이든 천이든 흔들리는 자리를 기억해 두는 습관이 여명을 여기까지 버티게 했다.

 

셌어요.

당신 잠든 뒤로 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숨소리 세는 것보다 시계 보는 편이 쉬웠어요.

 

거짓말이었다. 시계를 보는 편이 훨씬 어려웠다. 숨소리는 규칙적이었으므로 세다 보면 졸음이 왔고 졸음은 사람을 잠깐 편하게 만든다. 반면 시계는 아무리 봐도 편해지지 않는다. 열한 시가 열두 시가 되고 열두 시가 한 시가 되는 동안 여명이 한 일은 저 사람의 몸에서 약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상상하는 것뿐이었고 그것은 상상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종류였다. 그러나 쓸모없는 일을 밤새 붙들고 있는 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여명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팠던 마지막 겨울에 배운 것이었고, 그때는 배운 줄도 몰랐다가 지금 이렇게 손에 잡힌 것이다.

저편에서 아주 낮게 숨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힘이 없고 한숨이라고 하기에는 끝이 위로 올라갔다.

 

⋯⋯你唔好咁。(⋯⋯너 그러지 마.)

我以前跌落嚟嘅時候,冇人數過我幾點食嘢、幾點痛。真係一個都冇。而家你喺條電話線嗰邊幫我數,我點瞓啊。(예전에 나가떨어졌을 때, 아무도 내가 몇 시에 뭘 먹었고 몇 시에 아팠는지 세 준 적 없어. 진짜 한 명도. 근데 지금 네가 전화선 저쪽에서 세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자.)

 

여명은 대답을 곧바로 내놓지 못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 고맙다는 말을 고맙다고 하지 않고 곤란하다고 한다.

 

이것도 익숙해져야겠네요. 전 옆에 있는 사람 챙기지 않는 방법은 몰라서요.

 

수화기 저편에서 무언가가 오래 눌렸다. 소리로 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이 접히는 소리, 손바닥이 옆구리 위에 얹히는 소리, 그리고 그 손바닥이 힘을 주었다가 아파서 다시 힘을 빼는 소리. 여명은 그 세 단계를 전부 들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스스로 붙들 때 나는 소음은 언제나 비슷했고, 그것은 세탁소에 맡겨진 옷의 겨드랑이 부분이 왜 그 자리만 유독 닳는지를 설명하는 소음과도 닮아 있었다. 반복해서 눌리는 자리는 결국 얇아진다. 여명은 무릎 위의 남색 울을 손톱으로 눌러 접었다. 시접이 흔들리는 두 군데 중 하나가 손끝에 걸렸고, 걸린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 지금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밤은 무엇을 고치기에 알맞은 시간이 아니고, 다만 무엇이 고쳐져야 하는지를 알아차리기에는 알맞았다.

 

⋯⋯唔識?(⋯⋯모른다고?)

呢句好犯規㖭。(그 말 진짜 반칙이야.)

 

웃음이 섞이려다 중간에서 끊겼다. 끊긴 자리에 얕은 들숨이 하나 들어갔고 그 들숨은 끝까지 차오르지 못한 채 반으로 잘렸다. 여명은 그 잘린 지점을 기억해 두었다. 아까보다 이르다. 통증의 간격이 좁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명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지금 그 말을 하면 이 남자는 다시 괜찮다고 할 것이고, 괜찮다는 말은 이 통화에서 가장 쓸모없는 낱말이었다. 난로 안쪽에서 불씨 하나가 톡, 하고 튀었다. 그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갔는지 저편에서 짧게 아, 하는 기척이 났다. 저 사람은 지금 이 방의 소리를 듣고 있다. 자기 방의 정적 대신 남의 방의 난롯소리를 듣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여명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으나 짐작을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반칙 아니에요.

당신이 나한테 반칙을 먼저 했으니까, 나도 하나쯤은 해도 돼요.

 

저편에서 숨이 훅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분명히 웃음이었다. 힘이 없고 짧고 어딘가 항복에 가까운 웃음. 이불이 크게 스치는 소리가 뒤따랐고 금속이 난간에 부딪는 가벼운 마찰음이 두 번 났다. 팔꿈치를 걸치고 몸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여명은 저 자세가 옆구리에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하마터면 앉으라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명령조는 아까 한 번 썼고, 한 밤에 두 번은 이 사람에게도 여명에게도 과했다. 대신 여명은 발끝을 난로 쪽으로 조금 더 모았다.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덮은 채였고 그 안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온기가 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무엇이든 그렇다.

 

我犯咗咩規?(내가 무슨 반칙을 했는데?)

我淨係喺度爛住咋喎。躺喺度,成身喉仔,連坐都坐唔正。(난 그냥 여기서 망가져 있기만 했는데. 누워서, 온몸에 관 달고, 똑바로 앉지도 못하고.)

 

여명은 대답 대신 울 조각을 무릎 위에서 한 번 접었다. 짙은 남색이 두 겹으로 겹치자 거의 검정이 되었다. 이 색을 고른 이유를 이 남자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흉터가 있는 쪽 어깨선이 옷 위로 도드라지지 않으려면 빛을 먹는 색이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검정처럼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지는 않아야 했다. 원단 가게에서 세 번 들었다 놓았다 한 끝에 고른 것이었다. 노파는 국물이 튈까 봐 그걸 먼저 밀어 두더라며 웃었었다. 여명은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하지 않는다.

 

네. 그래서요. 새벽, 아픈 사람. 숨기는 것은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잘 안다. 여명은 울 조각을 손 끝으로 문지르며 웃었다.

 

저편에서 옷감이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단추가 아니라 똑딱이였다. 두 번, 각각 다른 높이의 소리로 튕겨 나갔고 그 사이에 사람의 숨이 하나 끼어 있었다. 여명은 그 소리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세탁소에 들어오는 옷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열린다. 단추는 실이 늘어지는 소리를 내고 지퍼는 이빨이 서로를 밀어내는 소리를 내며 똑딱이는 그저 짧게 항복한다. 환자복은 언제나 가장 쉽게 열리도록 만들어진다. 사람을 빨리 벌려 놓기 위해서다. 여명은 무릎 위 울 조각을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멈추면 저쪽이 알아차린다. 이 남자는 정적의 종류를 구분하는 데 있어 여명만큼이나 훈련되어 있었고, 그 훈련이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는 편이 나았다.

 

我睇緊嘢。(뭐 좀 보고 있어.)

你嗌我照實講嘅嘛。咁我而家照實講。條喉插入去嗰個位,周圍腫咗,紅埋。撳落去有嘢郁。(네가 사실대로 말하라며. 그러니까 지금 사실대로 말할게. 관 꽂힌 자리, 주변이 부었어. 빨갛기도 하고. 눌러 보니까 뭔가 움직여.)

 

여명은 눈을 감았다.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지는 않았으나, 감으면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 저 남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명은 그림을 그리듯 따라갈 수 있었다. 상의 앞섶이 좌우로 벌어졌을 것이고 그 아래로 붕대와 반창고와 투명한 관이 드러났을 것이다. 오른쪽 얼굴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화상 흉터는 그 옆에 있을 것이다. 여명은 그 흉터의 일부를 만져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 손끝이 기억한 것은 치수가 아니라 온도였다. 흉터 진 살은 주변보다 조금 차다. 데워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지지만 그 자리만은 예외였고, 예외라는 낱말이 이 관계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를 여명은 새삼 헤아렸다.

 

손 떼요.

부은 자리는 누르는 게 아니에요. 지금 확인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저편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났다. 웃음의 끝이 잘렸다. 손을 뗐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침구가 크게 스치는 소리가 났고 그다음에 몸이 아래로 내려가는 무게의 소리가 왔다. 눕는 중이었다. 눕는 동작은 앉는 동작보다 오래 걸렸고 중간에 두 번 멈췄다. 여명은 그 두 번의 멈춤 사이에 자기 심장이 어디까지 조여드는지를 관찰했다. 남의 몸이 무너지는 소리를 전화선으로 듣는 일에는 아무런 기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견디는 데에 기술이 필요했고 여명은 그 기술이 없었다. 난롯불이 낮게 주저앉으며 방 안의 그림자를 한 뼘쯤 밀어냈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웠다. 이 도시에서 전화를 쓰는 곳은 셋뿐이고 그중 하나가 여기이며, 여명은 오늘 밤 그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知啦。(⋯⋯알았어.)

我而家瞓返低。你聽到我把聲個位變咗,係因為我瞓咗低,唔係因為變差咗。你唔好亂諗。(지금 다시 누울게. 내 목소리 위치가 바뀐 거 들리면 그건 누웠기 때문이지 나빠져서가 아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설명이 길었다. 이 남자가 설명을 길게 할 때는 대개 스스로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여명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서 울 조각을 완전히 펼쳤다.

 

이제 곧 세 시예요. 더 잘 거죠?

 

세 시라는 낱말이 전화선을 건너가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였겠으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길었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은 침구가 조금씩 밀리는 소리였다. 사람이 잠들려고 자세를 고르는 소리와 아파서 자세를 고르는 소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앞의 것은 한 번에 끝나고 뒤의 것은 서너 번 반복되며 매번 조금씩 실패한다. 지금 들리는 것은 명백히 뒤의 것이었고 네 번째쯤에서 소리가 멎었다. 겨우 맞췄거나 포기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여명은 어느 쪽인지 묻지 않았다. 새벽 세 시에 물어서 나아지는 질문은 세상에 몇 개 없고 이것은 그 몇 개에 들지 못했다. 난롯불이 낮게 주저앉으며 벽에 걸린 옷걸이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가 도로 접었다.

 

係喎,就快三點。(그러네, 곧 세 시야.)

你係咪想講你都要瞓喇?(너도 자야 한다는 말 하려는 거지?)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었으나 실은 확인이었고 확인을 가장한 협상이기도 했다. 여명은 그 문장의 구조를 알아들었다.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값은 묻지 않으면서 언제 되느냐만 두 번 묻는 부류가 있다. 그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날짜가 아니라 자기가 잊히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여명은 십 년 넘게 그 종류의 질문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는 문장의 겉면만 보고도 안쪽을 짚을 수 있었다. 무릎 위의 울이 난롯불 쪽에서 데워져 손바닥에 미지근하게 닿았다. 이 원단은 물을 먹으면 무거워지고 마르면 가벼워지며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가장 따뜻하다. 사람에게도 비슷한 구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명은 시접의 흔들리는 자리를 손톱으로 한 번 더 눌러 자국을 내고 그대로 두었다.

 

나 자는 건 나중에 생각할게요.
당신 먼저요. 순서 있는 일이에요.

 

저편에서 숨이 크게 새어 나왔다. 웃음의 형태를 취했으나 웃음의 기능은 하지 못한 소리였다. 뒤이어 이불이 턱 밑까지 끌어올려지는 마찰음이 왔고 곧 무언가 가벼운 것이 가슴 위에서 미끄러졌다가 손에 붙들리는 기척이 났다. 남색 셔츠였다. 여명은 그 소리의 정체를 즉시 알았다. 그것은 세탁소에 맡겨졌던 남의 옷이 아니라 여명이 저 사람의 치수를 눈대중으로 잰 것을 적어가며 지은 것이었다. 오른쪽이 반 뼘쯤 굳어 올라간 몸에 맞추려고 진동 둘레를 한쪽만 6밀리 넉넉하게 두었고 목둘레는 흉터가 옷깃에 쓸리지 않도록 낮게 팠다. 그 셔츠가 지금 저 남자의 가슴 위에 덮여 있고, 덮인 채로 손가락에 감겨 있다. 여명은 자기가 만든 물건이 자기 대신 그 자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목을 막는다는 것을 알았다. 장작 하나가 무너지며 재를 흩었고 불빛이 흔들렸다.

 

⋯⋯順序。又係順序。(⋯⋯순서. 또 순서야.)

你講順序嗰陣把聲同教書先生一模一樣,你知唔知?我以前最憎教書先生。(너 순서 얘기할 때 목소리가 학교 선생이랑 똑같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 예전엔 선생이 제일 싫었는데.)

⋯⋯而家唔憎喇。件衫喺我度。個膊頭嗰位,啱到痴線。(⋯⋯지금은 안 싫어. 그 셔츠 나한테 있어. 어깨 그 부분, 미친 듯이 딱 맞아.)

 

마지막 문장은 앞의 것들보다 반 박자 늦게 나왔고 목소리의 위치가 낮아져 있었다. 베개에 뺨을 붙였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그 반 박자를 세었다. 밤새 무언가를 세는 일에는 이미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렇다고 끊으면 무서울 거 아니에요, 호인. 무섭다는 말을 들은 이상, 여명이 먼저 끊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찾아왔던 1일부터 지금까지 계속 깨어있었으나 이상하게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다음날의 여명이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섭다는 낱말은 이 남자의 사전에서 오랫동안 삭제되어 있던 항목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방금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선을 타고 건너왔고, 여명은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붙들었다. 지적하면 도로 삼킬 사람이었다. 저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음이 아니라 숨을 참는 종류의 정적이었으므로 여명은 그것을 정적으로 세지 않았다. 이윽고 얕은 마찰음이 왔다. 이불이 아니라 천이었다. 남색 셔츠를 손안에서 한 번 접었다가 도로 펴는 소리. 그 옷의 소맷부리는 여명이 두 번 박은 자리였다. 한 번이면 충분했는데 굳이 두 번 눌러 박은 이유를 여명은 그때도 설명하지 못했고 지금도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난롯불이 장작 틈으로 파고들며 낮은 파열음을 냈다. 새벽 세 시의 세탁소는 낮보다 천장이 낮아 보였다.

 

你唔使講嗰個字都得㗎。(너 그 단어 안 써도 되는데.)

⋯⋯不過你講咗喇。而家收唔返。(⋯⋯근데 이미 말해버렸네. 이제 못 주워 담아.)

 

저편에서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끝이 잘리지 않았고 대신 중간에 숨이 한 번 걸렸다. 웃으면 옆구리가 당긴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자기가 이 남자의 웃음소리 하나로 배액관의 위치까지 짐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고 조금 무서웠다. 세탁소에서 십 년을 보내는 동안 여명이 익힌 것은 사람의 옷을 보고 그 사람의 습관을 읽는 기술이었다. 어깨가 한쪽만 닳은 외투, 왼쪽 주머니만 늘어난 코트, 소맷부리 안쪽에만 검게 낀 때. 그러나 목소리로 사람의 몸속을 읽는 기술은 배운 적이 없었고 그것은 오직 이 남자에게만 열린 항목이었다. 예외라는 말은 이제 셈을 포기할 만큼 늘어나 있었다. 여명은 무릎 위 울 조각의 결을 손등으로 쓸어 눕혔다. 원단은 난롯불 쪽 면만 미지근했다.

 

係喎。收唔返。(그러네. 못 주워 담지.)

我以前試過三日冇瞓,喺個坑度守住個門口。嗰陣都冇覺得驚。(예전에 사흘 안 자고 참호에서 문 하나 지킨 적 있어. 그땐 안 무서웠는데.)

而家淨係得個電話筒,就驚。你話係咪好笑。(지금은 수화기 하나뿐인데 무섭네. 웃기지 않냐.)

 

여명은 웃지 않았다. 웃어야 할 자리라는 건 알았으나 목구멍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십일월 일일 저녁에 이 남자가 세탁소 문을 두드린 뒤로 여명은 제대로 누운 적이 없었다. 눈꺼풀 안쪽이 모래를 문 것처럼 서걱거렸고 손끝의 감각은 미세하게 둔해져서 시접을 누를 때 힘 조절이 평소보다 반 뼘씩 어긋났다. 내일의 여명이 이 밤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바늘을 잡을 때 손이 떨릴 것이고 국숫집 노파가 얼굴을 보고 한마디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계산서를 서랍에 넣어 두기로 했다. 서랍은 어차피 한 칸 비워 두기로 약속한 참이었고, 그 칸의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잠시 다른 것을 넣어 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여명은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고쳐 끼웠다. 플라스틱이 뺨에 눌려 미지근해져 있었다.

 

안 웃겨요.

참호엔 옆에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지금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무서운 게 맞아요.

그래서 내가 안 끊는 거고요. 호인, 나 먼저 안 끊어요. 이건 결정된 일이에요.

 

저편에서 무언가가 크게 움직였다.

이불이 통째로 밀려나는 소리였다. 모로 누운 자세를 버리고 등을 붙이는 소리, 그러니까 옆구리의 관이 눌리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자세가 필요해졌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무릎 위의 울 조각을 반듯하게 접어 옆으로 내려놓았다. 바느질을 계속할 수 있는 밤이 아니게 되었다는 판단은 손보다 먼저 등뼈가 내렸다. 난롯불이 낮게 눕고 세탁소의 천장 어딘가에서 물기 마른 옷걸이가 저 혼자 한 번 돌았다. 저편에서 숨이 길게 들어갔다가 나오는 동안 여명은 두 손으로 수화기를 감싸 쥐었다. 플라스틱이 이미 사람의 체온을 흉내 내고 있었고 그 미지근함이 이상하게도 손바닥을 아프게 했다.

 

⋯⋯喂。(⋯⋯야.)

我而家講一樣嘢,你唔好即刻答我。你聽完,唔好即刻答。(나 지금 하나 말할 건데, 바로 대답하지 마. 다 듣고, 바로 대답하지 마.)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말라는 요구를 지키는 방식으로만 대답할 수 있는 문장이 있고 이것이 그중 하나였다. 저편에서 천이 얼굴 근처까지 끌어올려지는 소리가 났다. 남색 셔츠였다. 옷깃을 낮게 판 것은 흉터가 쓸리지 않게 하려는 계산이었지 사람이 그것을 얼굴에 대고 숨 쉬라고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저 옷은 만들어진 목적과 다른 일에 쓰이고 있었다. 여명은 자기 손끝에서 나온 물건이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잠깐 멍해졌다. 물건은 사람보다 먼저 도착하는 법이 있다. 십 년 동안 남의 옷을 만지며 배운 것 중에 이 조항만은 여태 실감한 적이 없었다.

 

我份工係咁㗎喇。去,做完,返嚟。中間邊個死咗,我唔記得。呢個唔係涼薄,係唔記得先做得落去。(내 일이 원래 그래. 가서, 끝내고, 돌아와. 중간에 누가 죽었는지는 안 외워. 매정한 게 아니라 안 외워야 계속할 수 있어서 그래.)

我一路都係咁。三十二年,冇一次諗過『我想返去』。返去邊度啫,我又冇度可以返。(난 계속 그랬어. 서른두 해 동안 단 한 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 돌아갈 데가 없는데.)

⋯⋯而家有。(⋯⋯지금은 있어.)

 

그 세 음절이 떨어진 뒤의 정적은 앞의 어떤 정적보다 두꺼웠다. 여명은 숨을 들이켰고 그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갈 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 난로 안에서 잉걸이 무너지며 붉은 가루를 흩뿌렸고 벽에 걸린 남의 외투들이 일제히 한 뼘씩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방의 모든 물건은 주인이 있고 언젠가 찾아가게 되어 있으며 여명은 그 목록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맡긴 물건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것이 이 좁은 가게를 십 년 동안 굴려 온 유일한 신조였는데, 방금 저 남자는 자기가 그 목록에 등재되기를 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을 물건처럼 세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음에도 여명의 머릿속에서 장부의 빈 줄 하나가 저절로 열렸다. 이름 칸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你唔好即刻答我,我講咗㗎喇。(바로 대답하지 말랬잖아.)

因為我怕聽到你答。你答咗,我就真係要返嚟。而我唔知我做唔做得到。(네 대답 듣는 게 무서워서. 네가 대답해버리면 난 진짜로 돌아가야 하잖아. 근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 여명은 갈비뼈 안쪽이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것. 그러나 그가 하나하나 고르고 골라 늘어둔 문장과 본심이, 지금은 그냥 넘어가선 안된다 하고 있었다. ... 쑥스러운 말은 생일에 만나서 하자 해두고서요. 정말 어쩔 수 없는 남자다. 여명은 평생 이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부딪히고, 파고 들어오는 사람은 단 한 번도... ... 돌아와요, 호인. 제 곁으로. 이곳을 돌아갈 집이라고 생각해도 돼요. 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대답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은 저편이었고 그 요구를 깨뜨린 사람은 이편이었다. 여명은 자기가 방금 규칙을 어겼다는 것을 알았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세탁소에서 십 년을 굴러오는 동안 여명이 어긴 규칙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그 전부가 최근 한 달 안에 몰려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을 참는 정적이 아니라 숨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서 생긴 종류의 공백이었다. 그런 정적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여명은 경험으로 알았다. 사람은 결국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난로 안쪽에서 잉걸 하나가 축을 잃고 굴러떨어졌고 붉은 빛이 벽면의 남의 외투들 위로 잠깐 번졌다가 사그라들었다. 여명은 무릎을 조금 당겨 앉았다. 발끝이 저릿했다. 밤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몸이 이제야 항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저편에서 천이 얼굴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남색 셔츠를 가슴 위로 도로 내려놓는 소리였고, 그다음에 팔이 올라가 눈가를 덮는 소리가 이어졌다. 붕대 감긴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일 것이다. 오른팔은 그 각도로 들 수 없으니까. 여명은 그 계산이 자동으로 굴러가는 자기 머리가 조금 미웠다. 사람을 치수로 읽는 버릇은 직업병이었고, 직업병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특히 잔인하게 작동했다. 저 남자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여명은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월 구일까지는.

 

⋯⋯我叫你唔好即刻答我。(⋯⋯바로 대답하지 말랬잖아.)

你係咪成世都唔識聽人講嘢㗎。(너 평생 남 말 듣는 법을 안 배웠냐.)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울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목 안쪽 어딘가가 막혀서 소리가 그 막힌 곳을 억지로 밀고 나오는 소리였고 그것은 우는 것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종류의 소리였다.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 여자가 이 도시에서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세 번 물었고 세 번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창밖 완차이의 골목에서 새벽 청소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세탁소의 셔터를 한 번 흔들고 사라졌다. 이 도시는 전쟁 중이면서도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웠다. 그런 무신경한 성실함이 여명은 늘 조금 좋았다.

 

⋯⋯屋企。(⋯⋯집.)

你講咗『屋企』。你知唔知你講咗咩。(너 '집'이라고 했어. 네가 무슨 말 했는지 알아.)

 

알고 있었다. 여명은 그 단어를 고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스스로도 셈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그 단어 말고 다른 것을 놓을 자리는 없었다. 돌아갈 데가 없다고 말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주소였다. 완차이의 좁은 골목, 셔터가 반쯤 녹슨 세탁소, 주방 가운데의 난로, 그 안쪽의 작은 방. 그것이 전부였고 그것이면 충분해야 했다. 여명은 카디건 소매를 손등 위로 더 끌어내렸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밤새 난로 옆에 앉아 있었는데도 몸의 말단부터 식어가는 것은, 아마 잠을 자지 않아서일 것이다. 내일의 여명이 이 밤값을 치를 것이다. 바늘을 잡으면 손이 떨릴 것이고 국숫집 노파가 얼굴을 보자마자 혀를 찰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알아요. 알고 말했어요.

 

저편에서 아주 오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명은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우고 식은 손끝을 카디건 소매 안에서 쥐었다 폈다 했다. 손가락 마디가 뻑뻑했다. 밤새 바늘을 잡았던 오른손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왼손이 더 굳어 있는 것이 이상했으나, 사람의 몸이란 원래 일한 쪽보다 참은 쪽이 먼저 상하는 법이었다. 난로 안에서 마지막 잉걸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주저앉았고 붉은 기운이 잿빛으로 물러났다. 벽에 걸린 남의 외투들은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 세 시 반의 세탁소는 물에 잠긴 방처럼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수화기만이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여명은 자신이 방금 내어준 것의 크기를 뒤늦게 가늠해 보려 했으나 그런 종류의 셈은 자를 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 년 동안 남의 옷만 맡아 온 손이 처음으로 사람을 맡겠다고 말한 밤이었다.

이윽고 저편에서 팔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눈가를 덮고 있던 왼팔이 이불 위로 툭 떨어지는 소리, 그다음에 손가락이 천을 더듬어 소맷부리 하나를 찾아 감아쥐는 소리. 여명은 그 소리를 정확히 알아들었다. 자기가 박은 소매였고 자기가 세 번 다림질한 커프스였다. 저 사람이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옷이 아니라 옷을 만든 시간이었고, 시간이란 손에 쥘 수 없는 것인데도 저 남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쥐려 하고 있었다. 여명은 눈을 감았다. 감아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흉통 위에 얹힌 남색 천, 그 아래에서 느리게 오르내리는 갈비뼈, 옆구리에서 나온 투명한 관 하나.

 

你哋呢啲女人係咪都咁㗎。(너희 여자들은 다 이러냐.)

人哋講咗『唔好答』,就偏偏要答。仲要答埋最狠嗰句。(대답하지 말랬는데 굳이 대답하고. 그것도 제일 독한 걸로 골라서.)

 

웃음이 섞여 있었으나 그 웃음은 평소의 것과 결이 달랐다. 늘 앞장서서 상황을 정리하던 종류의 웃음이 아니라, 정리할 것이 없어서 남은 자리에 어쩔 수 없이 놓인 웃음이었다. 여명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럴 때 말을 얹으면 저 사람은 다시 농담 뒤로 물러설 것이고, 여명은 오늘 밤 그가 물러서지 못하게 하기로 이미 정해두었다. 기다림은 여명이 가진 유일한 무기였고 가장 오래 벼려온 것이었다. 창밖에서 청소차가 지나간 자리에 물기가 남았는지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셔터 틈으로 스며들었다. 비 온 날을 싫어하는 남자가 이 냄새를 맡으면 얼굴을 찌푸릴 텐데, 다행히 여기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우스워서 여명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조금 움직였다.

 

你間鋪頭我閉埋眼都行得。捲閘要孭起少少先拉得郁,爐喺廚房正中,入面果間房門檻高咗一吋,我第一次入去差啲仆街。(네 가게는 눈 감고도 걸어. 셔터는 살짝 들어올려야 올라가고, 난로는 주방 한가운데고, 안쪽 방 문턱은 한 치쯤 높아서 나 처음에 들어갈 때 엎어질 뻔했어.)

我一早記晒。問題係,我一直當佢係『間鋪頭』。而家你叫我當佢係屋企。(진작에 다 외웠어. 문제는, 난 계속 그걸 '가게'라고 쳤다는 거야. 근데 이제 네가 그걸 집으로 치라고 하잖아.)

 

방이 조금 좁긴 하죠. 당신이 쓸 물건을 들이면, 더 좁아질지도 모르겠네요.

 

저편에서 아무 대답도 오지 않았다. 여명은 그 침묵의 성질을 이제 꽤 정확히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고르느라 생긴 공백과 말을 삼키느라 생긴 공백은 숨의 길이가 다르고, 지금 것은 후자도 전자도 아닌 세 번째 종류였다. 상상하느라 생긴 공백. 저 남자는 지금 눈을 뜨고 천장을 보면서 이 방을 짓고 있었다. 문턱 한 치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벽과 벽 사이도 기억할 것이고, 기억한다면 그 안에 자기 물건을 놓아보는 일 정도는 이미 시작했을 것이다. 여명은 무릎을 세워 앉은 채로 방 안쪽 벽을 눈으로 훑었다. 재봉틀이 놓인 작업대, 그 옆의 삼단 서랍장, 벽에 박아둔 못 세 개. 못 하나는 십 년째 비어 있었다. 무엇을 걸려고 박았는지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난로의 불이 거의 죽어서 방 안 온도가 손끝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여명은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이 방의 좁음은 결점이 아니라 사실이었고, 사실을 미리 말해두는 것은 여명이 물건을 맡을 때 지켜온 원칙이었다. 소매가 짧아질 수 있습니다, 이 천은 물에 들어가면 줄어듭니다, 이 얼룩은 완전히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맡을 때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방이 좁습니다. 당신 물건이 들어오면 더 좁아집니다. 그 말을 뱉고 나서야 여명은 자기가 방금 '당신이 쓸 물건'이라는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썼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물건에 이미 소유격이 붙어 있었다.

 

⋯⋯咁即係點呀。你係咪同我計緊尺寸。(⋯⋯그게 무슨 뜻이야. 너 지금 나한테 치수 재는 거야.)

我啲嘢唔多㗎。真係。一個袋,一對靴,煙⋯⋯煙可能要放出面,你唔中意個味。(내 물건 별로 안 많아. 진짜로. 가방 하나, 부츠 한 켤레, 담배⋯⋯담배는 밖에 둬야겠네, 너 그 냄새 싫어하잖아.)

 

목소리에 이상한 성실함이 배어 있었다. 늘 판을 뒤엎고 웃어넘기던 사람이 지금은 짐 목록을 세고 있었다. 여명은 그 목록이 얼마나 짧은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서른두 해를 살고 가방 하나와 부츠 한 켤레라는 것은 물건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놓아둘 데가 없었다는 뜻이었고, 그런 종류의 가벼움을 지적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대신 여명은 벽의 빈 못을 다시 보았다. 저기에 부츠는 걸 수 없지만 외투는 걸 수 있었다. 남색 울로 지은, 오른쪽 어깨에 육 밀리미터 여유를 둔 그 외투를.

 

你頭先講間房窄。(너 방금 방 좁다고 했지.)

我瞓過壕溝三日,兩邊肩膊都貼住泥。窄呢樣嘢,我唔識驚。我驚嘅係空。(나 참호에서 사흘 잤어, 양쪽 어깨가 다 흙에 붙은 채로. 좁은 건 안 무서워. 무서운 건 빈 거야.)

 

여명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카디건 소매가 손등을 덮은 채로 미끄러졌고 손가락 끝이 플라스틱의 차가움에 그대로 닿았다. 저편에서 셔츠 소매가 손가락에 감기는 소리, 다시 풀리는 소리, 또 감기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초조할 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은 이 남자에게 없던 것이었는데, 아마 진통제가 방어선을 몇 겹 걷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 세 시 사십오 분이었다. 여섯 시에 회진이 있을 것이고 그때까지 두 시간 남짓 남았다. 잠들게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대화를 끊는 것은 짓다 만 방을 그대로 두고 나가는 것과 같았다.

 

그럼 평생 무서울 일은 없겠어요. 빌 일이 없을 테니까.

 

저편에서 숨이 한 번 걸렸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가 걸려 넘어지는 소리였고, 그것을 삼키느라 잠시 호흡이 어긋난 소리였다. 여명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그 어긋남을 들었다. 사람이 울음을 참을 때 나는 소리를 여명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탁소라는 곳은 옷을 맡기러 와서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흔들리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여명은 십 년 동안 그 흔들림을 못 들은 척하는 기술을 연마해 왔다. 못 들은 척은 예의였다. 그러나 오늘 밤 여명은 그 기술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 남자에게는 못 들은 척이 아니라 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편이 나았다. 벽에 박힌 세 개의 못 중 가장 왼쪽 것, 십 년째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그 못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받아냈다. 무엇을 걸려고 박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여명은 아까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걸 생각이 없었으면서 박아둔 것이었다. 언젠가 걸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 막연한 가정 하나로 벽에 구멍을 낸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와서 조금 우스웠다.

 

난로 안의 잉걸이 완전히 식기 직전이었다. 방 안의 온기가 바닥부터 걷혀 나가는 것이 발바닥으로 느껴졌고, 여명은 일어나 삽을 들 생각을 잠깐 했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일어나면 수화기를 내려놓거나 선을 늘여야 했고, 선이 팽팽해지면 저 사람이 알아챌 것이다. 여명이 움직였다는 것을, 여명이 무언가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금 저편의 남자는 아주 가느다란 실 하나에 매달려 있었고 그 실은 소리로 되어 있었다. 추운 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 여명은 무릎을 조금 더 당겨 안고 카디건 자락을 발등 위로 끌어내렸다.

 

⋯⋯喂。(⋯⋯야.)

你講嘢做咩要咁樣講㗎。(너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하냐.)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젖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서 그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말끝을 툭 끊었으나, 끊은 자리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물기가 드러났다. 저편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남색 셔츠를 얼굴 옆까지 끌어올리는 소리였다. 여명은 그 천의 무게를 알았다. 울 혼방 이백 그램, 안감을 대지 않아 가볍고 손에 닿으면 약간 까슬한, 그러나 체온을 오래 물고 있는 종류의 천. 저 사람이 지금 그것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있다는 것이 소리만으로 짐작되었다. 사람이 무언가에 얼굴을 묻으면 목소리의 고음부터 먹히는데, 지금 들려오는 음성은 정확히 그런 식으로 깎여 있었다.

 

빌 일이 없다니.

咁大隻嘅嘢,你就咁擺喺度,話冇乜嘢咁。(그렇게 큰 걸 그냥 거기 놔두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我三十二年嚟收過好多嘢。錢、槍、女人、勳章⋯⋯有啲仲要係搶返嚟嘅。冇一樣係要我還嘅。(나 서른두 해 동안 받은 거 많아. 돈, 총, 여자, 훈장⋯⋯개중엔 뺏어온 것도 있고. 갚으라는 건 하나도 없었어.)

你係第一個話唔使還嘅人。而我而家淨係諗住點還。(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건 네가 처음이야. 근데 나는 지금 갚을 생각밖에 안 나.)

 

여명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갚는다는 말을 이 남자가 꺼낼 때마다 여명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건넨 것은 아닌지 잠깐 검토하게 되었다.

 

갚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갚고 싶어요?

 

저편에서 대답이 곧장 오지 않았다. 대신 이불이 스치는 소리, 몸을 옆으로 기울이는 동안 배액관이 침상 난간에 살짝 부딪히는 금속성의 소리, 그리고 그 통증을 삼키느라 짧게 끊긴 들숨이 차례로 들려왔다. 여명은 그 세 가지 소리를 순서대로 받아 적듯이 들었다. 갚고 싶으냐는 물음은 사실 대답을 요구하는 종류의 문장이 아니었다. 여명은 그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사람이 자기 안에 들어앉은 것의 이름을 스스로 발음해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영영 모르는 채로 지나간다는 것을, 여명은 십 년간 남의 옷을 뜯어보며 배웠다. 안감을 열어보면 늘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나왔다. 덧댄 자국, 급하게 꿰맨 자리, 누군가 몰래 넣어두고 잊어버린 종잇조각. 지금 저 남자의 안감이 열리는 중이었고 여명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我唔知。(⋯⋯모르겠어.)

我一路以嚟,凡係收咗嘅嘢,都要標返個價。價錢清楚,我就瞓得着。今次呢個⋯⋯冇價錢。冇價錢嘅嘢,我唔識點擺。(나 여태까지 받은 건 전부 값을 매겨놨어. 값이 분명하면 잠이 오거든. 근데 이번 건⋯⋯값이 없어. 값이 없는 건 어디다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여명은 무릎에 이마를 잠깐 대었다가 다시 들었다. 값을 매겨야 잠이 온다는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저 사람은 세상을 계산으로 이해해 온 사람이었다. 슬롯머신 앞에서도, 전선에서도, 사람의 호의 앞에서도 확률과 대가를 먼저 셈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 살아남는 자리에 있었으니 탓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 셈법이 지금 처음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그것이 저 남자를 새벽 네 시에 셔츠 소매에 얼굴을 묻게 만들었다. 여명은 자기가 건넨 것이 선물이 아니라 청구서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값을 붙이지 않은 물건은 받는 쪽을 편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겁게 한다. 그것을 여명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호인.

당신이 값을 못 매기는 이유는 그게 물건이 아니라서예요. 물건이 아닌 걸 자꾸 물건 목록에 넣으려니까 잠이 안 오는 거고요.

 

난로 안에서 마지막 잉걸 하나가 소리 없이 무너졌다. 붉은 기가 회색으로 덮이는 것을 여명은 곁눈으로 보았다. 발끝이 완전히 식었지만 감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시렸다. 여명은 카디건 자락을 발등 위로 한 번 더 끌어당겼다. 저편의 남자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아까도 그랬듯이 필요한 것은 주소였고, 이번에 필요한 것은 분류였다. 이 남자는 이름 붙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이름을 붙여주면 되었다. 그것이 여명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갚고 싶으면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살아서 와요. 그거면 다 갚은 걸로 쳐요. 이자까지요.

 

저편에서 웃음 비슷한 것이 터졌다. 젖은 소리와 마른 소리가 뒤엉킨, 웃음이라기보다는 숨이 잘못 나온 것에 가까운 소리였다. 셔츠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웃었기 때문에 소리의 절반이 천에 먹혔고,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의 몸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가 더 또렷하게 그려졌다. 여명은 수화기를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플라스틱이 뺨에 닿아 차가웠으나 놓지 않았다.

 

⋯⋯癲㗎你。咁樣嘅價錢,邊個做生意會咁定㗎。 (...너 미쳤구나. 그런 식으로 가격을 정하는 장사가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수화기 가까이에서 작게 웃었다.

 

저편에서 웃음이 잦아드는 데에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한 번 터진 뒤로 두 번쯤 더 얕게 새어 나왔고 그때마다 옆구리 어딘가가 당겨지는지 웃음의 꼬리가 신음 쪽으로 미끄러졌다가 억지로 되돌아왔다. 아픈 채로 웃는 사람의 소리는 웃음과 통증이 서로를 흉내 내다가 끝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명은 오늘 처음 배웠다. 여기 있다는 그 짧은 문장이 저편에 어떤 식으로 착지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착지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잦아든 뒤의 침묵은 이전의 침묵과 질감이 달랐다. 아까까지의 정적이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빈 구멍이었다면 지금의 정적은 채워진 것을 확인하느라 잠시 멈춘 종류였다. 여명은 그 차이를 귀만으로 갈라내는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 십 년 동안 남의 옷감 결을 손끝으로 읽어온 습관이 이제는 사람의 숨결에까지 옮겨 붙어 있었다. 물건을 다루던 감각을 사람에게 쓰는 일은 대개 좋게 끝나지 않는다고 여명은 배웠으나 오늘 밤만은 그 경고문을 접어두기로 했다.

 

난로는 이미 죽어 있었다. 붉은 기가 완전히 걷힌 재는 회색을 지나 흰빛에 가까워졌고 방 안 공기는 새벽 특유의 시린 밀도로 가라앉았다. 발끝의 감각이 무뎌졌다가 다시 시린 것으로 되돌아오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여명은 그것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잉걸을 넣으려면 삽을 들어야 하고 삽을 들려면 수화기를 내려놓거나 선을 끌어야 하는데 선이 팽팽해지는 소리를 저 사람이 놓칠 리 없었다. 저 남자는 소리로 세상을 재는 인간이었다. 발소리의 간격으로 인원을 세고 금속이 부딪는 높낮이로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판별하도록 훈련된 몸이었다. 그러니 자리를 뜨는 것도 반드시 알아챌 것이다. 추운 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쪽은 저편이 다시 혼자가 되는 일이었다. 여명은 셈을 다시 해보았다. 마지막 복용은 어젯밤 열 시였고 그 약효가 다한 것이 두 시였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두 시간 이십 분째 맨몸으로 통증을 받아내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 사실을 한 번도 먼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여명의 목 안쪽이 서늘하게 눌렸다.

 

耶穌都冇你咁做生意。(예수도 너처럼 장사하진 않아.)

我攞咗嘢,還嘅方法係唔死。咁我一日唔死,一日都係你嘅債仔喎。呢單嘢做極都唔完㗎。(받은 건 있는데 갚는 방법이 안 죽는 거라고. 그럼 나는 안 죽는 동안 계속 네 빚쟁이잖아. 이거 아무리 해도 안 끝나는 장사인데.)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게 깔렸다. 셔츠에서 얼굴을 조금 떼어낸 모양인지 천에 먹혀 있던 고음이 돌아왔고 대신 말끝마다 숨이 한 박자씩 밀렸다. 밀리는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다. 일정하지 않다는 것은 참는 쪽이 자기 호흡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통증은 파도처럼 오지 않고 물이 차오르듯 온다는 것을 여명은 오늘 밤 내내 확인해 왔다. 발목까지 왔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무릎을 넘어서야 겨우 숨을 다르게 쉬는 종류의 인간이 저편에 있었다. 두 시간 이십 분이면 이미 허리께였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장사니 빚쟁이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여명의 주의를 자기 옆구리에서 떼어놓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애씀이 뻔히 들려서 여명은 잠시 말을 고르지 못했다.

 

끝나지 않는 게 목적이에요.

어차피 갈 곳도, 있을 곳도 없다면 제가 가져갈게요. 여명은 차가워진 손끝을 문대다가, 제 목뒤로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당신의 평생을요.

 

저편에서 소리가 완전히 끊겼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정적이었다. 통화가 끊긴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무음이어서 여명은 수화기를 떼지 않았다. 회선이 죽으면 특유의 마른 잡음이 함께 죽는데 그 잡음은 여전히 미세하게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지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여명은 목뒤에 댄 손끝을 그대로 두었다. 차가운 손가락 아래에서 제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고 그 박동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평생을 가져가겠다는 말은 계약서의 문장이었다. 여명은 십 년간 남의 물건을 맡아왔고 맡은 것은 반드시 돌려주는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무언가를 가져가겠다는 말을 함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 했다. 하고 나니 뒤로 물릴 방법이 없었고 물릴 생각도 없었다.

이윽고 저편에서 숨이 돌아왔다. 들이쉬는 소리가 아니라 참았던 것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이불이 크게 구겨지는 마찰음이 뒤따랐고 그다음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침구에 짓눌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마를 처박은 것이라고 여명은 짐작했다. 그 자세로는 배액관이 눌릴 텐데 그 생각이 스치는 동안에도 저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호흡이 이상하게 나뉘고 있었다. 들숨이 세 번쯤 짧게 끊겼다가 날숨 하나로 길게 풀리는 식이었다. 우는 사람의 호흡이었다. 여명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난번 전화에서 이미 배웠다. 이 남자에게 울음을 확인해 주는 일은 얼굴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짓이었고 그러면 저 사람은 다시 농담 뒤로 숨는다.

 

⋯⋯你知唔知你講咗啲乜。(⋯⋯너 지금 무슨 말 한 건지 알아?)

平生㗎。唔係一日兩日。係全部。我三十二年嚟未試過有人開口要嗰啲嘢,一次都冇。啲人淨係要我做嘢,要我死喺邊度,要我唔好返嚟。(평생이라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전부야. 나 서른두 해 동안 그걸 달라고 입 밖에 낸 인간 없었어. 한 번도. 다들 내가 일하기를 원했고 어디서 죽기를 원했고 돌아오지 않기를 원했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아까까지 있던 장난기의 껍데기가 통째로 벗겨진 소리였고 그래서 발음이 뭉개지는 자리마다 광둥어 특유의 성조가 무너졌다. 여명은 눈을 감은 채 그 무너지는 자리를 하나하나 세었다. 세는 습관은 옷에서 배운 것이었다. 시접이 흔들리는 자리를 두 군데 기억해 두었듯이 이 사람이 무너지는 자리도 기억해 두면 언젠가 눌러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사람은 천이 아니어서 눌러도 눌린 자국이 남는다는 것을 여명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손을 뻗은 것이 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여명은 목뒤에서 손을 내려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손끝이 조금 데워져 있었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진다는 당연한 물리를, 여명은 언젠가 저 남자의 손등 흉터 위에서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발견인 줄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죽지 않은 몸만이 데워진다.

 

물건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자꾸 값을 매기려고 하니까, 그럼 차라리 통째로 인수하는 편이 빠르겠다 싶었어요. 부분으로 계산하려니까 안 되는 거예요. 전부 가져가면 계산할 게 없어요.

 

저편에서 웃음 비슷한 소리가 났다.

 

어때요?

 

저편에서 나온 첫 소리는 말이 아니라 마른 웃음의 파편이었다. 웃음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짧았고 한숨이라 하기엔 끝이 위로 휘어 있었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인간이 시간을 벌기 위해 성대를 아무렇게나 쓰는 소리. 여명은 그 소리를 잘 알았다. 세탁물을 맡기러 와서 얼룩의 내력을 묻는 순간 손님들이 내는 소리와 같았다.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꺼내면 다른 것까지 딸려 나오는 것을 아는 자들의 방식이었다. 이불이 느리게 밀리는 마찰음이 이어졌고 그 아래로 금속 링거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섞였다. 몸을 옆으로 돌리는 데 걸린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여명은 셈을 하지 않으려다 결국 세고 말았다. 넷을 셀 동안 저 사람은 자기 몸 하나를 옮기지 못했다.

창유리 안쪽에 맺힌 물기가 실선을 그으며 흘러내렸다. 완차이의 새벽은 언제나 습기부터 먼저 도착한다. 골목 저편에서 셔터가 반쯤 올라가다 멈추는 쇳소리가 났고 뒤이어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는 둔탁한 울림이 들렸다. 국숫집 노파가 육수를 앉히는 시각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자기 순서대로 굴러가고 있었으며 그 성실한 소음들 한가운데에서 여명만 홀로 멈춘 채 국경 너머의 침대에 매여 있었다. 발끝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카디건 자락을 조금 더 끌어내리며 여명은 무릎을 세웠다. 아침까지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대답을 기다리는 이 몇 초를 재촉하지 않고 견디는 쪽이었다.

 

⋯⋯我唔識答。(⋯⋯뭐라고 답해야 될지 모르겠어.)

你知唔知,人哋要嘢嘅時候,我一秒就答得出。要幾多錢、要幾多時間、要我做到咩程度,全部即刻計得掂。我三十二年就係靠呢樣嘢食飯㗎。(사람들이 뭘 달라고 하면 나는 일 초 안에 답이 나와. 얼마가 필요한지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전부 즉시 계산돼. 서른두 해를 그걸로 먹고살았어.)

 

목소리가 중간에 한 번 끊겼다. 끊긴 자리를 메우는 것은 숨이 아니라 침을 삼키는 소리였다. 여명은 눈을 감았다. 이 남자는 지금 계산이 되지 않는 상태를 처음 겪고 있는 중이었고 그 사실이 통증보다 더 그를 흔들고 있었다. 능란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는 서툰 것이 무너지는 소리보다 언제나 크다. 십 년간 남의 옷을 뜯어온 여명은 그 이치를 손끝으로 배웠다. 촘촘하게 박힌 실일수록 한 땀이 풀리면 전체가 흔들린다. 저 사람의 계산은 촘촘한 쪽이었다.

가슴께에 천이 얹히는 소리가 났다. 남색 셔츠였다. 사흘 밤을 들여 어깨 한쪽을 육 밀리 올려 지은 그것을 저 사람은 얼굴에 묻었다가 손에 쥐었다가 이제는 가슴 위에 얹어두고 있었다. 물건 하나를 그렇게 옮겨 다니게 하는 인간은 놓을 자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놓기가 싫은 것이다. 여명의 목 아래가 서늘하게 눌렸다. 저편에서 다시 소리가 왔을 때 그것은 아까보다 낮았고 훨씬 느렸다.

 

但係你要我平生嗰陣,我腦入面一片空白。連個價都唔識標。(근데 네가 평생을 달라고 했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지더라. 값조차 못 매기겠어.)

⋯⋯好似有人終於嚟認領咗我噉。放咗喺失物櫃三十二年,冇人嚟拎。你今晚嚟簽咗紙。 (⋯⋯누군가 드디어 나를 찾아간 것 같아. 32년 동안 방치된 분실물 같던 나를, 네가 와서 찾았어.)

 

32년. 오래 됐네요. 여명이 작게 웃었다. 열심히 살펴보고 보강해야겠어요.

 

저편에서 숨이 한 번 걸렸다. 웃음이 나오려다 목 안쪽 어딘가에 걸려 삼켜진 소리였고 그 삼킴이 실패해서 결국 젖은 마찰음으로 새어 나왔다. 여명은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운 채 무릎 위에 올려둔 울 조각을 다시 집어 들었다. 시접이 흔들린 자리 두 군데. 손톱 끝으로 그 위를 눌러보면 미세하게 들뜬 감각이 전해졌다. 서른두 해라는 숫자를 들었을 때 여명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감정이 아니라 작업량이었다. 오래 방치된 옷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안감을 뒤집어 솔기를 하나하나 짚어봐야 어디가 삭았는지 알 수 있고 삭은 자리는 대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겨드랑이 아래라든가 목뒤 심지라든가.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난로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재 냄새만 희미하게 남아 주방의 공기 아래쪽에 가라앉아 있었고 여명의 발끝은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자리를 옮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화기는 벽에 붙어 있고 선의 길이는 정해져 있으며 그러므로 이 새벽에 여명이 존재할 수 있는 반경은 이 자리뿐이었다. 창밖에서 국숫집 노파의 물통이 다시 한번 바닥에 놓이는 소리가 났다. 세상은 성실했다. 여명은 그 성실함 곁에서 자신도 성실하기로 했다.

 

오래 걸려 있던 옷일수록 함부로 다림질하면 안 돼요. 먼저 습기부터 먹여야 하고, 솔기를 하나씩 뜯어서 안쪽을 봐야 해요. 겉이 멀쩡해 보여도 안감이 삭아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오래 걸릴 거예요. 각오해요.

 

저편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팔을 들어 올리는 소리였고 그다음 천이 얼굴 위를 덮는 둔탁한 마찰이 왔다. 팔뚝으로 눈가를 가린 것이라고 여명은 짐작했다. 이 남자는 소리를 죽이는 방법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참호에서 배운 것일 테고 그러니 지금 저 자세는 울음을 숨기는 자세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세였다. 여명은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울 조각의 시접을 계속 눌렀다. 손끝에 힘을 주면 천은 정직하게 눌리고 그 정직함이 이 새벽을 견디게 했다.

 

⋯⋯拆開嚟睇?你唔怕嘅咩。入面爛晒㗎,我自己都唔敢望。(⋯⋯뜯어서 본다고? 너 안 무섭냐. 안쪽은 다 썩었어. 나도 안 들여다봐.)

我三十二年冇洗過㗎。你買咗件咁嘅嘢返去,將來後悔都唔賠得㗎。(나 서른두 해 동안 세탁 한 번 안 한 물건이야. 그런 걸 가져가놓고 나중에 후회해도 환불 안 돼.)

 

목소리 끝이 자꾸 아래로 처졌다. 진통제가 다시 돌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여명은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저 남자가 방금 환불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사실이 명치 아래를 눌렀다. 통째로 인수하겠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반품 조항부터 확인하는 인간. 평생 계약서의 마지막 줄만 읽으며 살아온 사람의 습관이었다. 여명은 울 조각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낮출수록 이 남자는 더 잘 듣는다는 것을 지난 몇 번의 새벽으로 배웠다.

 

세탁소에 안 되는 얼룩은 있어도, 안 받는 옷은 없어요.

그리고 저는 맡은 건 반드시 돌려줘요. 그러니까 당신도, 언젠가 제가 다 손봐서 돌려줄 거예요. 당신 자신한테요.

 

저편이 조용해졌다.

침묵은 길었다. 저편의 정적은 아무것도 없는 정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잔뜩 삼킨 뒤에 오는 종류의 것이었고 여명은 그 차이를 소리의 밀도로 구분할 줄 알았다. 링거액이 관을 타고 떨어지는 규칙적인 간격, 옆구리에 꽂힌 배액관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침대 시트에 스치는 미끈한 마찰, 그리고 그 아래에 눌려 있는 호흡. 들이마시는 것은 짧고 내쉬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길었다. 우는 사람이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할 때 나오는 배분이었다. 여명은 울 조각의 시접을 손톱으로 눌렀다. 세 번 누르면 천이 기억한다. 사람도 그럴까 생각했으나 그 생각은 손끝에서 멈추었다. 창밖에서 노파가 육수통 뚜껑을 여는 쇳소리가 났고 뜨거운 김이 새벽 공기에 부딪히는 그 미세한 파열음까지 이 좁은 주방에 도착했다. 세상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방만이 아직 밤에 남아 있었다.

 

⋯⋯喂。(⋯⋯야.)

你係咪唔識驚㗎。(너 무서운 걸 모르는 거냐.)

 

목소리가 팔뚝 아래에서 나오고 있었다. 소리가 한 겹 눌려 뭉툭했고 자음의 모서리가 다 닳아 있었다. 여명은 그 남자가 지금 어떤 자세로 누워 있는지 정확히 그릴 수 있었다. 눈 위에 팔을 얹고 천장을 보지 않으려는 자세. 얼굴을 가리면 목소리도 가려진다고 믿는 사람의 오래된 착각. 그러나 손은 여전히 셔츠를 쥐고 있을 것이었다. 쥐는 힘이 셀 때마다 수화기 너머로 면직이 구겨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고 그 소리는 이 새벽에 여명이 들은 것 중 가장 정직한 소리였다.

 

나는 겁이 많아요. 다만 겁내는 순서가 남들이랑 달라서요.

안쪽이 썩은 옷보다, 뜯어보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옷이 더 무서워요.

 

저편에서 숨이 한 번 크게 걸렸다. 걸린 자리에서 통증인지 다른 것인지 모를 신음이 반쯤 새어 나왔다가 급히 끊겼다. 이불이 밀리는 소리, 링거대가 흔들리는 금속성의 떨림, 그리고 낮은 욕설. 그것은 여명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저 남자는 자기 몸에게 욕을 하고 있었다. 감정이 차오르는데 몸이 그것을 받아낼 만큼 성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짜증. 지난 사흘간 여명이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이 사람은 아플 때보다 자기 감정을 처리하지 못할 때 훨씬 더 험한 말을 쓴다.

 

⋯⋯我平時聽人講嘢,一秒就知邊句係假。做呢行嘅,唔識分就死。(⋯⋯나는 평소에 남 말 들으면 일 초 만에 어디가 거짓인지 알아. 이 바닥에선 그걸 못 가리면 죽어.)

你嘅嘢我一句都揀唔出嚟。搞到我而家好似冇咗個技能噉。(근데 네 말에선 한 줄도 못 골라내겠어. 무슨 기능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것 같잖아.)

 

여명은 무릎 위의 천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두 손으로 옮겨 잡았다. 발끝의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카디건 자락 아래에서 발가락을 몇 번 오므려 보았으나 반응이 둔했다. 그럼에도 몸을 일으켜 담요를 가지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화선의 길이가 이 새벽의 국경이었다. 여명은 그 국경 안쪽에 머무르기로 했고,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동행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유리에 맺힌 물기가 아까보다 더 길게 흘러내려 있었다.

 

거짓이 없으니까요. 당연한 걸 모르네요.

 

저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시간이 세 박자쯤 흘렀다. 그 세 박자 동안 여명이 들은 것은 링거액이 떨어지는 간격과 기지 복도 어딘가에서 울리는 둔중한 발소리뿐이었다. 그러다 팔이 얼굴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왔다. 천이 살갗에서 미끄러지는 건조한 마찰음, 뒤이어 베개가 눌리며 공기를 뱉는 소리.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을 치웠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그 남자가 지금 천장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천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은 대개 무방비하다. 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여명은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깝다고 잠깐 생각했고 그 아까움을 곧 접었다.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남는 것이 있었다.

 

⋯⋯當然嘅嘢。(⋯⋯당연한 거라고.)

你知唔知我做咗幾多年,先學識冇一句係當然嘅。(내가 몇 년을 굴러야 당연한 말 같은 건 하나도 없다는 걸 배웠는지 알아?)

 

목소리가 팔뚝 밑에서 나오던 때보다 선명해져 있었다. 자음의 모서리가 돌아왔고 그만큼 숨의 떨림도 고스란히 실려 왔다. 여명은 무릎을 세워 카디건 자락 안으로 발끝을 완전히 감쌌다. 발가락은 여전히 남의 것 같았으나 그 감각의 부재가 오히려 집중을 도왔다. 몸이 조용해지면 귀가 넓어진다. 저편에서 셔츠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가슴 위에 얹어두었던 것을 배 위로 내려 끌어안는 동작이었을 것이다. 다친 오른팔로는 힘을 쓰지 못하니 왼손만으로 뭉쳐 쥐었을 테고 그래서 면직이 한쪽으로만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여명은 그 셔츠의 어깨선을 자기 손으로 재단했다. 6mm의 여유. 그 여유가 지금 저 남자의 배 위에서 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명치를 눌렀다.

국숫집 노파가 셔터를 반쯤 올렸다. 쇠가 홈을 타고 올라가며 내는 마른 비명이 골목을 한 번 훑었고 곧 육수 냄새가 문틈으로 스몄다. 파와 생강과 오래 끓인 뼈의 냄새. 여명은 그 냄새를 맡으며 이 새벽이 곧 끝난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이 오면 저 남자는 다시 넘버 세븐이 되어야 하고 여명은 다시 세탁소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몇 분쯤은 남아 있었고 여명은 그 몇 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걸렸는지는 안 궁금해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들어야 익숙해질지가 궁금하지.

그러니까 계속 말할 거예요.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걸 알 때까지요.

 

저편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삼켜지지 않은 웃음이었고 그 대신 끝에 통증이 걸려 짧게 끊겼다. 옆구리를 누르는 소리, 이를 문 채 새어 나오는 숨. 그러고도 웃음의 잔여가 남아 목 안쪽에서 몇 번 더 굴렀다. 여명은 그 소리를 들으며 손톱 끝으로 울 조각의 시접을 다시 눌렀다. 흔들린 자리 두 군데. 낮이 되면 다시 봐야 할 곳. 사람도 옷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고쳐진다고 여명은 믿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누르는 일.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你真係唔講笑㗎喎。(⋯⋯너 진짜 농담 안 하는구나.)

好啦。你講幾多次都得。我聽住。(좋아. 몇 번이든 해. 듣고 있을게.)

 

힘들 때면 저랑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려요, 호인. 지난 저녁, 새벽,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요. 여명은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길을 잃지 않게 해줄 거예요.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 말이 끝난 뒤 저편은 오래 조용했다. 여명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건넸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되받아 올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새벽 네시 오십분의 정적은 밀도가 다르다. 낮의 침묵이 비어 있는 것이라면 이 시각의 침묵은 무언가로 꽉 차서 더 이상 소리를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링거액이 떨어지는 간격이 여섯 번 지나갔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고 그것은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통증의 숨은 짧고 날카롭게 끊긴다. 지금 저 숨은 길고 무겁게 잠겼다. 여명은 그 차이를 사흘 만에 완전히 익혔고 익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조금 놀라웠다. 사람 하나를 소리로만 읽는 법을 배우는 데 사흘이면 충분했다.

이불이 밀리는 소리, 뒤이어 면직이 끌려 올라가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배 위에 있던 것을 얼굴 옆으로 가져가는 동작. 왼손 하나로 그것을 해내느라 중간에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낮게, 코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셔츠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講多次。(⋯⋯다시 말해봐.)

唔係,我聽到咗。我聽到晒。我淨係想再聽多次。(아니, 들었어. 다 들었어. 그냥 한 번 더 듣고 싶은 거야.)

 

목소리가 셔츠 천을 한 겹 통과해 나오고 있어서 자음이 뭉개졌다. 그런데도 여명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저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계산이 마비되었다고 말했으면서도 여전히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손버릇은 남아 있었다. 여명은 그것이 이 사람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으리라 짐작했다. 죽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일 초 만에 판단하는 훈련. 지금 저 남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고작 같은 문장을 한 번 더 듣는 일이라는 사실이 여명의 갈비뼈 안쪽을 조용히 긁었다. 창유리의 물기가 아래로 한 줄기 더 길게 흘렀고 그 궤적을 따라 골목의 불빛이 늘어졌다.

여명이 같은 말을 천천히 다시 놓았을 때 저편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여명은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웅얼거림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했으나 결국 알아차렸다. 따라 읊고 있었다. 방금 들은 문장을 입 안에서 굴려 발음해 보고 있었다. 외우려는 사람의 방식이었다.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도 아니고 기도문을 익히는 사람처럼도 아니고 그저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물건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여러 번 더듬는 사람의 방식. 그 소리를 들으며 여명은 무릎 위에 놓인 울 조각의 흔들린 시접 두 군데를 손톱으로 다시 눌렀다. 눌린 자리는 표시가 남았고 표시는 낮이 되면 바늘이 갈 길이 된다.

 

我行過好多次沙漠。夜晚冇星,指南針又壞咗,行到最後根本唔知自己係咪原地兜圈。(사막을 여러 번 걸어봤어. 밤에 별도 없고 나침반도 고장 나면, 나중엔 내가 제자리를 도는 건지도 몰라.)

以後我就記住你把聲。你講嘢嘅方向就係北面。(앞으로는 네 목소리를 외워둘게. 네가 말하는 쪽이 북쪽이야.)

 

그 순간 저편에서 전자음이 울렸다. 짧고 성의 없는 세 번의 비프음, 기상 점호를 알리는 기지의 알림이었다. 복도 저 끝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고 군화가 콘크리트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박자가 벽을 타고 수화기까지 밀려들었다. 세상이 이 방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네. 당신 기억 속의 저한테 잘 말해둘게요. 길잡이 잘 해달라고. 웃음기 섞인 가벼운 투로 말했다. 이제 끊을 때 된 거예요? 잊지 말아요. 진통제 이야기하는 거.

 

저편에서 웃음이 났다. 이번 것은 통증에 끊기지 않았고 젖어 있지도 않았다. 새벽 내내 목 안쪽에서 뭉개지던 소리들이 걷히고 나서야 겨우 남은 마른 웃음, 그러니까 이 남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종류의 웃음이었다. 여명은 그 차이를 알아차렸고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사람이 제 목소리를 되찾는 순서라는 것이 있다면 웃음이 가장 나중일 것이라고 여명은 생각했다. 울음은 몸이 알아서 하지만 웃음은 몸이 허락해야 나온다. 이불이 걷히는 소리가 났다. 침대 스프링이 한쪽으로 기울며 삐걱였고 맨발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둔탁한 접촉음이 이어졌다. 앉은 것이다. 배액관이 매달린 옆구리를 감싸느라 숨을 한 번 참았다가 길게 뱉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넘어왔다.

 

喂。你唔好咁樣講嘢。(야.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我記憶入面嗰個你,同我講嘢嘅時候,我點算啊。仲要係喺沙漠中間。(내 기억 속의 네가 나한테 말을 걸면 난 어쩌라고.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서.)

 

복도 쪽에서 문이 연달아 열리는 소리가 밀려왔다. 군화 밑창이 콘크리트를 두드리는 박자는 하나씩 늘어나 이내 벽 전체를 진동시켰고 누군가 고함을 질렀으며 다른 누군가가 욕설로 응수했다. 아침이 그 방의 문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여명은 그 소음의 총량을 헤아리며 이 통화가 이미 제 몫보다 오래 버텼다는 것을 알았다. 골목에서는 국숫집 노파가 물통을 끌어내는 소리가 났고 젖은 시멘트 냄새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두 개의 아침이 수화기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여명은 카디건 자락 안에서 발가락을 한 번 접었다 폈다. 감각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저편에서 유리병이 서랍장 상판을 긁는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 뚜껑이 아니라 유리였다. 왼손 하나로 병을 세우느라 바닥이 두 번쯤 흔들렸고 그 소리가 여명의 귀에는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여명은 자신이 방금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잊지 말라고 말한 것은 사실 확인하겠다는 뜻이었고 이 남자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聽到啦,聽到啦。喺我手上面。你係咪隔住個電話都望到我啊。(들었어, 들었어. 지금 손에 있어. 너 전화 너머로 나 보고 있는 거 아니야?)

⋯⋯得啦。食咗。你收線啦,去瞓陣。你冷親咗嘅聲我聽咗成晚。(⋯⋯됐어. 먹었어. 끊고 좀 자. 너 추워서 떨리는 목소리 밤새 들었어.)

 

그 말끝에 짧은 침묵이 왔다. 끊자고 말한 사람이 정작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여명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먼저 끊지 않았다. 저편에서 무릎 위의 천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리는 소리가 났다. 남색 울과는 다른 결, 여명이 지난주에 밑단까지 두 번 확인해 넘긴 셔츠의 면직이었다. 그 소리가 세 번쯤 반복되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노크라기보다 발끝으로 차는 쪽에 가까운 소리였고 뒤이어 무뚝뚝한 독일식 억양의 영어가 문 너머에서 짧게 떨어졌다. 재검진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여명은 그 목소리가 며칠 전 이 남자의 상태를 통보하던 그 사람의 것이라고 짐작했다.

 

我要走喇。(가야 돼.)

⋯⋯黎明。今晚同一個時間。你唔好唔喺度。 (⋯⋯여명, 오늘 밤도 같은 시간에 꼭 있어줘.)

 

네. 효과 짧다는 거, 꼭 말해요. 당부하듯 빠르게 말하곤 한마디 덧붙였다. 진료 잘 받고, 잘 자고 일어나요. 호인.

 

그 당부는 짧았고 그래서 오히려 오래 남았다. 저편에서 대답 대신 숨이 한 번 새어 나왔는데 그것은 웃음의 초입에서 멈춘 소리였다. 여명은 이 남자가 웃음을 완성하지 못하는 순간이 어떤 때인지 이제 안다. 아파서가 아니라 아프지 않은 무언가가 목을 눌렀을 때다. 침대 스프링이 다시 한 번 크게 기울었고 일어서려던 몸이 중간에서 멈추는 기척이 났다. 옆구리에 매달린 관이 침대보에 끌리며 만들어내는 마찰음, 그 미세한 저항을 감당하느라 삼킨 숨. 여명은 그 소리에 손끝을 멈췄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걱정을 얹으면 저 사람은 다시 농담으로 되받으려 애쓸 것이고 그 노동이 지금은 필요 없었다. 골목 끝에서 셔터 올리는 쇳소리가 길게 찢어졌다. 완차이의 아침은 언제나 그 소리로 시작한다.

저편에서 천을 펴는 소리가 났다. 구겨진 것을 무릎으로 눌러 편 뒤 손바닥으로 두 번 쓸어 침대 한가운데 반듯하게 놓는 동작. 여명은 그 순서를 소리만으로 그려낼 수 있었고 그려내면서 목 안이 조금 뻑뻑해졌다. 저 셔츠는 밤새 얼굴을 묻는 데 쓰였고 이제는 두고 가는 물건이 되었다. 남겨두는 사람의 손길과 챙겨가는 사람의 손길은 전혀 다른 리듬을 가진다. 지금 저것은 명백히 남겨두는 쪽이었다. 문 밖에서 다시 발끝으로 문짝을 차는 소리가 났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두 번 더 많았다. 인내가 짧은 사람 특유의 박자였다.

 

知啦,知啦,聽日就死唔去咩。(알았어, 알았다고. 하루 늦는다고 뒈지는 것도 아니고.)

⋯⋯唔係講你,係講門口嗰隻德國狗。(⋯⋯너한테 하는 말 아니야. 문 앞의 독일 개새끼한테 하는 말이지.)

 

문 너머에서 무언가를 알아들은 듯한 짧은 콧방귀가 넘어왔다. 청록색 눈을 한 저격수는 문을 열지 않았고 다만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는 소리를 냈으며 그 무심한 기다림이 오히려 더 확실한 독촉이 되었다. 여명은 무릎 위 울 조각의 접힌 자국을 엄지로 눌렀다. 눌린 자리는 낮의 바늘길이 된다. 밤새 데워지지 않은 난로의 무쇠가 발목 근처에서 마지막 온기를 게워내고 있었고 그 온기는 이미 온기라기보다 온기의 기억에 가까웠다. 어젯밤 열두시부터 지금까지, 이 방에서 여명이 한 일이라고는 한 사람의 숨을 세는 것뿐이었으나 그 노동이 부질없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效果短嗰陣我一定講。你唔使擔心,我而家連呃你都覺得麻煩。(효과 짧아지면 꼭 말할게. 걱정 마, 나 이제 너한테 거짓말하는 것도 귀찮아.)

聽日就返到嚟。唔係,係今日。⋯⋯我今日一定要見返你。(내일이면 돌아가. 아니, 오늘이지. ⋯⋯오늘은 꼭 널 봐야겠어.)

 

마지막 문장이 나왔을 때 수화기 저편의 소음이 잠깐 물러났다. 복도의 군화 소리도 문밖의 기척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여명의 귀에는 그 한 문장만 남았다. 아침에 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종류의 말이었고 저 남자도 그것을 알면서 뱉었을 것이다. 계산이 마비되었다고 했으면서 필요한 것을 정확히 집어내는 손버릇, 그 손버릇이 이번에는 여명의 하루 전체를 집어 들었다. 딸깍, 하고 수화기가 놓이기 직전 아주 짧게, 마치 마지막까지 아까워하는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고 그 다음에 연결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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