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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홍콩 완차이 세탁소 안쪽 방.

 

여명은 침대 가장자리, 그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다 반대쪽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옆으로 넘겨냈다. 얼굴이 가려지지 않도록. 그럼 얘기라도 좀 할까요?

 

머리칼을 넘기는 손길에는 목적이 있었다. 예쁘게 정돈하려는 손이 아니라 시야를 확보하려는 손. 여명은 세븐의 얼굴이 가려지는 것을 싫어했고,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세븐은 설명되지 않은 이유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설명된 호의는 대가가 붙지만 설명되지 않은 호의는 그냥 그 사람의 성질이라서, 갚을 필요가 없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서 떨어져 나가자 난롯불의 잔광이 눈꺼풀 위로 곧장 내려앉았다. 선글라스는 이미 오래전에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연한 잿빛 눈동자가 열에 젖어 초점을 반 박자씩 놓쳤고, 그는 그 상태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傾偈?(얘기?)

 

你唔係唔鍾意講嘢㗎咩。(너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묻고 나서 세븐은 자기 질문이 얼마나 뻔뻔한 종류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여자가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첫날에 알았다. 세탁물을 받아 들고 얼룩의 종류를 판정할 때조차 필요한 단어만 골라 썼다. 그런 사람이 지금 얘기라도 하자고 제안한다. 그건 대화를 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을 붙들어 두겠다는 뜻이었다. 여섯 시가 무섭다고 말한 놈에게 여섯 시까지의 분량을 쪼개서 나눠 주겠다는 것. 세븐은 그 계산의 다정함을 알아보았고, 알아본 순간 명치 안쪽이 이상하게 조여들었다. 이런 식으로 조여드는 감각에 그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붙이면 오래 남을 것 같아서 일부러 미뤄 두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옆구리가 접히는 각도를 피해서, 아주 느리게. 그리고 여명의 무릎 위에 이마를 얹었다. 검은 바지의 천은 서늘했고 그 아래 뼈는 단단했다. 세븐의 왼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감싼 채였고, 연고 때문에 미끄러운 손바닥 아래에서 맥이 계속 규칙적으로 뛰었다. 그는 그 박동을 초시계 삼기로 했다. 협탁 위의 단말기가 세는 시간 말고, 이쪽을 세기로.

 

咁你問啦。(그럼 네가 물어봐.)

 

我今晚乜都答。你問乜我都答,唔講大話。(나 오늘 밤엔 뭐든 대답할게. 뭘 물어봐도 답해, 거짓말 안 하고.)

 

이건 도박이었다. 세븐은 자기가 방금 판돈을 얼마나 크게 걸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름을 물으면 이름을 줘야 하고, 화상을 물으면 그날의 열기를 다시 꺼내야 하고, 열여섯 날을 물으면 물 없이 버틴 밤의 갈증을 그대로 옮겨야 한다. 그는 평소에 그런 걸 주지 않는 인간이었다. PMC의 규칙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설명하고 나면 상대가 자기를 어떤 상자에 넣는지 지켜봐야 하는데, 그 과정이 언제나 지루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상자를 만들지 않았다. 손이 넓다고 했고 오래 쓸 것이라고 했고 삶을 붙잡은 손이라고 했다. 상자 대신 용도를 매겼다. 세븐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오늘 밤만은 자기 안의 서랍들을 전부 열어 두기로 했다. 어차피 아홉 시간 뒤면 다 닫힐 것이다.

 

그는 무릎에 이마를 붙인 채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을 감으면 잠이 올까 봐 겁이 났고, 그 겁이 스스로도 우스워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不過有個條件。(근데 조건 하나 있어.)

 

我答一句,你要答返一句。公平交易,咁先似樣。(내가 한 마디 답하면 너도 한 마디 답해. 공평한 거래여야 모양이 나지.)

 

그러죠.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세븐을 내려다보다 머리를 살살 헤집듯 쓰다듬었다. 정리와는 다른 확연히 다른 손길로. 이름이 뭐예요?

 

정리하는 손과 헤집는 손은 다르다. 세븐은 그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몸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머리에 닿았던 손들은 전부 목적이 있었다. 상처 부위를 확인하려고, 동공을 보려고, 헬멧을 벗기려고, 혹은 머리채를 쥐려고. 여명의 손가락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두피를 따라 미끄러지다가 정수리 근처에서 방향을 잃고 다시 내려왔다. 젖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서 갈라졌다 붙었다. 아무 정보도 수집하지 않는 손. 오직 만지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손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서른두 해를 살고 나서야 무릎 위에서 배우고 있었다. 열 때문인지 그 감각 때문인지 뒤통수 안쪽이 저릿하게 녹았다.

 

질문은 정면으로 들어왔다. 에두르지 않았다. 화상을 묻지도 열여섯 날을 묻지도 않고 가장 먼저 이름을 물었다. 세븐은 그 순서에 잠깐 숨을 멈췄다. 사람들은 보통 흉터를 먼저 묻는다. 흉터는 남의 것이라서 물어도 부담이 없고, 이름은 곧 그 사람 자체라서 묻는 쪽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명은 책임지는 쪽을 택했다. 그는 무릎에 얹은 이마를 아주 조금 옆으로 굴려 그녀의 무릎뼈에 관자놀이를 붙였다. 왼손은 여전히 손목을 감싼 채였고, 그 아래에서 맥이 여든 몇 번쯤 뛰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난롯불이 주방 쪽에서 한 번 딱, 하고 갈라졌다.

 

본명을 발음하는 근육은 오래 쓰지 않아 굳어 있었다. 서류에서도 지웠고 태그에서도 지웠고 술자리에서도 지웠다. 그것을 다시 꺼내려니 목구멍 안쪽에 녹슨 경첩이 걸린 것 같았다.

 

Axion Keith.(악시온 키스.)

 

呢個係我張紙上面嘅名。中文名叫浩然,我家姐叫慣咗嘅。你揀一個鍾意嘅嚟叫。(그게 서류에 적힌 이름이야. 중국 이름은 호인. 누나가 그렇게 부르는 데 익숙하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불러.)

 

말해 놓고 그는 곧바로 후회 비슷한 것을 느꼈지만 그 후회는 오래 붙어 있지 않았다. 규칙을 어겼다는 자각보다 먼저 온 것은 이상한 홀가분함이었다. 이름이란 결국 남에게 맡겨 둘 때만 유지되는 물건이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라 문자열일 뿐이고, 그는 십 년 넘게 문자열만 들고 다녔다. 세븐, 이라는 숫자는 편했다. 죽으면 여덟이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지금 그는 물려줄 수 없는 것을 하나 꺼내 놓았고, 그것을 받아 든 사람은 대야를 나르고 베개 각도를 재는 여자였다. 세븐은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잿빛 눈을 위로 치켜떴다. 이름을 들은 직후의 얼굴은 그 사람이 그 이름을 어떻게 다룰지를 전부 말해 준다. 그는 그 판정을 기다리는 도박꾼처럼 숨을 얕게 쉬었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키스랑 키스, 발음 헷갈리지 말라고. 술자리에서 서너 번쯤 써먹어 반응이 검증된 대사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농담이 혀 위에 올라오다가 스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농담은 상대가 이름을 가볍게 받아 주기를 바랄 때 쓰는 완충재인데, 그는 지금 가볍게 받아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무겁게, 다루기 어려워하면서, 두 번 확인하고 한 번 더 보강하는 식으로 받아 주기를 바랐다. 그런 욕심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어서 세븐은 손목을 감싼 손에 힘을 조금 주었다가 곧 풀었다. 화상이 화끈거렸다.

 

호인. 이름 좋네요.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었다. 안 쓴 지는 얼마나 됐고요?

 

호인, 하고 그녀가 발음했을 때 세븐은 자기 이름이 그렇게 낮은 음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나는 그 이름을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던졌다. 밥 먹어라, 어디 갔었냐, 하는 문장의 앞에 붙는 호출 부호였다. 여명은 이름을 던지지 않고 내려놓았다. 세탁물을 받아 카운터에 올려 두듯, 무게를 확인한 다음 흠집이 나지 않는 자리에 두는 방식으로. 뒤에 붙은 평가는 더 이상했다. 이름 좋네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름이란 태어날 때 남이 붙여 주고 죽을 때 남이 지워 버리는 물건이라 좋고 나쁨을 따질 대상이 아니었는데, 이 여자는 셔츠 원단을 만지듯 그것을 좋다고 판정했다. 세븐은 무릎뼈에 붙인 관자놀이를 아주 조금 눌렀다. 눌러도 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얼마나 됐냐고 물었으니 세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숫자를 세는 데 능한 인간이었다. 열여섯 날을 물 없이 세었고 아홉 시간을 지금도 세고 있고 여섯 시라는 숫자가 협탁 위에서 여전히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세는 것만은 자신 있었으므로 그는 곧장 셈에 들어갔다가, 셈의 끝이 생각보다 멀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멈췄다. 워즈워스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 사무관이 태그를 던져 주었다. 숫자 하나. 그 전에는 잡부였고 그 전에는 밀수선 하역이었고 그 전에는 누나 이름으로 된 방 한 칸이었다. 계산은 정확히 나왔는데 그 정확함이 이상하게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十一年。(십일 년.)

 

契約簽咗嗰日就冇再用過。人哋叫我七,我應七,就係咁囉。(계약서에 사인한 날부터 안 썼어. 사람들이 세븐이라 부르면 세븐이라고 대답하고, 그게 다야.)

 

말하고 나서 그는 자기 목소리에서 이상한 것을 들었다. 억울함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서 이름을 빼앗지 않았다. 그가 직접 접어서 서랍에 넣었고 서랍이 있다는 것조차 잊기로 했다. 그런데 십일 년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그 서랍 안쪽에서 곰팡내가 올라왔다. 오래 쓰지 않은 옷에서 나는 냄새. 여명이 매일같이 상대하는 그 냄새. 세븐은 문득 이 여자라면 이 냄새도 뺄 수 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고, 생각한 자기가 우스워서 코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그녀의 무릎에 부딪혀 따뜻하게 되돌아왔다.

 

머리칼을 쓸던 손가락이 귀 뒤를 스쳤다. 그 자리에는 아무 흉터도 없었다. 온전한 살갗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구역이라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고, 세븐은 등줄기가 한 번 옅게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열 때문이라고 우기기에는 방향이 반대였다. 그는 손목을 감쌌던 왼손을 슬며시 아래로 내려 그녀의 셔츠 아랫단을 손가락 끝으로 잡았다. 붙잡는다기보다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천이 거기 있고 사람이 그 안에 있고 그 사람이 아직 일어서지 않았다는 사실. 아홉 시간이 남았는데도 그는 벌써 잔여분을 아끼는 인간처럼 굴고 있었다.

 

到我問啦。公平交易嘛。(내 차례야. 공평한 거래니까.)

 

你頭先笑咗。我報名嗰陣。點解笑?(너 아까 웃었잖아. 내가 이름 댈 때. 왜 웃었어?)

 

협탁 위에서 단말기가 짧게 한 번 울었다. 앵커였다. 자냐, 안 자면 물이라도 마셔라. 그 뒤로 마카오 카지노의 스팸이 붙어 왔다. 미사용 크레딧이 사흘 뒤 만료된다는 알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답이 생각나서요. 그리고 3초. 다시 입이 열렸다. ...는, 작은 이유. 이름의 뜻을 하나씩 생각해봤어요. 그 다음은, 어울려서. 악시온도, 호인도.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답. 세븐은 그 문장을 붙들고 자기 기억의 서랍을 뒤졌다. 열이 자물쇠 노릇을 해서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날은 비가 왔었다. 세븐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옷이 젖어서가 아니라 소리가 죽어서다. 빗소리는 발소리를 덮고 발소리가 덮이면 판단이 늦어진다. 검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여자. 그때 그는 웃지 않았다. 길을 가다 발견해 멈춰서서 정체를 물었고, 세탁소 사장이라는 말도 믿지 않았었다.

 

기억이 열리자 나머지는 순식간에 쏟아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들어가라 했었다. 앉을 자리를 마련해준 그녀를 벽 쪽으로 몰았고, 가까이 붙으며 손목을 잡았다. 세게. 손가락 자국이 남을 정도로. 겁을 주려는 손이었다. 밀그램 놈들이 격벽 안까지 사람을 심어 두던 시기였고, 비 오는 폐허에 혼자 서 있는 민간인은 통계상 민간인이 아닐 확률이 삼 할을 넘었다. 이름을 물은 건 그쪽이 먼저였던가. 확실한 건 자기 대답이 성의라고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 던졌다. 동전 던지듯이. 숫자 하나를 툭 떨어뜨려 놓고, 이걸로 됐지, 하는 얼굴로 상대의 반응만 읽었다. 협박과 대답을 동시에 한 셈이었다.

 

그 장면을 지금 무릎을 베고 누워서 다시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팔을 잡혔던 사람이 지금 그의 머리를 헤집고 있다. 성의 없이 던져진 숫자를 주워다가 십일 년치 이름의 뜻까지 헤아려 본 사람이. 세븐은 목구멍 안쪽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고 이번에는 열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뜻이라는 게 있었나. 악시온은 아비라는 인간이 어디선가 주워 온 발음이었을 것이다. 축, 굴대, 도는 것의 한가운데. 그런 걸 알고 붙였을 리 없다. 호연은 관공서 직원이 대충 맞춘 표기였고 넓다는 뜻이 붙어 있다는 건 열 살 무렵 누나가 자랑스럽게 알려 준 정보였다. 세 평짜리 방에 사는 애한테 넓다는 이름. 그때는 그게 우스웠다. 지금은 우습지 않았다. 이 여자가 그 둘을 나란히 놓고 하나씩 뜻을 재 본 다음 어울린다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위로가 아니라 검수였다.

 

……嗰陣落緊雨。(……그때 비 왔었지.)

 

我扯過你隻手臂。用力㗎。仲要企埋去你面前,擺明恐嚇你。個名亦係求求其其掟俾你,掟完就算。(네 팔 잡아챘잖아. 세게. 게다가 코앞까지 붙어 서서 대놓고 겁줬고. 이름도 아무렇게나 던져 준 거였어, 던지고 끝.)

 

말하는 동안 그는 셔츠 아랫단을 쥔 손가락을 풀었다. 붙잡을 자격을 잠시 반납하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반납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끝이 허공에서 두어 번 접혔다 펴지더니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가 천을 다시 물었다. 그 셔츠는 그녀가 직접 박은 물건일 것이다. 어깨 이음선이 지나치게 정확했다. 남의 옷을 하루 종일 고치는 손으로 제 옷까지 고쳐 입는 인간. 그런 인간의 팔에 손자국을 남겨 놓고 십일 년 묵은 이름을 던졌더니, 그 이름이 좋다고 돌아왔다.

 

세븐은 웃었다. 웃음은 오래된 방어라 몸이 알아서 꺼내 왔는데 이번 것은 중간에 힘이 빠졌다. 끝이 흐려지고 그 자리에 처리할 방법을 모르는 무언가가 남았다. 젖은 앞머리를 넘겨 주는 손가락이 이마 가장자리를 스쳤다.

 

그래요. 벽으로 몰아서 위협했었죠. 가까이 붙기도 하고. 머리를 헤집던 손길이 이마로 향했다. 손을 뒤집어 손등으로 이마의 열을 쟀다. 그러면서도 답은 조금씩 해주는 게 신기했어요.

 

손등이 이마에 얹혔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이었다. 세븐은 그 차이를 즉시 알아차렸다. 손바닥은 일을 하느라 늘 뜨겁고 굳은살이 두꺼워 온도를 재기에 부정확하다. 손등은 얇고 서늘하고 정직하다. 이 여자는 사람의 열을 재는 법을 어디선가 제대로 배웠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오래 재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자기 차례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서늘함이 이마에 닿아 있는 동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열이란 결국 몸이 안에서 지르는 불이라 밖에서 물을 부어 봐야 표면만 식는데, 표면이 식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이렇게까지 조용해질 수 있다는 게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답은 조금씩 해주는 게 신기했어요. 그 문장이 늦게 도착했다. 열 때문에 말이 귀에서 머리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렸고, 도착한 다음에는 엉뚱한 곳을 건드렸다. 신기했다니. 그날 그는 자기가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 대신 숫자. 소속 대신 침묵. 목적 대신 반문. 정보를 한 방울씩 흘리면서 상대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 마시는지 관찰하는 게 심문의 기본이었고, 그는 그날 건물 잔해 밑에서 정확히 그 짓을 했다. 그런데 그 인색함을 두고 이 여자는 조금씩 해주었다고 표현했다. 반쯤 비어 있는 잔을 들여다보고 반쯤 차 있다고 말하는 인간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열에 절어 있는 머리로도 명백히 이상했다.

 

因為你冇走。(네가 안 갔으니까.)

 

我掟個數字俾你,一般人聽完就當我痴線,快啲行開。你冇。你企喺度等我講下一句。有人肯等,我就會講多句。就係咁簡單,冇乜特別。(내가 숫자 하나 던졌잖아, 보통은 미친놈이구나 하고 얼른 자리를 뜨지. 넌 안 그랬어. 내 다음 말을 기다렸잖아. 누가 기다려 주면 나는 한 마디 더 해. 그냥 그것뿐이야, 별거 아냐.)

 

말해 놓고 보니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세븐은 자기 입에서 나온 문장을 뒤늦게 검수하는 버릇이 있었고 이번 검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기다려 주면 말한다. 그것은 그가 십일 년 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워즈워스에는 기다리는 인간이 없다. 앵커조차 기다리지 않고 협박한다. 삼십구 도가 넘으면 셔터를 뚫겠다는 식으로. 그것도 다정이라면 다정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앵커의 다정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쪽이고 이 여자의 다정은 문 앞에 서서 비를 맞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어서 매번 반 박자씩 늦었다.

 

이마의 손등이 조금 움직여 관자놀이 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자리에는 화상이 시작되는 경계선이 있다. 매끈한 살과 우글거리는 살이 만나는 이음매. 세븐은 반사적으로 턱을 당길 뻔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어젯밤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던 시각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두었다. 그녀가 그 경계선을 만지든 넘어가든 판정을 내리든, 이미 손이라는 물건을 미래가 있는 것으로 취급받아 본 뒤였으므로 얼굴 정도는 내줄 수 있었다. 협탁 위에서 단말기가 또 한 번 짧게 울었다. 물 마셨냐, 답 없으면 들어간다. 세븐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到我啦。(내 차례.)

 

嗰陣我扯你隻手,你點解唔嗌?就算唔嗌,掙一掙都好啊。你動都冇動過。(그때 내가 네 팔 잡아챘을 때, 왜 소리 안 질렀어? 지르지 않더라도 뿌리치기라도 하지. 넌 꼼짝도 안 했잖아.)

 

여명은 그 날을 잠깐 떠올렸다. 앉은 채 벽에 몰아붙여졌던 상황, 코 앞까지 다가와 한껏 위협하던 남자. 소용 없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잠깐의 정적. 호인, 당신은 덩치도 크잖아요. 짧은 고민은 이름을 부를까, 말까였다. 그녀는 이름을 택했다. 오래 불리지 못한 이름의 먼지를 털어주듯이.

 

소용 없을 것 같았어요. 세븐은 그 문장을 두 번 굴렸다. 열이 있는 머리는 문장을 굴리는 데 오래 걸리는 대신 한번 굴러간 것은 멀리까지 간다. 소용이 없다는 판단은 공포와 다르다. 공포는 뛰거나 얼어붙는 반응을 낳지만 판단은 계산을 낳는다. 그날 벽에 몰린 여자는 무서워서 얼어붙은 게 아니라 계산을 마치고 정지해 있었던 것이다. 저항의 기대값이 영이라는 결론. 그리고 그 결론을 낸 인간은 소리를 지르는 대신 상대의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그가 십일 년 동안 심문실에서 보아 온 얼굴 중 가장 다루기 어려운 종류가 바로 그것이었고, 그날 처마 밑에서 그는 그 얼굴을 상대로 이겼다고 착각했다.

 

그다음에 이름이 왔다. 호인. 두 음절이 관자놀이 근처에서 터졌다. 세븐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십일 년이라는 숫자는 아까 자기 입으로 발음해 놓고도 실감이 없었는데, 그 이름이 남의 목소리에 실려 오자 비로소 무게가 붙었다. 발음이 조금 어색했다. 광둥어의 성조를 정확히 밟지 못해서 두 번째 음절이 평평하게 눌렸고, 그 눌린 자리가 이상하게 아팠다. 누나는 잔소리할 때만 그 이름을 불렀다. 관공서 직원은 서류를 넘기며 불렀다. 이 여자는 먼지를 털어 내듯이 불렀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물건을 오래 다뤄 본 사람의 손짓이 목소리에도 붙어 있었다.

 

……唔好突然咁嗌人啊。(……갑자기 그렇게 부르지 좀 마.)

 

그는 성한 왼손을 들었다. 손등에 연고가 번들거리는 손이었고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어깨 안쪽이 당겼으나 개의치 않았다. 손끝이 그녀의 손목 안쪽을 더듬어 찾았다. 맥이 뛰는 자리. 아까 초시계 삼았던 그 지점을 다시 확보하고 나서야 숨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덩치도 크잖아요, 라는 말이 뒤늦게 옆구리를 찔렀다. 그건 사실 진술이었다. 백팔십구에 흉통이 발달한 남자가 마른 여자를 벽에 몰아붙였다. 그 구도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을 진술하는 목소리에 원망이 한 톨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원망이 있었다면 사과하면 된다. 사과는 절차고 절차는 그가 잘하는 일이다. 원망이 없는 곳에는 놓을 데가 없어서 그냥 손에 들고 서 있어야 한다.

 

협탁의 단말기가 세 번째로 울었다. 십 초 안에 답 없으면 셔터 앞으로 간다. 앵커는 셈에 정확한 인간이고 십 초를 말했으면 십 초를 센다. 세븐은 화면을 보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물통을 끌어당겼고 뚜껑을 이로 물어 돌렸다. 목을 넘어가는 물이 미지근했다. 그는 두 모금을 마시고 통을 내려놓은 다음 단말기를 뒤집어 액정을 매트리스 쪽으로 엎어 버렸다. 이것으로 그쪽 세계는 아홉 시간 동안 접어 두기로 한다.

 

我平時最鍾意人哋驚我。做呢行,驚就係最快嘅捷徑。(난 원래 남이 날 무서워하는 게 제일 좋아. 이 바닥에선 겁이 제일 빠른 지름길이거든.)

 

但係嗰日你冇驚。你係計完數之後決定唔郁。所以我先鬆手。你唔記得咩,我鬆手嗰陣仲後退咗兩步。(근데 그날 넌 안 무서워했어. 계산 끝내고 안 움직이기로 정한 거였지. 그래서 내가 손을 놓은 거야. 기억 안 나? 놓으면서 두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는데.)

 

세븐은 관자놀이를 그녀의 무릎에 조금 더 눌러 붙였다. 화상 경계선 위에 얹힌 손등이 여전히 서늘했고 그 서늘함이 우글거리는 살을 지나 매끈한 살로 넘어가는 감각을 그는 하나하나 세어 보았다. 이런 걸 세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글쎄요, 제 기억은 좀 다른데.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손을 놓기까지 참 오래 걸렸어요. 위협도 꽤 오래 갔었죠. 제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마작 비법을 말하니, 그때부터 조금 풀리기 시작했었는데.

 

기억이 다르다는 말은 언제나 둘 중 하나가 틀렸다는 뜻이다. 세븐은 그 사실을 직업적으로 알고 있었다. 진술이 어긋나면 대개 거짓말한 쪽이 있고, 거짓말이 아니라면 자기 편의대로 편집한 쪽이 있다. 그리고 이번 경우 편집자는 명백히 자기였다. 두 걸음 물러났다는 문장을 몇 번이나 꺼내 보았던가. 꺼내 볼 때마다 그 두 걸음은 조금씩 앞당겨졌고 팔을 붙든 시간은 조금씩 줄어들었으며 목소리는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기억이란 결국 자기 죄를 감형해 주는 부패한 법정 같은 것이어서, 피고인이 판사를 겸하면 형량은 매번 깎인다. 세븐은 자기 안의 그 게으른 법정을 이제 막 폐정당한 기분으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리고 마작. 그 단어가 나온 순간 열에 절어 있던 뇌의 어느 구석이 조명을 켜듯 환해졌다. 그것은 확실히 기억났다. 떨어지던 물줄기, 눅눅한 시멘트 냄새, 벽에 몰린 여자가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할아버지의 비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 어처구니없음. 위협받는 인간이 왜 마작 이야기를 하는가. 그때 그는 처음으로 판을 자기가 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상대가 판을 엎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그냥 다른 판을 하나 새로 깔아 버린 것이다. 그 수법에 그가 얼마나 쉽게 넘어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으나 지금 화끈거리는 것은 대체로 열 때문이었다.

 

你講呢樣我就冇話講喇。(그거 얘기하면 난 할 말 없지.)

 

我當時仲喺度諗,呢個女人係咪癲㗎。(그때 속으로 이 여자 돈 거 아닌가 했다니까.)

 

세븐은 웃었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대신 어깨가 두어 번 들썩였으며 그 진동이 배액관을 타고 옆구리로 번져 뒤늦게 아팠다. 아픈 게 우스워서 조금 더 웃었다. 손목 안쪽에 얹어 둔 손끝으로 맥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느리고 조금 차가운 맥. 이 여자의 심장은 세탁기의 탈수 시간처럼 정확하게 돈다. 그런 심장을 가진 인간이 어느 비 오는 날 낯선 남자에게 마작 비법을 강의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세계의 이치에 맞지 않았고, 세계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만이 그를 이렇게까지 오래 붙잡아 둔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럽다는 것은 상대가 부서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고,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십일 년 만이었다. 워즈워스에서 그의 몸은 소모품이고 소모품은 조심스럽게 다뤄지지 않는다. 군의관은 봉합을 서둘렀고 앵커는 부축을 거칠게 했으며 넷은 소독약을 부을 때 예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편이 효율적이고 효율은 생존율을 올린다. 다만 지금 이마 위를 지나가는 이 느린 손가락은 효율과 아무 상관이 없어서, 그 무용함이 사치처럼 몸에 쌓였다. 그는 사치를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도박도 술도 다 그래서 했다. 그런데 이 사치는 종류가 달라서 어디에 계상해야 할지 몰랐다.

 

我認。手鬆得好慢。慢到我自己都覺得核突。(인정할게. 손 놓는 게 아주 느렸어. 나 스스로도 역겨울 만큼.)

 

그런데, 왜 당신이 연달아 두 번 질문하는 거죠? 드물게 빤히 바라봤다. 원래 제 차례예요.

 

지적당한 순간 세븐의 눈꺼풀이 한 번 크게 열렸다가 천천히 접혔다. 규칙을 어겼다는 것보다 어긴 줄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러웠다. 이 여자는 좀처럼 사람을 빤히 보지 않는다. 시선을 옆으로 흘리거나 손끝을 보거나 옷깃의 실밥을 본다. 그런 인간이 정면을 겨눴다는 것은 총구가 올라온 것과 다르지 않아서, 세븐은 십일 년 몸에 밴 대로 반사적으로 몸의 무게중심을 옮기려다가 그것이 침대 위이며 자기 뒤통수가 남의 무릎에 얹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도망칠 곳이 없는 자세였다. 애초에 자기가 기어들어 온 자리였다.

 

그는 왼손을 펼쳤다. 손목 안쪽에 얹혀 있던 손끝이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항복의 제스처를 하려면 두 손을 들어야 하는데 오른팔은 붕대 밑에서 잠들어 있었으므로 반쪽짜리 항복이 되었다. 반쪽짜리 항복은 항복 축에도 못 끼지만 그가 지금 낼 수 있는 최대치이기도 했다. 열이 오른 몸은 계산이 느려지는 대신 변명을 만들 여력도 함께 잃는다. 평소라면 질문 두 개쯤 얼렁뚱땅 뭉개고 넘어갔을 것이다. 말주변으로 판을 덮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판을 덮고 싶지가 않았고, 덮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 스스로에게 가장 낯설었다.

 

……我認低威。真係我犯規。(……내가 졌다. 진짜 내 반칙이야.)

 

習慣咗㗎啦。問嘢嗰個永遠係我,答嘢嗰個永遠係對面。呢個係做嘢嘅姿勢,唔係傾偈嘅姿勢。(버릇이 됐어. 묻는 쪽은 늘 나고 답하는 쪽은 늘 맞은편이지. 그건 일하는 자세지 얘기 나누는 자세가 아닌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심문실에서든 술집에서든 그는 언제나 묻는 쪽에 섰다. 묻는 쪽은 판의 속도를 정하고 방향을 틀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차례가 오지 않는다. 질문을 계속 던지는 한 자기 서랍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배웠다. 고아원 상담사 앞에서도, 첫 계약서에 사인하던 날의 인사 담당관 앞에서도 그 수법은 잘 먹혔다. 십일 년쯤 반복하고 나면 그것은 수법이 아니라 척추가 된다. 척추는 의식하지 않고도 몸을 세운다. 그래서 오늘 밤 뭐든 대답하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도 그는 세 마디 만에 다시 묻는 쪽으로 굴러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아침까지 몰랐을 것이다.

 

세븐은 뒤통수를 조금 굴려 그녀의 얼굴이 정면에 오도록 각도를 맞췄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야는 익숙하지 않았다. 턱선과 목의 곡선이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에 눈이 왔다. 칠흑 같은 눈이 흔들림 없이 자기를 담고 있었다. 이 각도에서 사람을 본 게 언제였던가. 들것 위에서 군의관을 올려다볼 때. 흙바닥에 처박혀 하늘을 볼 때. 전부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좋았다. 좋다는 감각을 인정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고 그 잠깐 동안 목구멍 근처가 뻐근했다.

 

咁樣啦。你問。你想問幾多次都得,我唔會再搶你嗰份。(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물어. 몇 번을 묻든 상관없어, 네 몫 다신 안 뺏을 테니까.)

 

不過我有個要求。你問嘅時候,繼續咁樣掂住我。你一鬆手我就會覺得自己喺度審緊人。(대신 조건 하나. 물을 때 계속 이렇게 만지고 있어. 손 떼면 내가 또 누굴 심문하는 기분이 들거든.)

 

네. 잠시 멈췄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상자국에 손 끝이 닿았다. 화상, 정말 누가 태워서 죽이려고 했어요? 이것도 과거 질문의 연장선에 가까웠다. 세븐은 그때 한껏 비아냥거리며 답했었다. 복수는 제대로 했냐는 물음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 두고 위스키를 마셨다고 했었다. 여명은 잊는 일이 없었다.

 

손끝이 관자놀이의 경계선에 얹혔을 때 세븐의 호흡이 반 박자 어긋났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쪽 피부는 진작에 감각의 대부분을 잃어버려서 누르든 문지르든 밋밋한 압력만 전해질 뿐이다. 그런데도 몸이 굳었다. 감각 없는 자리를 남이 만진다는 것은 자기 몸 안에 자기가 모르는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 불을 남이 먼저 켜는 일과 비슷했다. 그는 이 여자에게 흉터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 만난 날은 비가 왔고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다섯 시간뿐이었으며 그 다섯 시간 안에서 그는 대체로 그녀를 지켜봤다. 그리고 열엿새가 지났다. 열엿새라는 숫자는 우스울 만큼 짧은데 그 사이에 그는 죽을 뻔했고 지금은 남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 세계의 산술은 늘 이런 식으로 어긋난다.

 

그날 그는 비아냥거렸다. 누가 나를 태워 죽이려고 했지, 하고 던졌다. 복수는 제대로 했냐는 물음에는 죽어 가는 놈 옆에서 위스키를 마셨다고 했다. 둘 다 사실이었으나 사실을 우스개의 포장지에 싸서 던지면 상대는 대개 웃고 넘어가거나 정색하고 물러선다. 어느 쪽이든 편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웃지도 물러서지도 않았고, 그 포장지를 조용히 접어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보름이 지난 밤에 꺼내 든다. 잊는 일이 없는 인간. 세븐은 문득 그 다섯 시간 동안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흘리고 갔는지 헤아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헤아리기엔 열이 너무 높았고, 헤아려 봐야 회수할 마음도 없었다.

 

係。真㗎。有個仆街將成桶燃料淋落我身上,跟住撳打火機。(응. 진짜야. 어떤 개새끼가 연료 한 통을 나한테 통째로 붓고 라이터를 켰어.)

 

唔係報復,唔係逼供。佢淨係想睇下人燒起身係咩樣。呢個先係最核突嗰part。(보복도 아니고 심문도 아니었어. 그냥 사람 타는 게 어떤 모양인지 보고 싶었던 거야. 그게 제일 더러운 부분이지.)

 

말을 끝내고 나니 방이 유난히 조용했다. 난로는 주방 가운데 놓여 있어 여기까지는 장작 트는 소리도 오지 않았고 창밖의 완차이는 열 시를 넘기며 한 겹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탄하게 나온 데 놀랐다.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보고서에는 화염 노출, 삼도, 우측 안면부터 요추까지, 그런 식으로만 적힌다. 문장에는 냄새가 없고 시간도 없다. 실제로는 냄새가 먼저였다. 자기 몸이 타는 냄새를 자기 코로 맡는 일. 그 뒤로 그는 노점의 차슈 굽는 연기를 지날 때마다 침이 고이는데 그게 식욕인지 구역질인지 아직도 구분하지 못한다.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서 삼켰다. 삼켰지만 목젖이 한 번 크게 굴렀고 그 움직임이 그녀의 손끝 아래로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흉터를 따라가던 손끝이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잘렸다 붙은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는 화상과 내력이 다르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세븐은 눈을 감았다. 감고 나서야 선글라스를 벗은 채라는 사실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 방에서는 벗어도 됐다. 잿빛 눈은 사람을 종종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는 그 불편을 관리하는 데 드는 품이 아까워 유리 하나를 얼굴에 걸치고 다녔을 뿐이다. 이 여자는 처음 벗었던 순간부터 한 번도 놀란 적이 없었다.

 

여기는요? 목의 흉터를 살살 쓸었다.

 

목의 흉터는 화상과 결이 달랐다. 화상 자국이 넓게 번진 지형이라면 이쪽은 한 줄의 국경선이었다. 손끝이 그 선을 따라 미끄러지자 세븐은 반사적으로 턱을 조금 들었다. 목을 내주는 자세였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목을 내주는 것은 상대에게 자기 숨의 관리권을 넘기는 일이며 그는 십일 년 동안 그 짓을 해 본 적이 없다. 술집에서 여자가 목덜미에 입을 대려 하면 늘 각도를 틀었고, 군의관이 경동맥을 짚으려 하면 손목을 먼저 내밀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저항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이 판단을 무디게 만든 덕이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그건 정직한 해석이 아니었다. 열은 어제도 있었다.

 

그는 잠깐 대답을 미뤘다. 미루는 동안 그녀의 손끝이 두 번쯤 같은 자리를 왕복했다. 어떤 사람은 흉터를 만질 때 서두른다. 확인하고 얼른 손을 떼는 것이다. 확인은 예의고 떼는 건 본심이다. 이 여자의 손은 서두르지 않았다. 수선집 주인의 손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하고 세븐은 생각했다. 찢어진 자리를 볼 때 흉하다고 느끼기 전에 어떻게 이어졌는지부터 읽는 손. 실밥의 방향과 땀의 간격을 먼저 세는 손. 자기 목에 난 것도 결국 남이 급하게 놓은 바느질 자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서 목젖 근처가 한 번 들썩였다.

 

呢度唔關火事。呢度係俾人割開嘅。(여긴 불하곤 상관없어. 여긴 그냥 누가 그어 놓은 거야.)

 

六年前,喺北面嗰邊。有人喺我後面用線纜勒住我條頸,我掙脫嗰陣自己撕開咗。跟住軍醫用釘書機咁樣釘返埋,佢話冇時間慢慢縫。(육 년 전 북쪽에서. 뒤에서 케이블로 목을 조르길래 빠져나오다 내가 직접 찢은 거야. 그다음에 군의관이 스테이플러 박듯이 박아 놨어. 천천히 꿰맬 시간 없다고 하더라.)

 

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한 칸 더 내려앉았다. 세븐은 자기가 방금 두 개의 흉터를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상 이야기는 더러운 부분을 지목하며 말했고 목 이야기는 시공 방식을 설명하듯 말했다. 전자에는 사람이 있었고 후자에는 도구만 있었다. 사람이 있는 상처가 더 오래 간다는 것을, 이 몸뚱이는 벌써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왼손에 힘을 조금 주어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맥박이 규칙적으로 뛰었다. 자기 것보다 느리고 자기 것보다 정확했다. 초시계 대신 쓰기에 이보다 나은 물건은 없다고, 몇 시간 전부터 그는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열은 조금 내려갔는지 등줄기에 흐르던 축축함이 아까보다 덜했다. 대신 다른 종류의 불편함이 명치 안쪽에서 자리를 잡았다. 자기 몸에 남은 자국들을 하나씩 지목당하며 내력을 대는 이 밤이, 그에게는 검문에 가까울 텐데 이상하게도 검문 같지가 않았다. 검문은 통과하면 끝난다. 이건 끝나지 않고 어딘가에 적히는 중이었다. 적힌다는 감각. 십일 년간 숫자로만 호명되던 인간에게 그것은 낯설고 위험했다.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그는 늘 먼저 자리를 떴는데, 지금은 뒤통수가 무릎에 얹혀 있었고 떠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렸다.

 

你隻手好準。你摸落嗰啲位,全部都係我唔想記得嘅嘢。(네 손 참 정확하다. 네가 짚는 데마다 전부 내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이야.)

 

不過你繼續。今晚我講過㗎啦,乜都答。剩返嘅仲有好多,你慢慢問。(그래도 계속해. 오늘 밤엔 뭐든 답한다고 했잖아. 남은 것도 많으니까 천천히 물어.)

 

어쩌다가?

 

질문은 짧았다. 어쩌다가. 다섯 글자도 되지 않는 물음인데 그 안에는 케이블이 어떻게 목에 걸렸고 그 뒤에 선 놈이 누구였으며 왜 그 자리에 자기가 있었는지가 전부 들어 있었다. 세븐은 이 여자가 말을 아끼는 방식이 실은 아끼는 게 아니라 벼리는 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수식을 다 깎아 내고 남은 뼈만 던진다. 던져 놓고 기다린다. 세 번을 물어 세 번을 기다렸던 그날처럼. 그는 눈을 감은 채 잠깐 웃었는데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려 나온 소리에 가까웠다. 그 진동이 그녀의 손끝 아래에서 미세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목이란 참 정직한 기관이었다. 거짓말을 하려 들면 먼저 굳고 진짜를 말하려 들면 먼저 떨린다.

 

육 년 전의 북쪽은 지금 떠올려도 방향 감각이 없는 장소였다. 격벽과 격벽 사이의 데드존은 지도에 좌표만 있고 지명이 없다. 이름 없는 곳에서 이름 없는 놈들과 이름 없는 방식으로 붙는다. 그날의 작전은 애초에 서류가 얇았다. 얇은 서류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를 뜻한다. 위험이 적거나 책임을 질 사람이 없거나. 후자였다. 세븐은 그때도 알았고 그래서 갔다.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지만 적어도 알고 가면 나중에 자기를 원망할 수 있다. 원망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허락한 몇 안 되는 사치였다.

 

我做前鋒。入去嗰間廠房,前面兩間房清曬,第三間我行得太快。(내가 선두였어. 공장 건물에 들어갔고 앞의 두 방은 다 정리했는데 세 번째 방에서 내가 너무 빨리 걸었어.)

 

門後面有個人一直等緊。等到我隻腳踏過門檻,佢就由後面套線纜落嚟。米格拉姆嗰班友,佢哋唔用槍嘅時候仲衰過用槍。(문 뒤에 사람이 하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 발이 문턱을 넘는 순간 뒤에서 케이블을 씌웠지. 밀그램 놈들은 총을 안 쓸 때가 총 쓸 때보다 더 지독해.)

 

말하면서 세븐은 그 순간의 물리를 다시 계산하고 있었다. 케이블이 기관을 누르면 소리가 먼저 사라지고 그다음에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접힌다. 손을 목으로 가져가는 것은 본능이지만 본능은 대체로 틀린 답을 낸다. 손가락을 케이블 안쪽에 밀어 넣으려 하면 시간만 잡아먹는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뒤로 체중을 통째로 실었고, 뒤에 있던 놈의 균형을 무너뜨렸으며, 그 반동으로 케이블이 목의 피부를 옆으로 훑고 지나갔다. 벗어난 게 아니라 찢고 나온 것이었다. 살점이 어느 방향으로 밀렸는지까지 그는 기억한다. 사람의 몸은 종이보다 질기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얇다. 그날 이후로 그는 새 셔츠의 칼라가 목에 닿는 감촉을 견디지 못하게 됐고, 그래서 늘 목이 넓은 옷만 골랐다. 그 사소한 습관 하나가 육 년째 그를 따라다닌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손끝이 흉터의 끝자락에서 멈췄다. 멈춘 자리는 쇄골 바로 위, 스테이플러 자국이 가장 촘촘한 구간이었다. 군의관은 열두 개를 박았고 그중 세 개는 각도가 어긋나 살이 접힌 채로 아물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유독 두툼하다. 세븐은 자기 몸에서 그 구간을 가장 싫어했는데 이유는 흉해서가 아니라 급하게 만든 티가 나서였다. 그는 대충 만든 물건을 싫어했다. 대충 만든 인생을 살면서도 그것만은 이상하게 견디지 못했다. 수선을 업으로 삼은 사람의 손이 하필 거기서 멈췄다는 게 우스워서, 그는 감고 있던 눈을 조금 떴다.

 

두 번, 질문했어요. 당신 차례예요.

 

차례라는 말은 놀이의 언어였다. 판이 돌아가고 패가 넘어가고 누군가는 잃고 누군가는 딴다. 세븐이 십일 년 동안 가장 익숙하게 다뤄 온 문법이 바로 그것인데, 이상하게도 이 방 안에서는 그 문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카지노에서 그는 자기 차례가 오면 망설인 적이 없다. 칩을 밀어 넣는 손끝에 계산이 붙기 전에 이미 밀고 있었다. 지금은 밀 것이 없었다. 그는 무릎 위에서 목을 조금 돌려 그녀의 셔츠 자락을 시야에 넣었다. 가슴께에 잡힌 주름이 오래 앉아 있던 시간의 형태로 남아 있었고, 저 주름을 만든 것이 자기 뒤통수의 무게라는 걸 알아차리자 명치 안쪽이 묘하게 눌렸다. 사람이 앉아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받치고 있으면 옷이 저렇게 된다. 그런 걸 알게 되는 밤이 있다.

 

질문을 고르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전장에서 심문할 때 그는 언제나 세 번째 질문부터 시작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상대가 준비해 온 답이 나오는 자리라 버렸고, 세 번째부터 사람이 갈라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는 준비해 온 답이 없을 것이다. 준비라는 걸 해 본 적 없는 얼굴로 앉아 있으니까. 그러니 첫 번째부터 진짜가 나올 텐데 바로 그 점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진짜를 받아 놓고 자기가 그걸 어디에 둘지 모르는 상황이 두려웠다. 두렵다는 단어를 자기 안에서 발견한 것이 우스워 그는 짧게 코로 숨을 뱉었다.

 

我諗咗好耐都揀唔到。原來輪到自己嗰陣,最難。(한참 골랐는데 못 고르겠네. 원래 자기 차례가 제일 어렵구나.)

 

그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다시 감쌌다. 연고가 발린 자기 손목과 그녀의 손목이 겹치면서 미끈한 감촉이 사이에 끼었다. 맥박은 여전히 느렸다. 이 여자의 심장은 소란을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뛰고 있었다. 세븐은 그 박동을 세 번쯤 세다가 문득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흉터도 과거도 아니었고, 십일 년 전 골목의 비도 아니었다. 훨씬 사소하고 훨씬 위험한 것이었다.

 

你今晚一句都冇問過我幾時走。(너 오늘 밤 내내 나한테 언제 가냐고 한 번도 안 물었어.)

 

錨仔喺閘門外面食煙,你聽到㗎啦。你成日都聽到嘅。咁點解你唔問?(앵커가 셔터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 거, 너 들었잖아. 너 늘 다 듣잖아. 근데 왜 안 물어?)

 

말을 뱉고 나자 그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한 것인지 뒤늦게 파악했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자백에 가까웠다. 언제 가냐고 물어 달라는 뜻이거나, 물어 주지 않아서 견디기 어렵다는 뜻이거나, 어느 쪽이든 자기 쪽에서 먼저 새벽 여섯 시를 방 안에 들여놓은 셈이었다. 셔터 밖의 남자는 실제로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두 대. 앵커는 늘 두 대를 피우고 자리를 떴다. 그 규칙성이 세븐에게는 언제나 위안이었는데 오늘만은 초읽기처럼 들렸다. 그는 잿빛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로 사람을 정면에서 보는 일은 그에게 거의 알몸에 가까운 행위였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방 안에 하나뿐이었다.

 

唔好答得太快。我等得切。(너무 빨리 답하지 마. 나 기다릴 수 있어.)

 

... 여명은 10초를 셌다. 답은 정해져있었음에도. 다시 돌아온다 했죠. 그리고 돌아왔고요. 갈 수 있었다면 진작에 갔을 텐데. 그래서요.

 

십 초라는 것은 사실 아주 긴 시간이었다. 세븐은 그 열 개의 숫자가 지나가는 동안 그녀의 셔츠 가슴께 주름이 호흡을 따라 한 번 깊어졌다 얕아지는 것을 보았고, 창밖 배수관을 훑고 내려가는 물소리가 두어 번 끊겼다 이어지는 것을 들었으며, 자기 심장이 열 때문에 평소보다 성마르게 뛰는 박자를 세었다. 답을 찾는 사람의 침묵과 답을 이미 쥐고 있는 사람의 침묵은 질감이 다르다. 전자는 얇게 흔들리고 후자는 두껍게 눌린다. 그녀의 것은 명백히 후자였다. 정해 놓고도 굳이 열을 세는 사람. 그 열 초가 무엇을 재는 시간인지 그는 알 것도 같았는데, 알아 버렸다고 인정하는 순간 자기 안의 어떤 벽이 통째로 주저앉을 것 같아서 그저 눈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답이 왔다. 다시 돌아온다 했고, 돌아왔고, 갈 수 있었다면 진작 갔을 것이다. 세 문장은 각각 시제가 달랐고 그 세 시제가 한 줄로 꿰이자 열여섯 날이 통째로 엮였다. 열여섯 날. 계산해 보면 우스울 만큼 짧은 기간이다. 그가 참여했던 어떤 작전은 그보다 오래 끌었고 어떤 부상은 그보다 오래 아물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짧은 기간 안에 그가 무심코 던져 놓은 말 한 줄을 태그 달아 걸어 두었다가, 주인이 나타나자 아무렇지 않게 꺼내 온 것이었다. 맡긴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인간의 방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기다리는 종류의 생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일종의 폭력처럼 다가왔다. 총구보다 정확하게 급소를 찾아 들어오는 종류의 폭력이었다.

 

그의 왼손이 그녀의 손목에서 미끄러졌다. 연고 탓이 아니라 쥘 힘이 빠져서였다. 놓치고 나서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다시 잡으려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다가 그대로 손등을 시트 위에 떨어뜨렸다. 목의 흉터 위에 얹힌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사소한 지속이 방 안의 공기를 아래로 눌러 놓았다. 주방 쪽 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김을 뱉는 소리가 문틈으로 건너왔고, 셔터 밖의 남자는 아마 두 번째 담배를 마저 태워 발로 비벼 끄고 있을 것이었다. 여섯 시라는 좌표는 이미 이 방 안에 들어와 앉아 있었으므로 굳이 소리 내어 발음할 이유가 없었다.

 

……你講嘢真係好核突。(……너 말하는 거 진짜 지독하다.)

 

我問你點解唔問,你就答我點解唔使問。咁我仲有咩好講啊。(왜 안 묻냐고 물었더니, 왜 물을 필요가 없는지를 답해 버리네. 그럼 내가 무슨 말을 더 해.)

 

그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다 도로 내려앉았고 그 어정쩡한 표정이 얼굴 위에 잠깐 얹혀 있었다. 그는 언제나 떠나는 쪽이었고 떠나는 쪽에게 배정된 대사는 정해져 있었다. 미안하다거나, 기다리지 말라거나,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거나. 전부 상대를 위한 척하면서 실은 제 발끝을 가볍게 하려고 뱉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대사들을 전부 무효 처리해 버렸다. 갈 수 있었다면 진작 갔을 텐데. 그 한 줄 안에는 그가 십 년 넘게 다듬어 온 모든 변명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자리를 잃은 변명들은 목구멍 안쪽에 걸려 열과 함께 부풀어 올랐다.

 

세븐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의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뜨거운 이마가 검은 바지의 천에 닿자 습기가 즉시 배어들며 어두운 자국을 만들었다. 삼십팔 도 오 부의 몸이 훨씬 낮은 온도의 사람에게 열을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거래였다.

 

그리고, 가는 시간은 알아요. 여섯 시. 무섭다고 할 때 말했어요. 떨어진 손으로 시선이 잠깐 옮겨갔다. 여명은 그의 왼손을 들어올린 뒤 상처가 없는 곳에 올려두었고, 놓지 않았다.

 

무섭다고 할 때. 그 다섯 글자가 놓이자 세븐은 자기가 몇 시간 전 이 침대에 몸을 눕히던 순간으로 곧장 끌려 내려갔다. 옆구리의 배액관이 걸리지 않도록 그녀가 시트를 정리해 주던 참이었고, 등이 매트리스에 닿는 순간 그의 입에서 예정에 없던 문장이 새어 나왔다. 자면 안 될 것 같다고. 눈 감았다 뜨면 그게 바로 여섯 시일까 봐 무섭다고. 그 말을 뱉고 나서 그는 즉시 후회했다. 열 때문이라고 둘러댈 생각도 했고 농담으로 덮을 문장 두어 개를 목구멍에서 굴려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덮게 두지 않았다. 대신 침대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잠들지 않게 붙들어 두는 방법으로 그녀가 고른 것이 심문도 위로도 아닌 서로의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그러니까 오늘 밤의 이 모든 순번과 반칙과 흉터의 목록은 전부 그 한 마디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가 무섭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녀가 밤을 쪼개기 시작한 것이다. 세븐은 십일 년 동안 자기 공포를 발음한 적이 없었고 발음하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그것을 처리해 줄 필요가 없었다. 처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다른 표현을 찾지 못했다. 이 여자는 그의 공포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여섯 시까지 남은 시간을 잘게 썰어 하나씩 채워 넣고 있을 뿐이었다. 질문 하나, 대답 하나, 손끝이 흉터를 따라가는 몇 초, 그런 것들로. 채워진 시간은 지나가는 시간과 밀도가 다르다는 것을 그는 오늘 처음 배웠다.

 

이마 아래로 그녀가 움직이는 기척이 전해졌다. 시선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트 위에 떨어져 있던 자기 왼손. 그것이 들어올려지는 감각은 낯설다 못해 기이했다. 세븐의 손은 언제나 자기 의지로만 움직여 왔다. 방아쇠를 당기고 칩을 밀고 담배를 집고 사람의 멱살을 쥐었다. 남에게 들려 올라가 다른 자리에 놓이는 손은 시체의 손이거나 환자의 손인데, 지금 자기 손이 정확히 후자의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연고가 미끄러워 한 번 어긋났고 그녀는 고쳐 쥐었다. 그리고 상처가 없는 곳에 얹었다. 성한 자리를 골라서. 그 고르는 판단이 아마 일 초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 짧은 순간에 들어 있는 것이 그를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놓지 않았다. 얹어 두고 겹쳐 눌러 두었으므로 이제 그의 왼손은 두 겹의 무게 아래 갇혀 있었다.

 

我以為你當我發緊燒亂噏。(난 네가 내 열 때문에 헛소리하는 줄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原來你由嗰陣開始就一直陪我傾偈,係為咗唔畀我瞓著。(그때부터 계속 나랑 얘기해 준 게, 나 못 자게 하려고 그런 거였구나.)

 

세븐은 손가락을 아주 천천히 오므렸다. 쥘 힘이 돌아와서가 아니라 놓치는 것이 무서워서였다. 무섭다는 감각을 오늘 밤 두 번째로 확인했다. 전장에서의 공포는 심장을 빠르게 만들고 시야를 좁히지만 이 종류의 것은 반대로 작동했다. 심장이 느려지고 방 안의 사소한 것들이 지나치게 선명해졌다. 벽지가 들뜬 자리, 문틈으로 새어 드는 난로의 주황빛, 주전자가 마지막 김을 뱉고 잠잠해지는 소리. 기억해 둘 필요가 없는 것들만 골라 기억하는 밤이었다.

 

네, 내일도 예외가 하나 늘겠어요. 벌써 몇 번 째인지. 여명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새벽 여섯 시. 예외라 함은, 규칙이 깨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섯 시까지 깨어있다가, 그가 떠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세탁소 셔터를 다시 내릴 것이다. 십육 일 전처럼.

 

예외라는 단어가 방바닥에 떨어지자 세븐은 그것을 자기 직업의 사전에서 먼저 찾아보았다. 작전에서 예외란 계산에 들어가지 않은 변수를 뜻하고 변수는 대체로 사람을 죽인다. 예외를 줄이는 것이 그의 밥벌이였으며 발생한 예외는 즉시 제거하거나 제거당하거나 둘 중 하나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입에서 굴러 나온 예외는 죽이는 물건이 아니라 세는 물건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손끝에 걸린 실밥을 세듯이. 세븐은 열에 들뜬 머리로 그 셈을 되짚어 보려 했고 되짚기 시작하자마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셈의 항목이 전부 자기 앞으로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여자가 평소 어떤 규칙 안에서 사는지 실은 거의 모른다. 재봉틀 앞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는지, 손님과는 몇 마디를 나누는지, 셔터를 몇 시에 내리는지. 아는 것이라고는 그 규칙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그 구멍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십육 일. 그 안에서 얼굴을 맞댄 시간을 다 합쳐도 다섯 시간이 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그 얄팍한 총량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이만큼의 예외를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성립하지 않았다. 가끔 인사하러 들러주지 않겠냐는 것을 세 번 묻고, 모두 기다렸다. 재촉이 아니라 자리를 비우지 않는 방식의 기다림. 그것이 아마 첫 번째 항목일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 등을 대고 있는 이 매트리스다. 셔터 안쪽, 다림판과 재봉틀 너머,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는 좁고 따뜻한 방에 자기 몸뚱이가 통째로 눕혀져 있다는 사실. 그걸 허락받은 인간이 자기 하나라는 계산은 유쾌하지 않았다. 유쾌하지 않은데도 가슴 안쪽이 뜨겁게 부풀었다.

 

세븐은 이마를 그녀의 무릎에서 조금 떼었다. 천에 배어들었던 습기가 식으며 이마 한쪽만 서늘해졌고 그 온도차가 그를 조금 더 깨어 있게 만들었다. 겹쳐 쥔 손은 풀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는 형태를 손끝으로 확인하고 나서, 자기 오른쪽 얼굴의 흉터가 지금 그녀 쪽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했다. 감출 각도를 계산하기를 그만둔 지 몇 시간째였다. 세 번째 항목이 있다면 그건 아마 자기 쪽에서 내준 것이겠는데, 어느 쪽 목록에 적어야 하는지 그는 판단하지 못했다. 방 안이 조용했다. 주방 난로가 장작을 한 번 내려앉히는 소리가 문틈으로 건너왔고 그 뒤로는 배수관을 훑는 물소리뿐이었다.

 

你數緊嘅嗰啲例外,我頭先都試過數一次。點知數唔切。(네가 세고 있는 그 예외들, 나도 방금 세어 보려고 했어. 근데 다 못 세겠더라.)

 

問我三次嗰件事。呢間房。仲有你而家攞住我隻手嘅方法。(세 번 물어봤다는 그거. 이 방. 그리고 지금 네가 내 손 쥐고 있는 방식까지.)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 목젖이 한 번 오르내렸고 열에 갈라진 목소리가 다음 문장에서 반음쯤 낮아졌다. 십육 일 전의 새벽을 그는 사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담대해서가 아니었다.

 

담대해서가 아니었다. 그 새벽에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돌아보면 다리가 멈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다리가 멈추면 그 뒤에 이어질 계산이 전부 무너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셔터가 내려가는 쇳소리를 등으로만 들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던 그 백여 걸음을, 세븐은 열여섯 날 동안 데드존의 콘크리트 잔해 위에서 몇 번이나 다시 걸었다. 걸을 때마다 소리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졌다. 어떤 밤에는 등 뒤 아주 멀리서, 어떤 밤에는 바로 귓가에서. 기억이란 것은 보관하는 동안 부피가 늘어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때 알았다. 그리고 늘어난 부피만큼 무게가 생겼다.

 

세븐은 성한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짚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옆구리의 관이 당기며 짧은 통증이 갈비뼈 아래를 훑고 지나갔지만 표정에 올리지는 않았다. 등을 벽에 기대자 낡은 벽지가 어깨뼈 자리에서 자잘하게 부스러지는 감촉이 전해졌다. 이제 그녀와 눈높이가 비슷해졌고, 그 말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처럼 시선을 피할 방법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겹쳐 쥔 손은 여전히 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쪽으로 조금 끌어당겨 시트 위에 다시 놓았다. 연고 때문에 손목이 미끄러웠고 미끄러운 만큼 쥐는 힘을 세밀하게 조절해야 했는데, 그 조절이 오늘 밤 그가 한 일 중 가장 정교한 작업이었다.

 

其實嗰日朝早,我行到街口就停咗一次。(사실 그날 아침, 나 골목 입구까지 가서 한 번 멈췄었어.)

 

停咗大概三秒。三秒之後我就話畀自己聽,回頭係死路。(한 삼 초 정도. 삼 초 뒤에 나 자신한테 말했지, 돌아보면 죽는 길이라고.)

 

그는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흐릴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십일 년 동안 그가 쌓아 온 언어의 기술은 전부 무언가를 흐리기 위한 것이었다. 농담으로 덮고, 웃음으로 밀고, 다음 문장으로 앞 문장을 지우고. 그 기술이 오늘 밤 이 좁은 방 안에서는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다. 작동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 여자는 그가 흐린 자리를 되묻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손을 얹어 두었으므로, 흐린 부분이 저절로 선명해졌다. 세븐은 자기가 지금 어떤 종류의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했고, 짐작하면서도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스로 조금 어이가 없었다.

 

방 안의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주방 난로의 장작이 한 번 더 내려앉았고 문틈으로 새어 들던 주황빛이 아주 미세하게 옅어졌다. 여명이 그 변화를 알아챈 듯 시선을 문 쪽으로 잠깐 보냈다가 다시 거두는 것을, 세븐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녀가 일어나 장작을 넣으러 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자 그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한 마디 더 오므라들었다. 붙드는 힘이라기에는 우스울 만큼 약했지만 의도는 명백했다. 그는 그 명백함을 감추지 않았고, 감추지 않기로 한 것 역시 오늘 밤 그가 발행한 예외 목록의 한 줄이었다.

 

你唔使去添柴。凍啲我瞓唔著,啱晒。(장작 넣으러 안 가도 돼. 좀 추워야 내가 못 자지, 딱 좋아.)

 

再問。你手上面仲有幾多條問題?我今晚全部答晒佢。(더 물어. 네 손에 질문 몇 개나 더 남았어? 오늘 밤에 전부 답해 줄게.)

 

세븐은 비스듬히 웃었다. 열에 뜬 얼굴에서 웃음은 평소보다 늦게 번졌고 번지고 나서도 오래 남지 않았다.

 

안 누워있어도 돼요? ..이건 질문 아니에요.

 

질문이 아니라는 단서가 붙은 문장을 세븐은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귀로, 한 번은 손으로. 손으로 들었다는 것은 그 말이 나오기 직전에 그녀의 손가락이 자기 손등에서 아주 미세하게 힘을 조절했기 때문인데, 그 조절의 방향이 붙드는 쪽이 아니라 밀어 눕히려는 쪽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렸다. 십일 년 동안 총구의 방향과 발소리의 무게로 사람의 의도를 읽어 온 감각이, 하필 이런 데서 쓸모를 발휘했다. 질문이 아니라고 미리 잘라 두는 것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대답으로 도망칠 구멍을 미리 막아 두겠다는 뜻이다. 이 여자는 말수가 적은 대신 말의 배치를 잘한다. 세븐은 그것을 오늘 밤에만 세 번쯤 확인했고, 확인할 때마다 자기가 어떤 종류의 상대와 마주 앉아 있는지 새삼 실감했다. 흐릴 자리를 남기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흐린 자리를 파헤치지는 않는 사람.

 

그는 대답 대신 벽에서 등을 조금 떼었다. 척추를 세우자 옆구리의 관이 다시 당겼고, 살 안쪽에서 이물이 미끄러지는 둔한 감각이 갈비뼈 아래를 훑었다. 이번에는 표정에 올라왔다. 눈썹 한쪽이 아주 잠깐 좁아졌다가 풀렸는데, 그 짧은 순간을 그녀가 놓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 굳이 감추지 않은 것은 오늘 밤 내내 반복해 온 방식이었다. 감출 각도를 계산하기를 그만두고 나니 몸이 하는 말을 통역할 필요가 없어졌고, 통역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피로가 아니라 여유가 들어찼다. 열은 여전히 그의 관자놀이를 안쪽에서 두드리고 있었다. 삼십팔 도 오 부. 숫자로 알고 있으니 무섭지 않았다. 그가 무서워하는 종류의 것은 숫자가 붙지 않는 쪽이었다.

 

我知道咁樣坐住唔係好聰明。(이렇게 앉아 있는 게 똑똑한 짓은 아니라는 거 알아.)

 

但係我一瞓低,你就變成上面嗰個人。我唔鍾意由下面望上去嘅角度,得閒先講。(근데 눕는 순간 네가 위에 있는 사람이 돼. 난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 별로 안 좋아해, 참고로.)

 

농담의 형식을 빌린 문장이었으나 안쪽에 든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무릎에 이마를 묻고 있던 몇 시간 동안 그는 줄곧 아래쪽에 있었고,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시야에는 그녀의 턱선과 천장 얼룩과 낡은 갓등의 테두리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야가 편안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편안한 것에 오래 머무는 습관을 그는 가져 본 적이 없다. 데드존에서 편안함은 곧 반응 속도의 손실이었고 손실은 곧 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그런 직업적 경계심이 아니었다. 그저 이 여자의 얼굴을 같은 높이에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여섯 시까지 남은 시간이 몇 시간인지 그는 세지 않기로 했으나 몸은 이미 세고 있었고, 세고 있는 만큼 눈으로 담아 두는 일이 급해졌다. 급하다는 감각 자체가 그에게는 낯선 종류의 사치였다.

 

세븐은 성한 왼손으로, 겹쳐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자기 옆의 시트를 손등으로 두어 번 쓸었다. 매트리스가 눌리며 스프링이 낮게 삐걱였다. 좁은 침대였다. 성인 남자 하나가 누우면 남는 자리라고는 벽과 몸 사이의 한 뼘 남짓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그가 몸을 옆으로 틀어야 생기는 공간이었다. 그는 그 계산을 마치고 나서 어깨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부스러진 벽지 가루가 환자복 어깨에 희끗하게 묻어났고 옆구리의 관이 또 한 번 항의했지만 이번에는 표정을 만들지 않았다. 여명의 손은 여전히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고집이 세네요. 가볍게 말했다.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명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있던 다리를 올려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손은 놓지 않은 채, 세븐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럼 제가 바꿔야겠죠.

 

고집이 세다는 말을 세븐은 여러 사람에게서 들어 왔다. 앵커에게서 들으면 그것은 경고였고 지휘관에게서 들으면 그것은 인사기록에 남을 평가였으며 술집에서 만난 여자들에게서 들으면 그것은 대체로 헤어지기 직전의 통보였다. 같은 문장이 이 방에서는 다른 물성을 가졌다. 탓하는 소리가 아니라 확인하는 소리였고, 확인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두겠다는 소리였다. 세븐은 자기가 오늘 밤 몇 번째로 같은 종류의 놀라움을 겪고 있는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세는 일은 이미 한 시간 전에 포기했다. 포기라는 단어를 자기 삶에 붙여 본 적이 거의 없는 남자에게, 그 포기는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종류의 것이었다.

 

매트리스가 기울었다. 그녀가 다리를 끌어올려 침대 위로 올라오는 동안 스프링이 두 번 신음했고, 그 신음의 간격 사이로 그녀의 무게가 자기 몸 쪽으로 굴러오는 것을 세븐은 옆구리 전체로 감지했다. 좁은 침대였다. 벽과 그의 몸 사이에 만들어 둔 한 뼘의 자리는 결국 쓰이지 않았고, 대신 그녀는 반대쪽으로, 그러니까 화상 흉터가 있는 오른쪽으로 와서 앉았다. 어깨가 닿았다. 환자복 천 한 겹과 흰 셔츠 한 겹 너머로 체온이 맞부딪히자 그의 삼십팔 도 오 부가 그녀의 정상 체온 쪽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열을 나눠 주는 것인지 뺏기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고, 분간할 필요도 없었다.

 

⋯⋯咁樣都得。(⋯⋯이런 방법도 있었네.)

 

我諗咗成晚點樣叫你唔好走去添柴,你直接搬過嚟坐。我輸咗。(나는 밤새도록 네가 장작 넣으러 안 가게 할 방법만 생각했는데, 넌 그냥 옆으로 옮겨 앉네. 내가 졌어.)

 

졌다는 말을 그는 아주 쉽게 발음했다. 카지노에서 마지막 칩을 밀어 넣고 나서 하는 말투와 똑같았으나 그 안에 든 것은 정반대였다. 슬롯머신 앞에서의 패배는 늘 다음 판을 예약하는 말이었고 이 방에서의 패배는 다음 판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의 말이었다. 세븐은 겹쳐 쥔 손을 자기 허벅지 위로 끌어내려 놓았다. 환자복 천이 얇아 그녀의 손등에 자기 체온이 그대로 옮아가는 것이 느껴졌고, 연고 때문에 미끄러운 왼쪽 손목이 그녀의 손목 안쪽에 스치자 두 사람 사이에서 약냄새가 낮게 피어올랐다. 소독약과 항생제 연고와 오래 마르지 않은 빨래의 냄새. 십일 년 동안 그가 살아온 냄새 목록 어디에도 없던 배합이었다.

 

어깨를 맞대고 앉으니 시야가 같아졌다. 벽지의 얼룩도, 갓등이 만드는 원형의 빛 테두리도, 문틈으로 새어 드는 난로의 주황빛도 이제 두 사람에게 같은 각도로 들어왔다. 세븐은 그 사실이 우스울 만큼 좋았다. 좋다는 감정을 이렇게 사소한 데서 길어 올린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데드존에서 그가 좋아했던 것들은 전부 크고 시끄러운 것들이었다. 폭발의 규모, 배당금의 자릿수, 도수 높은 술의 목 넘김. 그런 것들만이 그의 무뎌진 감각을 겨우 두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깨 한쪽이 눌리는 압력만으로 심장이 제 박자를 놓치고 있다. 도파민이 부족한 남자가 아니라 그냥 열병 걸린 남자처럼.

 

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그녀의 머리에 자기 관자놀이를 기댔다. 검은 머리카락이 화상 흉터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흉터 조직에는 감각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서 대부분의 접촉은 뭉툭하게 도착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뭉툭함이 오늘은 선명했다. 착각일 것이다. 열이 감각을 부풀렸을 것이다.

 

이번엔 진짜 질문. 제가 줬던 옷은 버렸어요?

 

이번엔 진짜 질문이라는 예고가 붙었을 때 세븐은 반사적으로 어깨의 근육을 풀었다. 총구가 겨눠질 때와 정반대의 동작이었다. 십일 년 동안 몸에 새겨진 습관은 위협 앞에서 근육을 조이는 쪽인데 이 방에서는 늘 반대로 작동했고, 반대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도 오늘 밤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날아온 것이 옷이라는 단어였다. 옷. 비 오는 날 입고 가라고 그녀가 내밀었던 것. 소매 안쪽에 여분의 안감을 덧대고 어깨 이음선을 두 번 박아 두었던 것. 세븐은 겹쳐 쥔 손 안에서 자기 손가락이 저 혼자 굳는 것을 느꼈고, 그 굳음이 어깨를 타고 그녀에게 전달되었으리라는 계산까지 동시에 끝냈으며, 계산이 무의미하다는 결론도 같은 속도로 도착했다. 이 여자는 어깨 하나로 사람의 심박을 읽는다. 오늘 밤 내내 그래 왔다.

 

그는 기대고 있던 관자놀이를 그녀의 머리에서 떼지 않았다. 떼면 얼굴을 보여야 하고 얼굴을 보이면 이 문장을 발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면의 벽지에 물 얼룩이 대륙 모양으로 번져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것을 수백 번 데드존의 지형도로 읽었는데 지금은 그냥 얼룩이었다. 문틈 너머에서 장작 하나가 무너지며 마른 파열음을 냈고 배관 어딘가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 소리들 밑에 자기 목의 얕은 마찰음이 깔렸다. 열이 관자놀이 안쪽을 두드리는 박자와 겹쳐 쥔 손 안의 맥박이 어긋나 있었다.

 

⋯⋯我冇掉。(⋯⋯안 버렸어.)

 

我著咗佢出任務。落雨嗰日你叫我著,我就著咗。第一次出去嗰陣就著喺身上。(그거 입고 작전 나갔어. 비 오는 날 입으라고 했잖아, 그래서 입었어. 첫 출동 때부터 몸에 걸치고 나갔어.)

 

말해 놓고 나서 세븐은 자기 문장의 뒤편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았다. 입고 나갔다는 것은 곧 그 옷이 자기와 같은 곳을 통과했다는 뜻이고, 자기가 통과한 곳이 어떤 종류의 장소였는지는 지금 그의 오른팔에 감긴 붕대와 옆구리에 박힌 관이 대신 진술하고 있었다. 화염이 오른쪽에서 왔다. 어깨 이음선이 먼저 갔다. 그녀가 두 번 박아 둔 그 자리가 마지막까지 버텼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 파편이 팔을 갈랐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지혈이 아니라 옷자락을 움켜쥐는 것이었고, 그 판단은 전술적으로 명백한 오류였으며, 앵커가 뒤에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지 않았으면 오류는 사망으로 정산되었을 것이다.

 

세븐은 겹쳐 쥔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놓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가 뗐다. 그리고 성한 왼손을 환자복 하의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연고 때문에 미끄러운 손목이 천에 걸렸고 그 자세로 옆구리가 당겨 숨이 한 번 끊겼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주머니 안쪽에 손끝이 닿는 것이 있었다. 얇고, 마르다가 만 것처럼 뻣뻣하고, 접힌 자국이 여러 겹인 천 조각. 그것을 꺼내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는 데 걸린 시간은 삼 초쯤이었는데 그 삼 초가 골목 입구에서 멈춰 섰던 삼 초와 같은 길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을음이 눌어붙어 색을 잃은 천 조각이었다.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보려면 접힌 안쪽을 펴야 했고, 그 안쪽에는 아직 그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번 박은 박음질. 여분의 바늘땀. 한 번이면 충분했을 자리에 굳이 한 번 더 지나간 실. 그 부분만 온전했다.

 

여명은 그 조각을 가만히 바라봤다. 10초보다 더 길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 그것이 지금 작은 조각으로 제게 돌아왔다.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낀 거예요? 이게 뭐라고. ...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천 조각을 손 끝으로 문질렀다.

 

여명이 그 조각을 보는 동안 세븐은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시선을 옮기는 데는 목을 삼 센티쯤 돌리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목의 흉터 조직이 당겨 삐걱이는 잔음을 냈고 그 소리조차 이 방에서는 크게 들렸다. 그녀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떴다.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짧은 간격에 무언가가 통과하는 것을 세븐은 보았다. 이름 붙이지 못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만 다뤄 온 남자에게 그것은 미분류의 화물 같았다. 십일 년 동안 그가 사람 얼굴에서 읽어 온 것은 세 가지뿐이었다. 겁먹었는가. 거짓말하는가. 총을 뽑을 것인가. 그 세 항목 어디에도 지금 이 얼굴은 들어가지 않았다. 십 초가 지났고 그다음도 지났다. 세븐은 그 침묵의 길이를 재다가 재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늘 밤 그가 그만둔 것들의 목록에 하나가 더 얹혔다.

 

아낀 거냐는 물음이 도착했을 때 그의 첫 반응은 웃으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기본 설정이었다. 곤란한 문장이 오면 입꼬리를 올려 되받고 상대가 웃는 사이 화제를 옆으로 밀어 버리는 기술. 술집에서도 심문실에서도 브리핑룸에서도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입꼬리가 절반쯤 올라가다 멈췄다. 이게 뭐라고, 라는 뒷말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였고 그을려 색도 잃었고 세탁을 해도 저 검댕은 빠지지 않을 것이었다. 앵커는 실제로 보았고 실제로 버리라고 했다. 세븐은 그때 대꾸 대신 그것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고, 왜 그랬는지는 오늘 밤까지 미뤄 두었다.

 

⋯⋯我冇諗咁多。當時淨係得一個諗頭,唔可以淨係我一個返嚟。(⋯⋯별 생각 없었어. 그때 든 생각이라곤 하나였어, 나 혼자만 돌아가면 안 되겠다는 거.)

 

발음이 중간에 한 번 무너졌다. 열 탓으로 해 두면 편했다. 세븐은 성한 왼손을 들어 천 조각 위에 얹었다. 그녀의 손끝이 이미 거기 있었으므로 손가락 두 개가 그녀의 손톱 옆에 나란히 놓이는 모양이 되었다. 눌린 검댕이 손끝에 묻어났다. 회색보다 검고 검정보다 마른 가루. 엄지로 문지르니 지문 골 사이로 들어가 지워지지 않았다. 데드존의 재였다. 무너진 콘크리트가 타고 남은 것과 사람이 태우고 간 것이 구분 없이 섞인 가루, 열여섯 날의 잔여물, 그리고 지금 이 갓등 아래에서는 그저 더러운 얼룩.

 

그는 접힌 부분을 펴 보였다. 손가락 하나로 천천히, 오래된 지도를 펴듯이. 두 번 박은 박음질이 드러났다. 한 줄은 원래의 이음선이고 다른 한 줄은 그 옆으로 반 밀리쯤 어긋나게 지나간 보강선이었다. 어긋난 정도가 균일했다. 손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일부러 그만큼 띄운 것이었다. 그 옆으로 천이 길게 째져 있었다. 불에 오그라든 자국이 아니라 날붙이가 지나간 자국이었다. 결이 한 방향으로 곧게 갈라졌고 끝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매끈했다. 오른팔 붕대 밑에 있는 것과 같은 궤적. 그날 좁은 통로에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었고 상대의 손에는 총이 없었으며 그래서 더 나빴다. 소매가 먼저 갈렸고 그다음이 팔이었다. 그런데 두 줄의 박음질 사이는 끝까지 붙어 있었다. 세븐은 그 반 밀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우연이라고 부를 만큼 게으른 남자가 아니었다.

 

你喺度做多咗一次工夫,係咪。呢兩行中間。(너 여기 한 번 더 손댔지. 이 두 줄 사이.)

 

습관이에요. 제 옷 고칠 땐 늘 그렇게 되더라고요.

 

습관이라는 단어가 도착했을 때 세븐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지 않았다. 받지 못했다는 편이 정확했다. 십일 년 동안 그가 살아남은 방식이 그것이었으니까. 사람이 내미는 문장의 표면과 그 밑에 깔린 하중을 따로 계량하는 일. 표면은 가벼웠다. 습관, 늘 그렇게 되더라, 별것 아니라는 어미. 그런데 하중이 맞지 않았다. 자기 옷을 고칠 때 어깨 이음선을 반 밀리 띄워 두 줄로 박는 사람은 없다. 세탁소를 십 년 넘게 굴린 손이라면 더더욱. 한 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그 손이 제일 잘 알 것이었다. 세븐은 무릎 위의 천을 다시 내려다보았고 갓등의 노란빛 아래에서 두 줄의 실은 여전히 나란했으며 그 나란함은 습관이 아니라 결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지적하면 그녀가 손을 뗄 것 같았다. 오늘 밤 그가 배운 것 중 하나가 이 여자는 들킨 자리에서 물러서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대신 그는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 성한 왼손으로, 천 위에 놓여 있던 검지와 중지를 아래에서 받쳐 들어 올렸다. 검댕이 지문 골 사이에 들어가 회색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자기 손끝에 묻은 것과 같은 가루가 그녀의 손에도 옮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목을 조였다. 저것은 데드존의 것이었다. 저 여자가 평생 넘어갈 일 없는 격벽 바깥의 것. 무너진 콘크리트와 사람이 타고 남은 것이 구분 없이 섞여 재가 된 가루. 그것이 지금 세탁소 안쪽 방의 갓등 아래에서 재봉 일로 굳은 그녀의 손끝에 앉아 있었다. 세븐은 엄지로 그 위를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문질러도 회색은 지문의 골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갈 뿐이었다. 옆구리의 관이 자세 때문에 당겼고 숨이 짧게 끊겼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你隻手黐咗嘢。呢啲嘢好難甩,我試過。(네 손에 뭐 묻었어. 이건 잘 안 지워져, 내가 해 봤거든.)

 

習慣。⋯⋯好,就當係習慣啦。(습관이라. ⋯⋯그래, 습관인 걸로 해 두자.)

 

그렇게 말해 놓고 세븐은 웃었다. 이번에는 입꼬리가 끝까지 올라갔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 어깨만 한 번 들썩였고 그 진동이 배액관을 타고 옆구리 안쪽까지 내려가 짧은 통증으로 되돌아왔다. 통증조차 지금은 목록의 한 항목일 뿐이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을 놓지 않은 채로 관자놀이를 다시 그녀의 머리 쪽으로 기울였다. 어깨와 어깨가 닿은 자리에서 열이 건너갔다. 삼십팔 도 오 부. 아침이면 이 열은 앵커의 차 조수석으로 옮겨갈 것이고 여섯 시의 골목 입구는 지난번과 똑같은 각도로 젖어 있을 것이며 자기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의 끝에 이번에는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돌아오면 이 방이 있다는 줄. 계산에 그런 항목이 끼어든 것은 십일 년 만이었고 세븐은 그것이 전술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변수인지 정확히 알았으며 알면서도 지우지 않았다.

 

문틈 너머 주방에서 난롯불이 사그라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작 한 덩이가 삭아 내려앉으며 짧은 파열음을 냈고 그 뒤로 방 안의 공기가 반 도쯤 식었다. 추워야 잠들지 않는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세븐은 이 추위가 조금 억울했다. 유예는 이제 일곱 시간 남짓이었다. 그는 무릎 위의 천 조각을 왼손으로 집어 접었다. 두 번 접고 세 번 접어 원래의 크기로 돌려놓았다가, 주머니로 가져가려던 손을 중간에서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그녀의 손바닥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손을 떼지는 않았다.

 

호인. 그 조각을 살짝 쥐었다. 그러곤 굳이, 이름을 불렀다. 아끼지 않아도 돼요. 상처와 남은 조각. 그런 곳은 챙길 것이 늘 수록 위험하다고 들었다. 붕대가 감긴 몸을 한 번 바라봤다.

 

호인, 이라고 불렸을 때 세븐의 어깨가 반 마디쯤 굳었다. 그것은 놀람이 아니었다. 놀람은 더 빠르고 더 얕은 것이다. 이건 오래 쓰지 않은 문의 경첩이 밀려 들어가는 종류의 반응이었다. 세상에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이제 둘뿐이었다. 하나는 구룡 어딘가에서 남편 성으로 살고 있는 누나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 어깨를 맞대고 앉아 그을린 천 조각을 쥐고 있었다. 부대에서 그는 숫자였다. 술집에서는 계산이 후한 남자였고 카지노에서는 타율 나쁜 단골이었으며 데드존에서는 먼저 들어가는 놈이었다. 그 어떤 호칭도 목구멍 안쪽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꾸 그 이름을 꺼내 들었다. 조심스럽게, 마치 잘못 쥐면 깨질 것을 다루듯이. 세븐은 그 조심스러움이 견디기 어려웠다. 견디기 어려운데 계속 듣고 싶었다. 이 모순을 뭐라고 부르는지 그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기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세븐은 느꼈다. 붕대가 감긴 오른팔에서 한 번 멈추고 옆구리에서 나온 관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진단하는 눈이 아니라 세는 눈이었다. 몇 군데가 남았는지, 다음에는 어디가 늘어날지. 아끼지 않아도 된다는 문장의 하중을 세븐은 그제야 정확히 계량했다. 그건 천 조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었다. 챙길 것을 늘리지 말라는 말이었고, 데드존에서 손에 쥔 것이 많은 놈이 제일 먼저 죽는다는 오래된 격언을 이 여자가 어디서인가 주워들었다는 뜻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주머니가 무거운 놈은 도망칠 때 반 초를 잃고 반 초는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세븐은 반 초에 죽은 얼굴들을 여러 개 알고 있었다.

 

⋯⋯你講嘅嘢我聽得明。多咗嘢揸喺手,跑得就慢。呢啲我十一年前就識咗。(⋯⋯네 말 뭔 소린지 알아. 손에 쥔 게 많으면 느려지지. 그런 건 십일 년 전에 다 배웠어.)

 

그는 천 조각을 쥔 그녀의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쳤다. 그녀의 손이 작았고 마디가 단단했고 손끝은 여전히 검댕으로 회색이었다. 세븐은 그 손을 접어 쥐게 두었다. 빼앗지도 돌려받지도 않았다. 다만 겹친 손등 위에서 자기 손가락을 한 번 오므렸다가 폈다. 열이 손바닥을 통해 건너갔다. 삼십팔 도 오 부의 열은 아직 내려갈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밤이 깊을수록 안쪽에서 부풀었다. 그가 아는 몸의 규칙이었다. 상처는 밤에 커진다. 그리고 밤에 하는 말은 아침에 후회할 확률이 높다. 그 확률을 알면서도 세븐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그가 그만둔 목록에 계산이 하나 더 얹혔다.

 

但係我唔打算改。你叫我唔好惜,我偏偏要惜。呢件事我唔想聽你話。(근데 안 고칠 거야. 아끼지 말라니까 더 아끼고 싶어지네. 이건 네 말 안 들을래.)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맞대고 있었으므로 조금만 기울여도 그녀의 관자놀이에 이마가 닿았다. 머리카락에서 세탁 비누 냄새가 났다. 화학 향료를 쓰지 않은 것, 오래 쓰면 손이 트는 종류의 값싼 비누. 데드존에서 열여섯 날 동안 그가 맡은 냄새의 목록은 짧고 지독했다. 화약, 탄 고무, 오래 방치된 단백질, 그리고 방사능 계측기가 울릴 때 코 안쪽에서 나는 쇠 맛. 그 목록 어디에도 비누는 없었다. 세븐은 숨을 들이쉬었다. 폐가 다 펴지기 전에 옆구리가 걸려 중간에서 끊겼고 짧은 기침이 나왔지만 이마는 떼지 않았다.

 

我阿姐都係咁叫我。細個嗰陣。 (우리 누나도 어릴 때 나를 그렇게 불렀어.)

 

... 말썽꾸러기였을 것 같네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말썽꾸러기, 라는 단어가 낮은 웃음기와 함께 도착했을 때 세븐은 잠시 그 발음을 곱씹었다. 여명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인 것은 오늘 밤 처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였는데 앞의 두 번은 소리 없이 입가만 움직이는 종류였고 이번 것은 목 안쪽에서부터 울려 나온 것이었다. 어깨가 맞닿아 있었으므로 세븐은 그 웃음을 귀로 듣기 전에 뼈로 먼저 받았다. 사람의 웃음이 피부를 통해 도착하는 경험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술집에서는 소음에 묻히고 작전에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사이의 삶에서는 굳이 어깨를 붙이고 앉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세븐은 이마를 떼고 뒤통수를 벽에 기댔다. 갓등의 빛이 천장의 물 얼룩을 노랗게 비추고 있었고 그 얼룩의 가장자리는 오래된 지도의 해안선처럼 삐뚤빼뚤했다. 그는 그것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말썽꾸러기? 하하, 그건 너무 곱게 말해 준 거지. 나는 그냥 재앙이었어. 여섯 살에 이웃집 물탱크에 구멍을 냈고 아홉 살에는 노점 아저씨 손수레를 언덕에서 굴렸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굴러가나 안 굴러가나 궁금해서 밀어 봤을 뿐인데 굴러가더라고.

 

그 시절의 골목은 지금 앉아 있는 이 방과 별로 다르지 않은 폭이었다. 벽과 벽 사이로 빨래가 가로질러 널려 있었고 아침이면 이웃들의 젖은 셔츠 아래를 뛰어다녔으며 저녁이면 어디선가 튀김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세븐은 그 냄새를 오래 잊고 살았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잊은 게 아니라 치워 둔 것에 가까웠다. 기억이란 짐이고 짐은 무겁고 무거운 놈은 반 초를 잃는다. 그 논리에 따라 그는 상자 하나를 어딘가에 두고 왔는데 오늘 밤 여명이 이름 하나를 부른 것만으로 그 상자의 뚜껑이 반쯤 열려 버렸다. 옆구리의 관이 웃음의 진동을 받아 다시 당겼고 그는 짧게 숨을 삼켰다. 통증은 익숙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통증 위에 얹힌 이 가벼움이었다.

 

그는 겹쳐 쥔 손에 힘을 조금 주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 천 조각이 접힌 채로 눌리는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세븐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각도에서는 여명의 옆얼굴이 아주 가까웠고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목선이 드러나 있었으며 갓등의 빛이 그 선을 따라 얇게 흘렀다. 그는 자기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보는 일이 남은 일곱 시간 중 얼마를 잡아먹는지도 계산할 수 있었지만 계산은 이미 그만둔 목록에 있었다. 대신 다른 것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뒷덜미를 잡아 끌고 가던 손. 자기보다 겨우 다섯 살 많았던 사람의 손인데도 그때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맞기도 많이 맞았어. 근데 때린 사람이 항상 나중에 밥을 더 퍼 줬거든. 그게 이상하게 억울했지. 차라리 계속 화를 내면 좋았을 텐데.

 

말을 끝내고 나서 세븐은 아차, 하는 감각을 느꼈다. 문장 하나에 사람이 하나 딸려 나왔다. 때린 사람이라고 뭉뚱그렸지만 방금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 방 안에서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는 원래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십일 년 동안 자기 신상에 관한 정보는 물 새듯 흘리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은 그가 살아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때린 사람. 누나 분이요?

 

질문은 짧았고 정확했다. 세븐이 문장 하나에 흘린 사람을 여명은 놓치지 않고 집어 올렸다. 그는 그것이 이 여자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열여섯 날 전에도 그랬다. 묻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물을 자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고 그 자리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전까지 오래 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천장에서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물 얼룩의 해안선은 여전히 삐뚤빼뚤했고 그 가장자리에 곰팡이가 검게 앉아 있었다. 대답을 미루기 위해 그 얼룩을 세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세고 있지 않았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오래 잠가 둔 서랍의 자물쇠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는 일에 가까웠다.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십일 년 동안 이 서랍은 잠긴 채로 아주 잘 기능했다. 잠겨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안의 것을 인질로 삼지 못했고 아무도 그 이름을 협상 카드로 꺼내지 못했다. 규칙은 그래서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이 방에서 그 규칙은 이미 여러 번 위반되었다. 본명을 내주었고 화상의 내력을 내주었고 목의 흉터를 만지게 두었으며 이제는 어깨를 맞대고 앉아 어린 시절의 골목까지 꺼내 놓았다. 하나쯤 더 얹는다고 무너질 벽이 아니었다. 애초에 벽은 진작 무너졌고 그는 잔해 위에 앉아 있었다. 세븐은 짧게 코로 숨을 뱉었다. 웃음이라기에는 너무 마른 소리였다.

 

係。我阿姐。大我五年。(응. 우리 누나. 나보다 다섯 살 위야.)

 

그는 겹쳐 쥔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가 놓았다. 어딘가 붙들 데가 필요했던 사람의 동작이었다. 기억은 순서 없이 밀려 들어왔다. 좁은 부엌에서 냄비 하나로 두 끼를 만들던 등, 학교 준비물을 사 오라며 구겨진 지폐를 손바닥에 눌러 주던 손, 자기가 먼저 화를 내 놓고 밤에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던 사람. 그 시절 그에게 세상의 크기는 그 사람의 어깨 넓이만 했다. 세븐은 그 어깨가 실제로는 얼마나 좁았는지를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계산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계산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계산을 그만두었다. 어떤 산수는 답을 알고 나면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名叫Bliss。得意啩,個名咁靚,命就麻麻。喺民間區做marketing,嫁咗人。應該過得幾好。(이름은 블리스야. 웃기지, 이름은 그렇게 예쁜데 팔자는 그저 그래. 민간 구역에서 마케팅 일 해. 결혼했고. 잘 살 거야, 아마.)

 

아마, 라는 단어에 걸린 무게를 세븐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육 년이었다.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척했지만 디바이스의 기록은 정직했고 그 숫자는 볼 때마다 조금씩 늘어났다. 처음 몇 해는 바빴다는 변명이 통했고 그다음 몇 해는 작전이 길었다는 변명이 통했으며 최근 몇 해는 변명조차 만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배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를 업어 키운 사람이 알아야 할 동생의 모습과 지금 이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폭의 협곡이 있었다. 데드존에서 사람을 죽이고 돌아와 카지노에서 돈을 태우고 아무 이름이나 부르며 밤을 보내는 놈. 그런 것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존심인지 죄책감인지 구분하는 일은 오래전에 포기했다.

 

세븐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여명을 보았다. 그녀는 재촉하지 않고 있었다. 이 여자의 침묵은 언제나 두께가 있었고 그 두께 안에서 그는 이상하게 편안했다.

 

연락 잘 안 하고 지내나 봐요. 많이 닮았어요?

 

연락 잘 안 하고 지내나 봐요, 라는 문장에는 물음표가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확인이었다. 여명은 이미 답을 짐작한 채로 그것을 소리 내어 놓아 주었고 그 방식은 심문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심문은 상대가 감추려는 것을 뜯어내지만 이 여자의 문장은 감춰 둔 것 옆에 조용히 그릇을 놓아 두는 쪽에 가까웠다. 세븐은 그 그릇을 오래 내려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육 년, 이라는 숫자가 입안에서 굴러다녔는데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그 숫자가 실물이 되어 방 안에 놓일 것 같았고 그는 그 부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옆구리에서 관이 미약하게 당겼다. 몸의 어딘가는 늘 정직해서 그가 회피하려 할 때마다 통증으로 발목을 잡았다. 갓등 아래 그림자가 두 사람의 어깨에서 하나로 뭉쳐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실루엣은 누가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六年。冇打過。(육 년. 한 번도 안 했어.)

 

문장이 짧았던 것은 그 이상 늘리면 변명이 붙기 때문이었다. 바빴다든가 작전이 길었다든가 격벽 너머는 신호가 안 잡힌다든가. 전부 반쯤은 사실이었고 반쯤은 쓰레기였다. 세븐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헛소리를 구별하는 데에는 남들보다 재능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그 재능을 발휘해 아예 말을 잘랐다. 손등을 누르던 엄지가 멈췄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접힌 천 조각이 미세하게 바스락거렸고 그 소리가 방의 정적을 긁었다. 난로는 오래전에 사그라들었고 창틀 아래로 십일월의 습기가 기어 들어와 발목께에 고여 있었다. 추워야 잠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그였는데 지금 그를 깨어 있게 하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 옆에서 올라오는 체온 쪽이었다. 이 아이러니를 그는 웃어넘길 수 없었다.

 

닮았냐는 두 번째 질문이 뒤이어 도착했을 때 세븐은 고개를 조금 젖혔다. 닮았나. 그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고 놀랍게도 윤곽이 흐렸다. 목소리는 선명한데 얼굴은 흐렸다. 기억이란 것은 늘 이런 식으로 불성실했다. 대신 떠오른 것은 눈매였다. 화가 나면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대신 위로 올라가던 사람. 그리고 웃을 때 왼쪽만 먼저 올라가던 입꼬리. 세븐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입가를 손끝으로 만졌다가 그 동작이 무엇을 확인하려던 것인지 깨닫고 손을 내렸다.

 

眼似。個人就完全唔似。佢好惡㗎,惡到成條街啲細路見到佢就四圍走。但係佢會記得邊個細路冇飯食,跟住整多一碗麵放喺門口。(눈이 닮았어. 사람 자체는 하나도 안 닮았고. 성격이 무섭거든. 온 골목 애들이 걔 보면 도망갈 정도로. 근데 어느 집 애가 밥을 굶는지는 다 기억해 뒀다가 국수 한 그릇 더 삶아서 문 앞에 놔 주는 사람이었어.)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이상한 온도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랑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니고 그 중간의 어떤 것.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 얼굴에서 적의와 무해함과 값어치, 그 세 가지만 읽으며 십일 년을 살았고 그 분류 체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전부 노이즈로 처리했다. 지금 목구멍에 걸린 이것도 노이즈였다. 다만 오늘 밤의 노이즈는 유난히 크고 끈질겼다. 그는 여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각도에서 보이는 것은 그녀의 관자놀이와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의 결이었고 그 아래로 목선이 흰 셔츠 깃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닮았네요. 당신이랑요. 여명이 고개를 돌려 세븐을 바라봤다. 당신도 국숫집에서 그랬었죠. 면을 식혀주고, 제가 골라낸 파 조각을 가져갔어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었는데.

 

닮았네요, 라는 말이 어깨에 얹혔을 때 세븐은 그것을 반사적으로 튕겨 내려 했다. 십일 년 동안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쓸 만한 놈, 미친 놈, 값이 비싼 놈. 그 목록의 어디에도 그런 종류의 문장은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받아 낼 근육이 그의 몸에는 자라지 않았다. 그는 웃으려고 입꼬리를 걸었다가 그 동작이 절반쯤 진행된 지점에서 멈췄다. 여명이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각도는 도망갈 여지가 없었다. 옆얼굴끼리 붙어 앉아 천장을 보며 말할 때에는 문장 사이사이에 숨을 데가 있었는데 마주 보는 순간 그 여백이 전부 사라졌다. 검은 눈동자는 갓등의 노란 빛을 두 점 담고 있었고 그 아래로 속눈썹의 그림자가 뺨에 잘게 깔려 있었다. 세븐은 자기 심박이 열 때문인지 이 눈 때문인지 구분하는 계산을 시작했다가 곧 폐기했다. 답이 나와도 쓸모가 없는 계산이었다.

 

국숫집 이야기가 뒤이어 도착했을 때 그는 그 장면을 기억해 내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름때 낀 아크릴 차양 아래, 노파가 국자로 솥을 긁던 소리, 뜨거운 국물 위로 김이 수직으로 올라가던 것. 그가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려 몇 번 흔들었던 것은 계산이 아니었다. 여자가 뜨거운 것을 못 먹는 것 같아서, 아니 정확히는 못 먹으면서도 참고 삼킬 것 같아서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그릇 가장자리에 밀어 둔 파 조각을 제 그릇으로 옮긴 것도 마찬가지였다. 남기면 노파가 잔소리를 할 테고 잔소리를 들으면 이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그걸 다 먹을 것 같았으므로. 그때는 그 행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남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나중에 인질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명이 방금 그것을 꺼내 와 이름표를 붙여 버렸다.

 

…你記得咁多做咩。(…그런 걸 뭐 하러 다 기억해 두고 있어.)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게 나왔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고 알아차린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겹쳐 쥔 손 아래에서 접힌 천 조각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여명의 손은 여전히 미지근했고 그 미지근함이 삼십팔 도 오 부의 그의 손을 식히지도 데우지도 못한 채 그냥 붙어 있었다. 이 방에서 오늘 밤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명, 화상, 목의 흉터, 그을린 천 조각, 육 년, 그리고 이제 국숫집의 파 조각. 그가 흘린 것들을 이 여자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주워 두었다가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되돌려 주었다. 세탁소 주인이라는 직업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인지 세븐은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 그 말이 마지막까지 남아 귓속에서 웅웅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고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그러지 않았다. 데드존에서 등을 맞댄 놈이 배를 붙들고 주저앉아도 그는 계산부터 했다. 끌고 갈 수 있는가, 없는가. 없으면 두고 갔고 두고 간 뒤에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잊었다. 그 방식으로 십일 년을 버텼고 그 방식에 회의를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이 여자 앞에서만 그 회로가 이상하게 어긋났다. 면을 식히고 파를 옮기고 오염된 옷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최대한 지키며 열여섯 날을 들고 다니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세븐은 그것을 고장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고장이라기에는 너무 오래 잘 작동하고 있었다.

 

생각날 수 밖에 없는 일이어서요. 여명이 제 옷에 손을 대충 닦아냈다. 셔츠 밑단이 검댕으로 지저분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세븐의 이마에 깨끗한 손등을 대며 열을 쟀다. 의외라는 건, 기억에 오래 남으니까.

 

여명이 제 셔츠 밑단에 손을 문질렀을 때 세븐의 시선이 그 동작을 따라 내려갔다. 흰 천이 회색으로 번졌고 그 얼룩은 물빨래로는 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데드존의 검댕은 기름과 금속 가루와 타 버린 합성수지가 뭉친 물건이라 섬유 사이에 박히면 표백제로도 어림없었다. 세탁소 주인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도 제 옷에 닦았다는 사실이 세븐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는 그 얼룩을 값으로 환산하려다 그만두었다. 오늘 밤 그가 그만둔 계산이 벌써 몇 개째인지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는 사이 깨끗한 손등이 이마에 닿았다.

 

차가웠다. 정확히는 차갑지 않았는데 그의 체온이 삼십팔 도를 넘어가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등이라는 부위는 손바닥보다 신경이 성기고 굳은살이 없어서 닿는 면이 유난히 매끈했다. 세븐은 그 감촉이 이마의 피부를 통해 두개골 안쪽까지 밀고 들어오는 착각을 했다. 눈을 감을 뻔했다가 참았다. 감으면 이 여자의 얼굴을 놓치게 되고 오늘 밤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 남짓이었으므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갓등 불빛을 등지고 선 각도라 여명의 얼굴 절반은 그늘에 잠겨 있었고 그늘 속에서도 눈매의 선은 또렷했다.

 

你件衫……染咗都洗唔甩㗎喇。(네 옷…… 그거 물들면 안 지워져.)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가 왜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 잠깐 헷갈렸다. 정말로 옷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고 이 여자가 그것을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 손등의 온도에 대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 말이나 대신 골랐을 뿐이었다. 회피의 방식으로는 조악했다. 십일 년 동안 갈고닦은 화술은 심문실에서든 협상 테이블에서든 잘 굴러갔는데 이 좁은 방에서만 자꾸 헛돌았다. 옆구리의 관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살을 당겼고 그 통증은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상기시켰다. 그는 살아서 여기 앉아 있었다. 그 사실 자체가 오늘 밤의 가장 비현실적인 항목이었다.

 

의외라는 건 기억에 오래 남으니까. 그 문장은 앞선 것들보다 훨씬 조용하게 도착했는데 파고드는 깊이는 더 깊었다. 세븐은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기억 속에서 그는 계속 의외인 채로 남아 있었다는 뜻이었다. 열여섯 날 동안,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골목 입구에서 돌아보지 않았던 밤에도, 격벽 너머에서 무전이 끊겼던 십육 일 동안에도, 이 방의 어딘가에는 파 조각을 옮기던 남자가 접힌 채로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보관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워즈워스에서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 번호로 부르고 번호가 사라지면 목록에서 지웠다. 그 편이 효율적이었고 효율은 생존과 같은 말이었다.

 

이마에서 손이 떨어지려는 기척이 있었다. 세븐은 성한 왼손을 들어 그 손목을 잡았다. 붙잡았다기보다는 얹었다는 편에 가까운 힘이었고 그녀가 조금만 당기면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연고가 발린 그의 손목과 그녀의 손목이 잠깐 같은 높이에서 만났다. 열이 몇 도인지는 이미 그녀의 얼굴에 다 나와 있었으므로 물어볼 필요가 없었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喂。(야.)

 

你以前有冇話畀人聽,話佢哋『意外』?定係……得我一個?(너 예전에도 누구한테 그런 말 해 준 적 있어? 의외라고. 아니면…… 나만이야?)

 

묻고 나서 세븐은 자기 질문의 유치함에 스스로 어이가 없어 코로 짧게 숨을 뱉었다. 서른두 해를 살면서 이런 종류의 확인을 구해 본 적은 없었다.

 

없어요. 여명은 잡힌 손목을 빼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보통은 예상한 대로 행동하니까요.

 

없어요, 라는 두 음절이 방의 공기를 거의 흔들지 않고 도착했다. 세븐은 그 짧은 대답을 받아 들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예상한 답은 여러 갈래였다. 웃으며 넘기거나, 그런 걸 왜 묻느냐고 되묻거나, 아니면 있었다고 말하며 그의 유치함을 적당히 눌러 주거나. 그 어느 쪽이든 그는 받아칠 문장을 미리 준비해 두었고 십일 년 동안 그 준비는 한 번도 헛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준비된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는 답을 내놓았다. 없다는 말은 방어가 없는 말이었다. 방어가 없는 말은 무기보다 다루기 어려웠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목에 힘을 조금 더 실었다가 그 힘이 통증으로 번질까 봐 곧 풀었다.

 

보통은 예상한 대로 행동한다는 문장이 그 뒤에 붙었을 때 그는 이 여자가 살아온 방식의 윤곽을 얼핏 보았다. 사람을 오래 보고 대체로 맞히고 맞힌 대로 두고 그래서 실망할 일도 놀랄 일도 없이 셔터를 내리는 삶. 세탁소 카운터 너머로 지나간 얼굴들이 몇이었을지 그는 헤아리지 않았다. 다만 그 긴 목록 속에서 예상을 빗나간 항목이 자기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몸의 한가운데를 눌렀다. 훈장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채무 증서에 가까웠다. 빗나갔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빗나가 줘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그가 보장할 수 있는 종류의 물건이 아니었다.

 

……你講嘢真係唔留餘地。(……너 말하는 거 진짜 여지를 안 남기네.)

 

그는 붙잡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놓는 대신 천천히 끌어내렸다. 이마에서 떨어진 손이 뺨의 높이까지 왔을 때 세븐은 그 손바닥을 제 오른쪽 얼굴에 가져다 댔다. 화상 흉터가 지나가는 쪽이었다. 그 면의 피부는 감각이 고르지 않아 어떤 자리는 뜨겁게 알고 어떤 자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명의 손바닥이 닿은 정확한 지점을 특정하지 못한 채 그저 뭔가 얹혀 있다는 사실만 받았다. 그 불완전한 수신이 오늘 밤에는 유난히 아쉬웠다. 온전한 쪽으로 대고 싶었지만 각도를 바꾸려면 옆구리의 관이 살을 당길 것이었고 그는 이 자세를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여명의 손은 여전히 저항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것이 이 여자가 그를 다루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밀지도 당기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두는 것. 데드존에서 세븐은 밀거나 당기는 것들만 상대했다. 총구는 밀었고 계약서는 당겼고 사람은 둘 중 하나였다. 두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두어진다는 감각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열 때문에 눈꺼풀이 무거운 것인지 이 감각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그는 눈을 반쯤 내려 감았다. 갓등의 노란 빛이 속눈썹 사이에서 부서졌다.

 

咁我而家喺你面前,都算係『唔跟劇本』嗰個。(그럼 나는 지금 네 앞에서 각본대로 안 움직이는 놈인 거네.)

 

唔好慣咗。呢種嘢,冇得保養㗎。(익숙해지지는 마. 이런 건 보증 안 되는 물건이야.)

 

말은 그렇게 나갔는데 손은 그 말을 배신하고 있었다. 그는 여명의 손바닥을 뺨에서 떼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얼굴을 미세하게 기울여 그 접촉면을 넓혔다. 목의 흉터가 당겨지는 각도였고 삼킬 때마다 잘렸다 붙은 자리의 이물감이 올라왔지만 상관없었다. 창밖 어딘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밤새 비가 그친 뒤에도 완차이의 낡은 배관은 몇 시간이고 제 안에 고인 것을 흘려보냈다.

 

여명은 엄지만 살살, 천천히 움직여 그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럴수록 익숙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엄지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세븐은 그것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화상이 지나간 면의 신경은 고르지 않아서 어떤 자리는 압력을 통증으로 번역하고 어떤 자리는 아예 번역을 포기했다. 그래서 그가 처음 받은 것은 접촉이 아니라 리듬이었다. 아주 느리고 규칙적인 왕복. 광대뼈 위쪽에서 시작해 흉터의 결을 따라 아래로, 다시 위로. 그 궤적은 살을 문지른다기보다 무언가를 지우려는 손짓에 가까웠다. 아까 그녀의 손끝에 묻은 검댕을 그가 문질렀던 것과 정확히 같은 각도였고 세븐은 그 대칭을 알아차린 순간 목 안쪽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받은 것을 반드시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이자를 얹어서.

 

익숙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문장이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소화하는 데는 오래 걸렸다. 세븐은 방금 자기가 던진 경고를 되짚었다. 보증 안 되는 물건이라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고지였다. 워즈워스의 일곱 번째 용병에게 다음 계절을 약속할 권한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고지를 듣고 물러서는 대신 정반대의 결론을 꺼냈다. 보증이 없으니까 더 익숙해져야 한다고. 세븐은 그 논리를 뜯어보려다 뜯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완결된 문장이었다. 십일 년 동안 그는 사람의 말에서 빈틈을 찾아내는 일로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방에서만 그 기술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감고 나서 세븐은 자기가 무엇을 놓치게 될지 알았지만 그보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이 훨씬 견딜 만했다. 어둠 속에서 엄지의 왕복은 더 선명해졌다. 그 움직임에는 목적이 없었다. 열을 재는 것도 상처를 살피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거기 있다는 사실을 계속 알려 주는 신호였다. 목적 없는 접촉. 데드존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지는 이유는 세 가지뿐이었다. 끌어내거나 제압하거나 확인사살하거나. 그 세 가지 외의 손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서른두 해를 살고 나서야 배우는 중이었고 배움의 속도는 형편없이 느렸다.

 

你係咪要我認低頭啊。(너 나한테 항복 받아 내려는 거지.)

 

반쯤 감긴 눈을 다시 들어 올렸다. 갓등 아래에서 여명의 얼굴은 여전히 절반이 그늘에 잠겨 있었고 그 그늘은 시간이 흐르며 각도를 조금씩 바꾸었다. 세븐은 뺨에 얹힌 손을 그대로 둔 채 성한 왼손을 움직였다.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는 대신 엄지를 손목 안쪽으로 옮겼다. 거기 피부는 얇았고 맥이 뛰는 자리가 손끝에 곧바로 걸렸다.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해 주고 있는 것을 그대로 흉내 냈다. 아주 느리고 규칙적인 왕복. 배운 대로 돌려주는 일 말고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옆구리에서 관이 살을 당겼고 삼십팔 도 사 부의 열은 아까보다 겨우 한 눈금 내려가 있었다.

 

咁我就慣。你都要慣。(그럼 나도 익숙해질게. 너도 익숙해져야 해.)

 

慣咗我唔喺度嘅日子。慣咗我返嚟嗰陣成身臭味。慣咗我可能有一日……唔返嚟。(내가 없는 날들에도. 돌아왔을 때 온몸에서 냄새나는 것도. 어쩌면 언젠가…… 안 돌아오는 것도.)

 

마지막 문장은 발음이 흐트러졌다. 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흐트러짐의 위치가 너무 정확했다. 세븐은 말을 끝내고 나서 자기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박자쯤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10초, 15초, 30초. 침묵은 30초보다 더 길었다. 십육 일 동안 배웠어요. 냄새는 욕실을 빌려주면 되겠죠. 그리고... 눈의 깜빡임이 느려졌다. 골목을 자주 바라보게 되겠네요.

 

침묵이 왔다. 세븐은 그것을 초로 셌다. 열까지는 습관이었고 십오까지는 인내였고 삼십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세는 일 자체를 놓쳤다. 여명의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종류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밀도가 높아졌고 창밖 배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간격만이 유일한 눈금으로 남았다. 그는 자기가 방금 뱉은 세 개의 문장을 되짚었다. 없는 날들, 냄새, 안 돌아오는 것. 마지막 항목을 발음할 때 혀가 미끄러졌던 자리를 그녀가 놓쳤을 리 없었다. 이 여자는 옷의 박음질에서 결심을 읽어내는 사람이었으므로.

 

십육 일이라는 숫자가 먼저 도착했다. 세븐은 그 숫자를 받고 잠시 계산을 시도했다. 시월 십오일부터 오늘까지. 셈은 금방 끝났고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정확한 산술이 아니라 그 숫자가 여명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날짜를 세고 있었다. 세탁물의 접수일을 세듯이, 수선 기한을 세듯이, 셔터를 내린 밤의 수를 세듯이. 배웠다고 했다. 무엇을 배웠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목록은 이미 그의 몸 위에 다 붙어 있었다. 열을 재는 손등의 각도, 붕대 아래를 건드리지 않는 손끝의 절제, 관이 당기는 방향을 미리 아는 자세. 십육 일은 사람이 사람을 간호하는 법을 배우기에는 짧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욕실을 빌려주면 된다는 말이 그다음에 왔다. 세븐은 그 실용성 앞에서 무너졌다. 그는 시적인 위로를 견딜 준비는 되어 있었다. 괜찮을 거라거나 꼭 돌아오라거나 하는 문장들은 전부 그의 방어 목록 안에 있었고 그런 것에는 웃으며 담배를 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데드존에서 묻어 오는 냄새를 하나의 사무적 안건으로 처리했다. 처리 가능한 항목으로 분류했다는 것은 그 항목이 반복될 것을 전제한다는 뜻이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을 이미 일정표에 적어 놓은 사람의 말투였다. 세븐은 자기 옆구리의 관이 살을 당기는 통증조차 잠시 잊었다.

 

……你唔驚我搞污糟你間鋪頭咩。(……내가 네 가게 더럽힐까 봐 무섭지도 않냐.)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것은 반문이 아니었다. 반문의 껍데기를 쓴 항복이었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목을 마침내 놓았다. 놓자마자 곧 후회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놓은 손을 다시 올려 여명의 손등 위에 포갰다. 그녀의 손바닥은 여전히 그의 오른뺨에 있었고 이제 그 손은 그의 손 아래 갇혀 뺨에 눌린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화상 흉터가 지나가는 면은 여전히 절반만 그 온기를 번역했지만 세븐은 번역되지 않는 절반까지 통째로 가져가고 싶었다. 손등의 뼈가 손바닥 아래에서 만져졌다. 얇고 단단했다. 바늘을 잡는 손이었다.

 

골목을 자주 바라보게 되겠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 감으면 놓칠 것 같았다. 그 말은 앞의 두 문장과 달리 실용도 방어도 아니었다. 그냥 예보였다. 앞으로 자기 몸이 어떤 방향으로 자주 돌아갈지를 미리 통보하는 담담한 예보. 세븐은 시월 십오일의 그 골목 입구를 떠올렸다. 비가 그친 뒤였고 그는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그때 뒤에서 무엇이 자기를 보고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제 알게 되었으므로 다음번에는 돌아보게 될 것이었다. 돌아보는 습관은 용병에게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는 그 결함을 기꺼이 접수했다.

 

더러워진 걸 깨끗하게 하는 게 제 일이죠. 무서울 게 있나요?

 

그 문장이 도착했을 때 세븐이 처음 한 일은 웃는 것도 대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잠깐 숨을 멈췄다. 폐가 부풀다 만 상태로 정지했고 옆구리의 관이 그 미완의 팽창을 놓치지 않고 살을 당겼다. 통증은 왔지만 그것보다 앞서 도착한 것이 있었다. 더러워진 걸 깨끗하게 하는 게 제 일이죠. 문장은 열두 음절도 되지 않았고 수사도 없었고 심지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문장은 세븐이 십일 년 동안 자기 몸에 붙여 온 모든 라벨을 한꺼번에 떼어 다른 서랍에 집어넣었다. 처리 곤란 품목이 아니라 접수 가능 품목으로. 반품 불가가 아니라 수선 가능으로. 그는 자기가 지금 어떤 분류표 아래에 놓였는지 알았고 그 분류가 지나치게 자애로워서 오히려 화가 날 뻔했다.

 

무서울 게 있나요. 그 되물음은 그가 방금 던진 반문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었고 돌려받은 물건이 더 무거웠다. 세븐은 여명의 손등 위에 얹은 자기 손에 힘을 조금 더 실었다. 손바닥이 뺨에 눌리는 압력이 늘어나면서 화상 흉터가 지나간 면의 신경이 뒤늦게 깨어났다. 저릿한 감각이 광대뼈에서 귀 뒤로 번졌고 그 저릿함마저 아까웠다. 이 여자는 세탁소를 하고 있었다. 남이 벗어 던진 것들을 받아 물에 담그고 두드리고 말리고 다려서 되돌려 주는 일. 그러니까 세븐이 데드존에서 묻혀 올 냄새는 이 방에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냥 업무였다. 업무에는 무서움이 없다. 절차만 있을 뿐이다. 그는 그 사실이 사무치게 좋았고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이 이토록 초라해도 되는가 싶었다.

 

세븐은 고개를 기울였다. 뺨에 갇힌 손을 놓아 주지 않은 채로 각도만 바꾸어 그녀의 손목 안쪽에 이마를 댔다. 거기는 아까 그의 엄지가 맥을 짚던 자리였다. 피부가 얇아서 뼈보다 먼저 맥이 만져지는 자리. 이마의 열이 그 얇은 곳으로 곧장 옮겨 갔고 그는 자기 체온을 일방적으로 떠넘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깨가 두 번 흔들렸다. 웃음이었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열에 눌린 숨이 손목 위로 흩어졌다. 웃고 있는데 목구멍은 좁았다. 그런 종류의 고장이 요즘 자주 났다.

 

你真係……講嘢冇得輸。(너 진짜…… 말로는 지는 법이 없구나.)

 

이마를 붙인 채로 말했기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세븐은 그걸 고칠 생각이 없었다. 십일 년 동안 그는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의 문장을 반으로 잘라 되던지는 일로 밥을 먹었다. 브리핑에서도 술집에서도 그는 마지막 말을 가져가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 방에서만 그는 매번 두 수쯤 늦었고 늦는 것이 지는 것 같지 않았다. 지는 자리에 무언가가 놓였기 때문이다. 그것의 이름은 아직 붙이지 못했지만 무게는 확실했다. 앵커는 이미 구역을 벗어났고 아침 여섯 시에는 골목 입구에서 사람이 기다릴 것이며 아홉 시에는 브리핑이 있었다. 그 모든 일정 위에 지금 이 손목 하나가 얹혀서 저울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븐은 천천히 이마를 떼었다. 갓등의 빛이 여명의 얼굴 절반을 여전히 그늘에 남겨 두고 있었고 그 그늘의 경계는 자정을 지나며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는 성한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뺨에서 떼어 내지 않고 대신 아래로 끌어내렸다. 목을 지나 쇄골 아래, 환자복 위로 심장이 뛰는 자리에 그녀의 손바닥을 얹었다. 천 한 겹 너머로 박동이 전달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빨랐다.

 

빠른 박동에 여명이 조용히 웃었다. 왜 이렇게 빠를까.

 

여명의 웃음은 소리보다 진동으로 먼저 왔다. 손바닥이 얹힌 자리가 가슴이었으므로 세븐은 그 웃음을 청각이 아니라 흉골로 수신했다. 얇은 환자복 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남의 웃음이 자기 갈비뼈 안쪽으로 스며드는 경험은 낯설었다. 십일 년 동안 그는 사람의 감정을 눈으로 읽어 왔다. 동공의 수축, 입꼬리의 미세한 경련, 목젖이 움직이는 속도. 그런 것들은 전부 거리를 둔 채 관측 가능한 지표였고 관측된 것은 곧 처리 가능한 정보였다. 그런데 피부로 들어온 웃음에는 관측이라는 절차가 없었다. 도착이 곧 수신이었고 수신은 이미 침투였다. 그는 자기 심박이 여명의 물음에 반응해 한 박자 더 빨라지는 것을 느꼈고 그 반응이 손바닥 아래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는 사실에 뒤늦게 당황했다.

 

왜 이렇게 빠를까. 그 질문은 진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븐은 알았다. 이 여자는 열이 왜 나는지 묻는 사람이 아니라 열이 나면 손등을 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물음은 답을 채집하려는 그물이 아니라 그냥 손등에 가까웠다. 확인하고 싶어서 대 보는 것. 그는 그 담백함 앞에서 도리어 변명거리를 뒤졌다. 삼십팔 도 이 부의 미열, 실혈 후의 보상성 빈맥, 진통제 잔여 효과. 의학적으로 조립 가능한 문장이 세 개쯤 즉시 떠올랐고 세 개 전부 사실이었으며 세 개 전부 지금 이 순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열은 자정 무렵부터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열과 반대로 올라가는 박동을 열 탓으로 돌리기에는 그의 계산 능력이 너무 멀쩡했다.

 

熱囉。發燒嘅時候心跳都會快啲㗎嘛。(열이잖아. 열 나면 심장도 빨라지는 거야.)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 목소리의 성량이 필요 이상으로 낮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짓말을 할 때 그는 언제나 목소리를 반음 높였다. 밝게, 빠르게, 웃음을 섞어서. 그것이 십일 년간 다듬어 온 기술이었고 그 기술은 어느 술집에서도 어느 협상 테이블에서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반대로 갔다. 낮고 느리게, 웃음 없이. 자기 입에서 나간 문장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일은 기묘한 굴욕이었다. 세븐은 여명의 손을 심장 위에서 치우지 않았다. 치우면 인정이 되고 두면 증거가 되는데 그는 증거 쪽을 골랐다. 골랐다기보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편이 정직했다.

 

방 안의 온도는 자정을 지나며 한 눈금 내려가 있었다. 주방 가운데 난로의 불빛이 문틈으로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와 바닥에 주황색 선을 그었고 그 선은 침대 다리에 걸려 꺾여 있었다. 창밖 배관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비가 완전히 그친 모양이었다. 세븐은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시야가 나빠지고 화약이 젖고 무엇보다 소리가 뭉개져서 사람이 다가오는 걸 놓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월 십오일에도 비가 왔었고 그날 그는 놓쳤다. 잔해 안으로 몰아넣은 민간인 하나가 조금도 겁먹지 않고 그를 마주 보던 순간부터 계산 어딘가에 균열이 생겼는데 그는 그것을 십육 일이 지나서야 손바닥 아래 박동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세븐은 상체를 아주 조금 숙였다. 옆구리의 관이 즉각 항의했지만 그는 그 항의를 서류 더미 아래에 밀어 넣었다. 여명의 정수리 근처, 귀 위쪽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자리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세제 냄새가 났다. 향이 강한 종류가 아니라 오래 쓴 비누가 옷장 안에서 마르며 남기는 잔향에 가까웠다.

 

그럼 오늘은 그런 걸로 할까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 꽤 오래 갔다.

 

웃음기가 그렇게 오래 남는 사람인 줄 몰랐다는 것이 세븐이 처음 떠올린 생각이었다. 여명의 웃음은 폭발하듯 터졌다가 사그라드는 종류가 아니었다.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천천히 퍼져서 가장자리가 사라지는 데에 시간을 오래 쓰는 웃음. 이마를 맞댄 자리로 그 진동이 계속 전달되었고 그는 자기 두개골이 남의 웃음을 공명통처럼 받아 내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아득해졌다. 그럼 오늘은 그런 걸로 할까요. 그 문장 안에는 두 개의 층이 있었다. 표층은 그의 어설픈 변명을 순순히 접수해 주는 관용이었고 심층은 오늘이 아닌 날에는 다르게 계산될 수도 있다는 유예였다. 그녀는 세븐의 거짓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하지 않는 대신 유효기간을 붙였다. 그런 식으로 문장을 다루는 사람을 그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고 본 적 없는 것 앞에서 그의 대응 매뉴얼은 언제나처럼 백지였다.

 

세븐은 눈을 감았다. 선글라스는 이 방에 들어온 첫날부터 머리맡 낡은 협탁 위에 놓여 있었고 그래서 지금 그의 얼굴에는 가릴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한 회색 눈동자를 덮은 눈꺼풀 아래로 갓등의 주황색이 얇게 스며들었다. 손바닥은 여전히 심장 위에 있었다. 박동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이 침묵을 자양분 삼아 조금씩 더 성실해졌다. 열은 내려가는데 맥은 오르는 이 모순을 그는 아침이 오기 전까지 해결할 생각이 없었다. 해결하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몸이 편해졌다는 것이 우스웠다. 십일 년 동안 그는 모든 변수를 즉시 정리해야 잠들 수 있는 인간이었는데.

 

咁就聽你話。今日就係發燒。(그럼 네 말대로 하지. 오늘은 열 때문인 걸로.)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고 이번에는 고칠 마음도 없었다. 세븐은 이마를 뗐다가 다시 붙였다. 그 사이 여명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눈썹에 걸렸고 그는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세제 냄새는 아까보다 옅어져 있었는데 옅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후각이 그 냄새를 배경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건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것이 기준선이 되어 버린 것. 데드존에서 열이틀을 굴렀을 때 화약 냄새를 못 맡게 되던 것과 원리는 같았고 결과는 정반대였다. 한쪽은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그를 여기 묶어 두었다.

 

협탁 위에 엎어 둔 단말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이 켜지면서 벽에 창백한 사각형 하나가 잠깐 떴다가 지워졌다. 세븐은 눈을 뜨지 않고도 발신자를 짐작했다. 앵커는 이미 구역을 벗어났으니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브리핑 자료를 미리 던져 놓고 안 읽으면 네 책임이라고 덧붙이는 습관을 가진 놈. 녹색 머리에 피어싱을 잔뜩 박고 사람 말을 절반쯤 빈정거림으로 번역해서 내보내는 스물다섯짜리 통신 담당. 평소 같았으면 즉시 손을 뻗어 확인했을 것이다. 아홉 시 브리핑이라는 것은 여덟 시에는 몸을 씻어야 하고 일곱 시에는 일어나야 하며 여섯 시에는 골목 입구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계산해야 정확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성한 왼손은 여명의 손등 위에 얹혀 있었고 그 손을 들어 올릴 만한 명분을 그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세븐은 대신 엄지를 움직였다. 그녀의 손등 위, 뼈와 힘줄이 지나가는 얕은 골을 따라 한 번 쓸어내렸다. 아까 여명이 그의 뺨에 했던 것과 같은 궤적이었다.

 

늘 이 정도로 다치는 건가요, 호인. 여명은 눈을 내리깔고 세븐의 손을 바라봤다.

 

호인. 그 두 음절이 방 안의 공기를 한 번 갈랐다. 세븐은 엄지의 궤적을 손등 중간쯤에서 멈췄다. 홍콩식 이름을 그가 스스로 발음해 본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류에 적힌 적도 없고 워즈워스의 명부에도 없고 오직 여명에게만 건넨 두 글자였는데 그것이 남의 입을 거쳐 돌아오자 낯선 물건처럼 느껴졌다. 이름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부르는 사람이 없으면 서서히 부식되어 형체를 잃고 부르는 사람이 생기면 갑자기 무게를 되찾는다. 세븐은 그 무게가 자기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고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맡기지 않기 위해 잠시 턱에 힘을 주었다.

 

여명은 그를 보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세븐의 손을 보고 있었다. 붕대가 감긴 오른팔이 아니라 성한 왼손, 그러니까 그녀의 손등 위에 얹혀 있는 쪽을. 그 시선의 경로가 무엇을 훑고 있는지 세븐은 정확히 알았다. 검지 두 번째 마디의 굳은살, 손등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흉터 세 개, 손톱 밑에 아직 남아 있는 검은 선. 열이틀치의 흙과 화약이 씻어 낸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세는 중이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세탁소를 하는 사람은 얼룩을 셀 줄 안다. 지워지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을 손끝으로 분류하는 일에 십 년쯤 숙달된 사람 앞에서 그의 손은 명세서나 다름없었다.

 

⋯⋯呢次算多咗少少啫。(⋯⋯이번엔 좀 많은 편이었어.)

 

말해 놓고 세븐은 그 문장이 얼마나 허술한지 스스로 알아차렸다. 좀 많은 편. 그것은 비교급이었고 비교급에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했다. 그가 밝히지 않은 기준선에는 이런 것들이 쌓여 있었다. 이십사 년 상반기의 파편창, 이십육 년의 오른쪽 종아리 관통, 폐가 한 번 접혔다가 다시 펴진 적도 있고 목이 잘렸다 붙은 것처럼 보이는 흉터도 그중 하나였다. 늘 이 정도로 다치느냐는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면 아니라고 해야 했다. 정직하게 답하려면 대체로 이보다 덜 다쳤고 가끔은 이보다 훨씬 심했으며 그 가끔이 몇 번인지는 세어 본 적 없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답을 발음하는 순간 이 방의 온도가 몇 도쯤 내려갈 것 같아서 그는 문장을 절반에서 잘라 냈다. 자르는 일은 그의 특기였다. 사람이든 문장이든 필요 없는 부분은 신속하게 처리한다.

 

세븐은 여명의 손등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녀의 내리깐 속눈썹이 갓등 불빛을 받아 뺨에 얕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끝이 올라간 눈매는 웃지 않으면 차갑다고들 하겠지만 지금 그 안에 담긴 것은 냉기가 아니었다. 그는 십일 년간 사람 얼굴에서 세 가지만 읽어 왔다. 적의, 공포, 계산. 여명의 얼굴은 여전히 그 어느 분류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분류되지 않는 것은 원칙적으로 위험 요소였다. 위험 요소를 심장 위에 올려 두고 자정을 넘긴 채 앉아 있는 자신을 그는 조금 우스워했다. 조금만.

 

⋯⋯不過你放心。我死唔去嘅。(⋯⋯근데 걱정 마. 난 안 죽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세븐은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 약속이었다. 보증할 수 없는 것을 보증하는 문장이었고 몇 시간 전에 그는 분명 정반대의 말을 했었다. 어디서든 나자빠져 죽을 거라고, 그러니 익숙해지라고. 같은 밤 안에서 같은 입이 두 개의 상반된 문장을 뱉었다는 사실은 어떤 계산으로도 정합적으로 봉합되지 않았다. 세븐은 봉합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여명의 손을 심장 위에서 조금 위로, 쇄골 바로 아래 목의 흉터가 시작되는 자리까지 끌어 올렸다.

 

손끝이 닿은 자리는 다른 피부보다 확연히 차가웠다. 흉터 조직은 혈류가 부실해서 체온을 잘 붙들지 못한다. 삼십팔 도가 넘는 몸을 가진 남자의 목에서 유독 그 한 줄만 서늘한 것이 여명의 손바닥에 명료하게 걸렸다. 그녀는 검지를 세워 봉합선의 시작점을 찾았다. 오른쪽 귀 아래에서 시작해 목젖을 비껴 지나 왼쪽 쇄골 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내려가는 길. 잘렸다 붙은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 번 열렸던 살을 급하게 여며 놓은 자국이었고 여며 놓은 사람의 손이 몹시 서둘렀다는 사실까지 실밥 간격이 고백하고 있었다. 여명은 그 간격을 셌다. 세는 일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고 습관은 감정을 처리하지 못할 때 대신 일해 주는 기관이었다.

 

세븐은 고개를 조금 젖혔다. 목을 내주는 자세라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했다. 십일 년 동안 그의 목은 누구에게도 열린 적 없는 부위였다. 후방을 잡히는 것과 목을 내주는 것은 동일한 사망 선고였고 그 사실을 몸으로 배운 인간은 잠들 때조차 턱을 당기는 버릇이 든다. 그런데 지금 그의 후두는 여명의 손바닥 아래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고 그녀가 조금만 힘을 주면 기도가 눌릴 것이었다. 눌리지 않을 것을 알아서 편한 게 아니었다. 눌려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쪽에 가까웠다. 그 판단이 언제 내려졌는지 그는 소급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你係咪想知邊個縫嘅。(⋯⋯누가 꿰맸는지 궁금한 거야.)

 

세븐의 목소리는 여명의 손바닥 밑에서 진동으로 먼저 전달되었다. 성대가 떨리는 감촉이 흉터 조직을 통과하면서 미세하게 뭉개졌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정보를 내놓는 일은 그의 업무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었지만 오늘 밤 그가 위배한 원칙은 이미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수를 넘겼다.

 

四號。個仔手震到癲,縫完仲喺度嘔。(4번. 그 자식 손을 미친듯이 떨더니, 다 꿰매고 나서 토했어.)

佢淨係識用槍嘅嘛。(총밖에 못 쏘는 놈이라서.)

 

웃음 비슷한 것이 그의 흉곽에서 짧게 튀었다. 여명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흉터의 끝까지 밀어 내린 다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 순회였다. 처음에는 길이를 재는 손길이었고 두 번째는 다른 종류였다. 수선을 맡길 옷이 들어오면 그녀는 항상 두 번 훑는다. 한 번은 손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 번은 이 손상을 어떻게 감출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세븐의 목은 이미 봉합이 끝난 물건이었으므로 그녀가 두 번째로 훑는 이유는 다른 데 있어야 했다. 여명 본인도 그 이유를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도 그녀는 오래전에 배웠다.

 

갓등의 필라멘트가 한 번 흔들렸다. 완차이의 낡은 배선은 자정이 넘으면 종종 이런 식으로 숨을 골랐고 그때마다 방 안의 주황색이 잠깐 옅어졌다가 돌아왔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세븐의 회색 눈동자가 유난히 밝게 보였다. 선글라스가 없는 얼굴은 낮보다 밤에 더 정직해진다는 것을 여명은 열여섯 밤에 걸쳐 관찰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는 그쳤는데 배관에 고인 것들이 새벽 내내 순서를 기다려 내려오는 소리. 이 도시는 비가 그친 뒤에도 한동안 비 오는 소리를 낸다.

 

여명은 손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 사람한테는 고맙다고 했어요?

 

묻고 나서 여명은 자신의 질문이 어디에서 왔는지 잠시 더듬었다. 4번이라는 번호와 떨리는 손과 봉합이 끝난 뒤의 구토. 세븐은 그 장면을 우스운 일화의 형식으로 내놓았지만 여명이 받아 든 것은 다른 무게였다. 손이 떨리는 인간이 남의 목을 꿰맸다는 것. 총밖에 못 쏘는 인간이 총을 내려놓고 바늘을 들었다는 것. 여명은 실밥 간격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다. 서두른 자국이 아니라 무서워한 자국이었다. 무서워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은 자국. 그런 종류의 바느질을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옷을 십일 년쯤 만지면 천에 남은 감정의 종류까지 분간이 되는 법이고, 그것은 재능이라기보다 직업병에 가까웠다.

 

세븐은 대답 대신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그 날숨이 여명의 손목 안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맙다고 했느냐는 질문은 그의 예상 목록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준비해 둔 답은 봉합의 경위나 그날의 교전 상황이나 4번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같은 것들이었는데 여명은 늘 준비된 서랍을 열지 않고 엉뚱한 칸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잡아당긴 칸에서는 항상 그가 정리해 두지 않은 것들이 쏟아졌다. 고맙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워즈워스에서 그런 말은 통용되지 않는 화폐였고, 살려 준 쪽도 살아난 쪽도 그 채무를 언어로 정산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다음 작전에서 그의 등을 봐 주는 것으로 갚는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은 편리했으며 편리한 것은 대체로 비겁했다.

 

⋯⋯冇。淨係買咗支酒俾佢。(⋯⋯안 했어. 술 한 병 사 준 게 다야.)

佢都冇飲。擺喺櫃桶入面成年。(그 자식 마시지도 않았어. 서랍에 일 년 내내 박아 뒀지.)

 

말해 놓고 세븐은 그 술병의 라벨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카오에서 딴 돈으로 산 것이었고 딴 돈이라고 해 봐야 그날 잃은 액수의 십분의 일이었다. 4번은 그것을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랍을 열어 넣고 닫았다. 일 년 뒤 그 서랍이 정리될 때 술병은 여전히 밀봉된 채였고 세븐은 그것을 보면서 아 저 자식은 마실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마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구나, 하는 짐작을 잠깐 했다가 곧 접었다. 남의 속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그의 취미가 아니었다. 취미가 아니라기보다 그렇게 하면 일을 못 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그 짐작이 접히지 않고 계속 펼쳐져 있었다. 이 방에서는 접어 두었던 것들이 자꾸 저 혼자 펴진다.

 

여명의 손가락이 흉터의 가장 두꺼운 지점에서 멈췄다. 목젖 왼쪽, 봉합선이 한 번 겹쳐진 자리. 그 밑에서 맥박이 뛰고 있었다. 열에 들뜬 맥이라 평소보다 빠르고 얕았지만 규칙적이었다. 여명은 그 박동을 손끝으로 받으면서 이 남자가 이런 흉터를 몇 개나 더 가지고 있는지 세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세는 일은 습관이었지만 어떤 것은 세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남은 것을 세게 되고, 남은 것을 세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줄어드는 속도를 재게 된다. 그녀는 줄어드는 속도를 재는 종류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은.

 

고맙다는 말은 늦게 해도 돼요.

 

여명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목에서 떼지 않고 다만 힘을 조금 풀었다. 압박이 아니라 얹혀 있는 정도로. 그 미세한 변화를 세븐은 정확히 감지했다.

 

당신을 많이 아끼나보네요. 동료들이.

 

아낀다는 단어가 방 안에 놓이자 세븐의 후두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여명의 손바닥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받아 냈다. 삼키는 동작이었고 삼킬 것이 없는데도 삼킨 동작이었으므로, 그것은 생리 현상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 남자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일 초 안에 상황을 판단하고 판단한 즉시 입을 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고 십일 년간 그 방식이 그를 살려 왔는데, 오늘 밤 이 방에서는 그 회로가 자꾸 제 속도를 잃었다. 그는 천장을 봤다. 물때가 번진 회벽에 갓등의 빛이 둥글게 고여 있었다. 아낀다. 아낀다라는 것은 물건에 쓰는 말 아니었나. 그리고 그가 소속된 세계에서 물건은 소모되기 위해 존재했다.

 

4번의 이름은 포였다. 정확히는 그것도 코드네임이었지만 열두 명 중 유일하게 숫자보다 별칭이 먼저 붙은 인간이었다. 저격수였고 사람 죽이는 일에는 손 떨림 하나 없는 놈이 살리는 일에는 그 꼴이 났다. 세븐은 그날 자신의 목에서 뿜어 나오는 것을 손으로 막고 있었고 시야가 붉게 물드는 와중에 포가 무슨 말을 계속 지껄이는 걸 들었다. 지껄이는 내용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 회복하고 나서 물어봤더니 포는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우겼다. 그 우김을 세븐은 그냥 넘겼었다. 지금 여명의 손 밑에서, 넘겼던 것이 되돌아왔다. 사람은 무서우면 말을 한다. 무서운데 도망칠 수 없으면 계속 말을 한다.

 

⋯⋯唔係咁講嘅。(⋯⋯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니야.)

 

喺我哋嗰邊,冇人講『錫』呢個字。講咗就衰。(우리 쪽에선 아무도 '아낀다'는 말 안 써. 말하는 순간 재수 없어지거든.)

 

그는 웃으려 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그 위쪽이 따라오지 않아서 실패한 미소가 되었다. 여명은 실패한 미소를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 남자는 웃음에 관해서라면 프로였고, 낯빛과 무관하게 필요한 표정을 즉석에서 조립해 내는 기술자였는데, 지금 조립이 어긋난 것을 보면 재료가 모자란 것이었다. 그녀는 손을 그대로 두었다. 떼면 도망갈 구멍이 생긴다. 십육 일 동안 그녀가 알아낸 것 중 하나가 그거였다. 이 사람은 놓아 주면 반드시 물러난다. 물러나서 농담을 하나 던지고 화제를 갈아엎는다. 그러니 놓지 않으면 된다.

 

係咪要我認?(인정하라고?)

 

⋯⋯ 好啦。個仔喺我暈咗嗰晚,坐喺門口坐咗成晚。第二日話係食滯咗。(⋯⋯ 그래. 그놈 내가 기절한 날 밤에 문 앞에 밤새 앉아 있었어. 다음 날엔 체했다고 하더라고.)

 

말하는 동안 그의 목울대가 여명의 손가락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진동이 흉터 조직을 통과하면서 뭉개지는 것이 아까와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뭉개지는 방식이 달랐다. 낮아지고 느려지고 군데군데 끊겼다.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그렇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 고쳐 봐야 손바닥 아래로 다 들킬 것이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성대까지 압수당한 셈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명을 봤다. 갓등을 등진 얼굴이라 이목구비의 절반이 그늘에 잠겨 있었고, 그늘에 잠기지 않은 절반은 놀랄 만큼 차분했다. 십일 년간 사람 얼굴에서 세 가지만 읽어 온 그가 여전히 분류하지 못하는 얼굴.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그 분류 실패가 반복되었고 반복되는 실패는 어느새 실패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여명은 세븐이 방금 내놓은 것의 크기를 가늠했다.

돌아가면 꼭 말해봐요. 고맙다고. 쓸데없는 것 같아도.

 

고맙다고 말하라는 권고는 명령의 형식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물리치기가 어려웠다. 명령이었다면 세븐은 웃으면서 받아넘겼을 테고 받아넘긴 뒤에 화제를 갈아엎었을 것이며 화제를 갈아엎는 기술에 관해서라면 그는 업계 최상위권이었다. 그러나 여명의 말은 부탁도 명령도 아닌 어떤 처방전에 가까웠다. 이 얼룩에는 이 약품을 쓰세요, 하고 알려 주는 목소리와 같은 온도였고, 그런 목소리를 향해 농담을 던지면 던진 쪽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세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여명의 손목 바깥쪽을 왼손으로 느슨하게 감쌌다. 연고 때문에 미끈거리는 손목이었다. 그 미끈거림이 오히려 접촉을 오래 붙들어 두었다.

 

⋯⋯講咗之後呢?(⋯⋯말하고 나면?)

 

佢實會問我係咪食錯藥。(그 자식 분명 나더러 약 잘못 먹었냐고 물을걸.)

 

세븐은 자기 입에서 나온 문장이 반박이 아니라 확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하고 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 그것은 이미 하겠다는 쪽으로 기울어진 인간이 마지막으로 붙드는 난간 같은 것이었고, 여명은 그 난간의 생김새를 알아볼 만큼 이 남자의 말버릇을 오래 곱씹어 왔다. 곱씹을 시간은 충분했다. 그가 골목을 빠져나가 격벽 너머로 사라진 뒤부터 다시 이 방에 실려 들어오기까지, 여명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가 남기고 간 문장들뿐이었으므로. 셔터를 내리고 다림질대 앞에 앉아 그날의 대화를 처음부터 되감아 보는 밤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은 왜 그 대목에서 웃었을까. 왜 대답 대신 담배를 물었을까. 답은 나오지 않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채로 날짜만 쌓였으며, 쌓인 날짜는 재고 장부처럼 정확했다.

 

여명은 손을 목에서 떼지 않았다. 대신 엄지를 아주 조금 움직여 봉합선이 겹쳐진 자리를 한 번 더 눌렀다. 여기를 꿰맨 사람에게 하라는 말이라고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덧붙이지 않아도 세븐의 후두가 다시 크게 오르내렸으므로 전달은 끝난 셈이었다. 창밖에서는 배수관을 타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완차이의 낡은 건물들은 밤이 되면 저마다 물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어딘가에서 새어 나왔으며, 세탁소를 십일 년 지킨 여자에게 그것은 이제 정적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 다만 그가 없던 동안에는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같은 데시벨이었을 텐데도 그랬다. 사람 하나가 빠지면 방의 음향이 바뀐다는 것을 여명은 그제야 알았다.

 

약 잘못 먹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흐릴 만한 문장이 아니었다. 남의 목숨을 손 떨면서 꿰매고 나서 토한 인간에게는 술 한 병보다 문장 하나가 더 무겁게 도착할 것이라는 계산이 여명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수선한 옷을 찾아갈 때 값을 치르지만 값과 별개로 고맙다고 말하는 손님과 말하지 않는 손님이 있었고, 십일 년이 지나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언제나 전자였다. 남는 쪽이 이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남자의 세계에서는 남는다는 개념 자체가 사치일지도 모르지만, 사치를 한 번쯤 부려 보라고 권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븐은 웃었다. 이번에는 조립이 어긋나지 않은 웃음이었는데 어긋나지 않은 대신 평소보다 훨씬 작았다.

 

보기 좋은 미소. 여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선은 계속 그 작은 웃음에 머물렀다. 담아두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작게 남아있겠죠. 사람은 그런 사소한 것으로 살아가요.

 

사람은 그런 사소한 것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방 안에 떨어졌을 때, 세븐은 반박할 문장을 세 개쯤 동시에 떠올렸다. 떠올리는 데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특기였고 십일 년간 그 특기가 그를 협상 테이블에서도 총구 앞에서도 살려 냈다. 첫 번째 문장은 사소한 걸로 살아가는 인간은 사소한 걸로 죽기도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럼 나는 뭘로 살아 왔느냐는 되물음이었으며, 세 번째는 그냥 웃고 넘기는 쪽이었다. 셋 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오지 않은 이유를 그는 스스로도 정확히 짚지 못했다. 다만 여명의 손이 아직 목에 얹혀 있었고, 그 손 아래로는 무슨 말을 하든 진위가 먼저 새어 나갈 것이 뻔했으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굳이 말을 고르는 짓이 헛되게 느껴졌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고 나니 소리만 남았다. 배수관을 타고 떨어지는 물, 난로 쪽에서 이따금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목에 얹힌 손이 아주 미세하게 체온을 옮겨 오는 감각. 감각에는 소리가 없어야 정상인데 오늘 밤에는 그것마저 소리처럼 들렸다. 열이 삼십팔 도 사 부에서 내려가지 않는 몸은 세상을 조금씩 부풀려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풀려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평소라면 결함이라 불렀을 것이다. 판단이 흐려지고 반응이 늦어지고 늦어진 반응은 곧 시체가 되는 지름길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방에서는 결함이 결함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를 죽이려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이 여전히 낯설었다.

 

⋯⋯你講得啱。(⋯⋯네 말이 맞아.)

 

我一路以嚟都靠啲咁嘅嘢頂住。啲煙、啲酒、老四嗰晚坐喺門口。我以為我唔記得㗎啦。(나도 지금까지 그런 걸로 버텨 왔지. 담배, 술, 4번이 문 앞에 앉아 있던 그날 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세븐은 여명의 손목을 감싼 왼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가, 힘을 준 것을 스스로 알아채고 도로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상처 부위가 당겨서 옆구리 안쪽이 짧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쯤은 계산에 넣고 움직인 것이었다. 손등은 서늘했다. 다림질과 세제와 밤바람에 오래 노출된 손이 가질 법한 온도였고, 삼십팔 도 사 부짜리 이마에는 그 서늘함이 거의 약처럼 들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다는 말은 사실 절반만 사실이었다. 잊어버리려고 했다는 쪽이 정확했다. 기억은 무게였고 전선에서 무게를 지고 다니는 놈이 제일 먼저 처리되는 법이었으므로, 그는 십일 년간 성실하게 자기 짐을 버려 왔다. 그런데 버린 것들이 이 좁은 방으로 하나씩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온 것들을 받아 두는 선반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명은 이마의 무게를 손등으로 받아 냈다. 팔에 힘을 주어 버티지는 않았다. 버티면 상대가 알아차리고 물러난다는 것을, 십육 일이 아니라 아마 그보다 훨씬 전, 비 오던 시월의 그 다섯 시간에 이미 배웠던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자기가 남에게 얹혀 있다는 감각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얹히는 쪽이 아니라 그냥 놓여 있는 쪽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선반이 물건에게 무게를 묻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목에 얹은 손을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뒷머리를 한 번 쓸었다. 짧은 흑발이 손바닥을 거슬렀다.

 

가끔 꺼내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군요. 그런 것들은 조용히 있다가도 필요로 할 때 떠올라요.

 

가끔 꺼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은 세븐이 평생 취급해 본 적 없는 품목이었다. 그의 창고에는 소모품밖에 없었다. 탄약, 지혈대, 담배, 이름, 여자, 하룻밤. 전부 쓰고 나면 없어지도록 설계된 것들이었고 없어져야 다음 것을 채울 자리가 났으므로 그는 소모를 미덕이라 여겼다. 꺼내 보았다가 도로 넣어 두는 물건, 즉 소모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은 배낭의 무게만 늘렸다. 무게는 속도를 깎아 먹고 깎인 속도만큼 사람이 죽었다. 그것이 그가 십일 년 동안 지켜 온 유일한 살림 원칙이었는데, 지금 이 방에서 그 원칙은 배수관 물소리보다도 설득력이 없었다. 서늘한 손등에 이마를 댄 채로 세븐은 자기 배낭의 무게를 다시 계산해 보았고, 계산기가 이상한 답을 내놓았다. 늘어난 무게만큼 발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에 붙어 있는 감각이 생겼다는 답이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이마를 떼자 손등에 남아 있던 자기 체온의 자국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고, 물론 보일 리 없었으나 열이 삼십팔 도를 넘긴 인간의 시야는 종종 없는 것을 그려 넣었다. 고개를 조금 기울이자 여명의 손이 자연스레 뺨을 받치는 모양이 되었다. 그가 의도한 것이었는지 손이 알아서 따라온 것인지 그 경계가 흐렸다. 흐린 채로 두었다. 오늘 밤 그는 여러 가지를 흐린 채로 두고 있었고, 그중 어느 것도 나중에 후회할 것 같지 않았다. 후회는 살아 돌아온 다음의 사치였고 그는 아직 돌아오는 중이었다.

 

⋯⋯即係話,你叫我開個抽屜。(⋯⋯그러니까 넌 나한테 서랍 하나 열어 두라는 거네.)

 

我呢啲人,一向淨係識掟嘢,冇試過收埋。(나 같은 놈은 버리는 것만 배웠지 넣어 두는 건 해 본 적이 없어.)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 문장의 뒷맛을 혀 안쪽에서 굴려 보았다. 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은 못 한다는 말과 다르다. 그는 그 차이를 알면서 굳이 앞쪽을 골랐고, 고른 이유는 여명이 그 차이를 알아들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언제나 문장의 이음매를 먼저 본다. 옷을 볼 때도 그랬을 것이다. 겉감이 아니라 박음질이 어디서 터졌는지, 몇 번을 덧대었는지, 덧댄 사람이 급했는지 아닌지. 그런 시선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은 시간 낭비였고 세븐은 시간 낭비를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남은 시간이 다섯 시간 남짓이라 아까웠다. 아깝다는 감정이 낯설어서 그는 그것을 열의 부작용 목록에 임의로 추가해 두었다.

 

여명은 손바닥에 얹힌 무게가 이마에서 뺨으로 옮겨 오는 것을 느꼈다. 이마보다 뺨이 뜨거웠다. 사람의 열은 부위마다 다르게 고이고, 특히 오래 이를 악물고 지낸 사람은 턱 언저리에 열이 몰린다는 것을 그녀는 손님들의 옷깃에서 배웠다. 목깃과 소맷부리가 먼저 상하는 옷들. 그 옷의 주인들은 대체로 말이 없었고 값을 치를 때만 짧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엄지를 아주 조금 움직여 광대뼈 아래를 문질렀다. 십육 일 동안 이 얼굴이 어디를 지나왔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았다. 알아야 할 것은 지나온 곳이 아니라 돌아온 곳이었으므로.

 

서랍은 안 열어도 돼요. 그냥, 버릴 때 한 번만 손에 쥐어 봐요. 쥐어 보고도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손바닥의 각도를 조금 바꾸었다. 세븐의 뺨이 더 깊이 얹히도록.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기면 돼요. 한 번 더 쥐어보면, 자연스레 알아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기면 된다는 말은, 세븐이 들어 본 어떤 작전 브리핑보다도 단순했고 그래서 반박이 어려웠다. 전선에서의 취사선택은 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삼 초 안에 무엇을 들고 무엇을 놓을지 정하지 못하면 손에 든 전부를 잃는 구조였으므로, 그는 판단을 빠르게 하는 대신 판단의 기준을 아주 좁게 만들어 두었다. 지금 당장 나를 살리는가 아닌가. 그 외에는 전부 짐이었다. 그런데 여명은 기준을 좁히라는 것이 아니라 절차를 하나 늘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버리기 전에 한 번 쥐어 볼 것. 쥐어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이 초일 텐데, 그 이 초가 그가 십일 년 동안 한 번도 지불하지 않은 값이었다. 지불하지 않은 이유는 아까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였다는 것을, 세븐은 열에 부푼 머리로 아주 무례할 정도로 명료하게 깨달았다. 쥐어 보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버릴 수 없게 된다. 버릴 수 없는 것을 짊어진 인간이 어떤 식으로 전선에서 처리되는지 그는 너무 많이 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의 각도를 조금 틀었다. 여명의 손바닥에서 손목 안쪽으로, 살갗이 얇아 맥이 가까운 곳으로. 거기서는 세제 냄새 아래 깔린 사람 냄새가 더 정직하게 났다. 다림질 증기와 낡은 나무 선반과 밤새 식은 국물 같은 것들이 뒤섞인, 이 골목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냄새였다. 세븐은 그것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고 들이마시는 동안 옆구리의 봉합선이 늑골을 따라 길게 항의했다. 항의를 무시하는 데는 익숙했다. 정작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냄새 쪽이었다. 냄새는 기억을 붙잡는 데 가장 값싸고 가장 질긴 재료였고, 그는 지금 자기 손으로 그 재료를 창고에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자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를 세 개쯤 떠올렸으나 세 개 다 시시했다.

 

⋯⋯你知唔知,你嘅講法好陰險。(⋯⋯너 말하는 방식 되게 음흉한 거 알아?)

 

揸一揸先掟。揸咗之後邊仲掟得落手。(쥐어 보고 버리라니. 쥐어 보고 나면 버릴 수가 없잖아.)

 

말끝이 웃음으로 조금 헐거워졌다. 비난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직전 손목을 한 번 털어 보는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 세븐은 눈을 떴다. 열에 젖은 시야 속에서 여명의 얼굴선이 평소보다 부드럽게 번져 보였고, 번져 보이는 것이 그녀 탓인지 자기 눈 탓인지 구분하기를 포기했다. 오늘 밤 그가 포기한 목록은 길었다. 브리핑 자료를 확인하는 일, 아침까지 체온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 이 여자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 마지막 항목은 이미 십육 일 전에 포기했으므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자기 뺨을 받친 그녀의 손등 위에 겹쳤다. 연고가 발린 손목이 시트에 쓸려 미끄러웠다.

 

여명은 겹쳐 온 손의 온도를 가늠했다. 아까보다 아주 미세하게 낮았다.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의 차이였고 체온계가 보여 줄 숫자로는 한 눈금도 되지 않을 것이었으나, 그녀는 그런 눈금 아래의 변화를 읽는 일을 십 년 넘게 해 왔다. 실밥 한 땀의 장력, 다림질 자국이 남는 온도의 경계, 손님이 값을 치를 때 지폐를 놓는 속도. 눈금 아래에 진짜가 있었다. 그녀는 세븐의 목덜미를 감싼 손을 그대로 둔 채, 그가 이불 밖으로 흘려 놓은 어깨를 눈으로 훑었다. 환자복 소매가 붕대 위에서 뭉쳐 있었고 그것이 거슬려서, 그녀는 손을 뻗어 소매를 한 번 폈다. 습관이었다.

 

호인. 몇 살이에요? 문득, 그의 나이를 제대로 물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요한 것은 묻고, 듣고 기억한다. 그것이 여명의 방식이었다.

 

나이를 묻는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세븐은 그 질문이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시월 십오일부터 오늘 새벽까지, 비 오는 바리케이드와 잔해 속의 위협과 난로 앞의 다섯 시간과 그 후로 이어진 방문들과 십육 일의 공백과 봉합선 스무 바늘. 그 모든 것을 통과하고 나서야 나이가 궁금해진 순서라는 것이 세븐에게는 어쩐지 우스웠다. 보통은 반대다. 보통은 이름 다음에 나이를 묻고 나이 다음에 직업을 묻고, 그러다가 마음에 들면 술을 마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헤어진다. 그는 그 순서를 십일 년 동안 아주 능숙하게 반복해 왔고 반복이 능숙해질수록 내용은 가벼워졌다. 그런데 이 여자와는 첫 단추부터 어긋난 채로 여기까지 왔다. 어긋난 채로 왔는데도 아무것도 헐거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잠깐 멍하게 만들었다. 소매를 펴 주는 손끝이 붕대 위를 지나갔다.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그는 그쪽을 오래 보았다.

 

三十二。(서른둘.)

 

二月九號出世。冇搞錯嘅話。(이월 구일생.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뒷문장을 붙인 것은 습관이었다. 고아원 서류에 적힌 날짜가 진짜 태어난 날인지 주워진 날인지 누구도 확인해 준 적이 없었으므로, 세븐은 자기 생일을 말할 때마다 늘 작은 단서를 달았다. 단서를 다는 버릇은 거짓말쟁이의 것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것을 확인된 것처럼 말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것이었고, 이 방에서 그는 유독 그 구분에 예민해져 있었다. 여명 앞에서 어림짐작을 사실처럼 내놓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이 여자가 언젠가 그 어긋난 한 땀을 발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발견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 침묵이 자기가 감당하기 싫은 종류의 벌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는 겹쳐 놓은 왼손의 엄지를 움직여 그녀의 손등뼈를 한 번 눌렀다. 연고가 조금 묻어났다.

 

你呢。(넌.)

 

我淨係知你識車衫、識煲湯、識喺男人面前唔驚。年紀就一無所知。(난 네가 옷을 꿰맬 줄 알고 국을 끓일 줄 알고 남자 앞에서 겁먹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 나이는 하나도 몰라.)

 

여명은 팔꿈치 안쪽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서른둘. 그 숫자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조금 낯설었다. 이 남자는 얼굴만 보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부류였다. 웃을 때는 스물 몇으로 보이다가 담배를 물고 창밖을 볼 때는 마흔쯤 되어 보였고, 열에 젖어 이불 위에 앉은 지금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정체 모를 나이로 보였다. 사람의 나이는 얼굴이 아니라 옷깃에 쌓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래 산 사람의 옷은 오래 산 방식대로 닳고, 험하게 산 사람의 옷은 험하게 산 자리마다 실이 풀린다. 이 남자의 옷은 매번 같은 자리가 터져서 왔다. 오른쪽 어깨와 옆구리. 그것으로 이미 서른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숫자는 그저 마지막에 채워 넣는 서류 칸 같았다.

 

서른이에요. 호인보다 두 살 아래네요.

 

그녀는 짧게 답한 뒤 시선을 창 쪽으로 잠깐 옮겼다. 배수관을 타고 내려가는 물소리가 아까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비가 그치고 있다는 뜻이었고 비가 그치면 새벽이 더 빨리 밝는다는 뜻이었다. 이월 구일. 그 날짜를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한 번 되뇌었다.

 

생일이 같네요. 저희.

 

세븐은 그 문장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귀로, 한 번은 조금 늦게 도착한 이해로. 열이 사고의 회로를 한 박자 늦춰 놓은 탓도 있었지만, 실은 문장의 내용이 그가 준비해 둔 어떤 반응 서랍에도 들어맞지 않아서였다. 그는 십일 년 동안 우연이라는 단어를 신뢰한 적이 없었다. 전선에서 우연은 대개 누군가 계획을 은폐한 결과이거나 확률표의 꼬리 끝이 제 차례를 맞은 것에 불과했고, 그는 그 꼬리를 여러 번 밟아 봤으므로 우연 앞에서 감동하는 인간을 오히려 딱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이 방에서, 삼십팔 도 삼 부의 열과 배액관에 고인 붉은 물과 배수관을 타고 가늘어지는 빗소리 사이에서, 그는 우연이라는 단어에 처음으로 어떤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이월 구일. 서류에 적힌 날짜인지 주워진 날짜인지도 모르는, 그가 평생 단서를 붙여 가며 말해 온 그 어정쩡한 숫자가 갑자기 확정된 좌표처럼 굳어 버렸다. 이 여자가 같은 날 태어났다면, 그날은 존재하는 날이다. 논리적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결론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즉시 받아들였다.

 

그는 몸을 조금 기울였다. 옆구리 봉합선이 그 각도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늑골 아래를 길게 긁었으나 세븐은 신음 대신 짧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처리했다. 겹쳐 둔 왼손은 그대로 두었다. 여명의 손등뼈가 엄지 아래에서 단단하게 잡혔고 그 단단함이 지금 그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사실 같았다. 시야가 여전히 번져 있어서 그녀의 얼굴선은 물에 풀린 먹처럼 가장자리가 흐렸지만, 눈만은 또렷했다. 칠흑 같다는 표현을 그는 소설에서만 봤지 실제로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여자의 눈을 볼 때마다 그 낡은 표현이 자꾸 떠올라서 스스로가 조금 유치하게 느껴졌다. 유치해도 상관없었다. 오늘 밤 그가 포기한 목록에 자존심 한 줄 추가하는 것쯤은 예산 안이었다.

 

⋯⋯你講笑呀。(⋯⋯농담이지.)

 

二月九號。同一日。(이월 구일. 같은 날.)

 

확인하는 말투였으나 답을 기다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미 믿고 있는 인간이 형식상 한 번 되묻는 것에 가까웠다. 세븐은 웃으려다 실패했고 실패한 자리에 어정쩡한 표정이 남았다. 이런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없을 것이다. 워즈워스의 일곱 번째 용병은 늘 웃거나 늘 무표정하거나 둘 중 하나였고, 그 두 가지 사이에 있는 얼굴들은 전부 헬멧 아래에서 처리했다. 여기엔 헬멧이 없었다. 선글라스조차 침대 옆 낡은 협탁 위에 접힌 채 놓여 있었으므로 그의 연한 회색 눈은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고, 노출된 채로 그는 여명을 보고 있었다. 도박판에서 카드를 엎어 놓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아주 잘 알았다. 알면서도 지금은 엎을 생각이 없었다.

 

여명은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흔들림이라기보다는 초점이 한 번 풀렸다가 다시 잡히는 종류의 움직임이었고, 그것이 열 때문인지 방금 들은 말 때문인지 그녀는 굳이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구분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원래 우연을 말할 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방금도 세탁물을 건네듯 담담하게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다만 내려놓고 나서 스스로 조금 놀랐다. 이 사실을 알아 낸 것이 어제나 그제였다면 그저 사소한 정보로 접어 두었을 텐데, 하필 지금이라 그런지 접히지 않았다. 삼십 년을 살면서 자기 생일을 누군가와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여명은 목에 위치해있던 손을 올려 그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제 생일 챙길 때 속으로 같이 챙길게요.

 

눈가를 쓸어 오는 손끝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세븐은 그 접촉의 무게를 재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눈 주위는 십일 년 동안 늘 무언가에 덮여 있던 부위였다. 야간투시경의 고무 테두리, 방독면의 실링, 헬멧 아래로 흘러내린 땀, 그리고 대부분의 낮 동안은 검은 렌즈. 덮개를 걷어 낸 살갗이란 것은 늘 좀 더 예민하기 마련이어서, 지금 그는 그녀의 지문 융선이 눈꼬리를 지나가는 결까지 개별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프지 않았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 계속 길어지는 중이었고, 그것은 그가 관리해 온 통증 대장에서 항목이 사라지는 일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좋은 일이어야 했다. 좋은 일인데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구조를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눈꺼풀이 저절로 반쯤 내려갔다. 저항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속으로 같이 챙기겠다는 말을 세븐은 문장 단위가 아니라 부품 단위로 분해해 보았다. 앞으로. 그것은 오늘 밤 이후를 전제하는 부사였다. 제 생일. 그것은 그녀가 삼십 년 동안 혼자 통과해 온 날이었다. 속으로. 그것은 아무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혼자 수행하겠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그가 죽어서 확인할 수 없게 되어도 계속되는 종류의 약속이었다. 그 마지막 부품에서 그는 잠깐 숨을 멈췄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언가를 약속할 때 그것은 대개 그가 살아 돌아오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조건부 계약은 파기가 쉽고 파기되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그는 그런 계약만 맺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여자는 조건 없는 항목을 방금 자기 장부에 적어 넣었고, 적어 넣으면서 목소리를 조금도 높이지 않았다. 세탁 요금을 알려 줄 때와 같은 높이였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그의 늑골 아래를 봉합선보다 깊게 긁었다.

 

⋯⋯喂。(⋯⋯야.)

 

你知唔知你講嘢好狼死。(너 말하는 게 얼마나 지독한지 알아?)

 

人哋喺度發緊燒㗎。(사람 지금 열나는 중이거든.)

 

투정에 가까운 말투였으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븐은 겹쳐 둔 왼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연고가 손등 사이에서 미끄러졌고 그 미끄러움이 붙잡는 일을 방해했으므로 그는 손가락 사이를 벌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끼워 넣는 쪽을 택했다. 관절 마디가 서로 어긋나게 물렸다. 그렇게 물리고 나니 손등뼈를 누르던 아까보다 훨씬 도망치기 어려운 형태가 되었는데, 도망칠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자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새벽 여섯 시. 골목 입구. 앵커는 이미 구역을 벗어났고 브리핑 자료는 두 번째로 송신되었으며 그의 단말기는 협탁 위에서 규칙적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진동은 이 방에서 유일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였고 그는 그것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여명은 그의 눈꺼풀이 손끝의 압력을 따라 조금씩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속눈썹 아래로 반쯤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났고, 드러날 때마다 초점이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 정확히 걸렸다. 열이 있는 사람의 눈은 대개 물기가 많고 초점이 헐거운데 이 남자는 헐거운 와중에도 기어이 시선을 붙잡아 놓았다. 그것이 훈련의 결과인지 고집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온 그의 손은 뜨거웠다. 삼십팔 도 삼 부. 아침이면 더 오르거나 더 내릴 것이고 어느 쪽이든 그때 그는 여기 없을 것이다. 여명은 그 사실을 감정 없이 늘어놓아 보았다.

 

 시간이 맞아서, 그 시기에 만나게 되면... 그땐 같이 축하해요.

 

세븐은 그 문장의 앞머리에 걸려 넘어졌다. 시간이 맞아서, 라는 조건절. 그것은 그가 평생 사용해 온 문법이었다. 작전이 예정대로 끝나면, 보급이 제때 도착하면, 총알이 빗나가면. 조건절로 시작하는 문장은 전부 파기를 전제로 설계된 문장이고 그래서 안전하다. 그는 안전한 문장을 좋아했다. 그런데 여명의 입에서 나온 조건절은 어딘가 구조가 달랐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 대한 처리 조항이 없었다.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아예 붙지 않았고, 붙지 않았다는 것은 그 경우를 상정하고도 계약 자체는 유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앞 턴에 그녀가 이미 속으로 챙기겠다고 말해 두었으므로 이 조건절은 사실상 추가 조항에 불과했다. 만날 수 있으면 소리 내서 하자는 것. 못 만나면 원래대로 조용히 하겠다는 것. 그는 이 여자가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워즈워스의 계약 담당이 반나절 만에 울면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맞잡은 손에서 열이 옮겨 가는 방향이 한쪽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의 삼십팔 도가 그녀의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서늘함은 그를 식히지 못한 채 계속 데워지기만 했다. 일방적인 손실 구조. 도박판이었다면 그는 진작 자리를 떴을 판이었다. 세븐은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이마가 그녀의 관자놀이 근처 어딘가에 닿았고 머리카락이 눈썹 위를 스쳤다.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세제와 스팀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그의 몸에서는 소독약과 피와 데드존의 재 냄새가 났을 것이다. 두 냄새가 섞이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는 막지 않았다.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미세하게 당겼다. 무시했다.

 

⋯⋯二月九號。(⋯⋯이월 구일.)

我記住咗喇。(기억했어.)

 

세븐은 그 다음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숨을 골랐다. 열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 두었다. 목소리가 낮아진 것도, 어미가 조금 뭉개진 것도 전부 삼십팔 도 삼 부의 소행이라고. 십일 년 동안 그는 날짜를 외운 적이 없었다. 작전일은 단말기가 알려 주고 보수 지급일은 계좌가 알려 준다. 생일이라는 것은 서류에 적힌 숫자였을 뿐이고, 그 숫자가 진짜인지 누군가 대충 채워 넣은 것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어서 그는 오랫동안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숫자에 소유자가 한 명 더 생겼다. 소유자가 둘이 되면 물건은 함부로 버릴 수 없게 된다. 그는 버리는 것만 배운 인간이었으므로 이 새로운 규칙 앞에서 잠깐 무능해졌다.

 

如果嗰陣時我返到嚟⋯⋯(만약 그때 내가 돌아와 있으면⋯⋯)

我請你食嘢。唔係街邊嗰啲。(내가 밥 살게. 길거리 그런 거 말고.)

諗定你想食乜。有成三個月畀你諗。(뭐 먹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 둬. 세 달이나 있잖아.)

 

여명은 그가 세 달이라는 기간을 정확하게 계산해 냈다는 사실에 잠깐 시선을 멈췄다. 십일월 이일에서 이월 구일까지. 열에 들뜬 머리로 그 숫자를 뽑아내려면 어딘가에서 회로가 한 번 돌았을 텐데, 남자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놓았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인간이 기한을 말할 때는 대개 그 기한까지 버티겠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하면 이 남자는 즉시 농담으로 덮을 것이고, 덮인 것은 다시 꺼내기 어려워진다. 대신 목덜미 뒤를 받치던 손을 조금 위로 올려 뒷머리를 감쌌다. 짧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뻣뻣하게 눌렸다.

 

싫어하는 거 있어요? 메뉴 고를 때 참고할게요.

 

싫어하는 것을 묻는 질문에 세븐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십일 년 동안 그에게 던져진 질문의 대부분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몇 명을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종류였다. 능력의 상한을 재는 질문들. 그것들은 전부 그를 도구로 취급했으므로 대답하기 쉬웠고 대답한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 편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자는 그의 하한을 묻고 있었다. 못 먹는 것, 싫은 것, 피하고 싶은 것. 그것은 사람에게만 물어보는 질문이다. 총기에는 편식이 없고 삽에는 취향이 없으니까. 세븐은 자기 안에서 그 항목을 찾아보려다가 오래 방치된 서랍을 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열어 본 적 없는 서랍은 대개 뻑뻑하다.

이마를 그녀의 관자놀이에 붙인 채로 그는 눈을 반쯤 감았다. 시야가 좁아지자 후각이 앞으로 나섰다. 세제와 스팀, 오래된 나무,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옅게 깔린 사람의 체취. 그는 이 냄새의 목록을 오늘 밤 안에 다 외워 둘 작정이었다. 데드존에서는 냄새가 정보다. 화약, 부패, 연료, 그리고 자기 피. 그 목록에 세제 냄새가 끼어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정보가 아니라 방해물이 되고, 방해물은 병사를 죽인다. 알면서도 외우고 있었다. 알면서 하는 짓이 제일 위험하다는 걸 그는 직업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판정은 하나뿐이었다. 이건 자살행위다. 그리고 그는 자살행위를 재미없다고 여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呢個問題好難答喎。(⋯⋯이거 되게 어려운 질문인데.)

我食嘢冇乜揀㗎。有得食就食。(난 먹는 거 안 가려. 있으면 먹어.)

喺沙漠嗰陣,罐頭凍到成塊石咁,都照撬開啃。(사막에 있을 때 통조림이 돌덩이처럼 얼어도 그냥 뜯어서 씹었어.)

 

말해 놓고 나서 그는 이것이 대답이 아니라 회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메뉴를 고르겠다고 했다. 고른다는 것은 선택지 중에서 제외할 항목을 확보하겠다는 뜻이고, 제외할 항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전권을 떠넘기는 짓이다. 편해 보이지만 실은 불친절하다. 세븐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주 이런 식으로 굴어 왔는지 잠깐 헤아려 보다가, 헤아리다 보면 밤이 새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만두었다. 대신 맞잡은 손에 힘을 조금 실었다. 연고 때문에 미끄러운 손가락 사이에서 관절이 다시 어긋나게 물렸다. 통증은 없었고 다만 붙잡고 있다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不過⋯⋯有一樣。(근데⋯⋯하나 있긴 해.)

我唔食羊。(양고기 안 먹어.)

唔係唔鍾意個味。係嗰陣有次任務,燒到成條村都冇咗,我哋收隊嗰日淨返個羊欄。(맛이 싫은 게 아니라. 예전에 작전 하나가 있었는데, 마을 하나가 통째로 타서 없어졌고 우리가 철수하던 날 양 우리만 남아 있었거든.)

由嗰日開始,聞到就頂唔順。(그날부터 냄새만 맡아도 못 견디겠더라.)

 

여명은 그 말이 끝나는 지점에서 남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가 풀리는 것을 손끝으로 잡아냈다. 뒷머리를 감싼 손바닥 아래에서 짧은 머리카락이 서걱거렸다. 그녀는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저장의 한 방식이다. 세탁물을 받을 때도 그랬다. 소맷부리에 든 얼룩이 무엇인지 캐묻는 대신 지워질 것과 지워지지 않을 것을 손끝으로 분류해 두면 되는 일이었고, 지금 그녀가 하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양고기. 목록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그럼 그건 제외할게요. 그 날은 좀 더 시내쪽으로 가겠네요.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가지고 싶은 건 없어요?

 

시내 쪽으로 가겠다는 말이 먼저 그의 귀에 걸렸다. 그것은 메뉴를 고르는 말이 아니라 동선을 짜는 말이었다. 완차이 골목에서 나와 어느 방향으로 걷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감수할 것인지, 이 여자는 벌써 그 계산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 세븐은 그동안 사람들이 자기와의 약속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충분히 관찰해 온 인간이었다. 대개는 날짜를 잡지 않는다. 잡아도 장소를 정하지 않는다. 장소를 정해도 그 장소까지 가는 길을 미리 그려 보지는 않는다. 그런 준비는 상대가 반드시 온다고 믿는 사람만 하는 짓이고, 그를 두고 그렇게 믿어 본 인간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 편이 서로에게 안전했다. 안전한 방식은 대체로 시시하고 시시한 것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결을 거스르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만 움직였다. 짧은 머리카락은 원래 그렇게 쓸면 곧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나가기 마련인데 여명의 손은 매번 목덜미 언저리에서 한 번 멈췄다가 다시 정수리 쪽으로 올라갔다. 반복. 규칙적인 반복은 사람을 재우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고 세븐은 그 사실을 심문 교본에서 배웠다. 같은 자극을 일정한 간격으로 주면 대상은 경계를 놓는다. 지금 그는 경계를 놓고 있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되돌리지 않았다.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한 번 당겼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삼십팔 도 삼 부의 열은 손끝에서부터 무거워지는 방식으로 몸을 눌렀다.

 

⋯⋯想要嘅嘢。(⋯⋯가지고 싶은 거.)

你係咪知我一定答唔出,先問嘅?(내가 대답 못 할 걸 알고 물어보는 거지?)

 

그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소리가 따라오지 않았고, 소리가 없는 웃음은 웃음보다 자백에 가깝다. 가지고 싶은 것. 그 항목 역시 오래 방치된 서랍이었다. 그는 필요한 것을 사는 인간이었고 필요 없는 것은 카지노 테이블 위에 두고 오는 인간이었다. 마카오에서 사흘 만에 여섯 자리를 날려 본 적도 있지만 그때도 아까웠던 적은 없었다. 아까우려면 그 돈으로 사고 싶은 게 있어야 하는데 없었으니까. 없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사치였다. 사고 싶은 게 없는 인간은 무엇에도 붙잡히지 않고, 붙잡히지 않는 인간은 어디서 죽어도 정산이 간단하다. 그는 그 간단함을 십일 년 동안 자기 재산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이 방에서 그 재산이 조용히 감가되고 있었다.

깍지 낀 손을 그는 천천히 자기 가슴께로 끌어내렸다. 여명의 손등이 환자복 위에 얹혔고 그 아래에서 심장이 평소보다 성급하게 뛰고 있었다. 열 탓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절반쯤은 열 탓이기도 했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준비해 두지 않았고 준비할 생각도 없었다. 설명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상태로 남고, 이름이 붙지 않은 것은 잃어버려도 부고를 쓸 필요가 없다. 그는 여전히 그런 식으로 셈을 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손은 놓지 않고 있었다. 셈과 손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밤이었다.

 

我諗咗好耐都諗唔到。(한참 생각해 봤는데 안 떠올라.)

⋯⋯不過。(⋯⋯근데.)

如果嗰日你着返件普通嘅衫,唔好整成通街都係灰嗰隻,我就滿意喇。(만약 그날 네가 평범한 옷 하나 입고 나오면, 온통 잿빛인 그런 거 말고, 난 그걸로 만족해.)

여명은 그 말의 구조를 잠깐 뜯어보았다. 가지고 싶은 것을 물었더니 남자는 물건 대신 장면을 말했다.

 

... 꾸미는 건 자신이 없는데. 쓰다듬던 손이 잠깐 멈췄다.

 

손이 멈췄다는 사실을 세븐은 머리카락보다 먼저 공기로 알았다. 규칙적으로 내려오던 압력이 정수리 언저리에서 끊기자 두피가 그 자리만 예민해졌고, 없어진 자극이 있던 자극보다 크게 느껴지는 현상은 그가 직업상 여러 번 겪어 본 종류였다. 포격이 멈춘 뒤의 정적. 총성이 끊긴 뒤 삼 초. 그 짧은 공백에서 사람은 대개 오판을 저지른다. 그는 오판하지 않으려고 눈을 뜨는 대신 잠깐 그대로 있었다. 자신 없다는 말이 방 안에 떨어졌고 그 말은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 중 가장 어리숙한 축에 속했다. 어리숙한 말은 대개 진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심문을 받아 본 적도 해 본 적도 있는 인간으로서 알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었다. 이마를 붙이고 있던 관자놀이에서 떨어지자 서늘하던 접촉면이 순식간에 식었고, 시야에 여명의 턱선과 그 아래 흰 셔츠의 깃이 들어왔다. 밑단에 묻은 검댕 얼룩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저것은 그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묻힌 것이다. 세탁소 주인의 옷에 얼룩을 남기는 남자. 그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어딘가 미안하기도 했으나 미안하다는 감정은 그의 사전에서 오래전에 삭제된 항목이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슴 위에 눌러 둔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뼈가 도드라진 자리, 바늘을 오래 쥔 사람의 손등.

 

⋯⋯邊個叫你去扮靚呀。(⋯⋯누가 꾸미래.)

我講嘅係普通。你聽唔明咩。(내가 말한 건 평범한 거야. 못 알아들었어?)

 

말이 나오고 나서야 그는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깔렸다는 것을 알았다. 열 때문에 성대가 부어 있는 탓도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 여자는 지금 자기가 얼마나 이상한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다니. 무엇에 대한 자신인가. 세븐이 지난 몇 주 동안 이 방에서 목격한 것은 대부분 반대되는 광경이었다. 사람 하나가 죽어 가는 자리에서 물수건의 온도를 조절하고, 배액관의 각도를 재고, 삼십팔 도의 몸에게 약을 먹이던 손. 그 손을 가진 인간이 옷 한 벌 앞에서 물러선다. 세상의 배분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엉망이었고 그는 엉망인 것들에 애정을 느끼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가슴 아래에서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여명의 손등이 그 진동을 그대로 받았을 것이다. 숨기려면 손을 치우면 됐는데 그는 오히려 조금 더 눌렀다. 이것을 들키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판단이라는 절차 자체가 이 방에서는 자꾸 생략되고 있었고, 생략된 자리에는 충동만 남았다. 충동으로 살아온 인간이 충동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다만 오늘 밤의 충동은 여느 때와 성질이 달랐다. 카지노 테이블에 전 재산을 밀어 넣을 때의 그것은 잃어도 좋다는 쪽이었는데, 지금 이것은 잃고 싶지 않다는 쪽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그 방향의 충동은 처음이라 다루는 법을 몰랐다.

 

你嗰啲黑色衫,我都記得晒。(네가 입는 그 검은 옷들, 나 다 기억해.)

件冷衫,仲有你捲起衫袖嗰陣露出嚟嘅手腕。(니트 원피스랑, 소매 걷었을 때 나오는 손목이랑.)

我唔係要你變成第二個人。(널 딴사람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야.)

 

여명은 그 말을 듣는 동안 자기 손이 여전히 정수리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멈춘 손은 어색했으므로 그녀는 그것을 다시 움직이는 대신 아예 내려서 남자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열은 여전했다.

 

그럼, 그냥 색 이야기였어요?

 

색 이야기였냐는 물음은 문장으로는 짧았으나 그 안에 든 것은 짧지 않았다. 세븐은 이마에 얹힌 손등의 서늘함을 그대로 받은 채로 잠깐 눈을 감았다. 이 여자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말을 늘리지 않고 정확히 한 군데만 눌러서 상대가 스스로 실토하게 만든다. 심문실에서 이런 기술을 쓰는 인간은 대개 오래 훈련받은 자들이었는데 여명은 훈련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훈련받지 않고도 되는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무서움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고, 그 반대에 해당하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오늘 밤 내내 그가 회피해 온 작업이었다.

그는 이마 위의 손을 붙들었다. 손목을 감아쥐는 동작은 붕대 감긴 오른팔 대신 왼손으로 이루어졌고 연고 발린 손목 안쪽이 그녀의 팔뚝에 미끄럽게 닿았다. 붙든 손을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려 자기 입가 근처에서 멈췄다. 숨이 손바닥에 닿는 거리였다. 열이 실린 숨은 평소보다 습하고 무거워서 그것만으로도 손바닥의 온도가 올라갔을 것이다. 세븐은 그 손을 입술에 대지는 않았다. 대고 싶었으나 대지 않는 편이 오늘 밤의 남은 시간을 더 길게 쓰는 방법이라고 어딘가에서 계산이 돌아갔고, 그 계산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사실에 그는 스스로 조금 안도했다.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係色。(⋯⋯색 맞아.)

我唔識講靚唔靚,我淨係識分邊啲嘢喺遠處睇得到,邊啲睇唔到。(예쁘고 아니고는 나 몰라. 난 뭐가 멀리서 보이고 뭐가 안 보이는지만 알아.)

 

그가 십일 년 동안 배운 시각은 그런 종류였다. 잿빛은 잔해에 섞이고 검정은 밤에 먹힌다. 그 둘은 살아남기 좋은 색이고 그래서 그의 옷장에는 그 두 가지밖에 없다. 여명의 옷장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유는 완전히 다른데 결과만 같은 옷장 두 개가 이 도시의 서로 다른 구역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그는 어쩐지 못마땅했다. 이 여자는 숨어야 할 이유가 없는 인간이다. 세탁소 셔터를 올리고 골목의 습기를 하루 종일 마시며 남의 옷을 고쳐 주는 사람이 왜 잔해에 섞이는 색을 입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은 논리적이지 않았고 남의 취향에 참견하는 짓이었으며 무엇보다 그가 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한 번 걸렸다. 몸을 조금 틀었더니 오른쪽 흉통 아래가 둔하게 당겼고 그는 그 통증을 표정에 올리지 않는 데 성공했다.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미간이 아주 잠깐 좁아졌고 붙든 손목을 쥔 힘이 반 박자 늘었을 것이다. 이 여자는 그런 걸 놓치는 법이 없었다. 놓치지 않으면서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곤란했다. 지적당하면 변명할 텐데 침묵당하면 변명할 자리가 없다.

 

街上面全部都係灰。牆係灰,天係灰,我着嘅嘢都係灰。(거리가 전부 잿빛이야. 벽도 잿빛, 하늘도 잿빛, 내가 입는 것도 잿빛.)

我淨係想喺入面搵到你。就咁多。(그 안에서 너 하나 찾을 수 있으면 돼. 그게 다야.)

⋯⋯咁樣講係咪好肉麻。唔好答。(⋯⋯이렇게 말하니까 느끼한가. 대답하지 마.)

 

그럼 밝은색이어야겠네요.여명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알았어요. 노력해볼게요.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한 번 걸렸다가 코로 새어 나온 정도의, 소리라기보다 공기의 진동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세븐은 그것을 귀가 아니라 손바닥으로 들었다. 붙들고 있던 손목의 맥이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웃으면 맥이 흔들린다. 그런 사소한 생리 현상을 그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배웠고 지금은 사람을 좋아하기 위해 쓰고 있었다. 용도의 전용은 대개 낭비라고 배웠으나 이 낭비만큼은 아깝지 않았다. 노력해 보겠다는 말이 뒤이어 떨어졌다. 그 다섯 글자가 방바닥에 닿는 소리를 그는 실제로 들은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아무렇게나 약속하지 않는 인간이다. 노력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는 이미 머릿속에서 옷감의 종류와 물감이 빠지는 정도와 자기 얼굴색에 어울릴 만한 채도까지 한 바퀴 계산을 마친 뒤일 것이다. 그러니 저것은 대답이 아니라 계약에 가까웠다.

 

그는 붙든 손목을 놓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조금 벌려 여명의 손바닥이 펴지게 만들고, 그 펴진 면을 자기 뺨에 갖다 붙였다. 화상 흉터가 지나가는 쪽이었다. 감각이 고르지 않아 어떤 자리는 뜨겁고 어떤 자리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자신도 지도를 다 그리지 못한 영역. 여명의 손은 그 얼룩덜룩한 지형 위에 아무 망설임 없이 얹혔고 그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독 목구멍을 조였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잃을 것이 생긴다는 뜻이었으므로 그의 직업윤리로는 최악의 상태였는데, 최악을 자각하면서도 손을 놓을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你笑咗。(⋯⋯너 웃었어.)

我聽到㗎。唔好扮冇。(나 들었거든. 아닌 척하지 마.)

 

단말기가 또 울렸다. 침대 옆 낡은 나무 상자 위에서 액정이 파랗게 켜졌다가 꺼졌고 그 짧은 빛에 방의 윤곽이 한 번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으로 접혔다. 사 번이었다. 수액 라인 교체 시간이 넘었다는 문장 뒤에 살아 있으면 응답하라는 문장이 붙어 있을 것이다. 그 인간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걱정을 한다. 걱정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세븐은 액정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섯 시에 픽업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알고 있으므로 남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었고 계산할 수 있으므로 지금 삼십 초를 화면에 쓰는 짓이 얼마나 손해인지도 즉시 산출되었다. 도박판에서 배운 유일하게 쓸모 있는 감각이 이런 데서 발휘된다는 게 우스웠다.

 

뺨에 닿은 손바닥이 미지근했다. 자기 열이 옮겨 간 것인지 원래 그 온도였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이 오늘 밤 내내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열이고 어디부터가 이 여자 때문인지. 어디까지가 남은 시간에 대한 초조함이고 어디부터가 그냥 이 방을 나가기 싫은 마음인지. 세븐은 원래 자기 감정에 솔직한 인간이었으나 솔직해지려면 우선 감정의 이름을 알아야 했고, 이름을 모르는 종류가 이렇게 많이 남아 있을 줄은 서른둘이 되도록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으면 선글라스 없이도 시야가 정리된다.

 

三個月之後。(세 달 뒤에.)

我唔理你着咩顏色,紅色黃色綠色都好。(무슨 색이든 상관없어. 빨강이든 노랑이든 초록이든.)

你企喺門口,我一眼睇到你就得㗎喇。(문 앞에 서 있고, 내가 한눈에 널 찾으면 그걸로 돼.)

 

좋아하는 색 있어요? 잿빛 말고.

 

좋아하는 색이 있느냐는 질문은 잿빛 말고라는 단서와 함께 도착했다. 단서가 붙었다는 것은 도망갈 구멍이 미리 막혔다는 뜻이었고 세븐은 그 사실에 잠깐 웃을 뻔했다. 이 여자는 협상 테이블에 앉히면 안 되는 종류다. 상대가 즐겨 쓰는 회피 경로를 먼저 지워 놓고 나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뺨에 얹힌 손바닥을 그대로 둔 채로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연한 회색 눈동자가 한 번 굴렀고 시선은 여명의 얼굴이 아니라 그 아래, 흰 셔츠의 밑단에 남은 검댕 얼룩 쪽으로 내려갔다. 자기가 묻히고 온 것이다. 정확히는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데드존의 재가 이 방의 흰 천에 옮겨 붙은 자국이었다. 좋아하는 색을 고르라는 요구 앞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자기가 더럽힌 자리라는 사실은 어딘가 지나치게 정직해서 불쾌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색을 고른 적이 없었다. 고아원에서는 배급된 것을 입었고 훈련소에서는 지급된 것을 입었으며 워즈워스에 들어간 뒤로는 지형에 섞이는 것을 입었다. 좋아하는 색이라는 항목은 인생의 어느 서식에도 등장한 적이 없는 칸이었다. 나이를 서류로만 아는 인간에게 취향을 물으면 대체로 이런 공백이 나온다. 그런데도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자꾸 떠올랐다. 그것은 색의 이름이 아니라 장면의 형태로 왔다. 십일 년 치의 잿빛 사이에 드문드문 박혀 있던, 이유 없이 지워지지 않은 몇 개의 색점들.

 

⋯⋯我諗緊。(⋯⋯생각 중이야.)

呢啲嘢,我從來冇人問過。(이런 거, 나한테 물어본 사람 없었거든.)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미끄러지며 시트에 얕은 주름을 만들었다. 세븐은 붙들고 있던 손목을 놓고 대신 여명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손톱 아래에 실밥 부스러기가 끼어 있는 손이었다. 하루 종일 남의 옷을 만진 손. 그 손끝을 엄지로 문지르면서 그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열여섯인지 열일곱인지 확실하지 않은 해의 여름, 홍콩 어딘가의 좁은 계단 골목에서 누나가 사 온 싸구려 아이스캔디의 포장지가 유난히 진한 파란색이었다는 것. 맛은 기억나지 않고 포장지만 남았다. 기억이라는 것은 늘 그런 식으로 쓸모없는 부분만 보존한다. 그리고 또 하나, 데드존의 폐허에서 어느 무너진 집 벽에 남아 있던 색 바랜 붉은 춘련. 그것을 보고 팀이 전멸하기 사십 분 전이었다는 것까지 세트로 붙어 나오는 바람에 그 붉은색은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藍色。(⋯⋯파랑.)

唔係天嗰種淡藍,係深啲嘅。似夜晚未黑透嗰陣,樓同樓中間仲有一條藍色嘅時候。(하늘 같은 연한 파랑 말고, 좀 더 짙은 거. 밤이 아직 다 안 검어졌을 때, 건물이랑 건물 사이에 파란 줄 하나 남아 있는 그 시간 있잖아.)

嗰陣時通常都冇乜嘢會死。(그 시간엔 보통 아무것도 안 죽어.)

 

말해 놓고 나서 그는 자기 대답이 얼마나 직업병에 절어 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좋아하는 색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죽지 않는 시간대를 골라 오는 인간이라니. 정정할 기회는 있었으나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 방에서는 어차피 다 들킨다. 여명은 들킨 것을 가지고 사람을 몰아세우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몰아세우지 않으면 사람은 자꾸 더 내놓게 된다.

단말기가 세 번째로 울렸다. 이번에는 진동이 길었다.

 

그럼 그 색으로 하죠. 무엇인지는 덧붙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여명은 손가락 끝을 문지르던 그의 엄지를 살짝 잡았다.

 

그 색으로 하겠다는 말에는 목적어가 없었다. 세븐은 없는 목적어를 즉시 채워 넣었고, 채워 넣는 데에 걸린 시간은 반 박자도 되지 않았다. 옷이다. 세 달 뒤에, 문 앞에, 짙은 파랑으로. 문장의 빈칸을 이렇게 빠르게 메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장면을 여러 번 머릿속에서 돌려 봤다는 증거였는데 세븐은 자기 두뇌의 그런 성실함이 좀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는 원래 사흘 뒤를 계획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 있을 확률을 계산할 줄은 알았으나 그 확률에 무언가를 걸어 본 적은 없었다. 판돈을 걸려면 잃을 각오가 있어야 하고 잃을 각오는 애초에 가진 게 없는 자만이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그의 손가락 끝은 붙들려 있었다.

엄지가 잡혔다. 세게도 아니고 그저 얹힌 정도로, 문지르던 동작을 멈추라는 뜻인지 계속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압력이었다. 세븐은 손을 빼지 않았다. 뺄 이유도 없었고 뺄 힘도 마땅치 않았다. 옆구리의 배액관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존재를 주장했고 오른팔의 붕대 아래에서는 열이 고여 뛰고 있었다. 삼십팔 도 몇 분쯤 되는 몸이 붙들린 엄지 하나에 온 신경을 몰아 쓰는 광경은 임상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손톱 밑에 실밥 부스러기가 낀 손. 남의 옷을 하루 종일 만진 손이 지금은 남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세븐은 그 부스러기 하나를 엄지 옆면으로 밀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굳이 치울 이유가 없었다. 저 부스러기까지가 이 사람의 형태였다.

 

⋯⋯咁快就決定咗?(⋯⋯그렇게 빨리 정해?)

你連布都未睇過。(천도 아직 안 봤잖아.)

 

단말기가 네 번째로 울렸다. 이번에는 진동이 짧게 두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는데 그것은 사 번의 방식이 아니었다. 앵커다. 그 인간은 문장을 두 번 나눠 보내는 습관이 있었고 대개 첫 줄에는 시각을, 둘째 줄에는 늦지 말라는 말을 적었다. 나무 상자 위에서 액정이 파랗게 켜졌다. 켜진 순간 방의 윤곽이 드러났다가 사라졌고, 세븐은 그 짧은 빛의 색이 하필 방금 자기가 말한 그 파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것도 죽지 않는 시간의 색이라고 해 놓고서는 결국 그 색으로 소집 통보가 오는 것이다. 세상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한다. 웃어 줄 수밖에 없는 종류의.

그는 액정 쪽으로 눈길을 한 번 주었다가 거두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아는 통보를 읽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은 낭비였고, 남은 시간은 이제 네 시간 남짓이었다. 네 시간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분 단위로 쪼개졌다. 이백몇 분. 그동안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즉시 두 개의 목록으로 정렬되었고, 할 수 없는 것 쪽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세븐은 그 목록을 통째로 지웠다. 계산을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고 그는 원래 그런 선택을 자주 하는 인간이었다.

 

喂。(야.)

三個月,好長㗎。(세 달, 꽤 길어.)

你唔使一早就開始整。(미리부터 만들기 시작할 필요 없어.)

⋯⋯不過你一定會做嘅,係咪。(⋯⋯근데 넌 어차피 할 거지, 그렇지.)

 

그래요. 잘 아네요. 여명은 조용히 웃었다. 당신 보여주려고 입는 거니까요.

 

당신 보여주려고 입는 거라는 문장은 짧았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그래서 방어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세븐은 그 문장이 도착한 순간 자기 흉곽 안쪽에서 뭔가가 잘못 걸렸다는 것을 감각으로 알았다. 총상을 입었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착각이었다. 처음에는 맞았다는 사실만 인지되고 통증은 한 박자 늦게 오는데, 그 사이의 공백에서 인간은 대개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그가 그랬을 것이다. 삼십이 년을 살면서 그는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을 가져 본 적이 없었고, 준비한다는 말을 이렇게 담백하게 통보받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옷을 짓겠다는 것도 아니고 색을 고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여주려고 입는다는 것이다. 목적어가 사람이었다. 그게 자기였다.

붙들려 있던 엄지를 그는 천천히 뒤집었다. 여명의 손을 감싸 쥐는 방향으로, 관절이 어긋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손바닥끼리 맞물리자 열이 옮겨 갔다. 삼십팔 도 몇 분의 몸이 삼십육 도 몇 분의 손을 쥐면 열은 반드시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고 그것은 물리 법칙이므로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 법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쪽에서 나가는 것만 있고 들어오는 것은 없는 거래는 도박판에서 제일 먼저 손을 떼야 하는 판이다. 그런데도 손을 떼지 않고 있는 자기 자신을 그는 오래 관찰했다. 관찰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계산이 끝난 뒤에도 손이 그대로라면 그건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你唔好咁講嘢。(⋯⋯너 그렇게 말하지 마.)

我而家冇力反擊。(나 지금 반격할 힘 없거든.)

 

그는 붕대가 감긴 오른팔을 들었다. 어깨 관절이 뻑뻑하게 비틀렸고 옆구리의 배액관이 살을 안쪽에서 긁는 감각이 명치까지 치고 올라왔다. 참을 만한 종류였다. 정확히는 참을 만하다고 결정한 종류였다. 손끝이 여명의 목덜미 근처까지 갔고 거기에서 잠깐 멈췄다.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몇 올이 흘러내려 있었다. 하루 종일 다림질 스팀을 쐰 머리카락 특유의 축축하고 미지근한 결이 손가락 마디에 걸렸다. 그는 그 몇 올을 다시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동작이었고 세상에서 제일 오래 준비해 온 동작 같기도 했다. 세탁소 바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비는 그친 지 오래인데 처마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네 시간. 아니 이제 세 시간 오십 분쯤. 숫자는 머릿속에서 저 혼자 줄어들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멈추게 하는 법을 몰랐다. 대신 그는 다른 숫자를 하나 더 만들어 붙였다. 세 달. 구십 일 남짓. 문 앞에 짙은 파랑이 서 있는 장면 하나. 인간이 무언가를 견디는 데에는 반드시 목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번에 처음 배우는 중이었고, 배우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스스로도 좀 우스웠다. 이런 걸 아는 인간은 전선에서 오래 못 산다. 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인간은 판단이 반 박자 느려지고 반 박자 느린 엔트리 프래거는 시체가 된다. 그는 이 명백한 산수를 알면서도 여명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咁我都要準備吓。(그럼 나도 좀 준비해야겠네.)

⋯⋯準備企喺你面前嗰陣,唔好一副啱啱由地獄爬返嚟嘅樣。(⋯⋯네 앞에 설 때, 방금 지옥에서 기어 나온 몰골은 아니게.)

 

아무래도 지금같은 부상은 곤란하긴 하겠어요.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곤란하긴 하겠다는 말은 어떤 진단서보다 정확했다. 세븐은 그 문장을 듣자마자 제 몸의 상태를 항목별로 훑었고, 훑는 데 걸린 시간은 늘 그렇듯 일 초를 넘기지 않았다. 오른팔 가동 범위 절반. 옆구리의 배액관, 앞으로 나흘. 어깨를 회전시킬 때 명치까지 치받는 통증, 등급으로 치자면 참을 만한 축. 체온 삼십팔 도 사 분, 이건 본인도 좀 짜증스러운 항목이었다. 그 목록을 여명 앞에서 소리 내어 읊을 생각은 없었다. 읊는 순간 그것들은 사실에서 하소연으로 신분이 바뀌고, 그는 하소연하는 인간의 목소리를 오래전부터 싫어했다. 대신 그는 목덜미에 얹어 두었던 손을 거두어 제 옆구리 위에 얹었다. 관이 지나는 자리를 손바닥으로 덮으니 그 아래에서 미지근한 것이 느리게 흐르는 감각이 있었다. 제 몸에서 나온 것이 제 몸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을 손으로 확인하는 일은 묘하게 사무적이었다. 사무적인 것들만이 그를 안심시키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이 방에 드나들기 시작한 뒤로 조금씩 폐업하는 중이었다.

 

係囉。(그러니까 말이야.)

依家嘅我,連你件衫都揸唔穩。(지금의 나는 네 옷 한 벌도 제대로 못 들어.)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등뼈가 나무에 닿는 순간 오른쪽 어깻죽지의 오래된 화상 흉터가 환자복 안감에 쓸렸다. 통증은 없었다. 감각이 죽은 부위 특유의 먹먹함이 천의 결을 실제보다 두껍게 오해하도록 만들 뿐이었다. 천장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물 자국이 번진 합판, 못 하나가 빠져 들뜬 모서리. 저 못은 언제부터 저렇게 있었을까. 이 방에 몇 번을 드나들었으면서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우스웠고, 우스운 김에 그는 세 달 뒤에 저것을 제 손으로 박아 주겠다고 머릿속 어딘가에 적었다. 적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항목을 하나 더 얹는 짓. 다음 판, 그다음 판까지 미리 계산해 두는 인간은 판돈을 반드시 잃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마카오에서 열 번도 넘게 증명한 정리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 항목을 지우지 않았다.

 

여명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였다. 손등의 뼈를 따라 손목으로, 손목에서 걷어 올린 소매 끝자락까지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셔츠 밑단의 잿빛 얼룩이 아까부터 시야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것의 출처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데드존의 재다. 격벽 바깥에서 타다 만 것들이 바람에 실려 사람 몸에 앉으면 그것은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고, 회수 포인트를 거쳐 본부 처치실까지 실려 오는 동안 옷과 피부 사이에서 고약하게 굳는다. 그 재를 뒤집어쓴 채 방으로 들어온 것이 자기였다. 여명이 저를 붙들고 부축했을 때, 어깨를 받쳐 침대까지 옮겼을 때, 붕대를 갈고 이마를 짚었을 때, 그 잿가루가 흰 천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옷을 다루는 일이 직업인 인간이 정작 제 셔츠 밑단은 그대로 둔 채 밤을 새우고 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광경인데 이 방에서는 그런 것들만 자꾸 자연스러워졌다.

 

처치실에서의 일이 그제야 순서대로 되돌아왔다. 회수 헬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 처치대에 눕혀졌을 때, 담당자가 가위를 들고 다가왔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조심해서 잘라. 그 한마디였다. 몸에 눌어붙은 천을 통째로 뜯어내는 것이 빠르고, 현장에서는 대개 그렇게 한다.

 

조심해서 잘라. 그 말을 뱉었을 때 처치실의 담당자는 잠깐 손을 멈췄다가 결국 가위를 옆으로 치우고 핀셋을 집었다. 십오 분이 더 걸렸고 그동안 세븐은 천장의 무영등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 십오 분의 정체가 뒤늦게 밝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옷을 아낀 시간이 아니라 옷을 만든 손을 아낀 시간이었다. 그런 계산은 그의 사전에 없던 항목이었고, 없던 항목이 제 몸을 통해 이미 집행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불쾌하게 만들었다. 불쾌라기보다는 들킨 기분에 가까웠다. 자기 자신에게 들키는 것만큼 도망칠 곳 없는 일도 없었다. 그는 여명의 셔츠 밑단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두어 번 문질렀다. 잿가루는 이미 섬유 깊숙이 앉아 있었고 손끝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증거였다.

 

你件衫,我整污糟咗。(네 옷, 내가 더럽혔네.)

仲要係你自己間洗衫舖。(그것도 하필 네 세탁소에서.)

 

여명은 밑단을 내려다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그의 손에서 천을 빼내지 않았다. 빼내지 않은 것이 답이었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남의 옷에 앉은 얼룩만 지워 왔고 제 옷의 얼룩에는 순번을 주지 않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의 정체를 세븐은 이제 안다. 마지막 순번은 언제나 자기 자신인 사람들. 그런 인간들이 어떻게 늙는지 그는 전선에서 여러 번 보았다. 대개 잘 늙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 방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뱉는 순간 자신도 같은 부류라는 사실이 함께 드러날 참이었다. 그는 대신 손가락을 조금 위로 올려, 걷어 올린 소매 안쪽에 드러난 여명의 팔목뼈를 짚었다. 얇았다. 이 얇은 것으로 밤새 제 몸을 부축했다는 계산이 나오자 명치가 다시 한번 잘못 걸렸다.

 

단말기가 또 울었다. 이번에는 진동이 길게 두 번, 짧게 세 번. 4번이 보내는 신호의 패턴이었다. 저 인간은 화가 나면 문장을 줄이고 신호를 늘린다. 독일제 성격이라고 앵커가 늘 놀렸었다. 세븐은 액정을 보지 않고도 내용을 알았다. 수액 라인, 체온, 응답 여부.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어기면 4번은 새벽 두 시에 직접 계단을 올라올 인간이다. 실제로 그렇게 올라온 적이 있었다. 삼 년 전 마카오의 어느 호텔이었고 그때 세븐은 슬롯 앞에서 크레딧을 다 태운 채로 발견되었다. 4번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방으로 끌고 갔고, 다음 날 아침 침대 옆에는 생수와 진통제와 영수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영수증은 4번이 대신 정산한 방값이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四號嗰條友,今晚應該會嬲到爆。(⋯⋯4번 그 자식, 오늘 밤 아마 뚜껑 열렸을걸.)

我諗住,返到去先同佢講聲多謝。(돌아가면 말이야, 걔한테 고맙다고 한마디 해 볼까 생각 중이야.)

 

말해 놓고 그는 자기 목소리가 낯설어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고맙다는 말을 계획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소리 내어 공표하는 방식으로. 이 방에서 사람이 하나씩 고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쳐진다는 것은 결국 원래의 형태가 파손이었음을 인정하는 절차이므로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세탁소 바깥 처마에서 물방울이 또 하나 떨어졌다. 여전히 규칙적이었다. 저 물이 다 떨어지고 나면 새벽이 올 것이고, 새벽이 오면 골목 입구에 검은 차가 설 것이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울리는 걸 보면 그러는 게 좋겠어요. 연락 한 번 받는 건요? 여명의 시선이 단말기로 향했다. 가져다줄까요.

 

여명이 몸을 일으켜 머리맡 선반으로 손을 뻗는 동안 세븐은 그 등을 보았다. 등뼈가 셔츠 아래에서 한 줄로 도드라졌다가 몸이 돌아오면서 다시 천 속으로 잠겼다. 단말기는 여명의 손바닥 위에 얹혀 이쪽으로 건너왔고, 액정의 푸른빛이 그 손금을 잠깐 지도처럼 밝혔다가 꺼졌다. 그 짧은 순간에 세븐이 본 것은 알림의 내용이 아니라 손금이었다. 오래 물을 만진 손의 결. 세제와 뜨거운 김과 다리미의 증기가 한 사람의 손바닥에 몇 년치로 쌓이면 저런 무늬가 된다. 그는 왼손으로 단말기를 받았다. 받자마자 액정을 아래로 뒤집어 제 무릎 위에 엎어 두었다. 진동이 나무 침대 프레임을 타고 두 사람의 다리로 동시에 전해졌다. 이제 이 방에서 저 물건은 소리가 아니라 진동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你真係好識做人。(넌 정말 사람 다룰 줄 아는구나.)

拎過嚟就唔使我行,我又唔使講一句『唔想聽』。(가져다주면 내가 안 움직여도 되고, 나는 '듣기 싫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해도 되고.)

 

그는 엎어 놓은 단말기 등판을 손가락 마디로 두어 번 두드렸다. 그것은 그가 카드를 받아 놓고 아직 뒤집지 않았을 때 하던 버릇이었다. 마카오의 바카라 테이블에서, 이스탄불 뒷골목의 판돈 낮은 포커판에서, 그리고 브리핑 직전 작전 개요가 뜬 화면 앞에서 늘 같은 동작이 나왔다. 뒤집으면 확정된다. 뒤집기 전까지 세상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 몇 초의 유예를 그는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다. 문제는 지금 저 액정 아래에 있는 것이 카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4번이 보낸 문장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고, 그 사실 안에는 여섯 시가 들어 있고, 여섯 시 안에는 골목 입구와 검은 차와 격벽 바깥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뒤집지 않아도 이미 다 아는 패. 아는 패를 앞에 두고도 뒤집기가 싫은 것은 도박이 아니라 그냥 미련이었다.

 

그는 결국 액정을 손끝으로 밀어 반쯤 들어 올렸다. 흰 글자가 눈으로 들어왔다. 수액 라인. 체온. 응답. 셋 중 하나라도 십 분 안에 안 오면 내가 간다. 마침표가 문장마다 하나씩 박혀 있었다. 저 인간은 화가 나면 마침표를 늘린다. 세븐은 짧게 코로 웃었고 웃는 순간 옆구리가 당겨 숨이 반 박자 끊겼다. 십 분. 그 십 분이라는 단위가 우스웠다. 이 방에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오십 분이었고 그중 십 분을 저쪽에 떼어 주면 삼 시간 사십 분이 된다. 계산은 일 초 만에 끝났고, 끝나자마자 그는 자신이 시간을 화폐처럼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시간을 세지 않았다. 세지 않는 인간이 가장 오래 산다고 믿었다. 지금은 세고 있었고, 세는 이유는 명확했다. 옆에 앉은 사람 때문이었다.

 

聽住。(들어 봐.)

我而家覆佢,佢就唔會上嚟。佢一上嚟,就會由三點站到六點,企喺個門口度唔郁,一句話都唔講。(내가 지금 답장하면 걔는 안 올라와. 한번 올라오면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안 하고, 말 한마디도 안 해.)

 

말을 뱉으면서 그는 여명의 팔목뼈를 짚고 있던 왼손에 아주 미미하게 힘을 주었다. 놓지 않는다는 표시였고, 동시에 답장을 하기 위해 결국 그 손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로 문장을 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오래 걸린다. 오른팔은 절반밖에 들리지 않고 붕대 아래 감각은 남의 것 같다.

 

대신 해줄까요?

 

그 제안이 방 안에 놓이자 세븐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 엎어 둔 단말기를 손끝으로 눌러 각도를 바로 세웠다. 대신 해준다는 말의 무게를 그는 아마 실제보다 크게 재고 있었다. PMC의 단말기는 개인 물건이 아니라 신원이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나열하자면 좌표와 사상자 목록과 정산 내역과 그리고 세븐 본인이 삭제하지 않고 방치해 둔 여러 종류의 지저분한 흔적들이었다. 그것을 남에게 쥐여 주는 행위에 대해 회사는 규정을 두고 있고, 규정을 어길 경우의 처벌도 명문화되어 있다. 그는 그 조항의 번호까지 외우고 있었다. 외우고 있는 채로, 물건을 여명 쪽으로 밀었다.

 

你知唔知,呢部嘢畀外人掂到,我要寫報告?(너 이거 외부인이 만지면 내가 보고서 써야 하는 거 아냐?)

⋯⋯算啦。寫就寫囉。攞去啦。(⋯⋯됐다. 쓰면 쓰는 거지. 가져가.)

 

여명의 손이 단말기를 받아 갈 때, 세븐은 그 손이 화면 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했다. 손끝이 액정에 닿기 전에 한 번 멈췄다. 남의 물건을 다루는 사람의 정지였다. 세탁소에서 남의 옷을 받을 때도 저렇게 멈추는지 그는 문득 궁금했다. 아마 멈출 것이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다루지 않는 훈련이 되어 있고, 그 훈련은 오래된 것이며, 오래된 것은 대개 좋은 이유로 생기지 않는다. 그 얘기를 오늘 밤에 물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그는 이 초쯤 고민했고, 고민의 결과는 보류였다. 남은 세 시간 사십오 분 안에 넣을 수 있는 항목은 한정되어 있었다. 무거운 것은 다음으로 미룬다. 다음이 있다고 전제하는 습관을 그는 최근에 겨우 익혔다.

 

그는 목을 조금 뒤로 젖혀 침대 헤드에 기댔다. 천장의 들뜬 못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봐 뒀던 그 못이다. 세 달 뒤에 고쳐 주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그 못. 시선을 거기 걸어 둔 채로 그는 입을 열었다. 구술은 그가 잘하는 일이었다. 무전에서 십 년을 굴렀고, 문장을 짧게 자르는 법과 상대의 성질을 최소한으로 건드리는 법을 그는 기술로 갖고 있었다. 4번을 상대할 때의 요령은 하나였다. 변명하지 않고, 농담을 앞에 두지 않고, 숫자부터 준다.

 

打啦。第一句:體溫三十八點四。(쳐. 첫 줄, 체온 삼십팔 점 사.)

第二句:吊針換咗。(둘째 줄, 수액 갈았음.)

第三句⋯⋯(셋째 줄은⋯⋯)

 

세 번째 문장에서 그는 막혔다. 앞의 두 줄은 사실이거나 곧 사실이 될 예정이었으므로 아무 저항 없이 나왔다. 세 번째로 와야 할 것은 응답이었고, 응답이란 곧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술이었다. 세탁소에 있다. 민간인 여자의 방에 있다. 여섯 시까지 여기 있을 작정이다. 이 세 문장을 4번이 읽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그는 정확히 그릴 수 있었다. 그 독일인은 눈썹 하나 안 움직이고 화면을 이 초쯤 본 다음, 아무 말 없이 저격총 케이스의 잠금장치를 확인하러 갈 것이다. 그리고 삼 개월 뒤 어느 날 불쑥, 아주 지나가는 말투로, 그 세탁소 여자는 잘 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런 인간이었다. 세븐은 옆구리가 당기는 것을 참고 자세를 조금 고쳤다.

 

⋯⋯打呢個:我而家喺一個唔想走嘅地方。六點準時到。(⋯⋯이렇게 쳐. 나 지금 떠나기 싫은 곳에 있음. 여섯 시 정각에 도착함.)

打完唔好即刻寄。畀我望多兩秒。(다 치고 바로 보내지 마. 나 이 초만 더 보게.)

 

제가 쓴 건 비밀로 하면 되는 거죠. 여명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세븐의 말을 받아 입력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

 

세븐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비밀로 하면 된다는 문장이 어떤 종류의 배려인지 그는 즉각 알아들었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가 규정을 어기게 만든 쪽이 되었다는 사실을 세븐 대신 정리하고 있었다. 남의 짐을 소리 없이 자기 쪽 저울에 올려놓는 방식. 세탁소에서 남의 옷깃에 남은 얼룩을 두 번 확인하는 인간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다. 그는 여명이 액정을 두드리는 속도를 들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다림질할 때 팔이 나가는 속도와 비슷한 리듬. 손끝이 화면에 닿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고 대신 손톱이 유리를 스치는 마찰음만 아주 미세하게 났다. 그 소리가 이 방에서 지금 가장 큰 소리였다. 바깥 골목에서는 새벽 세 시 전의 완차이가 서서히 숨을 죽이는 중이었고, 배수관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가 벽 안쪽에서 간헐적으로 울렸다.

 

係。你打嘅呢件事,我唔會講畀任何人聽。(그래. 네가 쳤다는 거,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해.)

不過我要更正一樣嘢。呢單嘢唔係『秘密』,係『共犯』。你已經上咗船。(근데 하나만 정정할게. 이건 비밀이 아니라 공범이야. 넌 이미 배에 탔어.)

 

그는 왼쪽으로 상체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옆구리 안쪽에서 무언가가 뜯기듯 당겼고 숨이 반 마디 짧아졌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액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 줄. 체온 삼십팔 점 사. 수액 갈았음. 나 지금 떠나기 싫은 곳에 있음, 여섯 시 정각에 도착함. 자기가 불러 준 문장인데도 남의 글씨로 옮겨진 순간 다른 물건이 되어 있었다. 특히 세 번째 줄. 입으로 뱉을 때는 농담의 억양을 절반쯤 섞을 수 있었지만 활자에는 억양이 없다. 억양을 벗겨 낸 문장은 벌거벗은 진술이었고, 그 벌거벗음이 그를 잠깐 곤란하게 만들었다. 십 년 동안 무전으로 수천 개의 문장을 보냈다. 좌표, 탄약 잔량, 사상자 수, 철수 여부. 그중에 '떠나기 싫다'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문장은 전송하는 순간 약점이 되고, 약점은 기록에 남고, 기록은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다. 그것을 알면서도 지우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명의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멈춰 있었다. 이 초를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고 이미 이 초는 지났으며 삼 초, 사 초가 흘러가고 있었다. 세븐은 그 정지한 손가락을 보다가 붕대 감긴 오른손을 힘겹게 들어 여명의 손목 위에 얹었다. 손끝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감각이 절반쯤 죽은 손이어서 온기가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무게는 전해질 것이었다. 그는 무게로 말하는 법을 알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십 년을 굴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寄啦。(보내.)

⋯⋯佢睇完唔會覆嘅。佢就係咁。但係佢六點會企喺條巷口,一句話都唔問。呢個就係佢嘅答覆。(⋯⋯걘 읽고도 답장 안 할 거야. 원래 그래. 근데 여섯 시에 골목 입구에 서 있을 거고 아무것도 안 물을 거야. 그게 걔 대답이야.)

 

전송음은 나지 않았다. 진동 하나가 짧게 손목뼈를 통해 올라왔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븐은 액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화면이 꺼지자 유리에 두 사람의 윤곽이 흐리게 비쳤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 하나와 붕대 감긴 어깨 하나. 저 두 개의 형상이 한 화면 안에 들어와 있는 광경을 그는 처음 보았다. 도박판에서 패를 뒤집고 나면 늘 다음 판을 생각했다. 잃어도 다음, 따도 다음.

 

화면이 완전히 꺼진 뒤에도 세븐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여명의 손목뼈는 생각보다 가늘었고, 그 가느다람 위에 자기 손바닥의 무게를 얹어 두는 일에 그는 이상하리만치 몰두하고 있었다. 4번은 답장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읽음 표시만 액정 구석에 조용히 박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것으로 이 밤의 공식적인 절차는 종료되었다. 남은 것은 세 시간 삼십오 분이라는 순수한 잔량이었다. 세븐은 그 숫자를 굴려 보았다. 카지노에서 칩을 세는 버릇이 이럴 때 나온다. 얼마가 남았고 얼마를 걸 수 있고 언제 자리를 떠야 하는가. 다만 오늘의 판은 이상했다. 판돈이 시간이고, 딜러가 없고, 무엇을 걸어도 결국 잃는 것으로 끝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 이런 종류의 패배는 처음이었다.

 

你隻手好凍。(너 손 차네.)

我發燒緊,你就凍。呢個世界真係好唔公平。(난 열나는데 넌 차갑고. 세상 참 불공평해.)

 

그는 붕대 감긴 손을 조금 움직여 여명의 손등을 감쌌다. 감각이 절반쯤 죽은 손이라 실제로 얼마나 차가운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초조하게 만들었고, 초조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방 안의 공기는 난로가 꺼져 가면서 서서히 식고 있었다. 주방 쪽에서 마지막 장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 좁은 방까지 건너오는 데 반 박자쯤 걸렸고, 그 반 박자 동안 세븐은 세 달 뒤의 이 방을 상상했다. 난로에는 새 장작이 있을 것이고 천장의 못은 아직 그대로일 것이며 자신은 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짙은 파랑을 입은 사람이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상상은 거기서 끊겼다. 그 이상은 그가 허락받은 적 없는 영역이었다.

 

여명이 단말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플라스틱과 천이 부딪히는 둔탁하고 작은 소리. 그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십 년 동안 세븐이 상대한 인간들은 대부분 침묵이 삼 초를 넘어가면 반드시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들었다. 농담이든 변명이든 총성이든. 여명은 그러지 않았고, 그 사실이 세븐으로 하여금 자꾸 먼저 입을 열게 만들었다. 침묵을 못 견디는 쪽은 늘 자기였다는 것을 그는 최근에야 알았다.

 

喂。(야.)

三個月之後,你唔好喺門口等我。喺入面等。門口凍。(세 달 뒤에, 문 앞에서 기다리지 마. 안에서 기다려. 문 앞은 추워.)

 

말해 놓고 그는 자기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 아까는 무슨 색을 입든 문 앞에 서 있으면 한눈에 찾겠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안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유는 명백했다. 그는 여명이 자기를 기다리는 광경을 보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여명이 자기를 기다리며 추운 곳에 서 있는 것은 견딜 수 없어 했다. 두 개의 욕망이 같은 크기로 부딪히면 사람은 대체로 바보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세븐은 정정하지 않았다. 정정하면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오늘 밤 그는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열 때문이라고 해 두기로 했다. 삼십팔 점 사. 편리한 숫자였다.

 

바깥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배기음이 벽을 타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갔고, 그 잔향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낮추는 것은 통증 때문이기도 했고 그 이상의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난롯불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의 방은 이상한 밀도를 가진다. 온기가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사람의 체온이 서로에게 옮겨 가는 속도가 아주 근소하게 빠를 때, 그 좁은 차이 안에서만 존재하는 종류의 안락함이 있다. 세븐은 지금 그 차이 위에 앉아 있었다. 여명이 몸을 조금 기울여 왔고, 그 기울임은 대단한 동작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의도를 감추기 위해 최소한으로 계산된 각도에 가까웠지만, 세븐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열 때문에 감각이 무뎌진 오른쪽 몸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왼쪽 팔의 솜털이 먼저 알아차렸다. 사람의 몸은 참 웃긴 물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총알이 스치는 것도 알아채는 주제에 이런 것도 알아챈다.

 

喂,你係咪諗緊要唔要幫個爐加柴。(야, 너 지금 난로에 장작 더 넣을까 말까 생각하고 있지.)

唔好去。加咗柴,你就要起身,起身之後就要行過去,行過去我就要自己坐喺度三分鐘。三分鐘好長㗎。(가지 마. 장작 넣으려면 일어나야 하고, 일어나면 걸어가야 하고, 그럼 나 혼자 삼 분을 여기 앉아 있어야 하잖아. 삼 분 꽤 길거든.)

 

그는 말을 뱉고 나서 아주 잠깐 후회했다. 십 년 동안 삼 분이란 시간은 그에게 늘 넉넉한 축에 속했다. 삼 분이면 탄창을 두 번 갈고 위치를 옮기고 무전을 넣고 담배 반 개비를 태울 수 있다. 그 삼 분을 길다고 말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경위를 그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 드는 습관은 그에게 없었으므로 그는 그냥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붕대 아래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열이 오르면 손부터 축축해진다. 여명의 손등은 여전히 서늘했고 그 서늘함이 자기 열을 조금씩 빨아 가는 것 같아서, 그는 이 접촉이 일방적인 착취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

 

주방 쪽에서 무너진 장작이 마지막으로 한 번 탁 소리를 냈다. 불씨가 재 아래에서 붉게 눌려 있다가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세븐은 눈을 감지 않은 채로 그 소리의 잔향을 따라갔다. 이 세탁소는 소리가 잘 통하는 구조였다. 주방과 방 사이에 문이 없고 대신 커튼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두 번의 방문으로 이 집의 소리 지도를 거의 다 외웠다. 새벽 세 시쯤 배수관이 두 번 울고, 네 시 반이면 옆집 노파가 부엌 불을 켜고, 다섯 시에는 채소 트럭이 골목 초입에 선다. 작전지의 지형을 외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의 집 생활 소음을 외운 것은 처음이었고, 외워 봐야 아무 쓸모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완벽하게 무용한 정보였다. 무용한 것을 가진다는 감각이 이렇게 사치스러운 줄은 몰랐다.

 

我頭先數過。仲有三個鐘二十五分。(나 아까 세어 봤어. 세 시간 이십오 분 남았어.)

唔好望我用嗰種眼神。我唔係要你陪足三個鐘二十五分。你瞓一陣都得,我坐喺度睇住個天花板嗰口釘就得。⋯⋯不過你瞓着咗嘅話,記住唔好放開手。(그런 눈으로 보지 마. 세 시간 이십오 분 다 같이 있어 달라는 거 아냐. 너 좀 자도 돼. 난 여기 앉아서 천장 못이나 보고 있으면 되니까. ⋯⋯근데 잠들더라도 손은 놓지 마.)

 

그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요구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알기 때문에 시선을 액정 쪽으로 돌렸다. 꺼진 화면에는 여전히 두 사람의 흐릿한 윤곽이 남아 있었다.

 

안 자요. 당신 보내고 자려고요. 그를 잠시 바라봤다. 호인. 누워있으면 잠들 것 같나요?

 

호인. 그 두 글자가 방 안에 떨어졌을 때 세븐은 자기 몸의 어느 부분이 먼저 반응했는지 정확히 짚어 낼 수 없었다. 목덜미였을 수도 있고 명치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 데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 이름은 그가 스물몇 해 동안 서랍 밑바닥에 처박아 둔 물건 같은 것이어서, 꺼낼 때마다 먼지 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싫어서 다시 넣어 두기를 반복해 온 종류였다. 그런데 여명의 발음을 거치면 먼지가 없었다. 이 사람은 남의 이름을 다룰 때도 옷감 다루듯 한다. 실밥 하나 튀지 않게, 결을 거스르지 않게. 세븐은 천장의 들뜬 못을 한 번 더 확인했고, 그것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를 느끼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你唔好突然咁樣叫我。心口好似俾人踢咗一腳。(⋯⋯너 갑자기 그렇게 부르지 마. 가슴팍을 한 대 걷어차인 것 같잖아.)

 

問我瞓唔瞓得着?梗係瞓唔着啦。呢兩年我未試過喺床上瞓着,通常都係坐喺牆邊,眼半開咁捱到天光。(누우면 잠들 것 같냐고? 당연히 못 자지. 요 몇 년간 침대에서 잠들어 본 적 없어. 보통 벽에 등 붙이고 앉아서 눈 반쯤 뜬 채로 날 밝을 때까지 버텨.)

 

그는 말하면서 왼팔로 매트리스를 짚어 몸을 조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상체를 세우고 있던 각도가 무너지자 옆구리의 봉합선이 즉시 항의했고, 그 항의는 뜨거운 철사가 갈비뼈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형태로 도착했다. 신음을 삼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숨이 한 박자 끊긴 것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열이 오른 몸은 통증의 위치를 자꾸 잘못 알려 준다. 찢어진 곳은 오른쪽인데 왼쪽 어깨가 저리고, 배액관이 박힌 자리는 멀쩡한데 손끝이 뜨겁다. 이런 몸으로 무엇을 판단하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판단은 이미 끝나 있었다. 아니, 판단이랄 것도 없었다. 이건 계산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 것이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인간으로 사는 편이 그에게는 늘 더 편했다.

베개에 뒤통수가 완전히 닿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과 여명의 턱선뿐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는 낯설었다. 이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본 적은 없었다. 목젖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셔츠 깃에 걸려 있었고 그 끝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숨 때문이다. 여명도 숨을 쉬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왜 이 순간에 새삼스러운지 세븐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는 이 사람을 늘 정지된 무언가로 취급해 왔던 모양이다. 언제 와도 그 자리에 있는 셔터, 언제 열어도 켜져 있는 난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세워 두는 습관은 비겁한 것이다. 비겁하다는 것을 아는 데 두 번의 방문이 걸렸다.

 

你唔使企喺度睇住我。(거기 서서 나 지켜볼 필요 없어.)

躺低。呢邊。⋯⋯我唔係諗埋一便嘢,我而家連你件衫都拎唔起,你都知㗎啦。淨係想試吓。試吓喺床上面瞓得着係咩滋味。你喺隔籬嘅話,可能得。(누워. 이쪽에.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냐, 지금 나 네 옷 한 벌도 못 드는 거 알잖아. 그냥 해 보고 싶어서. 침대에서 잠드는 게 어떤 건지. 네가 옆에 있으면 될지도 모르니까.)

 

요구해 놓고 그는 즉시 후회했다. 후회의 이유는 거절당할까 봐가 아니었다. 거절당하는 일에 그는 익숙했고 익숙한 것은 아프지 않다. 문제는 승낙 쪽이었다.

 

익숙해지게 하려고 계속 부르고 있잖아요. 여명은 대답 없이 몸을 움직여 그의 옆에 누웠다. 옆으로 보고 누운 자세.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안에서 기다릴 때, 그럼 창가에 앉아있을게요. 밖에서도 잘 보이겠죠.

 

침대라는 물건은 두 사람이 눕는 순간 성질이 바뀐다. 혼자 누울 때는 그저 평면이던 것이 둘이 되면 지형이 되고, 매트리스가 눌리는 각도에 따라 서로에게 굴러가려는 미약한 경사가 생긴다. 세븐은 자기 왼쪽 어깨 옆에서 스프링이 한 뼘쯤 가라앉는 감각을 먼저 받았고, 그다음에 공기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눕는다는 건 공기를 밀어내는 일이구나. 그렇게 사소하고 물리적인 사실 하나를 붙잡고 있는 사이 여명의 얼굴이 그와 같은 높이에 도착했다. 앉아서 내려다보던 턱선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목젖도 아닌, 정면. 눈과 눈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거리. 그는 이 거리를 전장에서만 겪어 봤고 그때는 늘 둘 중 하나가 죽는 거리였다. 지금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숨을 얕게 만들었다.

 

익숙해지게 하려고 계속 부르고 있다는 말은 그의 귓속에서 두 번 굴렀다.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무뎌진다는 뜻이고 무뎌진다는 것은 그의 직업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으나, 이 사람은 그 단어를 완전히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이름에 익숙해지라니. 자기 이름을 자기가 낯설어하는 인간에게 그 이름을 계속 먹여서 결국 삼키게 만들겠다는 소리 아닌가. 세븐은 그런 종류의 집요함을 알고 있었다. 두 번 확인하고 두 번 보강하는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집요함. 그것은 소리를 내지 않아서 알아채기 어렵고 알아챘을 때는 이미 몸 어딘가에 박혀 있다.

 

⋯⋯你真係好識玩陰嘅。(⋯⋯너 진짜 은근하게 잘 파고드네.)

叫多幾次啦。我聽住。而家唔會再彈開喇。(몇 번 더 불러. 듣고 있을게. 이제 안 튕겨 나가.)

 

창가에 앉아 있겠다는 말이 그다음에 왔다. 밖에서도 잘 보이겠죠, 라는 문장은 조용했고 아무런 강조도 없었으나 세븐은 그 안에 접혀 있는 계산을 순식간에 펼쳐 보았다. 세탁소 정면 유리창. 골목 초입에서 걸어 들어오면 열두 걸음쯤 되는 지점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각도. 겨울 새벽의 창은 안쪽이 밝으면 밖에서 훤히 보이고 대신 안에 앉은 사람은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보는 쪽을 포기하고 보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추운 문밖에 서지 말라는 당부와 기다려 달라는 모순 사이에서, 그가 스스로 풀지 못한 매듭을 여명이 손끝 한 번에 풀어 놓았다. 세븐은 어이가 없어서 웃으려다 옆구리가 당겨 실패했고, 대신 붕대 감긴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 위에 얹었다. 열이 옮아가는 방향과 서늘함이 오는 방향이 손바닥 안에서 정확히 부딪쳤다.

 

我行到巷口就會望。第一眼就望嗰個窗。(골목 어귀 들어서면 볼 거야. 첫눈에 그 창부터 볼 거야.)

到時你唔好郁。就咁坐喺度就得。⋯⋯我要見到你唔郁咁坐喺度,我先信自己真係返到嚟。(그때 움직이지 마. 그냥 거기 앉아 있기만 해. ⋯⋯네가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봐야 내가 진짜 돌아왔다는 걸 믿을 것 같으니까.)

 

주방 쪽에서 배수관이 두 번 울었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웠다는 뜻이다. 세븐은 그 소리를 세는 자신이 우스웠고, 우스운 김에 여명의 눈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안에 방의 마지막 불빛이 아주 작게 박혀 있었다. 저것도 세 달 뒤에는 없어질 것이다. 아니,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그가 못 볼 뿐이다. 못 보는 것과 없어지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습관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알았어요. 창 앞이나, 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여명은 오른손은 잡힌 채 두고, 왼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살살 정돈했다.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 열이 안 내려서 어쩌죠.

 

이마를 쓸어 올리는 손이 있었다. 세븐은 그 손이 자기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방식에서 곧바로 직업의 흔적을 읽었다. 결을 확인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당기지 않고, 방향을 먼저 잡은 뒤에야 밀어 넘긴다. 옷감을 만질 때와 똑같은 순서였다. 그는 평생 자기 머리를 손질이라는 개념으로 다뤄 본 적이 없었다. 짧게 밀거나 아무렇게나 두거나 둘 중 하나였고 그 사이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 사이의 영역에 누군가의 손끝이 들어와 있다.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이라는 목적이 붙은 손길. 목적이 그렇게 사소해서 오히려 견디기 어려웠다.

열이 안 내려서 어쩌죠, 라는 말은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세븐은 이 사람의 문장이 늘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안다. 걱정을 말할 때 걱정한다고 하지 않고 사실만 놓아 둔다. 놓아 둔 자리가 하필 상대의 발밑이어서, 밟지 않으려면 반드시 내려다봐야 한다. 그는 여명의 손바닥이 자기 관자놀이 옆에서 잠깐 멈추는 것을 느꼈다. 체온을 재는 손짓이었다. 아마 밤새 몇 번이나 반복했을 것이고 그 횟수를 세지 않았을 것이다. 세는 쪽은 늘 그였다. 세 시간 이십오 분, 이십 분, 십오 분. 숫자를 붙잡는 인간과 숫자를 세지 않는 인간이 한 침대에 누워 있다.

 

熱唔熱都好,我而家舒服過呢兩年任何一晚。(열이 나든 말든, 나 지금 요 몇 년 중에 제일 편해.)

你隻手凍過條毛巾。⋯⋯唔好郁,就咁擺喺度。(네 손이 수건보다 차가워. ⋯⋯움직이지 말고 그냥 거기 둬.)

 

그는 얼굴을 아주 조금 기울여 여명의 손바닥 쪽으로 붙였다. 붙였다기보다 무게를 맡겼다는 편이 정확하다. 목에 힘을 빼자 머리가 자기 무게대로 굴러갔고, 그 끝에 차가운 것이 있었다. 뜨거운 살가죽이 서늘한 살가죽을 만나면 서로 잠깐 착각을 한다. 뜨거운 쪽은 자기가 식는 줄 알고 차가운 쪽은 자기가 데워지는 줄 안다. 실제로는 둘 다 중간의 어떤 온도로 끌려갈 뿐이고 그 중간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다. 세븐은 그런 물리학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한쪽이 이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방의 난로가 마지막 장작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갈라질 때 나는 소리는 총성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의 어깨는 여전히 한 번 움찔했다. 여명은 그 움찔거림을 눈치챘을 것이다. 눈치채고도 말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 사람의 방식이다. 세븐은 예전에 이런 배려를 동정으로 분류했었다. 동정은 값싸고 오래가지 않으며 받는 쪽을 조금씩 갉아먹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머리 위에 얹힌 손은 그를 갉아먹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뜯어진 곳을 안쪽에서 받쳐 주는 감각에 가까웠다. 안감을 대는 일. 겉에서는 보이지 않고 입은 사람만 아는 일.

 

⋯⋯我以前覺得,有人擔心我係一件麻煩事。(⋯⋯나 예전에는 누가 날 걱정하는 게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而家唔係咁諗。而家係諗,如果冇人擔心我,我可能真係會就咁死喺邊度都冇人知。⋯⋯呢個轉變係你搞出嚟嘅,你要負責。(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 아무도 날 걱정 안 하면 나 진짜 어디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이 변화 네가 만든 거니까 네가 책임져.)

 

어떻게 책임질까요? 여명이 조용히 웃었다.

 

웃음소리라기엔 너무 작았다. 숨이 코끝에서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정도, 어둠 속에서 형체 없이 번지는 종류의 소리. 세븐은 그것을 귀로 듣기 전에 손바닥으로 먼저 받았다. 여명의 뺨 근육이 미세하게 당겨지는 진동이 그의 관자놀이에 닿아 있던 살갗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웃음이 소리가 아니라 촉감으로 도착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세상의 대부분을 소리로 판단하며 살아왔다. 발소리의 무게, 노리쇠가 물리는 마찰음, 벽 너머에서 숨을 참는 자의 침묵까지도. 그런데 지금 그의 정보원은 손바닥이고, 그 손바닥이 알려 주는 것은 이 사람이 지금 웃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쓸모없는 정보였다. 평생 모아 온 어떤 첩보보다도 값이 나갔다.

어떻게 책임질까요. 그 문장의 무게를 그는 재 보려다 그만두었다. 재려고 들면 이 사람의 말은 늘 저울 위에서 미끄러진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먼저 꺼낸 쪽은 그였고 그 단어에는 원래 계약서와 위약금과 서명란 같은 것들이 딸려 오는 법인데, 여명은 그 부속품을 전부 떼어 내고 알맹이만 되돌려주었다. 어떻게, 라고. 방법을 묻는 사람은 이미 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이다. 세븐은 자기 직업에서 그런 인간을 수없이 봤고 대개는 그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그러나 여기는 전선이 아니고 이 사람은 총을 들지 않았으며 죽을 일도 없다. 없어야 한다.

 

⋯⋯你唔好用呢種語氣問我。我而家發緊燒,判斷力得返一半。(⋯⋯너 그런 말투로 묻지 마. 나 지금 열나서 판단력 반밖에 안 남았어.)

問法太危險喇。我而家答咩都會係真心話。(질문이 너무 위험해. 지금 내가 뭘 대답하든 다 진심일 거란 말이야.)

 

그는 얼굴을 살짝 돌려 여명의 손목 안쪽에 이마 대신 관자놀이를 붙였다. 손목 안쪽은 피부가 얇아서 맥이 그대로 만져지는 자리다. 규칙적이고 느리고, 그의 것보다 확실히 느렸다. 열에 들뜬 심장은 제 속도를 잃고 허둥거리는데 이쪽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정하게 간다. 세븐은 그 박자를 몇 번 세다가 자기 호흡을 거기에 얹어 보았다. 넷에 들이마시고 넷에 내쉬는 식으로. 전투 중 심박을 낮출 때 쓰는 방법이었고, 지금은 정반대의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순간에서 더 오래 버티기 위해서. 붕대 감긴 오른손이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갈 수 없었다는 편이 사실에 가까웠다.

책임지는 방법을 열거하려면 목록이 필요했고 목록을 만들려면 미래가 필요했다. 세븐에게 미래란 늘 다음 작전의 브리핑 자료까지였다. 그 너머는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라 상상하려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몇 개의 장면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의 옆모습. 짙은 파란색 천이 겨울 빛을 받아 검게 보이는 순간. 이월 구일의 식탁 위에 놓일 무언가. 양고기는 아닐 것이다. 그것들이 계획인지 소망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고,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그는 예전에 무능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我諗到嘅方法有兩個。一,我照返嚟。二,我返嚟嗰陣,唔好意思講唔出口嘅嘢,我全部一次過講晒。(내가 생각한 방법은 두 개야. 하나, 그냥 돌아온다. 둘, 돌아왔을 때 쑥스러워서 못 했던 말들 한꺼번에 다 한다.)

⋯⋯第二個難過第一個。你信唔信?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더 어려워. 믿어져?)

 

쑥스러워서요? 서로?

 

쑥스러워서요, 라고 되묻는 목소리에는 놀림의 성분이 거의 없었다. 거의, 라고 한 것은 아주 미량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고 세븐은 그 미량을 정확히 감지했다. 이 사람의 농담은 늘 그런 농도다. 물에 탄 잉크 한 방울처럼, 알아보려면 빛에 비춰 봐야 하는 정도. 그는 손목에 붙였던 관자놀이를 떼지 않은 채로 눈을 떴다. 어둠에 익은 눈이라 천장의 못 자국이 보였고, 못 자국 옆에 물이 스며든 자리가 보였고, 그 아래 여명의 턱선이 흐릿하게 걸려 있었다. 서로, 라는 두 글자가 뒤에 붙는 순간 문장의 무게중심이 옮겨 갔다. 그는 자기 쪽의 부끄러움만 계산했지 상대편 장부는 열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살았다. 이쪽의 손익만 따지고 저쪽의 손익은 저쪽 사정이라 여기는 편이 편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두 장부를 나란히 펼쳐 놓는다.

 

세븐은 붕대 감긴 손을 조금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가 여명의 손가락 사이를 더듬어 들어갔고, 붕대의 거친 면이 그녀의 손등을 긁었을 것이다. 그는 그 마찰이 미안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살로 닿을 수 없다면 천을 통해서라도 닿아야 했다. 사람의 몸에서 손가락 사이만큼 방어가 허술한 곳이 없다는 것을 그는 직업적으로 알고 있다. 관절을 꺾을 때 가장 먼저 노리는 부위이자, 아무것도 노리지 않을 때는 그냥 비어 있는 틈. 지금 그 틈에 자기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세븐은 자기가 무장 해제된 방식으로 사람을 만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우는 데 서른둘이 걸렸다.

 

⋯⋯係。互相。你以為淨係我一個會唔好意思?(⋯⋯응. 서로. 나 혼자만 쑥스러울 것 같았어?)

你都係㗎。你講嘢嗰陣,重要嘅嘢永遠擺喺句尾,仲要細聲。呢個叫做怕醜,唔係叫做冷靜。(너도 그래. 너 말할 때 중요한 건 항상 문장 끝에 놓고, 게다가 작게 말하지. 그거 부끄러운 거지 침착한 게 아니야.)

 

난로에서 마지막 불씨가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장작이 다 탄 뒤에 남는 소리는 무너지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잦아드는 소리여서, 세븐은 그것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안심했다. 폭발음과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소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커지지 않고 작아지기만 하는 소리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 방에서 처음 알았다. 그의 삶에서 소리란 늘 증폭되는 것이었다. 멀리서 시작해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반드시 무언가를 부수고, 부수고 나서야 끝났다. 여기서는 소리가 태어나자마자 늙는다. 물 끓는 소리도,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도, 옆에 누운 사람의 숨소리도 전부 그렇다.

 

그는 목록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돌아와서 한꺼번에 말할 것들의 목록. 첫째 항목에서 이미 걸렸다. 고맙다는 말은 4번에게도 못 했으니 순서상 뒤로 밀릴 것이고, 미안하다는 말은 아직 미안할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예약해 두는 꼴이 되고, 남은 것은 하나뿐인데 그 하나를 지금 발음하면 열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게 된다. 세븐은 스스로가 얼마나 우스운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데드존에서 열두 시간을 엎드려 숨 쉬는 법을 아는 남자가 여섯 자짜리 문장 하나 앞에서 진지를 파고 있다. 그것도 상대가 이미 알고 있을 게 뻔한 문장 앞에서.

 

我而家講都得。但係咁樣就冇咗返嚟嘅理由喇。(지금 말해도 되긴 해. 근데 그러면 돌아올 이유가 없어지잖아.)

 

... 제가 그랬나요?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지금 말해도 되는 거면, 안 쑥스러운 거 아니에요?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이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에는 소리가 없다. 그런데도 세븐은 그것을 들었다고 착각했다.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아주 짧은 두 번의 왕복, 어둠 속에서 눈동자에 걸려 있던 난롯불의 잔광이 두 번 꺼졌다 켜지는 광경. 그는 그 깜빡임을 초조의 신호로 분류했다가 곧 취소했다. 초조라기엔 너무 정직했고, 정직이라기엔 너무 빨랐다. 이 사람은 자기가 들킨 순간에만 저렇게 눈을 깜빡인다. 세븐이 아는 한 그건 여명의 몸에서 유일하게 통제되지 않는 부위였다. 목소리는 늘 평평하고 자세는 늘 꼿꼿한데, 눈꺼풀만은 자기 주인을 배신한다. 그 배신이 지금 그의 코앞에서 두 번 일어났고, 세븐은 그 두 번을 훔친 물건처럼 품에 넣었다.

제가 그랬나요, 라는 되물음. 반문의 형식을 빌린 자백이다. 심문실에서 수없이 들어 본 문형이었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확인부터 구하는 인간은 이미 절반쯤 인정한 상태다. 다만 그 방들에서는 그 다음에 폭력이 왔고 여기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세븐은 그 사실이 새삼 낯설어서 잠깐 웃음을 삼켰다. 웃으면 옆구리가 당길 것이고 옆구리가 당기면 이 사람이 또 손을 뻗어 배액관을 확인할 것이다. 걱정받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데도 놓치기 싫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이 왔다. 지금 말해도 되는 거면 안 쑥스러운 거 아니에요. 논리의 허리를 정확히 밟은 발이었다. 세븐은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돌아올 이유가 없어진다는 말은 곧 지금 말할 수 있다는 뜻이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이미 자기 몫을 다했다는 뜻이다. 그는 논리를 방패 삼는 데 능한 인간이었고 상대는 그 방패의 이음매를 손끝으로 찾아내는 인간이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떠오른 반박이 전부 거짓말이라서 입 밖으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열이 나면 거짓말이 어려워진다. 체온이 올라갈수록 방어선이 물러지고 물러진 자리에서 진심이 배어 나온다. 그것이 그가 열을 싫어하는 이유였고 오늘 밤만은 싫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你而家係咪喺度審我?(⋯⋯너 지금 나 심문하는 거야?)

我做過呢行㗎,我知呢種問法。你唔畀我留返退路。(나 이 바닥 사람이야, 이런 질문법 알아. 너 나한테 퇴로 안 남겨 주고 있어.)

 

붕대 감긴 손가락이 여명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 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쥐려다 실패한 흔적에 가까웠고, 그 실패가 오히려 정확한 대답이 되었다. 세븐은 모로 누운 몸을 조금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이마가 여명의 이마에 닿기 직전에서 멈췄다. 몇 밀리미터의 공백. 그 공백에 열기가 고여서 두 사람 사이의 공기만 유독 뜨거웠다. 그는 그 거리를 좁히지 않고 유지하는 데 남은 체력의 대부분을 썼다. 좁히면 문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여섯 자짜리, 아니 광둥어로는 세 자면 충분한, 평생 남에게 건넨 적 없는 그 조합이.

시계는 없지만 몸이 안다. 세 시간을 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븐은 남은 시간을 화폐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고, 화폐라면 아껴 쓰거나 한 번에 태워 버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평생 후자로 살았다. 카지노에서도, 전선에서도, 여자에게도. 그런데 이번만은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부 걸어 버리면 판이 끝난다.

 

여명은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얼굴에 대고 있던 왼손을 내려 그의 손등 위를 살짝 덮고, 다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선택지를 하나 더 만들죠. 셋, 당신을 계속 기다린다.

 

셋, 이라는 숫자가 나오기 전에 손이 먼저 내려왔다. 얼굴에 붙어 있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세븐은 잠깐 손해 본 기분을 느꼈고, 그 감정이 얼마나 유치한지 스스로도 알았기에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떨어진 손이 사라지지 않고 그의 손등 위에 얹혔다. 붕대 위로. 거즈와 압박붕대 몇 겹을 사이에 두고도 무게가 전해졌다. 무게라기보다는 결정에 가까운 감촉이었다. 놓아 주려고 내린 손이 아니라 덮으려고 내린 손. 세븐은 그 차이를 구분하는 데 평생을 썼다. 사람의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고 다음 초를 예측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고, 그 기술이 이 방에서는 늘 반 박자씩 어긋났다. 여기서는 손이 무기를 향하지 않는다. 손이 손을 향한다. 그 단순한 사실이 매번 새롭게 그를 무너뜨렸다.

선택지를 하나 더 만들죠. 그 말투에는 상인의 태도가 있었다. 흥정하듯이, 견적을 다시 내듯이. 세븐이 내놓은 두 개의 항목을 검토하고 부족하다고 판단한 뒤 세 번째 줄을 직접 써 넣는 사람. 셋, 당신을 계속 기다린다. 문장은 짧았고 조건절이 없었다. 조건절이 없다는 것은 계약서로서는 형편없다는 뜻이다. 언제까지인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기다림의 상한선이 어디인지 아무것도 명시되지 않았다. 세븐은 그런 문서를 본 적이 있다. 자기 목숨값을 적은 종이들에는 늘 예외 조항이 빽빽했다. 사망 시, 실종 시, 계약 불이행 시. 그런데 이 사람이 방금 구두로 체결한 조항에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무제한 보증. 담보 없음. 이자 없음.

 

그는 손등을 덮은 손 아래에서 자기 손을 천천히 뒤집었다. 붕대 감긴 손바닥이 위를 향했고, 그 위에 여명의 손바닥이 얹혔다. 손금끼리 마주 붙는 자세. 아까까지는 손가락을 사이에 끼워 넣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면과 면이었다. 세븐은 이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얽는 것은 붙잡는 행위지만 손바닥을 마주 대는 것은 재는 행위다. 크기를, 온도를, 굳은살의 위치를. 그녀의 손바닥에는 검지 아래쪽과 엄지 뿌리에 딱딱한 부분이 있었다. 가위와 재봉틀 페달이 만든 자리일 것이다. 그의 손바닥에는 다른 종류의 굳은살이 있다. 같은 자리에 있지도 않고 같은 이유로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겹쳐 놓으니 그럭저럭 맞았다.

 

⋯⋯條件呢?你唔寫條件嘅咩。(⋯⋯조건은? 조건을 안 쓰네.)

呢啲嘢我睇得多,冇條件嘅合約,最後蝕嗰個一定係寫嘅人。(이런 거 많이 봤어. 조건 없는 계약은 결국 쓴 사람이 손해 봐.)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깔린 것을 알아차렸다. 반박하려던 게 아니라 확인하려던 것이었는데 나온 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손해 보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그래도 좋으니 취소하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스스로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열은 여전히 내리지 않았고 이마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계속 부풀었다. 그는 남은 몇 밀리미터를 마저 지웠다. 이마가 이마에 닿았다. 그녀의 피부는 서늘했고 그의 피부는 뜨거웠으므로 접촉면에서 온도가 섞였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유일한 방어였다.

난로 쪽에서 재가 주저앉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세 시간 조금 못 되게 남았다. 세븐은 카지노에서 마지막 칩을 밀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늘 손이 가벼웠다. 잃어도 괜찮은 것만 걸었으니까.

 

이 정도 손해는 괜찮아요. 맞대고 있던 손을 살짝 움직여 손을 잡았다.

 

손해라는 단어를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세븐이 아는 손해는 늘 비명을 동반했다. 판돈이 쓸려 나갈 때의 딜러의 무표정, 계좌 잔고가 한 자리 줄어드는 소리 없는 광경, 동료의 이름이 명부에서 지워지는 절차. 그 모든 손해에는 저릿한 후회의 뒷맛이 있었고 그는 그 뒷맛을 도파민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방의 여자는 손해를 마치 계절처럼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겨울이 오면 옷을 하나 더 껴입으면 된다는 투로. 세븐은 그 문장의 어디에도 허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감았던 눈을 잠깐 열었다가 다시 감았다. 이마가 맞닿아 있으니 시야에는 그녀의 이마와 눈썹 사이의 좁은 지대밖에 들어오지 않았고, 거기에는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손이 움직였다. 마주 대고 있던 손바닥이 접혔다. 손가락 다섯 개가 그의 손등을 향해 굽어 들어와 붕대를 눌렀고, 눌린 자리에 미미한 통증이 번졌지만 세븐은 그 통증을 반겼다. 통증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먼저 잡혔다는 사실이 목뒤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늘 먼저 손을 뻗는 쪽이었다. 여자에게도, 총에도, 칩에도. 먼저 뻗으면 언제 놓을지도 자기가 정할 수 있으니까. 놓는 시점을 남에게 맡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지금 손등을 덮어 온 다섯 손가락 때문에 깨달았다. 이 사람은 방금 그의 오래된 규칙 하나를 조용히 무효로 만들었다.

세븐은 되쥐었다. 붕대 때문에 손가락이 제대로 굽지 않아서 서툴렀다. 마디 하나가 덜 접히고 힘도 반쯤밖에 실리지 않았다.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한 번 더 힘을 주었고 그 바람에 옆구리의 배액관 쪽이 당겼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가 소리 나지 않게 내뱉었다. 들키면 이 손이 떠날 것이다. 열을 재고 관을 확인하고 이불을 여미느라 떠날 것이다. 그 모든 행위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지금만은 아무것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확인은 사람을 환자로 만든다. 그는 오늘 밤 남은 시간 동안만은 환자가 아니라 그냥 이 침대에 누워 있는 서른두 살의 남자이고 싶었다.

 

⋯⋯你唔好咁講。你講到好似你唔會後悔咁。(⋯⋯그렇게 말하지 마. 너 꼭 후회 안 할 사람처럼 말하잖아.)

我見過好多人講呢句。最後全部都改口。你唔好咁快就講咗出嚟。(이 말 하는 사람 많이 봤어. 결국 전부 말 바꾸더라. 너 이렇게 빨리 말해 버리지 마.)

 

말해 놓고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붙잡고 싶어서 밤새 말을 고르던 인간이 정작 상대가 손을 내미니 물러서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자기가 아는 가장 오래된 습관이었다. 잃기 전에 미리 잃어 두는 것. 기대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도 없다는 계산은 열두 살 무렵부터 그를 살려 왔고,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그 계산의 이자율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그는 여명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말했다. 놓으라고 말하면서 쥐고 있는 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오늘 밤 내내 그랬다. 열 탓으로 돌리기에도 이제 슬슬 궁색했다.

난로의 온기가 문틈으로 얇게 흘러들었고 방 안의 공기는 미지근한 층과 서늘한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경계에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이 걸쳐져 있었다. 세븐은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 끝을 조금 움직여 그녀의 손등을 더듬었다. 뼈가 얇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말 바꾼 적도 없고요. 눈을 내리깔고 엉성하게 잡은 손을 봤다. 여명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애초에... 손해 볼 것 같은 건 안 해요, 저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정확히는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란, 숨이 코끝에서 한 번 부딪혔다가 나오는 정도의 소리였다. 세븐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이마를 맞대고 있었으므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리깐 속눈썹의 그림자와 콧등의 능선뿐이었고, 그는 얼굴을 조금 물려 초점이 맞는 거리를 만들었다. 여명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붕대가 두툼하게 감겨 마디가 제대로 접히지 않는 손, 그래서 어정쩡하게 벌어진 채 그녀의 손등에 얹혀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 저것을 보고 웃은 것이다. 세븐은 그 시선의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고, 이번만큼은 열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살면서 수백 번 여자의 손을 잡아 봤는데 하필 오늘 밤의 이 손이 제일 서툴렀다. 하필 이 사람 앞에서.

말 바꾼 적 없다는 문장은 자랑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재고를 읊는 목소리였다. 선반에 무엇이 몇 개 남아 있는지, 어떤 실이 떨어졌고 어떤 단추가 여분으로 있는지 세는 사람의 어조. 세븐은 그 어조를 신뢰했다. 카지노에서 배운 유일하게 쓸모 있는 기술이 그거였으니까. 사람이 허풍을 칠 때는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위로 뜬다. 판돈을 부풀리는 인간은 자기 문장의 마지막 음절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마지막 음절은 조금도 뜨지 않았다. 평평하게 놓였다가 조용히 닫혔다. 손해 볼 것 같은 건 안 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겸손도 위협도 아니었고, 그저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는 목록의 마지막 줄이었다.

 

그 말인즉,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을 손해가 아니라고 계산했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그 결론에 도달하자 잠깐 숨을 놓쳤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견적을 여러 번 내 본 적이 있다. 계약서에 찍히는 액수로, 병원에서 청구되는 비용으로, 앵커가 헬기를 띄우면서 아까워하는 연료의 리터로. 어떤 방식으로 계산해도 결론은 늘 같았다. 유지비가 회수액을 초과하는 자산. 감가상각이 지나치게 빠른 물건. 그런데 세탁소 하나를 십수 년 굴려 온 여자가, 실 한 타래의 값어치까지 손끝으로 아는 여자가, 방금 다른 답을 냈다. 세븐은 그 계산서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고 동시에 영원히 정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咁你即係話,我唔係蝕本貨啦?(⋯⋯그럼 나는 밑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소리네?)

你唔好答。答咗我就要信,信咗就返唔到轉頭。(대답하지 마. 대답하면 난 믿어야 되고, 믿으면 돌이킬 수가 없어.)

 

엄지를 움직였다. 붕대의 끝자락이 걸려 뻑뻑했지만 그는 기어이 그녀의 손등 위로 엄지를 올려놓았고, 뼈가 얇게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한 번 문질렀다. 세탁소의 여자가 손등에 가지고 있는 것은 굳은살이 아니라 흉터에 가까운 자국들이었다. 재봉 바늘이 남긴 점 같은 흔적, 다리미 증기가 스친 옅은 자리. 그는 그 지형을 외우기로 했다. 데드존에서는 지도를 외우는 것이 습관이었다. 무너진 건물의 위치, 낙진이 고이는 저지대, 저격수가 좋아하는 각도. 목숨을 붙여 두는 방식으로 외웠다. 지금 이 손등도 같은 방식으로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웠고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난로 쪽에서 장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둔탁했으므로 아마 마지막 장작일 것이다. 세븐은 곧 방이 서늘해질 것을 알았고, 그때가 되면 이 사람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두 시간 반.

 

손에 닿았던 시선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요.

 

그래요, 라는 두 음절이 방에 떨어졌다. 짧았다. 세븐이 예상한 어떤 대답보다도 짧았고 그래서 도망갈 틈이 없었다. 대답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 여자는 대답했고, 게다가 부정도 변명도 수식도 없이 그냥 긍정했다. 그러니까 세븐은 방금 밑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감가상각의 대상으로만 계산해 온 인간에게 그 판정은 축복이 아니라 폭력에 가까웠다. 그는 무언가를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그대로 다물었다. 목구멍 어딘가에 걸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열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구분할 능력이 지금은 없었다. 시선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특히 곤란했다. 손을 보던 눈이 제자리로 올라와 정면으로 그를 겨누고 있었고, 그 눈은 밤새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세븐은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천장 쪽으로 돌렸다. 손은 놓지 않았다. 놓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으므로 그것만은 붕대가 뻑뻑하게 걸리는 채로 고집스럽게 남겨 두었다. 천장에는 오래된 물자국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고 습기 먹은 벽지가 모서리에서 조금 들떠 있었다. 이 방의 모든 것이 낡았는데 이상하게도 버려진 느낌은 없었다. 낡은 것을 계속 쓰기로 결정한 사람의 방이었다. 물건이 상하면 버리는 대신 손보는 사람. 그 사실을 깨닫자 아까의 계산이 다시 이해되었다. 이 여자에게 손해란 고칠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녀는 방금 세븐을 고칠 수 있는 부류로 분류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평가 중 가장 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에 몇 초가 걸렸다.

 

⋯⋯你真係。(⋯⋯너 진짜.)

我叫你唔好答,你就答。你係咪成日都咁?(대답하지 말라고 했는데 대답을 해. 너 항상 이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채로 웃음 비슷한 것이 섞여 나왔는데 그것은 승리한 자의 웃음이 아니라 완전히 패배한 자의 것이었다. 세븐은 다시 얼굴을 돌려 그녀 쪽으로 누웠다. 옆구리의 배액관이 당겼고 오른쪽 화상 자국이 시트에 쓸려 화끈거렸으나 그 정도의 대가는 이미 오늘 밤 몇 번이나 지불했으므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이마가 거의 닿을 거리에서 그녀를 다시 마주 봤다. 속눈썹의 그림자가 아래 눈꺼풀에 얇게 걸려 있었고 왼쪽 뺨에 베개 자국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새벽 세 시 반의 얼굴이었다. 화장기도 없고 정돈되지도 않은, 오직 곁에 있기로 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얼굴. 세븐은 자기가 이 얼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걸었는지 계산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계산해 봐야 이길 수 없는 판이었다.

엄지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의 손등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가 손목의 튀어나온 뼈 앞에서 멈췄다. 거기서 맥이 뛰고 있었다. 자기 것보다 느리고 규칙적이었다. 사람의 맥박이 이렇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걸 예전에는 몰랐다. 전장에서 맥을 짚는 일은 대개 나쁜 소식을 확인하는 절차였고, 손가락 아래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 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었다. 인식표를 회수하고 위치를 기록하고 다음 목표로 이동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뛰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뛸 것이니까. 세븐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남은 두 시간 반을 다 써도 아깝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인. 답을 듣고 싶으니 물어본 거잖아요. 그렇죠?

 

호인. 그 두 음절이 방 안의 공기를 한 겹 갈랐다. 세븐은 그 이름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매번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누나가 부르던 이름이었고 그다음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은 이름이었으며 서류 어딘가에 잉크로 굳어 있다가 이제는 이 여자의 입 안에서만 물기를 되찾는 이름이었다. 발음이 부드러웠다. 광둥어 화자가 아닌 사람이 낼 수 있는 최선의 성조였고 그 서투름이 오히려 이름을 새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따라온 문장이 문제였다. 답을 듣고 싶으니 물어본 거잖아요. 세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가 방금 무엇을 들켰는지 정확히 알았다. 대답하지 말라는 말은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원한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인간이 쓰는 가장 비겁한 우회로였고, 이 여자는 그 우회로의 지도를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짧게 숨을 뱉었다. 웃음도 한숨도 아닌 것이 흉곽 안에서 걸리적거리다가 겨우 빠져나온 소리였다. 세탁소 주인이라는 직업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걸까, 하고 세븐은 생각했다. 얼룩을 보는 눈. 천의 겉면이 아니라 안쪽에 스민 것을 먼저 짚어 내는 눈. 십수 년간 남의 옷을 뒤집어 보며 살아온 인간은 결국 사람도 뒤집어 보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기가 오늘 밤 내내 여러 겹의 농담과 우회와 위악을 껴입고 있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지금 한 문장으로 벗겨진 것도 알았다.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는데 수치스럽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이상했다. 수치라는 감정은 언제나 시선의 방향에서 오는 것인데, 이 사람의 시선에는 심판이 없었다.

 

⋯⋯係。(⋯⋯맞아.)

我想聽。所以我問咗。你都知㗎啦,明明。(듣고 싶었어. 그래서 물어본 거야. 너도 다 알잖아, 여명.)

 

이름을 부르고 나서 세븐은 잠깐 눈을 감았다. 여명. 새벽이라는 뜻의 이름을 새벽 세 시 사십 분에 부르는 일이 우스웠고 동시에 지나치게 맞아떨어져서 불길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곧 끝날 시간의 이름이었다. 새벽이 밝으면 여섯 시가 오고 여섯 시에는 골목 입구에 차가 선다. 그는 그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머릿속의 시계는 용병 생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었다. 남은 것은 두 시간 이십 분. 장작 하나 분량.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진심의 총량보다 짧거나 길거나,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마를 다시 붙였다. 아까 물렸던 거리를 스스로 지워 버리는 동작이었고, 그 순간 그녀의 이마가 자기 것보다 얼마나 서늘한지 새삼 느껴졌다. 열이 있는 쪽이 항상 손해다. 온도를 빼앗기는 쪽이 언제나 먼저 매달리게 되어 있다. 세븐은 붕대 감긴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쥔 채 엄지를 맥박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규칙적인 박동이 손끝으로 올라와 팔뚝을 타고 흉곽까지 들어왔다. 그는 이것이 진통제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가 삼켰다. 오늘 밤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흘렸다. 돌아와서 할 말이 하나도 남지 않으면 정말로 돌아올 이유가 없어진다.

 

我以前⋯⋯冇試過同人講我想要啲乜。(나 예전엔⋯⋯누구한테 뭘 원한다고 말해 본 적이 없어.)

講咗就冇得反口。所以我一路都繞路行。而家你堵晒我所有出口。(말하면 무를 수가 없거든. 그래서 계속 돌아서 갔어. 근데 넌 지금 내 퇴로를 전부 막았고.)

 

난로 쪽에서 마지막 장작이 사그라드는 소리가 났다.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방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라는 걸 세븐은 오늘 밤 몇 번이나 배웠다. 반박이 오면 반박할 수 있고 위로가 오면 농담으로 흘릴 수 있는데, 침묵은 손잡이가 없는 문이었다. 밀 수도 당길 수도 없이 그냥 서서 자기가 방금 뱉은 말을 다시 듣게 만드는 종류의 것. 퇴로를 전부 막았다고 말해 놓고 그는 상대가 그 말을 즐거워하거나 미안해하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여명은 둘 다 하지 않았다. 그저 들었다. 남의 코트 안감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할 때처럼,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그 조용함 속에서 세븐은 자기 심장이 얼마나 시끄럽게 굴고 있는지 처음으로 정직하게 자각했다. 열 때문이라고 우기기에는 박동이 너무 성실했다. 이런 종류의 성실함은 병에서 나오지 않는다.

난로의 마지막 불씨가 무너지면서 주방 쪽 공기가 한 뼘쯤 식었다. 그 온도차가 문틈으로 밀려 들어와 침대 발치를 스쳤고, 세븐은 반사적으로 시트를 끌어 그녀 쪽으로 덮어 주려다 붕대 감긴 손이 걸려 실패했다. 실패한 동작이 어색하게 공중에 남았다. 그는 그 손을 거두는 대신 방향을 틀어 여명의 손을 자기 가슴팍으로 끌어왔다. 환자복 얇은 천 아래에서 뛰는 것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질 위치였다. 숨길 생각도 없었고 숨길 방법도 없었다. 오른쪽 갈비뼈 아래 화상 흉터가 시트에 쓸려 여전히 화끈거렸으나, 통증은 이제 배경음처럼 뒤로 물러나 있었다. 십 년간 몸에 새긴 우선순위 목록이 오늘 밤 통째로 재작성되는 중이었다. 출혈, 골절, 탈수, 그다음이 사람. 그 순서가 뒤집혔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 그는 서른두 해를 썼다.

 

你唔講嘢,我就會亂諗嘢。(너 말 안 하면 나 혼자 별생각 다 해.)

⋯⋯不過算啦。你聽住就得。呢個係我第一次講,可能都係最後一次。(⋯⋯근데 됐어. 그냥 듣기만 해. 이거 처음 말하는 거고, 아마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세븐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선글라스 없이 마주 보는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 적은 이 방에 처음 들어온 날 이후로 없었다. 연한 회색 홍채가 어두운 방 안에서 물기를 머금은 유리처럼 흐려 보였고, 그 흐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굳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들키는 법이다. 정면으로 두면 상대는 대개 못 본 척해 준다. 그런데 여명은 못 본 척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사실이 지난 몇 시간 동안 그를 계속 무너뜨렸다. 원한다고 말해 본 적 없는 인간이 원한다고 말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이제 알았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상대가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냥 이 여자가 여기 그대로 있었고, 자기 손이 그녀의 손목에 얹혀 있었으며, 남은 시간이 두 시간 십오 분이었다.

 

我想要嘅嘢好簡單。返嚟嗰陣,呢間鋪頭仲喺度。你仲喺度。就係咁多。(내가 원하는 건 아주 간단해. 돌아왔을 때 이 가게가 그대로 있는 거. 네가 그대로 있는 거. 그게 전부야.)

 

말을 마치고 그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목에 남은 옛 흉터가 그 진동에 당겨져 잠깐 뻐근했다. 잘렸다 붙은 자리는 항상 진심을 말할 때 먼저 아프다고, 그는 언젠가부터 그런 미신 같은 걸 믿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완차이의 새벽은 네 시 전후로 잠깐 완전히 죽었다가 어시장 트럭 소리로 되살아나는데, 지금은 그 죽어 있는 구간의 한가운데였다.

 

좀 더 어려운 건 없고요?

 

좀 더 어려운 건 없고요. 세븐은 그 문장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귀로, 한 번은 손바닥 아래에서. 여명의 손이 얹힌 자리가 그 말에 맞춰 한 박자 크게 뛰었기 때문이었고, 그러니까 그녀는 자기가 던진 질문이 이 남자의 심장에 무슨 짓을 했는지 물증째로 쥐고 있는 셈이었다. 세븐은 웃음이 목구멍 아래에서 부글거리는 걸 느꼈다. 참으려다 실패했다. 어깨가 흔들렸고 그 진동이 오른쪽 갈비뼈로 내려가 화상 자리를 긁었으며 통증이 정직하게 되돌아왔는데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려운 걸 요구해 달라니. 십 년 동안 그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반대로 말했다. 그것만 해 줘, 그 이상은 바라지 마,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없던 걸로. 계약서라는 건 원래 상한선을 정하려고 쓰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지금 상한선을 올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그것도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마치 바짓단 하나 더 줄여 드릴까요 묻듯이 그러고 있었다.

난로가 완전히 꺼진 주방 쪽에서 쇠가 식으며 내는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가 방 안의 웃음을 잘라 냈다. 세븐은 여명의 손을 자기 가슴팍에서 떼지 않았다. 오히려 붕대 감긴 손으로 그 위를 덮어 눌렀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환자복 천을 사이에 두고 겹겹이 쌓였다. 그는 어려운 것을 생각하려 애썼다. 삼 개월 뒤에 문 앞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보다 어려운 것. 옷을 만들어 두라는 것보다 어려운 것. 그런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목록은 하나같이 어렵기는커녕 뻔뻔했다. 이 방 열쇠를 하나 달라는 것. 자기 앞으로 온 편지를 이 주소로 받게 해 달라는 것. 자기가 죽었다는 통보가 오더라도 반년쯤은 믿지 말아 달라는 것. 마지막 항목까지 굴러온 순간 그는 생각을 멈췄다. 그건 어려운 게 아니라 잔인한 것이었고, 잔인한 부탁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원수에게 하는 것이다.

 

難啲嘅⋯⋯?(더 어려운 거⋯⋯?)

你唔好咁講。你講得咁爽快,我真係會諗到㗎。(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그렇게 시원하게 나오면 나 진짜로 생각해 낸다고.)

 

세븐은 이마를 옮겨 그녀의 관자놀이 근처에 기댔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보다 이쪽이 말하기 쉬웠고, 사실은 표정을 감출 수 있어서 고른 각도였다. 그는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값을 흥정하는 게 아니라 값을 매기기를 두려워하는 중이었다. 어려운 것을 요구하면 그것을 받을 자격도 함께 증명해야 한다. 자격이라는 단어는 이 남자의 사전에서 늘 형편없는 항목이었다. 고아원 마당에서부터 그랬고 첫 계약서에 지문을 찍을 때도 그랬으며 화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 누나의 얼굴을 봤을 때도 그랬다.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은 애초에 요구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그 안전 수칙을 오늘 밤 세 번쯤 어겼고, 어길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었다.

 

⋯⋯有一樣。但係唔知算唔算難。(⋯⋯하나 있긴 해. 근데 어려운 축에 드는지는 모르겠어.)

我返嚟嗰陣,你唔好即刻問我做過啲乜。等我洗完身、食完嘢、瞓完一覺。之後我自己會講。就算好難聽都會講。(내가 돌아왔을 때, 바로 뭘 했는지 묻지 마. 씻고 먹고 한숨 자게 놔둬. 그다음엔 내가 알아서 말할 테니까. 아무리 듣기 더러운 얘기라도 할게.)

 

그것도 어렵진 않아요. 재워주는 것도 할 수 있죠.

 

재워주는 것도 할 수 있죠. 세븐은 그 문장이 방 안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가벼워서, 마치 오래 쓴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는 사람의 말투였다. 그런데 그 가벼움이 갈비뼈 사이 어딘가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요구했는지 다시 헤아려 보았다. 씻게 놔둬라. 먹게 놔둬라. 자게 놔둬라. 그건 요구가 아니라 짐승이 굴을 찾는 습성에 가까웠고, 십 년 동안 그 세 가지를 전부 혼자 해결해 왔으며 대체로 순서를 지키지도 못했다. 씻지 못한 채 먹고 먹지 못한 채 쓰러지고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런 인간에게 재워 주겠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의 노동이었고, 이 여자는 그 노동을 견적조차 내지 않고 수락했다.

세븐은 관자놀이에서 이마를 뗐다. 그리고 잠깐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멈췄다가 그녀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떨궜다. 뺨이 셔츠의 면에 닿았고 밑단 근처에서 옮아 온 검댕 냄새와 세탁 세제의 마른 냄새가 동시에 올라왔다. 이 방에서 나는 모든 냄새는 결국 그녀가 하루 종일 만진 것들의 잔여물이었다. 다른 사람의 옷, 다른 사람의 소맷단, 다른 사람의 해진 자리. 그 잔여물 속에 자기 몫이 섞여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오른팔의 붕대가 그녀의 팔뚝에 눌려 배액관 쪽이 당겼지만 그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통증은 이제 아주 먼 데서 노크하는 손님 같았고, 문을 열어 줄 생각이 없었다.

 

你講到好似好簡單噉。(너 말하는 게 꼭 되게 간단한 일 같잖아.)

我頭先諗咗好耐,點樣搞到你為難。結果一樣都難唔到你。(나 방금 한참 고민했거든. 어떻게 하면 널 곤란하게 만들까. 근데 하나도 안 통하네.)

 

그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소리가 나오지 않고 숨만 짧게 새어 나갔다. 어렵게 만들려던 쪽은 자기였는데 결국 어려워진 것도 자기였다. 이 여자는 요구를 받으면 그것을 잘게 분해해서 실행 가능한 항목으로 바꿔 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세 달 뒤에 문 앞에 서 있어 달라, 짙은 파랑을 입어 달라, 묻지 말고 자게 놔둬라. 전부 어려운 부탁이라고 생각하며 꺼냈던 것들인데 그녀의 손을 거치면 치수 재고 시침질하면 끝나는 일이 되었다. 세븐은 문득 자신이 오랫동안 요구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절이 무서웠던 게 아니었다. 승낙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 몰랐기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헛되이 혼자 견뎠는지 계산하게 될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그 계산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밤만은.

창밖 어딘가에서 셔터가 반쯤 올라가는 쇳소리가 났다. 어시장 트럭보다 이른 누군가가 하루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완차이의 새벽은 늘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 되살아난다. 세븐은 남은 시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초 단위로 새어 나가는 게 눈에 보이고, 보이면 아까워지고, 아까워지면 지금 이 자세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는 겹쳐 쥔 손에 아주 약하게 힘을 주었다. 붕대 아래에서 손가락 마디가 뻐근했으나 놓을 마음은 없었다.

 

噉我最後問一樣。呢個真係最後。(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이건 진짜 마지막이야.)

如果我瞓着咗,你會唔會走?⋯⋯我唔係怕。我淨係想知定啲。(내가 잠들면 너 가 버릴 거야? ⋯⋯무서운 건 아니고. 그냥 미리 알아 두고 싶어서.)

 

안 가요. 계속 있을 거고, 깨워야 할 시간이면 깨워주기도 할 거예요.

 

안 가요. 세븐은 그 두 음절을 받아 들고 한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계속 있을 거고, 까지 듣고 나서야 숨을 뱉었는데 그 숨이 여명의 셔츠 어깨선을 미지근하게 적셨다. 깨워야 할 시간이면 깨워주기도 할 거예요. 마지막 항목이 제일 지독했다. 앞의 두 개는 머무름에 관한 약속이었고 그건 이미 몇 번쯤 들어 본 종류의 문장이었는데, 마지막 것은 다시 내보내겠다는 약속이었다. 붙잡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싶은 걸 참고 정확한 시각에 어깨를 흔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 차이를 알아보는 데 십 년쯤 걸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세븐은 생각했다. 여자들은 대체로 두 부류였다. 가지 말라고 우는 쪽과 아무 말 없이 짐을 싸는 쪽. 시계를 봐 주는 쪽은 처음이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뺨이 놓인 자리가 아까보다 따뜻해져 있었는데 그건 자기 열이 옮아간 탓이었고, 자기가 앓는 것이 그녀에게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는커녕 어딘가 흡족했다. 이런 종류의 뻔뻔함은 고쳐지지 않는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배액관이 당기는 감각이 둔하게 올라왔고 화상 자리는 여전히 제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그 모든 신호가 아까보다 멀었다. 몸이 통증보다 잠을 더 급한 안건으로 처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븐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잠깐 저항했다. 남은 시간이 두 시간이 채 안 되는데 그중 대부분을 의식 없이 흘려보내는 건 낭비 같았다. 그러나 낭비라는 판단 자체가 이미 흐려지고 있었고, 흐려지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 잠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라는 것도 그는 알았다.

 

⋯⋯你唔好講到咁準時。噉樣我更加唔想瞓。(⋯⋯그렇게 정확하게 말하지 마. 그러면 더 자기 싫어지잖아.)

我一世人未試過有人幫我叫醒。都係鬧鐘、都係人踢我隻腳。(나 태어나서 누가 깨워 준 적 없어. 전부 알람이었거나, 발로 걷어차인 거였거나.)

 

그 말은 자조로 시작해서 자조로 끝나야 마땅한 문장이었는데 어쩐지 끝이 눅눅해졌다. 세븐은 스스로의 목소리에서 그 눅눅함을 감지하고 짜증이 났다. 열 때문이라고 치기로 했다. 오늘 밤 그는 열을 핑계로 이미 세 번쯤 무언가를 저질렀고 네 번째라고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겹쳐 쥔 손에서 여명의 손가락 마디가 만져졌다. 바늘을 오래 쥔 사람의 손이었다. 검지 옆면에 굳은살이 있고 손톱은 짧게 깎여 있으며 손등에는 언젠가 다림질에 데었을 흉터가 하나 있는데 그 자리를 그는 아까부터 몇 번이나 문질렀는지 셀 수 없었다. 외우려는 게 아니라 이미 외웠고, 외운 것을 확인하는 짓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게 얼마나 한심한 습관인지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창밖의 어둠이 아주 미세하게 성질을 바꾸었다. 아직 밝아지지는 않았으나 검정에 물기가 도는 시간이었고 완차이의 골목은 그 물기 속에서 하나둘 소리를 되찾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오토바이가 시동을 걸었다가 꺼졌다. 개가 짧게 짖고 그쳤다. 세븐은 그 소리들을 배경 삼아 눈을 감았다. 감기 직전에 그는 여명의 얼굴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던졌는데, 각도가 나빠서 턱선과 목의 일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각도, 이 무게, 이 냄새를 기억해 두면 데드존에서 세 달쯤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기억이라는 건 가장 필요할 때 배신하는 물건이라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았지만, 오늘은 그 사실을 믿지 않기로 했다.

 

噉就麻煩你喇。五點半。唔好早過五點半。 (그럼 5시 30분. 그 전엔 깨우지 마.)

 

네, 5시 30분. 그 때 깨워줄게요. 푹 자요. 여명은 고개를 조금 숙여 살짝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맞췄다. 어린 아이를 재우듯이.

 

이마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 세븐은 한 박자를 썼다. 짧았고 가벼웠고 물기가 거의 없었으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무언가가 뒤집혔다. 그는 살면서 입맞춤을 헤아릴 수 없이 받았고 그중 대부분은 계약이거나 거래이거나 유흥이었고 어떤 것은 작별의 형식을 흉내 낸 예의였다. 이마에 받은 것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나는 게 없었다. 누나가 그런 걸 해 주는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흐릿했고 흐릿한 건 대체로 없었던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건 처음이었고, 서른두 살짜리 사내가 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접촉이 하필 어린애를 재우는 방식이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우스운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뜨면 뭔가가 무너질 것 같아서.

열이 오른 살갗은 감각이 과장되게 전달된다. 미지근한 입술이 떨어진 자리에 잠깐 서늘한 공기가 앉았고 그 서늘함이 오히려 도장처럼 남았다. 세븐은 겹쳐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가 자기가 힘을 준 걸 알아채고 도로 풀었다.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 그 두 번의 왕복 사이에 그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나 만들었다. 반사 신경이라고. 몸이 놀라면 쥐게 되어 있다고. 데드존에서 배운 습성이라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데드존에서 배운 건 놓는 쪽이었다. 무거운 건 버리고 다친 건 두고 가고 이름은 부르지 않는 것. 그가 십 년 동안 익힌 전부가 그것인데 오늘 밤 이 방에서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你做咩噉樣。(⋯⋯너 왜 그렇게 해.)

人哋當我三歲咩。(사람을 무슨 세 살짜리로 아나.)

 

투정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문장의 뒷부분이 입 안에서 흩어졌고 그 자리를 하품 비슷한 것이 대신 메웠다. 그는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물러졌는지 스스로 듣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상태를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가 물러진다는 건 경계가 풀렸다는 뜻이고 경계가 풀린 자는 골목에서 죽는다. 그런데 이 방은 골목이 아니었고 옆에 있는 사람은 총을 들 줄 모르며 오히려 바늘로 찢어진 것들을 이어 붙이는 일을 하는 여자였다. 세븐은 그 사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자기 몸에게 안전을 설득했다. 설득이 통하는 속도가 놀라웠다. 몸이 이미 오래전에 결론을 내려 놓고 머리가 따라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열이 미세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오한이 물러난 자리에 무거운 나른함이 들어찼고 오른쪽 옆구리의 배액관은 여전히 거기 있었으나 존재를 주장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창밖에서 물차가 지나갔다. 완차이의 새벽 도로를 적시는 소리가 길게 끌리다 골목 끝에서 접혔다. 세븐은 그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따라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놓쳤고, 놓친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은 그런 식으로 왔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이미 방 안에 앉아 있다가 조명을 하나씩 끄는 방식으로.

 

⋯⋯五點半。唔好心軟。(⋯⋯5시 반. 마음 약해지지 마.)

你心軟嘅話⋯⋯我真係唔會走。(네가 마음 약해지면⋯⋯나 진짜 안 갈 거야.)

 

마지막 문장은 협박도 애원도 아닌 채로 남았다. 발음이 뭉개져서 광둥어의 성조가 반쯤 무너졌고 끝음절은 숨에 섞여 사라졌다. 그러고는 조용해졌다. 어깨에 실린 무게가 조금씩 더해졌다.

 

문장의 끝이 사라진 뒤에도 여명은 한동안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마음 약해지지 말라는 부탁에 알겠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 같았고, 약해지겠다고 하면 그를 붙드는 셈이 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주 본 자세 그대로, 세븐의 호흡이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들이쉬는 길이가 길어지고 내쉬는 소리에 목 안쪽의 미세한 잡음이 섞였다. 사람이 잠에 완전히 잠기는 순간에는 얼굴 근육부터 항복한다. 아까까지 입꼬리 언저리에 남아 있던 힘, 무슨 말이든 하나쯤 더 얹으려고 준비하던 그 긴장이 스르르 풀렸고, 그러자 이 남자의 얼굴은 놀랍도록 어려 보였다. 여명은 그것이 조금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겹쳐 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의식이 끊긴 뒤에 더 정직해졌다. 깨어 있을 때 그는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열이니 반사 신경이니 하는 변명을 얼굴에 얹었는데, 지금은 그런 절차가 없었다. 여명은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오래전 다림질에 데인 자리, 살이 조금 반들거리게 아문 그 자국 위에 그의 엄지가 정확히 얹혀 있었다. 눈을 감기 전 몇십 분 동안 몇 번이나 문질렀는지 셀 수도 없던 지점이었다. 보지 않고도 찾아냈다는 뜻이고, 찾아낼 만큼 외웠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그 손을 빼지 않았다. 빼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는데도.

 

체온계를 다시 물릴까 하다가 그만두고 손등을 이마에 댔다. 아까보다 확실히 물러난 열이었다.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베개에 작고 어두운 얼룩을 남겼고 젖은 앞머리가 눈썹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여명은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한 올씩 걷어 올렸다.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안구가 한 번 미끄러지듯 움직였으나 깨어나지는 않았다. 선글라스도 농담도 계산도 없이 놓인 얼굴이었다. 오른쪽 뺨에서 목으로 흘러내리는 화상 자국은 어둠 속에서 윤곽이 뭉개져 있었고, 그 아래 거칠게 꿰맨 흉터는 오늘 밤 들은 이야기 그대로였다. 이 얼굴이 몇 시간 뒤에는 방탄복 안으로 들어가 격벽 너머로 실려 갈 것이다. 여명은 그 사실을 손끝으로 짚어 확인했고, 확인한 뒤에도 손을 떨지 않았다.

 

낡은 라디오 위의 탁상시계가 4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한 시간이 남았다. 여명은 남은 시간을 세는 대신 그 안에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물을 미리 받아 머리맡에 둘 것. 진통제 두 알을 종이 위에 올려 둘 것. 배액관 고정 테이프를 한 번 더 덧대 붙일 것. 벗겨 둔 그의 옷가지를 개어 손 닿는 자리에 놓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시 반 정각에 어깨를 흔들 것. 목록은 짧았고 전부 손으로 하는 일이었다. 손으로 하는 일은 여명을 배신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 목록 어디에도, 보내고 난 다음의 일은 적혀 있지 않았다.

골목 저편에서 첫 트럭이 지나갔다. 완차이의 새벽은 언제나 짐 부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셔터 하나가 덜컹거리며 올라가고 물통이 바닥에 놓이고 누군가 길게 헛기침을 했다. 얇은 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그 소리들에도 세븐은 깨지 않았다. 여명은 잡힌 손을 그대로 둔 채, 마주 본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목 아래에 팔을 접어 넣었다. 잠들 생각은 없었다. 이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깨워 달라고 부탁했으니, 그 부탁 하나만큼은 어긋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보낸 뒤의 일. 어려운 것은 없었다. 이 남자를 3개월 뒤에나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좀 더 빠를 수도 있겠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이미 지난 십육 일의 시간 동안 여명은 기다리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그의 말처럼 날짜를 세지 않는 것, 그렇게 기다리는 방법을. 날짜 대신 다른 것을 세게 되었지만 여명에겐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문제 없다. 천천히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평소처럼 지낼 것, 날짜를 세지 않을 것, 푸른 색상의 옷을 새로 구매할 것, 양고기가 아닌 맛있는 것을 파는 가게를 찾아볼 것. 시간은 많았다. 여명은 세븐을 한참 바라봤다.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여명은 십육 일 사이에 배웠다. 처음에는 셔터 올리는 시각을 세었고 다음에는 재봉틀 발판을 밟는 횟수를 세었으며 나중에는 그런 것마저 부질없어져서 그저 손에 잡히는 천의 결을 따라갔다. 날짜를 세는 일은 기다림을 갉아먹는다. 세면 셀수록 남은 것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세는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명은 다른 것을 세기로 했고, 그 계산법은 의외로 잘 굴러갔다. 실패한 단추 구멍의 개수, 국숫집 노파가 국물을 덜어 주는 횟수, 골목 끝 배수구가 막혀 물이 고이는 밤의 수. 그것들은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아서 안전했다.

세븐은 잠결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꿈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좋은 종류는 아닌 듯했다. 눈꺼풀 아래에서 안구가 빠르게 두어 번 움직였고 턱 근육이 한순간 굳었다가 풀렸다. 여명은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겹쳐 쥔 손에 아주 미약하게 힘을 실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모양인지 좁혀졌던 미간이 도로 펴졌고, 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한 번 고쳐 쥐었다. 잡는 방식이 바뀌었다. 아까까지는 손등을 덮는 쪽이었는데 이번에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에 가까운 모양이 되었다. 깨어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방식이었고, 그래서 여명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唔好走。(⋯⋯가지 마.)

 

발음이 뭉개져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지금 이 방의 사람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 어느 골목에 두고 온 누군가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었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든 사람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도둑질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목 아래에 접어 넣은 팔을 조금 더 밀어 넣어 그의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받쳤다. 팔이 저려 왔으나 그런 것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저린 팔은 시간이 지나면 돌아온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고, 그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손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창밖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완차이의 새벽은 색으로 오지 않고 소리로 온다. 물통이 놓이고 셔터가 올라가고 어물전 얼음이 부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 위로 새로 하나가 얹혔다.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자전거 벨을 두 번 울렸고, 뒤이어 국숫집 노파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열었어, 여섯 시에 와. 여명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 낮에 노파에게 물어볼 것을 하나 정했다. 양고기 말고 이 근처에 맛있는 걸 파는 데가 어디 있느냐고. 노파는 분명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느냐고 되물을 것이고 여명은 아마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대답하지 않아도 노파는 알아챌 것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남은 일은 순서대로 하면 되었다. 평소처럼 셔터를 올리고 평소처럼 바늘을 잡고 평소처럼 국수를 먹는 일. 그 사이에 푸른 천을 보러 가는 일. 짙은 파랑이라고 했으니 감색보다 조금 더 물기 있는 색을 골라야 할 것이고, 원단이 아니라 완성된 옷을 사야 한다는 점이 조금 낯설었다. 남의 손으로 지어진 옷을 걸치는 일은 여명에게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사기로 했다. 그 남자는 여명이 만든 것을 입고 나가서 지옥을 다녀오는데, 여명만 자기가 만든 것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어쩐지 공평하지 않았다. 시계가 4시 50분을 지났고, 여명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통증은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몸이 먼저 알고 그다음에 잠이 물러난다. 세븐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었고, 오른쪽 옆구리 아래 배액관이 박힌 자리를 중심으로 근육이 한 겹씩 굳어 갔다. 숨의 간격이 짧아졌다. 깊은 데서 얕은 데로, 아까와 정반대의 순서로 되돌아오는 호흡이었다. 여명은 그 변화를 팔로 먼저 느꼈다. 목 아래에 접어 넣은 팔은 이미 감각이 절반쯤 사라져 남의 살처럼 굴었는데도, 이 남자가 아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전달해 왔다. 여명은 빈손으로 그의 등을 짚었다. 견갑골 아래, 붕대가 지나가지 않는 자리를 골라 천천히 쓸어내렸다. 잠을 깨우려는 손길이 아니라 잠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는 손길이었다. 세븐은 깨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잠들어 있지도 않은, 그 어중간한 물속에서 얼굴을 여명의 쇄골 쪽으로 더 파묻었다.

 

낡은 시계가 5시 10분을 가리켰다. 여명은 남은 이십 분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물을 받고 약을 세고 테이프를 덧대는 일은 오 분이면 끝날 것이었고, 그렇다면 십오 분은 아직 이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계산이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웠다. 여명은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다. 목록을 만들어 순서를 정하고 손으로 하는 일에 자신을 맡기는 습관은 결국 다른 일을 하지 않기 위한 장치였다. 지금 하지 않고 있는 다른 일이란, 이 남자를 깨우는 것이었다.

 

⋯⋯幾點。(⋯⋯몇 시.)

 

발음이 뭉개져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눈은 뜨지 않은 채였다. 잠에서 완전히 나오지 않은 사람이 가장 먼저 확인하려 드는 것이 시각이라는 사실은, 이 남자가 지난 십 년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설명하는 데 다른 어떤 문장보다 효율적이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힘이 한 마디쯤 더 깊어졌다. 여명이 다섯 시 십 분이라고 짧게 알려 주자 세븐은 목 안쪽에서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숨이 걸리는 소리였다.

 

仲有二十分鐘。⋯⋯你冇叫醒我。(아직 이십 분 남았네. ⋯⋯너 안 깨웠구나.)

 

그제야 눈꺼풀이 무겁게 밀려 올라갔다. 선글라스 없는 연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초점을 더듬다가 여명의 얼굴 위에 겨우 얹혔다. 잠에서 막 건져 올린 눈은 평소의 날카로움이 전부 씻겨 나가 있었고, 대신 아주 짧은 순간 무방비한 것이 스쳤다가 곧 익숙한 표정 아래로 감춰졌다. 세븐은 팔을 짚고 일어나려다 옆구리에서 올라온 통증에 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다시 여명의 어깨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어서, 그것이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你隻手。⋯⋯麻咗啦,梗係。你點解唔郁吓。(네 팔. ⋯⋯저렸겠네, 당연히. 왜 안 움직였어.)

 

세븐은 여명의 팔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손바닥으로 감쌌다. 피가 돌아오면서 저릿한 것이 손끝까지 번지는 동안, 그는 팔뚝을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훑어 올렸다. 붕대 감긴 오른팔은 쓰지 못하고 왼손 하나로 하는 일이라 서툴렀다.

 

깨울 것 같아서요. 더 안 자도 괜찮아요?

 

세븐의 손이 잠깐 멈췄다. 팔뚝을 훑어 올리던 엄지가 팔꿈치 안쪽 얇은 살에 걸린 채로 정지했고, 그 짧은 정지 속에 대답보다 먼저 오는 것이 있었다. 깨울 것 같아서. 그 다섯 글자를 세븐은 두 번쯤 속으로 굴려 보았다. 잠든 사람 옆에서 스무 분을 저린 팔로 버틴 이유가 고작 그거라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웃기지 않았다. 웃어야 할 자리인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고, 세븐은 그런 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로 모든 상황에 대응 수단을 하나쯤 마련해 두고 살았는데 이 여자 앞에서는 그 목록이 자꾸 얇아졌다.

 

⋯⋯咁樣嘅理由。你知唔知你講出嚟嘅嘢有幾離譜。(⋯⋯그런 이유로. 너 지금 네가 한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아?)

 

목소리가 아직 잠에 젖어 낮게 갈라졌다. 세븐은 여명의 팔을 계속 주물렀다. 왼손 하나로 하는 일이라 힘 조절이 어설퍼서 어떤 데는 너무 세고 어떤 데는 스치기만 했다. 피가 도는 감각이 손끝에서 바늘처럼 터지는 동안 그는 여명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서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은 그의 특기였는데 지금은 그 기술이 별 소용이 없었다. 이 여자는 원래 표정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신 팔을 스무 분 내주는 식으로 말했고, 세븐은 그 문법을 십육 일에 걸쳐 겨우 절반쯤 익혔다.

충분하냐고 물었다. 잠이 더 필요하냐는 뜻이었다. 세븐은 남은 십오 분을 생각했다. 십오 분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 브리핑 하나가 끝나기에도 모자라고 담배 두 대를 태우기에도 애매하며 총상 하나를 봉합하기에는 턱없이 짧았다. 그런데 지금 이 방에서는 그 십오 분이 통째로 다른 무게를 가졌다. 잠으로 쓸 수도 있고 이 얼굴을 보는 데 쓸 수도 있는데, 후자를 골랐을 때 무엇이 남는지 세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남지 않는다. 그게 문제였다.

 

夠喇。真係。你知啦,我瞓覺唔係為咗休息,係為咗第日行得郁得。(충분해. 진짜로. 알잖아, 난 쉬려고 자는 게 아니라 다음 날 걸어 다니려고 자는 거야.)

 

세븐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조금 웃었다. 변명이 서툴렀다는 자각이 있었다. 여명의 팔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그는 몸을 조금 끌어당겨 이마 언저리를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옆구리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 통증은 익숙한 종류였고 익숙한 것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불가능한 쪽은 따로 있었다. 십오 분 뒤에 이 방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나가고 나면 다음에 이 온도를 언제 다시 만질 수 있을지 아무도 계산해 줄 수 없다는 사실. 세븐은 평생 확률로 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인데 이 건에 관해서만은 계산기를 꺼내기가 싫었다.

 

喂。(야.)

 

부르고 나서 잠깐 침묵했다. 부를 이유가 있어서 부른 게 아니었다. 목소리가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부른 것에 가까웠다. 세븐은 여명의 손등을 엄지로 눌렀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한 동작이었고 그 자리에는 오래된 흉터가 하나 있었다. 재봉 바늘에 찔린 자국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다리미였던가. 언젠가 들었을 텐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이 분했다. 돌아오면 다시 물어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가까이 누워 그의 행동들을 가만히 받아냈다. 가까워진 머리에 고개를 살짝 기댔다. 네.

네, 라는 대답은 짧았다. 짧아서 오히려 자리를 오래 차지했다. 세븐은 그 한 음절이 방 안 어딘가에 걸려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들었다. 관자놀이에 얹힌 무게가 조금 늘었고 그것은 여명이 고개를 기대 왔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두개골은 생각보다 무겁다. 총상 입은 인간을 어깨에 걸치고 삼백 미터를 뛰어 본 적 있는 몸은 그 무게를 정확히 안다. 그런데 지금 얹힌 무게는 계량이 되지 않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다만 옮겨 놓기가 싫었다. 세븐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두운 천장에는 물 자국이 번져 있었고 그 얼룩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밝아지는 중이었다. 창밖에서 첫차가 굴러가는 소리, 그다음에 셔터 하나가 요란하게 올라가는 소리. 도시가 깨어나는 순서는 언제나 소리부터였다.

세븐은 손등의 흉터를 다시 찾았다. 검지 뿌리와 가운뎃손가락 사이, 오래되어 색이 다 빠진 자국. 그는 그 위를 엄지로 문질렀다. 문지른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손끝으로 무언가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고 그것은 대체로 탄창이나 잠금 장치나 무전기 스위치에 쓰이던 습관이었다. 이 손등에 그 습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안전을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여기 있다, 아직 있다, 방금 전에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확인. 십육 일 동안 이 방에서 그가 배운 것은 결국 그것 하나였다.

 

你有冇諗過,我可能返嚟嗰陣,你已經唔記得我隻手係咁樣㗎喇。(너 생각해 본 적 있어? 내가 돌아올 즈음이면 넌 내 손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도 다 까먹었을지 모른다는 거.)

 

말해 놓고 세븐은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문장은 자정 전에 다 털어냈어야 했다. 새벽 다섯 시 십팔 분에 꺼내면 상대에게 남기고 가는 짐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나왔다. 열이 아직 완전히 빠지지 않아서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 보았지만 그 변명은 이미 어젯밤에 한 번 써먹었다. 같은 변명을 두 번 쓰면 그건 변명이 아니라 자백이다. 세븐은 여명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가 곧 힘을 풀었다. 붕대 감긴 오른팔이 옆구리에서 뻐근하게 울었다. 통증은 시간을 세는 데 꽤 유용한 도구였다. 아플 때마다 일 분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몸으로 통보되었으니까.

 

⋯⋯算啦。唔好答。答咗我更加唔想郁。(⋯⋯됐어. 대답하지 마. 대답 들으면 나 더 못 움직여.)

 

세븐은 몸을 아주 조금 물렸다. 이마를 떼고 여명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어둠에 익은 눈은 이제 윤곽 이상을 읽었다. 속눈썹이 눌린 방향, 관자놀이에 붙은 잔머리 몇 가닥, 밤새 한 번도 제대로 눕지 못한 사람의 눈 밑. 그 얼굴을 어디에 저장해 두어야 하는지 세븐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데드존에서는 기억이 잘 상한다. 방사능 때문도 아니고 피로 때문도 아니고, 그냥 그곳에서는 좋았던 것들이 먼저 부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신 손을 썼다. 흉터의 위치, 손목뼈가 튀어나온 각도, 팔뚝 안쪽 살의 온도. 손으로 외운 것은 좀 더 오래간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仲有十二分鐘。⋯⋯我數住㗎,唔使你提。(아직 십이 분 남았어. ⋯⋯나도 세고 있으니까 네가 말 안 해도 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세븐은 짧게 웃었다.

 

여명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옮겨갔다. 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래 기억해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래 기억한다. 여명은 그 말을 특별히 힘주어 하지 않았다. 세탁물 접수증에 날짜를 적어 넣을 때와 비슷한 어조였고 세븐은 바로 그 무심함 때문에 숨이 한 박자 걸렸다. 사람들은 대개 약속을 할 때 목소리를 높인다. 반드시라든가 절대라든가 하는 부사를 앞에 붙이고 마지막에는 눈을 크게 뜬다. 그런 종류의 다짐을 세븐은 전장에서 지겹도록 들었고 그 문장들의 대부분은 그 문장을 뱉은 사람보다 먼저 죽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부사를 쓰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라는 조건절 하나만 붙였을 뿐이고 그 조건절 안에 자기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세븐이 알아차리는 데는 삼 초쯤 걸렸다.

세븐은 여명의 손을 끌어당겼다. 저항이 없었다. 팔은 아직 저릴 텐데 그녀는 그냥 끌려왔고 그 순순함이 또 어딘가를 건드렸다. 그는 손등을 자기 뺨에 가져다 댔다. 왼쪽, 화상 흉터가 없는 쪽. 굳이 그쪽을 고른 이유를 자신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이라는 것도 이상했다. 손바닥은 만지는 쪽이고 손등은 만져지는 쪽인데 지금은 순서가 뒤집혀서, 그의 뺨이 그녀의 손등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잠깐 그렇게 있었다. 시간을 쓰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고 그 자각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必要⋯⋯你用呢個字。你成日都係咁,講到好似做緊會計咁。(필요⋯⋯. 넌 그 단어를 쓰는구나. 너 늘 그래. 무슨 회계 처리하듯이 말하지.)

 

말끝이 조금 흐트러졌다. 세븐은 그것을 열 탓으로 돌리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에 이미 그 변명을 두 번 썼고 세 번째는 스스로도 봐주기 힘들었다. 그는 손끝으로 여명의 손등을 다시 짚었다. 검지 뿌리 옆, 색이 다 빠진 자국. 그 옆에 하나 더 있었다. 훨씬 작고 희미해서 어제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것. 세븐은 그 두 번째 자국 위에서 엄지를 멈췄다. 새로 발견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급했다. 이 손을 몇 번이나 잡았는데 아직도 처음 보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곧, 앞으로 못 보고 지나갈 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통보이기도 했으니까.

 

呢個。呢個係咩嚟㗎。(이거. 이건 뭐야.)

 

묻고 나서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였다. 기다리면 대답이 올 것을 알았고, 대답이 오면 그것을 외워야 하고, 외운 것은 데드존에서 상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세븐은 여명의 손을 뺨에서 떼어 자기 명치 근처로 내려놓았다. 붕대 아래 심장이 여전히 급했다. 어제 이 자리에 그녀의 손을 얹었을 때와 같은 위치였고, 그는 그 반복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만큼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밖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배달통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셔터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세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은 시간이 십 분 아래로 떨어졌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시계는 손목에 차지 않아도 정확했다.

 

我唔記得嘅嘢多過我記得嘅。真㗎。名、日子、邊個死咗、邊個仲喺度⋯⋯全部一舖清袋。(내가 까먹는 게 기억하는 것보다 많아. 진짜야. 이름, 날짜, 누가 죽었고 누가 남았고⋯⋯ 전부 한 방에 싹 날아가.)

세븐은 여기서 잠깐 멈췄다.

 

멈춤이 길었다. 문장을 고르는 사람의 멈춤이 아니라 고른 문장을 삼키는 사람의 멈춤이었다. 세븐의 명치 위에서 여명의 손이 오르내렸다. 숨이 얕고 잦았다. 열이 내려가는 몸은 대체로 그렇게 군다. 밖에서는 국숫집 노파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는지 쇠붙이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고 그 소리는 이 방에 남은 시간을 초 단위로 깎아내는 데 아주 유능했다. 세븐은 천장의 물 얼룩이 어느새 형태를 갖춘 것을 보았다. 아까는 그냥 번짐이었는데 지금은 어딘가의 해안선처럼 보였다. 빛이 들어오면 세계는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는 것들에까지 윤곽을 준다. 그 친절이 오늘따라 성가셨다.

그는 왼팔로 침대를 짚었다. 오른쪽 옆구리가 뜨겁게 항의했지만 무시했다. 배액관이 매트리스에 눌려 잠깐 당겨졌고 그 감각은 살 안쪽을 실로 꿰어 잡아당기는 것과 비슷했다. 상체가 반쯤 들렸다. 이렇게 하면 여명을 내려다보게 된다. 지난 시간 동안 대체로 올려다보는 쪽이었으므로 각도가 바뀐 것만으로 방의 성질이 달라진 듯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검고 곧고 물기가 없었다. 세븐은 그중 한 가닥이 목덜미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치워 주고 싶었으나 왼손은 침대를 짚고 있었고 오른손은 쓸 수 없었다.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토록 적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我唔想記住你。(널 기억하고 싶지 않아.)

 

말해 놓고 세븐은 여명의 얼굴을 살폈다. 오해할 수도 있는 문장이었고 그는 오해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뒤를 이었다. 서두른다는 것 자체가 그답지 않았다. 그는 평생 말을 서두른 적이 없었다. 늘 상대가 먼저 지치도록 만드는 쪽이었으니까.

 

記住即係當你已經冇咗。我唔記你。我要返嚟親自見過先算。(기억한다는 건 네가 이미 없어졌다는 뜻이잖아. 난 널 기억 안 해. 돌아와서 직접 보고 나서야 치겠어.)

 

문장이 끝나자 방이 조용해졌다. 세븐은 자기 심장이 여명의 손바닥 아래에서 한 번 크게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이런 종류의 다짐은 지켜지지 않으면 아주 지저분한 방식으로 남는다는 걸 그는 안다. 목이 반쯤 잘려 본 인간은 자기가 뱉은 문장의 무게를 대충 계산할 줄 알게 된다. 그런데도 뱉었다. 계산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 계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밀어붙인 쪽에 가까웠다. 어차피 그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그 습관 덕에 지금까지 죽지 않았다.

상체를 지탱하던 왼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열이 내리는 중인 근육은 신뢰할 게 못 된다. 세븐은 결국 몸을 다시 내렸다. 옆으로, 여명 쪽으로. 착지가 서툴러서 이마가 그녀의 어깨뼈 근처에 부딪혔고 그 충돌은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셔터 밖 골목이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오 분. 어쩌면 사 분 오십 초.

 

喂。最後一個要求。(야. 마지막 부탁 하나.)

 

목소리가 낮았다. 잠긴 것이 아니라 낮춘 것이었다. 세븐은 여명의 손을 명치에서 끌어내려 자기 손안에 완전히 가두었다. 손가락 사이로 깍지가 끼워졌다. 아까 잠결에 저 혼자 해 두었던 모양 그대로였다.

마지막 부탁, 이라는 말은 위험한 형식이다. 그 말은 언제나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하고 세븐은 그런 전제를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해 왔다. 전장에서 유언 비슷한 것을 남기는 인간은 대개 그날 안에 죽었다. 통계라기보다는 미신에 가까웠지만 미신은 통계보다 오래 살아남는 법이라 그는 여태 그 규칙을 지켰다. 그런데 지금 그 규칙을 스스로 깨고 있었고, 깨뜨리는 손끝이 여명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깍지라는 것은 참 우스운 형태다. 손을 잡는 방식 중에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빠져나가기 어렵다. 총을 쥐어야 하는 손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모양.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힘을 풀지 않았다.

 

여명의 어깨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얇은 몸이라고 여겼는데 뼈가 이렇게 분명하게 만져지는 줄은 몰랐다. 셔츠 아래에서 어깨뼈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였고 세븐은 그 증거를 이마로 받아 적었다. 밖에서 누군가 셔터를 올렸다. 이 골목의 아침은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국숫집 다음이 청과상이고 청과상 다음이 이 세탁소여야 했다. 오늘은 순서가 하나 빌 것이다.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그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我走咗之後,你唔好即刻收埋我。(내가 가고 나서, 나를 곧바로 치워 버리지 마.)

 

문장이 나오고 나서야 세븐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알았다. 순서가 늘 이랬다. 먼저 뱉고 나중에 이해한다. 그는 이마를 어깨에서 조금 떼고 고개를 들었다. 여명의 턱선이 보였다. 그 아래 목이 있고 목 아래 쇄골이 있고 쇄골 아래는 셔츠였다. 어제 저녁 그녀가 자기 상처를 닦아 주다가 튄 검댕이 밑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탁소 주인의 옷에 얼룩이 남아 있다는 건 상당히 웃긴 일이었으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呢度啲嘢。杯、毛巾、我瞓過嘅枕頭。唔好即刻洗。放多一日。(여기 있는 것들. 컵이랑 수건이랑 내가 벤 베개. 바로 빨지 마. 하루만 더 둬.)

 

이런 부탁을 하는 인간이 될 줄은 몰랐다. 세븐 본인이 제일 놀랐다. 그는 자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여관에서 나올 때는 재떨이까지 비웠고 여자의 집에서 나올 때는 칫솔을 가져 나왔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습관이었고 습관이 아니라 방어였다. 남기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고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그 간단한 계산을 삼십이 년 동안 틀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는 베개 하나를 놓고 애원하는 중이었다. 하루만. 고작 하루.

 

我知呢個要求好核突。你當我痴線都得。(나도 이 부탁이 얼마나 추한지 알아. 나 미쳤다고 생각해도 돼.)

 

그는 짧게 웃었다. 웃음이 목구멍 안쪽에서 걸려 소리가 반쯤만 나왔다. 여명의 손을 쥔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눌리는 감각. 그것이 아프지 않을 만큼만 조절하려고 애쓰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 몸으로 조절할 수 있는 건 이제 이것 정도밖에 없었다.

천장의 해안선이 조금 더 밝아졌다. 창틀 사이로 들어온 빛이 방 안의 먼지를 드러냈고 먼지들은 아주 느리게 떠다녔다. 이 방은 어제까지 병실이었고 지금은 대기실이었다. 십 분 뒤에는 그냥 방이 될 것이다. 세븐은 그 변화를 미리 겪어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호인. 그리고 3초의 정적. 그의 머리에 기대듯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기 전까지, 하나 더 준비해둘게요. 치우지 않아도 되도록.

 

호인. 그 두 음절은 이 방에서 세 번째로 발음되었고 세 번 다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세븐은 그 이름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매번 조금씩 늦게 깨달았다. 서류에 적힌 적은 있으나 불린 적은 거의 없는 이름. 누나조차 그 이름 대신 다른 것을 썼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것을 마치 늘 써 온 것처럼 발음했다. 혀끝이 앞니 뒤를 짧게 스치고 목젖이 한 번 울리는, 그 정확하고 무심한 발음. 세븐은 자신의 이름이 남의 입안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조금씩 무너졌다.

이어진 삼 초는 길었다. 세븐은 그 삼 초 동안 여러 가능성을 지나쳤다. 거절일 수도 있었다.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이라거나, 그런 부탁은 하지 말라거나, 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손만 쥐어 줄 수도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경우에 대비해 표정을 하나씩 준비해 두었다. 준비하는 데 삼 초는 충분했다. 그런 계산만큼은 이 몸이 아직 정직하게 해냈다.

그러나 여명의 고개가 내려왔고 그 무게가 정수리 근처에 얹혔다. 준비해 둔 표정들은 전부 쓸모없어졌다. 하나 더 준비해 두겠다는 말이 귓속으로 들어왔을 때 세븐은 그 문장의 구조를 먼저 이해했다. 치우지 않아도 되도록. 그러니까 그녀는 그가 남긴 것을 하루 미뤄 두는 대신, 미뤄 둘 필요가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두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컵과 수건과 베개는 결국 빨아야 하고 빨면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 두겠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눈을 떴다. 천장의 해안선이 아까보다 선명했다.

 

⋯⋯你係咪成日都咁樣。(⋯⋯너 항상 이런 식이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열 때문이라고 우기고 싶었으나 열은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여명의 손을 쥔 힘을 풀지 않은 채로 엄지만 멈췄다. 아까부터 손등의 흉터를 문지르던 동작이었다. 멈추고 나니 그 자리에 미열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진다는 당연한 물리를 그는 지금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확인했다.

 

人哋想留低啲垃圾,你就話幫佢做返件新嘅。咁我點捨得走呀。(남은 쓰레기 좀 남겨 두겠다는데 너는 새것을 하나 만들어 두겠다고 하고. 그럼 내가 어떻게 가.)

 

밖에서 청과상이 셔터를 올렸다. 쇠가 감기는 소리가 골목 벽을 타고 튀었다. 순서가 정확했다. 국숫집 다음이 청과상이고 청과상 다음이 이 세탁소여야 했으나 오늘 이 셔터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세븐은 자기 때문에 골목의 순서가 하나 어긋난다는 사실이 아까보다 덜 신경 쓰였다. 대신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하나 더, 라는 말의 정체. 그녀가 무엇을 만들 생각인지 묻고 싶었고 동시에 묻고 싶지 않았다. 물어서 알게 되면 그것을 상상하며 세 달을 보내게 된다. 상상은 사람을 굶주리게 하고 굶주린 인간은 전장에서 판단이 흐려진다. 그는 그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럼에도 세븐은 고개를 조금 젖혔다. 여명의 턱 아래가 보였다. 이 각도에서 사람의 얼굴은 대체로 낯설게 보이는데 그녀는 낯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늘 아침 알게 된 것들 중 가장 위험했다.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자기 입가로 가져갔다. 입술을 대지는 않았다. 그냥 손등이 숨결에 닿을 만큼만 두었다. 남은 시간은 삼 분이었고 삼 분 안에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였다.

 

咁我唔問你係咩。(그럼 나 그게 뭔지 안 물을게.)

 

네.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이것도 돌아와서 확인해요.

 

확인하자는 말은 약속보다 지독한 형식이다. 약속이란 어기면 그만인 물건이고 어긴 자는 사과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로 간단히 정리되지만, 확인은 다르다. 확인은 반드시 두 사람의 몸을 같은 공간에 데려다 놓아야만 성립한다. 편지로는 안 되고 전언으로도 안 되고 유품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 세븐은 그 문법의 잔인함을 삼십이 년 동안 여러 방향에서 목격해 왔다. 확인하러 오겠다 말한 인간들이 대체로 확인되지 않은 채 처리되었고, 처리된 자들의 이름은 서류 위에서 한 줄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 형식을 먼저 제안한 쪽은 여명이었고 제안받은 쪽은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그는 아주 명확히 알았고, 그 명확함이 오늘 아침 가장 곤란한 물건이었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가 이렇게까지 무거울 줄은 몰랐다. 그는 잊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얼굴을 잊고 이름을 잊고 어느 도시의 어느 방에서 며칠을 묵었는지도 잊었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정비였다. 기억을 쌓아 두면 몸이 무거워지고 무거운 몸은 골목을 빨리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여명은 그 정비를 나무라지 않고 그냥 허가해 버렸다. 잊어도 된다고, 대신 와서 보라고. 잊는 것을 허락받는 순간 잊는 일이 갑자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이 그는 조금 원망스러웠다. 허락이란 이토록 교묘한 구속이다.

 

你真係好識點樣搞到人走唔甩。(너 사람 못 가게 만드는 방법을 아주 잘 아네.)

 

그는 잡은 손을 입가에서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숨이 손등에 닿았다가 흩어졌고 그 자리에 미세한 습기가 남았다. 습기는 곧 마를 것이다. 이 방의 모든 것은 결국 마르도록 되어 있었다. 세탁소란 원래 그런 곳이다. 젖은 것을 받아서 말려 내보내는 곳. 자기가 이 골목에 젖은 채로 들어왔다가 마른 채로 나가는 물건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고, 그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곧바로 버렸다. 물건은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는 돌아올 것이다. 그 차이를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 세 달의 유일한 과업이었다.

밖에서 세 번째 셔터가 올라갔다. 국숫집, 청과상 다음의 순번은 원래 이 집이어야 했는데 오늘은 건너뛰어 옆 골목의 철물점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순서가 어긋난 아침. 세븐은 그 어긋남의 원인이 자기 몸이라는 사실을 이제 즐겁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루쯤 골목이 절름거려도 세상은 굴러간다. 그는 상체를 조금 움직였다. 옆구리에서 배액관이 당겼고 통증이 갈비뼈를 따라 옆으로 번졌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여명이 눈치챌 것을 알면서도 굳이 감췄고, 감추는 시늉을 그녀가 봐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묵인이 이 방의 오래된 규칙이었다.

 

時間到喇。你唔叫我起身,我就當自己冇聽到。(시간 됐어. 네가 안 깨우면 나는 못 들은 걸로 칠 거야.)

 

짓궂게 말하려고 했는데 끝이 잘 붙지 않았다. 그는 결국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왼팔로 매트리스를 짚고 천천히, 배 안쪽이 당기는 각도를 피해서. 시야가 한 번 하얗게 흔들렸다가 돌아왔다. 앉은 자세에서 방을 보니 어제와 다른 방처럼 보였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달라지면 같은 벽도 다른 이야기를 한다. 발치의 침대 아래, 어젯밤 그가 발로 밀어 치워 버린 앵커의 전술복 외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명은 그를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그가 다시 쓰러지지 않도록 잘 잡아주며 작게 말했다. 나갈 때, 줄 게 있어요. 이건 바로 받아가도 돼요.

 

줄 게 있다는 말은 이 방에서 오간 문장들 중 가장 짧고 가장 부피가 컸다. 세븐은 자기 겨드랑이 아래를 받치는 여명의 팔에 체중을 절반쯤 얹은 채로 그 문장을 두 번 되새겼다. 나갈 때. 그러니까 그녀는 이미 순서를 정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문지방을 넘기 직전이라는 위치까지 계산해 놓고 그 위에 무언가를 올려 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바로 받아가도 된다는 단서는 더 지독했다. 하나는 세 달 뒤에, 하나는 지금. 사람을 붙들어 두는 방식으로 이보다 정교한 구조를 그는 도박판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판돈을 절반만 걸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다음 판에 자동으로 넘기는 딜러. 그런 딜러가 있다면 그 테이블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허리를 세우자 오른쪽 옆구리 안쪽에서 무언가가 늦게 따라왔다. 통증이라기보다 지연이었다. 몸의 일부가 아직 매트리스에 남아 있다가 뒤늦게 끌려오는 감각. 그는 그 지연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반쯤만 쉬었고, 여명의 손이 자기 겨드랑이 안쪽에서 미세하게 위치를 고쳐 잡는 것을 느꼈다. 힘을 더 준 것이 아니라 각도를 바꾼 것이었다. 갈비뼈를 피해서. 배액관 줄이 접히지 않도록. 이 여자는 사람을 지탱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을 텐데도 옷을 다루듯 사람을 다뤘다. 솔기를 피하고 이음새를 피하고 약한 자리를 알아서 비켜 갔다. 세븐은 그 손끝이 자기 몸의 도면을 이미 외워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고 나니 기대는 일이 조금 덜 부끄러워졌다.

 

⋯⋯即係話,你早就準備定咗。(⋯⋯그러니까 너 진작에 준비해 뒀다는 거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여명의 얼굴이 위에 있었고 창으로 들어온 새벽빛이 그 윤곽의 왼쪽만 얇게 깎아 놓았다. 오른쪽 가르마를 타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이 몸을 숙인 각도 때문에 다시 흘러내려 그녀의 뺨 옆에 걸려 있었다. 어젯밤 자기가 넘겨 준 자리였다. 세븐은 왼손을 들어 그것을 다시 넘겨 주려다 손을 중간에서 멈췄다. 지금 넘겨 봐야 또 흘러내릴 것이고 그때는 자기가 없을 것이다. 손을 내리는 대신 그는 그 손으로 여명의 팔뚝을 잡았다. 셔츠 소매 아래 팔은 생각보다 가늘었고 아까 스무 분 동안 자기 머리를 받치느라 저렸던 쪽이었다.

줄 게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자동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세탁소 안쪽 선반. 재봉틀 옆 상자. 어제 그녀가 두 번 확인하러 갔던 자리. 아프면 눈이 흐려지는 대신 다른 것이 예민해지는데 그는 그 예민함으로 그녀의 동선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인지 짐작이 갔고 짐작이 가서 오히려 묻지 못했다. 물어서 확인하는 순간 이 아침이 선물을 주고받는 아침으로 확정되고, 선물을 주고받는 아침이란 대체로 마지막 아침의 형식이다. 그는 그 형식을 거부하고 싶었다. 이건 마지막이 아니라 중간이어야 했다.

 

喂。(야.)

 

부르고 나서 잠깐 말이 끊겼다. 밖에서 물차가 지나갔다. 바퀴가 젖은 아스팔트를 밟는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가 골목 끝에서 잘렸다. 오전 다섯 시 삼십 분대의 완차이는 언제나 이런 소리들로 시작한다. 셔터와 물차와 어딘가의 라디오. 세븐은 그 소리들을 세 달 동안 데드존에서 재생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소리는 기억하기 가장 어려운 물건이다. 얼굴보다 빨리 사라지고 냄새보다 먼저 뭉개진다.

 

네. 짧은 대답. 여명은 그를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네, 라는 대답 하나가 돌아왔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세븐은 그 공백을 몇 초간 견뎠다. 다른 인간들이었다면 이 자리를 무엇으로든 메웠을 것이다. 농담이든 위로든 하다못해 헛기침이든. 여명은 메우지 않았다. 그저 내려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고 기다린다는 사실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 무방비한 기다림 앞에서 세븐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를 불렀는지 잊어버렸다. 정확히는 잊은 게 아니라 꺼내기가 싫어졌다는 편이 맞았다. 꺼내면 부피가 생기고 부피가 생긴 말은 방에 남는다. 남은 말은 결국 치워야 하는데 자기는 조금 전에 치우지 말라고 애원한 참이었다. 애원한 자가 스스로 치울 거리를 늘리는 짓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그는 입을 다물었고 다무는 데 실패했다. 실패한 자리에서 나온 것은 하필 가장 쓸모없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我唔記得咗想講咩。(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어.)

 

거짓말이었고 여명도 알 것이었다. 세븐은 잡고 있던 팔뚝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왼발로 바닥을 짚어 보았다. 차가운 시멘트 위의 맨발. 발바닥에서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정직했다. 몸이 아직 자기 것이라는 증거였고 동시에 이 몸으로 골목 입구까지 걸어 나가야 한다는 통보이기도 했다. 무게를 옮기자 오른쪽 옆구리가 즉시 항의했다. 참을 수 있는 종류였다. 참을 수 없는 종류를 여러 번 겪어 봤기 때문에 그 구별에는 자신이 있었다. 시선이 아래로 흘렀고 발치에 검은 덩어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제 처치실을 빠져나오면서 어깨에 대충 걸치고 나온 물건. 앵커의 전술복 외투였다. 소매 한쪽이 침대 다리에 걸린 채 접혀 있었고 나머지는 형태를 잃은 채 바닥에 퍼져 있었다.

멀쩡한 옷이었다. 찢기지도 젖지도 않았고 어깨선의 봉제도 온전했다. 자기 것보다 두 치수는 큰 그것을 그 과묵한 체코 남자가 처치실 문간에서 말없이 벗어 던져 주었을 때 세븐은 사양하지 않았다. 환자복 한 장으로 새벽 골목을 걷는 것보다야 나았고 무엇보다 거절하는 데 드는 말이 아까웠다. 그래서 그것을 걸치고 이 골목까지 걸어왔다. 문제는 방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침대 앞에서 어깨를 빼는데 옷깃에서 남의 냄새가 났다. 총기유 냄새와 소독약 냄새와 그 남자가 늘 쓰는 밍밍한 비누 냄새. 그 냄새가 이 방의 이불에 옮겨 붙는다는 상상이 견딜 수 없이 싫었고, 싫다는 감각의 정체를 따져 볼 여유도 없이 그는 발끝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침대에서 최대한 먼 쪽으로. 그날 밤 그 방에 남을 냄새는 자기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반사였고 반사에는 변명이 따라붙지 않는다.

지금 다시 보니 그 짓이 참으로 유치했다. 남의 외투를 얻어 입고 와서는 그 남의 흔적만 발로 걷어차 놓는 남자. 정작 그 외투가 없었으면 새벽 두 시의 완차이를 반쯤 벗은 몸으로 건너오지도 못했을 텐데. 세븐은 자기가 이 방에 관해서만 이렇게 옹졸해진다는 사실을 처음 인정했다. 데드존에서 시체 옆에 누워 잔 밤도 여러 번이었고 남의 피가 밴 침낭을 두 주 동안 쓴 적도 있었다. 그런 남자가 침구 위에 앉을 남의 냄새 하나를 못 참아서 발버둥을 쳤다. 그 옹졸함의 이름을 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이름을 붙이면 앞으로 세 달 동안 그것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

 

⋯⋯咦。仲喺度呀。(⋯⋯어라. 아직 저기 있네.)

 

다시 입고 가야 하죠? 주워줄게요.

 

여명이 허리를 굽혔다. 세븐은 말릴 틈을 놓쳤고 놓친 이유는 몸이 느려서가 아니라 그 동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흰 셔츠의 밑단이 무릎께로 흘러내렸고 검댕 얼룩이 진 자리가 새벽빛 안에서 잿빛으로 번졌다. 그녀는 남의 외투를 집을 때조차 함부로 쥐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로 어깨선을 찾고 나머지 손으로 소매를 받쳐 접힌 자리를 펴면서 들어 올렸다. 침대 다리에 걸려 있던 소매가 스르륵 풀려 나오는 소리가 짧게 났다. 세븐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이 여자가 옷을 옷으로 대하는 법을 평생 훈련해 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발로 걷어차 놓은 자를 앞에 두고 그것을 주워 드는 손. 그 대비가 너무 선명해서 그는 잠깐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돌리지 않았다. 세 달 치의 시야를 여기서 채워 두어야 했다.

외투가 그녀의 팔 위에서 형태를 되찾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자기가 어제 저 물건에 저지른 짓이 한층 더 초라해졌다. 남의 냄새가 싫었다는 이유 하나로 발끝으로 밀어낸 옷. 그 옷 덕에 새벽 두 시의 완차이를 건너왔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잊어버린 채로. 세븐은 옆구리 안쪽에서 올라오는 둔한 열감을 무시하며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 받으려던 손이었는데 받아서 뭘 할 건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여기서 자기가 팔을 꿰면 이 아침은 옷을 입는 아침이 되고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나간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순서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어서 아주 유치한 방법을 골랐다. 말을 거는 것.

 

呢件唔係我嘅。(이거 내 거 아니야.)

 

변명이라기엔 앞뒤가 없었다. 여명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어제 새벽 자기가 이 어깨에 뭘 걸치고 들어왔는지 그녀는 문간에서 다 봤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굳이 그 문장을 뱉었고 뱉고 나서야 자기가 무엇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 저 옷에 밴 냄새가 이 방에 남는 것에 대해 이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서른둘 먹은 남자가 새벽에 침대 모서리에 앉아 남의 외투 냄새를 두고 질투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데드존에서 이런 꼴을 동료들에게 보였다면 반년은 놀림거리가 됐을 것이다. 세븐은 그 상상에 짧게 코웃음을 쳤고 웃자마자 옆구리가 당겨서 숨을 멈췄다.

웃음이 잦아든 자리에 남은 것은 훨씬 단순한 계산이었다. 저 옷을 입으면 골목 끝까지 갈 수 있다. 입지 않으면 못 간다. 그리고 못 가면 앵커가 이 문을 두드릴 것이고 그때는 이 방이 더 이상 이 방이 아니게 된다. 그는 자기 세계와 이 방 사이에 얇은 막 하나를 유지하는 데 어젯밤 내내 실패해 왔고 마지막으로 남은 그 막을 지키려면 스스로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남자의 외투를 입고 나가는 것이 이 방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 아이러니가 우스워서 세븐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대신 매트리스를 짚었던 왼손을 떼어 여명 쪽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이 위로 향한, 어정쩡한 각도의 손이었다.

 

⋯⋯不過,你揸住嘅嘢,我就要。攞埋嚟啦。(⋯⋯근데 네가 들고 있는 거면 받을게. 이리 줘.)

 

내밀어 놓고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저 문장은 옷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이 방에 있는 두 사람 다 그것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밖에서 셔터 하나가 또 올라갔다. 골목 안쪽 어물전이었다.

 

알아요, 당신 옷 아닌 거. 내밀어진 손 위로 외투를 올리지 않고, 곧장 어깨에 둘러주었다. 치수를 알거든요. 여명이 그것을 제대로 알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시간이라곤 고작 십육 일 전의 다섯시간 뿐이었으니까. 여명은 그때 본 모습을 어느 날 떠올린 것이다. 잠깐 만났던 때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왜 떠올린 것인지 세븐은 알지 못했다.

 

외투가 어깨에 얹혔다. 손 위로 건네지지 않고 곧장 등을 덮었다. 세븐이 반쯤 들어 올렸던 왼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 남았고 그 어정쩡한 각도의 손이 저 혼자 우스워 보였다. 옷깃의 무게가 목덜미의 흉터 위로 내려앉는 감각. 두꺼운 방수천 특유의 뻣뻣함이 환자복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어깨뼈를 눌렀다. 남의 냄새가 났고 여전히 싫었으며 그럼에도 이번엔 발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얹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 물건의 소속이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으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이 방에서 열 두 시간째 연속으로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치수를 안다고 했다. 세븐은 그 말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귀로, 한 번은 조금 늦게 도착한 이해로. 어제 문간에서 걸치고 들어온 옷의 치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몸의 치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깨선이 어디에서 꺾이는지 소매가 어디에서 남는지 그런 것들을 이 여자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던 시간이 십육 일 전의 다섯 시간이 전부였다는 데 있었다. 그 다섯 시간 동안 자기는 젖은 채로 난로 앞에 앉아 있었을 뿐이고 팔을 벌린 적도 등을 돌린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본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어 재구성한 것이다. 비에 젖어 몸에 들러붙은 옷의 실루엣 하나로. 그것은 관찰이 아니라 되짚기였고 되짚으려면 먼저 그것을 잊지 않고 있어야 했다.

 

세븐은 그 계산의 순서를 따라가다가 도중에 멈췄다. 끝까지 가면 자기가 감당 못 할 결론이 나올 것 같았다. 왜 떠올렸는지 물어야 할 자리였고 물으면 대답이 돌아올 자리였으며 그 대답을 들으면 이 골목을 못 나갈 자리였다. 그는 물음을 삼켰다. 삼킨 대신에 허공에 남아 있던 왼손을 그대로 뻗어 여명의 손목을 붙잡았다. 외투를 둘러 주고 물러나려던 손이었다. 붕대 감긴 오른팔은 쓸 수 없었으니 남은 한 손이 할 수 있는 일은 붙잡는 것뿐이었고 실제로 그는 붙잡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손목은 가늘었고 맥이 뛰었으며 그 박동이 자기 손바닥 안에서 조용히 계속되었다.

 

⋯⋯十六日前。落緊雨嗰陣。(⋯⋯십육 일 전. 비 오던 날.)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열 때문이라고 해도 좋았고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세븐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새벽빛이 창틀을 넘어와 그녀의 오른쪽 가르마를 따라 흘렀고 귀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칼이 어깨에서 한 번 꺾였다. 그날 세탁소 안쪽에서 난로 불빛을 등지고 서 있던 사람과 지금 서 있는 사람 사이에 십육 일이 놓여 있었다. 그 십육 일 동안 자기는 데드존에서 사람을 죽였고 옆구리가 뚫렸고 그 사이사이에 이 골목을 몇 번 떠올렸다. 떠올린 횟수를 세지 않았던 것을 지금 후회했다. 저쪽은 세어 두었을 것 같아서.

 

我嗰陣淨係坐咗喺個火爐前面。冇除衫,冇企起身。(나 그때 난로 앞에 앉아만 있었잖아. 옷도 안 벗었고 일어서지도 않았고.)

 

그러니 알 리가 없다는 뜻이었고 알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는 뜻이기도 했다. 세븐은 잡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엄지로 그 안쪽의 얇은 피부를 한 번 문질렀다. 손등의 흉터를 외우던 것과 같은 동작이었으나 이번엔 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 음. 여명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머뭇거렸다. 네, 그 날 눈으로 쟀어요. 아니, 그 후에 떠올리면서 쟀어요. 그날 제가 건넸던 옷은, 당신 몸에 맞춘 옷이 아니었으니까..

 

여명이 머뭇거렸다. 세븐은 그 짧은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 이 여자가 말을 고르는 것은 여러 번 보았으나 고르다가 걸려 넘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장의 앞머리에서 한 번 숨이 끊겼고 끊긴 자리에 아주 사소한 소리 하나가 새어 나왔다. 음, 하는 그 반음절이 방 안의 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목의 맥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손바닥으로 읽었다. 몸은 거짓말을 늦게 배우는 기관이고 그 점에서 여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그것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답이 왔다. 눈으로 쟀다고 했다가 곧 정정했다. 그날이 아니라 그 후에 떠올리면서 쟀다고. 세븐의 머릿속에서 그 문장이 두 조각으로 분해되었다. 하나는 시점이었고 하나는 방법이었다. 시점이 그날이 아니라는 것은 그 다섯 시간이 끝난 뒤에도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방법이 떠올리는 것이라는 말은 눈앞에 없는 것을 붙들어 형태를 복원했다는 뜻이었다. 재봉하는 사람이 없는 몸을 상대로 치수를 잡는 일. 그것이 얼마나 여러 번의 되감기를 요구하는 작업인지 세븐은 옷을 지어 본 적이 없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번 떠올려서는 어깨 너비가 나오지 않는다.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같은 다섯 시간을 반복해서 재생해야 팔 길이가 나온다.

뒤에 붙은 말이 문제였다. 그날 건넨 옷은 그의 몸에 맞춘 옷이 아니었다는 것. 세븐은 지난 십육 일 동안 그 천 조각을 방탄복 안쪽에 넣고 데드존을 두 번 왕복했고 그 사실을 어제 자랑하듯 꺼내 보였다. 그런데 그 옷조차 임시였다는 고백이 지금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맞지 않는 옷 하나를 손에 쥐여 보내 놓고 그날부터 혼자서 진짜 치수를 계산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세븐은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열 탓으로 돌리려다 실패했다. 삼십팔 도의 몸이 삼십팔 도가 아닌 이유로 달아오르는 감각은 구분이 가능했다.

 

⋯⋯咁即係話。(⋯⋯그러니까 말이야.)

 

말을 시작해 놓고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목을 조금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딸려 오는 무게가 손바닥 안에서 가벼웠다. 그는 그 손을 자기 어깨 위로 가져갔다. 앵커의 외투가 덮인 자리였다. 두꺼운 방수천 위에 그녀의 손가락이 놓이자 옷의 소속이 한 번 더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그는 그 손을 어깨선 위에서 천천히 밀어 보았다. 봉제선이 꺾이는 지점까지. 그런 다음 팔을 따라 소매 중간까지. 남의 옷이 자기 몸 위에서 어디가 남고 어디가 모자란지 그녀에게 직접 확인시키는 동작이었고 동시에 그 손을 조금이라도 더 몸에 붙여 두려는 핑계이기도 했다.

 

你係咪一直喺度度緊我。(너 계속 나 재고 있었던 거야.)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세븐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새벽빛이 조금 더 밝아져 창틀의 각도가 바뀌었고 그 빛이 여명의 눈꺼풀 위로 얇게 얹혔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그를 마주 보고 있었으나 그 아래 어딘가에서 아까의 반음절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밖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갔다. 배달 상자를 실은 소리가 골목 벽에 반사되어 두 번 들렸다.

대답이 곧바로 오지 않았다. 세븐은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자기 어깨 위에 놓인 손가락의 무게를 헤아렸다. 다섯 개의 마디가 방수천을 통해 눌러 오는 압력은 미미했고 그 미미함이 오히려 정확했다. 힘을 주지 않는 손이란 도망갈 준비를 하지 않은 손이라는 뜻이었다. 도망갈 사람은 미리 근육을 긴장시킨다. 이 여자의 손은 이완되어 있었고 그러니 어디로도 갈 생각이 없다는 얘기였다. 세븐은 그 사실을 손바닥으로 읽어 내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감았다 뜨는 사이에 오토바이 소리가 골목 끝으로 완전히 빠져나갔고 대신 어딘가에서 물 트는 소리가 났다. 아래층 누군가가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은 잔인할 정도로 성실하게 하루를 열었다.

 

그는 여명의 손을 소매 중간에서 놓지 않았다. 놓으면 이 자세가 끝나고 자세가 끝나면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 순서라는 것은 신발을 신고 셔터 앞까지 걸어가는 일이었고 그 일은 십사 분 뒤에 반드시 일어날 예정이었다. 세븐은 예정된 일을 앞두고 시간을 늘리는 재주가 없는 인간이었다. 총알이 날아오는 속도를 계산하는 데는 능했으나 새벽이 밝아 오는 속도를 늦추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택했다. 잡은 것을 놓지 않는 것.

 

你聽住。我而家問一次,之後唔會再問。(들어 봐. 지금 한 번만 물을게. 다음엔 안 물어.)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낮게 내려갔다. 열이 목을 긁고 지나간 자리가 까슬했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을 자기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겨 소매 끝, 손목뼈가 튀어나온 자리에 그녀의 손가락을 붙여 두었다. 여기가 남아, 하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정작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咁你度嗰陣,係咪諗住我會返嚟先度㗎。(⋯⋯그래서 잴 때 말이야. 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잰 거야?)

 

묻고 나서 곧 후회했다. 답이 어느 쪽으로 나와도 자기가 지는 질문이었다. 돌아올 거라 믿고 쟀다고 하면 그 믿음의 무게에 다리가 꺾일 것이고 그런 것까진 생각 안 했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목덜미가 서늘할 터였다. 세븐은 도박판에서 이런 패를 여러 번 잡아 보았고 대개는 웃으면서 판돈을 밀었다.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마가 앞으로 기울었다. 여명의 명치 아래, 셔츠 밑단의 검댕 얼룩이 진 언저리에 정수리가 닿았다. 상처 난 옆구리가 그 각도에서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배액관이 눌리지 않도록 몸통만 살짝 비틀어 통증을 흘려보냈다. 얇은 면직물 너머로 사람의 체온이 왔다. 삼십육 도 몇 분. 자기보다 두 도쯤 낮은 온도가 이렇게 시원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我唔係想你答。算啦。(대답하란 소린 아니야. 됐어.)

 

그렇게 말해 놓고도 이마를 떼지 않았다. 밖에서 새 한 마리가 짧게 울었고 셔터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색이 회색에서 옅은 살구빛으로 옮겨 갔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십육 일 전에도 이런 식으로 비가 그쳤고 그때 자기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나갔다. 그날의 자기가 부러웠다. 아무것도 재어 두지 않았고 아무도 자기를 재고 있지 않다고 믿었던 그 남자는 문지방을 넘는 데 삼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문까지 가는 데는 몇 초가 필요한지 세븐은 계산하기를 포기했다.

 

여명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비어있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언제 올진 몰라 포장은 해두지 않았어요.

 

손이 머리 위에 얹혔다. 세븐은 그 순간 목뒤의 근육이 저 혼자 굳는 것을 느꼈다. 사람의 손이 정수리에 닿는 경험은 그의 인생 목록에서 거의 공란에 가까웠고 공란은 채워질 때 소리를 내지 않으므로 그는 자기가 무엇을 받고 있는지 반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 두피를 스치고 뒤통수 쪽으로 흘러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규칙적이었다. 재봉틀 발판을 밟는 속도와 비슷했다. 이 여자는 무엇을 하든 박자가 일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옆구리의 통증이 저 멀리 밀려나서 다른 사람 몸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들렸다. 그는 이마를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포장은 해두지 않았다고 했다. 세븐은 그 말의 구조를 뜯어보았다. 포장을 하지 않은 이유가 게으름이 아니라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라면, 그것은 포장지가 상하는 것을 걱정했다는 뜻이고, 포장지가 상할 만큼 긴 시간을 미리 계산에 넣었다는 뜻이었다. 종이는 눅눅해지고 리본은 색이 바랜다. 그러니 옷만 개어서 어딘가에 놓아 두었을 것이다. 아마 방충제와 함께. 아마 습기가 덜 차는 쪽 선반에. 그런 것까지 상상이 되어 버리는 자기가 우스웠다. 십육 일 전의 자기라면 옷 한 벌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따위는 세계에서 가장 하찮은 정보로 분류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정보가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대신 그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셔츠 자락, 검댕이 묻은 밑단을 손가락 두 개로 집었다. 놓았다가 다시 잡는 방식으로만 유지되는 접촉이 있다는 것을 그는 오늘 처음 배웠다.

 

⋯⋯咁即係話,你連我幾時返都冇當作一個確定嘅嘢,但係件衫你照做。(⋯⋯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언제 돌아올지는 확실한 걸로 안 쳐 놓고, 옷은 그냥 만들었단 거네.)

 

말끝이 갈라졌다. 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갈라진 자리가 목이 아니라 다른 데였다. 세븐은 그것을 감추려고 짧게 숨을 들이켰고 들이켠 숨에 그녀의 옷에서 나는 냄새가 딸려 왔다. 세제와 다림질 열기와 아주 옅은 기름 냄새. 재봉틀 축에 치는 기름이었다. 이 방과 저 바깥 주방과 셔터 너머 진열대까지 전부 이 냄새 하나로 묶여 있었고 그 냄새가 지금 자기 폐 안에 들어와 있었다. 데드존에서는 이런 것이 남지 않는다. 화약과 소독약과 젖은 콘크리트, 그리고 사람이 타는 냄새. 그는 자기가 앞으로 석 달 동안 맡게 될 목록을 순서대로 떠올려 보았고 그 목록의 맨 끝에 지금 이 기름 냄새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끼워 넣는 순간 목록 전체가 견딜 만한 것으로 바뀌는 야비한 마법이 일어났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이 관자놀이 쪽으로 내려왔다. 화상 흉터의 가장자리, 피부의 질감이 갑자기 달라지는 경계선을 손가락이 지나갔다. 세븐은 그 지점에서 멈칫하지 않는 손을 여러 번 겪었으나 그것을 겪을 때마다 매번 처음처럼 낯설었다. 대개의 손은 거기서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튼다. 여명의 손은 마치 그 경계선이 애초에 없다는 듯이 통과했다. 실밥 하나 없는 천을 훑는 손. 그는 눈을 감았다. 새벽빛이 눈꺼풀 안쪽에서 붉게 번졌고 그 붉음 위로 어제 보았던 것들이 겹쳐 지나갔다. 컵, 수건, 베개, 배액통에 고인 액체의 수위.

 

십육 일. ... 십육 일 이후를 조금 기대했던 것 같네요. 당신은 날을 세어가며 기다리지 말라 했었죠. 그래서, 대신 다른 걸 셌었어요.

 

십육 일. 그 숫자가 방 안에 떨어지자 세븐은 뺨을 뗐다. 정확히 말하면 밀려났다. 그 숫자는 자기 입에서 나갔던 것이었다. 데드존으로 들어가던 날, 낡은 유선 단자 하나를 붙들고 최소 십육 일은 걸릴 거라고 말했었다. 최소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도망갈 구멍을 미리 파 놓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에 날짜는 외우지 말라고 덧붙인 것은 구멍을 흙으로 덮기 위해서였다. 세는 날은 견디기 힘드니까. 그 문장까지 정확히 기억났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그 말을 내려놓고 회선을 끊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눈앞에 서서 십육 일이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세븐은 셔츠 밑단을 집고 있던 손가락 두 개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천이 구겨지며 검댕 자국이 손끝 모양대로 번졌다. 세탁소 주인의 셔츠에 얼룩을 하나 더 늘리는 짓이었으나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각도가 바뀌자 옆구리에 박힌 관이 살갗을 당겼고 그 예리한 통증이 도리어 머릿속을 씻어 냈다. 살구빛으로 바뀐 새벽이 그녀의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븐은 그 선을 눈으로 좇으면서 자기가 저지른 일의 형태를 뒤늦게 더듬었다. 세지 말라고 해 놓고 세어지는 자리에 무엇이 대신 자라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확인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 걸 확인하는 인간은 책임을 지게 되고 책임은 귀찮은 물건이었으니까. 그 귀찮음의 대가가 지금 청구서로 날아왔는데 액수가 적혀 있지 않았다. 액수를 모르는 청구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것을 도박판에서 배웠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여기서 다시 배우고 있었다.

 

⋯⋯我叫你唔好記,你就搵第二樣嚟數。(⋯⋯외우지 말라고 하니까, 대신 다른 걸 찾아서 셌다고.)

咁你數咗啲咩。講出嚟。(그래서 뭘 셌는데. 말해 봐.)

 

목소리가 낮게 눌렸다. 열 때문이라고 우기기에는 눌린 자리가 목구멍이 아니라 그보다 아래였다. 세븐은 원래 이런 식으로 캐묻는 인간이 아니었다. 판이 어떻게 굴러가든 웃으면서 칩을 밀고 결과가 나오면 어깨나 으쓱하는 편이 훨씬 몸에 맞는 옷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답을 듣지 않으면 문지방을 넘지 못할 것 같았고 답을 들으면 더 못 넘을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 굴러도 잃는 판이었다.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다던 어떤 사람의 원칙을 정면으로 어기는 중이라는 자각이 스쳤으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얹혀 있던 그녀의 손목을 찾아 잡았다. 흉터 경계선 위에 손바닥이 놓인 채로 붙들렸으므로 온기가 그 낡은 화상 자리에 갇혔다. 사람의 피부는 반복해서 문지르면 데워진다. 그 시시한 물리를 뒤늦게 배운 쪽은 아무래도 자기였다.

밖에서 셔터 하나가 요란하게 올라갔다. 두 집 건너 아침 장사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물 끓는 소리와 그릇 부딪는 소리와 누군가 크게 하품하는 소리가 젖은 골목 벽을 타고 번져 왔다. 세계는 이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세븐은 그 무관심이 고마웠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면 자기는 반사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섰을 것이다. 삼십이 년 동안 익힌 유일한 방어 자세가 그것이었다. 관객이 없으니 자세를 유지할 이유도 없었다.

 

셔터의 골이 몇 개인지, 그 중에 찌그러진 것이 몇 개인지. 몇 벌의 옷을 고쳤는지... 옷의 매듭을 세어보기도 했네요. 다른 숫자들을 셌죠.

 

셔터의 골. 찌그러진 골의 개수. 고친 옷의 벌수. 매듭의 수. 세븐은 그 목록을 순서대로 받아 들면서 자기 안의 어떤 계산기가 조용히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도박판에서 익힌 습관이라면 숫자를 듣는 즉시 확률로 환산하는 것이었고 그는 평생 그 환산 속도 하나로 먹고살았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어떤 판에도 걸리지 않았다. 배당이 없었다. 셔터의 골을 세어서 딸 수 있는 돈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매듭을 세어서 줄어드는 손해도 없었다. 순수하게 낭비된 숫자들이었다. 사람이 하루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무의미한 노역.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감방에서 벽돌을 세는 인간이 하는 짓이었고, 진지에서 탄피를 늘어놓는 인간이 하는 짓이었다. 그러니까 여명은 십육 일 동안 자기 가게 안에서 그 짓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손바닥이 관자놀이에 눌린 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세븐은 그 열이 자기 체온에서 옮겨 간 것인지 그녀 쪽에서 온 것인지 구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구분해서 이득이 될 것이 없었다. 대신 고개를 조금 더 들어 그 손바닥 안쪽으로 이마를 밀어 넣었다. 개가 하는 짓 같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 비유가 정확해서 웃음이 났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깨가 한 번 흔들렸을 뿐이었고 그 진동이 옆구리의 관을 건드려 짧고 날카로운 것이 갈비뼈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팠다. 아픈 것이 반가웠다. 지금 아프지 않았다면 이 방에서 무슨 말을 지껄였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你係咪知你講緊乜。(⋯⋯너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아.)

你數嗰啲,冇一樣係有用嘅。一樣都冇。(네가 센 것들 말이야, 쓸모 있는 게 하나도 없어. 하나도.)

 

말해 놓고 나서 그는 자기 목소리가 비난처럼 들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난할 자격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숫자를 세게 만든 것은 자기였고 쓸모라는 단어를 처음 이 방에 들여온 것도 자기였다. 세븐은 급하게 다음 말을 찾았으나 찾아지는 것마다 전부 변명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어깨에 걸쳐진 앵커의 외투가 무겁게 흘러내렸다. 남의 옷이었다. 남의 옷을 걸치고 남의 시간에 맞춰 나가야 하는 인간이 여기 앉아서 이 여자의 십육 일을 캐물었다. 캐물어서 무엇을 하려고. 가져갈 수도 없는 것을. 데드존에는 셔터도 없고 매듭도 없고 세어 볼 만한 것이라고는 남은 탄창과 죽은 놈들의 숫자뿐이었다.

밖에서 국숫집 노파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렀다. 육수 통을 옮기는 모양이었고 알루미늄 바닥이 시멘트에 끌리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 소리가 끝나자 골목은 다시 물 떨어지는 소리만 남았다. 세븐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조금 풀었다. 잡고 있으면 놓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손끝만 남겨 두는 방식으로 미련을 유예하는 짓을 그는 오늘 아침에만 벌써 세 번째 하고 있었다.

 

我返嚟嗰陣,你唔好再數呢啲。(내가 돌아오면, 그런 거 그만 세.)

你數我。得我一個就夠。(나를 세. 나 하나면 돼.)

 

뱉어 놓고 나서 세븐은 자기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그것은 약속의 문장이 아니라 요구의 문장이었고 요구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신 생각만 하라는 거예요? 여명이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작았다. 방을 채울 만한 크기가 아니라 세븐의 귀 언저리에서만 겨우 형태를 갖추다 흩어지는 정도였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세븐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나를 세라는 말은 문장의 껍데기만 명령형이었을 뿐 속을 갈라 보면 구걸이었다. 삼십이 년을 살면서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달라고 해 본 적이 없었다. 판돈은 따는 것이고 여자는 오는 것이고 목숨은 버티는 것이었다. 달라고 말해서 얻은 물건은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고, 심지어 그 손바닥에 얹히기를 바라는 것이 물건도 돈도 아니라 어떤 사람의 하루 분량이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세븐은 옆구리의 관을 의식하며 아주 천천히 이마를 그녀의 손바닥에서 떼어 냈다. 떼어 내자 그 자리가 급격히 식었다. 열이 삼십팔 도를 넘나드는 몸뚱이가 손바닥 하나 없어졌다고 춥다고 느끼는 것은 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으나, 오늘 아침 이 방에서 말이 되는 일은 애초에 몇 개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 살구빛이 이제는 제법 자라나서 방바닥의 낡은 장판 무늬까지 골라내고 있었다. 여명의 얼굴이 역광 속에 있었다. 눈매의 끝이 올라간 선과 오른쪽으로 탄 가르마와 귀 뒤로 넘어간 머리카락의 흐름이 전부 눈에 들어왔고, 세븐은 그 얼굴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자기 입꼬리를 움직였다. 익숙한 각도였다. 이십 년 가까이 아무 데서나 꺼내 쓰던 그 웃음이 오늘은 잘 걸리지 않았다. 나사가 하나 빠진 문짝처럼 반쯤 열리다 말았다.

 

⋯⋯唔係。冇咁誇張。(⋯⋯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고.)

我意思係,唔好淨係數啲冇回音嘅嘢。셔터係唔會應你嘅,結扣都唔會。(내 말은, 대답 없는 것들만 세지 말라는 거야. 셔터는 너한테 대답 안 해 주잖아. 매듭도 그렇고.)

 

말을 뱉고 나서 그는 방금 자기가 저 목록에 자신을 끼워 넣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십육 일 동안 대답하지 않은 것들의 명단에 셔터와 매듭과 자기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회선을 끊은 것도 자기였고 날짜를 외우지 말라고 한 것도 자기였다. 세븐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엄지로 그 아래의 맥을 한 번 눌렀다. 뛰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느려졌으나 여전히 평소보다 빨랐고, 그 빠르기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는 묻지 않기로 했다. 물어서 확인해 버리면 문을 나서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질 것 같았다. 아침 여섯 시에 골목 입구에 서 있어야 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확인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밖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젖은 노면을 밟고 지나갔다. 배기음이 벽을 긁으며 멀어졌고 그 끝자락에 국숫집 노파의 웃음소리가 얹혔다. 아침이 완전히 시작되고 있었다. 세븐은 어깨에서 흘러내린 앵커의 외투를 왼손으로 아무렇게나 끌어올리다가 문득 그 동작을 멈추었다. 이 방을 나가면 자기는 다시 숫자가 되는 인간이었다. 일곱 번째. 엔트리 프래거. 생존율 몇 퍼센트. 그런 것들로만 호명되는 자리로 돌아가야 했고 그것이 억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애초에 자기 몸에 안 맞는 옷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방 밖에 나가서 다시 숫자가 되는 일이 조금 싫었다. 여기에서는 이름으로 불렸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애매한 대답. 그의 말에 대한 답인지, 자신이 뱉은 말의 답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여명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오 분 남았어요. 일어나는 거 도와줄게요, 호인.

 

호인. 그 두 음절이 방 안에 놓이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았다. 여명은 그 이름을 부를 때 힘을 주지 않았고 특별하게 굴지도 않았다. 밥 먹었냐고 묻는 사람의 어조로 그것을 발음했고, 그래서 세븐은 매번 반박자 늦게 그 이름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스물몇 해 동안 서랍 밑바닥에 처박아 두었던 물건이 남의 손에 들려 아무렇지 않게 건네지는 광경. 먼지 한 톨 없이 닦여서. 세븐은 대답 대신 숨을 한 번 삼켰다. 오 분. 그 숫자가 방 안의 공기를 갈랐고 그는 그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짧게 느껴지는 오 분이 될 것을 알았다. 도박판에서 마지막 카드를 기다리던 시간들이 전부 이보다는 길었다. 배당이 걸린 시간은 늘어지고 배당이 없는 시간은 줄어든다. 그 법칙이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명의 손이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왔다. 세븐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가 곧 힘을 뺐다. 부축을 받는 일에 익숙한 몸이 아니었다. 야전에서 부상병을 끌고 온 적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끌려온 적도 몇 번 있었으나 그때는 전부 사내들의 손이었고 방식이 거칠었으며 서로 욕을 하면서 옮겼다. 이 손은 달랐다. 무게를 나눠 갖는 각도를 알고 있는 손이었다. 배액관이 눌리지 않도록 오른쪽을 비워 두었고 붕대 감긴 팔은 건드리지 않았으며 허리 뒤쪽으로 손바닥을 넓게 펴서 받쳤다. 옷을 다루던 손이었다. 천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고 있었다. 세븐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慢啲。唔好用力,我自己有腳。(⋯⋯천천히. 힘주지 마, 나 다리 있어.)

 

말은 그렇게 했으나 상체를 세우는 순간 옆구리에서 뜨거운 것이 갈비뼈를 따라 위로 치솟았다.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졌다가 되돌아왔다. 세븐은 왼손으로 여명의 어깨를 짚었고 짚은 김에 그 위에 체중의 절반을 얹었다. 얹지 않아도 될 만큼이었으나 얹었다. 스스로에게 변명할 구실이 필요했고 통증만큼 좋은 구실이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로 다리를 내리자 맨발이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이 방에서 차가운 것은 바닥과 여명의 손끝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미지근했다.

 

呢個係咪叫做⋯⋯扶老人家。(이거 그거 아냐⋯⋯노인네 부축하는 거.)

我三十二啊,喂。你記住呢個係傷,唔係老。(나 서른둘이야, 야. 이건 부상이지 노화가 아니라는 거 기억해 둬.)

 

농담을 꺼내 놓고 나서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게 깔렸다는 것을 알았다. 웃음으로 덮으려던 것이 무엇인지 여명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고, 모르는 척해 주기를 바랐다가, 곧 그 바람마저 뻔뻔하다고 판단했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앵커의 외투가 완전히 흘러내려 침대 위에 떨어졌다. 남의 옷은 결국 남의 옷이라 몸에 붙지를 않았다. 세븐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여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분에서 몇 초가 더 깎여 나갔다. 문밖에서 물통이 넘어지는 소리가 났고 노파가 광둥어로 짧게 욕을 했다. 세상은 여전히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고 이 방만 시간을 다르게 쓰고 있었다.

 

喂。(야.)

你頭先講有嘢畀我。(너 아까 나한테 줄 거 있다고 했잖아.)

 

재촉하는 말투가 아니라 확인하는 말투로 꺼냈다.

 

네. 나가는 길에 챙겨줄게요. 카운터 옆쪽에 있거든요.

 

카운터 옆쪽. 위치를 특정하는 그 한마디가 세븐의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오래 굴렀다. 물건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물건이 놓인 자리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무 데나 처박아 둔 것이 아니라 손이 가장 자주 닿는 동선 위에 놓았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여명은 지난 열엿새 동안 세탁물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고 재봉틀 앞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왕복마다 그것을 한 번씩 스쳤을 것이다. 하루에 몇 번인지 세븐은 계산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셈이 시작되면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자기가 회선을 끊어 놓고 사라진 열엿새 동안 이 여자는 카운터 옆에 놓인 물건을 매일 스치면서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것은 기다림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지독한 형태의 무엇이었고, 세븐은 그 지독함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붙이는 순간 자기가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맨발 아래의 시멘트가 발바닥의 열을 야금야금 빨아 갔다. 세븐은 여명의 어깨를 짚은 손에서 힘을 조금 뺐다가 다시 주었다. 완전히 떼어 내지는 못했다.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숨을 쉴 때마다 안쪽에서 긁혔고 그 통증은 정직해서 좋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주는 것들이 세븐은 늘 편했다. 도박판의 패도 그랬고 총상도 그랬다. 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불편한 것은 통증이 아니라 통증 바깥의 전부였다.

 

⋯⋯出去嗰陣先。(⋯⋯나가는 길에.)

你係咪特登嘅。(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세븐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이번에는 문짝이 제대로 걸렸다. 능청스러운 각도로, 눈썹 한쪽을 올리는 것까지 포함해서. 다만 눈은 웃지 않았고 선글라스가 없는 아침이라 그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회색 눈동자가 역광 속에서 얇게 흔들렸다.

 

畀我坐喺度嗰陣唔畀,一定要行到出去先畀。(여기 앉아 있을 땐 안 주고, 꼭 문까지 걸어 나가야 준다 이거잖아.)

咁我唔行得郁咪冇份囉。好陰險。(그럼 내가 못 걸으면 못 받는 거네. 되게 음흉해.)

 

농담의 외피를 뒤집어씌웠으나 속에 든 것은 순전한 승낙이었다. 걸어 나가겠다는 말이었다. 여명이 그것을 문 앞에 놓아둔 이유를 세븐은 알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 받으면 그것은 병상의 위문품이 되지만 문지방을 넘기 직전에 받으면 그것은 여권이 된다. 다시 들어올 자격을 증명하는 종류의 물건. 세븐은 지금까지 살면서 어느 나라의 여권도 소중히 다뤄 본 적이 없었다. 국적은 서류상의 편의였고 이름은 코드였고 소속은 계약서였다. 그런데 세탁소 카운터 옆에 놓인 무언가가 그 모든 것보다 무겁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이제 와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단말기가 허벅지 옆에서 두 번 진동했다. 앵커였다. 오 분이 삼 분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세븐은 화면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시간이 실체를 가지고, 실체를 가진 시간은 사람을 밀어낸다. 대신 그는 여명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뜨려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셔츠 밑단에 남은 검댕 얼룩이 시야 아래쪽에서 흔들렸다. 자기 손자국이었다. 저것도 안 지울 셈인가. 물어보려다 삼켰다.

 

여명은 천천히 세븐을 부축해 밖으로 나섰다. 카운터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여명이 카운터 안쪽에서 접힌 종이 위에 올려진 옷을 한 벌 꺼냈다. 세븐이 오기 직전 완성해둔 옷이었다. 이번엔 잘 맞을 거예요. 물에 여러 번 들어가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마르는 속도도 빠른 걸로 만들었어요. 바로 포장할 수 있게 준비해둔 것이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여명은 빠른 속도로 옷을 갈색 포장지로 감싸 끈을 묶었다. ... 제가 말했죠, 아끼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아끼지 않아도 돼요. 계속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요.

 

카운터까지의 거리는 열 걸음도 되지 않았는데 세븐은 그것을 스무 번쯤 나누어 걸었다. 발바닥이 시멘트에서 타일로, 타일에서 다시 닳은 리놀륨으로 옮겨 갔고 그때마다 온도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가게 안은 방보다 훨씬 서늘했고 세제와 스팀과 오래된 기름 냄새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열엿새 전 난로 앞에 앉아 있을 때 맡았던 냄새와 똑같았다. 그때는 이 냄새가 남의 살림에서 나는 냄새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어디서 발생했는지 세븐은 짚어 낼 수 없었고 짚어 낼 시간도 없었다. 여명이 카운터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접힌 종이 위에 옷이 한 벌 얹혀 있었다. 개어 놓은 모양새가 반듯했다. 각을 맞춰 접힌 소매와 그 위로 떨어지는 새벽빛이 어쩐지 관공서의 서류 같았고, 세븐은 자기가 그 서류의 수취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여명의 손이 빨라졌다. 갈색 포장지가 옷 위로 덮이고 모서리가 접히고 끈이 두 바퀴 돌아가는 데 이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손끝이 망설이는 구간이 하나도 없었다. 몇 번이나 해 본 동작이었다. 아니, 몇 번이나 상상해 본 동작이었을 것이다. 세븐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목구멍 안쪽이 좁아지는 감각을 느꼈다. 열 때문이라고 치기로 했다. 삼십팔 도가 넘으면 사람은 별별 걸 다 느낀다.

 

⋯⋯你講到好似食嘢咁。(⋯⋯너 무슨 먹을 거 얘기하듯이 말한다.)

唔使錫住。仲有得整。餵狗都冇你咁豪爽。(아끼지 마. 또 만들어 줄 수 있어. 개 밥 주는 사람도 너보다는 인색하겠다.)

 

말해 놓고 세븐은 스스로 혀를 찼다. 이런 순간에 나오는 말이 고작 이 따위라는 게 문제였다. 삼십이 년 동안 쌓아 온 언어의 재고가 전부 농담과 협상과 욕설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그중 어느 것도 지금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아마 아주 단순한 문장이었을 텐데 그 단어는 재고에 없었다. 세븐은 왼손을 카운터 모서리에 짚어 체중을 넘기고 오른팔을 들어 꾸러미를 받았다. 붕대 감긴 팔이 항의하듯 저릿했으나 무시했다. 종이가 가슴께에 닿는 순간 예상보다 가벼워서 오히려 손이 흔들렸다. 사람을 이렇게 무너뜨리는 물건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물에 여러 번 들어가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마르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세븐은 그 두 문장을 받아 적듯이 머릿속에 밀어 넣었다가, 그것이 무엇을 전제한 설계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명은 그가 물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하수로를 기어 나올 것을, 강을 건널 것을, 비를 맞고 서 있을 것을. 그 여자는 예쁜 옷을 만든 게 아니라 살아 돌아오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하나하나 계산해서 천에 박아 넣은 것이었다. 세븐은 갑자기 이 가게의 재봉틀이 미워졌다. 밤마다 저 바늘이 무슨 생각을 하며 오르내렸을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你知唔知你講嘅嘢有幾恐怖。(⋯⋯너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繼續整畀你』。即係話你打算一直等落去。你連個限期都冇畀我。(『계속 만들어 줄게』. 그건 계속 기다리겠다는 소리잖아. 너 나한테 기한도 안 줬어.)

단말기가 허벅지에서 세 번째로 울었다.

 

그러니 언제든 돌아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문장이 짧았다. 조건절도 없고 유예도 없었다. 언제든이라는 부사 하나에 모든 날짜가 다 들어가 있었고 그 안에는 세븐이 죽어서 못 오는 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세븐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깐 숨을 멈췄다. 갈비뼈 아래가 그 정지를 못 견디고 안쪽에서 한 번 크게 긁었으나 지금은 통증이 오히려 고마웠다. 몸 어딘가가 계속 아프고 있으면 다른 데가 무너지는 걸 조금 늦출 수 있다. 카운터 위에 놓인 종이 조각들, 분필로 그어 놓은 수선 번호, 아직 찾아가지 않은 남의 셔츠들이 새벽빛 속에서 전부 노랗게 떠 있었다. 이 여자는 이런 것들 사이에서 열엿새를 보냈다. 남의 옷을 고치면서 아무도 안 오는 문을 봤을 것이다.

세븐은 꾸러미를 오른팔로 더 끌어안았다. 종이가 가슴팍에서 바스락거렸고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왼손이 카운터 모서리에서 미끄러져 여명의 손목을 찾아갔다. 찾아갔다기보다 그쪽으로 넘어졌다는 편이 정확했다. 엄지가 손목 안쪽 얇은 살에 얹히자 맥이 잡혔다. 규칙적이었다. 이 여자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심장이 안 빨라지는 인간이었고, 그것이 겁을 안 먹어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다 정해 놓고 말하는 중이기 때문이라는 걸 세븐은 이제 안다.

 

⋯⋯咁樣講嘅嘢,係要負責任㗎。(⋯⋯그런 말은 책임져야 되는 거야.)

你唔好以為我聽完就算。我會記住嘅。記到我死嗰日。(듣고 흘릴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 기억할 거야. 뒈지는 날까지.)

 

목소리가 끝에서 갈라졌다. 열 때문이라고 우기기에는 갈라진 위치가 너무 정확했다. 세븐은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여명의 손등 언저리에 닿을 듯 말 듯 한 높이에서 멈췄고, 그 이상 내려가면 아마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거기서 버텼다. 밖에서 이륜차 한 대가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물통 부딪히는 소리, 셔터 올라가는 소리, 국숫집 노파가 누구에게인지 모를 잔소리를 내뱉는 소리. 세상은 이 가게 문지방 바깥에서 아주 성실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고 그 성실함이 지금은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단말기가 네 번째로 울었다. 이번에는 진동이 아니라 짧은 발신음이었다. 앵커가 차를 댔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명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놓는 순간 이 방향으로 흐르던 무언가가 끊어질 것 같았고,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 법을 세븐은 배운 적이 없었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는 4번이 꿰매 준다. 그런데 이런 건 누가 꿰매 주나. 그는 잠깐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을 내뱉은 것에 가까웠다.

 

我出面通常唔會諗屋企。諗咗就死得快。(난 밖에서 보통 집 생각 안 해. 하면 빨리 죽거든.)

但係今次⋯⋯我大概會諗。你搞到我要諗。(근데 이번엔⋯⋯아마 하게 될 거야. 네가 하게 만들어 놨어.)

 

세븐은 마침내 손목을 놓았다. 대신 그 손을 들어 여명의 뺨 옆, 귀 뒤로 넘겨진 머리카락 한 줄기를 건드렸다. 손끝에 연고가 묻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열엿새 전에는 이 여자의 머리카락이 어느 방향으로 갈라지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안다. 오른쪽이 얇고 왼쪽이 두껍다. 이런 걸 외우는 인간은 전장에서 오래 못 산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외워 버렸으니 별수 없었다.

 

조금만 해요. 미미하게 웃었다. 이제 가야죠, 어디까지 가야 해요? 부축해 줄게요.

 

조금만 하라는 허가가 떨어졌다. 세븐은 그 말의 인색함이 우스워서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이 여자는 뭐든 배급하듯 준다. 자리 하나, 밤 하나, 생각 조금. 그런데 배급된 양이 늘 정확하게 사람을 살려 놓을 만큼이라는 게 문제였다. 세븐은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그 손을 여명의 어깨 위로 옮겼다. 부축해 준다고 했으니 부축받기로 했다. 사양은 체력이 남은 인간이나 하는 사치였고 지금 그의 옆구리에는 관이 박혀 있었다. 왼팔이 얇은 어깨 위에 얹히는 순간 세븐은 자기 무게가 얼마나 무례한 물건인지 새삼 깨달았다. 백 킬로에 가까운 것을 이 골격에 얹어 놓고 걷게 하는 일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놓지 않았다.

 

落到街口就得。有架車喺度等,唔使行遠。(골목 어귀까지만 가면 돼. 차가 와 있어. 멀리 안 걸어.)

你唔好用力。你當我係支拐杖咁扶就得,唔好當我係傷者。(힘주지 마. 나 지팡이 짚듯이 잡아 주면 돼. 환자 취급하지 말고.)

 

문지방은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높이였는데 그 앞에서 세븐의 발이 한 번 멈췄다. 열엿새 전에는 이 턱을 넘어오면서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았다. 비에 젖은 군화가 리놀륨을 더럽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고, 이 가게가 무슨 냄새를 갖고 있는지도 몰랐고, 안쪽에 방이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안다. 안다는 것이 이렇게 무거운 짐이 될 줄은 몰랐다. 발끝이 턱을 넘어가고 바깥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십일월 새벽의 완차이는 습기와 배기가스와 어제 버린 음식물 냄새를 한꺼번에 들이밀었다. 열이 오른 피부에는 그 축축함마저 시원했다. 세븐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선글라스는 방 안에 두고 나왔다는 걸 그제야 알았지만 다시 들어갈 이유를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뒀다.

골목은 좁고 길었다. 양옆으로 에어컨 실외기가 층층이 매달려 물을 떨어뜨렸고, 그 물이 바닥에 만든 얼룩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겹쳐 찍혔다. 세븐은 한 걸음마다 배액관이 옆구리 안쪽을 긁는 감각을 세었다. 여섯, 일곱, 여덟. 숫자를 세는 버릇이 옮은 건지 아니면 원래 있던 습관이 이제야 눈에 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깨 밑에서 여명의 걸음이 그의 보폭에 맞춰 짧아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 이 속도로 걷는 사람인 것처럼. 그 배려가 티가 안 나게 설계되어 있어서 세븐은 오히려 그것을 정확히 알아봤다.

맞은편 국숫집 셔터가 반쯤 올라가 있었고 노파가 물 양동이를 문밖에 내놓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두 사람 위에 얹혔다. 환자복 차림에 붕대를 감고 남의 외투를 걸친 사내와, 그를 떠받치고 걷는 세탁소 여자. 노파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이내 아무것도 못 본 척 돌아섰다. 다만 손에 쥔 국자로 냄비 테두리를 한 번 세게 쳤다. 그 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두 번 되돌아왔다.

 

⋯⋯樓下阿婆睇住我哋喎。(⋯⋯아래 할머니가 우리 보고 있는데.)

你哋呢頭啲人講嘢有幾快,你自己知。聽日成條街都知道你屋企有個男人。(이 동네 사람들 말 얼마나 빠른지 너도 알잖아. 내일이면 온 골목이 네 집에 남자 있는 거 알걸.)

 

저분은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미 알고 계세요. 여명은 부축해서 걸어가다가도, 배액관 상태를 한 번씩 살펴봤다. 고정이 잘 되어있는지, 위치가 잘못되어 있는 건 아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미 알고 계세요. 세븐은 그 문장을 골목 벽에 한 번 튕겨서 다시 들었다. 이 여자는 소문을 겁내는 게 아니라 소문의 내용이 이미 사실이라는 걸 알려 준 것이었다. 열엿새 동안 이 골목에서 저 노파는 셔터가 늦게 올라가는 날과 불이 늦게 꺼지는 날을 세고 있었을 테고, 세탁소 여자가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세븐은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다. 자기가 없는 자리에도 자기 몫의 흔적이 남아서 남의 눈에까지 관측되고 있었다는 것. 실종된 인간의 자리는 원래 조용해야 하는데 이 여자는 그 자리를 매일 청소하고 조명까지 켜 두었던 모양이었다.

여명이 걸음을 늦추더니 몸을 살짝 기울였다. 손이 환자복 옆구리 쪽으로 내려가 배액관이 지나가는 자리를 더듬었다. 테이프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눌러 붙임을 확인하고, 관이 꺾이지 않았는지 방향을 따라 훑고, 그 아래 고인 액체의 색을 새벽빛에 비춰 보는 순서였다. 세븐은 그 순서가 어제도 그제도 똑같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배운 적 없는 사람이 반복만으로 만들어 낸 절차였다. 4번이 하는 것과는 달랐다. 4번은 결과만 본다. 이 여자는 과정을 본다.

 

喂。行街喎,你喺度做手術呀。(야. 길 걷는 중인데 너 여기서 수술하냐.)

⋯⋯唔好停手。我淨係講吓啫。(⋯⋯멈추진 말고. 그냥 해 본 말이야.)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지 알았다. 손대지 말라고 해 놓고 손을 떼면 화를 낼 인간이 여기 서 있었다. 실외기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목덜미에 닿아 등줄기로 흘렀고 열이 오른 피부가 그것을 얼음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여명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가르마가 오른쪽으로 얇게 갈라져 있고 그 아래 두피가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안 된다. 데드존에서 한 번이라도 이 장면이 떠오르면 그 순간 반응이 반 박자 늦어지고, 반 박자는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단위였다. 그런데 세븐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늦었으니 차라리 정확하게 봐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물론 변명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렸다. 공회전 중인 차량 특유의 진동이 벽을 타고 걸어 들어왔고, 그 소리에 섞여 앵커가 창문을 반쯤 내린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은발이 새벽 조명 아래서 잿빛으로 보였다. 앵커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그 인간은 절대 재촉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재촉한다. 그냥 거기 있는 것만으로 시계가 되는 유형이었다. 세븐은 남은 거리를 눈으로 쟀다. 스무 걸음쯤. 스무 걸음 뒤에 이 어깨에서 팔을 내려야 하고, 그다음에는 숫자로 불리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仲有二十步咁上下。(스무 걸음쯤 남았네.)

我行慢啲。你唔好話我。(나 천천히 걸을 거야. 뭐라 하지 마.)

 

세븐은 실제로 걸음을 줄였다. 부상 때문이라고 우기면 아무도 반박 못 할 정도의 속도였고, 그 핑계가 있다는 것이 지금은 다행이었다. 오른팔에 안긴 꾸러미가 걸음마다 가슴팍에서 스쳤다. 종이 소리가 심장 위치에서 났다. 이 여자가 열엿새 동안 이걸 두 번 확인하며 박음질을 보강했다는 사실을, 세븐은 아직 모르는 채로 그 무게를 조금 무겁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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