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세탁소의 셔터를 올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 똑같은 움직임. 하나 달라진 게 있었다면, 문득 생각난 유리병이었다. 여명은 서랍을 열고 쌓인 먼지를 살짝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워즈워스 본부의 의무동은 사람을 고치는 곳이라기보다 사람을 계산하는 곳에 가까웠다. 침대 옆 모니터는 심박과 체온을 숫자로 환산했고 벽에 붙은 서식은 그 숫자를 다시 금액으로 환산했으며 복도에서는 누군가가 그 금액을 두고 전화기에 대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세븐은 등받이를 세운 침대에 반쯤 앉아 그 언성을 들었다. 오른팔은 팔꿈치 위까지 새 붕대에 감겨 있었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느리게 흘러나와 투명한 관을 타고 침대 밑 주머니로 떨어졌다. 색은 여전히 탁했으나 어제만큼 검지는 않았다. 검지 않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세븐은 알았고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 안에서는 확인하면 느려졌지만 여기서는 확인하지 않으면 남들이 대신 결정한다. 결정권을 남에게 넘기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밤새 세 번 깼고 세 번 다 왼손으로 침대 옆 트레이를 더듬었다. 트레이 위에는 잘려 나간 천 조각이 접힌 채 놓여 있었다.
군의관이 서류철 대신 종이 한 장만 들고 들어왔다. 어젯밤의 그 여자였고 여전히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발치에 서서 배양 결과지를 세븐의 무릎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혐기성 감염 국소 한정. 요골동맥 박동 양호. 원위부 혈행 유지. 절단 적응증 해당 없음. 세븐은 그 문장들을 왼손 검지로 한 줄씩 짚어 내려갔다. 서류라는 것은 대체로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존재하는데 오늘 아침의 이 한 장만은 반대였다. 어제 그녀가 내밀었던 보철 지원 등급 부속 조항은 사흘 뒤 폐기 서류함으로 갈 것이다. 두꺼웠던 쪽이 버려지고 얇은 쪽이 남는 일은 이 회사에서 흔치 않다.
咁即係……唔使切啦?(그러니까……. 안 잘라도 된다는 거지?)
군의관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붕대 위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눌린 자리에서 통증이 왔다. 왔다는 사실 자체가 소식이었다. 어제 관 속에서 벽에 갈릴 때 오지 않던 것이 지금은 정직하게 왔고 세븐은 그 통증을 아주 잠깐 음미했다. 죽은 살은 아프지 않다. 아픈 것은 살아 있다는 통보다. 그녀는 죽은 가장자리를 도려내는 수술이 오후에 잡혔고 사흘간 정맥으로 항생제를 밀어 넣을 것이며 그 사흘 동안 오른손으로 방아쇠는커녕 젓가락도 잡지 말라고 말했다. 말투에는 십 년치 권태가 정확한 발음으로 발라져 있었다. 세븐은 절반쯤 듣고 나머지 절반은 창밖으로 흘려보냈다. 유리 너머에 격벽이 서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가 하늘을 반으로 잘라 놓았고 그 아래로 아침 물류 차량들이 개미처럼 줄을 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저 벽 안쪽 어딘가에 완차이가 있다. 완차이 어딘가에 셔터가 있고 셔터 아래에는 미싱 소리가 있을 것이다. 손가락 끝이 근질거렸다. 담배 때문이 아니었는데 그것에 이름을 붙이면 무거워지므로 그는 붙이지 않았다.
聽日出得街未?……唔好嬲,我問下啫。我有嘢要攞返俾人。(내일 밖에 나갈 수 있어? ……화내지 마, 물어보는 거야. 누구한테 돌려줄 게 있어서.)
문가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앵커가 아니었다. 녹색 머리를 대충 눌러 쓴 자가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태블릿을 흔들고 있었다. 2였다. 그는 세븐의 링거 줄과 붕대와 트레이 위의 천 조각을 차례로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고 그 코웃음에는 안도가 형편없이 숨겨져 있었다. 피어싱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십육 일 동안 통신 두절이었던 자에게 던지는 첫마디로 그것은 충분히 다정한 축에 속했다.
2는 문틀에서 어깨를 떼고 들어와 침대 발치의 회전 의자를 발끝으로 끌어당겼다. 앉는 동작이 지나치게 여유로워서 오히려 십육 일치의 초조가 그 여유의 뒷면에 서툴게 접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태블릿을 무릎에 올려놓고 한동안 화면만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가락의 리듬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세븐은 그 반 박자를 알아챘으나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하면 이 녀석은 반드시 세 배로 빈정거리는 것으로 갚으며 그 갚음은 대체로 길다. 링거 줄에서 방울이 하나 떨어졌고 그 소리가 처치실 안에서 유일하게 규칙적인 것이었다.
你隻手仲喺度,係咪好失望啊?聽講你已經幫我諗定悼詞。(내 팔 아직 붙어 있어서 실망했냐? 너 벌써 내 추도사 써 뒀다며.)
2는 코를 찡그리며 태블릿을 돌려 세븐 쪽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회랑 배전실의 감시 카메라 영상이 정지 화면으로 떠 있었다. 십육 일 전 세븐이 렌즈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던 그 프레임이었다. 다만 2가 짚은 곳은 세븐이 아니었다. 화면 왼쪽 아래 구석, 배전반 문짝에 흐릿하게 찍힌 스텐실 도장. 밀그램의 것이 아니었다. 마름모 안에 숫자가 하나 들어 있었고 그 서체는 워즈워스의 화물 관리 태그와 동일한 규격이었다. 세븐은 왼손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확대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고 선명해질수록 위장이 아래로 한 뼘 꺼졌다. 회수기가 이륙할 때의 그 감각과 비슷했으나 이번 것은 즐길 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我哋嘅嘢,點解會喺人哋個窿入面?(우리 물건이, 왜 남의 굴 안에 있냐?)
2는 대답 대신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낮춘 이유는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주 기록을 역추적했으나 태그 번호가 삼 년 전 폐기 처리된 물류 라인의 것이라고 했다. 폐기된 것이 데드존 한복판의 배전실 문짝에 붙어 있는 경우 남는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며 두 가지 다 유쾌하지 않다. 세븐은 화면을 끄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십육 일 동안 자신이 쫓기던 그 관들, 금속 탐지기를 든 여섯, 지나치게 정확했던 그들의 방향 감각. 짜증의 정체가 이제야 이름을 얻었다. 이름을 얻은 짜증은 무거웠고 그는 그것이 무거워지는 것을 순순히 내버려 두었다. 무릎 위 결과지 옆에 놓인 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저 물건만은 이 계산에서 빼 두고 싶었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세탁소에서는 미싱이 세 번 헛돌았다. 여명은 밑실을 다시 감고 바늘귀에 실을 통과시켰다. 손끝이 평소와 같았고 같은 것이 다행이었다. 노파가 놓고 간 조리복은 목깃부터 손을 봐야 했으며 그 아래 개어 둔 옷더미에는 여전히 임자 없는 것이 한 벌 섞여 있었다. 여명은 그 한 벌을 옆으로 밀어 두지 않았다. 밀어 두면 정리한 것이 되고 정리한 것은 끝난 것이 된다. 셔터 밖으로 물류 트럭이 지나가며 물웅덩이를 갈랐고 그 소리에 여명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바늘이 천을 물었다. 오늘도 세지 않았다.
여명은 천천히, 옷을 정리해가며 손보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손놀림, 평소와 같은 호흡, 평소와 같은 자세로. 변함없다는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좋은 일 뒤엔 필연적으로 나쁜 일이 함께한다. 욕심도 똑같았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것만 챙겼다. 말, 물건,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을. 문득, 예외로 남은 하나를 잠깐 떠올렸다. 밝은 회색, 흉터. 그리고 금방 흩어졌다. 아직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세븐은 링거대를 왼손으로 붙잡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뜨거운 실이 한 가닥 당겨지는 감각이 왔고 그는 그 감각을 무시하는 대신 정확히 세었다. 하나, 둘, 셋. 셋에서 통증이 정점을 찍고 넷에서 물러났다. 물러난다는 것은 아직 협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협상 불가능한 통증이 어떤 것인지 그는 십육 일 동안 충분히 배웠으므로 지금 이것은 거의 애교에 가까웠다. 배액 주머니가 다리에 부딪히며 미지근하게 출렁였다. 창가까지는 여섯 걸음이었고 여섯 걸음을 걷는 동안 2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리지 않는 것이 그 녀석 나름의 배려였다. 유리에 이마를 대지는 않았다. 이마를 대면 유리가 차갑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차갑다는 것을 알면 이 몸이 얼마나 뜨거운지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격벽은 아침 안개를 반쯤 삼킨 채 서 있었다. 저 콘크리트 덩어리는 세상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물건이지만 실제로 나누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청구서였다. 안쪽 사람들은 청구서를 받고 바깥쪽 사람들은 청구서 대신 총알을 받는다. 화물 게이트 쪽에서 컨테이너 크레인이 천천히 팔을 돌렸고 그 아래로 태그가 붙은 상자들이 줄지어 삼켜지고 있었다. 마름모. 그 안의 숫자. 세븐은 아까 화면에서 본 서체를 다시 떠올렸고 떠올리자마자 관자놀이 안쪽이 지끈거렸다. 십육 일 동안 그를 쫓던 여섯의 방향 감각이 지나치게 훌륭했던 이유. 배전실 문짝의 도장. 삼 년 전에 죽었어야 할 물류 라인. 죽은 것이 걸어 다니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누군가가 시체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我打咗成十六日交,原來對面有人攞緊我哋公司嘅單。(십육 일을 굴렀는데, 알고 보니 상대편이 우리 회사 전표를 들고 있었다는 거네.)
2는 회전 의자를 반 바퀴 돌려 세븐의 등을 바라보았다. 안경알에 창밖의 회색이 얇게 얹혔다. 그는 태블릿을 무릎 위에 엎어 놓고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 번 두드린 뒤 감사국에서 소환장이 나왔다고 말했다. 세븐과 앵커, 오늘 오후, 변연절제술 직후. 수술 직후에 사람을 부르는 것은 의견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의견을 낼 힘이 없을 때 서명을 받고 싶어서다. 세븐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처치실 안에서 웃음소리는 지나치게 크게 울렸고 복도를 지나던 간호 인력이 흘끗 들여다보았다가 지나갔다. 그는 웃음의 끝을 붙잡아 천천히 접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처음이 아니었고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叫Anchor唔好簽任何嘢,一個字都唔好簽。我落手術檯之前自己去。(앵커한테 아무것도 서명하지 말라고 해. 한 글자도. 수술대 눕기 전에 내가 직접 간다.)
그는 돌아서서 트레이 쪽으로 걸어갔다. 여섯 걸음, 다시 여섯 걸음. 잘려 나간 천 조각들은 앵커가 접어 놓은 그대로였고 그 중 소맷단 하나가 위쪽에 놓여 있었다. 진흙과 피와 세정액이 겹겹이 스민 회색 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이제는 그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왼손 엄지로 시접을 문질렀다. 실밥이 터진 자리가 손끝에 걸렸고 걸리는 감촉이 이상하게 정확했다. 완차이의 그 좁은 주방, 난로 옆에 놓인 의자, 미싱이 돌아갈 때 방 안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던 것. 이 조각을 저 사람 앞에 내미는 것은 아마 실례일 것이다.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에 가깝다.
세븐은 그 조각을 접어 환자복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넣고 나서 주머니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는데 누른 이유는 자신도 명확히 대지 못했다. 물건이 빠질 리 없는 깊이였고 빠진다 한들 바닥에서 주우면 그만이었으며 그런데도 눌렀다. 링거대의 바퀴가 타일 이음새에 걸려 삐걱였다. 그는 그것을 왼손으로 살짝 들어 이음새를 넘겼다. 오른팔은 여전히 자기 것이 아닌 물건처럼 몸통에 매달려 있었고 매달린 채로 열을 냈다. 창밖에서는 크레인이 또 한 번 팔을 돌렸다. 저 상자들 중 몇 개가 삼 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서류상 기록되어 있을까. 세븐은 그 계산을 시작했다가 도중에 그만두었다. 계산은 자신의 특기였으나 이번 건은 특기의 문제가 아니라 인내의 문제였고 인내는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個Tag你唔好交上去,先自己查。交咗上去,就變咗人哋想俾我哋睇嘅版本。(그 태그 위에 올리지 말고 너 혼자 먼저 파. 올리는 순간, 저쪽이 우리한테 보여주고 싶은 버전으로 바뀌어.)
2는 안경을 벗어 옷자락으로 닦았다. 닦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었고 그 길이가 곧 대답이었다. 그는 안경을 다시 쓰고 태블릿을 겨드랑이에 끼며 일어섰는데 일어서는 동작에서 회전 의자가 뒤로 반 바퀴 돌아 벽을 쳤다. 폐기 라인 번호를 역으로 훑으려면 물류국 서버 권한이 필요하고 그 권한은 감사국을 거쳐야 나온다. 감사국을 거치는 순간 조회 기록이 남는다. 기록이 남는 조회는 조회가 아니라 통보다. 2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대신 알겠다고만 짧게 말한 뒤 문 쪽으로 걸었다. 문지방에서 한 번 멈췄다. 멈춘 김에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를 던졌는데 그것은 소환 시각 전에 밥 대신 물이라도 마시라는 말이었고 금식 중인 인간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세븐은 손을 흔들어 보냈다. 흔든 것은 왼손이었다.
복도로 나서자 소독약 냄새가 층을 이루어 흘렀다. 벽을 따라 십육 일치의 부재가 게시판 형태로 붙어 있었다. 임무 편성표, 결원 표시, 붉은 줄이 그어진 이름 둘. 세븐은 그 붉은 줄을 지나치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늦추면 애도가 되고 애도는 대체로 남은 자의 사치다. 다만 지나치고 나서 가슴 주머니를 다시 한 번 눌렀다. 완차이의 그 방에서 미싱이 돌 때 나던 소리가 이 복도의 형광등 소리와 어딘가 비슷했다. 규칙적이고 낮고 사람을 졸게 만드는 소리. 그 방의 소리는 살리는 쪽이었고 이 복도의 소리는 서류를 만드는 쪽이었으나 주파수만은 유사했다. 유사한 것들이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같은 시각 완차이에서는 조리복 목깃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 여명은 시침실을 뽑아내고 손끝으로 깃 안쪽을 눌러 각을 살폈다. 늘 이 부분에서 노파는 목이 조인다고 말했고 그래서 여명은 매번 반 푼씩 여유를 두었다. 반 푼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목에는 보인다. 그것이 수선이었다. 다음 순서를 위해 옷더미로 손을 뻗었을 때 손등이 임자 없는 한 벌에 닿았다. 여명은 그 옷을 끌어당겨 무릎에 펼쳤다. 소맷단은 여전히 터진 채였고 터진 자리의 실 끝이 마른 채 곱슬거렸다. 고치지 않고 두었다. 고쳐 두면 기다림이 완료된 형태를 갖추게 되고 완료된 것은 어쩐지 돌려줄 곳을 잃는다.
셔터 밖에서 스쿠터 한 대가 지나가며 웅덩이를 튀겼다.
감사국 대기실은 의무동보다 두 도 정도 서늘했다. 벽면은 흡음재로 마감되어 발소리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죽은 소리들이 쌓여서 이룬 침묵은 자연스러운 고요와는 종류가 달랐다. 세븐은 벤치 끝에 앉아 링거대를 무릎 옆에 세워 두었다. 누군가 어깨에 걸쳐 준 검은 야전 재킷이 오른쪽으로 자꾸 흘러내렸는데 흘러내릴 때마다 왼손으로 끌어 올렸다. 환자복 차림으로 진술하는 것과 재킷을 걸치고 진술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으나 저쪽이 먼저 그 차이를 계산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는 재킷을 포기하지 않았다. 벽에 붙은 안내판에는 진술은 전부 녹취된다는 문장이 세 개 국어로 적혀 있었다. 세 개 국어로 적어야 할 만큼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문장이라는 뜻이다.
맞은편 벤치에 앵커가 앉아 있었다. 은발이 형광등 아래에서 쇠처럼 보였다.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낀 채 바닥의 한 점을 보고 있었는데 열여섯 시간 전까지 그 손으로 세븐의 손목을 잡아 격자 아래로 끌어내렸다는 사실이 지금 이 조명 아래에서는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세븐은 그 은발 쪽으로 턱을 조금 들었다. 앵커의 말수는 언제나 배급제였으므로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서명 이야기를 했다. 아무것도 쓰지 말 것. 이름 석 자도 저쪽 서류 위에서는 진술이 된다는 것. 앵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는데 그것이 이 남자의 긍정이었다.
我哋兩個而家係證人,定係嫌疑犯?呢兩樣嘢,喺呢啲房入面通常都係同一張凳。(우리 둘, 지금 증인이야 용의자야? 이 두 개는 이런 방 안에서 보통 같은 의자거든.)
링거액이 한 방울 떨어졌다. 떨어지는 간격이 지나치게 규칙적이어서 세븐은 그것을 세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는 버릇은 데드존에서 유용했으나 여기에서는 그저 시간을 늘릴 뿐이다. 대신 그는 왼손을 가슴 주머니 위에 얹었다. 접힌 천 조각의 두께가 손바닥에 닿았다. 두께랄 것도 없는 두께였고 무게랄 것도 없는 무게였는데 그 없음이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십육 일 동안 그 소맷단은 진흙과 피와 세정액을 차례로 먹었고 이제는 원래 색을 잃었다. 잃어버린 색을 아쉬워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조금 우스웠다. 그는 여자 관계에 관한 한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한 적이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이 감각은 분류할 서랍이 없었다. 서랍이 없으면 바닥에 두는 수밖에 없고 바닥에 둔 물건은 자꾸 발에 채인다.
驗完之後我要出去一晚。唔係休假,係去攞返一件衫。(조사 끝나면 나 하룻밤 나갔다 올 거야. 휴가 아니고, 옷 한 벌 찾으러 가는 거야.)
같은 시각 완차이의 아침은 물기를 털어 내는 중이었다. 여명은 무릎에 펼쳐 두었던 그 한 벌을 다시 접었다. 접는 순서는 늘 같았다. 어깨선을 맞추고 소매를 안쪽으로 넘기고 허리에서 한 번. 접어서 작업대 구석, 손이 자주 가지 않는 자리에 올려 두었다. 고치지 않은 소맷단이 접힌 면 사이로 조금 삐져나왔으나 밀어 넣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다리미에 물을 채우고 노파의 조리복을 판 위에 폈다. 증기가 올라오며 면 특유의 미지근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목깃을 눌렀다. 반 푼의 여유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잘된 것이었다. 잘된 수선은 티가 나지 않는다. 티가 나지 않는 것을 정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으나 여명에게 그것은 그저 순서였다.
셔터 틈으로 들어온 빛이 작업대 위에 가느다란 띠를 그었다.
여명은 7을 처음 만났던, 갈아입을 옷을 건넸던 그날. 건넸던 그 옷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 옆에 놓인 이 임자 없는 옷도 마찬가지로, 떠나보낸다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하지만 준비된 물건은 언젠가 쓰임을 다한다. 그녀는 준비성이 철저했다. 십 육일. 만약 돌아온다면, 옷을 못쓰게 됐다고 할 것이다. 뻔뻔하게 새 옷을 요구할 것이고. 그와는 고작 5시간을 마주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준비하기로 했다. 제 예상이 틀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언젠가 또다시 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우연히, 운명처럼, 그를 마주친다면. 그 때 건넬 수 있으리라 믿고.
진술실은 대기실보다 다시 두 도쯤 낮았다. 탁자는 사람 둘이 마주 앉기에 지나치게 넓었고 넓은 만큼 상대의 손끝까지 관찰할 여유를 주었는데 그 여유가 곧 이 방의 설계 의도였다. 감사관은 얇은 서류철을 펼치고 사진 한 장을 밀어 왔다. 밀어 오는 속도가 느렸다. 느린 것은 배려가 아니라 관찰이다. 세븐은 왼팔꿈치를 탁자에 얹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오른팔은 삼각건 안에서 자기 온도를 고집했고 그 온도가 어깨를 타고 목덜미까지 올라와 관자놀이에서 맥으로 바뀌었다. 사진 속에는 회랑 배전실의 강철 문틀이 찍혀 있었고 문틀 옆 상자 모서리에 찍힌 도장이 확대되어 있었다. 세븐은 검지를 그 도장 위에 얹었다. 얹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열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는 본인도 구분하지 않았다.
呢個唔係偽造。偽造嘅印會歪,佢哋唔會為咗一箱貨去磨個模。呢個係真嘅,即係話出貨嗰陣就已經係我哋嘅嘢。(이거 위조 아니야. 위조 도장은 삐뚤어져. 상자 하나 때문에 형틀까지 깎진 않거든. 이건 진짜야. 그러니까 출고될 때부터 이미 우리 물건이었단 소리지.)
감사관은 펜을 돌렸다. 돌리는 손이 두 바퀴 만에 멈췄고 멈춘 자리에서 질문이 나왔다. 폐기 라인 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세븐은 웃었다. 웃음은 그의 오래된 도구였고 이런 방에서는 특히 값싼 도구였다. 십육 일 동안 그를 쫓은 것들이 금속 탐지기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 데드존의 무국적자들이 금속 탐지기 여섯 대를 어디서 구하며 구했다 한들 배터리를 어디서 충전하는가. 그 질문 하나면 라인 번호를 몰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숫자를 세는 버릇이 있고 그 버릇으로 밥을 벌어 왔다고. 감사관의 펜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세븐은 그 회전을 보며 이 방에 앉아 있는 사람 중 누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가를 헤아렸다. 답을 아는 자가 질문하는 방에서는 진술이 아니라 시험이 이루어진다. 시험이라면 그는 답안지를 백지로 내는 쪽을 택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지가 아니라 반쪽짜리 답을 냈다. 그는 회랑에서 봤던 감시 카메라 이야기를 꺼냈고 그 카메라에 대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꺼냈다.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렌즈에 흔들어 보인 일. 그 유치한 행위가 지금 이 방에서 유일한 물증의 시각이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감사관의 얼굴에 아주 잠깐 무언가 지나갔다. 웃음도 짜증도 아닌 계산. 계산은 이쪽에도 있었으므로 세븐은 그 순간에 재킷의 흘러내리는 어깨를 왼손으로 끌어 올렸다. 옷을 고쳐 입는 인간은 아직 여유가 있는 인간으로 보인다.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규칙 중 하나였다.
我可以講嘅都講晒。至於邊個喺公司入面幫人開門,你哋唔會喺我度搵到答案。我而家連自己隻手都揸唔實。(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했어. 회사 안에서 누가 문 열어 줬는지, 그건 나한테서 답 안 나와. 난 지금 내 손도 못 쥐거든.)
같은 시각 완차이의 세탁소에서는 다리미가 식고 있었다. 여명은 조리복을 걸어 두고 작업대 구석의 접힌 한 벌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소맷단의 실 끝이 접힌 면 사이로 여전히 삐져나와 있었고 그것을 밀어 넣지 않는 이유를 그녀는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녹취 표시등이 꺼졌다. 붉은 점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방의 성질이 바뀌었다. 감사관은 서류철을 덮었고 덮는 손이 아까보다 빨랐다. 빨라진 손은 대개 지시를 받은 손이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자는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 계급장을 달지 않은 채로 감사관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인간은 이 건물에 몇 되지 않는다. 세븐은 그 몇을 머릿속에서 세어 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세는 버릇이 유용한 것은 상대가 정직할 때뿐이고 이 방에는 정직한 물건이 링거대밖에 없었다. 남자는 탁자 맞은편에 앉지 않고 옆에 섰다. 서서 내려다보는 자세는 취조의 문법이 아니라 통보의 문법이다. 세븐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기대는 순간 오른쪽 어깨에서 유리 조각을 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몸 안쪽에서만 났다.
你唔坐低嘅?企住講嘢好攰㗎,尤其係當你想講嘅嘢比你想問嘅仲多嗰陣。(안 앉으시게? 서서 얘기하면 피곤한데. 특히 묻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더.)
남자는 웃지 않았다. 대신 얇은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사진이 아니라 명단이었다. 열두 줄. 숫자 열둘. 워즈워스의 전부. 그중 세 줄에 가느다란 연필 선이 그어져 있었고 그어진 선은 지워진 흔적 위에 다시 그어진 것이었다. 한 번 지웠다가 다시 긋는 인간은 확신이 없는 인간이거나 확신을 숨기려는 인간이다. 세븐은 명단을 끌어당기지 않았다. 끌어당기면 읽었다는 기록이 남는다. 대신 시선만 내렸다. 첫 줄에 그의 숫자가 있었다. 일곱. 그 옆으로도 선이 지나가 있었는데 선의 농도가 나머지 둘보다 옅었다. 옅다는 것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거나 이쪽에 보여 주려고 일부러 옅게 그었다는 뜻이다. 후자라면 상당히 공들인 연출이었고 공들인 연출은 언제나 상대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열이 다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 뒤쪽에서부터 젖은 수건을 덮는 것처럼 서서히. 그는 왼손으로 재킷 깃을 끌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에 남자의 시선이 따라왔고 따라온 시선은 어깨가 아니라 가슴 주머니에서 멈췄다. 세븐은 주머니를 누르지 않았다. 누르는 순간 그 안의 것이 무엇이든 값이 매겨진다. 십육 일 동안 진흙과 피와 세정액을 차례로 먹은 천 조각 따위에 값을 매기게 두고 싶지 않았다. 값이 매겨진 물건은 협상 탁자에 올라가고 협상 탁자에 올라간 물건은 반드시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나간다. 그는 그 사실을 열아홉에 배웠고 그 이후로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방식이 무너진 것은 비 오는 날 어느 골목에서였다.
你哋想我簽嘅唔係口供,係名單。邊個賣、邊個買、邊個開門,你哋心裏面已經有答案,而家淨係想搵個斷咗手嘅人喺下面畫個花押。(당신들이 나한테 서명시키고 싶은 건 진술서가 아니라 명단이지. 누가 팔았고 누가 샀고 누가 문을 열었는지, 답은 이미 갖고 있잖아. 지금은 팔 하나 못 쓰는 놈한테 밑에다 수결 하나 받고 싶은 거고.)
같은 시각 완차이의 세탁소에서는 서랍이 열렸다. 여명은 작업대 아래 깊은 칸에서 원단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꺼운 면과 얇은 면 사이의 것. 물에 여러 번 들어가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마르는 속도가 빠른 종류. 폭을 재고 종이에 어깨선 치수를 적었다. 적으면서 그녀는 그의 어깨를 기억으로 더듬었다. 넓었다. 그날 건넨 옷은 소매가 짧았을 것이다. 짧은 소매를 입고도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계급장 없는 남자는 세븐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대신 두 번째 봉투를 꺼냈다. 첫 번째 봉투가 명단이었다면 두 번째 봉투는 훨씬 얇았고 얇은 것은 대체로 더 무겁다. 안에서 나온 종이는 인사기록의 사본이었다. 워즈워스의 등록 원칙상 숫자 외의 정보는 본부 서버의 봉인 구역에 잠겨 있어야 하고 그 봉인을 여는 데에는 세 사람의 승인이 필요하다. 종이 상단에 찍힌 조회 시각은 오늘 오전 열한 시 사십오 분이었다. 세븐이 이 방에 앉아 도장 사진 위에 검지를 얹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이름 칸은 검게 칠해져 있지 않았다. 칠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전시였다. 세븐은 그 글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반응이 되고 반응은 기록된다. 다만 목 안쪽에서 마른 것이 한 번 걸렸고 그 걸림이 열 탓인지 아닌지는 스스로도 판정을 미뤘다.
Axion Keith. 唔錯啊,連拼法都冇打錯。你哋喺我瞓喺手術床上面之前,特登搵人幫我開咗個封印,即係話你哋唔係想查我,係想令我知道你哋查得到。(악시온 키스. 훌륭하네, 철자도 안 틀렸고. 내가 수술대 눕기 전에 굳이 사람 셋 모아서 봉인을 열었다는 건, 나를 캐고 싶다는 게 아니라 캘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다는 뜻이지.)
남자는 그제야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앉는 자세가 아까의 통보보다 조금 낮아졌고 낮아진 만큼 이야기는 더 더러워질 참이었다. 그는 열두 줄 명단의 여덟 번째와 열한 번째를 손톱으로 두드렸다. 두드린 자리에는 아직 연필 선이 없었다. 없다는 것은 곧 그어질 자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짚은 것은 명단의 아래쪽 여백이었다. 열두 줄 다음의 빈칸. 워즈워스는 열둘로 운용되는데 봉투 속 서식에는 열세 번째 줄이 인쇄되어 있었다. 인쇄 오류라고 하기에는 줄 간격이 지나치게 정확했다. 세븐은 그 빈 줄을 보다가 왼손을 명단 위에 펼쳐 덮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종이가 체온을 받아 미지근해졌다. 미지근한 종이는 사람 살갗과 구분이 잘 되지 않고 그래서 그는 잠깐 이것이 누구의 목숨인가를 생각했다. 열세 번째. 등록되지 않은 자리. 회랑의 상자에 진짜 도장이 찍혀 나갈 수 있으려면 숫자를 가진 열둘 중 하나가 아니라 숫자를 아예 부여받지 않은 자가 필요하다. 문을 여는 자는 명단에 없다.
열이 정수리까지 차올랐다. 오른쪽 어깨의 배액관이 재킷 안감에 걸려 살짝 당겨졌고 당겨진 통증은 놀랍도록 선명하게 그의 머리를 씻어 주었다. 그는 통증을 고마워한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예외였다. 남자가 펜을 내밀었다. 펜은 검고 가늘고 값비쌌으며 값비싼 물건으로 서명을 받아 내려는 자는 대개 그 서명으로 값싼 일을 하려는 자다. 세븐은 펜을 받지 않았다. 대신 왼손 검지를 들어 인쇄된 열세 번째 줄을 짚었다. 짚은 손끝에 잉크가 묻어날 리 없는데도 그는 그 자리를 문질렀다. 문지르는 동안 방 안의 공기가 한 겹 굳었다. 감사관은 눈을 들지 않았고 계급장 없는 남자의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미세한 움직임은 언제나 가장 큰 자백이다.
我唔簽呢張。你哋想搵嘅唔喺呢十二行入面,係下面呢一行。連編號都冇嘅人,先至可以攞住真印出貨。你哋印咗第十三行出嚟,即係話你哋自己都知,係咪?(난 이거 서명 안 해. 당신들이 찾는 놈은 이 열두 줄 안에 없어. 밑에 이 한 줄이야. 번호조차 없는 놈이라야 진짜 도장 들고 물건을 빼지. 열세 번째 줄을 인쇄해 왔다는 건 당신들도 이미 안다는 소리 아냐?)
기억에 의존해 치수를 적어내려갔다. 비를 피하던 잔해 아래에서 가까이 다가왔던 모습, 세탁소로 향하던 길, 옆에서 나란히 걷던 모습, 세탁소 난로 앞에서 옷을 말리던 모습. 여명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치수를 재고, 그리고, 잘라내고, 미싱을 돌렸다.
계급장 없는 남자는 세븐이 짚은 열세 번째 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방식이 상당히 훈련된 것이어서 놀라움도 당황도 얼굴 위로 올라오지 않았고 다만 그것이 훈련된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었다. 그는 펜을 거두지 않고 탁자 위에 눕혀 두었다. 눕혀 둔 펜은 여전히 요구였다. 요구를 철회하지 않은 채로 화제를 바꾸는 자는 언제나 다음 카드를 갖고 있다.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낮았고 낮은 목소리는 방을 좁게 만들었다. 그는 세븐의 오른팔을 보았다. 삼각건 아래로 늘어진 배액관과 그 끝의 반투명한 주머니. 안에 고인 것이 붉지 않고 탁하다는 사실은 이 방의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았다. 남자가 말한 것은 팔이 아니라 일정이었다. 수술은 오늘 오후로 잡혀 있고 감염 소견은 하루 사이에 뒤집힐 수 있으며 뒤집힌 소견은 절단으로 이어지고 절단은 계약 조항의 특정 항목을 작동시킨다는 이야기. 세븐은 그 문장의 순서를 들으며 감탄에 가까운 것을 느꼈다. 협박을 의료 정보의 형식으로 배달하는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你講嘢好靚喎。用醫生嘅語氣講數,咁樣就算錄咗音,聽落都似關心。不過我提你一句:我隻手爛咗,唔代表我腦都爛埋。(말솜씨 좋으시네. 의사 말투로 협상을 하면 녹음이 남아도 걱정처럼 들리니까. 근데 한마디 해 두지. 내 팔이 썩었다고 머리까지 썩은 건 아냐.)
남자는 그 말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만든 것이지 지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얼굴의 절반만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세 번째 봉투를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아깝다는 뜻이다. 대신 그는 아주 사소한 문장을 하나 놓았다. 십육 일 전 강하 명단을 최종 승인한 결재란에 서명이 두 개였고 그중 하나는 오늘 이 건물 안에 없다는 것. 세븐은 그 문장을 받아 들고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굴리는 동안 열이 관자놀이 안쪽에서 맥박과 박자를 맞췄다. 부재한 서명. 열세 번째 줄. 도수관로에서 하필 그 방향으로만 밀려 나던 추격. 조각들이 저희끼리 자석처럼 붙으려 했고 그는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가장 의심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이렇게 잘 붙는 이야기는 대개 누군가 미리 다듬어 놓은 이야기다. 그는 왼손을 명단에서 떼었다. 떼자 종이에 손바닥 모양의 습기가 남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세븐은 등받이에서 상체를 떼어 앞으로 기울였다. 기울이는 동안 어깨 속에서 젖은 모래를 쏟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그의 귀에만 들렸다. 눈높이를 빼앗는 것은 취조받는 자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반격이었다. 그는 상대의 동공을 정확히 조준했다. 선글라스는 처치실에 두고 왔으므로 지금 그의 연회색 눈은 아무런 차폐 없이 노출되어 있었고 그 사실이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흉터보다 눈을 무서워한다.
你哋要我畫花押可以,不過唔係喺呢十二行上面。將個第十三行嘅名寫出嚟,我即刻簽,簽完你哋想切我隻手定係切我條頸都得。但你哋唔會寫,因為嗰個名一寫出嚟,就唔止我一個人要瞓喺手術床上面。(수결이 필요하면 찍어 주지. 단, 이 열두 줄 위에는 안 해. 열세 번째 줄에 이름을 적어 와. 그럼 그 자리에서 서명하고, 그다음엔 내 팔을 자르든 목을 자르든 마음대로 해. 근데 안 적을 거야. 그 이름이 종이에 올라가는 순간 수술대에 누울 사람이 나 하나로 끝나지 않으니까.)
진술실의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미싱이 몇 번 돌아가고, 삐져나온 실을 정리하고. 여명은 완성된 옷을 들어 펼쳤다. 제가 입기엔 너무 크고, 그에겐 딱 맞는 크기였다. 옷을 다시 접어 세탁기에 넣었다. 라벤더 향이 미미하게 맴도는 세제를 열었다.
세탁기의 뚜껑이 낮게 닫히는 소리는 이 좁은 가게 안에서 언제나 하루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여명은 세제 통의 뚜껑을 돌려 열었고 안쪽에서 라벤더의 잔향이 아주 미미하게 피어올랐다. 향이 강한 것은 쓰지 않는다. 강한 향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지우는 게 아니라 덮어 버리고 덮인 것은 결국 냄새의 형태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계량컵의 눈금까지 세제를 채우고 그것을 투입구에 부었다. 물이 도는 소리가 통 안쪽에서 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새 옷은 아직 한 번도 사람의 체온을 받아 본 적 없는 천이었다. 그래서 한 번 빨아야 했다. 풀기를 빼고 조직을 눕히고 처음부터 살에 닿을 준비를 시켜 두어야 했다. 여명은 무릎을 펴고 일어서며 앞치마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손끝에 아직 재단 가위의 차가움이 남아 있었다.
같은 시각 감사국 진술실의 형광등은 두 번째로 깜빡였고 그 두 번째는 우연이 아니었다. 벽면 상단에 붙은 녹음 장비의 표시등이 붉은색에서 소등으로 바뀌었다. 계급장 없는 남자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가 시킨 일이라는 뜻이다. 세븐은 그 짧은 소등을 목격하는 동시에 자신의 척추 어딘가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록이 멈춘 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두 종류뿐이다. 거래이거나 처분이거나. 남자는 명단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넣는 손놀림이 아까보다 빨랐고 빠른 손은 언제나 다음 일정을 갖고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주 평범한 어조로 말했다. 열세 번째 줄은 인쇄 서식의 잔재이며 감사국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세븐은 그 문장을 들으면서 웃었다. 방금 전까지 손톱으로 여덟 번째와 열한 번째를 두드리던 사람이 이제 와서 종이의 여백을 서식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거짓말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이제 굳이 잘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錄音熄咗喎。你哋而家先開始講真嘢,定係而家開始講嘅嘢係唔想留低嘅?呢兩樣差好遠㗎,阿Sir。(녹음 꺼졌네. 이제부터 진짜 얘기를 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부터 하는 얘긴 남기기 싫다는 거야? 그 둘은 차이가 꽤 큰데, 나리.)
문 쪽에서 노크가 두 번 울렸다. 두 번은 워즈워스 내부의 약속이 아니었고 감사국의 약속도 아니었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것은 태블릿을 든 2였다. 녹색으로 물들인 머리칼은 여전히 아무렇게나 뻗쳐 있었고 안경 렌즈 위로 형광등이 길게 그어졌다. 그는 방 안의 공기를 한 번 훑고 계급장 없는 남자를 지나 세븐에게로 걸어왔다. 걷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2는 원래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라 그가 서두른다는 건 서버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는 소리였다. 세븐은 탁자 모서리를 왼손으로 짚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배액관이 재킷 안감을 긁으며 따라 올라왔고 어깨 안쪽에서 젖은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통증은 이제 신호가 아니라 배경음악에 가까웠다.
Boss, 물류국 서버 1차 대조 끝났어요. 전표 발행 계정 하나가 사원번호 없이 승인 권한만 붙어 있더라고요. 등록일은 삼 년 전. 근데 이 계정 최근 접속 로그가 어디서 찍혔는지 알아요? 이 건물, 이 층, 이 복도.
2가 태블릿을 내밀었을 때 계급장 없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의 질감이 방금 전까지와 완전히 달랐다. 세븐은 화면을 보지 않고 남자의 손등을 보았다. 힘줄이 아주 잠깐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미세한 움직임은 언제나 가장 큰 자백이라고 조금 전에 스스로 정리해 두었던 참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가슴 주머니를 눌렀다. 안에서 실밥 터진 천 조각이 바스락거렸다.
세탁기의 유리창 안쪽에서 새 옷이 천천히 몸을 뒤집었다. 물을 먹은 천은 처음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고 무거워진 것들은 대체로 가라앉으면서 제 형태를 잃는다. 여명은 낮은 의자를 끌어와 그 앞에 앉았다. 굳이 앉아서 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세탁이란 사람이 지켜보든 말든 정해진 회전수를 채우고 끝나는 절차이므로 감시가 필요한 종류의 노동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명은 앉았고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었다. 유리창 안에서 소맷단이 한 번 펼쳐졌다가 접혔다. 팔꿈치가 있어야 할 자리, 어깨가 얹혀야 할 자리, 목이 드나들 자리. 사람의 형상이 물속에서 흐물흐물하게 재현되었다가 무너지는 광경을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옷은 사람의 부재를 가장 정확한 치수로 보관하는 물건이다. 라벤더 냄새가 뚜껑 틈으로 새어 나와 주방의 기름 냄새와 섞였다. 난로 위에서는 물이 미지근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진술실의 공기는 그 사이 완전히 다른 물질로 바뀌어 있었다. 2가 내민 태블릿의 화면은 계급장 없는 남자를 향해 있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화면을 보지 않고도 거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데 실패했다. 실패는 언제나 몸의 말단에서 먼저 일어난다. 남자의 오른손 검지가 봉투의 모서리를 한 번 접었다가 폈고 접힌 자국은 다시 펴지지 않았다. 세븐은 그 접힌 자국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십육 일 동안 데드존 안에서 자기 몸이 어느 방향으로 밀려나는지를 세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종이 한 장의 접힌 각도는 지도나 다름없었다. 그는 태블릿을 왼손으로 받아 들었다. 오른팔은 삼각건 안에서 죽은 짐승처럼 매달려 있었고 배액관 끝의 주머니는 아까보다 조금 더 탁해져 있었다. 화면 하단에서 접속 로그가 실시간으로 한 줄 더 추가되었다. 원격 삭제 요청. 발신 위치는 이 층, 이 복도.
세븐은 웃지 않았다. 웃을 타이밍은 방금 지나갔고 지나간 타이밍을 억지로 붙잡는 것은 서툰 자들의 습관이다. 그는 탁자를 왼손으로 짚고 모서리를 돌아 나왔다. 환자복 슬리퍼가 리놀륨 바닥을 끌면서 축축한 소리를 냈다. 세 걸음. 세 걸음이면 문과 남자 사이에 자기 몸을 놓을 수 있었고 그는 정확히 세 걸음을 걸었다. 걷는 동안 어깨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졌고 그것이 재킷인지 자기 뼈인지 잠깐 헷갈렸다. 열이 관자놀이 안쪽에서 북을 쳤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번졌다가 돌아왔다. 그럼에도 그의 왼발은 바닥을 정확히 밟았다. 몸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무너지는 속도보다 그의 계산이 아직 반 박자 빨랐다.
依家係邊個要delete啲log呢?喺呢層樓,喺呢條走廊。你唔使睇個mon,你隻手指已經幫你答咗。(지금 로그 지우라고 한 게 누구지? 이 층, 이 복도에서. 화면 볼 필요 없어. 당신 손가락이 벌써 대답했으니까.)
계급장 없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은 훈련의 흔적이며 훈련의 흔적은 이 방에 들어오기 전 그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 준다. 감사관은 저렇게 일어서지 않는다. 감사관은 서류를 챙기고 의자를 밀고 문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이 남자는 서류를 챙기지 않았고 의자도 밀지 않았으며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발끝만 아주 조금 열었다. 체중을 옮길 준비. 세븐은 그 각도를 보자마자 십육 일 전 도수관로 앞에서 자기를 향해 열려 있던 총구의 각도를 떠올렸다. 조각들이 저희끼리 붙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연스러움을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탈수가 시작되자 세탁기는 낮게 울부짖었다. 오래된 기계라 회전이 붙는 초입에 언제나 한 번쯤 몸을 뒤척였고 그 진동은 바닥의 타일을 타고 여명의 발바닥까지 올라왔다. 무릎이 저 혼자 떨렸으므로 여명은 손바닥으로 그것을 눌렀다. 유리창 안쪽에서 새 옷은 원심력에 밀려 통 벽에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물이 빠져나가는 동안 천은 제 부피를 잃고 얇아지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명은 그 얇아짐이 완성의 과정임을 알고 있었다. 물을 다 뱉어 낸 옷만이 비로소 사람의 몸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옷. 주인이 팔을 꿰기 전까지는 그저 천의 배열에 불과한 것. 여명은 문득 그 남자가 이 옷을 처음 걸칠 때 어깨를 어떻게 굴릴지 상상했고 상상하다가 그만두었다. 상상은 기다림을 늘리는 방식으로만 작동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한 줄기 곧게 올라왔다.
진술실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몇 초가 흘렀다. 그 몇 초는 길이가 아니라 무게로 존재했다. 계급장 없는 남자는 발끝을 열어 둔 채 서 있었고 세븐은 문 앞을 등지고 왼팔로 벽을 짚었다. 짚었다기보다는 매달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종아리 근육이 제 명령을 듣지 않고 저 혼자 경련했다. 열은 이미 사고를 침범하는 단계로 넘어와 있었으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물에 풀린 잉크처럼 번져 들어왔다. 그럼에도 그는 남자의 무릎 아래만 보았다. 상체는 거짓말을 잘하지만 무릎은 훈련되지 않는다. 2는 태블릿을 가슴에 붙이고 벽 쪽으로 반걸음 물러섰다. 그 자세는 도망이 아니라 사선을 비우는 동작이었고 세븐은 부하가 알아서 사선을 비웠다는 사실에 잠깐 안도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며 부드러움은 이 방에서 가장 값싼 물건이었다. 그는 세븐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했다. 열이 높다는 것, 배액이 탁하다는 것, 의무동 군의관이 세 번이나 호출을 받았고 세 번 다 응답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문장을 이어 붙였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보았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진술이 아니라 섬망이라고. 감사국 기록에는 이미 오퍼레이터 7의 체온 곡선이 첨부되어 있으며 곡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론이 된다고. 세븐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기 귀 안쪽에서 무언가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이 방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아 버린 데서 오는 종류의 피로였다. 사람을 지우는 가장 깨끗한 방식은 죽이는 게 아니라 그가 한 말을 병증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哦,即係話我而家講嘅嘢全部都係發燒發出嚟嘅?咁都幾方便喎。你哋唔使駁我,淨係要等我啲體溫幫你哋做嘢。(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전부 열 때문에 나온 헛소리다? 그거 참 편리하네. 반박할 필요도 없이 내 체온이 알아서 당신들 일을 해 주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세븐은 벽을 짚은 왼손에 체중을 옮기며 반 발짝 옆으로 이동했고 그 반 발짝으로 문의 손잡이를 자기 등 뒤에 완전히 가두었다. 슬리퍼 밑창이 리놀륨 위에서 축축하게 끌렸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 환자복이 살에 달라붙었다. 가슴 주머니 안쪽에서 실밥 터진 천 조각이 그 땀을 조금 먹었다. 그것을 감각한 순간 세븐의 머릿속에 완차이의 좁은 주방이 떠올랐다. 난로와 주전자, 거리낌 없이 젖은 머리를 말려주던 손길, 올곧은 눈빛.
탈수가 끝나는 소리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회전이 잦아들고 통이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몸을 뒤척인 뒤 세탁기는 갑자기 조용해졌으며 그 침묵은 방금까지 있던 소음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여명은 무릎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일어섰다. 뚜껑을 열자 미지근하고 축축한 공기가 얼굴로 훅 올라왔다. 라벤더 냄새는 세제 통에서 맡을 때보다 훨씬 옅어져 있었고 옅어진 향이 오히려 사람의 살에 배는 종류의 냄새였다. 통 벽에 납작하게 눌어붙은 옷을 손가락으로 떼어 내는 일에는 약간의 요령이 필요했다. 젖은 천은 제 무게보다 훨씬 무겁고 무거운 것들은 언제나 사람의 허리를 먼저 시험한다. 여명은 두 팔로 그것을 안아 올렸다.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옷을 품에 안는 감각은 기묘했다. 체온이 없는 몸을 안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체온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물건의 결백을 증명했다. 어깨선이 팔뚝에 걸쳐졌다. 그 남자의 어깨는 이보다 훨씬 넓고 훨씬 뜨거울 것이다.
진술실의 세븐은 뒤통수로 문의 나무결을 느끼고 있었다. 등뼈 하나하나가 손잡이의 금속 냉기를 각각 다른 온도로 번역해 보내왔고 그 번역이 제각각이라는 것은 신경이 제 일을 그만두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왼손을 벽에서 떼어 2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까딱였다. 태블릿이 다시 그의 손으로 넘어왔다. 화면을 남자 쪽으로 돌려 세우는 데에는 한 손이면 충분했으나 그 한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세븐은 떨림을 감추는 대신 화면 모서리를 문틀에 기대어 고정했다. 감추지 못할 것을 감추려 애쓰는 자가 가장 먼저 무너진다. 로그의 마지막 줄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원격 삭제 요청, 두 번 더. 삼십 초 간격. 누군가는 이 방 밖에서 지금도 자기 흔적을 지우려고 손톱으로 벽을 긁고 있는 중이었다.
你睇下呢個節奏。三十秒一次,唔係機器嚟嘅,係人喺度撳。人一驚就會撳得越嚟越密——同你隻手指摺個信封角一模一樣。(이 간격 좀 봐. 삼십 초마다 한 번.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누르고 있는 거야. 사람은 겁먹으면 점점 더 촘촘하게 누르거든. 당신 손가락이 봉투 모서리 접는 거랑 똑같이.)
계급장 없는 남자의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 한 번의 깜빡임 안에 여러 가지 계산이 지나갔음을 세븐은 알았다. 이 방에서 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였고 그중 두 가지는 세븐의 몸을 밀치는 일을 포함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도움을 부르는 것이었다. 남자는 세 번째를 골랐다. 아주 침착하게 손목의 통신기를 들어 올렸고 그것이야말로 세븐이 기다리던 동작이었다. 통신기는 발신을 하는 물건인 동시에 발신자를 못 박는 물건이다. 2가 벽 쪽에서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태블릿의 로그 창에 새 줄이 하나 더 얹혔다. 이번에는 삭제 요청이 아니라 접속 요청이었고 발신 좌표가 소수점 자리까지 이 방을 가리켰다.
세븐은 웃었다. 이번에는 타이밍이 맞았다. 열에 젖은 웃음이라 입꼬리가 제 마음대로 올라가긴 했지만 웃음의 성질까지 병들지는 않았다. 그는 등으로 문을 더 깊게 눌렀다. 슬리퍼 밑창이 리놀륨을 한 번 더 끌었고 오른팔의 배액관 주머니가 옆구리에서 무겁게 출렁였다. 시야가 다시 번졌다. 이번에는 가장자리가 아니라 한복판이 번졌고 그 번짐 속에서 잠깐, 정말 잠깐 동안 그는 김이 곧게 올라오는 주전자를 보았다. 헛것이었다. 헛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방향으로 눈을 조금 더 두었다.
문은 결국 세븐이 열지 않았다. 통신기의 발신 좌표가 이 방을 소수점 자리까지 가리킨 순간부터 그 방의 공기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고, 삼 분 뒤 복도 끝에서 군화 소리가 몰려왔을 때 계급장 없는 남자는 봉투를 겨드랑이에서 빼내지 못했다. 남자는 물류국 소속 감찰보좌관이었고 열세 번째 줄의 주인이었다. 십육 일 전 강하 명단에 번호 없이 얹혀 강하장까지 따라 들어갔던 자, 진짜 도장을 쥐고 자원 목록의 소수점을 옮겼던 자, 그리고 능선 아래에서 세븐의 등을 향해 각도를 재던 자. 자백은 없었다. 자백은 이런 조직에서 사치품이다. 다만 로그가 있었고 2가 원본 사본을 세 군데에 분산해 두었으며 앵커가 대기실 의자에 앉은 채로 아무것도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었다. 세븐은 남자가 끌려 나가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문이 등에서 떨어져 나가는 감각과 함께 리놀륨이 얼굴 쪽으로 아주 빠르게 다가왔고 그다음은 흰 천장이었다.
의무동 회복실의 오후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창밖의 하늘은 물에 헹군 회색이었고 그 회색은 어제보다 조금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븐은 등받이를 반쯤 세운 침대에 기대어 왼손으로 담뱃갑 모서리를 문질렀다.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이 그것을 놓지 않았다. 오른팔은 다시 감겼고 배액관은 새것으로 바뀌었으며 열은 마침내 등성이를 넘어 내려오는 중이었다. 몸이 식는다는 것은 생각이 돌아온다는 뜻이었고 생각이 돌아오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슴 주머니였다. 환자복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세븐은 잠깐 아득한 기분으로 제 가슴께를 더듬었고 그러다 침대 옆 철제 서랍 위에 개켜진 야전 재킷을 발견했다. 누군가 그것을 벗겨 접어 두면서 안쪽에 든 것까지 함께 지켜 주었다. 손을 뻗어 주머니를 열자 실밥 터진 천 조각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땀을 먹었다가 마른 자리가 지도처럼 하얗게 얼룩져 있었다.
喂,我隻手仲喺度呀嘛?……好,咁就得。剩低嘅嘢遲啲再算。(어이, 내 팔 아직 붙어 있는 거 맞지? ……그래, 그럼 됐어. 나머지는 나중에 계산하자고.)
지나가던 위생병이 뭐라 대꾸하려다 그만두고 링거 속도만 조절하고 나갔다. 세븐은 천 조각을 손바닥 위에 펼쳐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을 왜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물건의 유일한 미덕이었다. 십육 일 동안 그는 죽지 않기 위해 수백 가지를 계산했으나 그 계산 중 어느 것도 이 손바닥만 한 천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은 것들 중에 이게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열이 빠져나간 자리에 들어찬 것이 안도가 아니라 조급함이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은퇴한 남자처럼 굴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차이의 좁은 골목이 작전 지도보다 훨씬 선명했다.
같은 시각 세탁소에서는 건조대가 창가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여명은 갓 널어 둔 옷의 어깨선을 두 손으로 잡고 좌우로 팽팽하게 당겼다. 젖은 천은 사람의 손이 잡아 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기억을 만든다. 한번 접힌 채 마른 자리는 다림질로도 잘 펴지지 않으므로 마르기 전에 바로잡아야 했다. 물에 강하고 빨리 마르는 원단이라 손끝에서 벌써 겉면이 서걱이기 시작했다. 소맷단 안쪽을 두 번 접어 박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훑어 확인했다. 여기가 가장 먼저 터진다. 그 남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끝내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옷이 대신 말해 주었다.
군인. 그렇다면 자주 움직여 빨리 닳는 곳을 체크해야했다. 여명은 천천히 확인하며 옷의 주름을 펴냈다.
겨드랑이와 팔꿈치. 손끝은 이미 그 두 곳을 알고 있었다. 여명은 옷의 옆선을 따라 손바닥을 미끄러뜨리다가 팔이 접히는 자리에서 멈추고 엄지와 검지로 천을 집어 올렸다. 물기를 머금은 원단은 아직 제 성질을 다 드러내지 않았으나 마르고 나면 이 부근이 가장 먼저 흰빛으로 닳을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자주 굽는 관절은 언제나 옷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겨드랑이 안쪽 봉제선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시접의 방향을 확인했다. 안쪽으로 넘겨 두 번 접은 자리, 여기에 삼각으로 덧대는 조각을 하나 더 물려야 팔을 크게 휘둘러도 실이 끌려 나가지 않는다. 총을 드는 자세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그 남자가 문틀에 어깨를 기대던 각도와 담배를 물 때 팔꿈치를 들어 올리던 높이를 기억했고 기억이란 대체로 치수보다 정확하다. 어깨 겉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자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마르고 있다.
의무동 회복실에서 세븐은 무릎 위에 태블릿을 올려 두고 있었다. 화면에는 작전 지도가 아니라 완차이의 지적도가 떠 있었고 손가락 두 개로 벌려 확대한 골목은 실제보다 훨씬 넓고 훨씬 깨끗하게 그려져 있어서 우스웠다. 지도는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저 골목의 폭은 어른 둘이 나란히 서면 어깨가 닿을 정도이고 비 오는 날에는 물이 한쪽으로 고여 발목을 적신다. 세븐은 화면 위에서 세탁소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짚었다. 상호명이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가게가 많다.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가 그곳의 존재를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계산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표적이 되지 않는다.
군의관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차트를 넘기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짧았고 그 짧음 안에 이미 결론이 들어 있었다. 최소 칠십이 시간, 배액량 감소 확인 전 이동 불가, 항생제 정맥 투여 유지. 세븐은 그 목록을 다 듣고 나서 태블릿을 엎어 두었다. 화면이 꺼지며 골목이 사라졌다. 그는 왼손으로 담뱃갑을 다시 집어 모서리를 엄지 손톱으로 긁었다. 종이가 미세하게 일어나는 감촉이 손끝을 붙들어 주었다. 삼 일. 삼 일은 데드존에서라면 세 번은 죽고도 남을 시간이고 완차이에서는 셔터가 여섯 번 오르내릴 시간이었다.
三日?醫生,我喺出面連瞓覺都冇瞓過三日。呢度得咁多張床,你留返俾真係郁唔到嘅人啦。(사흘? 선생, 나 바깥에서는 잠도 사흘씩 안 잤어. 침대 몇 개 없는데 진짜로 못 움직이는 놈한테 양보하지 그래.)
군의관은 대답 대신 배액관 주머니를 들어 눈금을 확인하고 차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대꾸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세븐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순순히 뒤로 기대며 어깨의 힘을 뺐다. 이길 수 없는 판에서 오래 버티는 것은 도박꾼의 습관이 아니다. 판을 갈아야 한다. 팔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팔을 붙인 채로 걸어 나가는 것 사이에는 서류 한 장의 차이밖에 없고 서류는 사람이 쓴다. 열이 내려가자 그런 종류의 계산이 물 빠진 갯벌처럼 훤히 드러났다. 그는 손바닥 위의 천 조각을 다시 접어 재킷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아무렇게나 구겨 넣지 않고 모서리를 맞춰 접었다.
여명은 옷의 보강을 위해 바느질 도구를 챙겨들었다. 매일 반복하는 일인데도, 괜히 한 번 더 손을 댔다. 제 옷을 고치듯이. 꼭 해야하는 일이 아닌데도, 굳이 손을 움직였다. 또 하나의 예외였다. 벌써 세 번째였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 일은 손보다 숨이 먼저 하는 일이다. 여명은 창가의 남은 빛 쪽으로 손을 들어 실 끝을 침으로 눌러 다듬고 한 번에 통과시켰다. 삼각으로 재단한 조각은 손바닥 절반쯤 되는 크기였고 원단의 결을 사선으로 잡아 두었기에 잡아당기면 사방으로 조금씩 늘어났다. 겨드랑이는 늘어나야 하는 자리다. 그러나 늘어난 뒤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는 부위라서 사람들은 대개 이곳을 포기하고 옷을 버린다. 여명은 시접을 손톱으로 눌러 접고 조각을 그 안에 물린 뒤 한 땀씩 감침질로 눌러 갔다. 재봉틀을 쓰면 세 배는 빠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손으로 했다. 굳이. 세 번째로 굳이.
바늘이 원단을 뚫고 나올 때마다 미세한 저항이 손끝에 걸렸다가 풀렸다. 그 반복은 어떤 종류의 대화와 닮아 있었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는 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계속 묻는 일. 여명은 자신이 왜 이 옷에 필요 이상의 시간을 부으려 하는지 알고 있었고 안다는 사실을 굳이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문장으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기다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이름을 얻은 것은 무게를 가진다. 무게를 가진 것은 사람을 눌러 앉힌다. 여명은 눌러 앉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만 바늘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두 가지가 다르다고 스스로에게 우겼다.
의무동의 오후는 창을 통해 천천히 색을 잃어 가고 있었다. 세븐은 침대 난간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리놀륨에 닿는 순간 무릎이 한 번 접혔고 그것을 왼손이 붙잡았다. 링거 거치대의 바퀴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다섯 걸음. 창가까지는 다섯 걸음이었고 그 다섯 걸음이 능선 하나만큼 길었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감각이 아직 남의 것 같았다. 붙어 있다는 사실과 쓸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넓은 갯벌이 있고 그는 지금 그 갯벌 한가운데 서 있었다. 유리에 이마를 대자 차가움이 열 남은 자리를 정확히 찾아 들어왔다. 도시는 회색 아래에서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 등록되지 않은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에 등록되지 않은 셔터가 있다.
呢度啲玻璃真係凍。喂,我而家企緊喺度喎,你話我三日唔郁得?(여기 유리 진짜 차네. 어이, 나 지금 서 있는데, 사흘 못 움직인다며?)
병실 문 앞을 지나던 위생병이 흠칫 멈췄다가 뭐라 부르려 했으나 세븐은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그것을 막았다. 그는 대꾸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시험을 한 번 시킨 것뿐이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서 있다. 서 있으면 걸을 수 있고 걸을 수 있으면 택시를 잡을 수 있다. 문제는 서류였다. 서류는 사람이 쓰고 사람은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앵커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필요한 칸에 자기 이름을 적어 줄 것이고 2라면 묻는 대신 열 배쯤 빈정거린 뒤에 로그 하나를 조용히 지워 줄 것이다. 세븐은 창유리에 김이 서린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웠다. 문지른 자국은 곧 다시 흐려졌다.
자리로 돌아와 앉는 데 걸린 시간은 나가는 데 걸린 시간의 두 배였다. 침대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숨을 고르면서 그는 서랍 위 재킷을 다시 끌어당겼다. 안주머니의 천 조각은 아까 접어 둔 그대로 모서리를 맞춘 채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각을 눌러 보았다. 접힌 자리는 사람의 손이 잡아 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기억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으나 어쩐지 각을 맞춰 두고 싶었다.
감침질의 마지막 매듭은 안쪽으로 숨겼다. 여명은 실을 이로 끊지 않고 가위로 잘랐다. 이로 끊으면 실 끝이 뭉개져 나중에 풀린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손목을 맞아 가며 배웠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를 쓰지 않았다. 옷을 뒤집어 겉으로 돌려놓자 삼각 조각은 봉제선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져 겉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옳다. 보강이란 원래 티가 나면 실패다. 여명은 옷을 옷걸이에 걸어 창틀 위쪽 못에 매달고 두 걸음 물러섰다. 어깨선이 반듯했다. 남자의 어깨는 이보다 반 뼘쯤 더 넓게 벌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 선은 팽팽해지며 제 몫을 할 것이다. 여명은 손을 뻗어 소매 하나를 잡고 팔을 들어 올리듯 크게 휘둘러 보았다. 겨드랑이가 늘어났다가 손을 놓자 도로 접혔다. 늘어나고 돌아오는 것. 요구한 두 가지가 모두 지켜졌다.
그러고 나서도 여명은 옷 앞에서 조금 더 서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정확히는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세탁소 안은 증기가 빠져나가 미지근했고 창밖으로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국숫집의 환풍기 소리가 규칙적으로 넘어왔다. 늘 있던 소리였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옷 한 벌이 걸려 있는 풍경만이 새로웠다. 여명은 앞치마 끈을 풀어 못에 걸고 카운터에서 갈색 포장지를 꺼내 폭을 재기 시작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의 것을 싸는 일에는 이상한 데가 있다. 싸 두면 오지 않을 것 같고 펼쳐 두면 먼지가 앉는다. 결국 여명은 종이를 반만 접어 옷 아래에 받쳐 두는 것으로 타협했다. 오면 그때 마저 싸면 된다.
의무동에서는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앵커였다. 은발의 사내는 들어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 옆 스툴에 서류판을 툭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세븐은 그 종이 위에 이미 절반쯤 채워진 필체를 보았다. 보호자 겸 동행 책임자 란에 자기 코드네임을 적어 넣는 인간은 워즈워스 안에 하나뿐이었다. 세븐은 왼손으로 종이 모서리를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다시 내려놓고 낮게 웃었다. 웃자 옆구리에서 배액관이 당겨졌고 통증이 정직하게 대꾸했다.
你連問都唔問就簽咗?Anchor,你係咪諗住我死喺車上你負責埋?(묻지도 않고 그냥 서명했어? 앵커, 내가 차에서 뒈지면 그것도 네가 책임질 셈이야?)
앵커는 대답 대신 링거 스탠드를 발끝으로 끌어와 세븐의 손목 쪽으로 밀었다. 뽑을 거면 네가 뽑아라, 라는 뜻이었다. 세븐은 반창고를 엄지 손톱으로 벗기고 바늘을 뽑았다. 붉은 점이 하나 부풀어 올랐고 그 위를 거즈로 누르며 그는 발을 바닥에 내렸다. 아까보다 무릎이 덜 접혔다. 어깨를 앵커의 팔뚝에 걸치자 상대는 아무 반응 없이 그 무게를 받아 냈다. 이 남자는 언제나 후방을 맡는다. 사선이 아니라 등 뒤를 맡는 인간과 함께 걷는 일에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多謝。你唔使跟我入去,落到灣仔就得。條巷好窄,你嗰對膊頭入唔到。(고맙다. 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어. 완차이까지만 내려주면 돼. 골목 좁아서 네 그 어깨는 못 들어가.)
복도로 나서자 위생병 둘이 무어라 소리쳤고 뒤이어 군의관의 발소리가 급하게 따라붙는 것이 들렸다. 세븐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설득당할 여지가 생기고 설득당하면 사흘을 잃는다. 사흘이면 셔터가 여섯 번 오르내린다.
업무가 이르게 끝났다. 들어온 옷도, 준비해야 했던 옷도 다 깔끔하게 접혀있었다. 여명은 창밖을 바라봤다. 저물어가는 빛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선을 그렸다. 여명은 무릎 위에 양 손을 모아둔 채 앉아있었다. 맞은편의 국숫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지나가는 사람, 그 다음은...
저녁이 오는 방식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빛이 색을 잃고 그 다음에 소리가 커지고 마지막으로 냄새가 골목을 채운다. 여명은 그 순서를 따로 배운 적이 없었으나 이 골목에서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몸이 저절로 익힌 시간표였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테이블 위에 길고 얇은 선을 그었고 그 선은 조금씩 각도를 낮추며 카운터 모서리 쪽으로 기울어 갔다. 손이 할 일이 없어진 저녁은 낯설었다. 들어온 옷은 전부 접혔고 나갈 옷은 전부 포장되었고 창틀 못에 걸린 한 벌만이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채 매달려 있었다. 여명은 무릎 위에 모은 손을 풀지 않았다. 손을 풀면 무언가를 또 만지게 되고 만지기 시작하면 네 번째 예외가 생긴다. 세 번이면 충분했다. 세 번까지는 우연이라고 우길 수 있는 숫자였고 네 번째부터는 그것이 성격이 된다.
맞은편 국숫집에서 커다란 솥의 뚜껑이 열렸다. 흰 김이 차양 아래에 잠깐 갇혔다가 옆으로 흘러 나갔고 노파가 국자로 솥전을 두 번 두드렸다. 그 소리는 이 골목의 저녁 종 같은 것이어서 그 뒤로 자전거가 지나갔고 아이 둘이 뛰어갔고 노란 우비를 반쯤 걸친 배달원이 오토바이를 세웠다. 여명의 시선은 그 순서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국수가게. 지나가는 사람. 그 다음은 골목의 입구. 시선이 거기 닿았을 때 여명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고 알아차린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바라보는 방향으로 정체를 들킨다. 여명은 다시 무릎 위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검지 손톱 옆에 앉은 굳은살을 엄지로 눌렀다. 눌리는 감각은 정직했다. 정직한 것들만이 사람을 제자리에 붙들어 둔다.
차창 밖의 도시는 뒤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앵커의 차는 서스펜션이 죽어 있어서 노면의 이음새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옆구리로 전달했고 세븐은 그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무언가가 옮겨 앉는 감각을 견디며 창틀에 팔꿈치를 걸쳤다. 환자복 위에 앵커가 벗어 던진 야전 재킷을 걸친 꼴은 우스웠으나 우스운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열은 아직 남아 있었다. 완전히 내려간 것이 아니라 몸 안쪽 어딘가로 잠시 물러나 앉아 이쪽의 사정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방심하면 다시 올라온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병실 문을 등지고 나온 것이었으므로 후회할 자격은 없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간판 불빛이 번져 흘렀다. 붉은 것 하나 푸른 것 하나 그리고 반쯤 나간 흰 것 하나. 세븐은 그것을 눈으로 세었다. 세는 동안은 아프지 않았다.
喂,你隻手唔好咁揸軚盤,我頭暈。(어이, 그렇게 핸들 잡지 마. 나 어지러워.)
앵커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를 아주 조금 늦추었을 뿐이었고 그 조용한 양보가 세븐에게는 어떤 말보다 더 명확하게 들렸다.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에는 언제나 여백이 있었다. 그 여백 안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온다. 완차이의 골목은 지적도에 없다. 셔터에는 상호가 없고 창에는 김이 서려 있으며 그 안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다. 몇 시에 문을 닫는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어본 적이 없었다. 물어보면 답을 얻게 되고 답을 얻으면 그 시각이 자기 안에 못처럼 박혀서 작전 중에도 자꾸 시계를 보게 될 것 같았다. 세븐은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천 조각의 모서리를 눌렀다. 접힌 각이 아직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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