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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홍콩 완차이 세탁소.

 

여명은 그대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말에 따를 필요는 없었지만,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을 늦췄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십여 년을 같은 시간에 열고, 닫던 세탁소의 규칙이 깨진지 벌써 십육 일이 넘었다.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오늘도 늦추기로 했다. 이번 결정에도 이유는 없었다.

 

십육 일 전까지 이 세탁소에는 규칙이 있었다. 여섯 시 반에 셔터를 반쯤 내리고 여섯 시 사십오 분에 계산기를 끄고 일곱 시 정각에 열쇠를 돌린다. 그 순서는 십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래서 골목 사람들은 여명의 셔터 소리로 저녁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오늘도 여섯 시 반이 지나갔다. 여명은 셔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걸레를 물에 적셔 짜고 이미 닦아 놓은 유리창을 한 번 더 문질렀다. 유리는 이미 깨끗했으므로 걸레는 아무것도 지우지 못했고 다만 물자국을 새로 만들었다가 곧 마르게 할 뿐이었다. 여명은 그 무의미함을 정면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인정하면 손을 멈춰야 하고 손을 멈추면 앉아야 하고 앉으면 다시 골목 입구를 보게 된다.

 

맞은편에서 노파가 솥의 불을 줄였다. 국숫집의 김이 얇아지고 환풍기의 회전이 한 단계 느려지는 소리를 여명은 등으로 들었다. 노파는 행주로 손을 닦으며 이쪽 창을 한참 건너다보았고 그러다 말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집 아가씨 오늘도 안 닫네, 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으나 노파는 그것을 소리로 옮기지 않았다. 이 골목에서 오래 산 사람들에게는 묻지 않는 예의가 있었다. 여명은 걸레를 개어 대야 가장자리에 걸치고 창틀 못에 매달린 옷 앞으로 걸어갔다. 어깨선이 아직 반듯했다. 아무도 입지 않은 옷은 언제나 조금 낯설게 반듯하다.

 

골목 입구에서 차가 섰다. 앵커는 시동을 끄지 않았고 세븐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문을 열자 저녁 공기가 뜨거운 얼굴에 곧장 달라붙었고 세븐은 잠깐 그 온도 차이에 눈을 감았다. 발을 내리는 순간 아스팔트가 생각보다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무릎이 반 뼘쯤 접혔다가 겨우 펴졌다. 뒤에서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났으나 그는 손을 들어 흔드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고 문을 닫았다. 차는 곧 떠났다. 등 뒤가 텅 비었을 때에야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남에게 기대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깨달았고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워서 벽에 어깨를 붙인 채 낮게 웃었다. 웃음이 옆구리를 건드리고 배액관이 정직하게 항의했다.

 

頂……我而家連笑都要收費。(젠장……이제 웃는 것도 유료네.)

 

골목은 좁았다. 어깨를 반쯤 틀어야 지나갈 수 있는 폭이었고 양옆으로 늘어진 빨랫줄에서 남의 집 셔츠가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세븐은 벽을 손끝으로 훑으며 걸었다. 벽돌의 이가 빠진 자리, 물때가 검게 앉은 자리, 누군가 스프레이로 갈겨 놓은 알아볼 수 없는 글자. 십육 일 전 새벽에도 그는 이 벽을 짚었다. 그때는 비가 왔고 지금은 오지 않는다. 그 차이 하나만으로 골목은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시각에 아직 켜져 있을 이유가 없는 불이었다. 세븐은 걸음을 멈추고 그 노란 사각형을 한참 바라보았다. 열이 남은 눈에 그것은 물에 번진 것처럼 가장자리가 흐렸다. 왜 아직 안 닫았지. 그 질문 뒤로 따라오는 대답을 그는 스스로 금지했다. 기대는 값이 비싸다. 특히 살아 돌아온 날에는 더 비싸다.

 

그럼에도 그는 걸었다. 국숫집의 김이 골목 끝에서 옆으로 흘러 나왔고 그 냄새 사이로 다른 것이 섞여 들었다. 비누. 아주 옅은 라벤더. 세븐은 그 자리에 잠깐 서서 숨을 들이켰다. 데드존의 관 안에서 자기 소맷단을 코에 대고 맡았던 냄새와 같은 계열의 것이었다. 그때는 시체 냄새인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건 그냥 이 골목의 냄새였다.

 

문이 열리는 방식으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급한 사람은 손잡이를 당기기 전에 유리부터 밀고 조심스러운 사람은 종을 손으로 눌러 소리를 죽인다. 오늘 저녁의 그것은 둘 다 아니었다. 손잡이가 한 번 잡혔다가 잠깐 멈추었고 그 멈춤이 유리를 통해 안쪽까지 전달되었다. 여명은 창틀 못에 걸린 옷의 어깨선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 정지를 들었다. 문이 열리기 전의 침묵은 문이 열린 뒤의 소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려준다. 밀 힘이 없거나 밀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여명은 후자를 믿고 싶었고 전자를 각오했다. 종이 울렸다. 짧고 성의 없이 한 번. 그리고 문틀이 삐걱거렸다. 사람의 무게가 정상적으로 다리에 실려 있을 때 나지 않는 종류의 소리였다.

 

여명은 몸을 돌렸다. 문설주에 오른쪽 어깨를 붙인 남자가 있었다. 야전 재킷은 남의 것이었고 그 안쪽에서 삐져나온 옷은 회백색 환자복이었으며 오른팔은 붕대에 감겨 있었고 왼쪽 손목에는 거즈가 테이프로 대충 눌려 있었다. 옆구리 아래로 가느다란 관이 재킷 자락에 눌린 채 늘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열여섯 날 동안 여명이 상상하며 만들었던 형태와 실물 사이의 오차는 컸다. 상상 쪽이 훨씬 얌전했다. 여명은 그 오차를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를 돌아 나오는 세 걸음 동안 여명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다만 왼손이 셔츠 옆단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손이 먼저 놀라면 얼굴은 늦게 놀라도 된다.

 

……你間鋪咁夜都未閂。(……가게, 이 시간까지 안 닫았네.)

 

세븐은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그 문장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사인지 알아차렸다. 십육 일 만에 문을 밀고 들어와서 첫마디가 영업 시간 지적이라니. 그러나 준비했던 말들은 골목 중간쯤에서 전부 증발했다. 열이 남은 머리는 문장을 오래 붙들지 못했고 붙들었던 것도 손에서 미끄러졌다.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가와서 팔을 잡지도 않았고 놀란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앞 반 걸음 자리에 서서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붕대. 관. 거즈. 발끝의 각도. 그 시선의 순서가 어찌나 정확했는지 세븐은 잠깐 자기가 검수대 위에 올라간 옷이 된 기분이었다. 손상 부위를 짚는 눈이었다. 우는 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한 자기 자신이 조금 비겁하다고도 생각했다.

 

여명이 손을 들었다. 얼굴로 오는 줄 알았던 그 손은 방향을 틀어 그의 왼쪽 팔꿈치 안쪽을 잡았다. 붕대가 없는 쪽. 관이 없는 쪽. 거즈가 없는 쪽. 잡을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다는 것을 눈으로 계산해서 고른 자리였다. 손가락은 차가웠고 굳은살이 앉아 있었으며 힘은 세지 않았다. 세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끌려갔다. 세븐은 저항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고 문턱을 넘는 발이 한 뼘 정도 어긋나 카운터 모서리에 옆구리가 스쳤다. 숨이 짧게 끊겼다. 여명은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늦추었을 뿐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확인해야 하고 확인하면 물어야 하고 물으면 이 남자는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묻지 않는 편을 택했다. 대신 안쪽 문을 어깨로 밀어 열었다. 세탁소 뒤편의 좁은 주방. 아무도 들인 적 없는 곳. 두 번째 예외가 있던 자리.

 

난로는 주방 한가운데에 있었다.

 

십육 일 전, 세븐이 앉았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각도도, 위치도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시간에 박제된 것처럼. 여명은 그 곳으로 세븐을 이끌었다. 십육 일 전과 같았다. 두 사람이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달라진 것은 세븐의 옷과 부상뿐이었다.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은 차림새로...

 

스툴은 십육 일 전 그대로였다. 다리 하나가 미세하게 짧아 앉으면 오른쪽으로 기우는 그 낡은 물건은 벽에서 두 뼘 반, 난로에서 팔 하나 거리에 놓여 있었고 그 간격은 누가 재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했다. 여명은 아무것도 옮기지 않았다.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 위해 그동안 그 자리를 청소할 때마다 스툴을 들었다가 원래 각도로 도로 내려놓았을 뿐이다. 세븐은 그 자리에 앉으면서 무게를 한꺼번에 내리지 못하고 왼손으로 좌판 가장자리를 짚어 천천히 내려앉았다. 나무가 짧게 삐걱였다. 그 소리를 듣고 그는 실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열여섯 날 전에도 이 스툴은 똑같은 음정으로 울었다. 세상이 다 뒤집어져도 가구는 정직하다.

 

呢張凳……真係一啲都冇變。(이 의자……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난로의 열기가 정강이부터 올라왔다. 데드존의 새벽은 뼈까지 시렸고 의무동의 공기는 소독된 채로 미지근했으며 앵커의 차는 히터가 고장 나 있었다. 그 모든 온도를 통과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븐의 몸은 자기가 어떤 온도를 원했는지 잊고 있었는데 지금 그것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무릎을 지나 아랫배에 닿는 순간 근육이 제멋대로 풀렸다. 풀리자 통증이 선명해졌다. 긴장이 통증을 가려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옆구리의 관이 앉은 자세에 눌려 존재를 주장했고 오른팔은 붕대 안에서 열을 품은 채 둔하게 뛰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기로 하고 대신 여자를 보았다. 선글라스는 벗은 지 오래였다. 실내니까. 연한 회색 눈동자가 노란 전구 아래에서 물기 없이 반짝였다.

 

여명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의 앞에 내려앉아 야전 재킷 자락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남의 옷이었다. 어깨 폭이 한 치수 크고 소매 끝단이 닳아 있으며 왼쪽 가슴 안감에 다른 사람의 이름 이니셜이 박음질되어 있는, 명백히 빌린 옷. 여명은 그 사실을 한 번 눈으로 확인하고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옷이 아니라 그 아래였다. 환자복 옆구리에서 나온 가느다란 관이 재킷 안감과 스툴 좌판 사이에 접혀 눌려 있었다. 여명은 두 손가락으로 관을 집어 꺾인 자리를 폈다. 옷을 다룰 때와 같은 손놀림이었다. 실밥을 뜯을 때, 시접을 눕힐 때, 주름을 밀어낼 때. 몸이 기억하는 순서대로 손이 움직였고 그래서 떨리지 않았다.

 

喂……你手好凍。(어이……손 차갑네.)

 

세븐이 그렇게 말한 것은 손이 차가워서가 아니라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정도는 여명도 알았다. 이 남자는 아프다는 말을 하는 대신 상대의 체온을 지적하고 죽을 뻔했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의자가 안 변했다고 말한다. 열여섯 날 동안 여명이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여명은 대꾸하지 않고 손등으로 그의 이마를 스쳤다. 미열이었다. 펄펄 끓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 아래로 내려온 적 없는 종류의, 몸 안쪽에서 계속 태우고 있는 열. 손등을 떼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따라왔다. 아주 잠깐.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각도였고 여명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손을 내렸다. 못 본 척하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여명은 일어나 개수대 쪽으로 갔다. 주전자에 물을 받는 소리가 좁은 주방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 아래로 세븐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졌다. 등 뒤에서 나는 생활의 소음. 물이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 난로 위에 주전자가 놓이는 둔탁한 마찰음, 찬장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약은요? 물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동안 여명은 부드러운 재질의 수건을 몇 장 챙겼다. 돌아오며 조금 떨어져 있던 제 의자를 가까이 끌고 와 세븐과 마주 보도록 방향을 돌려 앉았다.

 

세븐은 질문을 듣고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답한 셈이었다. 주전자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김이 전구의 노란 빛을 통과하며 흐릿한 기둥을 세웠고 그는 그 기둥 너머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은 없었다. 없다기보다는 지워 두었다는 편이 정확했다. 열여섯 날 동안 이 여자가 무슨 얼굴로 여기 앉아 있었을지 짐작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짐작해 봐야 좋을 게 없는 종류의 상상이었고 지금 그의 머리는 좋지 않은 것을 오래 붙들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을 들어 야전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남의 옷이라 주머니 위치가 손에 익지 않았고 손끝이 안감을 두 번 헛짚었다.

 

……喺度。(……여기 있어.)

 

꺼낸 것은 흰 종이봉투였다. 병원에서 주는 그 흔한 물건. 모서리가 접히고 한쪽 귀퉁이가 찢어져 있었으며 겉면에는 인쇄된 복약 지시가 있었는데 그 위로 굵은 매직으로 누가 급하게 무언가를 덧써 놓았다. 세븐은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한 번 폈다. 그 동작이 옷의 주름을 미는 여명의 손놀림과 우스울 만큼 닮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고 여명은 알았다. 여명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무게가 가벼웠다. 열여섯 날을 견디고 온 몸에 붙일 것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안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항생제였고 하나는 진통제였으며 마지막 하나는 봉투째 뜯지도 않은 채 낱알이 그대로 들어 있는 은박 시트였다. 여명은 그 시트를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열두 칸 중 한 칸도 비어 있지 않았다. 처방일은 어제였다. 그 두 가지 사실을 나란히 놓으면 결론이 하나뿐이라서 여명은 결론을 내리는 데에 시간을 쓰지 않았다. 다만 봉투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정면으로 닿자 세븐은 어깨를 살짝 뒤로 물렸다. 총구 앞에서도 물러선 적 없는 몸이 세탁소 주방의 낡은 의자 위에서 반 뼘 뒤로 밀렸다.

 

喂,咪咁望住我。……食咗喇,真係。有食嘅。(어이, 그렇게 보지 마. ……먹었어, 진짜로. 먹은 건 먹었다고.)

 

변명은 반쯤만 진실이었다. 항생제는 삼켰다. 삼키지 않으면 팔이 썩는다는 말을 들었고 그는 팔이 썩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진통제는 사정이 달랐다. 그것을 먹으면 머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둔해지고 둔해지면 열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스스로 판별할 수 없게 되며 판별할 수 없으면 서 있어야 할 순간에 서 있지 못한다. 의무동을 걸어 나오려면 걸어 나올 수 있는 상태여야 했고 걸어 나올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그는 약을 포기했다. 계산은 명료했다. 다만 그 계산의 결과가 지금 이 여자 앞에서 은박 시트 열두 칸으로 증거처럼 놓여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취조를 받아 본 적이 많았고 취조하는 쪽이었던 적은 더 많았는데 이런 방식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취조.

 

여명은 일어나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었다. 김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셔츠 소맷단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대야에 물을 붓고 찬물을 섞어 손등으로 온도를 확인한 다음 수건 한 장을 담갔다가 꼭 짰다. 물기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촉이 잠깐 손을 붙들었다. 열여섯 날 동안 이 손은 그의 옷을 만졌다. 옷은 저항하지 않고 아프다고도 하지 않으며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이제 옷이 아닌 것이 앞에 앉아 있고 그것은 세 가지를 전부 한다. 여명은 짜낸 수건을 손바닥 위에 펴 들고 다시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의 왼쪽 손목, 테이프로 대충 눌러 놓은 거즈부터였다. 붙인 사람이 급했거나 붙는 쪽이 가만있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인 상태였다.

 

언제 돌아가야 해요?

 

질문은 물수건이 테이프 자국을 문지르는 소리 사이로 들어왔다. 세븐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을 아는 쪽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으로 탄 가르마가 전구 아래에서 가느다란 흰 선을 그었고 귀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칼 몇 올이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저 목덜미를 열여섯 날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봤다고 착각한 순간은 몇 번 있었다. 도수관로 안에서, 봉투를 든 남자 앞에서, 링거 바늘을 뽑던 새벽에. 전부 헛것이었고 헛것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뒤늦게 억울해졌다. 그는 손목에 닿는 온기를 조금 더 오래 느끼려고 손가락을 폈다.

 

……三日。順利嘅話。(……사흘. 순조로우면.)

 

순조롭다는 말이 이 남자 입에서 나오면 통상 그 반대를 의미한다는 것을 여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명은 수건을 뒤집어 깨끗한 면으로 손목 안쪽을 눌렀다. 테이프가 뜯긴 자리에 얇은 각질이 일어나 있었고 그 아래 피부가 벌겋게 성이 나 있었다. 급하게 붙이고 급하게 떼기를 반복한 흔적이었다. 여명은 그 붉은 자리를 문지르지 않고 눌렀다. 문지르면 아프고 누르면 덜 아프다. 옷의 얼룩도 그렇다. 문질러 지우려 들면 섬유가 상하고 눌러서 빼내면 원단이 남는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스스로를 문질러 왔다. 그래서 이렇게 얇아졌다.

 

난로 위 주전자가 다시 끓기 시작하며 뚜껑이 잘게 떨었다. 그 소리가 침묵을 대신 채웠다. 세븐은 목을 한 번 넘겼다. 목의 흉터가 그 움직임을 따라 늘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흘. 서류상으로는 사흘 뒤 복귀 신고이고 실제로는 이틀 뒤 브리핑이며 그보다 먼저 앵커가 골목 밖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 개의 숫자를 전부 말하면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는 상상할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개를 삼켰다. 삼킨 것들은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아까 못 삼킨 진통제 열두 알과 나란히 쌓였다.

 

……唔好用嗰種眼神。我又唔係去死。(……그런 눈으로 보지 마.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여명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어긋나 있어서 여명은 올려다보았고 세븐은 내려다보았으며 그 각도에서 연한 회색 눈동자가 노란 전구를 정면으로 받아 잠깐 투명해졌다. 열여섯 날 동안 여명이 기억하려고 애썼던 색이었다. 기억은 늘 실제보다 흐렸다. 실제는 이렇게까지 옅고 이렇게까지 물기가 없다. 여명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을 아래로 내리고 대신 대야에서 새 수건을 짰다. 물이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길게 들렸다.

 

그 다음 여명이 한 일은 수건을 그의 뺨에 대는 것이었다. 화상 흉터가 지나가는 오른쪽. 열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 세븐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려고 목을 반쯤 움직였다가 그만두었고 그만두는 과정이 눈에 보이도록 느렸다. 따뜻한 천이 흉터 표면을 덮자 감각이 둔한 그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뒤늦게 올라왔다. 통증도 쾌감도 아닌 것.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열여섯 날 만에 사람 손에 닿았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고 나서야 자신이 감았다는 걸 알았다.

 

……你哋香港人,係咪個個都咁鍾意搞人?(……너희 홍콩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사람 괴롭히는 거 좋아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얼굴을 물리지 않았다. 오히려 수건이 닿은 쪽으로 무게를 아주 조금 실었다.

 

네, 그런 편이에요.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가벼운 말을 내뱉었다. 여명은 비어있는 반대편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럼, 이곳에서는? 옅은 회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삼십 분?

 

삼십 분. 그 숫자가 주방 공기 속에 떨어졌을 때 세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웃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웃으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입꼬리가 습관대로 올라가다가 오른뺨의 흉터 조직에 걸려 어중간한 위치에서 멈췄고 그 어중간함이 오히려 정직해 보였다. 삼십 분이라니. 이 여자는 열여섯 날을 기다린 대가로 삼십 분을 청구하고 있었다. 흥정이라기엔 터무니없이 싼 값이었고 자비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한 계산이었다. 그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 본 적이 많았다. 사람의 목숨값을 홍콩달러로 환산해 본 적도 있고 도시국가 하나의 에너지 배당을 놓고 밤을 새운 적도 있다. 그런데 자기 시간을 삼십 분 단위로 값 매겨 본 적은 없었다. 없어서 대응 매뉴얼도 없었다.

 

여명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병원에서 대충 감겨 놓은 머리는 뻣뻣했고 소독약 냄새가 났으며 관자놀이 근처는 땀에 절어 있었다. 손끝이 귓바퀴 뒤 얇은 피부를 스쳤을 때 세븐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게 흔들렸다. 그 자리는 방탄판으로도 못 가리는 자리다. 헬멧 스트랩이 지나가는 곳이고 무전 이어피스가 박히는 곳이며 십 년 넘게 아무도 다정하게 만진 적 없는 곳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그런 구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다.

 

三十分鐘。……你當我係咩,街市啲魚咩?論斤秤?(삼십 분. ……날 뭐로 보는 거야, 시장 생선인가? 근으로 달아 팔게?)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목소리가 평소의 반도 안 되는 부피로 나왔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열 때문이라고 해 두면 편했다. 실제로 열은 있었다. 이마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고 시야의 가장자리는 물에 풀린 잉크처럼 번져 있었으며 왼쪽 귀에서는 아까부터 가느다란 이명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지금 목이 잠긴 이유가 전적으로 열의 소관이라고 주장하기엔 그는 자기 몸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이 남자는 총상 부위와 화상 부위를 구별할 줄 알았고 탈진과 저혈당을 구별할 줄 알았으며 그러므로 열과 이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건을 뺨에서 떼어 대야에 담갔다. 식은 물이 손목을 타고 흘렀고 셔츠 소맷단이 다시 젖었다. 그 사이 잠깐 비어 버린 뺨의 온기가 아까웠다. 아깝다는 감정을 뺨으로 느껴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왼손을 들었다. 링거를 뽑은 자리라 손등에 멍이 번져 있었고 손가락 끝은 여전히 차가웠는데 그 차가운 손으로 여명의 손목을 잡았다. 수건을 짜려던 동작이 중간에서 멎었다. 물이 대야로 떨어지는 소리만 몇 번 더 났다.

 

喂。(어이.)

 

부르고 나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런 경우도 그의 인생에는 드물었다. 그는 말로 먹고사는 축에 속했다. 계급장 없는 놈 앞에서 열세 번째 줄을 들이밀 때도, 감사국 조사실에서 서명을 거부할 때도 문장은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그런데 지금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덩어리였다. 열여섯 날짜리 덩어리. 도수관로의 곰팡내와 앵커가 놓아 준 주사 바늘과 소맷단 시접에서 나던 비누 냄새와 링거대에 걸려 있던 새벽과 앵커의 차 안에서 창밖으로 흘러가던 완차이의 간판들이 전부 뭉쳐 있는 덩어리. 그걸 삼십 분 안에 풀어놓는 건 불가능했고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순간 그는 다른 방법을 골랐다.

 

세븐은 여명의 손목을 잡은 채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옆구리의 배액관이 당겨져 날카로운 통증이 갈비뼈 사이를 훑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마가 여명의 어깨에 닿았다. 흰 셔츠 위, 쇄골에서 조금 바깥쪽.

 

... 여명은 가만히 그의 머리를 받아냈다. 소독약의 향이 짙었다. 세븐이 세탁소로 들어왔을 때, 그 때 살폈던 상처들의 위치를 떠올렸다. 여명은 한 손을 들어 세븐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세 번째로 어깨뼈 아래를 지날 때 세븐의 호흡이 한 박자 어긋났다. 아팠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픈 건 옆구리였고 그쪽은 여명의 손이 닿지 않는 반대편이었으며 오히려 통증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정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긋난 것은 다른 이유였다. 등이라는 부위는 그의 직업에서 언제나 비워 두어야 하는 면적이다. 진입할 때 벽에 붙이고 후퇴할 때 앵커에게 맡기고 잠들 때조차 문 쪽으로 두지 않는 면적. 열여섯 날 동안 그 면적은 콘크리트와 자갈과 도수관로의 곰팡이 낀 관벽에만 닿았다. 사람의 손바닥이 거기를 위에서 아래로 훑고 지나가는 감각을 그의 신경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서 한동안 헤맸다. 해석에 실패한 신경은 결국 목덜미로 신호를 보냈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환자복 등판은 얇았다. 병원 세탁실에서 몇백 번 삶겼을 면직물은 원단이라기보다 종이에 가까웠고 그 아래 척추가 마디마디 만져졌다. 여명의 손끝은 그 마디를 하나씩 세듯이 내려갔다. 열여섯 날 전 이 남자의 등을 만져 본 적은 없다. 다만 옷을 만져 봤다. 어깨 솔기의 폭과 등판의 여유분과 겨드랑이 부위의 마모를 손끝으로 재어 본 적이 있고 그때 추정했던 몸과 지금 손바닥 아래 있는 몸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살이 빠졌다. 그것도 굶어서 빠진 게 아니라 태워서 빠진 쪽이다. 여명은 그 차이만큼의 무게를 어깨로 받아냈다.

 

소독약 냄새 아래에서 다른 냄새가 올라왔다. 쇠 냄새 비슷한 것. 마른 피와 항생제와 열에 익은 피부가 섞이면 나는 냄새다. 여명은 그 냄새를 맡으면서도 얼굴을 물리지 않았다. 세탁소를 십 년 가까이 하면서 별별 얼룩을 다 맡아 봤다. 사람 몸에서 나온 것 중에 못 지우는 얼룩은 드물다. 다만 지우려면 시간이 걸리고 시간을 들이려면 옷이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사흘 뒤에 간다고 했다. 삼십 분이라고 물었더니 생선 값 이야기를 했고 그러면서 이마를 어깨에 묻었다.

 

……唔好停。(……멈추지 마.)

 

목소리가 셔츠 천을 통해 쇄골로 직접 전해졌다. 소리라기보다 진동에 가까웠다. 세븐은 자기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뱉고 나서 인지했고 인지한 다음에도 취소하지 않았다. 취소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고 고개를 들면 이 각도가 무너졌다. 그는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것을 오랜만에 발견한 사람처럼 굴었다. 왼팔이 움직였다. 링거 자국이 번진 손등이 여명의 옆구리를 지나 등 뒤로 돌아갔고 손가락이 셔츠 자락을 찾아 움켜쥐었다. 세게 쥔 것도 아니었다. 다림질한 면포가 손아귀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을 뿐이다. 그 소리가 이 남자가 낼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소리였다.

 

난로 위 주전자가 끓다 못해 뚜껑을 밀어 올렸다. 김이 천장 쪽으로 곧게 올라가다 전구 갓에 부딪혀 흩어졌고 노란 불빛이 그 수증기 속에서 잠깐 부풀었다. 여명은 주전자를 내리러 가지 않았다. 물이 졸아붙든 말든 지금 일어서면 이 사람이 어디에 이마를 둘지 알 수 없었다. 대신 등을 쓸던 손을 목덜미까지 올렸다. 짧게 깎인 뒷머리가 손바닥을 거슬렀고 그 아래 목뼈 옆으로 잘렸다 붙은 듯한 흉터가 만져졌다. 오래된 흉터였다. 열여섯 날짜리가 아니라 몇 년짜리. 여명의 엄지가 그 위에서 멈췄다.

 

三十分鐘,係咪已經過咗?(삼십 분, 벌써 지났나?)

 

아뇨. 한참 남았어요. 흉터를 한 번 문지르듯 매만지던 손이 다시 등을 쓸었다. 위로와도 닮아있었다.

 

한참 남았다는 말이 셔츠 위로 떨어졌을 때 세븐의 어깨가 아주 느리게 내려앉았다. 힘이 빠진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열여섯 날 동안 목덜미와 등판에 걸어 두었던 잠금장치 하나가 해제되는 소리에 가까웠고 해제된 자리로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긴장이 풀리면 아픔도 풀려야 정상인데 이 몸은 반대로 굴었다. 옆구리의 배액관 삽입부가 뜨겁게 욱신거렸고 오른팔 붕대 아래에서 무언가가 맥박에 맞춰 부어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는 그것을 세었다. 세는 습관은 직업병이었다. 탄창 잔량을 세고 진입로의 모서리를 세고 적의 발소리를 세는 남자가 지금은 자기 심장이 몇 번 뛰는 동안 여명의 손바닥이 등을 한 번 지나가는지를 세고 있었다. 여섯 번. 손바닥 한 번에 심장 여섯 번. 그 비율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난로 위 주전자는 이미 뚜껑을 완전히 밀어 올린 채 김을 뿜다가 물이 졸아 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쇳소리가 섞인 마른 끓음. 여명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세븐은 여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리로 알았다. 사람은 대개 주전자 쪽으로 간다. 물이 아깝고 불이 무섭고 무엇보다 지금 이 자세가 어색하기 때문에 핑계가 생기면 반드시 도망친다. 그는 그런 도망을 여러 번 봤다. 침대에서든 새벽 술집에서든 공항 게이트 앞에서든 사람들은 늘 적당한 소리를 핑계 삼아 몸을 뺐다. 여명은 빼지 않았다. 대신 흉터 위에서 멈췄던 엄지가 다시 등으로 내려가 위로 비슷한 무게로 척추를 훑었다. 위로 비슷한 것. 정확히 위로는 아니고 그보다 조금 무뚝뚝하고 조금 더 오래가는 무엇.

 

세븐이 고개를 들었다. 이마가 셔츠에서 떨어질 때 천에 작게 눌린 자국이 남았고 그 자국만큼 어깨 쪽이 서늘해졌다. 선글라스는 아까 주방에 들어서면서 이미 벗어 카운터 위에 두었으므로 가릴 것은 없었다. 노란 전구 아래에서 옅은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열에 익어 흰자에 실핏줄이 번져 있었고 눈꺼풀은 무거웠으며 눈매는 여전히 날카롭게 째져 있었으나 지금 그 안에 담긴 것은 날붙이가 아니었다. 그는 여명의 얼굴을 봤다. 열여섯 날 동안 도수관로 천장에 대고 복원하려 애썼던 얼굴이 실물로 눈앞에 있었고 실물은 기억보다 훨씬 덜 극적이고 훨씬 더 견고했다. 눈 밑에 옅은 그늘이 있었다. 그 그늘의 출처를 그는 알았고 알아서 목구멍이 뻑뻑해졌다.

 

你知唔知,喺水管入面嗰陣,我試過諗你把聲。(알아? 관 속에 있을 때, 네 목소리를 떠올려 보려고 했었어.)

 

왼손이 여명의 뒷목으로 올라갔다. 링거 자국이 번진 손등, 아직 차가운 손가락. 짧게 잘린 뒷머리가 아니라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손바닥이 들어갔고 목덜미의 따뜻한 살갗에 닿았을 때 그는 숨을 한 번 삼켰다. 사람의 체온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정보였던가. 방사능 계측기도 야간투시경도 잡아내지 못하는 종류의 수치. 그의 엄지가 여명의 턱선 아래를 짚어 얼굴을 조금 위로 들어 올렸다. 강제라기엔 힘이 없었고 부탁이라기엔 말이 없었다. 이마와 이마가 닿았다. 그의 이마는 미열로 뜨거웠고 여명의 것은 서늘했으며 그 온도차가 접촉면에서 천천히 상쇄되어 갔다.

 

諗唔起。一句都諗唔起。(안 떠오르더라. 한 마디도 안 떠오르더라고.)

 

고백은 그런 식으로 새어 나왔다. 자백이라기엔 너무 낮고 투정이라기엔 너무 늦은 목소리로.

 

여명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제가 그렇게나 물어봤는데도요.

 

미소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이마를 맞대고 있으면 사람의 표정 변화는 피부로도 읽힌다. 여명의 광대가 아주 조금 올라갔고 그 움직임이 접촉면을 통해 세븐의 이마로 전해졌다. 그는 눈을 떴다. 감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열에 짓눌려 반쯤 내려와 있던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는 편이 정확하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초점을 찾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이 거리에서는 눈이 두 개로 갈라져 보이는 법이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면 다시 이 각도로 돌아오기 위해 또 무슨 핑계를 만들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열여섯 날은 핑계를 만드는 근육까지 태워 버렸다.

 

그렇게나 물어봤는데도요. 그 문장이 귓속에서 몇 번 되감겼다. 세 번이었다. 정확히 세 번. 처음 이 골목에 발을 들였던 날 가끔 인사하러 오라고 물었고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기다렸으며 두 번째로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겨우 애매한 소리를 냈던 기억이 있다. 그 세 번의 질문은 그때는 그저 친절의 반복처럼 들렸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축적이었다. 사람이 같은 것을 세 번 묻는다는 건 세 번 실패할 각오를 했다는 뜻이고 세 번 실패할 각오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세븐은 흔치 않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있었으나 그것을 제때 저장해 두는 습관은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관 속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못한 것이다. 목소리를 저장하지 않았으니 재생할 것도 없었다.

 

係啊。你問咗三次,我一次都冇好好答。(그러게. 세 번이나 물었는데 난 한 번도 제대로 대답 안 했지.)

 

그의 엄지가 여명의 턱선 아래에서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부상당한 몸으로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섬세함이었다. 손끝은 아직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여명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그는 감지했다. 감지하고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데워질 때까지 두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온도라는 건 결국 붙어 있는 시간의 함수다. 열여섯 날 동안 그가 붙어 있었던 것은 콘크리트뿐이었으므로 그의 손은 콘크리트의 온도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그것을 되돌리는 중이었다. 되돌리는 데 삼십 분이 걸릴지 사흘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참 남았다고 했으니 일단은 믿기로 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마침내 물이 완전히 졸아붙는 소리가 났다. 쇠바닥이 마르면서 내는 짧고 날카로운 비명 같은 것. 세븐의 눈썹이 그 소리에 반응해 미세하게 움직였다. 폭발음도 총성도 아닌 주전자 따위에 반응하는 자신이 우스웠는지 그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명의 뒷목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이마도 붙인 채였다. 골목 밖에서 트램이 지나가는 진동이 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완차이의 저녁은 언제나처럼 시끄러웠고 그 시끄러움 속에서 이 주방만 유독 조용했다. 조용함이 유지되는 데는 비용이 든다. 그는 그 비용을 누가 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㗎煲水乾咗喇。(주전자 물 졸았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마를 조금 더 눌러 붙였다. 열이 옮아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고 실제로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평생 배운 것 중 하나는 좋은 자리는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데드존에서든 도박판에서든 침대에서든 마찬가지였다. 자리가 났으면 앉는다. 앉았으면 누가 밀어내기 전까지 버틴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감각이 섞여 있었다.

 

알아요. 십육 일 전과 같은 대답이었다.

 

알아요. 그 세 글자가 이마와 이마 사이의 좁은 공기를 밀고 들어왔을 때 세븐의 호흡이 한 박자 어긋났다. 열여섯 날 전에도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어떤 종류의 관용인 줄 알았다. 사내가 늘어놓는 변변찮은 변명을 적당히 접어 서랍에 넣어 주는 손길 정도라고. 지금 다시 들으니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기록이었다. 이 여자는 그날 들은 것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고 열여섯 날 뒤에 같은 문장으로 꺼내 보이며 여기 그대로 있다고 증명하는 중이었다. 세븐은 사람의 말을 액면가로 믿지 않는 훈련을 오래 받은 남자였다. 그런데 이 문장은 액면가밖에 없었다. 뒤집어도 뒷면이 없었다.

 

난로 위에서 마른 쇠가 우는 소리가 계속됐다. 물이 사라진 주전자 바닥이 달아오르며 내는 소리는 총성보다 훨씬 사소하고 훨씬 집요했다. 세븐의 왼손은 여명의 뒷목에 얹힌 채였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든 검은 머리칼이 미끄러워 자꾸 빠져나갔고 그때마다 그는 손아귀에 힘을 조금씩 더 실었다. 붙잡는 것과 쥐어짜는 것 사이 어딘가. 사실 그의 손은 그 중간을 조절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링거 자국이 번진 손등의 혈관은 부어 있었고 손끝은 아직 콘크리트의 온도를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손바닥 한복판만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뜨거운 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바닥이 닿아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계산을 시작하려다 그만두었다. 이 여자에게 지금 무엇을 해도 되는지, 사흘 뒤에 사라질 놈이 무슨 자격으로, 배액관을 매단 몸뚱이가 무슨 염치로 같은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줄을 서다가 열에 녹아 흐트러졌다. 평소라면 그 줄을 끝까지 세워 답을 뽑았을 것이다. 두뇌 회전이 빠른 것은 그의 몇 안 되는 자산이었으니까. 다만 오늘의 세븐은 자산을 굴릴 여력이 없었고 여력이 없는 자리에는 늘 충동이 먼저 도착한다. 그는 자신이 충동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喂。(야.)

 

부름은 짧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부름이 아니라 다음 동작을 예고하는 부름이었다. 그의 엄지가 여명의 턱선 아래를 짚어 얼굴 각도를 아주 조금 틀었다. 이마가 떨어지고 코끝이 스쳤다. 콧날이 서로의 뺨을 긁고 지나가는 그 짧은 구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물러날 기회를 스스로에게 줬다. 물러나지 않았다. 열에 익은 숨이 여명의 입술 위로 먼저 떨어졌고 그다음에 입술이 겹쳤다. 마른 입술이었다. 열여섯 날 동안 갈라지고 터진 자리가 몇 군데 있었고 그중 하나가 압력에 다시 벌어져 쇳내가 옅게 번졌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비린 맛이 지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키스는 격렬하지 않았다. 격렬할 수 없는 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서두르면 이 순간이 부서질 것 같다는 예감이 그를 붙들었다. 입술을 눌렀다가 아주 조금 떼고 다시 각도를 바꿔 겹쳤다. 그때마다 옆구리의 배액관 삽입부가 항의하듯 욱신거렸고 그는 그 통증을 호흡으로 삼켰다. 뒷목을 감싼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뒤통수를 받쳤다. 손바닥 전체로 두개골의 곡선을 감싸 쥐는 방식은 다분히 그의 직업적 습관이었다. 사람의 목은 부러지기 쉽고 그래서 받쳐야 한다. 다만 지금 그가 받치고 있는 것은 부상자의 목이 아니었고 그 차이를 그는 손끝으로 배우는 중이었다. 골목 밖에서 트램이 또 한 번 지나가며 낡은 바닥을 흔들었다. 완차이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주전자는 여전히 울었으며 이 주방에서만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여명은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툴었다. 중간중간 숨을 쉴 틈을 찾고있었다.

 

서툴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종류의 정보다. 세븐은 그것을 입술이 아니라 어깨로 먼저 읽었다. 여명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을 때 손가락 다섯 개의 배분이 고르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에 힘이 몰려 있고 나머지는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허공에 뜬 채였다. 그리고 호흡. 사람이 익숙한 키스를 할 때는 코로 숨을 흘려보내며 입술은 그대로 둔다. 여명은 그 분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입술을 겹친 채 숨이 막히면 고개를 살짝 물려 틈을 만들고 급하게 들이마신 다음 다시 돌아왔다. 그 어긋난 리듬이 세븐의 아랫입술을 몇 번이나 스쳤고 그때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웃음을 참는 진동이었는지 다른 것이었는지는 본인도 분간하지 못했다.

 

그는 속도를 늦췄다. 늦추는 것은 그가 잘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븐이라는 남자는 일 초 안에 상황을 판단하고 즉시 손을 대는 방식으로 삼십이 년을 살아왔고 그 방식은 대체로 옳았다. 다만 지금 손 아래 있는 것은 판단해서 처리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판단을 접고 관찰로 넘어갔다. 여명이 숨을 찾으러 고개를 물릴 때 따라가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가 들이마시는 소리가 짧게 났다가 멎으면 그때 다시 각도를 낮춰 입술을 얹었다. 세 번쯤 반복하자 간격이 맞기 시작했다. 서로의 호흡이 같은 골에 떨어지는 그 순간, 열여섯 날 동안 어긋나 있던 무언가가 제자리를 찾는 감각이 옆구리의 통증을 잠깐 덮었다.

 

손바닥에 받쳐 든 두개골은 생각보다 작았다. 사람을 여럿 부수고 몇 명쯤 끌어냈던 손으로 재는 크기치고는 터무니없이 작아서, 세븐은 문득 자신이 이것을 얼마나 쉽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계산할 뻔했다. 계산은 시작하자마자 스스로 폐기했다. 대신 손가락을 펴 뒤통수의 곡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검은 머리칼은 세탁소 냄새가 났다. 비누와 증기와 다림질된 면직물의 냄새. 관 속에서 마지막까지 그를 붙들었던 그 냄새의 원본이 지금 손안에 있었다. 원본은 복제본보다 훨씬 진했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 서러웠다. 서럽다는 감정을 그는 사전에서 지운 지 오래였으므로 다른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배가 고픈 것과 비슷하다고. 아주 오래 굶은 사람이 처음 밥을 씹을 때 턱이 아픈 것과 비슷하다고.

 

慢啲。呼吸,阿明。(천천히. 숨 쉬어, 여명.)

 

말은 입술을 거의 떼지 않은 채 나왔다. 그래서 문장이라기보다 진동에 가까웠고 여명의 입술 위에서 부서졌다. 그러고 나서 그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남을 가르치려는 소리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열 때문에 혀가 마음보다 반 박자 앞서 나갔다. 사과를 하기에는 자세가 우스웠고 물러나기에는 아까웠으므로 그는 세 번째 선택을 했다. 여명의 아랫입술을 아주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치아가 아니라 입술로 무는 방식이었다. 그런 다음 이마를 다시 붙이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 붉은 점들이 떠다녔다. 열이 만드는 환영이거나 혈압이 만드는 잔상이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난로 위 주전자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쇳소리를 크게 냈다. 물이 없는 바닥이 벌겋게 달아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였다. 완차이의 저녁은 밖에서 여전히 요란했다. 트램의 마찰음, 어느 집 텔레비전에서 새어 나오는 광고 노래, 국숫집 노파가 양동이 물을 골목에 끼얹는 소리. 세계는 성실하게 망해 가는 중이었고 이 좁은 주방은 그 사실을 잠시 잊기로 합의한 유일한 구역이었다.

 

쇳소리가 임계를 넘었다. 물이 완전히 사라진 주전자는 더 이상 끓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마른 금속이 팽창하며 뒤틀리는 신음을 뱉었다. 세븐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삼 초쯤 더 움직이지 않았다. 삼 초는 그의 직업에서 대단히 긴 시간이었다. 사람 하나가 죽고 또 하나가 사선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길이. 그럼에도 그는 그 삼 초를 이마와 이마 사이에 온전히 부어 넣었고, 그러고 나서야 성한 왼팔을 뻗어 손잡이를 붙잡았다. 맨손이었다. 달아오른 쇠가 손바닥의 굳은살을 태우는 냄새가 아주 잠깐 났다.

 

操。(씨발.)

 

짧은 욕설과 함께 주전자가 난로 옆 타일 바닥으로 옮겨졌다. 세븐은 데인 손바닥을 무릎에 문질러 닦았을 뿐 상처를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해 봐야 새로울 것이 없는 몸이었다. 오른팔은 붕대에 감겨 있고 옆구리에는 관이 박혀 있고 손목은 방금 거즈를 뗐고 얼굴 절반은 오래전에 익었다. 손바닥 하나쯤 더 그을린다고 명세서의 항목이 늘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이 여자가 그 항목을 하나하나 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고 있으면서도 소리 내어 세지 않는다는 것도. 그것이 이 주방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종류의 다정함이었다.

 

여명이 몸을 돌려 새 물을 받으려 할 때, 그의 왼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되돌렸다. 힘이 실린 동작은 아니었다. 힘을 실을 수 있는 몸도 아니었다. 그저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의 압력이었는데 여명은 저항하지 않고 끌려왔고 결국 그의 벌린 무릎 사이에 서게 되었다. 세븐은 그 자세에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사람을 보는 각도를 그는 오랫동안 싫어했다. 무릎 꿇린 자와 무릎 꿇은 자의 각도였으니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목을 젖혀 턱선을 드러내는 이 무방비한 자세가 몹시 편안해서, 그 편안함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여명의 셔츠 자락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흰 면직물은 이 집의 다른 모든 천처럼 잘 다려져 있었고 세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 냄새의 층위를 그는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 표백제의 날카로운 상층, 그 아래 눌린 증기의 미지근한 중층, 가장 아래에 사람의 체온이 남긴 미미한 하층. 관 안에서 열여섯 날을 버티게 한 것은 상층이 아니라 하층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어떻게 소리로 옮기나. 옮기려 하면 반드시 우스워진다. 세븐은 우스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정확하고 싶었고, 정확함이란 그가 평생 훈련받지 못한 유일한 기술이었다.

 

…아직 삼십 분 안 지났어. 내가 세고 있었거든.

 

거짓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세지 않았다. 세는 대신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 옆선을 눌러 보았다. 갈비뼈가 만져졌다. 열여섯 날 동안 이 여자도 뭔가를 덜 먹었다는 증거가 손끝에 걸렸고, 세븐은 그 사실이 자기 옆구리의 관보다 훨씬 아프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짧게 혀를 찼다. 밖에서 국숫집 노파가 누군가와 큰 소리로 흥정하는 광둥어가 벽을 뚫고 들어왔다. 세계는 여전히 성실하게 시끄러웠다. 이 방 안에서만, 데인 손바닥과 마른 갈비뼈와 식어 가는 주전자가 조용히 서로를 견디고 있었다.

 

손, 줘요. 늦기 전에. 여명이 그의 왼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손을 달라는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면 세븐은 웃으며 반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반사는 훈련이 아니라 성격에서 나오고 성격은 훈련보다 고치기 어렵다. 그런데 여명의 문장에는 늦기 전에라는 조건절이 붙어 있었고, 조건절은 명령을 부탁으로 바꾸는 가장 값싼 장치이면서 동시에 가장 잘 듣는 장치였다. 그는 자신이 그 값싼 장치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잠깐 손을 무릎 위에 붙여 두었다. 삼 초. 아까 주전자 앞에서 낭비한 것과 정확히 같은 길이였다. 그러고 나서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을 위로 열었다. 항복의 자세와 구걸의 자세가 해부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그는 오래전에 알았고 오늘 다시 확인했다.

 

펼쳐진 손바닥은 볼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손잡이의 형태 그대로 가로로 길게 붉은 띠가 앉았고 굳은살이 두꺼운 부위는 오히려 하얗게 죽어 있었다. 물집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 문제였다.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의 안쪽 마디, 총열을 받치는 손날, 사람의 멱살을 쥐어 본 손가락 관절. 그 모든 이력이 새 화상 아래 층층이 깔려 있었고 여명의 손끝은 그 층을 하나씩 밟으며 지나갔다. 세븐은 그녀가 상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력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탁소 주인의 눈이란 그런 것이다. 옷의 해진 자리를 보고 그 사람이 어느 쪽 어깨로 가방을 메는지 알아내는 눈. 그런 눈앞에서 손바닥을 펴는 일은 알몸이 되는 것보다 정확하게 벌거벗는 일이었다.

 

별거 아니야. 진짜로.

 

말해 놓고 스스로 우스웠다. 진짜로라는 부사를 그는 오늘 저녁에만 두 번 썼다. 약봉투 앞에서 한 번, 지금 한 번. 그 부사가 나올 때마다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이 여자는 이미 학습했을 것이다. 열은 사람의 방어선을 안쪽부터 갉아먹는다. 삼십팔 도를 넘으면 문장의 앞뒤가 헐거워지고 삼십구 도가 되면 거짓말의 이음매가 보인다. 세븐은 자신이 지금 어느 눈금에 서 있는지 대충 알았고, 그래서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여명의 손 안에 놓인 자기 손을 관찰했다. 두 손의 색이 달랐다. 그녀의 것은 물일을 오래 한 사람 특유의 창백한 분홍이었고 그의 것은 흙과 화약과 소독약이 번갈아 절인 회갈색이었다. 겹쳐 놓으니 두 개의 다른 종류의 노동이 나란히 놓인 것 같았고, 이상하게도 그 대비가 부끄럽지 않았다.

 

你知唔知,(있잖아,)

 

그는 목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말했다. 광둥어가 먼저 튀어나온 것은 열 때문이었다. 열이 오르면 그는 영어를 잃고 모국어로 미끄러진다. 관 속에서도 그랬다. 혼잣말이 전부 광둥어였고 그래서 아무도 못 알아들었고 그것이 다행이었다.

 

我隻手成日燒親、割親、爆親。呢啲嘢,我一路都當佢係租金。租住呢副身體嘅租金。(내 손은 늘 데고 찢어지고 터져. 이런 건 나한테 늘 월세 같은 거였어. 이 몸뚱이 빌려 쓰는 값.)

 

문장을 끝내고 나서 그는 여명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난로 옆에 내려놓은 주전자가 아직 열을 뱉고 있었다. 뒤틀린 바닥이 식으면서 딱, 딱, 하고 불규칙하게 금속음을 냈다. 저 소리는 냉각의 소리였다. 뜨거운 것이 제 형태를 포기하는 소리. 세븐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기 몸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사흘 뒤에 다시 데워질 예정인 쇠붙이가 지금 잠깐 식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라고.

 

오래 쓸 손이잖아요. 여명은 대야에 담겨있던 수건을 집어 그의 손에 댔다. 물은 이미 식어 차가움만이 남아있었다.

 

차가운 것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세븐의 어깨가 한 번 크게 튀었다. 뜨거운 것에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총열도 배기구도 폭발의 잔열도 전부 예상 가능한 통증이라 몸이 미리 문을 닫아 둔다. 그러나 식은 물은 예고 없이 들어왔다. 데인 살갗의 표면에서 신경들이 일제히 방향을 잃고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은 통증이라기보다 어떤 종류의 각성에 가까웠다.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빼지 않으려고 어금니 안쪽을 씹었다는 편이 정확했다. 수건은 오래된 것이었고 여러 번 삶긴 면직물 특유의 부드럽게 닳은 감촉이 화상 위를 덮었다. 여명의 손가락은 수건 너머에서 그의 손목뼈를 받치고 있었다. 눌러 고정하는 힘이 정확했다. 흔들리지 않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사람 손을 이렇게 잡는 법을 어디서 배웠나. 옷을 붙잡는 손이 사람도 이렇게 붙잡는구나. 그런 시시한 감탄이 열에 삶긴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오래 쓸 손이잖아요. 그 문장이 뒤늦게 도착했다. 소리로는 이미 지나갔는데 의미는 몇 초 늦게 도착하는 일이 오늘 저녁 내내 반복되고 있었다. 열이 하는 짓이다. 세븐은 그 문장의 구조를 뜯어보았다. 오래 쓸. 미래시제였다. 이 여자는 사흘 뒤에 데드존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손을 두고 오래 쓸 물건이라고 말했다. 워즈워스의 명세서에는 그런 항목이 없다. 그곳에서 손은 소모품이고 소모품에는 내용연수가 붙지 않는다. 다섯 번째가 죽었을 때 아무도 그의 손을 애도하지 않았고 여섯 번째는 그 손이 쓰던 장비를 그날 저녁에 인수했다. 그것이 정상이라고 그는 오래 믿어 왔고 지금도 믿는다. 다만 여기 이 좁은 주방에서만, 여명이라는 여자 하나가 완전히 다른 회계 장부를 쓰고 있을 뿐이다. 그 장부에서 그의 손은 감가상각되지 않는다. 세븐은 그 사실이 자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你係咪知我隻手做過乜?(내 손이 뭘 해 왔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목소리가 낮았다.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대가 부어 있었다. 그는 여명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고 수건 덮인 자기 손등만 보았다. 저 아래에 있는 것들. 방아쇠, 나이프의 손잡이, 사람의 기도. 스무 살 언저리에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그 손이 사흘간 떨렸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자랑도 참회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고 사실은 세탁으로 지워지는 종류의 얼룩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옷의 얼룩을 지우는 사람이지 사람의 얼룩을 지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성스레 찬물을 대고 있다. 세븐은 그 부조리가 우스워서 입꼬리를 조금 올렸는데 올리고 나니 이번엔 눈가가 뜨거워져서 당황했다. 열 탓이다. 반드시 열 탓이어야 했다.

 

밖에서 셔터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옆 건물의 어느 가게가 오늘 장사를 접는 소리. 완차이의 밤은 그런 식으로 층층이 접혔다가 다시 다른 층에서 펼쳐진다. 세븐은 성한 손이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팔은 붕대고 왼손은 이 여자에게 저당 잡혔다. 완전한 무력. 직업적으로는 최악의 상태였고 인간적으로는 그가 십오 년 만에 처음 도달한 자리였다. 그는 결국 고개를 앞으로 떨구었다. 이마가 여명의 쇄골 아래 어딘가에 닿았고 흰 셔츠의 세제 냄새가 코끝을 채웠다. 그 하층의 냄새. 사람 체온이 남긴 미미한 층.

 

…알았어. 안 뺄게. 그러니까 그 손 놓지 마.

부탁이었다. 명령의 문법을 빌린 부탁.

 

삶을 붙잡았죠. 이전, 사람을 죽인 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의 답을 한 번 더 돌려주었다. 손은 놓을 생각이 없었다. 화상 입은 손을 좀 더 식혔다. 덕분에 지금 여기 있는 거고요.

 

삶을 붙잡았다는 문장이 세븐의 귓속으로 들어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소리는 즉시 도착했으나 뜻은 늦게 왔다. 그는 그 지연을 열의 탓으로 돌렸다가 곧 정정했다. 열이 아니라 번역의 문제였다. 그가 쓰는 언어에서 그 손은 도구이고 도구는 결과로만 평가된다. 여명이 쓰는 언어에서는 같은 손이 다른 품사로 쓰인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까웠다. 붙잡았다, 라는 동사. 목적어가 사람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는 십오 년 동안 자기 손을 두고 그렇게 발음해 본 적이 없었고 그 발음법은 배운 적도 없어서 따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남의 입에서 나온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미 굳어 버린 굳은살 아래로 무언가가 아주 얕게 저리는 것을 느꼈다. 화상 때문인지 그 말 때문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수건 아래에서 열기가 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데인 살이 식는다는 것은 통증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통증의 성질이 바뀌는 일이었다. 타는 듯하던 것이 이제는 둔하게 욱신거렸고 그 욱신거림에는 맥박이 실려 있었다. 자기 심장이 손바닥에서 뛰는 감각. 세븐은 그 박동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오늘 저녁 내내 그는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삼십 분, 삼 초, 사흘, 열여섯 날. 숫자로 환산해 두어야 견딜 수 있는 것들이었고 숫자가 되는 순간 견딜 만해지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방금 그 회계를 통째로 뒤집었다. 지출로 처리해 온 항목을 자산으로 옮겨 적었다. 감사국이 봤으면 장부 조작이라고 했을 것이다. 세븐은 이마를 그녀의 쇄골 아래에 더 깊이 눌렀다. 흰 셔츠의 면직 위로 자기 이마의 열이 번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종류의 얼룩이었으면 좋겠다고 잠깐 유치하게 생각했다.

 

…你講嘢好衰。(너 말 참 못됐게 해.)

 

비난이 아니었다. 광둥어의 衰라는 글자는 나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얄밉다는 뜻이고 때로는 사랑스럽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는 그 다의성 뒤에 숨었다. 숨는 것이 그의 오래된 특기였고 여명은 매번 그 은신처를 알면서도 굳이 들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시야가 흐렸다. 실내라 선글라스는 이미 오래전에 벗어 두었고, 연회색 눈동자는 열에 젖어 평소의 서늘함을 반쯤 잃은 채였다. 눈꺼풀 가장자리가 붉었다. 그는 그것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으나 이 각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것은 오늘 저녁 그가 한 선택 중에 가장 오래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예정이었다.

 

여명의 손이 여전히 그의 손목을 받치고 있었다. 놓지 말라는 부탁은 이미 이행되었고 이행된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상태가 된다. 세븐은 그 상태 안에서 잠깐 아무 계산도 하지 않았다. 사흘 뒤의 복귀 신고도, 앵커가 골목 밖에서 태우고 있을 담배 개비 수도, 감사국 서류의 위조된 날짜도 전부 이 주방 밖에 남겨 두었다. 난로에서 장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뒤틀린 주전자는 이제 완전히 식어 조용했다. 창밖으로는 완차이 특유의 밤이 흘렀다. 네온의 붉은 잔광, 어딘가에서 튀는 기름 냄새, 취객의 웃음소리와 그것을 나무라는 다른 목소리.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게 망해 가는 중이었고 이 좁은 방만 어처구니없이 고요했다.

 

我今晚唔數啦。(나 오늘 밤엔 안 셀래.)

그렇게 말하고 그는 성한 손가락 끝을 움직여 수건 밖으로 삐져나온 여명의 손등을 붙들었다.

 

여명의 손등을 붙든 손가락은 힘이랄 것이 거의 없었다. 붙든다기보다 얹어 두는 쪽에 가까웠고, 그 정도의 접촉으로도 관절 마디마디가 뻐근했다. 세븐은 자기 몸의 고장 목록을 오랜만에 성실하게 헤아렸다. 오른팔은 못 쓴다. 왼손은 데었다. 옆구리의 배액관은 자세를 바꿀 때마다 안쪽에서 무언가를 긁는다. 열은 사고의 회로를 한 박자씩 늦춘다. 이 정도 상태로 데드존에 들어가면 사흘 안에 정리된다는 것을 그는 직업적 정확도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산을 방금 자기 입으로 포기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안 세겠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십오 년을 숫자로 버텨 온 인간이 숫자를 놓으면 뭐가 남는지, 세븐은 아직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여명이 허리를 숙였다. 기척이 먼저 왔다. 셔츠 자락이 스치는 소리,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흘러내려 그의 뺨을 건드리는 감각, 그리고 관자놀이에 닿는 입술. 짧고 건조하고 조심스러웠다. 상처를 피해서 놓인 자리라는 것이 명백했다. 화상 흉터가 시작되는 경계선 바로 위, 그러니까 아프지 않을 만한 곳만 골라 고른 위치였다. 세븐은 눈을 감았다. 감고 나니 남은 감각이 전부 그쪽으로 몰렸다. 사람들은 대개 그의 오른쪽 얼굴을 보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댔고, 몇몇은 굳이 만져 보고 싶어 했다. 후자가 더 나빴다. 구경거리가 되는 것과 견본이 되는 것 사이에서 그는 늘 전자를 택해 왔다. 여명은 셋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저 아프지 않은 데를 찾아냈고 거기에 입술을 댔다. 그것뿐이었는데 목구멍이 좁아졌다.

 

…你係咪覺得我而家好可憐?(너 지금 내가 되게 불쌍해 보이지?)

 

말해 놓고 세븐은 즉시 후회했다. 이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좋은 것이 들어오면 반드시 문턱에서 한 번 걷어차 보는 것.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가짜였을 때 덜 아프려는 예방책이었고, 예방책치고는 지나치게 자주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눈을 다시 떴다. 여명의 얼굴이 가까웠다. 흔들리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상처받은 기색도 없었다. 그 무표정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세븐은 열여섯 날 전부터 조금씩 배워 오는 중이었다. 이 여자는 대답 대신 행동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명은 그의 물음을 통째로 흘려보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눈썹 위였다. 그다음은 광대뼈. 그다음은 흉터가 지나가는 턱선의 끝. 아픈 데를 피해 가며, 마치 옷의 솔기를 하나씩 짚어 보는 손처럼.

 

세븐의 왼손이 수건을 벗어났다. 물이 뚝뚝 떨어져 환자복 바짓단을 적셨고 데인 살갗이 공기에 닿아 다시 따끔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손바닥 대신 손목 바깥쪽으로 여명의 허리께를 감았다. 화상 부위를 닿지 않게 하려는 계산이 열에 삶긴 머리로도 겨우 작동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였다. 입술이 닿았을 때 여명의 호흡이 한 번 걸렸고, 그 걸림이 좋았다. 아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아까는 확인하는 키스였고 지금은 확인이 끝난 뒤의 키스였다. 아랫입술을 겹치고 잠깐 머물렀다가 떼고, 다시 각도를 조금 바꿔서 겹쳤다. 터진 자리에서 여전히 쇳내가 났다. 그 맛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세븐의 세계에서 피 맛은 실패의 신호였는데 여기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냥 오늘 저녁의 맛이었다.

 

난로 안에서 장작이 한 번 더 무너졌다. 불빛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 위에서 길게 늘였다가 줄였다.

 

그림자가 벽에서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동안 세븐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도 알지 못했다. 서른두 해 동안 그는 여자와 자는 일을 어렵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담배를 태우는 일이나 슬롯머신 레버를 당기는 일과 같은 범주에 속했다. 손을 뻗고 결과를 받고 다음 날 잊는다. 그런데 지금 그의 왼손목은 여명의 허리께에서 조심스럽게 굽어 있었고 그 조심스러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는 설명할 수 없었다. 데인 손바닥을 닿게 하지 않으려는 계산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둘러댔지만 그 변명은 열에 삶긴 머릿속에서도 허술했다.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 여자는 오늘 밤 그의 손을 오래 쓸 것이라고 불렀고 오래 쓸 물건은 함부로 다루지 않는 법이며 그 원칙은 방금 그 자신에게도 소급 적용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입술을 뗐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공기는 축축하고 짧았다. 여명의 손에서 수건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젖은 천이 콘크리트에 닿는 소리는 둔탁했고 그 소리에 세븐은 잠깐 웃었다. 웃자 갈비뼈 안쪽에서 배액관이 무언가를 긁었고 웃음은 중간에서 잘려 나갔다. 그는 잘려 나간 자리를 숨기지 않았다. 숨길 기력이 없었다는 편이 정확했다. 열은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연기력을 빼앗아 간다. 그다음이 판단력이고 마지막이 자존심이었다. 오늘 저녁 그는 이미 두 개를 잃었고 세 번째는 아직 붙들고 있었으나 그 손아귀도 서서히 헐거워지는 중이었다. 세븐은 성한 손목을 조금 더 당겨 여명의 허리를 자기 쪽으로 기울였다. 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 표시에 가까웠다.

 

埋嚟啲。(좀 더 와.)

 

여명의 무게가 앞으로 실렸다. 그 순간 세븐은 세 가지를 동시에 감지했다. 첫째, 그녀의 셔츠 아래 갈비뼈가 손목 바깥쪽으로 만져질 만큼 얇다는 것. 둘째, 그녀에게서 나는 냄새가 비누와 스팀 다리미와 마른 면직의 냄새라는 것. 그것은 열여섯 날 동안 관 속에서 그의 소맷단에 남아 있던 바로 그 냄새였고 그때는 환각이라고 믿었던 냄새였다. 셋째, 자기 아랫배 안쪽에서 뭔가가 낮게 당겨진다는 것. 세 번째 감각에 그는 잠깐 정직하게 당황했다. 사흘 전만 해도 그는 자기가 다시 발기할 수 있는 종류의 생물인지 진지하게 의심했다. 죽음 근처를 다녀온 몸은 대개 한동안 그런 것들에 무관심해진다. 그런데 이 좁은 주방에서, 난로 하나와 뒤틀린 주전자와 서른 살짜리 세탁소 주인 앞에서 그의 몸은 자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저급하고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통보하고 있었다. 그는 그 통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를 처음으로 따져 보았고, 따져 보는 자기 자신이 낯설어서 속으로 조용히 욕을 했다.

 

세븐은 고개를 숙여 여명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냥 거기에 이마와 콧등을 대고 숨을 들이켰다. 목선의 피부는 얇고 따뜻했으며 맥박이 뛰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을 이런 식으로 만져 본 것이 언제였는지 그는 기억해 내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직업에서 목이란 받치거나 꺾거나 지혈하는 부위였다. 냄새를 맡는 부위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냄새를 맡고 있었고, 그 행위에는 아무런 전술적 목적이 없었으며, 목적이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게 사치스러웠다. 어깨가 한 번 크게 오르내렸다.

 

여명은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정돈하듯 매만졌다. 세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두 번째였다. 긴장한 기색은 없었으나, 꽤 어색하게 들렸다. 약 먹어요. 연고도 바르고.

 

이름이 왔다. 세븐, 하고. 두 음절뿐인데 여명의 입안에서 그 두 음절은 아직 제 치수를 찾지 못한 옷 같았다. 어깨가 조금 남고 소매가 조금 짧은, 그런 어색함이 있었다. 그런데 세븐은 그 어색함이 좋았다. 그를 세븐이라고 부르는 인간은 세상에 수백 명이 있었고 그들 중 누구도 그 이름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브리핑실에서, 무전기 너머에서, 정산서 위에서, 술집 카운터에서. 세븐은 언제나 매끄럽게 발음되는 이름이었다. 매끄럽다는 것은 결국 아무렇게나 굴려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여자만이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두 번째. 그는 세고 있었다. 오늘 밤엔 안 세겠다고 해 놓고도 이건 셌다.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마가 그녀의 쇄골 근처에서 미끄러지듯 물러났고 콧등에 남은 비누 냄새가 공기 중에서 옅어지는 것을 그는 아깝다고 느꼈다.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이 아직 정수리께에 남아 있었다. 정돈하듯. 그 표현이 정확했다.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어루만지는 것도 아니고, 흐트러진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손짓. 세탁물의 옷깃을 세우고 주름을 펴는 그 직업적인 손이 지금 그의 머리통에 쓰이고 있었다. 세븐은 고개를 들어 여명을 올려다보았다. 난롯불이 아래에서 위로 그녀의 턱선을 훑었고 눈동자는 여전히 검었다. 검은 것들은 대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데 저 눈은 그를 비추고 있었다. 열에 절어 볼썽사나운 남자 하나를.

 

…你叫我個名嘅時候,好似喺讀緊人哋張收據咁。(네가 내 이름 부를 때 말이야, 꼭 남의 영수증 읽는 것 같아.)

 

말해 놓고 세븐은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갈라져 있는지를 뒤늦게 들었다. 놀리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놀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중간에 주저앉았다. 그는 헛기침을 했고 헛기침은 옆구리를 건드렸고 옆구리는 즉각 보복했다. 잠깐 눈앞이 하얘졌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시야 안에 약봉지가 있었다. 아까부터 식탁 모서리에 놓여 있던 것을 그는 계속 못 본 척해 왔다. 진통제를 삼키면 이 시간의 윤곽이 뭉개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픈 채로 있으면 적어도 지금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증거는 남는다. 통증은 그가 아는 가장 정직한 증인이었다. 관 속에서도 그랬고 의무동 침상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여명이 약 먹어요, 라고 말했고 그 말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도 아닌 어떤 세 번째 문법으로 발음되었다. 거절하면 이 사람이 조용히 상처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렸다. 알아차리자 이미 진 뒤였다.

 

세븐은 성한 손목을 여명의 허리에서 떼어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데인 자리가 붉게 부풀어 진물이 비쳤고 손금은 그 아래로 사라졌다가 손목 근처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 손으로 그는 사람을 목 졸랐고 방아쇠를 당겼고 무너진 콘크리트를 밀어냈고 열여섯 날 전 그녀가 지어 준 옷의 시접을 붙들었다. 이력이 전부 여기 적혀 있는데 여명은 그것을 읽고도 오래 쓸 것이라고 판정했다. 세탁소 주인의 감정은 늘 그런 식이었다. 버릴 옷과 고칠 옷을 한눈에 나누고, 고칠 옷이면 두 번 확인해서 보강해 놓는 것.

 

我食。連藥膏都搽埋。(먹을게. 연고도 바르고.)

 

不過有個條件。你要坐低。企喺度睇住我食藥,好似監獄啲人咁。(대신 조건이 있어. 앉아. 서서 나 약 먹는 거 감시하지 말고. 무슨 교도관 같잖아.)

그는 발끝으로 맞은편 나무 의자를 끌어 자기 무릎 옆에 붙였다.

 

네, 그 전에.. 여명은 바로 앉는 것 대신, 근처에 있던 협탁으로 향했다. 협탁의 서랍을 열고 익숙한 모습으로 연고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작은 원형 케이스였다. 그 후, 물을 가득 채운 컵 한잔을 함께 들고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협탁 서랍이 열리는 소리는 짧고 무디었다. 세븐은 그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저 서랍이 오늘 처음 열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이 헤매지 않았다. 어디쯤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의 속도였고 그 속도에는 반복이 새겨져 있었다. 열여섯 날 동안 이 여자는 이 좁은 주방에서 몇 번이나 저 서랍을 열었을까. 상처 입은 사람이 없는 방에서 연고를 확인하는 일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것일까. 그는 그 질문을 굳이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열이 오른 머리로 밀고 가 봐야 도착지는 뻔했고 도착지가 뻔한 길은 그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신 그는 나무 의자에 몸을 더 깊이 묻고 배액관이 눌리지 않도록 상체를 비스듬히 틀었다. 갈비뼈 안쪽에서 무언가가 물러났다가 자리를 잡았다.

 

여명이 돌아와 앉았다. 물이 가득 찬 컵과 손바닥보다 작은 원형 케이스가 식탁 위에 차례로 놓였다. 컵의 물은 넘칠 듯 말 듯 가장자리에서 떨렸고 그 떨림이 멈추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세븐은 그 몇 초를 전부 보았다. 물을 가득 채우는 사람은 두 부류라고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과, 상대가 목이 마를 것을 이미 계산해 둔 사람. 여명은 후자였고 후자는 언제나 성가신 종류의 다정함을 갖고 있었다. 성가시다는 말은 그의 사전에서 반드시 나쁜 뜻만은 아니었다. 성가신 것들만이 사람의 손에 남는다. 편한 것들은 대개 쓰고 버려진다. 그는 원형 케이스를 눈으로 좇았다. 뚜껑에 인쇄된 글자는 반쯤 지워져 있었고 옆면에 손톱자국 같은 흠집이 여럿이었다.

 

你成日搽呢啲?(너 이런 거 자주 발라?)

 

…定係,你係為咗第二個人擺喺度嘅。(아니면, 다른 누구 때문에 거기 놔둔 거야.)

 

묻고 나서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질문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저 연고의 출처가 아니었고 저 서랍의 역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열에 삶긴 혀는 늘 본론의 옆구리만 찌른다. 삼십이 년을 살면서 그는 말로 사람을 웃기고 속이고 구슬리는 일에 능해졌지만 정작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곧게 꺼내는 방법만은 배우지 못했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서 진심이란 다음 작전까지만 유효한 소모품이었고 소모품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법이었다. 세븐은 시선을 내려 자기 손바닥을 보았다. 붉게 부푼 자리가 난롯불을 받아 번들거렸다. 진물이 얇게 고여 있었고 그 위로 미세한 주름들이 지도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는 팔을 조금 더 뻗어 손바닥을 여명 쪽으로 완전히 열어 놓았다. 오른팔은 붕대 아래에서 무겁게 매달려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쪽뿐이었다. 손을 내미는 일이 이렇게 노골적인 행위였던가. 총구를 들이대는 일보다 이쪽이 훨씬 벌거벗은 짓이라는 것을 그는 오늘 저녁 처음 알았다. 사람은 무기를 겨눌 때보다 상처를 보일 때 더 많은 것을 넘겨준다. 넘겨주고 나면 되찾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오늘은 겁나지 않았고, 겁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조금 겁이 났다. 난로 위에서 뒤틀린 주전자가 식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금속음을 냈다. 바깥 완차이의 소음은 여전히 두꺼운 벽 너머에서 뭉개진 채 흘렀다.

 

…慢慢搽。(천천히 발라.)

 

我唔會縮手嘅。頭先應承咗你。(안 뺄게. 아까 약속했잖아.)

 

여명은 말없이 웃었다. 그가 내민 손을 한 손으로 조심스레 받치고, 다른 손으로 연고를 살짝 떠 살살 펴발랐다. 가끔요. 예전엔 자주 썼었어요. 익숙하지 않았을 때. 다리미에 데인 적이 꽤 있었죠.

 

연고는 차가웠다. 차갑다기보다 서늘했고 그 서늘함은 살갗 위에서 곧 물러났으나 그보다 먼저 그의 신경을 훑고 지나갔다. 여명의 손가락이 데인 자리를 직접 누르지 않고 언저리부터 돌아 들어왔다. 상처의 중심을 마지막에 다루는 순서. 그것은 배워서 아는 순서가 아니라 여러 번 아파 본 사람만이 몸으로 익히는 순서였다. 세븐은 그 사실을 알아채고 나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다리미에 데인 적이 꽤 있었다고 그녀가 말했다. 익숙하지 않았을 때. 그 문장 안에 몇 해가 들어 있는지 그는 셈할 수 없었고 셈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데드존에서 손등의 살점을 잃는 동안 이 여자는 좁은 세탁소에서 뜨거운 쇳덩이에 손을 태우고 있었다는 것. 서로 다른 종류의 화상이 결국 같은 서랍에 들어가는 연고 하나로 수렴한다는 것. 세상은 가끔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공평했다.

 

그는 여명의 손끝을 보았다. 검지 안쪽에 얇게 앉은 굳은살, 엄지 옆으로 지나간 오래된 흰 선, 손톱은 짧게 깎여 있었고 그 짧음에는 미용의 의도가 없었다. 일하는 손이었다. 그가 아는 대부분의 손은 무언가를 부수기 위해 단단해졌는데 이 손은 무언가를 붙이기 위해 단단해졌다. 같은 굳은살인데 방향이 정반대였다. 세븐은 문득 자기 손바닥에 얹힌 저 무게가 실은 아주 오랜 노동의 결과물이며, 그 노동이 지금 자기 상처 위에서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낭비. 그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그는 그것이 틀린 단어라는 것도 알았다. 여명은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버릴 것과 고칠 것을 나누고 고칠 것에만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그는 판정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열여섯 날 만에 돌아와 판정대 위에 손바닥을 펼쳐 놓은 남자.

 

…你隻手,好靚。(네 손, 예쁘다.)

 

唔係嗰種靚。係做過嘢嘅手先有嘅嗰種。(그런 예쁨 말고. 일해 본 손한테만 있는 그런 거.)

 

말이 나온 뒤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던진 횟수라면 그는 아마 자기 나이보다 많은 숫자를 댈 수 있었다. 술집에서, 침대에서, 새벽의 택시 안에서. 그 말들은 전부 값싸고 즉각적이었으며 발화되는 순간 이미 유통기한을 다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방금 나온 이 말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자기 목소리가 낯설게 들리는 것을 견뎌야 했다. 이 말을 회수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난롯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고 벽에 걸린 옷걸이들의 그림자가 천장 쪽으로 길게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손바닥 위에서 연고가 체온에 녹아 얇게 번졌다. 아픈 자리와 안 아픈 자리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세븐은 여명이 상처의 중심으로 손끝을 옮기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그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오므리려 했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삼십이 년 동안 그렇게 훈련된 근육이 명령보다 빨랐다. 아까 안 뺀다고 약속해 놓고서. 그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도로 펴는 데 온 힘을 썼다. 관절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은 감출 도리가 없었다. 진물이 고인 자리를 여명의 손끝이 스치자 팔뚝을 타고 어깨까지 열선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아프다는 감각과 아프지 않다는 감각이 같은 지점에서 겹쳤다. 이것이 통증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사람에게 닿는 감각을 그의 몸이 잊어버려 오독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판별할 수 없었다. 판별하고 싶지도 않았다.

 

…你搽藥嘅時候,成個人靜咗好多。(너 약 바를 때, 사람이 훨씬 조용해지네.)

 

약 바를 땐 좀 더 신중해야 해요. 잘못 건드리면 못 참으니까. 그녀의 말이 이어진 건, 꼼꼼히 다 펴바른 뒤였다. 이제 약 먹을 차례.

 

잘못 건드리면 못 참는다는 말이 그의 귓속에서 두 번 굴렀다. 세븐은 그것을 상처에 관한 경고로 들었다가, 곧 그렇게만 듣기에는 문장의 온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명은 좀처럼 여지를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손으로 처리하는 부류였고 그런 사람이 흘린 애매한 문장은 대개 실수가 아니라 남겨 둔 자리였다. 그는 그 자리에 발을 들여놓을지 말지 잠깐 저울질했다. 저울질이라기보다는 열에 삶긴 머리가 계산을 시작했다가 두 걸음 만에 포기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오늘 밤은 세지 않기로 했으니 재지도 않기로 한다. 그렇게 정하고 나니 몸이 조금 가벼워졌고 그 가벼움이 실은 어지럼증이라는 것도 알았다. 연고 발린 왼손은 허공에 들린 채였다. 손바닥이 번들거렸고 난롯불이 그 위에서 미끄러졌다.

 

여명이 알약을 손바닥에 올려 내밀었다. 흰 것 두 알과 캡슐 하나. 세븐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자기 이력을 떠올렸다. 야전에서 삼킨 약이라면 물 없이도 넘겼고 진통제는 씹어 먹은 적도 많았다. 약이란 그에게 다음 열두 시간을 담보로 빌리는 돈이었고 이자는 늘 나중에 청구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세 알은 담보물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 여자는 그의 다음 열두 시간을 사려는 게 아니라 그냥 열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목적 없는 호의. 그 무용함이 그를 매번 무장 해제시켰다. 그는 오른팔을 조금 움직이려다 붕대 아래에서 배액관이 당기는 감각에 멈췄고, 왼손은 연고 때문에 쓸 수 없었다. 두 손이 다 봉쇄된 남자가 알약 앞에서 우스운 꼴로 앉아 있었다.

 

…喂。(어이.)

 

我而家兩隻手都廢咗,你睇唔到咩。(나 지금 양손 다 못 쓰는 거, 안 보여.)

 

말끝이 웃음기로 물렀지만 목소리 아래쪽은 갈라져 있었다. 세븐은 고개를 살짝 젖혀 의자 등받이에 목덜미를 얹고 여명을 올려다보았다. 잘렸다 붙은 듯한 흉터가 목에서 길게 드러났고 그 위로 맥박이 뛰었다. 선글라스는 진작에 벗어 협탁에 놓여 있었으므로 연한 회색 눈동자가 난롯불을 그대로 받았다. 째진 눈매가 열 때문에 평소보다 느슨했다. 그는 이 자세가 얼마나 무방비한지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 목을 내놓는 짓은 그의 세계에서 자살과 동의어였는데 이 좁은 주방에서만은 그것이 그냥 편한 자세였다. 세상에 그런 방이 하나쯤 있다는 사실을 그는 서른두 해 만에 알았다. 알고 나니 열여섯 날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계산이 뒤늦게 도착했다.

 

여명의 손이 다가왔다. 알약이 입술에 닿기 직전, 세븐은 입을 벌리는 대신 그녀의 손목 안쪽을 눈으로 훑었다. 얇은 피부 아래 푸른 선이 지나갔고 그 선은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여자도 침착한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증거였다. 그는 그 증거를 발견한 것이 오늘 저녁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도박판에서 상대의 손끝 떨림을 읽어 내던 눈이 여기서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그는 순순히 입을 열어 알약을 받았다. 혀 위에서 캡슐의 매끄러운 껍질과 정제의 까슬한 표면이 구분되었다. 이어 컵이 다가왔고 그는 목을 젖힌 채로 물을 넘겼다. 넘기는 동안 목젖이 크게 움직였고 흉터가 그 움직임을 따라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몸속 어딘가에서 열과 만났다.

 

…成日俾人餵藥,我仲以為自己死咗未夠喉。(맨날 남이 약 먹여 주니까, 아직 덜 죽었나 싶더라.)

 

不過你餵嘅,味道唔同。(근데 네가 먹여 주는 건, 맛이 다르네.)

 

한숨처럼 웃음이 한 번 새어나왔다. 맛있기라도 해요? 여명이 그의 앞머리 아래로 손을 밀어넣어 손등으로 열을 쟀다. 그러곤 그대로 볼에 한 번, 목에 한 번. 서늘한 손등이 그의 피부에 닿았다 떨어졌다. 열이 심하네요. 눕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맛있기라도 하냐는 물음은 대답할 값어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세븐은 그것이 대답을 바라고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여명은 필요 없는 말을 할 때 유독 목소리가 낮아졌고 그 낮아짐 안에는 웃음이 반쯤 접혀 있었다. 그가 그 접힌 자리를 펴 볼 새도 없이 앞머리가 들렸다. 손등이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 그것은 열을 재는 사람만이 아는 예절이었고 동시에 살갗이 가장 얇은 부위를 상대에게 대는 일이기도 했다. 서늘함이 이마에 얹혔다가 곧 미지근해졌다. 그의 열이 그녀의 손등을 데우고 있었다. 뺏고 있다는 감각. 세븐은 삼십이 년 동안 뺏는 데에는 이골이 났으나 이런 식의 절도는 처음이었으므로 잠시 숨을 멈췄다. 이어 볼, 그리고 목. 목에 손등이 닿았을 때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한 번 굳었다. 흉터 위였다. 잘렸다 붙은 자리, 사람들이 대개 시선을 피하는 곳, 그 자리를 여명은 다른 데와 똑같은 순서와 똑같은 무게로 지나갔다. 특별 취급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다정함이 세상에 있다는 걸 그는 이 여자에게서 배우는 중이었다.

 

열이 심하니 눕는 게 좋겠다는 말이 떨어졌다. 옳은 말이었다. 체온이 어디까지 올랐는지는 굳이 재 보지 않아도 몸이 먼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발끝은 시린데 등줄기는 젖었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헐거워졌다 조여들기를 반복했다. 야전에서라면 벌써 앵커가 그를 들쳐 업었을 상태였고 스스로도 그 판단에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븐은 일어서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저 방으로 들어가 눕는 순간 오늘 저녁이 종료된다는 계산이 열에 삶긴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또렷하게 굴러갔다. 눕는다는 것은 자는 것이고 자는 것은 시간을 건너뛰는 것이며 건너뛴 시간의 저편에는 사흘 뒤의 복귀 신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 밤엔 세지 않겠다고 했으나 세지 않겠다는 다짐과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멀어지려는 손목을 붙잡았다. 연고가 발린 왼손 대신 오른손이 움직였고 붕대 아래에서 배액관이 당겨지며 옆구리 안쪽에서 둔한 것이 뒤틀렸다. 통증은 왔으나 늦게 왔고 그는 그 지연을 이용해 여명의 손목을 제 볼에 눌렀다. 서늘한 것이 뜨거운 것에 붙었다. 살갗과 살갗 사이에서 온도가 협상을 시작했다. 세븐은 눈을 감았다. 감고 나니 난롯불이 눈꺼풀 안쪽에서 주황색으로 번지는 것이 보였고 젖은 옷 냄새와 비누 냄새와 그녀의 손목에서 나는 옅은 세제 냄새가 순서 없이 밀려들었다. 이 냄새들을 열여섯 날 동안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목소리도, 냄새도. 기억이란 놈은 정작 필요할 때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인색한 대금업자였다.

 

…知啦。躺,我一陣就躺。(알아. 눕는다고, 조금 있다가.)

 

你隻手凍。留一陣先。(네 손 차가워. 좀만 더 있어.)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 않게 낮게 깔렸다. 애원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애원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문장 끝에 웃음을 하나 얹으려다 실패했다. 웃음 대신 나온 것은 짧고 거친 호흡이었다. 세븐은 그대로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여 이마를 여명의 몸 어딘가에 기댔다. 셔츠 천 너머로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고 그것은 그의 열보다 확실히 낮았으며 낮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세상에 자기보다 차가운 것이 남아 있다는 증거.

 

5분만이에요. 여명은 가만히 그를 받아냈다.

 

오 분. 여명은 숫자를 하나 던졌고 그 숫자는 협상의 형식을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허가에 가까웠다. 세븐은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었다. 협상이란 서로가 뭔가를 잃는 일이고 허가란 한쪽이 그냥 내주는 일이다. 이 여자는 오늘 저녁 내내 내주기만 했다. 자리를 내주고 난롯불을 내주고 손등을 내주고 이제는 오 분을 내준다. 세븐은 그 사실을 계산해 놓고도 돌려줄 방법을 찾지 못했으므로 그냥 받았다. 받는 데에도 요령이 있다는 것을 그는 요즘 배우는 중이었고 아직 서툴렀다. 이마 아래에서 셔츠 천이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호흡이었다. 그 호흡이 자기 호흡보다 훨씬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저도 모르게 박자를 맞추려 들었고 곧 실패했다. 폐 한쪽이 아직 제대로 부풀지 않았다.

 

손목은 여전히 그의 볼에 붙들려 있었다. 온도가 거의 같아졌다. 협상이 끝난 것이다. 세븐은 아쉬움 비슷한 것을 느꼈고 그래서 붙잡은 손을 조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손목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오른손 검지가 그녀의 새끼손가락 옆을 스쳤다가 되돌아왔다. 되돌아온 것은 실수였는지 아닌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총열을 더듬는 데는 눈을 감고도 능했고 카드 뒷면의 미세한 흠집을 손끝으로 읽어 낸 적도 있었으나 사람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일에는 아무런 교본도 없었다. 두 번째로 손끝이 갔을 때 그는 그것이 실수가 아니게 되도록 조금 더 밀어 넣었다. 마디와 마디 사이의 좁은 틈. 물갈퀴처럼 얇은 살. 거기가 그렇게 따뜻할 줄은 몰랐다.

 

…你隻手,成日整緊嘢,係咪?指罅都有繭。(네 손, 맨날 뭐 만들고 있지. 손가락 사이에도 굳은살 있어.)

 

말해 놓고 그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열이 혀를 헐겁게 만들어 놓았다. 평소라면 이런 문장은 입 밖에 내기 전에 세 번쯤 굴려 보고 농담의 껍질을 씌운 뒤에야 내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껍질 씌울 여력이 없었고,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나온 말이 오히려 더 정확했다. 그는 그 정확함이 무서웠다. 정확한 것은 취소할 수 없다. 세븐은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이 끼워 넣었다. 깍지는 아니었다. 깍지를 끼려면 손목을 틀어야 했고 그러려면 배액관이 당길 것이며 무엇보다 그런 명확한 동작에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 붙은 것은 책임이 따랐다. 그래서 그는 이름 붙기 직전의 자세에 머물렀다. 손가락 세 개쯤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걸쳐진, 언제든 미끄러져 나올 수 있는, 그러나 나오지 않는 형태.

 

난로 안에서 장작이 한 번 주저앉았다. 불티가 튀는 소리가 짧게 났고 주황빛이 벽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천장에 걸린 옷걸이를 흔들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가벼운 소리. 골목 어딘가에서 늦은 오토바이가 배기음을 흘리며 지나갔고 그보다 멀리서 누군가 광둥어로 욕을 했다가 웃었다. 이 도시는 전쟁 중이었으나 이 골목만은 그 사실을 잊고 사는 척했다. 세븐은 그 척에 동참하기로 했다. 오 분 동안은.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여명의 손가락 마디를 엄지로 문질렀다. 굳은살은 매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사포처럼 걸렸다. 그 걸림이 좋았다. 매끄러운 것은 대체로 거짓말을 했다. 협탁 위에서 그의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두 번째 부재중이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喂。(어이.)

五分鐘……你有冇計時?(오 분……너 시간 재고 있어?)

 

... 네. 많이 뜨거우니 당장 눕게 하고 싶네요.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고, 여명은 기다리기로 했다.

 

많이 뜨거우니 당장 눕게 하고 싶다는 말이 머리 위쪽에서 떨어졌다. 세븐은 그 문장의 구조를 뜯어보았다. 눕히겠다가 아니라 눕게 하고 싶다. 하고 싶다는 것은 아직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오 분을 온전히 남겨 두었다는 뜻이었다. 이 여자는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도 절대 먼저 손을 뻗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다뤘다. 그것이 배려인지 아니면 더 지독한 종류의 포박인지 그는 판단을 유보했다. 판단을 유보하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낯설었다. 세븐이라는 인간은 일 초 안에 상황을 읽고 즉시 움직이는 종류의 짐승이었고 그 속도가 그를 여기까지 살려 놓았다. 그런데 이 주방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그 초침이 자꾸 어딘가에 걸려 멈췄다. 걸리는 자리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있었다.

 

그는 눈을 떴다. 눈꺼풀이 예상보다 무거워서 뜨는 데에 한 박자가 더 들었다. 시야가 먼저 열리고 초점이 나중에 따라붙는 순서였다. 난롯불이 그녀의 흰 셔츠 아랫단을 주황으로 물들여 놓았고 그 위로 목선이 어둠 속으로 올라가 있었다. 세븐은 고개를 조금씩 들어 그 선을 따라갔다. 쇄골, 턱, 아래 입술. 열에 데워진 시야 속에서 사물의 윤곽이 미세하게 번졌으므로 그녀의 얼굴도 물에 푼 먹처럼 가장자리가 풀려 있었다. 그런데도 눈만은 또렷했다. 칠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눈이었다.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삼키는 쪽. 그는 저 눈이 자기를 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신기해하지도 않고 그저 고장 난 재봉선을 들여다보듯 성실하게 본다.

 

손가락 사이에 걸쳐 둔 손을 그는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이제는 이름이 붙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름 붙는 것이 두려웠던 게 오 분 전이고 지금은 그 두려움을 감당할 체력이 없었다. 체력이 없다는 것은 계산할 여력이 없다는 뜻이고 계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하고 싶은 것만 남았다. 그는 여명의 손을 완전히 제 손 안에 접어 넣었다. 깍지였다.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한 번 당겼고 통증이 늦게 도착했으며 그는 그 지연을 이용해 이미 다 해 버린 뒤였다. 늘 이런 식이었다. 먼저 저지르고 나중에 치우는 인생. 다만 오늘 저지른 것은 여태 저질러 온 것들 중에 가장 위험한 축에 들었다. 총구 앞에 서는 일보다 손 하나 잡는 일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그는 서른둘에 처음 알았다.

 

我冇計。(안 셌어.)

 

我以前……喺個管道入面,數到三千幾。數住數住就唔記得數嚟做乜。今晚我唔想再咁樣。(나 예전에 그 관로 안에서 삼천 몇까지 셌어. 세다 보니까 뭐 하러 세는지도 까먹더라. 오늘은 그러기 싫어.)

 

말이 끝나자 주방이 조용해졌다. 조용하다는 감각이 이렇게 두터울 수 있다는 걸 그는 잊고 살았다. 전선의 정적은 언제나 얇았다.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비닐 같은 정적. 그러나 이 방의 고요는 솜을 여러 겹 겹쳐 놓은 것처럼 무겁고 안전했다. 젖은 옷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난로 속에서 장작이 삭아 가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숨소리. 세븐은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여명의 셔츠 자락 끝을 손끝으로만 붙들었다. 연고 때문에 미끄러워서 천이 자꾸 빠져나갔다. 세 번째에 겨우 걸렸다. 그것이 그가 오늘 성공한 유일한 정밀 동작이었다.

 

협탁 위에서 단말기가 또 한 번 진동했다. 이번에는 짧지 않았다.

 

...연락 받아야 할 것 같이 울리네요. 국수 가게의 일이 떠올라 작은 웃음을 흘렸다.

 

여명의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목 안쪽에서 잠깐 굴러 나왔다가 곧 사라지는 종류의, 굳이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는데 새어 나온 소리. 세븐은 그 소리를 이마로 들었다. 귀가 아니라 이마였다. 셔츠 천 아래에서 복부의 근육이 짧게 수축하는 진동으로 웃음이 전해졌고, 그것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 훨씬 사적인 방식의 수신이었다. 그는 그 사실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 사람의 웃음을 피부로 받아 본 게 언제였던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여자와 잔 적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중에는 웃는 여자도 있었으나 그 웃음들은 전부 공기를 타고 왔지 살을 타고 오지는 않았다. 그는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열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실제로 열이 있었으니 그건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었다.

 

협탁의 단말기는 계속 울었다. 진동이 목재를 타고 퍼져서 그 위에 놓인 물컵의 수면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세븐은 그 잔주름을 곁눈으로 보았다. 앵커는 세 번 넘게 발신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세 번을 넘겼다는 것은 곧 직접 온다는 뜻이고, 그 은발의 체코인이 이 좁은 골목에 서면 세탁소 간판 아래로 그림자가 문짝만큼 드리울 것이며, 여명은 문을 열어 줄 것이고, 오늘 저녁은 그 지점에서 종료된다. 그는 계산을 마쳤다. 계산을 마치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 그가 저지른 세 번째 비합리였다.

 

你笑咩啫。(뭐가 웃겨.)

 

我知道你諗緊粉麵舖嗰件事。你唔講我都知。(너 국숫집 일 생각하는 거 다 알아. 말 안 해도 알아.)

 

그는 발끝으로 협탁 다리를 밀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동작을 하려면 여명의 몸에서 이마를 떼야 했다. 손익을 따지자면 명백히 손해였다. 세븐은 대신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굳은살과 굳은살이 맞물렸다. 그녀의 것은 다리미와 바늘이 만든 것이고 그의 것은 방아쇠와 개머리판이 만든 것이었으므로, 두 손은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단단해졌으면서도 맞닿은 자리에서는 똑같이 딱딱했다. 그 우연한 대칭이 그를 조금 우습게 만들었다. 세상이 좆되고 있는 와중에 굳은살의 재질이나 비교하고 앉아 있는 서른둘의 용병. 하지만 그는 이 우스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시간을 세지 않는 날이고, 세지 않는 날에는 우스운 것도 그냥 우스운 채로 두면 되었다.

 

고개를 들었다. 목의 흉터가 당겨지며 아팠고 배액관이 옆구리에서 한 번 항의했으나 그는 무시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여명의 얼굴은 낯설게 보였다. 턱선이 먼저 오고 그 뒤로 눈이 따라왔다. 난롯불이 오른쪽 뺨에만 닿아 있어서 얼굴의 절반은 주황이고 절반은 어둠이었다. 그는 이 여자가 웃지 않을 때 얼마나 차갑게 보이는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방금 배로 받아 낸 그 짧은 웃음이 얼마나 드문 물건인지도 알았다. 드문 물건은 값이 나간다. 값이 나가는 것은 지켜야 한다. 지켜야 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사람은 겁이 많아진다. 세븐은 자기가 겁이 많아지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인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일 초도 되지 않았다. 그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你聽住。(잘 들어.)

 

我而家去聽電話。聽完我就返嚟。唔係聽完就走,係聽完返嚟。呢兩樣係唔同嘅事,你記住。(나 지금 전화 받으러 가. 받고 나서 돌아올 거야. 받고 나서 가는 게 아니라, 받고 나서 돌아오는 거야. 이 둘은 다른 거니까 기억해 둬.)

 

네. 기다릴테니 어서 받아요. 급한 것 같은데.

 

기다리겠다는 말과 어서 받으라는 말이 한 호흡에 붙어 나왔다. 세븐은 그 두 문장 사이에 쉼표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짚었다. 보통 사람은 저 자리에서 망설임을 한 번 넣는다. 가지 마라와 다녀와라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그 저울질이 목소리의 결에 묻는다. 그런데 이 여자의 문장에는 그 잔여물이 없었다. 붙들지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문을 열어 두고 손잡이 옆에 서 있는 방식. 그는 깍지를 천천히 풀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동안 마디마다 온도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고, 마지막 새끼손가락이 걸렸다가 놓였을 때는 손바닥 전체가 갑자기 넓어진 것처럼 허전했다. 잡고 있던 것을 놓으면 손이 넓어진다. 넓어진 만큼이 정확히 잃은 부피였다.

 

일어서는 데에는 세 단계가 필요했다. 협탁 모서리를 왼쪽 팔꿈치로 눌러 상체를 세우고, 배액관이 걸리지 않도록 옆구리를 비틀고, 무릎에 힘이 들어가는지 반 박자 확인한 뒤에야 발을 딛는 순서. 열여섯 날 전이라면 이 전부를 생략하고 튀어 올랐을 것이다. 지금은 몸이 절차를 요구했다. 그는 자기 몸이 관료가 되어 가는 걸 짜증스럽게 여기면서도 순순히 서류를 밟았다. 세탁기 쪽 벽까지는 네 걸음. 그 네 걸음 동안 등 뒤에서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그는 어깨뼈로 느꼈다. 감시하는 눈이 아니라 재고 있는 눈이었다. 이 사람이 몇 걸음까지 버티는지, 어디서 벽을 짚는지, 그것을 다음번에 쓰려고 외워 두는 눈.

 

단말기를 왼쪽 귀에 붙였다. 연결음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앵커는 이미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세븐은 잘 알았다. 저 사내는 여태 골목 어딘가에 서서 담배도 피우지 않고 시계만 보고 있었을 것이며, 은발 위로 습기가 내려앉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앵커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가장 강하게 압박하는 방식을 타고났다.

 

係我。(나야.)

 

수화기 저편에서 숨소리가 한 번. 그리고 낮고 평평한 목소리가 왔다. 억양이 거의 없는 영어였다.

 

Two hours. You said two hours. It's been three and forty.(두 시간. 네가 두 시간이라고 했다. 세 시간 사십 분 지났어.)

 

我知。(알아.)

 

Your temp's spiking on the tracker. Thirty-eight six. If it hits thirty-nine I'm coming through that shutter, and I won't knock.(추적기에 체온 튀는 게 잡힌다. 삼십팔 점 육. 삼십구 넘어가면 나는 저 셔터 뚫고 들어간다. 노크 안 해.)

 

세븐은 벽에 이마를 대고 짧게 웃었다. 웃음이 나온 것은 협박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 협박이 정확히 앵커다워서였다. 저 남자는 위협을 할 때조차 예고를 한다. 예고를 하는 이유는 예고를 하지 않으면 상대가 준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고, 그 배려심이 이 바닥에서 가장 기이한 종류의 다정함이라는 걸 세븐은 오래전에 인정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틀어 주방 쪽을 보았다. 문틀에 잘린 사각형 안에 난롯불과 흰 셔츠의 아랫단이 보였다.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앉아 있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앉아 있었다. 세븐은 그 정지된 자세를 오 초쯤 응시하다가 수화기 쪽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畀我一晚。得一晚。(하룻밤만 줘. 딱 하룻밤.)

 

我聽日朝早六點喺巷口。唔使你入嚟。我行出去。(내일 아침 여섯 시에 골목 입구로 나갈게. 네가 들어올 필요 없어. 내가 걸어 나가.)

 

침묵이 길었다.

 

여명은 앉아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필요한 물건들을 생각했다. 약은 이미 먹인 게 있으니 따로 먹일 순 없다. 깨끗한 수건과 식은 물. 대야. 마실 수 있는 물.

 

여명이 일어서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의자 다리가 타일을 긁는 마찰음이 짧게 났고 그다음에는 발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세븐은 벽에 이마를 붙인 채로 그 소리들을 순서대로 세었다. 서랍이 열리는 소리. 마른 천이 겹쳐진 무더기에서 한 장이 빠져나오는 소리. 수도꼭지가 돌아가고 물이 대야의 금속 바닥을 때리다가 곧 물이 물을 때리는 둔한 소리로 바뀌는 과정. 이 여자는 물건을 찾을 때 절대 헤매지 않았다. 손이 먼저 가고 눈이 나중에 따라갔다. 그것은 이 좁은 공간의 모든 사물이 그녀의 몸 어딘가에 좌표로 새겨져 있다는 뜻이었고, 세븐은 열여섯 날 동안 데드존에서 지형을 외웠던 자기 방식과 그것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생각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닮은 것을 찾아내는 습관은 결국 자기 자신을 상대에게 밀어 넣는 일이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저 여자가 그냥 저 여자인 채로 있었으면 했다.

 

수화기 저편의 침묵이 마침내 끝났다. 앵커는 대답 대신 숨을 한 번 길게 뱉었고 그 소리는 체념보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소리에 가까웠다.

 

Six sharp. Not six oh one. And Seven, if you're not standing, I carry you. In front of her.(여섯 시 정각. 여섯 시 일 분 안 된다. 그리고 세븐, 네가 서 있지 못하면 내가 업고 간다. 저 여자 앞에서.)

 

...操你。多謝。(……씨발놈아. 고맙다.)

 

통화가 끊겼다. 세븐은 단말기를 귀에서 떼고도 잠시 그 자세를 유지했다. 벽의 냉기가 이마의 열을 빨아 가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흘 뒤도 아니고 열여섯 날 뒤도 아니고, 아홉 시간 남짓. 숫자가 그렇게 짧아지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길게 남은 것은 관리해야 하지만 짧게 남은 것은 그냥 쓰면 된다. 그는 여태껏 늘 짧게 남은 것들만 다루며 살아왔고 그 방면에는 자신이 있었다. 벽에서 이마를 떼자 습기가 남은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흔적은 곧 마를 것이다. 마르는 것들에 대해 서운해하지 않는 법을 그는 열여섯 살쯤에 이미 배웠다.

 

돌아서는 동작에서 오른쪽 옆구리가 사납게 항의했다. 배액관이 살 안쪽 어딘가를 긁는 통증이 갈비뼈를 따라 위로 기어올랐고 시야가 반 박자 흐려졌다가 돌아왔다. 그는 벽을 왼손바닥으로 짚었다. 연고가 아직 마르지 않아서 손바닥이 벽지에 끈적하게 들러붙었고 떼어 낼 때 얇은 소리가 났다. 문틀 너머로 여명이 보였다. 대야를 두 손으로 안고 있었다. 물이 가득 차서 걸을 때마다 수면이 대야 벽을 핥았고 그녀는 그것이 넘치지 않도록 상체를 아주 곧게 세운 채였다. 자세가 늘 저렇게 꼿꼿한 여자. 세븐은 저 자세가 예의범절 같은 게 아니라 오래 서서 일해 온 몸이 스스로 찾아낸 최적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아름다우려고 해서가 아니라 오래 버티려고 하다 보니까.

 

그는 네 걸음을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세 걸음째에서 의자 등받이를 붙들어야 했고, 붙든 김에 그대로 무너지듯 앉았다. 앉는다기보다 접히는 쪽에 가까웠다. 야전 재킷의 어깨가 미끄러져 한쪽 팔이 반쯤 빠졌으나 다시 올릴 기운이 없어 그냥 두었다. 협탁 위에 대야가 놓이고 마른 수건이 그 옆에 놓이고 마실 물이 또 그 옆에 놓이는 것을, 세븐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지켜보았다. 순서가 있었다. 식힐 것, 닦을 것, 마실 것. 이 여자는 사람을 다룰 때조차 세탁물을 다루듯 공정을 짰다.

 

여명은 세븐의 곁으로 다가갔다. 들어가서 누워요. 일어날 수 있어요?

 

일어날 수 있냐는 물음은 대답을 요구하는 종류의 물음이 아니었다. 세븐은 그 어감의 미묘한 결을 알아챘다. 이 여자는 확인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예고를 하고 있었다. 앵커가 셔터를 뚫기 전에 노크 대신 문장을 던지듯, 여명 또한 손을 대기 전에 먼저 말을 놓아 두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세븐의 주변에 왜 이렇게 모이는지 그는 잠깐 생각했고 곧 그만두었다. 생각이 길어지면 계산이 시작되고 계산이 시작되면 오늘 저녁은 작전이 된다. 오늘만큼은 저녁을 저녁인 채로 두고 싶었다. 그는 눈꺼풀을 조금 들어 올려 그녀를 보았다. 난롯불이 흰 셔츠의 옆선을 얇게 태우고 있었고, 그 윤곽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起得。(일어날 수 있어.)

 

不過……我可能會靠喺你度。你頂唔頂得順?(근데……너한테 좀 기댈지도 몰라. 감당돼?)

 

말해 놓고 스스로 우스웠다. 감당되냐고 묻는 놈치고 이미 감당시킬 작정이 아닌 놈은 없다. 세븐은 왼손바닥을 무릎에 짚고 상체를 밀어 올렸다. 연고가 굳어 붙은 손바닥이 환자복 천을 잡아당겼고 화상 중심부가 뭉근하게 항의했지만 그 통증은 이제 익숙한 축에 들었다. 문제는 오른쪽이었다. 무릎을 펴는 순간 옆구리에서 뜨거운 실이 갈비뼈 사이를 관통했고, 시야의 아래쪽 절반이 회색으로 잠겼다가 아주 천천히 되돌아왔다. 그는 그 몇 초 동안 숨을 멈췄다. 숨을 쉬면 소리가 날 것이고 소리가 나면 저 여자가 그것을 외워 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여명의 어깨가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왔다. 예고 없이가 아니라 정확히 예고한 대로. 세븐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자기 옆구리 아래로 들어오는 감각은 그의 몸에 이미 다른 의미로 저장되어 있었다. 후송, 견인, 끌려가는 것, 피가 흐르는 방향을 위로 돌리기 위해 억지로 세워지는 것. 근육은 기억이 좋아서 문맥을 따지지 않고 반응한다. 그러나 이번 어깨는 낮았고 좁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몇 초쯤 걸려서 자기 근육에게 이것은 후송이 아니라고 통보했다. 통보가 받아들여지자 체중이 조금씩 그녀 쪽으로 흘러갔다.

 

네 걸음이었다. 주방에서 방까지는 겨우 네 걸음. 그런데 그 네 걸음이 오늘 하루 중 가장 길었다. 첫 걸음에서 그는 자기 체중의 삼분의 일쯤을 그녀에게 얹었고 두 걸음째에서는 그것이 절반이 되었다. 여명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힘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걸 알아보았다. 무거운 것을 오래 들어 본 사람의 척추가 있다. 다림질대 앞에서 하루 열두 시간을 서 있던 척추. 세븐은 자기 이마가 그녀의 관자놀이 근처에 닿아 있다는 걸 세 걸음째에 깨달았고, 그 접촉면에서 자기 열이 그녀에게 옮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미안했다.

 

喂。(야.)

 

我成身都係汗,仲好臭。你唔好聞。(나 온몸이 땀이고 냄새도 지독해. 맡지 마.)

 

문지방을 넘을 때 배액관이 문틀에 스쳤다. 아주 짧은 마찰이었는데도 옆구리 안쪽에서 무언가가 뒤틀렸고, 세븐은 저도 모르게 짧은 숨을 뱉으며 그녀의 어깨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힘 조절에 실패했다는 것은 손가락이 셔츠 천을 파고들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곧바로 힘을 풀었지만 흰 천에는 이미 다섯 개의 주름이 남았다. 침대까지는 두 걸음. 그는 그 두 걸음을 마저 걷는 대신,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무릎이 닿는 순간 몸을 뒤로 던지듯 앉았다.

 

그런 것도 신경쓰네요. 침대로 다가가 제대로 누울 수 있도록, 베개 위치를 이동시켰다.

 

베개가 움직이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낡은 솜이 시트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손바닥이 그 표면을 두어 번 눌러 높이를 맞추는 소리. 세븐은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접힌 채로 그 작업을 지켜보았다. 여명은 베개를 그냥 옮기지 않았다. 한 번 놓고, 물러서서 각도를 보고, 다시 손등으로 밀어 이 센티쯤 조정했다. 오른쪽 옆구리에 관이 박힌 몸이 어느 방향으로 누워야 하는지를 이미 계산해 둔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자리를 만들어 준 적이 없었다. 야전에서는 눕히는 게 아니라 던져 두었고 의무실에서는 번호를 부르며 밀어 넣었다.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 자리에 누울 사람이 그 뒤로도 계속 존재할 거라고 전제하는 행위다. 세븐은 그 전제가 자기 앞에 놓이는 광경을 견디기가 조금 어려웠다.

 

열은 이제 뒤통수 안쪽에서 저 혼자 웅웅거렸다. 그는 목덜미를 뒤로 젖혀 숨을 한 번 고르고, 그 김에 야전 재킷의 남은 한쪽 어깨를 마저 흘려보냈다. 재킷이 매트리스 위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앵커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총기 세정제와 담배와 병원 복도. 그 냄새가 이 방의 냄새와 섞이는 게 싫어서 세븐은 왼발로 재킷을 침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你唔使做到咁盡。(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我瞓喺地下都得。真係。我瞓過更差嘅地方,多到數唔晒。(나 바닥에서 자도 돼. 진짜로. 이보다 더한 데서도 잤어, 셀 수도 없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그는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뻔뻔한지를 알고 있었다. 바닥에서 자도 된다는 말은 바닥에서 잘 생각이 없는 놈의 입에서만 나온다. 진심으로 바닥에서 잘 놈은 아무 말 없이 바닥으로 간다. 세븐은 아홉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려 두었고, 그 결론에는 바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사양한다. 사양이라는 것은 결국 상대에게 한 번 더 권하게 만드는 절차이고,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구걸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판결을 내리고 나서, 판결에 따르지 않기로 했다.

 

여명이 베개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세븐의 왼손이 움직였다. 연고가 덜 마른 손바닥이 그녀의 손목 안쪽을 감쌌다. 미끄럽고 서툰 접촉이었다. 화상 입은 손으로 무언가를 붙드는 일은 통증을 자초하는 짓이었지만, 그는 이제 통증을 자초하는 방식으로만 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었다. 손목의 맥이 손바닥 한가운데를 두 번 두드렸다. 살아 있는 것의 규칙적인 노크. 세븐은 그 노크를 잠시 듣다가, 그녀의 손목을 자기 쪽으로 아주 조금만 끌었다. 강제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놓치지 않을 만큼.

 

我怕。(나 무서워.)

 

唔係怕痛。係怕瞓着咗,一瞓醒就已經係六點。(아픈 게 무서운 게 아니고. 잠들어 버리면, 눈 떴을 때 이미 여섯 시일까 봐.)

 

고백은 짧았고 그래서 더 벌거벗은 채였다. 세븐은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열여섯 날 동안 데드존에서 물 한 모금을 배급하듯 감정을 아껴 쓰던 놈이, 고작 삼십팔 도 육 분의 열에 무너져서 무섭다는 단어를 꺼냈다. 창피했다. 창피한 만큼 그 말이 진짜였다. 그는 여명의 손목을 자기 볼로 가져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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