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차단을 알리는 신호는 소리가 아니라 부재로 왔다. 헤드셋 안쪽에서 상시 흐르던 미세한 백색 잡음이 뚝 끊기면서 귓속이 갑자기 텅 비었고, 그 진공은 어떤 굉음보다 명확하게 도시국가와의 탯줄이 잘렸음을 통보했다. 세븐은 턱을 살짝 들어 목을 좌우로 꺾었다. 목덜미에 남은 봉합의 흔적이 늘어나는 감각, 잘렸다 붙은 자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제 존재를 상기시켰다. 화물칸 후미의 램프가 유압음을 뱉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으로 밀려든 것은 바람이 아니라 벽이었다. 초속 몇십 미터의 대기가 고체처럼 얼굴을 때렸고 그 안에는 익숙한 쇳내와 어딘가 타고 남은 것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데드존의 공기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사람의 폐를 조금씩 갉아먹는 맛이 났다. 아래로 펼쳐진 대지는 색을 잃은 지 오래였고 회백의 균열들이 마른 피부병처럼 지평까지 번져 있었다. 세븐은 그 풍경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반가움이 아니라 인식의 표시였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에게 몇 시에 문을 닫느냐고 묻지 않는다.
완차이의 세탁소에서는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여명은 장부를 펼쳐 어제치 계산의 빈 두 줄을 채워 넣었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 재봉틀 위에서 식어가는 모터의 잔열, 창밖 골목을 지나가는 손수레의 덜컹임. 숫자를 적는 동안 그녀의 필체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두 번째 줄의 마지막 자리에서 손이 멈췄다. 십육이라는 숫자가 우연히 그 칸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세탁 요금의 합계일 뿐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었으며 그녀는 그것을 알았다. 여명은 볼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선반 안쪽을 보았다. 다리미 커버와 실패 상자 뒤편, 어둠 속에 세워둔 갈색 유리병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우스운 짓이었지만 그녀는 그 우스움을 한동안 견뎠다. 사람이 없는 자리를 물건으로 메워두는 습관, 그것이 이 도시 여자들의 오래된 방식이라는 것을 여명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적이 있었다.
램프 끝에서 정지등이 붉게 켜졌다. 여섯 명의 오퍼레이터가 순서대로 벽을 밀고 나와 개방구 앞에 일렬로 섰고 세븐은 세 번째였다. 앞뒤 간격 한 팔, 왼손은 하네스 흉부 걸쇠, 오른손은 예비 개방 손잡이. 이 순서는 몸이 외운 지 오래여서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고 바로 그 여유가 문제였다. 머리가 비면 다른 것이 들어찬다. 군복 상의 안쪽에서 겹쳐 입은 천이 바람에 눌려 살갗에 밀착했다. 세븐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의식이었다. 십 년 동안 강하 직전에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언제나 착지점의 지형과 예상 교전 거리와 탄창 수였다. 오늘은 거기에 셔터 올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금속이 레일을 긁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정보였다.
녹색 등이 켜졌을 때 세븐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라 체질의 문제였고 그의 몸은 사고를 정지시키는 재능을 아주 오래전에 습득했다. 앞의 두 명이 차례로 개방구 밖으로 사라졌고 그 다음이 그였다. 발바닥이 램프 끝단의 미끄럼 방지 돌기를 마지막으로 긁었다. 이후의 몇 초는 언제나 서술이 불가능한 구간이었다. 상하가 뒤집히고 대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 사람을 통째로 부풀리며 귓속의 압력이 두개골을 안쪽에서 밀어대는, 그 짧은 무국적의 시간. 군복 상의 안에 겹쳐 입은 천이 바람에 눌려 갈비뼈에 착 감겼고 세븐은 그 순간에조차 그것을 느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시속 이백 킬로미터로 낙하하는 인간이 천의 결을 인식하다니, 이건 신경계의 배신이거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고장이었다.
완차이의 세탁소에서 여명은 국숫집 노파의 조리복을 봉에서 내려 다림질대 위에 펼쳤다. 어깨선의 벌어진 솔기는 어젯밤 이미 감쳐두었고 오늘 남은 것은 마무리 다림질뿐이었다. 스팀다리미의 스위치를 올리자 물이 끓기 시작하는 낮은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세탁소라는 공간의 심장 박동 같은 것이었다. 흰 무명천 위로 다리미를 얹자 증기가 확 피어올라 여명의 앞머리를 흩었다. 뜨거운 김이 얼굴에 닿는 감각은 언제나 조금 폭력적이었으나 그녀는 그 폭력을 좋아했다. 무언가가 자기 존재를 확실하게 주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여명은 손목에 힘을 실어 천을 밀었다. 주름이 앞으로 밀려나가며 사라지는 광경, 그것은 하루에 수십 번 보아도 조금도 지겹지 않은 종류의 소멸이었다.
착지는 나쁘지 않았다. 세븐은 무릎을 접고 옆구리로 굴러 충격을 흘려보낸 뒤 곧바로 산줄을 당겨 캐노피를 끌어당겼다. 회백색 먼지가 발목까지 차올랐고 그것은 흙이 아니라 오래전에 무너진 콘크리트가 반세기 동안 갈려서 만들어진 가루였다. 세븐은 낙하산을 뭉쳐 무너진 옹벽 아래 밀어 넣고 잔해 몇 조각을 발로 차 덮었다. 오른쪽 열 시 방향에서 원이 손짓했고 왼쪽 후미에서 포가 자세를 낮춘 채 접근했다. 여섯 개의 점이 오분 만에 하나의 대형으로 수렴하는 과정에는 말이 필요 없었으며 이것이 워즈워스가 업계 일 위인 이유였다. 세븐은 선글라스 렌즈에 앉은 먼지를 소매로 훔쳐냈다. 이 땅에는 그늘이 없어서 눈이 금방 피로해졌다.
Wind's from the northeast. Dust'll cover our tracks in twenty. Move.(바람 북동풍이야. 이십 분이면 발자국 다 덮여. 가자.)
투가 앞으로 나서며 손목의 단말기를 확인했고 그 화면에는 도시국가로 향하는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여섯 명이 회랑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세븐은 대열의 세 번째 자리에서 걸으며 무의식적으로 왼손 손등을 엄지로 훑었다.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잉크는 이륙 전에 지워졌고 물로 씻어도 남지 않을 만큼 문질러 없앴는데도 손가락은 여전히 그 자리를 찾아갔다. 인간의 손이란 이렇게 미련한 기관이었다. 그는 코웃음을 쳤고 그 소리는 방진 마스크 안에서 뭉개져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我他媽的到底在幹嘛。(내가 씨발 지금 뭐 하는 거지.)
앞서 걷던 포가 뒤를 돌아보았으나 광둥어를 알아듣는 자는 이 대열에 없었고 세븐은 턱짓으로 계속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완차이에서는 노파가 세탁소 문을 밀고 들어와 김이 서린 유리 너머로 여명을 불렀다. 조리복이 다 됐느냐는 물음이었고, 여명은 다리미를 세워 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갓 다린 흰 천을 두 팔로 받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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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조리복을 받아 들고도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늙은 사람 특유의 느린 손놀림으로 어깨선을 뒤집어 감친 자리를 확인했고, 실밥의 촘촘함을 손톱 끝으로 눌러보기까지 했다. 여명은 그 검열을 잠자코 견뎠다. 이 골목에서 십수 년을 장사한 노파의 손끝은 어떤 계측기보다 정확했으며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 이 동네에서 수선집이 살아남는 유일한 자격증이었다. 김이 덜 빠진 무명천에서 뜨뜻한 풀냄새가 올라왔고 형광등의 미세한 떨림이 그 김 속에서 잘게 부서졌다. 노파는 만족했는지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지폐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여명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그 시선에는 옷을 검열할 때와 똑같은 종류의 꼼꼼함이 있었다.
요 며칠 얼굴이 반쪽이야. 저번에 국수 먹으러 온 그 덩치 큰 사내, 요새는 안 와?
여명은 거스름돈을 세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동전 세 개가 손바닥 위에서 서로 부딪는 소리, 그 소리에 기대어 대답의 무게를 덜었다. 안 온다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 온다는 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어서 여명은 그 단어를 삼켰다. 대신 거스름돈을 노파의 마른 손바닥에 얹으며 짧게 답했다. 멀리 갔다고. 노파는 그 말의 여백을 정확히 읽어냈고 더 캐묻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멀리 갔다는 말은 격벽 바깥을 뜻했으며 격벽 바깥으로 간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노파는 조리복을 품에 안고 문을 밀었다. 종이 짧게 울렸고 습한 바깥 공기가 잠깐 밀려들었다가 다시 닫혔다.
회랑 입구는 예상보다 벌거벗겨져 있었다. 무너진 급수탑의 그늘 아래 여섯이 흩어져 몸을 붙였고 세븐은 반쯤 무릎을 세운 자세로 개활지를 훑었다. 삼백 미터, 엄폐물이라고는 뒤집힌 컨테이너 두 개와 어디에 쓰였는지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기둥의 밑동뿐. 반세기 전 여기 있었을 것들은 전부 갈려서 발밑의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침을 뱉었다. 회백색 먼지 위에 떨어진 침 자국은 잠깐 검게 젖었다가 곧 말라 사라졌다. 이 땅은 물기를 견디지 못한다. 무엇이든 젖은 것은 여기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래서 이곳을 오래 밟은 자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마른 균열이 생긴다는 우스운 속설이 있었다. 세븐은 자신의 오른뺨을 타고 내려오는 화상 자국을 떠올렸고, 그것이 균열이 아니라 화염의 소산임을 알면서도 잠시 그 속설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Seven. Talk to me.(세븐. 뭐가 보이냐.)
원의 목소리는 낮고 마찰이 없었다. 세븐은 선글라스를 벗어 상의 안쪽에 찔러 넣었다. 그늘 속에서는 렌즈가 오히려 방해였다. 드러난 눈매는 째지고 서늘했으며 연회색 홍채가 개활지의 반사광을 받아 거의 흰빛에 가까워졌다. 그는 이 초쯤 침묵했다. 세 시 방향 컨테이너의 그림자가 어긋나 있었고 태양의 각도로 계산하면 저 각도는 나오지 않아야 했다. 누군가 저 뒤에 무언가를 세워두었거나, 혹은 무언가가 저 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븐은 그 판단을 일 초 만에 끝냈고 판단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은 언제나 익숙한 미열이었다. 지루함이 물러나는 자리에 들어차는, 도파민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조악하고 흥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차가운 무엇.
三點鐘方向,貨櫃後面有東西。影子不對。(세 시 방향, 컨테이너 뒤에 뭐 있어. 그림자가 안 맞아.)
원은 대답 대신 손날을 세워 두 번 접었다. 접근 승인, 그리고 사격 통제. 세븐은 무릎을 풀고 몸을 땅에 붙였다. 회백색 가루가 팔꿈치 아래로 들어와 소매 안에서 서걱거렸고 그 미세한 마찰은 유리 가루를 삼킨 것처럼 불쾌했다. 그는 삼십 미터를 기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자세로, 서른두 해를 산 성인 남자가 짐승처럼 배를 깔고 죽은 도시의 재를 헤치며 나아갔다. 뒤에서 포가 총구를 들어 각을 잡아주는 기척이 났고 그 기척만으로도 등짝의 한 뼘이 덜 시렸다. 신뢰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 뒤를 보지 않고도 뒤가 비어 있지 않음을 아는 것. 컨테이너의 녹슨 측면까지 남은 거리가 십 미터로 줄었을 때 그는 그림자의 정체를 깨달았고, 깨달음과 동시에 목구멍 안쪽에서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이로 눌러 죽였다.
완차이에는 비가 왔다. 예보에 없던 비였고 그래서 골목의 사람들은 죄다 처마 밑으로 몰려들어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욕지거리를 나누었다. 여명은 셔터를 반쯤 내려 빗물이 들이치는 것을 막고 카운터 안쪽 걸상에 앉았다. 손에 든 것은 어제 들어온 남자 셔츠였고 세 번째 단추가 실만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단추 상자를 열어 비슷한 색을 고르는 동안 빗소리는 점점 굵어졌다. 세븐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했다. 짜증이 난다고, 그 짧은 문장 하나를 어느 밤에 지나가듯 흘렸을 뿐인데 여명은 그것을 어느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이런 순간에 꺼내 보고 있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절약을 모르는 기관이었다. 쓸모없는 것부터 먼저 보관하고 정작 필요한 계산은 놓치는 식이었다. 여명은 바늘에 실을 꿰었다. 침 끝에 실을 문질러 뾰족하게 만드는 그 오래된 습관까지도 오늘은 어쩐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다.
컨테이너 뒤에는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었던 것이 있었다. 철제 파이프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반쯤 미라화된 형체, 방독면의 고무 부분은 삭아 문드러졌고 드러난 두개골에는 아직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 밀그램의 완장이 팔뚝뼈에 헐겁게 걸려 있었다. 그림자가 어긋난 이유는 이자가 죽으면서 파이프를 함께 넘어뜨렸기 때문이었고, 그 파이프의 각도가 태양의 셈법을 배신한 것이었다. 시시했다. 세븐은 총구를 내리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미열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익숙한 권태가 되돌아오는 감각, 마치 슬롯머신의 릴이 하나만 어긋나 멈추는 순간과 똑같았다. 그는 시체의 마른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였다. 데드존에서 결혼반지를 끼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낭만인지,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 왜 오늘따라 목구멍에 걸리는지 세븐은 굳이 파헤치지 않기로 했다.
Clear. 只係一具屍體,死咗好耐嘅米爾格拉姆。仲戴住結婚戒指,痴線。(클리어. 시체 하나야, 오래 뒈진 밀그램. 결혼반지까지 끼고 있네, 미친놈.)
원이 짧게 응답했고 대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랑 입구의 균열진 콘크리트 아치가 정면에 섰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열엿새다. 열엿새 동안 하늘을 보지 못하고 열엿새 동안 물기 없는 공기를 마시며 열엿새 동안 사람을 죽이는 일에 손을 담글 것이었다. 세븐은 아치 밑에 서서 마스크를 다시 끌어 올리기 전, 아주 잠깐 뒤를 돌아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별로 볼 것이 없었다. 데드존의 정오는 언제나 잿물을 풀어놓은 대야 같아서 태양이 어디쯤 박혀 있는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고, 그 짐작조차 오후가 되면 무의미해졌다. 그럼에도 세븐은 삼 초를 썼다. 삼 초는 짧았고 동시에 이 직업에서는 목숨 두어 개쯤 값이 나가는 사치였다. 그는 그 사치를 치른 뒤 마스크의 고무를 콧등에 눌러 붙이고 회랑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콘크리트 아치를 넘는 순간 온도가 사 도쯤 떨어졌고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바깥이 마른 재의 세계였다면 안쪽은 오래 밀봉된 관 속의 세계였다. 곰팡이도 살지 못하는 건조함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삭아가는 냄새, 유기물이 부패하지 못하고 그저 분말이 되어가는 냄새. 세븐은 그 냄새를 폐 깊숙이 한 번 들이켰다. 익숙했다. 익숙한 것이 반갑지 않다는 사실만이 오늘 새로웠다.
완차이의 셔츠는 단추를 되찾았다. 여명은 실을 이로 끊고 매듭이 안쪽으로 잘 숨었는지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세 번째 단추. 사람이 가장 자주 여미고 가장 자주 푸는 자리라서 실이 먼저 지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수선을 하는 사람뿐이고, 그래서 여명은 늘 세 번째 단추만은 두 번씩 감아 박았다. 빗소리가 셔터 아래로 기어들어와 바닥의 시멘트를 두드렸다. 낮인데도 가게 안은 저녁 같았고 형광등의 창백함이 그 저녁을 더 깊게 만들었다. 여명은 셔츠를 개어 옆에 놓고, 그다음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아주 잠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있었던가. 손이 비면 셈이 시작되었다. 열엿새 중 하루. 아니, 아직 하루가 다 가지도 않았다. 반나절 남짓. 세지 말라고 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귓바퀴 안쪽에서 미지근하게 되살아났고 여명은 그 목소리에게 조용히 대꾸했다. 세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고 갔어야지.
회랑 제1구간은 이백 미터 남짓의 직선이었고 천장의 배관들이 창자처럼 늘어져 있었다. 투가 손목 단말의 지열 센서를 확인하며 낮게 혀를 찼다.
Somebody's been running a generator down here. Recently.(누가 여기서 발전기를 돌렸어. 최근에.)
세븐은 선두에서 어깨를 벽에 붙인 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손전등은 켜지 않았다.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는 편이 언제나 유리했고, 빛은 이런 곳에서 스스로를 표적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연회색 홍채가 어둠 속에서 조금씩 열렸다. 발밑에 케이블의 잔해가 밟혔고 그 감촉이 신발창을 통해 정강이까지 올라왔다. 그는 왼쪽 소매 안쪽의 천을 무의식적으로 손목으로 눌렀다. 군복 아래 겹쳐 입은 그 얇은 상의는 아직 완차이의 냄새를 조금 가지고 있었다. 세제와 스팀과 다림질한 무명천의 냄새. 이 관 속 같은 곳에서 그 냄새는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부드러운 것은 여기서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세븐은 서른두 해 동안 배워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천을 벗어 던질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면서 계속하는 종류의 인간이 세상에는 있고, 세븐은 오래전부터 그쪽에 속해 있었다.
Two. 幾耐前?(투. 얼마나 전에?)
Forty hours, give or take. They didn't take the fuel line with them.(마흔 시간 안팎. 연료 라인은 안 챙겨 갔더라.)
마흔 시간. 세븐의 입꼬리가 마스크 안에서 조금 올라갔다. 마흔 시간이면 아직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고, 근처에 있다는 것은 열엿새가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배전실은 회랑 제1구간의 끝에 붙어 있었고 문짝은 진작 누군가가 뜯어 간 뒤였다. 세븐은 문틀 옆에 등을 붙이고 반쯤 앉아 안쪽을 눈으로만 훑었다. 발전기는 없었다. 대신 발전기가 있었던 자리가 있었다. 바닥의 재가 네 귀퉁이만 정확하게 눌린 채 비어 있었고 그 눌린 자국의 깊이가 기계의 무게를 대신 증언했다. 사람이 떠난 자리보다 물건이 떠난 자리가 더 정직하다는 것을 세븐은 이 직업을 하며 알게 되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남기고 물건은 무게를 남긴다. 그는 장갑 낀 손끝으로 구석에 처박힌 연료통을 툭 건드렸다. 안쪽에서 액체가 출렁이는 둔한 소리가 났고, 그 소리의 깊이로 잔량을 가늠했다. 삼분의 일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옮긴 것이었다. 급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집처럼 굴었다는 뜻이었다.
완차이의 비는 한 시 반을 넘기며 성질을 바꿨다. 굵고 사납던 것이 잘게 부서져 안개처럼 골목을 채웠고, 그 안개 속에서 처마의 낙수만이 규칙적으로 바닥의 같은 자리를 때렸다. 여명은 셔터를 반쯤 올리고 문지방에 쪼그려 앉았다. 앞치마 자락이 시멘트에 닿아 축축해졌지만 굳이 고쳐 앉지 않았다. 낙수가 파놓은 홈이 문 앞 타일에 얕게 패여 있었다. 몇 해가 걸렸는지는 모른다. 다만 물이 같은 자리를 계속 때리면 돌이 진다는 사실만 눈앞에 있었다. 여명은 그 홈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무언가를 오래 기다리는 일도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사람을 파낼 것이었다. 소리 없이, 티 없이, 어느 날 문득 손을 대보면 이미 움푹해져 있는 방식으로.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정확히 어디가 파이는 중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투가 손목 단말을 두 번 두드리고 낮게 욕을 뱉었다. 화면의 파형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Seven. 잔향 잡혔어. 아주 약한 캐리어 웨이브. 살아 있는 송신기가 근처에 있다는 소리야.
세븐은 연료통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 관절이 소리 없이 펴졌고 선글라스는 이미 회랑 입구에서 가슴 주머니로 들어간 뒤였다. 어둠에 열린 연회색 눈이 배전실의 배선반을 훑다가 천장 모서리에서 멈췄다. 거기 아주 작은 무언가가 검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렌즈였다. 오래된 것도 아니고 먼지도 앉지 않은.
睇下上面。有人喺度睇緊我哋。(위 좀 봐. 누가 우릴 보고 있어.)
그는 총구를 들지 않았다. 대신 렌즈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마스크를 턱까지 내렸다. 재가 입술에 즉시 달라붙었고 혀끝에서 쇳가루 맛이 났다. 세븐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런 순간 그의 몸은 언제나 지나치게 정직해서, 위험의 냄새를 맡으면 권태가 물러가고 피가 뜨거워졌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병증인지 그는 오래전에 진단을 포기했다. 다만 오늘은 그 뜨거움 아래에 낯선 무게가 하나 깔려 있었다. 군복 안쪽에 겹쳐 입은 얇은 천이 갈비뼈를 따라 미끄러졌고 그 감촉이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옷깃을 여며주는 것 같았다. 죽지 말라는 뜻으로 여며주는 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단추가 헐거워 보여서 감아 박은 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븐은 그 손을 떠올리며 렌즈 앞에서 웃었다.
喂,睇夠未?我叫Seven。等陣見。(어이, 실컷 봤어? 난 세븐이야. 이따 보자고.)
여명은 문지방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저릿했고 앞치마 밑단에서 물이 뚝 떨어졌다. 두 시가 되면 세탁물 인수가 온다. 열두 장의 시트와 여섯 벌의 작업복, 그중 셋은 팔꿈치가 나갔을 것이다.
여명은 일상을 보내다가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생각을 치워내지 않았다. 떠오른 자리에 가만히 자리 잡게 두었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므로. 추억과 기억을 쌓아가며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가르침 중 하나였다. 그러니 달갑지 않은 것은 없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행동, 표정, 손짓. 세탁물을 받고, 비고 뜯어진 곳은 채워낸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찾아올 것이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 했다.
세탁물 인수는 두 시 정각에 왔고 예상은 반쯤 맞았다. 팔꿈치가 나간 것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 여명은 작업복을 하나씩 펼쳐 조명 아래 비춰보며 실밥이 어디서부터 풀렸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옷이 해지는 데에도 순서가 있었다. 힘이 실리는 자리부터 먼저 지치고, 지친 자리는 반드시 두 번 지친다. 팔꿈치, 무릎, 세 번째 단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자주 접히는 곳이 가장 먼저 낡는다는 그 단순한 이치가 여명에게는 늘 어떤 위로처럼 여겨졌다. 낡는다는 것은 그만큼 썼다는 뜻이고, 썼다는 것은 살았다는 뜻이므로. 그녀는 덧댈 천을 고르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남색과 회색과 낡은 카키. 손끝이 카키에서 멈췄다가 다시 회색으로 옮겨갔다. 이유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떠오른 것은 떠오른 자리에 두면 되는 일이었다.
회랑 제2구간의 천장에는 통풍 갱도의 아가리가 벌어져 있었다. 세븐은 그 아래에서 반쯤 무릎을 굽힌 채 벽을 타고 내려온 배선 다발을 손끝으로 훑었다. 피복이 벗겨진 구리선이 몇 가닥, 그 끝이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이빨로 뜯거나 총알에 끊긴 것이 아니라 공구로 잘린 단면이었다. 누군가 여기서 전력을 훔쳐 쓰고 있었고 그 누군가는 손이 야무진 종류였다. 세븐은 그 단면을 엄지로 문질러보고 짧게 콧숨을 뱉었다. 야무진 적은 좋았다. 야무진 적은 반드시 습관을 남기고, 습관은 총알보다 정확한 좌표였다. 마스크는 턱에 걸린 채였고 재가 목덜미 흉터의 골을 따라 앉았다. 그는 그것을 털지 않았다.
포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건조하게 떨어졌다.
Sichtlinie frei. Drei Wärmequellen, oberes Deck.(사각 확보. 열원 셋, 상부 갑판.)
세븐은 갱도 안쪽의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은 언제나 위쪽에서 더 짙었다. 셋이면 적당했다. 하나는 지루하고 열은 성가시다. 셋은 딱 심장이 뛰기 좋은 숫자였고 그는 자신의 몸이 그 숫자에 이미 반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하게 데워졌다. 이 감각을 뭐라 불러야 하는지 세븐은 오래전에 이름 붙이기를 그만두었다. 다만 오늘은 그 저릿함 아래로 아주 다른 결의 무게가 함께 눌렸다. 갈비뼈를 감싼 얇은 천이 숨을 쉴 때마다 미끄러졌고, 그 미끄러짐이 마치 누가 등 뒤에서 옷깃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마흔 시간 전에 발전기를 옮긴 놈들과, 세 번째 단추를 두 번씩 감아 박는 여자가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여전히 어떤 농담처럼 여겨졌다. 아주 질 나쁜 농담이었고 그는 그 농담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我上去。等我信號。(내가 올라간다. 신호 기다려.)
여명은 회색 천을 재단대 위에 펼치고 자를 댔다. 팔꿈치 덧댐은 타원이어야 했다. 각이 지면 모서리부터 다시 뜯긴다. 그녀는 초크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으며 손목의 힘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셔터 밖에서 안개비가 여전히 골목을 채우고 있었고 그 습기가 실을 무겁게 만들어 바늘땀이 평소보다 조금씩 늦게 빠져나갔다. 여명은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면 반드시 어딘가가 어긋나고, 어긋난 자리는 결국 두 번 손이 간다. 열엿새를 세지 않는 방법은 결국 이것뿐이었다. 손 안의 일을 하나씩 정확하게 끝내는 것. 시간을 세지 않고 매듭을 세는 것.
갱도는 사람이 들어가라고 만든 구멍이 아니었다. 세븐은 장구 가방을 하부에 벗어 두고 팔꿈치와 무릎만으로 배관 위를 밀고 올라갔다. 철판은 오래 식은 것들 특유의 습한 냉기를 품고 있었고 그 냉기가 군복을 통과해 살에 닿기까지 정확히 세 번의 호흡이 걸렸다. 어깨가 좌우 벽에 번갈아 쓸렸다. 화상 흉터가 지나가는 오른쪽 옆구리는 감각이 고르지 않아서, 긁히는 것인지 눌리는 것인지 매번 뒤늦게 판별해야 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좁은 곳을 기어오르는 일을 십 년 넘게 해왔다는 사실이 새삼 우스웠다.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불리한 일에 가장 오래 머무는 짐승이었다. 세븐은 그 명제를 반박할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고 찾을 생각도 없었다.
완차이의 재단대 위에서는 회색 타원 네 개가 나란히 잘려 나왔다. 여명은 가위를 내려놓고 시침핀을 입에 물었다가, 그 습관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임을 떠올리고 도로 손에 옮겨 쥐었다. 바늘을 입에 무는 사람은 언젠가 삼킨다. 그 경고를 들은 것이 스물 몇 해 전이었는데도 경고는 여전히 유효했다. 덧댐천을 팔꿈치 위에 얹고 결의 방향을 맞췄다. 천에는 결이 있어서 그것을 거스르면 아무리 튼튼하게 박아도 이 년을 못 간다. 손끝으로 결을 쓸어 방향을 확인하는 동안, 여명은 자신이 지금 옷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지속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년. 옷 한 벌에 이 년을 약속하는 일을 그녀는 매일같이 태연하게 해왔다. 그런데 사람에게 열엿새를 약속받은 일이 왜 이토록 손끝을 무겁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부 갑판의 격자가 세븐의 얼굴 바로 위에 있었다. 빛이 마름모꼴로 잘려 뺨에 떨어졌고 그 빛의 격자무늬가 흉터의 융기 위에서 일그러졌다. 아래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러시아어와 광둥어가 섞인 잡탕이었고, 그중 하나는 웃고 있었다. 웃는 놈은 언제나 마지막에 죽는다. 웃을 여유가 있다는 것은 경계를 남에게 미뤘다는 뜻이므로. 세븐은 격자 틈에 눈을 붙이고 위치를 셋 다 확보했다. 발전기는 갑판 구석에서 돌고 있었다. 삼분의 일이 남았던 그 연료통의 형제가 옆에 서 있었다. 나이프를 역수로 고쳐 쥐는 손아귀에 힘이 실렸고, 그 순간 갈비뼈를 감싼 얇은 천이 숨을 따라 한 번 미끄러졌다. 세븐은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零,我喺佢哋頭頂。三個都喺我腳下面。(제로, 나 놈들 머리 위야. 셋 다 내 발밑에 있어.)
제로의 응답은 짧았고 승인은 그보다 더 짧았다. 세븐은 격자의 걸쇠를 엄지로 밀어 올렸다. 오래된 쇠가 뻑뻑하게 저항하다가 어느 순간 미련 없이 놓아버렸다. 물건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끝까지 버티는 척하다가 결국 한 번에 내준다. 사람도 대체로 그랬다. 그는 낙하하기 직전의 반 박자 동안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했고, 그것이 셔터 올라가는 소리였다는 사실에 소리 없이 웃었다. 이것은 확실히 직업적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은 채 격자를 열고 몸을 떨어뜨렸다.
喂,落雨啊。(어이, 비 온다.)
세탁소의 재봉틀이 돌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몸은 오 미터를 채 가지 못했고 그 짧은 낙차 동안 세븐이 계산한 것은 세 가지였다. 착지점의 철판이 울릴 것인가, 웃던 놈이 어느 쪽에 서 있었는가, 발전기 소음이 첫 비명을 얼마나 먹어줄 것인가. 답은 전부 유리했다. 철판은 두꺼웠고 웃던 놈은 등을 돌리고 있었으며 발전기는 낡아서 필요 이상으로 시끄러웠다. 세븐의 무릎이 첫 번째 사내의 어깨를 접었다. 뼈가 접히는 소리는 언제나 나무보다 젖은 소리를 냈다. 역수로 쥔 날은 아래에서 위로, 쇄골 위 오목한 자리를 지나 목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피가 뿜어지지 않고 흘러넘쳤다. 뿜어지는 것은 영화의 일이고 실제는 대체로 조용히 넘친다. 두 번째 사내가 총구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세븐은 총구가 아니라 팔꿈치를 잡았다. 사람의 팔은 팔꿈치를 잡히면 방향을 잃는다. 힘이 실리는 자리부터 먼저 지치고, 지친 자리는 반드시 두 번 지친다. 그 사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에 갑판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완차이의 재봉틀은 일정한 박자로 돌았다. 여명의 오른발이 페달을 누르는 압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녀가 이 일에 십 년 가까이 붙어 있을 수 있었던 유일한 재능이었다. 손이 빠른 사람은 많다.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회색 타원이 카키색 팔꿈치 위에 앉으며 바늘땀이 원의 궤도를 따라 촘촘하게 박혔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반드시 처음 자리로 되돌아와 두어 땀을 겹쳐 박는다. 시작과 끝이 만나는 자리가 가장 먼저 풀리기 때문이었다. 여명은 마지막 겹박음을 마치고 실을 끌어당겼다. 가위가 손 닿는 곳에 있었으나 그녀는 오래된 버릇대로 실을 이로 끊었다. 어금니 사이에서 면사가 툭 하고 끊어지는 감각. 그 미세한 진동이 턱뼈를 타고 귀 뒤까지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네 벌 중 세 벌째였다.
세 번째 사내는 도망을 택했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향한 쪽에 발전기가 있었고 발전기 뒤에는 벽이 있었으며 벽에는 문이 없었다. 세븐은 뒤쫓지 않고 걸음의 속도를 오히려 늦췄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돌아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두 걸음 반, 그 반 걸음의 어긋남 안에서 상대는 반드시 손을 먼저 쓴다. 사내가 돌아서며 권총을 뽑았고 세븐은 그 손목을 아래에서 쳐올렸다. 총성이 갑판 천장을 때리고 파편이 눈처럼 떨어졌다. 두 번째 총성은 없었다. 세븐이 사내의 손목을 잡은 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이마를 내리찍었기 때문이었다. 코뼈가 내려앉는 소리, 그리고 무릎이 꺾이는 소리가 반 박자 간격으로 이어졌다. 세븐은 무너지는 몸을 붙잡아 소리 나지 않게 눕혔다. 시체는 조용히 눕히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소리가 남으면 다음 방에서 기다리게 되니까.
三個都清咗。發電機喺度,油仲有大半桶。(셋 다 정리했어. 발전기 여기 있고, 기름도 반 통 넘게 남았다.)
세븐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연료통의 마개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제가 덜 된 조악한 물건이었으나 데드존에서 이 정도면 상등품에 속했다. 나이프의 날을 바짓단에 두 번 닦아내는데, 손등으로 무언가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오른쪽 소맷단이었다.
피는 군복 위에서는 검게 보이고 밝은 천 위에서는 정직하게 붉었다. 세븐은 검은 군복 소매를 걷어 올렸고, 그 아래 겹쳐 입은 얇은 상의의 소맷단이 이미 손목까지 물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언제 베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내의 팔꿈치를 잡던 순간이거나, 세 번째 사내가 총구를 들어 올리며 허공을 긁던 순간이거나. 전투 중 통증은 대체로 지각의 뒤편으로 밀려나 있다가 정산이 끝난 뒤에야 청구서처럼 도착한다. 팔뚝 바깥쪽으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열상이 벌어져 있었다. 깊지 않았다. 힘줄도 뼈도 무사했다. 다만 그 조악한 상처가 하필 밝은 천을 지나 흘렀다는 사실만이 그를 붙들었다. 세븐은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붉은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세탁으로 지워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단백질은 열을 받으면 응고하고 응고한 것은 섬유 속에 눌러앉는다. 그런 상식을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처구니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옷이란 더러워지면 버리는 물건이라고 믿었다.
완차이의 창은 오후 세 시를 넘기며 한 번 더 어두워졌다. 여명은 네 번째 작업복을 재봉틀 위에 올려두고 잠시 손을 멈췄다.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이 각자의 무게를 채우고서야 아래로 굴렀다. 굴러 내려간 자리에는 투명한 길이 났고 그 길로 다음 물방울이 따라 내려왔다. 세상 대부분의 길은 그렇게 생긴다. 앞선 것이 지나간 자리를 뒤에 오는 것이 따라 밟으며. 여명은 그것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고, 실제로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자세로 그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바늘을 다시 내렸다. 카키색 천 위에 회색 타원이 앉았다. 마지막 한 벌. 그녀는 이 한 벌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이미 정해두었고, 정해두었다는 사실이 오늘 하루를 견디게 했다. 건조기를 돌리고, 셔터를 반쯤 내리고, 저녁을 먹는다. 그 순서 어디에도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들어 있지 않아야 했다.
세븐은 개인 장구 가방에서 지혈대와 압박붕대를 꺼냈다. 오른팔이었으므로 왼손과 이빨만으로 처리해야 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지혈대의 끝을 어금니로 물고 당기자 팔뚝의 근육이 밧줄에 조여드는 나무처럼 부풀었다. 그는 통증을 소리로 내보내지 않았다. 소리는 자원이었고 데드존에서 자원을 낭비하는 놈은 오래 살지 못했다. 다만 조여드는 압력 아래에서 밝은 천이 한 번 더 붉게 배어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입꼬리가 이상한 각도로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삐뚤었고 자조라고 부르기엔 너무 다정한 무엇이었다. 열엿새 뒤에 그는 이 옷을 들고 완차이의 좁은 골목을 걸어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매를 받아 들 것이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얼룩의 크기를 손끝으로 재고, 찬물이어야 한다고 짧게 말할 것이었다. 그 광경이 실제로 벌어진 일처럼 선명해서 세븐은 잠깐 자기 머리를 의심했다.
喂,錨。你係咪成日話我唔識照顧自己?(어이, 앵커. 너 맨날 나더러 자기 관리 못한다고 했지?)
무전 너머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저음이었고, 상처의 깊이와 위치와 출혈량을 순서대로 물었다. 세븐은 열상의 길이를 손가락 마디로 대충 재어 보고하며 압박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세 바퀴를 감고 나서야 밝은 천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붕대의 끝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 넣고 나자 오른팔은 제 것이 아닌 물건처럼 뻣뻣해졌다. 세븐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힘은 팔 분쯤 남아 있었고 그 정도면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왼손을 쓰면 될 일이었다. 그는 검은 군복 소매를 다시 내려 밝은 천을 덮었다. 덮는 손길이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웠다는 것을 자기도 알았으나 아무도 보지 않았으므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갑판 위에는 세 구의 몸뚱이와 낡은 발전기와 반 통의 기름이 남아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치의 서열은 명확했다. 기름이 첫째고 발전기가 둘째고 사람은 셋째였다. 세븐은 그 서열에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없었으며, 다만 최근 들어 목록의 맨 아래쪽 어딘가에 낡은 재봉틀 한 대가 몰래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이 성가셨다.
무전이 짧게 두 번 끊어졌다. 투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반쯤 하품을 삼킨 것 같았고 그 나른함 밑에 날 선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감시 카메라의 로그를 통째로 빨아냈다는 보고와 함께, 밀그램 측 통신망이 삼십 분 전부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경고가 따라붙었다. 세븐은 배전실 천장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던 자신의 얼굴이 어느 서버에 저장되어 있을지를 잠깐 생각했다. 유쾌한 일이었다. 이름을 알려준 상대가 그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는 것만큼 지루하지 않은 사건도 드물었다.
知道喇。畀佢哋搵咪搵囉,橫掂我又唔係匿埋。(알았어. 찾겠다면 찾으라 그래, 어차피 나 숨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연료통의 손잡이를 왼손으로 걸어 쥐고 일어섰다. 반 통이라 해도 무게는 정직했고,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붕대 아래의 살이 당겨 쓰라렸다. 세븐은 그 통증을 몸의 한구석에 접어두고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회랑 하부는 여전히 어둡고 축축했으며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 소리가 났다. 데드존의 건물들은 죽어가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흘렸다. 방사능 먼지가 섞인 빗물이 콘크리트 갈비뼈 사이로 스며들었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그는 문득 그것이 비 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비를 싫어한다고 말했던 자신의 취향이 어쩌면 그냥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취향이란 대체로 검증되지 않은 습관의 다른 이름이었다.
완차이의 다리미는 세 번째 물을 먹었다. 여명은 마지막 작업복의 팔꿈치를 다리미판 위에 펼쳐 올리고, 수선한 자리 위로 젖은 천을 한 겹 덮었다. 직접 열을 대면 회색 타원의 결이 눌려 번들거린다. 그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사이에 한 겹을 두어야 했다. 사람 사이도 그렇지 않던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으나 여명은 그런 종류의 비유를 오래 붙들고 있는 성미가 아니었다. 다리미가 내려앉고 증기가 솟았다. 뜨거운 김이 손등을 스치며 지나갔고 그 짧은 열기는 익숙한 것이어서 이제는 아프지도 않았다. 열엿새라고 했다. 여명은 세지 않기로 했으므로 세지 않았고, 다만 오늘이 두 번째 날이라는 사실이 세지 않아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아는 것과 세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그녀는 천을 뒤집었다.
네 벌이 개어졌다. 여명은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종이끈으로 묶고, 매듭을 두 번 감았다.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자 갈색 유리병의 어깨가 어둠 속에서 둔하게 빛났다.
갈색 유리병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여명은 병목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 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유리는 사람의 체온을 오래 거부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항복하는 물질이어서, 손안에서 미지근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이미 쥐고 있던 시간이 제법 길어져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그 항복의 순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만 무언가를 쥐고 있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라벨의 글자는 오래된 인쇄물 특유의 뭉개진 획으로 남아 있었고 아래쪽 귀퉁이는 습기에 부풀어 들떠 있었다. 손톱으로 눌러 붙여봤자 다시 뜰 것이었다. 여명은 눌러 붙이지 않았다.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쳐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그녀의 직업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항목이었고, 종이는 대체로 후자였다.
회랑 하부의 합류 지점은 무너진 계단참 아래 삼각형으로 남은 공간이었다. 세븐은 연료통을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놓았고 쇳소리가 짧게 울렸다가 축축한 벽에 먹혔다. 앵커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은발의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세븐은 그 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검은 군복 소매가 걷어 올려지고 압박붕대가 드러났다. 앵커의 손가락이 붕대의 장력을 눌러 확인했다. 두 번째 마디에서 멈췄고 세븐은 그 정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붕대 아래에서 밝은 천의 소맷단 한 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군복도 아니고 지급품도 아닌, 부드럽고 성긴 짜임의 무언가가.
睇乜嘢啊。冷親啫。(뭘 봐. 추워서 껴입은 거야.)
앵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혈 상태를 확인하고 붕대를 반 바퀴 더 조였다. 그 무심함이 세븐에게는 거의 예의처럼 느껴졌다. 워즈워스에서 오래 굴러먹은 자들은 남의 몸에서 나온 이물질에 관해 묻지 않는 법을 익힌다. 이름도 마찬가지고 흉터도 마찬가지고 군복 안에 껴입은 여자 옷도 마찬가지다. 다만 앵커의 시선이 소맷단에 아주 잠깐 더 머물렀고, 세븐은 그 반 초를 놓치지 않았으며,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은 대체로 유용한 도구였다. 그것 하나로 서른두 해를 밀고 왔으니 이제 와서 방법을 바꿀 이유도 없었다.
여명은 병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서랍의 나무 바닥에 병 밑동이 닿는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녀는 서랍을 끝까지 밀어 넣지 않고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어둔 채로 손을 뗐다. 왜 그랬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다 닫아버리면 어쩐지 봉인 같아지고 봉인은 기다림의 형식이었으므로, 어정쩡하게 열어둔 상태가 차라리 무심해 보였다. 그런 종류의 자기기만을 그녀는 최근 며칠 사이에 몇 가지나 발명했다. 창밖에서는 안개비가 이제 제법 굵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문지방의 홈을 다시 파고 있었고 그 소리는 규칙적이어서 시계보다 정직했다. 여명은 셔터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아직 반쯤은 열어두어도 될 시간이었다.
제로의 지시가 무전으로 내려왔다. 밀그램 통신망이 살아난 이상 예정된 야간 이동 경로는 폐기되고 서쪽 배수 갱도를 우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세븐은 방진 마스크를 턱에서 끌어올리며 짧게 응답했다. 서쪽 갱도는 물이 찬다. 물이 차면 옷이 젖고 옷이 젖으면 밝은 천의 얼룩은 물을 먹어 번질 것이었다.
물은 예고 없이 깊어졌다. 발목이었다가 정강이였다가 어느 순간 허리까지 차올랐고, 그 사이의 경사는 눈으로 읽히지 않았으므로 몸으로 읽어야 했다. 세븐은 왼손으로 벽면을 따라 뻗은 낡은 배관을 짚으며 한 걸음씩 밀고 나아갔다. 검은 물은 기름과 녹과 이름 모를 부산물을 섞어 걸쭉했고, 무릎을 스칠 때마다 표면에 무지갯빛 얇은 막이 찢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데드존의 물은 결코 맑아지지 않는다. 맑아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세븐은 자신의 아랫배 언저리에서 옷감이 물을 빨아들이는 감각을 느꼈다. 군복이 젖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안쪽, 살에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밝은 천이 젖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 느낀 자기 자신이 우스워서 그는 마스크 안쪽으로 짧게 코웃음을 쳤고, 그 웃음은 습한 공기에 먹혀 소리조차 남기지 못했다.
앵커가 뒤에서 손전등의 각도를 낮췄다. 수면에 반사된 빛은 천장을 훑고 지나가며 갱도의 곡선을 잠깐 드러냈다가 지웠다. 투의 목소리가 무전으로 들어왔으나 절반쯤 갈라져 있었다. 갱도 안에서는 전파가 벽에 부딪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밀그램 정찰조로 추정되는 이동 신호가 북쪽 분기에서 잡혔다는 보고였고, 그 뒤로 이어진 문장은 잡음에 삼켜져 형체를 잃었다. 세븐은 되묻지 않았다. 앞쪽이 아니라면 상관없었고 앞쪽이라면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다. 정보란 대개 도착하기 전에 사건이 먼저 도착하는 종류의 물건이었으며, 그는 그 순서에 익숙했다.
水浸到腰喇。行慢啲,跟實我條線。(물이 허리까지 찼어. 천천히 와, 내가 짚는 선 그대로 따라오고.)
목소리는 마스크의 필터를 통과하며 한 겹 눌렸다. 세븐은 오른팔을 물 위로 들어 올린 채 유지하고 있었다. 붕대가 물을 먹으면 감염이 앞당겨진다는 것쯤은 배우지 않아도 알았고, 그보다는 그 아래 접혀 있는 소맷단이 검은 물에 잠기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는 편이 더 정직한 이유였다. 정직한 이유는 대체로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았다. 팔을 든 자세는 곧 어깨를 저리게 했고 저림은 통증으로 번졌으며 통증은 시간을 세게 만들었다. 그는 세지 않기로 했으므로 세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세지 말라고 일러두고 정작 자기가 세고 있다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을 터였다.
완차이의 골목에는 저녁이 일찍 내려앉았다. 여명은 셔터를 반쯤 내린 채 문지방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다 내리지도 않고 다 올리지도 않은 그 어정쩡한 높이가 요 며칠 그녀의 습관이 되었다. 어깨에 걸친 회색 카디건의 소매가 팔꿈치 아래로 흘러내렸으나 고쳐 올리지 않았다. 처마에서 떨어진 물이 돌 위의 홈으로 정확히 꽂혔고, 그 홈은 수십 년에 걸쳐 파인 것이었으므로 오늘 하루의 비가 더한 몫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했다. 여명은 손가락 끝을 그 안에 대어보았다. 차가웠다. 물은 쉬지 않고 같은 자리를 때리는 방식으로만 돌을 이긴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을 그녀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골목 끝에서 노파의 국숫집 등이 켜졌다. 김이 서린 유리문 너머로 흐릿한 주황빛이 번졌고, 국물 냄새가 젖은 공기를 타고 낮게 흘러왔다.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셔터를 다 내리고 세탁소 문을 닫았다. 제대로 잠근 뒤, 방으로 돌아갔다. 지극히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셔터는 마지막 한 뼘에서 늘 걸린다. 여명은 그 걸림을 손목의 각도로 풀어내는 요령을 오래전에 익혔으므로 오늘도 손목만 비스듬히 틀어 끝까지 내렸다. 금속이 바닥의 홈에 물리며 낮고 둔한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골목을 채운 물소리에 곧 삼켜졌다. 자물쇠는 두 번 돌려야 완전히 잠긴다. 그녀는 두 번 돌렸다. 손잡이를 흔들어 잠김을 확인하는 습관까지 마치고서야 몸을 돌렸다. 카운터 아래 서랍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되돌아가지 않았다. 닫으러 가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했고 이유를 만들면 그 이유가 이름을 갖게 될 터였다. 이름 붙지 않은 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여명은 그 편의를 오래 애용해왔다. 골목의 등불은 여전히 주황빛이었고 국수 냄새는 문틈으로도 들어왔으나 오늘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가게 뒤편의 방은 좁고 천장이 낮았다. 재봉실의 마른 먼지 냄새가 문턱을 넘어오다 말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여명은 앞치마를 벗어 못에 걸고 카디건의 소매를 이번에는 제대로 꿰었다. 어깨에 걸치는 방식은 바깥에서만 유효한 차림이고 안에서는 그저 추운 사람의 옷매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평상에 앉아 무릎 위로 손을 포갰다. 벽 너머에서 처마의 낙수가 여전히 같은 박자로 떨어졌으나 실내에서 듣는 물소리는 문지방에 앉아 듣던 것과 음정이 달랐다. 벽 한 겹을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같은 물이 다른 소리를 냈다. 세상의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속인다. 그녀는 오늘만은 속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그편이 잠들기 쉬웠고 잠드는 일은 열엿새를 짧게 만드는 유일하게 정직한 방법이었으므로.
갱도의 물은 북쪽으로 갈수록 물러났다. 허리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발목으로 낮아지는 동안 콘크리트 경사면이 등을 드러냈고 세븐은 그 위에 한쪽 무릎을 짚고 주저앉았다. 방진 마스크를 턱으로 끌어내리자 갱도의 공기가 여과 없이 콧속으로 들이닥쳤다. 곰팡이와 철분과 오래 방치된 유기물의 냄새가 층층이 눌려 있는 공기였다. 그는 오른팔을 눈앞으로 끌어와 붕대 끝을 이빨로 물었다. 물을 먹은 천은 무겁고 미끄러워서 잘 잡히지 않았고 몇 번을 고쳐 물어 비틀자 탁한 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붉은 것이 섞여 있었으나 그 붉음이 오늘 것인지 아까 것인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가릴 필요도 없었다. 피는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 물질이고 그 무성의함이 세븐에게는 늘 마음에 들었다.
붕대 아래에서 밝은 천의 소맷단이 다시 삐져나왔다. 젖어 있었다. 검은 물이 스민 자리는 회색으로 번져 경계가 흐려졌고 팔뚝에 배어 있던 얼룩은 물을 먹어 제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세븐은 엄지로 그 자리를 눌러 물기를 밀어냈다. 밀어낸 만큼 다시 차올랐다. 그가 그 여자에 관해 아는 것은 실로 몇 개 되지 않았다. 다섯 시간. 비 오는 골목과 셔터 아래의 어둑한 실내와 국숫집의 아침 한 끼. 그 사이에 오간 것이라고는 대체로 말이었고 말의 절반은 그가 떠들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여자가 듣기만 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아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다. 세탁보다 수선이 주력이라는 것. 비 오는 날이면 손님이 없다는 것. 그런 부스러기들.
세븐은 소맷단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물기는 짜낼수록 손금 사이로 옮겨갈 뿐 사라지지 않았고, 밝은 천은 젖은 채로 살에 달라붙어 팔뚝의 형태를 고스란히 베껴냈다. 그는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이 천이 마르면 얼룩의 경계가 어떤 모양으로 굳을지 대충 짐작이 갔고, 그 짐작이 이상하리만치 구체적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조금 우스웠다. 사람은 자기가 잃을 것의 형태만은 미리 그려보는 재주가 있다. 세븐은 그 재주를 오래 써먹지 않았다. 잃을 것을 만들지 않는 편이 훨씬 간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갱도에서, 곰팡이 냄새 나는 공기를 마시며, 그는 세탁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얼룩의 윤곽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병증이라면 병증이었다.
앵커가 손을 들었다. 말은 없었다. 손등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 넷이 접혔다가 펴지는, 워즈워스에서만 통하는 짧은 문법이었다. 넷. 북쪽. 조명 없음. 세븐은 즉시 붕대를 마저 감고 이빨로 끝을 물어 고정했다. 물을 먹은 매듭은 헐거웠으나 다시 묶을 시간은 없었고 헐거운 매듭이 사람을 죽인 사례는 그의 경험상 생각보다 드물었다. 그는 경사면을 따라 몸을 낮추며 총을 앞으로 돌렸다. 젖은 군복이 무릎에서 접히며 물을 뱉었다. 무거웠다. 무거운 것은 소리를 줄여주기도 한다. 이 세계에는 그런 식의 보상이 드문드문 박혀 있고 세븐은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四個,唔開燈行緊。傻仔咩,睇唔到路都夠膽衝。(넷이야, 불도 안 켜고 걸어오는데. 멍청이들인가, 앞도 안 보이면서 잘도 들어오네.)
마스크를 다시 끌어 올리며 그는 낮게 웃었다. 필터 안쪽에서 웃음은 습기와 섞여 눅눅해졌다. 제로의 지시가 이어폰을 파고들었다. 교전 회피 우선. 자원 확보가 목표이며 소모전은 승인되지 않는다는 건조한 문장. 세븐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답하면서도 손가락은 방아쇠울 바깥에서 두 번 까딱거렸다. 싸우지 않는 쪽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반대편으로 기울려 하는 이 감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지루함이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벽면 배관 아래의 그늘로 몸을 밀어 넣으며 앵커에게 뒤를 맡겼다.
완차이의 방은 어두웠다. 여명은 등을 끄고 평상에 모로 누웠다. 이불은 얇았으나 오늘 밤을 넘기기에는 충분했고 그녀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갖추는 일에 흥미가 없었다. 벽을 향해 무릎을 조금 접고 이불 끝을 턱 아래로 끌어당겼다. 처마의 낙수는 여전했다. 규칙적이었고 성실했으며 아무 뜻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 무의미함이 좋았다. 뜻을 가진 소리는 사람을 깨워두지만 뜻 없는 소리는 사람을 재운다. 열엿새라는 말은 세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왔으므로 그녀는 세지 않았다. 다만 오늘 수선한 작업복이 네 벌이었고 실을 이로 끊은 것이 아홉 번이었다는 것은 기억에 남았다. 숫자를 세지 않기 위해 다른 숫자를 세는 일이 과연 정직한지, 여명은 눈을 감은 채 잠깐 생각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올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 손가락 끝이 아직 차가웠다.
정찰조는 느리게 왔다. 물을 밟는 소리가 먼저 도착했고 그 뒤에 숨소리가, 마지막으로 금속이 금속에 스치는 소리가 왔다. 방독면을 쓴 자들의 호흡은 필터를 통과하느라 늘 한 박자 늦게 들리며 그 지연이 밀그램 인간들의 위치를 정직하게 팔아넘긴다. 세븐은 배관 아래 그늘에 등을 붙인 채 그 박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앵커가 손가락으로 알려준 숫자와 어긋남이 없었다. 어긋남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면서 동시에 재미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예측대로 굴러갈 때마다 가벼운 실망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 실망을 감추는 법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선두의 군화가 그의 무릎에서 두 걸음 떨어진 물을 밟았다. 튄 물방울이 손등에 닿았다. 차가웠고 기름 냄새가 났다.
지나가라. 그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말하면서도 오른손 검지는 방아쇠울 바깥에서 여전히 까딱거리고 있었다. 넷을 정리하는 데 걸릴 시간을 그는 이미 계산해두었다. 스무 걸음 남짓의 좁은 통로, 반사면이 되어줄 젖은 벽, 오른팔이 제 몫을 못 하니 나이프는 왼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소리 없이, 세 번째부터는 소리가 나겠지만 그때쯤이면 앵커가 뒤를 막아줄 것이고. 계산은 이 초 만에 끝났다. 끝난 계산을 버리는 데는 그보다 오래 걸렸다. 제로의 목소리가 이어폰 안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소모전 불허. 세븐은 마스크 안쪽으로 아주 길고 아주 얇게 숨을 뱉었다. 이 정도의 인내는 파는 값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참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고 그 말은 늘 절반쯤만 효험이 있었다.
선두가 지나갔다. 두 번째도. 세 번째 인간은 하필 배관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방독면 유리에 갱도의 어둠이 통째로 담겨 있었고 그 어둠 속에 세븐의 형체가 들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늘은 충분히 깊었으니까. 그런데도 그 인간은 고개를 옆으로 조금 틀었다. 냄새를 맡는 짐승의 각도였다. 세븐은 움직이지 않았다. 젖은 소맷단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져 발밑의 수면에 닿았다. 소리는 났으나 갱도 전체가 물 떨어지는 소리로 가득했으므로 그 한 방울은 다른 수천 방울의 형제로 취급되었다. 세계가 무질서한 덕에 목숨을 건지는 일이 있다. 세븐은 그런 아이러니를 좋아했다. 세 번째 인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네 번째가 뒤따랐다. 물소리가 멀어졌다.
완차이의 방에서 여명은 눈을 떴다. 잠들었던 것 같기도 했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경계가 흐린 것은 늘 있는 일이라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천장을 향해 돌아눕자 어둠 속에서 서까래의 윤곽이 아주 희미하게 잡혔다. 낮에 저 목재가 습기를 먹어 조금씩 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집은 오래되었고 오래된 것들은 대체로 제 형태를 조금씩 잃어가며 버틴다. 잃는 것과 버티는 것이 같은 일이라는 사실은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알았으나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본 적은 없었다. 문장이 되면 무거워진다. 그녀는 무거운 것을 이 좁은 방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 끝은 여전히 차가웠고 카디건 소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옷 안쪽에 남아 있는 제 체온이 손등에 닿았다. 그 온기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빗소리가 잠깐 약해졌다가 다시 굵어졌다. 처마의 낙수가 박자를 놓쳤다가 되찾는 동안 여명은 벽 쪽을 향해 다시 돌아누웠다.
휘어지는 목재는 조만간 수리를 해야할 듯했다. 여명은 속으로 천천히 계산했다. 수리공에게 찾아갈 시간, 설명해야 할 것, 정산 후 방을 비울 시간.
여명은 어둠 속에서 서까래의 휜 선을 눈으로 따라갔다. 목재라는 것은 정직해서 제가 먹은 물의 양만큼만 휘고 그 이상은 휘지 않는다. 다만 정직한 것들은 대개 늦게 무너지는 대신 한꺼번에 무너지는 습성이 있어서, 지금 저 완만한 곡선이 언제 각으로 꺾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리공은 골목 끝에서 두 번 꺾어 들어간 자리에 있고 아침 일곱 시 전에는 셔터를 올리지 않는다. 찾아가서 설명하는 데 십 분, 사람이 와서 보는 데 이틀, 자재를 대는 데 사흘. 그동안 이 방을 비워야 한다면 옷감과 재봉틀과 다리미판을 어디로 옮길지가 문제였다. 세탁소 앞칸으로 밀어 넣으면 손님이 지나갈 통로가 사라지고 통로가 사라지면 영업이 멈춘다. 영업이 멈추면 열엿새 중 며칠이 비게 된다. 여명은 거기까지 계산하고 손을 멈췄다.
가게를 접지 말라고 했던 목소리가 그 계산의 끝에 걸려 있었다. 접는 것과 잠깐 멈추는 것은 다르다고 스스로 변명해보았으나 변명이라는 자각이 있는 이상 그것은 이미 변명으로서 실패한 것이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손등이 아직 서늘했다. 서까래는 앞으로도 한동안 저 속도로 휠 것이고 사람이 열엿새 자리를 비우는 동안 무너질 만큼 성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늦추자. 그녀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늦추는 일에 이유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굳이 되짚지 않기로 했다.
갱도의 물소리가 등 뒤로 밀려났다. 세븐은 경사로 중턱에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방진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렸다. 공기는 여전히 곰팡내가 났으나 물 위에 뜬 기름 냄새보다는 나았다. 젖은 붕대는 이미 제 역할을 포기한 지 오래였고 그 위에 새 압박대를 겹쳐 감는 것은 부러진 다리에 붕대를 감는 것만큼이나 임시방편이었다. 그래도 그는 감았다. 왼손과 이빨로. 끝을 물고 당기자 팔뚝의 살이 붕대 아래에서 밀려나며 열상 자리가 뜨겁게 울었다. 통증은 정직하다. 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통증만큼 성실하게 알려주는 것도 드물다. 세븐은 그 성실함에 대해 별다른 감상을 갖지 않았다. 다만 젖은 소맷단이 새 압박대 위로 축 늘어져 붙는 것을 보고 잠깐 손을 멈췄을 뿐이었다.
밝은 천은 이제 밝지 않았다. 물을 먹고 피를 먹고 갱도의 검은 것을 먹어서 회색과 갈색 사이의 애매한 색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이걸 들고 가면 그 여자는 뭐라고 할까.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받아 들고 뒤집어 보고 얼룩의 가장자리를 엄지로 문질러보고 그다음에 세제 이름을 하나 떠올리겠지. 그 순서가 눈에 선했다. 사람을 이만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되면 그건 이미 관찰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세븐은 그 다른 무엇에 이름을 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이름을 붙이면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두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이어폰이 짧게 긁혔다. 투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쓸데없는 억양이 없었다. 밀그램 통신망이 재구축되었고 서쪽 상행로의 감시 공백이 십이 분이라는 통보. 십이 분. 세븐은 붕대 끝을 이로 물어 마지막 매듭을 조이고 일어섰다. 무릎에서 물이 뱉어졌다.
十二分鐘?夠喇,我行三分鐘就到頂。剩低嗰九分鐘我攞嚟抖氣。
(12분? 그 정도면 충분해. 난 3분이면 올라갈 수 있으니까. 나머지는 숨을 고르는 데 쓰지.)
세븐은 삼 분이라고 말했고 실제로는 이 분 사십 초에 정상부에 닿았다. 경사로의 마지막 열 걸음은 발 디딜 자리가 미끄러워서 왼손으로 벽의 배관을 잡고 끌어올렸는데 그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항의하듯 열을 뿜었다. 통증은 소리를 내지 않는 대신 시야의 가장자리를 아주 조금씩 뿌옇게 만든다. 그는 그 뿌연 가장자리를 몇 번 눈을 깜빡여 밀어냈다. 배수구 격자 아래 그늘에 몸을 접어 넣고 무릎 위에 소총을 걸치자 비로소 물이 아닌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위쪽 어딘가에서 바람이 통하는 모양이었다. 데드존의 바람이라는 것은 대개 재를 실어오고 재는 혀끝에 쇠 맛을 남긴다. 그는 그 맛을 익숙하게 삼켰다.
남은 아홉 분 중 이 분을 그는 소맷단을 짜는 데 썼다. 왼손으로 천을 비틀자 검은 물이 손가락 사이로 밀려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부터는 나오는 게 없었고 그건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천이 물을 놓아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섬유라는 것도 어느 시점을 넘기면 제가 먹은 것을 제 살로 삼는다. 세븐은 그 회갈색 소맷단을 손등 위에 늘어뜨려 놓고 잠깐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이 옷을 건넬 때의 손 모양이 떠올랐다. 접는 자리를 손날로 눌러 각을 세우던 그 동작. 각을 세워 봐야 결국 이렇게 되는데도 그 여자는 매번 각을 세웠다. 그게 병증이라면 꽤 견딜 만한 병증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喂,錨。你上到嚟未?格柵我未郁,等你埋位先。
(어이, 앵커. 올라왔어? 격자는 아직 안 건드렸으니까 네가 붙고 나서 하자.)
이어폰 저편의 대답은 짧았고 그 짧음 안에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들어 있었다. 세븐은 손목의 시계 대신 제 호흡으로 시간을 셌다. 이런 곳에서는 숫자를 보는 것보다 숨을 세는 편이 정직하다. 여섯 분 남짓. 그는 격자의 경첩 쪽을 눈으로 훑으며 어디부터 뜯을지를 정해두었고 정해두고 나자 또 할 일이 없어졌다. 할 일이 없는 몇 분은 그에게 가장 위험한 시간이다. 손가락이 저 혼자 방아쇠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머릿속에서는 아까 지나간 넷을 정리했을 경우의 그림이 뒤늦게 재생되었다. 첫 번째는 목, 두 번째는 등 뒤에서 입을 막고, 세 번째는 소리가 났겠지. 그는 그 그림을 끝까지 보고 나서 접었다. 접는 데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서운할 지경이었다.
완차이의 방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명은 소리로 먼저 알았다. 빗소리와 처마의 낙수 사이에 섞이지 않는 이질적인 박자가 하나 늘어난 것이다. 평상에서 내려와 맨발로 방바닥을 딛자 발바닥에 닿는 나무가 차가웠고 그 차가움 중 한 뼘 정도가 젖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서까래 아래 천장널에 검은 원이 번져 있었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원이었다. 여명은 손끝으로 그 아래 바닥을 눌러 젖은 범위를 확인했다. 손바닥만 했다. 손바닥만 한 것은 아직 손바닥만 한 것이고 그건 대야 하나로 해결되는 종류의 문제다. 그녀는 부엌 쪽에서 낡은 법랑 대야를 가져와 물자국 아래에 놓았다. 첫 방울이 대야 바닥에 닿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앉아서 그 소리를 몇 번 들었다. 여덟을 세고 나서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숫자를 세지 말라는 말은 날짜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녀는 요즘 모든 숫자를 조금씩 경계하게 되었다.
앵커는 늦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세븐도 늦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은발의 사내가 경사로 끝에서 물을 헤치고 올라오는 소리는 유난히 낮았는데 그건 그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무게를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앵커는 격자 아래에 이르러 한 번 고개를 들고 경첩의 위치를 확인했고 그다음 세븐의 오른팔을 한 번 보았다. 두 시선 사이의 간격은 반 초도 되지 않았다. 워즈워스의 인간들은 남의 몸에 붙은 이물질에 관해 묻지 않는 법을 배운 자들이고 그 배움은 대체로 친절보다 오래간다.
你托一下,我用左手撬。右手今日休息,唔好意思。
(네가 좀 받쳐. 나 왼손으로 뜯을 테니까. 오른팔은 오늘 휴가야, 미안하게 됐네.)
경첩은 두 번째 지렛질에서 비명을 질렀다. 녹이 슨 쇠는 부러질 때 소리를 아끼지 않아서 갱도 전체가 그 소리를 한 번 받아 되돌려주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숨을 죽였다. 십 초. 이십 초. 위쪽에서 돌아오는 것은 바람뿐이었다. 세븐은 그제야 격자를 옆으로 밀고 왼팔로 진입구 턱을 잡아 몸을 끌어올렸다. 오른쪽 겨드랑이가 턱에 쓸리는 순간 열상 자리가 하얗게 번쩍했으나 그는 소리 대신 이를 물었다. 상체가 바깥으로 나오자 처음 닿은 것은 재였다. 무너진 상부 구조물의 잔해 위에 손바닥을 짚었더니 손금 사이로 회색 가루가 파고들었다. 하늘은 없었다. 정확히는 뚫린 천장 너머로 검붉게 저물어가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을 하늘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세븐은 상체를 낮춘 채로 주변을 훑었다. 무너진 콘크리트 기둥이 셋, 그중 하나는 아직 철근이 살아 있어서 엄폐로 쓸 만했다. 왼쪽 삼십 미터에 컨테이너 잔해. 그 뒤로는 시야가 꺾였다. 그는 소총을 앞으로 돌리고 앵커에게 손짓으로 위치를 지정했다. 말을 아끼는 편이 좋은 지형이었다. 그러다 문득 팔뚝이 걸리적거려 소맷단을 걷어 올렸는데 회갈색이 된 그 천이 압박붕대 위로 다시 늘어붙었다. 재까지 먹었으니 이제 저 옷은 무슨 색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잠깐 그 생각에 붙들렸다가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격자 뜯고 올라와 처음 한 생각이 세탁 문제라니. 이런 걸 병증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 여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건 그가 그 여자를 두고 혼자 붙인 이름이었고 이제 그 이름은 그에게 되돌아와 있었다.
완차이의 방에서 여명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대야는 이미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물을 받았고 낙수의 박자는 처음보다 조금 빨라져 있었다. 그녀는 마른 수건으로 바닥의 젖은 자리를 눌러 닦았다. 문지르지 않고 눌렀다. 문지르면 물이 나뭇결을 따라 퍼지고 퍼진 물은 결국 넓은 얼룩이 된다. 사람이 오래 손을 놀린 자리에는 이런 사소한 규칙들이 쌓여서 하나의 방식이 되고 방식이 된 것들은 대개 설명하기가 어렵다. 수건이 무거워지면 짜고 다시 눌렀다. 세 번쯤 반복하자 나무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원래의 색이라고 그녀가 믿는 색을.
수리공에게 남길 쪽지를 적기 위해 카운터 쪽으로 나갔다가 여명은 서랍 앞에서 멈췄다. 끝까지 밀어 넣지 않은 서랍이 그날 그대로 반 뼘쯤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갈색 유리병의 어깨가 어둠 속에 둥글게 떠 있었다.
여명은 서랍을 좀 더 당겼다. 낡은 레일이 중간에서 한 번 걸렸고 그 걸림을 손목의 힘으로 밀어 넘기자 병의 전체가 드러났다. 갈색 유리는 어두운 실내에서 제 색을 잃고 거의 검게 보였는데 카운터 위 작은 등을 켜자 그제야 밑동 쪽에 고인 액체가 호박빛으로 살아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병을 감싸 들었다. 생각보다 차가웠다. 서랍 안쪽은 벽에 붙어 있어서 이 계절의 습기와 냉기를 그대로 받는 자리다. 라벨에는 인쇄가 아니라 손으로 눌러 찍은 듯한 글자가 있었고 잉크가 번져서 마지막 글자의 획이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주류상의 늙은 사내가 이건 오래 두면 둘수록 목이 부드러워진다고 했었다. 오래 둔다는 말이 그때는 좋은 말처럼 들렸다.
손끝으로 그 흘러내린 획을 몇 번 훑었다. 유리에 지문이 남았고 그 지문 위로 다시 습기가 앉았다. 열엿새 중 이틀이 지났다는 계산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굴러가려 했으므로 그녀는 계산을 중간에서 끊었다. 대신 다른 것을 헤아렸다. 이 병을 열려면 잔이 둘 필요하고 잔은 하나뿐이니 사기 그릇이라도 하나 더 꺼내두어야 한다는 것. 안주랄 것이 없으니 국숫집에서 삶은 땅콩을 한 접시 얻어와야 한다는 것. 그런 종류의 준비는 날짜와 상관없이 미리 해둘 수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안전했다. 여명은 병을 원래 자리에 눕히고 이번에는 서랍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딸깍, 하고 레일이 제 홈에 앉는 소리가 났다. 밀어 넣고 나서 그녀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잠깐 서 있었다.
데드존의 잔해 지대는 소리를 이상하게 다룬다. 무너진 콘크리트와 뒤틀린 철판이 만든 골짜기 안에서는 발소리가 앞으로 가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가 엉뚱한 데서 떨어진다. 세븐은 기둥에 등을 붙이고 그 낙하 지점들을 세었다. 왼쪽 컨테이너 뒤에서 한 번, 그 너머 무너진 계단참에서 두 번. 사람 걸음은 아니었다. 짐승이거나 바람에 걸린 철판이거나. 데드존에서 짐승이라는 것은 대개 개였고 개들은 사람보다 정직해서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알린다. 그는 방진 마스크의 끈을 턱 밑에서 한 번 고쳐 잡았다. 재가 목구멍으로 들어와 침이 자꾸 걸쭉해졌다.
앵커가 왼쪽 삼십 미터 지점에서 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접었다. 컨테이너 뒤 공간이 비었다는 신호. 세븐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고 무릎을 폈다. 일어서는 동안 오른팔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듯 무겁게 딸려왔고 그는 그 무게를 왼쪽 어깨로 받아 균형을 잡았다. 이동 중에는 통증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편이 좋다.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제 자리를 요구하기 시작하니까. 첫 번째 기둥에서 두 번째 기둥까지 여섯 걸음. 걸음마다 군화 밑창에서 재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위로 올라갔다가 그의 뒤통수 쪽에서 떨어졌다.
錨,聽住。呢啲灰唔對路。太乾。上面應該有嘢遮住咗,唔係天然嘅。
(앵커, 들어. 이 재 상태가 이상해. 너무 말랐어. 위에 뭔가 덮여 있다는 소리야, 자연적인 게 아니라.)
앵커는 대답 대신 위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뚫린 천장이라고 여겼던 것의 가장자리에 곧은 선이 있었다. 무너진 콘크리트가 만드는 선은 절대 곧지 않다.
곧은 선이라는 것은 자연이 좀처럼 만들지 않는 물건이다. 세븐은 기둥 그늘에서 목을 조금 더 젖혀 그 선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부러진 대들보의 잔영이겠거니 했으나 선은 끊기지 않고 십 미터 남짓을 그대로 달렸고 그 끝에서 직각으로 꺾였다. 직각. 무너진 것들은 직각으로 죽지 않는다. 눈이 어둠에 익자 선의 정체가 서서히 벗겨졌다. 굵은 철사에 걸린 위장망이었다. 회색과 갈색이 뒤섞인 천 조각들이 격자에 촘촘히 매달려 있었고 그 위에 재가 두껍게 얹혀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무너진 천장이었다. 재가 유난히 말라 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비가 닿지 않는 자리였으니까. 밀그램의 스캐빈저들이 잔해 위에 지붕을 얹고 그 아래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뜻이고 살림이 있다는 것은 지키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세븐은 마스크를 코 위까지 끌어올렸다. 이 아래 공기는 오래 마시면 폐가 먼저 늙는다.
零,睇到嘢喇。上面唔係塌咗,係佢哋自己搭嘅。偽裝網,跨度大概十米以上。下面實有人住緊。
(제로, 봤어. 위쪽 저거 무너진 게 아니라 저놈들이 직접 얹은 거야. 위장망, 폭이 십 미터는 넘어. 아래에 사람 살고 있는 게 확실해.)
무전 너머의 제로는 언제나처럼 삼 초를 쉬고 대답했다. 그 삼 초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시간이라고 세븐은 짐작해왔다. 식별 우선, 교전 불허. 여덟 글자로 요약되는 지시가 귓속에서 건조하게 떨어졌고 세븐은 혀를 짧게 찼다. 눈앞에 지붕이 있고 그 아래 사람이 있고 자기 오른팔에는 그놈들이 남긴 열상이 있는데 손대지 말라니. 앵커가 컨테이너 그늘에서 이쪽을 보며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라, 라는 뜻이었다. 세븐은 웃었다. 마스크 안이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웃음이었지만 그런 웃음이야말로 그가 제일 오래 짓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몸을 낮춘 채 왼팔로 소총을 받쳐 들고 위장망 아래쪽 그림자를 훑었다. 철사에 매달린 천 조각이 바람에 흔들리며 아래로 빛의 조각을 흘렸는데 그 빛은 자연광이 아니었다. 노랗고 균일했다. 전구다. 발전기를 돌리고 있다는 소리고 그것은 어제 그가 상부 갑판에서 연료를 걷어온 이유와 정확히 맞물렸다. 세븐은 그 노란빛의 배열을 눈으로 세었다. 하나, 둘, 다섯. 다섯 개의 광원이면 최소한 방이 셋이거나 통로가 길다는 의미다. 오른팔이 다시 제 존재를 알리려 들었으므로 그는 팔뚝을 허벅지에 붙여 고정하고 왼손만으로 전진 경로를 그렸다. 무너진 계단참을 타고 오르면 위장망의 가장자리에 닿는다. 여섯 걸음, 다시 여덟 걸음. 재를 밟는 소리를 줄이려면 발끝부터 내려야 한다. 그런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소맷단이 자꾸 손목 안쪽에서 미끄러졌고 그때마다 회갈색으로 죽은 천이 시야 끝에 걸렸다. 저건 이제 못 살린다. 그 여자가 보면 뭐라고 할까.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부터 내밀겠지.
완차이의 카운터 위에서는 몽당연필이 종이를 긁고 있었다. 여명은 수리공에게 남길 문장을 세 번 고쳐 썼다. 서까래 휘었음, 급하지 않음, 연락은 낮에. 열두 글자면 충분한 것을 스물 몇 글자로 쓰고 다시 열두 글자로 줄이는 일에 그녀는 이상할 만큼 오래 매달렸다. 급하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지붕은 급했다.
계단참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계단의 형태를 잃은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세븐은 그 위에 배를 붙였다. 재가 가슴팍에서 눌려 옆으로 밀려나며 아주 미세한 소리를 냈고 그는 그 소리가 위로 올라갔다가 어디로 떨어지는지를 먼저 확인한 뒤에야 팔꿈치를 옮겼다. 왼팔로 기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굴욕적이었다. 오른팔은 몸통에 붙여 죽은 짐처럼 끌고 다녀야 했고 그 짐이 계단 모서리에 걸릴 때마다 팔뚝 안쪽에서 뜨거운 실이 한 가닥씩 끊어지는 감각이 왔다. 통증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원칙은 아직 유효했으므로 그는 그것을 그냥 걸림이라고만 불렀다. 걸림. 세 번 걸리고 나서 위장망의 가장자리에 손이 닿았다. 철사는 굵고 녹이 슬어 있었으며 매듭이 서툴렀다. 서툰 매듭은 급하게 살림을 차렸다는 뜻이거나 매듭을 배울 데가 없었다는 뜻인데 밀그램의 이세들은 대개 후자였다.
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노란 전구 다섯 개가 아까 세었던 그대로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 컨테이너를 뜯어다 이어 붙인 벽과 방수포로 만든 칸막이가 보였다. 살림이 맞았다. 빨래가 걸려 있었으니까. 철사에 널린 옷가지들이 전구 빛을 받아 흔들리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 크기였다. 세븐의 시선이 거기서 반 박자 멈췄다. 데드존에서 그런 건 드물지 않다. 드물지 않다는 것을 그는 십 년쯤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시선을 떼는 데에도 반 박자면 충분했다. 사람 수를 셌다. 화덕 옆에 둘, 통로 끝에 하나, 방수포 안쪽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최소 둘. 총을 든 자는 통로 끝의 하나뿐이었고 그자는 총을 어깨에 메지 않고 팔에 걸고 있었다. 팔에 거는 자는 쏠 생각이 없는 자다.
零,數到六個。攞緊槍嘅得一個,姿勢仲爛過我隻手臂。呢度唔係哨站,係屋企。
(제로, 여섯 셌어. 총 든 놈은 하나뿐이고 자세가 내 팔뚝보다 더 엉망이야. 여기 초소 아니야, 집이야.)
무전 너머에서 삼 초가 흘렀다. 세븐은 그 삼 초 동안 철사에 널린 아이 크기의 옷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애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스웠다. 우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동쪽 파쇄 구역을 돌아 이백 미터, 시간은 더 걸리지만 흔적이 남지 않는 길. 세븐은 알겠다고 짧게 답하고 팔꿈치를 뒤로 밀었다. 물러나는 동안 아래에서 여자 목소리가 올라왔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알아들을 필요도 없었으며 다만 그 억양이 누군가를 부르는 억양이었다는 것만 남았다. 밥 먹으라는 소리겠지. 어디서든 그 억양은 비슷하다. 세븐은 계단참 뒤편으로 몸을 굴려 내리고 등을 콘크리트에 붙였다. 앵커가 이십 미터 앞에서 손목을 두 번 뒤집었다. 좌측 사각 확보, 삼 분. 세븐은 엄지를 세워 보이고 마스크 안쪽에서 숨을 길게 뱉었다. 재 냄새와 제 땀 냄새와 그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세제 냄새가 뒤섞였다. 오염된 소맷단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 여자가 쓰던 세제는 값싼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래 갔다.
완차이의 셔터 아래로 저녁 골목의 냄새가 들어왔다. 기름과 팔각과 젖은 시멘트. 여명은 세 번 고쳐 쓴 쪽지를 결국 열두 글자로 확정하고 문 안쪽 유리에 붙였다. 밥풀 대신 낡은 테이프를 썼는데 접착이 약해서 왼쪽 위 귀퉁이가 자꾸 들렸다.
파쇄 구역이라는 이름은 지나치게 정직했다. 한때 도시의 뼈를 씹어 삼키던 기계들이 제 이빨을 드러낸 채 죽어 있었고 그 이빨 사이에는 아직도 씹다 만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물려 있었다. 세븐은 파쇄기 하나의 옆구리에 등을 붙이고 앉아 앵커가 스무 걸음을 걸어가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저 큰 몸이 어떻게 저렇게 소리를 안 내는지는 십 년을 봐도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종류의 일이었다. 앵커는 무게를 발바닥 전체가 아니라 바깥날로 옮기며 걷는데 그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재주다. 세븐은 왼팔로 소총을 받쳐 들고 총열 너머의 어둠을 훑었다. 재가 여기서는 다시 축축했다. 지붕이 없다는 뜻이고 지붕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뜻이며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아이 크기의 빨래를 다시 볼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이 왜 안도로 번역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동 중에 통증에도 이름을 안 붙이는 마당에 감정에 이름을 붙일 여유가 있을 리 없다.
투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떨어졌다. 상공 감시 재개까지 이십일 분. 이십일 분이면 이백 미터는 충분하다 못해 남는다. 남는 시간이야말로 이 바닥에서 제일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세븐은 오래전에 배웠다.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놈은 대개 다음 구역에서 죽는다. 그는 오른팔의 압박붕대를 왼손 엄지로 눌러 위치를 확인했다. 피가 배어 나온 자리가 손끝에 미끄럽게 걸렸으나 새로 번지는 기색은 없었다. 그 위로 여명이 준 상의의 소맷단이 덮여 있었다. 회갈색으로 죽은 천. 세제와 피와 갱도의 물과 재가 순서대로 스며들어 이제는 무슨 색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천. 세븐은 그것을 손목 위로 한 번 끌어올렸다.
錨,前面碎石堆右邊有條縫,過得人。你行先,我睇住你條尾。
(앵커, 앞쪽 자갈 무더기 오른편에 틈 있어. 사람 지나가. 네가 먼저 가, 뒤는 내가 봐줄게.)
앵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등을 한 번 뒤집어 보이고 자갈 무더기의 그늘로 사라졌다. 저 사내가 무전으로 말을 하는 경우는 일 년에 몇 번 없었고 그중 절반은 누가 죽었을 때였으므로 침묵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었다. 세븐은 총구를 뒤쪽으로 돌려 지나온 길을 훑었다. 위장망 아래의 노란 불빛은 이미 잔해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다만 밤공기 속에 아주 옅은 연기 냄새만 남아 이쪽까지 흘러왔다. 화덕이겠지. 누군가 저 아래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고 그것을 먹으라고 부르는 억양이 있었고 그 억양은 세계 어디서나 비슷하다. 세븐은 그 생각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던지고 나서도 손끝에 감촉이 남았다.
완차이의 골목은 저녁 장사가 한창이었다. 여명은 유리문 바깥으로 나와 들뜬 테이프 귀퉁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낡은 접착제는 체온에 잠깐 물러졌다가 다시 굳으며 겨우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그 위를 두 번 더 문질렀다. 유리 안쪽에 붙인 열두 글자가 바깥에서는 뒤집혀 보였다. 뒤집힌 글자를 읽는 일에는 언제나 반 박자가 더 걸린다. 급하지 않음. 사실이 아닌 문장이 뒤집힌 채로 유리에 매달려 있는 것을 여명은 잠시 들여다보았다.
자갈 무더기의 틈은 사람이 지나가라고 생긴 구멍이 아니었다. 무너진 것들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다 우연히 남긴 여백에 불과했고 그런 여백은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세븐은 소총을 먼저 밀어 넣고 어깨를 비스듬히 세워 몸을 집어넣었다. 왼쪽 견갑골이 콘크리트 모서리에 갈렸다. 오른팔은 여전히 몸통에 붙인 채였고 그 짐덩이가 틈의 벽에 스칠 때마다 팔뚝 안쪽에서 무언가가 미지근하게 벌어지는 느낌이 왔다. 걸림. 그는 다시 그렇게만 불렀다. 이름을 아끼는 것은 인색해서가 아니라 이름을 부여받은 것들이 반드시 제 몫의 자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통증에 자리를 내주면 그 다음에는 두려움이 방을 달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그리움이 문간에 앉는다. 그런 식으로 사람 하나가 통째로 세를 놓게 되는 것이다.
틈의 절반쯤에서 그는 잠시 멈췄다. 위쪽에서 잔돌 몇 개가 굴러 목덜미로 떨어졌고 그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세븐은 숨을 멈추고 그 소리의 뒤를 따라오는 다른 소리가 있는지를 기다렸다. 없었다. 데드존의 밤은 대체로 정직해서 무언가 다가오면 반드시 소리를 내주었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들은 이미 죽었거나 아직 멀리 있었다. 그는 다시 어깨를 밀었다. 마스크 안쪽이 축축했다. 제 숨이 천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축축함이었고 그 축축함 속에 여전히 세제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이 이상했다. 이 옷은 이미 죽은 색이 되었는데 냄새만은 끈질기게 살아 있었다. 값싼 것들이 대체로 그렇다. 오래간다.
錨,我卡住咗。唔係,唔使返嚟。等我兩秒。
(앵커, 나 좀 끼었어. 아니, 돌아올 필요 없어. 2초만 기다려.)
투의 목소리가 귓속을 두드렸다. 육 분. 카운트다운은 언제나 사람의 등을 떠미는 방식으로 친절했다. 세븐은 왼손으로 틈의 반대편 모서리를 잡고 상체를 비틀었다. 하네스의 버클이 콘크리트에 걸려 금속성의 짧은 비명을 냈고 그는 그 소리에 인상을 쓰면서도 손에 힘을 뺐다가 다시 주었다. 몸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무릎이 먼저 젖은 재에 닿았고 그 다음에 손바닥이 닿았다. 일어서면서 오른팔을 확인했다. 붕대 위로 새 얼룩이 손바닥만 하게 번져 있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고 무시할 정도도 아닌, 정확히 짜증나는 만큼의 크기였다. 세븐은 짧게 웃었다. 마스크 안이라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완차이의 셔터는 반쯤 내려오다 멈췄다. 여명이 고리를 잡은 채 몸을 낮춘 자세로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 맞은편 국숫집에서 노파가 대야에 담긴 물을 도랑으로 쏟았고 그 물이 시멘트 위를 훑고 지나가며 기름 냄새를 한 겹 벗겨냈다. 여명은 셔터의 차가운 골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내리면 하루가 끝나고 끝난 하루는 하나씩 쌓이는데 쌓이는 것을 세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는 대신 다른 것을 했다. 셔터의 골이 몇 개인지, 그 골 중에 찌그러진 것이 몇 개인지, 그런 것들은 날짜가 아니었으므로 안전했다. 여덟 번째 골이 찌그러져 있었다. 언제 찌그러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나지 않는 손상은 대개 오래된 것이다.
阿妹,今晚食咗未。
(아가씨, 오늘 저녁은 먹었어?)
노파의 목소리가 도랑 너머에서 건너왔다. 여명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요. 여명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셔터는 그대로 반만 내려와있었다.
노파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대야를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늙은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듯 질문은 형식이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여명은 셔터 고리를 놓고 허리를 폈다. 반쯤 내려온 철판이 제 무게를 잊은 듯 그 높이에 그대로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가게 안의 어둠이 납작하게 눌린 채 골목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저것을 끝까지 내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이라기보다는 이미 벌어진 일에 붙이는 뒤늦은 이름에 가까웠다. 국숫집의 노란 백열등이 도랑의 물기 위에 길게 번졌고 그 번진 빛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여명은 골목을 건넜다. 카디건 소매 끝이 셔터의 녹슨 모서리에 걸렸다가 풀렸다. 실 한 올이 뽑혔을 것이다. 나중에 꿰매면 되는 종류의 손상이었고 그런 손상들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안전한 목록이었다.
坐啦,唔使客氣。今日剩返嘅湯底最靚,煲咗成日。
(앉아, 사양할 것 없어. 오늘 남은 국물이 제일 좋아. 하루 종일 고았거든.)
노파는 여명을 벽 쪽 자리에 앉히고는 묻지도 않고 면을 삶기 시작했다. 조리복의 왼쪽 어깨에 여명이 며칠 전 덧댄 천이 아직 반듯하게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박음질의 간격이 일정했고 실 색을 원단보다 반 톤 어둡게 골랐던 것이 지금 보니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 것을 확인하는 일이 여명에게는 오래된 위안이었다. 손으로 한 일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은 떠나고 날씨는 마음대로 바뀌고 지붕은 아무 예고 없이 새지만 바늘로 붙인 자리는 붙인 그대로 남아 있다. 김이 오르고 마늘 냄새와 기름 냄새가 좁은 가게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여명은 젓가락통에서 젓가락 한 쌍을 꺼내 끝을 맞추고 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고 나서 잠깐 손을 멈췄다. 두 쌍을 꺼낼 뻔했던 것이다. 그 실수는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
파쇄 구역의 배출로는 한때 부순 것들을 밖으로 뱉어내던 통로였고 지금은 세븐과 앵커를 뱉어내는 중이었다. 콘크리트 턱에 몸을 반쯤 기대고 세븐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렸다. 밖의 공기는 마스크 안보다 차가웠고 훨씬 맛이 없었다. 재와 쇠와 오래 죽어 있던 물의 맛. 그는 그것을 두어 번 크게 들이켰다. 폐가 쓰라렸지만 쓰라린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므로 불평할 일이 아니었다. 앵커가 이십 미터 앞에서 손등을 두 번 뒤집었다. 클리어. 세븐은 왼손으로 개머리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의 새 얼룩은 이제 손바닥 크기에서 조금 더 자라 있었는데 자란 속도가 아까보다 느려진 것을 보면 안쪽에서 알아서 굳고 있다는 뜻이었다. 몸이란 대체로 주인보다 성실하다.
喂,Two。你講嘅六分鐘我用咗五分五十幾秒,仲有得剩。你係咪應該讚下我。
(어이, 투. 네가 말한 6분 중에 5분 50초 좀 넘게 썼어. 아직 남았잖아. 너 나 좀 칭찬해야 하는 거 아냐?)
투의 대답은 칭찬이 아니라 통보였다. 상공 감시 재개. 지금부터 열선 노출 주의. 목소리에 실린 무성의함이 오히려 반가웠는데 그 애송이가 빈정거릴 여유가 있다는 것은 전선 어디에서도 급한 일이 터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븐은 마스크를 다시 코 위로 끌어올렸다.
여명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가게 내부의 라디오에선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명은 그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흥얼거리지는 않았다. 듣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라디오는 낡아서 저음이 뭉개졌다.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실제보다 한 겹 두껍게 들렸고 그 두꺼움이 오히려 국숫집의 습기와 잘 어울렸다. 광둥어로 부르는 오래된 노래였는데 가사의 절반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충분했다. 여명은 무릎 위에 손을 겹쳐 놓았다. 오른손이 위, 왼손이 아래. 그 순서는 오래전부터 그랬고 왜 그런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노래를 듣는 일은 옷을 만지는 일과 닮은 데가 있었다. 결을 따라가야 하고 결을 거스르면 상한다. 흥얼거리는 것은 결을 거스르는 쪽에 가까웠으므로 그녀는 하지 않았다. 듣는 것으로 충분했다. 세상에는 받기만 해도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고 노래는 그중에서도 가장 값이 싼 축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물이 두 번째로 끓어올랐다. 노파가 면을 건져 물기를 털었고 그 털어내는 손목의 각도가 조리대 앞에서 사십 년쯤 서 있던 사람의 것이었다. 국물이 그릇에 부어지는 소리가 라디오 위로 겹쳤다. 여명은 그 겹침을 가만히 들었다. 소리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그냥 같이 있는 상태. 그런 것이 좋았다. 함께 있는 것들이 반드시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고, 언젠가 누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았고 다만 그 말을 하던 사람의 목이 웃음을 참느라 잠깐 울렸던 것이 남아 있었다. 목에 흉이 있는 사람이 웃으면 소리가 조금 갈라진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擺低喇。慢慢食,唔使趕。
(여기 놨다. 천천히 먹어, 서두를 것 없어.)
배출로의 끝은 갑자기 넓어졌다. 부순 것을 뱉어내던 아가리는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 입을 크게 벌리는 법이고 그 벌어진 입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엄폐물이 없다는 뜻이다. 세븐은 콘크리트 턱 아래로 몸을 접고 고개만 젖혀 위를 봤다. 재가 걷힌 자리로 하늘이 보였는데 별은 없고 대신 아주 옅은 붉은 기가 남쪽 지평 위에 깔려 있었다. 저건 노을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오래 타고 있는 것의 잔광이다. 열엿새 동안 하늘을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게 이틀 전인지 사흘 전인지 헷갈렸고 헷갈리는 편이 나았다. 그는 왼손으로 개머리를 고쳐 잡았다. 오른팔은 몸통에 붙인 채 그대로 두었다. 붕대 위의 얼룩은 이제 자라기를 멈추고 가장자리부터 검게 말라가는 중이었으며 마른 피는 천을 뻣뻣하게 만들어 팔을 굽힐 때마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앵커가 개활지 반대편 배수구 그늘에 몸을 붙인 채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삼 초. 그 이상 서 있으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이 열의 잔상을 붙잡는다. 세븐은 마스크 안에서 숨을 길게 뱉었다. 뛰기 전에 폐를 비워두는 것은 습관이었고 습관이란 결국 죽지 않은 자들이 남긴 유언 같은 것이다. 그때 문득 소맷단이 손목뼈에 닿는 감촉이 왔다. 여명이 준 상의는 원래 그의 팔에 짧았고 그래서 뛸 때마다 소맷단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했는데 그 자잘한 왕복이 이상하게 신경을 붙들었다. 색은 이미 죽었다. 회갈색. 세제 냄새만 끈질기게 남아서 재 냄새 사이로 자꾸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 게 문제다. 죽은 색보다 살아 있는 냄새가 사람을 더 흔든다.
錨,我行先。你數三下,唔好數快啲,你次次都數快啲。 (내가 먼저 간다. 세 번 세어, 매번 너무 빨리 세지 말고.)
앵커의 손가락이 접히는 것을 세븐은 보지 않았다. 보고 뛰면 이미 늦는다. 시야 대신 어깨의 각도를 읽는 편이 빠르고 그 습관 때문에 여태 살았으므로 그는 세 번째 손가락이 접히기 반 박자 전에 콘크리트 턱을 밀고 나갔다. 개활지의 재는 발목까지 푹 꺼졌다가 뒤에서 다시 부풀어 올랐고 그 부푼 자리마다 회색 연기 같은 것이 발자국 모양으로 남았다. 뛰는 동안 오른팔은 몸통에 못 박아둔 것처럼 움직이지 않게 붙들었는데 그렇게 해도 어깨뼈 안쪽에서 뜨거운 실이 한 가닥씩 당겨지는 감각은 어쩔 수 없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스물세 걸음이 될 거라고 짐작했고 실제로는 스물하나였다. 짐작보다 짧은 것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다. 배수구 그늘에 몸을 던져 넣으면서 그는 등부터 벽에 부딪혔고 부딪힌 충격이 오른팔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반 초쯤이었다.
마스크 안쪽이 순식간에 습해졌다. 숨소리가 제 귀에 지나치게 크게 들렸고 그것을 줄이려면 입을 다물고 코로만 쉬어야 하는데 코로만 쉬기에는 폐가 모자랐다. 세븐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왼팔을 걸쳤다. 붕대는 다시 젖어 있었다. 아까 말라가던 가장자리가 안쪽에서 새어 나온 것에 밀려 다시 색을 얻었고 그 색은 이제 검은 것과 붉은 것의 중간 어디쯤에서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여명이 준 상의의 소맷단은 뛰는 동안 팔꿈치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그것을 손목까지 끌어내렸다.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었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 하는 짓들이 요즘 부쩍 늘었고 그 목록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錨,過咗。你嗰邊仲有幾多米?……唔好答我『差唔多』,你每次都係差唔多。
(앵커, 넘어왔다. 네 쪽은 몇 미터 남았어? ……'거의 다'라고 대답하지 마. 넌 매번 거의 다야.)
무전 저편에서 앵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삼 초쯤 뒤에 스물여덟, 하고 숫자 하나를 뱉었다. 그 무성의한 정확함이 세븐은 마음에 들었다. 이어서 투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열원 스캔 일 회 통과, 미검출이라고 통보했는데 그 애송이의 말투에는 여전히 남의 목숨을 날씨 예보처럼 읽는 데가 있었다. 세븐은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재 냄새 사이로 세제 냄새가 또 올라왔다. 죽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이 지랄 맞은 구덩이 안에서 혼자만 멀쩡한 냄새. 그는 그것을 한 번 더 들이마셨다가 눈을 감았다. 감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이 초만, 하고 스스로와 협상했다.
국숫집의 그릇은 뜨거웠다. 여명은 왼손으로 가장자리를 받치되 손바닥 전체를 대지 않고 손가락 끝만 걸쳤다. 뜨거운 것을 다루는 방법은 다림질에서 배웠다. 열은 잡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고 견디려면 닿는 면적을 줄여야 한다. 국물 위로 파가 떠 있었고 그 아래 면이 김을 뿜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건져 올리자 뜨거운 김이 얼굴로 곧게 올라와 눈가를 잠깐 흐렸다. 여명은 눈을 깜빡이고 면을 조금 식혔다. 노파는 조리대 앞에 서서 행주로 손을 닦으며 라디오 쪽을 보고 있었는데 노래는 이미 다른 곡으로 넘어가 있었고 이번 것은 아까보다 빠르고 값이 싸 보였다.
수선해 드린 곳, 불편하진 않으세요? 면을 식히고, 파 조각을 살짝 건져냈다. 우습게도 파 조각을 제 그릇에 가져갔던 세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려라고는 해본 적 없이 살았을 것 같은 사람이 의외의 행동을 보이는 것. 이상하게 오래가는 기억들이 있다. 그것도 그런 기억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어느날 문득 희미하게 떠올라선 웃음 짓게 만드는 것. 여명은 미미하게 웃었다.
노파는 행주를 조리대 모서리에 걸치고 몸을 돌렸다. 팔을 들어 겨드랑이 아래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이는 동작에는 사십 년쯤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국물을 뜬 사람 특유의 무람없음이 있었다. 여명이 덧댄 천은 원단의 결을 두 번 접어 안쪽으로 감춘 방식이었고 겉에서 보면 그저 색이 조금 짙은 사각형에 지나지 않았다. 노파는 그 사각형을 손끝으로 두어 번 눌러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다는 뜻의 저음이 아니라 놀랐다는 뜻의 저음이었다. 조리대 위 냄비에서 김이 한 번 크게 솟았다가 천장의 기름때 속으로 흩어졌다.
一啲都唔覺。之前嗰個裁縫車完之後,我抬手就扯住條肉,成日以為自己老咗。原來唔係我老,係佢車得差。
(하나도 안 느껴져. 전에 그 수선집이 박아준 건 팔만 들면 살이 당겨서, 내가 늙은 줄만 알았지. 늙은 게 아니라 그쪽이 못 박은 거였더라고.)
여명은 젓가락 끝으로 파 조각을 건져 그릇 가장자리에 밀어두었다. 밀어두고 나서야 그 동작이 누구의 것을 흉내 낸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날 그 남자는 아무 설명 없이 제 젓가락을 뻗어 여명의 그릇에서 파를 건져 갔고 건져 간 것을 제 국물에 아무렇지도 않게 빠뜨렸다. 싫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았고 남자도 왜 가져가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배려라는 단어는 그 장면에 붙이기엔 지나치게 격식이 있었다. 차라리 손버릇에 가까웠고 손버릇이란 사람이 오래 살면서 저도 모르게 몸에 새긴 것이므로 어쩌면 그쪽이 더 정직한 증거였다. 여명은 그 사각형의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을 스스로 알았고 알면서도 굳이 막지 않았다.
안쪽으로 접어서 박으면 살에 안 닿아요. 겉에서 보기엔 좀 두꺼워 보여도.
세븐은 이 초를 채우지 않고 눈을 떴다. 협상은 언제나 이쪽이 먼저 파기하는 쪽이 이득이다. 벽에 등을 붙인 채 반쯤 몸을 일으키면서 왼손으로 소총을 무릎 위로 끌어올렸는데 그 무게가 평소보다 반 근쯤 무겁게 느껴진 것은 팔이 하나 모자라서지 총이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개활지 저편에서 앵커가 몸을 낮추고 첫걸음을 뗐다. 저 덩치가 뛰면 재가 무릎까지 튄다. 세븐은 총구를 앵커의 진행 방향 오른쪽 이십 도쯤으로 두고 그 각도를 유지했다. 사람을 지키는 일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오지 않을 쪽을 보는 일이라는 걸 그는 오래전에 배웠고 배운 방식은 대체로 누군가가 죽는 형태였다.
소맷단이 다시 흘러내려 손목뼈를 덮었다. 아까 끌어내린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흘긋 보고 시선을 즉시 개활지로 되돌렸다. 죽은 색 위로 마른 재가 앉아 이제는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천 조각이 제 팔에 붙어서, 이 구덩이 안에서 유일하게 사람 사는 냄새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지 않았다. 웃으면 목의 흉이 울리고 울리면 소리가 갈라지고 갈라진 소리는 개활지에서 멀리 간다. 앵커의 열여덟 번째 걸음쯤에서 남쪽 잔광이 한 번 흔들렸다. 무언가가 그 앞을 지나갔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눈이 지쳤다는 뜻이다. 세븐은 후자라고 결론 내리기 전에 총구를 그쪽으로 삼 도 옮겼다.
앵커가 마지막 대여섯 걸음을 남기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줄이면 실루엣이 길어지고 길어진 실루엣은 상공에서 사람 모양으로 읽힌다. 세븐은 왼손 하나로 그 덩치의 하네스 어깨끈을 낚아채 배수구 안쪽으로 끌어들였고 끌어들이는 힘의 절반 이상은 사실 앵커 제 관성이었다. 두 사람의 무게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히며 둔한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다행히 관 모양의 공간 안에서 앞뒤로 굴러다니다가 잦아들었다. 앵커의 어깨에서 회색 재가 한 움큼 떨어졌다. 세븐은 그 재가 제 무릎 위에 앉는 것을 보면서도 털지 않았다. 털어봐야 다시 앉을 것이고 다시 앉을 것에 손을 쓰는 습관은 이 구덩이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남쪽 잔광은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세븐은 삼 도 옮겨두었던 총구를 그대로 둔 채 십오 초를 셌다. 셈이 끝나갈 무렵 제로의 목소리가 귀 안쪽에서 건조하게 들어왔고 확인 불가, 자체 판단, 하는 두 마디는 늘 그렇듯 책임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문장이었다. 그는 그 문장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할 만한 대상은 이 세계에 너무 많고 그것들을 하나씩 상대하기에는 인생이 지나치게 짧으며 무엇보다 지금 그의 오른팔은 원망 따위에 배정할 여력이 없었다. 눈이 지쳤다는 결론과 무언가 지나갔다는 결론 사이에서 그는 전자를 택했다. 택했다기보다는 후자를 감당할 인원이 둘뿐이라는 산술의 결과였다.
錨,你成身都係灰,好似個骨灰盅噉。……唔好郁,我幫你抹咗塊面鏡先,你自己抹嘅話又整污糟。
(앵커, 너 온몸이 재투성이야. 유골 단지 같잖아. ……가만있어, 고글부터 닦아줄게. 네가 닦으면 또 더럽히니까.)
앵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여 얼굴을 내밀었다. 세븐은 왼손 엄지로 그 고글의 렌즈를 두 번 문질렀고 문지른 자리에 마른 재가 반원을 그리며 밀려났다. 그 짧은 동안 앵커의 시선이 세븐의 오른팔로 한 번 내려갔다가 아무 데도 머물지 않고 되돌아왔다. 붕대는 이제 완연히 검붉었고 그 색은 결정을 미루던 단계를 지나 스스로 무엇인지 인정한 색이었다. 앵커는 여전히 묻지 않았다. 워즈워스의 인간들은 몸에서 나오는 것들에 관해 말을 아끼는 법을 안다. 말을 얹으면 그것이 실체를 얻고 실체를 얻은 것은 이동 속도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세븐은 엄지에 묻은 재를 제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여명이 준 상의의 소맷단이 그 동작을 따라 손등 위로 조금 흘러내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국물은 첫 모금보다 두 번째 모금이 짰다. 여명은 그것이 국물이 변한 게 아니라 혀가 익숙해진 탓이라는 걸 알았다. 사람의 감각이란 언제나 기준을 새로 세우고 새로 세운 기준으로 앞선 것을 배반한다. 면을 한 젓가락 삼키고 나서 그릇 위에 뜬 기름 무늬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것들이 서로 가까이 갔다가 닿기 직전에 미끄러지고 어떤 것들은 결국 하나로 합쳐져 더 큰 원이 되었다. 합쳐진 원은 원래의 두 원보다 테두리가 흐렸다. 여명은 그 흐린 테두리를 한참 보았다.
배수관 안쪽은 사람 하나가 허리를 굽히면 겨우 지나갈 만한 원통이었고 그 원통의 바닥에는 발목을 적시지 않을 만큼의 물이 얕게 깔려 있었다. 세븐은 벽의 곡면에 등을 맞추고 앉아 왼손으로 지도 단말을 무릎 위에 올렸다. 화면의 광량을 최하로 낮추자 지형선이 거의 사라지고 굵은 뼈대만 남았는데 그 정도가 오히려 읽기에 편했다. 세밀한 것을 보려 들면 없는 것까지 보게 된다. 앵커가 옆에 쭈그려 앉으며 어깨를 붙여 왔고 그 접촉은 다정함이 아니라 광량을 두 사람 몫으로 가리기 위한 계산이었다. 원통 안에서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저희끼리 부딪혀 두 배로 들렸으므로 세븐은 호흡을 배 아래쪽으로 눌러 내렸다.
투의 보고가 귀 안쪽으로 들어왔다. 북쪽 분기점에 열원은 없으나 신호 반사에 이상이 있다는 문장은, 번역하자면 저기 뭔가 금속이 있는데 그게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네가 가서 봐라, 하는 뜻이었다. 세븐은 그 어법이 늘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투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아는 척하는 인간들이 이 바닥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였다. 그는 단말을 껐고 어둠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눈이 세 번 깜빡일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오른팔은 이제 팔이라기보다 팔이 있던 자리에 매달아 둔 무거운 물건에 가까웠다. 그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아까의 결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錨,你行頭。我隻右手而家淨係識得掛喺度,撞到嘢嘅話會嘈。……唔使睇我,行啦。
(앵커, 네가 앞장서. 내 오른팔은 지금 매달려 있는 것밖에 못 해서, 뭐에 부딪히면 시끄러워져. ……날 보지 말고, 그냥 가.)
앵커는 삼 초쯤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삼 초 동안 그가 무엇을 저울질했는지 세븐은 알 것 같았고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 은발 머리가 원통의 어둠 속으로 먼저 밀려 들어갔고 물이 발목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앞서 나갔다. 세븐은 왼손으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순간 오른쪽 어깨에서 목덜미까지 뜨거운 것이 한 줄 그어졌으나 그는 그 선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중간에서 놓아버렸다. 소맷단이 손등을 덮은 채 벽에 쓸렸다. 이 천이 원래 어떤 냄새였는지를 기억하려면 이제는 코를 아주 가까이 대야 했고 그것마저 며칠 안에는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그는 걸으면서 그 사실을 담담하게 계산했고 계산의 끝에서 아주 잠깐, 다림질을 마친 옷이 개켜져 있던 카운터의 각진 모서리를 떠올렸다.
국물은 그릇 바닥에서 미지근해졌다. 여명은 두 손으로 그릇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손금을 따라 스며드는 감각은, 뜨거울 때보다 식어갈 때가 더 정확하게 전해진다. 뜨거운 것은 통증에 가까워서 온도를 세밀하게 읽을 수 없고 식어가는 것만이 제 몸의 온도와 비교되어 비로소 온도로 읽힌다. 사람도 그런 데가 있었다. 곁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얼마나 따뜻한지 헤아릴 겨를이 없다가, 자리가 비고 나서야 남은 열의 두께를 손바닥으로 재게 되는 것이다. 여명은 그 비유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노파가 조리대 너머에서 앞치마 끈을 뒤로 당겨 다시 묶었다.
앵커의 발소리가 앞에서 멎었다. 규칙적으로 갈라지던 물소리가 사라지자 원통 안에는 자기 숨이 벽을 타고 되돌아오는 소리만 남았고 세븐은 그 되돌아오는 숨의 간격으로 앞사람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네 걸음. 손을 뻗으면 하네스 끝이 닿을 만한 거리다. 어둠 속에서 은발이 아주 희미하게 빛의 잔여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빛이라기보다 눈이 만들어낸 위안에 가까웠다. 세븐은 허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왼손을 벽면에 붙였다. 콘크리트의 곡면이 어느 지점에서 끊기고 그 끊긴 자리부터 다른 촉감이 시작되었다. 차갑고 매끄럽고 결이 없다. 콘크리트에는 언제나 결이 있다. 거푸집의 흔적이든 세월의 흔적이든 손끝을 붙잡아 끄는 무엇이 있는 법인데 이것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 그 면을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이음매가 만져졌다. 이음매는 자연이 만들지 않는다.
투의 목소리가 삼십 초를 요구했다. 반사 패턴을 다시 잰다는 말은 저쪽에서도 이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고백이었고 세븐은 삼십 초라는 단위가 이 좁은 관 안에서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 이미 여러 번 겪어 알았다. 시간이란 공간의 넓이에 반비례해 늘어나는 물건이다. 그는 왼손 검지를 세워 앵커의 시야 안쪽에서 두 번 까딱였고 그 은발이 아주 미세하게 각도를 틀어 총구를 뒤로 넘겼다. 말이 없어도 굴러가는 이런 관계를 그는 오래 좋아해 왔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굳이 명명해본 적은 없지만 앵커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총구만 돌리는 그 무성의한 신뢰에는 술을 사줄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물론 돌아가서. 돌아간다면.
錨,呢度有嘢唔對路。牆面太滑,滑到好似有人專登磨過噉。……你唔好行前,我摸多兩下。
(앵커, 여기 뭔가 이상해. 벽면이 너무 매끄러워, 누가 일부러 갈아놓은 것처럼. ……앞으로 나오지 마, 내가 두어 번 더 만져볼게.)
손끝이 이음매를 따라 옆으로 흘러가다 작은 돌기에 걸렸다. 원형이고 손톱만 하고 미지근하다. 이 관 안의 모든 것은 물의 온도를 따라 차가운데 이것만 미지근하다는 사실이 목덜미의 솜털을 세웠다. 오른팔이 그 순간 제 존재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세븐은 그것을 뒤로 밀어냈다. 통증은 지금 발언권이 없다. 발언권을 주면 판단이 흐려지고 흐려진 판단은 두 사람을 여기 눕힌다. 그는 미지근한 돌기 위에 엄지를 얹은 채로 숨을 아주 얇게 뱉었다. 렌즈다. 아니면 렌즈였던 것. 배전실에서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던 게 며칠 전인지 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세지 말라고 남에게 당부해놓고 제가 세는 짓은 우스운 일이었다.
골목의 공기는 국숫집 안보다 두 뼘쯤 차가웠다. 여명은 문턱을 넘으며 등 뒤에서 발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고 노파가 억지로 쥐여준 비닐봉지가 왼손에서 미지근하게 무게를 가졌다. 남은 국물을 담았다고 했다. 데워 먹으라고 했다. 혼자 먹기 뭣하면 누구든 불러다 먹으라고도 했는데 그 마지막 말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지 않았고 붙어 있지 않은 물음표야말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여명은 봉지 손잡이를 손가락 두 개에 걸고 골목의 젖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여명은 골목을 건너 다시 세탁소 앞으로 왔다. 몸을 숙여 절반 열린 셔터 안으로 들어가 세탁소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힘을 줘 셔터를 끝까지 내린 뒤, 세탁소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궜다.
셔터가 바닥의 홈에 닿으며 마지막으로 낸 소리는 쇠붙이의 비명이라기보다 늙은 짐승이 자리에 눕는 소리에 가까웠다. 여명은 문고리를 돌려 잠금쇠가 제 홈으로 물리는 감각을 손목까지 받아들였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소리들이다. 자물쇠, 셔터, 수도꼭지, 그리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인사. 어둠은 익숙한 순서로 물건들의 윤곽을 되돌려주었고 다림판의 각진 모서리와 재봉틀의 둥근 등과 벽에 걸린 옷들의 늘어진 어깨선이 차례로 제자리에 복귀했다. 여명은 국물 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비닐이 접히며 미지근한 김이 손목 안쪽을 한 번 스치고 사라졌다.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여명은 잠시 서 있었다. 켜야 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켜고 나면 이 방이 얼마나 비어 있는지가 정확한 광량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둠은 관대해서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카운터 위에 개켜둔 자리, 문지방 옆에 신발이 놓였던 자리, 난로 옆에 누군가 다리를 뻗고 앉았던 자리. 어둠 속에서 그 자리들은 여전히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여명은 그 착시를 몇 초쯤 누렸다. 착시를 누리는 것은 계산에 넣지 않은 사치였으나 하루에 한 번쯤은 허용해도 좋을 것이었다. 여명은 결국 스위치를 올렸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고 나서야 제 몫의 창백함을 뱉어냈고 자리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냄비를 꺼내 봉지의 매듭을 풀었다. 국물이 쏟아지며 파 조각과 기름 무늬가 함께 흘러 내려갔다. 난로 위에 냄비를 올리고 불을 아주 약하게 낮췄다. 오늘 밤에 마실 것도 아니고 내일 아침에 데울 것도 아닌데 왜 지금 올려두는지 스스로 물었고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준비라는 것은 언제나 대답보다 먼저 손이 움직이는 일이다. 서랍 안에는 갈색 유리병이 눕혀져 있고 그 옆에는 며칠 전에 꺼내둔 사기 그릇 하나가 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명은 그쪽을 보지 않으려 했으나 시선은 이미 다녀온 뒤였다. 카디건 소매 끝에서 실 한 올이 뽑혀 나와 손등을 간질였고 여명은 그것을 뜯지 않고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배수관 안에서는 엄지 밑의 미지근함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세븐은 그것이 전기가 흐르는 물건의 체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결론에 도달한 뒤에도 엄지를 떼지 않았다. 손을 떼는 순간 저쪽에서 시야가 복구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의 보고가 귀 안쪽으로 들어왔다. 인공물 확정, 능동 소자 가능성 육십 퍼센트, 파괴보다 차폐 권고. 육십 퍼센트라는 숫자는 참으로 정직하고 참으로 쓸모없다. 부수면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면 저쪽이 알고 저쪽이 알면 이 관은 곧 파이프가 아니라 관짝이 된다. 세븐은 왼손만으로 배낭 옆주머니를 더듬어 절연 테이프를 찾아냈다. 이빨로 끝을 물어 뜯어내는 동안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무겁게 처졌고 압박붕대가 살에 눌려 축축한 소리를 냈다.
錨,過嚟少少,用你隻手掌幫我遮住呢粒嘢。唔好郁,遮住就得。我封咗佢就走。
(앵커, 조금만 와서 손바닥으로 이거 좀 가려줘. 움직이지 말고 가리기만 하면 돼. 내가 봉해버리고 바로 뜰 거니까.)
앵커의 장갑 낀 손바닥이 옆에서 미끄러져 들어와 미지근한 돌기 위를 덮었다. 손이 겹치는 순간 세븐은 제 엄지를 빼냈고 두 사람의 손등이 좁은 관 안에서 잠깐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접촉이란 이런 데서는 신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세븐은 이빨로 물어 뜯어낸 절연 테이프의 끝을 왼손 검지에 감아 고정하고 앵커의 손바닥 가장자리부터 원을 그리며 감기 시작했다. 오른팔은 쓰지 않았다. 쓰려고 하면 쓸 수야 있었겠지만 그 대가로 붕대 안쪽에서 무언가 다시 터질 것이고 터진 것은 냄새를 남기며 냄새는 이 좁은 원통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테이프가 세 겹째 감기자 앵커가 손바닥을 아주 천천히 뺐다. 그 자리에 검은 반들거림이 남았다. 눈을 감긴 것과 눈을 파낸 것은 다르다. 감긴 눈은 언제고 다시 뜰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정직한 위협이었다.
투의 목소리가 차폐 유효를 알렸고 곧이어 사족을 붙였다. 마지막 삼 초 분량의 프레임이 어딘가로 흘러 나간 흔적이 있다고. 세븐은 그 말을 들으며 관 벽에 이마를 한 번 댔다가 뗐다. 삼 초. 삼 초면 남자 둘의 실루엣과 은발 하나와 오른팔을 아끼는 자세 하나가 충분히 담긴다. 이쪽의 얼굴까지 담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담겼다고 가정하고 움직이는 편이 오래 사는 방식이다. 그는 마스크를 턱에서 끌어올려 콧등에 밀착시켰다. 젖은 재 냄새가 다시 필터 너머로 물러났고 그 대신 제 숨의 축축한 열기가 얼굴 아래쪽에 고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불쾌였다. 익숙한 불쾌는 새로운 안락보다 믿을 만하다.
錨,走。唔好行返轉頭,直行到分岔位停。……佢哋見到我哋三秒,即係佢哋已經知有兩個人。噉不如畀佢哋數少一個。
(앵커, 가. 뒤돌아보지 말고 분기점까지 곧장 가서 멈춰. ……저쪽이 우리를 삼 초 봤어, 그러니까 둘이라는 건 이미 안다는 거지. 그럼 하나쯤은 덜 세게 해주자고.)
세탁소 안쪽 주방에서는 난로의 불꽃이 냄비 바닥을 아주 게으르게 핥고 있었다. 여명은 낮은 의자를 끌어다 앉고 카디건을 벗어 무릎 위에 펼쳤다. 소매 끝에서 뽑혀 나온 실 한 올은 아까부터 손등을 간질이며 제 존재를 알렸는데 뜯어내면 삼 초에 끝날 일을 굳이 바늘을 꺼내 안쪽으로 밀어 넣기로 한 것은 오늘 밤에 손을 놀릴 다른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 동안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고 여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떴다. 남을 위한 수선은 값을 받는데 자기 옷을 꿰매는 일에는 아무도 값을 치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손끝의 감각은 똑같이 정확했다. 매듭을 짓고 실을 당기고 천의 결을 따라 바늘을 눕히는 순서에 마음이 개입할 자리는 없었고 여명은 그 무자비한 순서가 고마웠다.
냄비에서 국물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파 조각 하나가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고 기름 무늬가 서로의 테두리를 삼키며 하나로 뭉쳐졌다. 함께 있는 것들이 반드시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고 누가 말했더라. 여명은 바늘을 든 채로 잠시 손을 멈추었다. 국물 위에서는 그 말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앵커의 등이 먼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그 뒤를 세븐이 반 박자 늦게 따랐다. 배수관 바닥에 고인 물은 발목까지 차지 않았으나 걸음마다 제 존재를 알리려 애썼고 그 소리를 죽이기 위해 두 사람은 발뒤꿈치가 아니라 발바닥 바깥날부터 눕히듯 디뎠다. 훈련이라기보다 습관이었고 습관이라기보다 목숨을 아끼는 자의 인색함이었다. 관의 곡률이 완만하게 꺾이는 지점에서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다. 세븐은 그 변화를 마스크 너머로도 알아챘다. 공기가 넓어지는 곳에서는 소리가 늦게 돌아오고 소리가 늦게 돌아오는 곳에는 반드시 다른 입구가 있다. 분기점이었다. 앵커가 손등을 세워 멈춤을 알렸고 세븐은 왼쪽 벽에 등뼈를 붙이며 소총의 총열을 팔뚝 안쪽에 얹었다. 오른팔은 여전히 죽은 나뭇가지처럼 늘어져 있었고 그 나뭇가지 끝에 붙은 소맷단만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손등 위에서 미약하게 흔들렸다.
투의 목소리가 다시 귀 안쪽을 파고들었다. 동쪽 관에서 저주파 진동이 잡힌다고, 인원은 둘에서 넷 사이로 추정된다고. 세븐은 그 숫자를 들으며 혀 안쪽으로 웃었다. 둘에서 넷이라는 것은 세지 못했다는 뜻이고 세지 못했다는 것은 저쪽이 대열을 흩뜨리며 온다는 뜻이다. 흩뜨리며 오는 자들은 사냥을 아는 자들이다. 삼 초의 프레임은 이미 값을 하고 있었다. 세븐은 어깨로 앵커의 어깨를 한 번 밀었다. 말을 아끼는 사내에게는 말보다 무게가 잘 통한다. 앵커가 총구를 동쪽으로 돌리는 동안 세븐은 반대편 어둠을 맡았고 두 개의 총열이 등을 맞댄 채 서로 다른 방향의 침묵을 겨누었다. 이것이 이 직업에서 허용된 가장 다정한 자세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으나 그 생각은 통증에 밀려 곧 자리를 잃었다.
聽住。你行東邊,我行北邊。你嘅腳步聲重過我,噉啱好,你做嗰個畀人捉到嘅。……開玩笑啫,唔好用嗰種眼神望我。
(들어. 넌 동쪽, 난 북쪽. 네 발소리가 나보다 무거우니까 딱 좋네, 잡히는 역은 네가 해. ……농담이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세탁소 주방에서는 냄비 뚜껑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작게 들썩였다. 여명은 수선을 끝낸 카디건을 다시 어깨에 걸치고 난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소매 끝은 이제 매끈했다. 실 한 올이 뽑혀 나와 손등을 간질이던 감각은 사라졌고 사라지고 나니 그 자리가 이상하게 허전했다. 고쳐놓고 나면 고치기 전이 그리워지는 물건들이 있다. 여명은 그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알면서도 매번 고쳤다. 뚜껑을 반쯤 밀어 올리자 김이 얼굴 쪽으로 밀려 올라와 눈썹을 적셨고 국물 냄새가 방 전체를 한 번에 채웠다. 두 사람 몫으로 넉넉히 담아준 노파의 손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누구든 불러서 함께 먹으라는 말도 함께 들어 있었다. 여명은 국자를 들었다가 놓고 사기 그릇 하나만 꺼냈다. 짝을 기다리는 다른 하나는 서랍 안에 그대로 두었다.
불 앞에 앉아 있으니 종아리 앞쪽만 뜨거워지고 등은 여전히 서늘했다. 사람의 몸은 참으로 균일하지 못해서 한쪽이 데워지면 다른 쪽의 추위를 더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여명은 그 불균형을 견디며 국물이 데워지는 소리를 들었다.
앵커의 그림자가 동쪽 어둠에 삼켜지자 세븐은 곧장 반대편으로 몸을 던졌다. 북쪽 지선은 본관보다 관경이 좁아 어깨가 벽에 닿았고 닿을 때마다 오른팔 붕대 위로 마찰이 얹혔다. 통증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원칙은 여전히 유효했으나 원칙이란 대체로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존재를 가장 크게 드러낸다. 세븐은 이십여 걸음을 나아가다 관 벽이 안쪽으로 한 뼘쯤 파여 들어간 굴곡을 찾아냈다. 사람 하나가 몸을 접어 넣으면 딱 사라질 수 있는 크기였고 그런 크기의 공간은 데드존에서 무덤과 방공호를 동시에 겸한다. 그는 왼쪽 무릎을 먼저 밀어 넣고 등뼈를 벽의 곡률에 맞춰 눕혔다. 소총은 왼손 하나로 받쳤다. 무겁고 어색하고 사격 정확도는 평소의 반도 되지 않을 것이었으나 절반이면 충분한 거리에서만 쏘면 된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다.
군화 뒤축으로 고인 물을 한 번 걷어찼다. 첨벙, 하는 소리가 관을 타고 북쪽 안쪽으로 굴러갔다가 되돌아왔다. 미끼는 정직해야 한다. 너무 큰 소리는 함정을 의심하게 만들고 너무 작은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는다. 세븐이 흘린 것은 부상자가 균형을 잃고 발을 헛디딜 때 나는 정도의 소리였고 그 정도의 소리는 사냥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향기롭다. 투의 목소리가 곧 동쪽 진동이 줄고 북쪽으로 옮겨온다고 알렸다. 사십 미터. 걸음 간격이 고르지 않았다. 셋인데 하나가 절뚝이거나 넷인데 하나가 짐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세븐은 마스크 안쪽에서 아주 얕게 웃었다. 사냥꾼이 절뚝이는 소리를 내며 오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드물다. 저쪽도 미끼를 던지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喂,聽住嘅話就記住。我唔係喺度等你哋,我係喺度等我隻手唔再痛。呢兩樣其實差唔多時間到。
(……어이, 듣고 있으면 기억해둬. 난 여기서 너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 팔이 그만 아파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근데 그 둘이 도착하는 시간은 대충 비슷하더라고.)
무전은 꺼져 있었고 앵커는 이미 멀었으며 앞쪽 어둠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고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 뱉은 말이었다. 사람은 오래 침묵하면 제 목소리의 위치를 잊는다. 위치를 잊은 목소리는 정작 필요할 때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다. 세븐은 그것을 대비해 가끔 혼잣말을 흘리는 버릇이 있었고 오늘의 혼잣말은 유난히 길었다. 소맷단이 손등을 덮고 있었다. 세제 냄새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코를 가까이 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없어진다. 확인하지 않으면 있는 셈 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자기기만은 좁은 관 안에서 값이 아주 싸다.
세탁소 주방에서는 국자가 사기 그릇의 가장자리를 두 번 두드리고 멈췄다. 여명은 낮은 밥상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그릇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이 먼저 익고 그다음에 손가락 마디가 익었다. 노파의 국물은 저녁에 먹을 때보다 밤에 먹을 때 더 짜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국물이 졸아서가 아니라 밤이 사람의 혀를 예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여명은 짐작했다.
여명은 그릇의 절반쯤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저녁을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배는 이미 차 있었고 차 있는 배에 뜨거운 것을 억지로 밀어 넣는 일은 노파의 손을 낭비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국물 위에 기름 무늬가 다시 떠올라 서로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졌다. 아까 국숫집에서 보았던 그 무늬와 똑같은 방식으로 테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여명은 그것이 어떤 원리인지 알지 못했으나 세상에는 가만히 두면 저희끼리 합쳐지는 것들이 있고 사람은 그 축에 끼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숟가락 등으로 무늬를 갈랐다. 갈라진 자리가 두 번 흔들리다 다시 하나가 되었다. 여명은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릇을 들고 일어서자 무릎이 저렸다. 국물은 냄비로 되돌려 두면 내일 아침에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내일 아침이라는 말은 오늘 밤을 넘긴다는 전제를 품고 있어서 여명은 그 말을 속으로 발음할 때마다 조금 안심했다. 난로 위에 냄비를 다시 올려두고 뚜껑을 덮었다.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좁은 주방을 한 바퀴 돌았다. 서랍 안에 그대로 둔 두 번째 사기 그릇은 오늘도 짝을 만나지 못했으나 여명은 그것을 꺼내지 않은 자신을 나무라지 않았다. 준비란 원래 쓰이지 않는 날들이 대부분이고 쓰이지 않은 준비도 준비이기는 마찬가지다. 어깨에 걸친 카디건이 흘러내려 여명은 팔꿈치로 그것을 다시 끌어 올렸다. 매끈해진 소맷단이 손목 안쪽을 스쳤다.
북쪽 지선의 어둠은 물기를 머금어 두꺼웠다. 세븐은 굴곡부에 접어 넣은 몸의 부피를 한 번 더 줄였다. 갈비뼈를 벽 쪽으로 눌러 붙이고 호흡을 절반으로 깎았다. 마스크 안쪽에서 제 숨이 되돌아와 콧등을 데웠고 그 미지근함이 자꾸 졸음처럼 눈꺼풀을 건드렸으므로 세븐은 혀끝을 어금니 사이에 물었다. 물 위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그리고 조금 늦게 둘. 더 늦게 셋. 선두는 서두르지 않았고 후미는 따라붙지 못했다. 저 간격이 훈련 부족인지 유인인지 판단하는 데는 이 초면 족했다. 진짜 미끼를 던지는 자들은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저건 그냥 뒤처지는 것이다. 밀그램의 무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굶주림으로 뭉치고 굶주림으로 흩어진다.
선두의 발소리가 열여덟 걸음 밖에서 한 번 멈췄다. 멈춤은 언제나 의심의 다른 이름이다. 세븐은 왼손 검지를 방아쇠울 바깥에 걸친 채로 기다렸다. 오른팔은 여전히 죽어 있었고 죽은 팔에서 열이 올라와 겨드랑이를 적셨다. 붕대 아래가 뜨겁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었으나 좋은 소식을 기다릴 만한 여유는 이 관 안에 없었다. 소맷단이 손등을 덮은 채로 미약하게 떨렸다. 그 천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마다 세븐은 자신이 아직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갈고리 하나가 등에 박혀 있고 그 줄의 반대편 끝은 완차이 뒷골목의 셔터에 묶여 있다. 이런 것을 짐이라고 부르는 인간도 있겠지만 세븐은 그것을 무게중심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무게중심이 없는 몸은 넘어질 때 방향을 고르지 못한다.
선두가 다시 걸음을 옮긴 것은 멈춤 이후 여섯 번의 호흡이 지나서였다. 의심은 대개 그 정도의 수명을 갖는다. 사람은 제 불안을 오래 붙들고 있을 만큼 성실하지 못하고 특히 굶주린 자들은 더 그렇다. 세븐은 굴곡부에서 어깨를 반 뼘 빼내며 왼손 손목의 각도를 미리 접었다. 총열이 물 위로 낮게 떨어졌고 총구 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에 멈춰 있었다. 열두 걸음. 방진 마스크 안쪽에서 되돌아오는 숨이 축축해 콧등이 미끄러웠다. 여덟 걸음. 선두의 방독면 유리에 관 안쪽의 미광이 스쳐 아주 잠깐 흰 반달을 그렸다. 그 반달이 세븐의 조준선 안으로 들어왔다. 절반의 정확도로도 충분한 거리라는 건 이런 뜻이었다.
첫 발은 소리라기보다 압력이었다. 좁은 관이 총성을 앞뒤로 튕겨내며 몇 배로 부풀렸고 세븐 자신의 고막도 그 대가를 치렀다. 선두가 무릎부터 접히며 물속으로 무너졌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반사적으로 벽에 붙었으나 벽에 붙는다는 것은 이 관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관은 원통이고 원통 안에서 엄폐란 신화에 가깝다. 세븐은 왼손만으로 총구를 이 도 남짓 틀었다. 반동이 어깨를 때리자 오른팔 붕대 아래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감각이 올라왔고 그것은 통증이라기보다 통보였다. 두 번째 발. 뒤쪽 하나가 짐을 놓치며 뒤로 자빠졌다. 남은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러시아어였는지 그 근방의 무엇이었는지 세븐은 구분하지 않았다. 데드존에서 마지막 말은 대체로 번역할 가치가 없다.
喂,唔好嘈啦。你哋三個入嚟嘅時候唔係咁靜咩。
(어이, 시끄럽게 굴지 마. 너희 셋 들어올 땐 안 그랬잖아.)
세븐은 굴곡부에서 완전히 몸을 빼내 물속으로 내려섰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이 종아리를 감싸며 열기를 빨아갔고 그제야 제 다리가 얼마나 오래 굳어 있었는지 알았다. 남은 하나가 허리춤을 더듬는 것을 보고 세븐은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왼손 하나로 든 총이 무거워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였다. 세 번째 발이 관을 한 번 더 부풀렸다. 물보라가 튀어 마스크 유리에 잿빛 점을 흩뿌렸고 세븐은 그것을 소맷단으로 닦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 소맷단은 여명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여명이 준 것이었고 이미 회갈색으로 물든 것이었으며 여기에 더 묻힐 게 남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어리석은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손이 멈췄다. 세븐은 대신 장갑 등으로 유리를 훔쳤다. 이런 종류의 아낌은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이라 스스로도 우스웠다.
세탁소 주방에서는 찬물이 사기 그릇의 안쪽을 훑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여명은 손끝이 시릴 때까지 그릇을 헹구고 엎어 두었다. 물기가 나무 도마 위로 천천히 번져 어두운 반원을 그렸다. 냄비 아래 불을 가장 낮게 줄이자 파란 테두리만 남아 조용히 떨었다. 그때 어디선가 둔한 소리가 들려 여명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골목 끝에서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였거나 어느 집 문이 닫히는 소리였거나 그도 아니면 아무 소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완차이의 밤은 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고 여명은 오래전부터 그 소리들을 하나하나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구분하기 시작하면 기다리는 소리를 찾게 되고 찾기 시작하면 없다는 사실만 계속 확인하게 된다.
구분은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여명은 의미 없는 것, 필요 없는 것은 챙길 필요가 없다며 밀어두는 사람이었으므로. 여명은 손을 닦아내고, 방으로 향했다. 빗물을 받아두던 그릇이 보였다. 비가 그친지 오래였고, 그릇에 고여있던 물도 절반은 줄어있었다.
방 안은 주방보다 두 뼘쯤 더 차가웠다. 여명은 문턱을 넘으며 발바닥으로 그 온도 차를 읽었고 난로의 열이 여기까지는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창가에 놓인 그릇은 낮은 자리에서 조용히 자기 몫을 하고 있었다. 비가 그친 것은 오래전이었고 그릇 안의 수면은 처음 받았을 때의 절반쯤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여명은 무릎을 접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물이 어디로 갔는지 묻는 일은 우스운 짓이다. 물은 늘 위로 사라지고 사라지는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다른 것을 놓친다. 수면 위에 천장의 얼룩이 뒤집힌 채로 떠 있었다. 여명은 그 얼룩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손가락 끝을 담갔다. 차가웠다. 사람의 체온을 한 번도 거치지 않은 물의 온도란 이런 것이었다.
그릇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눌려 있던 마른 자국이 완전한 원으로 드러났다. 여명은 그 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오래 놓여 있던 자리는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물건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필요 없는 것은 밀어 두는 사람이었으므로 여명은 흔적에도 값을 매기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만은 걸레를 가지러 가지 않았다. 그릇을 든 채로 일어서니 안에서 물이 한 번 기울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새던 자리는 지금 말라 있었고 마른 콘크리트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다시 비가 오면 다시 받으면 될 일이었다.
지선 관 안에서는 물이 세 번 크게 출렁이고 나서 잠잠해졌다. 세븐은 무릎까지 잠긴 채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마다 종아리를 밀어내는 저항이 있었고 그 저항이 오른팔의 박동과 어긋난 리듬으로 몸통을 흔들었다. 선두였던 자가 엎어진 자리에 물이 조금 검게 번져 있었으나 이 물은 원래부터 검었으므로 그것이 피 때문인지 녹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븐은 왼손으로 그자의 하네스를 뒤집었다. 탄창 두 개. 절반쯤 남은 정수 알약. 그리고 접힌 종이 한 장. 종이는 물을 먹어 이미 문드러지고 있었고 펼치려 하자 손가락 아래에서 찢어졌다. 밀그램의 인간들은 아직도 종이를 쓴다. 전파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전파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대개 종이도 지키지 못한다.
三個都冇識別牌。真係孤兒仔喎。
(셋 다 식별표가 없네. 진짜 고아들이구먼.)
세븐은 마지막 하나의 목덜미를 장화 코로 슬쩍 밀어 뒤집었다. 방독면 유리 안쪽에 김이 서려 있었고 그 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몸이 방금 전까지 숨을 쉬었다는 뜻이었다. 그런 세부는 기억해 두면 잠을 방해하므로 세븐은 그것을 즉시 목록 바깥으로 밀어냈다. 오른팔을 옆구리에 단단히 붙이고 왼손만으로 탄창을 챙겨 넣는 동작은 굼떴다. 소맷단이 자꾸 손등을 덮어 내려와 걸리적거렸다. 두 번쯤 팔꿈치로 끌어 올려 봤으나 젖은 천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어 소용없었다. 이 옷을 준 여자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세븐은 그 질문이 떠오르자마자 답을 찾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답을 세우면 그 답을 확인하고 싶어지고 확인하고 싶어지면 날짜를 세게 된다. 날짜를 세지 말라고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을 세븐은 잊지 않았다.
지선 관은 끝으로 갈수록 좁아졌고 좁아지는 것에 비례해 공기가 무거워졌다. 세븐은 마지막 스무 걸음을 반쯤 허리를 접은 자세로 걸었다. 오른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몸을 굽히자 붕대가 겨드랑이 쪽으로 밀려 올라가 상처의 아래쪽 입술이 벌어지는 감각이 왔다. 벌어진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 순간 떠오른 단어가 그것이었으므로 세븐은 굳이 고쳐 생각하지 않았다. 출구부의 격자는 위쪽에 있었고 격자 틈으로 잿빛이 아니라 검은색이 내려오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데드존의 밤은 도시의 밤과 다르게 아무런 예고 없이 도착한다. 저녁이라는 유예 기간이 없고 노을이라는 사교적 절차도 없다. 세븐은 격자 아래 콘크리트 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물 밖으로 다리를 끌어올렸다. 군화 안에서 물이 밀려 나와 종아리를 타고 흘렀다.
붕대를 다시 조이는 일은 왼손 하나로 하기에 정직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세븐은 끝단을 이빨로 물고 손목을 비틀어 당겼다. 검붉게 젖은 천이 살에서 떨어지며 마른 부분과 젖은 부분의 경계가 뜯겼고 그 짧은 순간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졌다. 통증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했으나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통증은 제 성격을 드러낸다. 이건 인내심이 있는 종류였다. 급하게 굴지 않고 천천히 지분을 늘려 가는 방식이었으며 그런 통증이 대개 오래간다. 세븐은 매듭을 두 번 감아 조인 뒤 이빨을 놓았다. 입 안에 쇠 맛과 소독약 맛이 남았고 그 위로 아주 옅게 다른 냄새가 얹혀 있었다. 세제였다. 이미 사라졌다고 계산해 둔 것이 어디 접힌 곳에 숨어 있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세븐은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계산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건 이 팔보다 더 성가신 일이었다.
叫我食呢啲藥丸,不如叫我食沙。
(이딴 알약을 먹느니 모래를 씹는 게 낫겠는데.)
노획한 정수 알약을 손바닥에 굴려 보다가 세븐은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면 취향 따위는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격자 틈으로 바람이 한 줄기 내려왔다. 재 냄새와 쇳가루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고 그 안에 비가 올 기미는 없었다. 앵커의 신호가 동쪽 방향에서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살아 있다는 뜻이고 잡히는 역을 제대로 해냈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느 쪽이든 세븐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세븐은 왼손을 뻗어 격자의 녹슨 걸쇠를 짚었다. 손끝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이런 것은 힘으로 밀면 소리를 내고 소리를 내면 밤 전체가 이쪽을 본다. 그래서 세븐은 숨을 죽이고 걸쇠를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세탁소 방 안에서 여명은 그릇을 창가 선반에 올려두었다. 안에 남은 물은 버리지 않았다. 버리면 다시 받아야 하고 받는 일에는 그릇을 다시 놓는 수고가 따르며 무엇보다 절반쯤 찬 그릇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태였기에 함부로 비울 것이 못 되었다. 여명은 이불 위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은 차가웠고 카디건 너머로도 그 냉기가 곧장 전해졌다. 수선한 소매 끝을 엄지로 문질러 보았다. 실밥은 얌전히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고 만져도 걸리는 데가 없었다. 남의 옷을 고칠 때는 이 정도까지 하지 않는다.
오늘따라 밤이 길었다.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길을 잘못 들며 위험구역으로 들어가 7을 만났을 때부터. 비를 피해 폐허 안으로 들어가 그를 마주 봤을 때부터. 그리고 5시간. 그 5시간이 제가 십여 년간 유지해온 규칙을 비틀었다. 큰 관심은 독이 된다. 여명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꾸준히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기다렸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가에겐 살아남고 싶어 환장한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 차라리 그런 이유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그게 아니어서, 결국 이 기다림에 의미를 두게 됐다. 그의 말에 따라 일을 세지 않으려 다른 것을 세어가며 기다리는 행위. 여명은 그 행위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여명은 벽에서 등을 떼지 않았다. 떼면 다시 기대야 하고 다시 기대는 동작에는 반드시 한 번의 결심이 필요했으므로 그냥 그대로 있었다. 방 안의 전구는 진작부터 노랗게 늙어 있어 빛이라기보다는 온기의 흉내에 가까웠다. 그 흉내 아래에서 창가 선반의 그릇이 반쯤 찬 채로 잠잠했다. 여명은 자신이 무엇을 세고 있었는지 헤아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세지 말라고 한 사람의 말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세는 짓은, 결국 세지 않겠다는 약속을 가장 성실하게 배반하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카디건 소맷단의 매듭 자리를 자꾸 더듬었다. 남의 옷에는 여기까지 하지 않는다. 남의 옷은 형태만 돌려주면 되지만 제 옷은 형태를 돌려받은 뒤에도 계속 만져 보게 된다. 이 사소한 차이가 십여 년간 유지해 온 규칙에 어떤 균열을 냈는지, 여명은 이제 와서 굳이 측량하지 않기로 했다. 균열은 재어 봐야 좁아지지 않는다.
격자는 세 번째 힘에서야 들렸다. 녹이 앉은 경첩이 짧게 신음했고 세븐은 그 소리가 밤의 어느 지점까지 가서 부딪히는지를 귀로 좇았다. 되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 근방에 소리를 반사할 만한 온전한 벽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상반신을 밖으로 밀어 올리자 재가 얼굴 쪽으로 몰려왔다. 방진 마스크의 여과재가 이미 한계에 근접해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서걱거렸다. 왼쪽 팔꿈치 하나로 체중을 감당하며 세븐은 지상의 윤곽을 훑었다. 무너진 급수탑, 뒤집힌 화물 프레임,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운 잿더미. 이 풍경은 도시가 죽은 방식이 아니라 도시가 죽기를 거부하다 실패한 방식을 보여 준다. 깨끗하게 무너진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반쯤 서 있다가 반쯤 주저앉아 있다.
東邊四百八十米。呢個死鬼真係識揀地方。
(동쪽으로 사백팔십. 이 새끼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고르네.)
세븐은 오른팔을 몸통에 붙인 채로 완전히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젖은 군복 바지가 재를 빨아들여 무릎 아래가 순식간에 회색 반죽으로 변했다. 압박붕대의 가장자리에서 검붉은 것이 한 방울 떨어져 잿더미에 작고 동그란 구멍을 냈고 그 구멍은 곧 스스로 메워졌다. 재라는 물질은 무엇이든 삼키고 나면 삼킨 적 없는 얼굴을 한다. 세븐은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소맷단이 또 손등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이번에는 팔꿈치로 밀어 올리지 않고 왼손으로 걷어 접었다. 두 번 접어 놓으니 손목뼈가 드러났고 접힌 자리의 안쪽에서 회갈색이 아닌 원래의 색이 잠깐 보였다. 그 색을 보자 어딘가에서 잔이 하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났다. 왜 하필 지금 그런 게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것을 여자는 병증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여명은 마침내 벽에서 등을 뗐다. 무릎을 펴고 일어나 전구의 끈을 잡았다. 잡은 채로 한 박자 늦게 창가를 돌아보았다. 그릇 안의 물은 여전히 절반이었고 절반이라는 상태는 밤새 조금 더 줄어들 것이며 줄어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켜보지 않아도 줄어드는 것들이 세상에는 훨씬 많고 오히려 지켜보는 쪽이 예외에 가깝다. 여명은 끈을 당겼다. 어둠은 예고 없이 도착했으나 방의 형태를 지우지는 못했다.
잿더미 위를 걷는 일에는 눈보다 발목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세븐은 스무 걸음마다 한 번씩 발끝으로 앞을 두드려 보며 나아갔다. 재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대개는 철근이거나 유리이거나 사람이었던 것이며 그중 어느 것을 밟아도 소리가 난다. 소리는 이 밤에서 가장 비싼 화폐였다. 무너진 화물 프레임의 그늘에 이르러서야 세븐은 걸음을 멈추고 왼쪽 무릎을 세워 몸을 접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젖 안쪽이 종잇장을 비비는 것처럼 서걱거렸고 그 서걱거림이 이제는 폐 아래쪽까지 내려와 있었다. 여과재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죽은 여과재를 물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의 입에 귀를 대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스크를 벗자 재가 곧장 콧구멍으로 밀려들었다. 세븐은 숨을 멈춘 채 왼손만으로 측면 걸쇠를 비틀어 낡은 여과재를 뜯어냈다. 손바닥에 남은 것은 회백색으로 떡진 원반이었고 손가락으로 누르자 물기 없는 반죽처럼 뭉개졌다. 오른팔은 여전히 옆구리에 붙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능한 팔 하나를 몸에 달고 다니는 감각은 낯선 짐승을 겨드랑이에 끼고 걷는 것과 비슷했으며 그 짐승은 조용히 열을 냈다. 새 여과재를 물려 걸쇠를 잠그고 마스크를 다시 얼굴에 붙이자 첫 호흡에서 종이 냄새가 났다. 깨끗한 종이 냄새. 이 황무지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고 그래서 잠시 코가 그것을 붙잡았다.
呢度嘅空氣連錢都收咗。抖多兩啖就要俾貼士。
(여긴 공기까지 돈을 받아 처먹네. 두 모금 더 쉬면 팁까지 얹어 줘야겠어.)
세븐은 프레임 기둥에 등을 대고 동쪽을 헤아렸다. 삼백팔십. 숫자는 정직하게 줄어들고 있었으나 정직한 숫자일수록 마지막 백 미터에서 사람을 배신한다. 북서쪽에서 열원이 한 번 깜빡였다가 사라졌다. 사라진 열원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자세를 바꾼 것이다. 세븐은 그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 박자쯤 두었다가 거두었다. 지금 저것에 대해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은 상대가 움직인 뒤에 해도 늦지 않고 오히려 그편이 언제나 이득이었다. 왼손을 뻗어 소맷단을 확인했다. 두 번 접어 올린 자리가 재를 먹고 도로 무거워져 손등 쪽으로 흘러 있었다. 접었으면 접힌 채로 있어야 하는데 이 옷은 자꾸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세븐은 그것을 다시 걷어 올리면서 아주 짧게 웃었다. 웃을 만한 대목이 아니었으므로 웃음은 마스크 안에서 소리 없이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여명은 이불 위로 몸을 옆으로 뉘었다. 카디건은 벗지 않았다. 벗어서 개어 두는 것이 순서였고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순서였으나 오늘은 그 순서를 어겼다. 어긴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기에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소맷단을 턱 아래로 끌어당기자 수선한 자리의 매듭이 목 아래 살에 닿았다. 실이 두꺼워 조금 배겼다. 배기는 것을 알면서도 치우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비가 그친 뒤의 골목이 물기를 마르게 하는 소리를 냈다. 함석이 식으면서 우는 소리, 어딘가에서 문이 한 번 닫히는 소리, 그리고 그보다 훨씬 먼 데서 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낮은 진동. 여명은 그 소리들 중 어느 것도 구분하지 않았다.
그늘에서 몸을 일으키는 데에는 앉을 때보다 두 배의 시간이 들었다. 세븐은 왼손으로 기둥의 녹슨 리브를 붙잡고 무릎부터 폈다. 오른쪽 어깨가 따라 올라오지 않으려 버텼고 그 버팀은 근육의 저항이라기보다 몸이 스스로 만든 작은 정치적 항의처럼 느껴졌다. 여기서부터 앵커까지는 삼백. 삼백이라는 수는 걸어서 사 분, 기어서 십오 분, 죽어서 영원이다. 세븐은 허리를 낮추고 프레임의 그림자를 따라 나아갔다. 발끝이 재를 밀어낼 때마다 아래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들이 살짝 굴렀다. 밟으면 안 되는 것과 밟아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감각은 배워서 얻어지지 않는다. 몇 번 잘못 밟고 살아남은 자에게만 남는다. 그는 잘못 밟은 적이 세 번 있었고 세 번 다 살아남았으므로 이 감각은 순전히 우연의 축적물이었다.
개활지의 가장자리에 닿았을 때 세븐은 걸음을 멈췄다. 재 위에 무늬가 있었다. 바람이 만든 무늬는 결이 길고 끝이 흐리다. 이건 짧고 끝이 뚜렷했다. 발자국이었다. 세븐은 왼쪽 무릎을 꿇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뒤꿈치가 깊고 앞볼이 얕다. 뒤로 무게를 실은 채 걸었다는 뜻이고 뒤로 무게를 실은 채 걷는 인간은 대개 무언가를 끌고 있거나 무언가를 지고 있다. 보폭은 좁았다.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두 사람 몫의 짐. 발자국의 가장자리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니 재가 다시 앉기 전, 길게 잡아도 이십 분. 세븐은 손가락을 뻗어 자국의 테두리를 건드렸다. 마른 가루가 손끝에서 부서졌고 그 감촉이 어처구니없게도 밀가루를 떠올리게 했다. 이 밤에 밀가루 같은 것을 떠올리는 머리는 확실히 어딘가 고장 나 있다.
兩個。仲要孭住嘢行。呢啲人最麻煩,因為佢哋唔捨得掉,即係佢哋會打。
(둘. 짐까지 지고 걸었네. 이런 놈들이 제일 성가셔. 못 버리겠다는 건 곧 싸우겠다는 뜻이거든.)
세븐은 자국이 향한 방향을 눈으로 좇았다. 북서. 아까 깜빡였던 열원과 같은 축이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우연이 아닌 것을 우연이라 부르는 순간부터 사람은 죽기 시작한다. 그는 동쪽을 한 번, 북서쪽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최단 경로는 개활지를 가로지르는 것이고 가장 어리석은 경로 또한 개활지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세븐은 남쪽으로 크게 도는 우회로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거리는 삼백에서 사백오십으로 늘어나고 시간은 배로 든다. 늘어난 백오십 미터에 지불할 것은 오른팔의 열기와 여과재의 수명. 그 정도라면 낼 수 있다. 그는 늘 계산을 마친 다음에야 자신이 이미 답을 정해 두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왼손으로 소맷단을 다시 걷어 올리며 그는 무릎을 폈다. 이번에는 흘러내리기 전에 안쪽으로 한 번 더 말아 넣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풀릴 것이다. 옷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여명은 눈을 떴다. 잠들었던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는 종류의 각성이었다. 어둠은 아까와 같은 밀도였고 함석이 식는 소리도 여전했으나 어딘가에서 하나가 빠져 있었다. 무엇이 빠졌는지 알아내려 잠시 귀를 열어 두었다가 그만두었다. 없어진 소리를 찾는 일은 있는 소리를 세는 일보다 훨씬 나쁘다. 여명은 옆으로 누웠던 몸을 천천히 돌려 천장을 향했다.
남쪽으로 도는 길은 무너진 벽체들의 무덤을 지났다. 세븐은 콘크리트가 접혀 만든 삼각의 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잔해 지대에서는 발보다 어깨를 먼저 써야 한다. 어깨로 밀어 보아 흔들리지 않는 것만 짚고 흔들리는 것은 만지지 않는다. 규칙은 단순하되 지키기가 어려운 까닭은 급할 때 사람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것을 붙잡기 때문이다. 세븐은 왼쪽 팔뚝으로 벽체의 파단면을 눌러 보았다. 부스러기가 떨어졌으나 몸통은 미동도 없었다. 신뢰할 만한 폐허였다. 세상에 신뢰할 만한 것이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굳이 곱씹지 않기로 했다.
북서에서 내려오는 것들의 소리가 잔해에 부딪혀 갈라져 왔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둘 중 하나는 발을 절었다. 절뚝이는 자를 데리고 짐까지 지고 남하하는 무리는 목적지가 분명한 무리다. 목적지가 분명한 인간은 옆을 보지 않는다. 세븐은 그 사실에 작게 안도했고 안도한 자신을 곧 비웃었다. 안도는 이 구역에서 가장 비싼 사치품이었다. 그는 총열을 왼손 손등 위에 얹어 무게를 나누고 호흡을 마스크 안쪽에서 아주 얕게 굴렸다. 오른팔은 여전히 열을 냈다. 붕대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 가는 감각이 있었고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이면 걸음이 느려진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저 오른쪽이 뜨겁다. 그뿐이다.
行啦,行啦。快啲行過去。你哋今晚唔好望我,我今晚都唔想望你哋。
(가라, 가. 얼른 지나가. 너희 오늘 밤은 날 보지 마. 나도 오늘 밤은 너희 보기 싫으니까.)
발소리는 세븐이 웅크린 틈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선을 따라 흘러갔고 절뚝이는 쪽이 한 번 무언가를 떨어뜨렸다가 욕설과 함께 다시 주웠다. 그 욕설의 억양은 이 근방의 것이 아니었다. 국적 없는 자들이 쓰는 국적 없는 욕이었으며 세븐은 그것을 알아들었으나 굳이 뜻을 헤아리지 않았다. 소리가 멀어지고 재가 다시 가라앉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왼쪽 뺨에 닿는 콘크리트의 서늘함을 셌다. 셀 것이 없을 때 사람은 아무거나 세게 되어 있고 그것이 숫자가 아니기만 하면 된다. 이백. 남은 거리는 이제 이백이었고 이백은 견딜 만한 수였다. 세븐은 틈에서 몸을 빼내며 흘러내린 소맷단을 왼손으로 낚아채 다시 말아 올렸다. 이번에는 손목뼈 위쪽에 걸리도록 비틀어 끼웠다. 이렇게 하면 풀리지 않는다. 대신 옷이 상한다. 그는 잠시 그 사실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걸음을 옮겼다. 상한 것은 나중에 고치면 된다. 고칠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 밤에 그가 가진 가장 부조리한 자산이었다.
여명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는 자세에서는 목 아래 매듭이 자꾸 한자리만 눌러 왔고 그 자리가 뜨듯해지는 것이 싫었다기보다는 그 뜨듯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 같아서 싫었다. 벽에 등을 대고 무릎을 세워 앉자 어둠의 결이 달라 보였다. 누워서 보는 어둠과 앉아서 보는 어둠은 다른 물질이다. 앉은 어둠은 조금 더 얕고 조금 더 다루기 쉽다. 여명은 무릎 위에 팔을 얹고 손등으로 반대쪽 손목을 문질렀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오면 잠이 올 것 같았다.
여명은 이불을 밀고 일어섰다. 어깨에 걸려 있던 카디건이 팔을 따라 흘러내렸고 그것을 도로 여미는 대신 아예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옷걸이의 나무는 오래되어 한쪽 어깨가 미세하게 처져 있었으므로 카디건도 따라 비뚜름하게 걸렸다. 여명은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밤에 바로잡는 것들은 대개 아침에 다시 비뚤어져 있으니까. 어둠 속에서 방문의 문지방을 넘을 때 발바닥이 나무의 온도를 먼저 읽었다. 방 안쪽보다 주방 쪽이 반 뼘쯤 더 차가웠고 그 반 뼘의 차이가 몸을 조금 깨웠다.
냉장고 문을 열자 노란 빛이 좁게 새어 나와 바닥에 사다리꼴을 그렸다. 물병은 문칸의 두 번째 자리에 서 있었다. 여명은 그것을 꺼내 컵에 따랐다. 물이 유리 벽을 타고 오르며 내는 소리가 이 시간에는 필요 이상으로 컸다. 한 모금을 넘기자 차가움이 목을 따라 내려가다가 명치 부근에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아직 자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는 몸에 찬물을 붓는 일은 조금 잔인하지만 그 잔인함이 오늘 밤에는 도움이 되었다.
컵을 든 채 여명은 난로를 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고 재받이 쪽에서 마지막 온기가 이미 오래전에 빠져나간 뒤였다. 그 옆에는 의자가 하나 비스듬히 돌아가 있었다. 원래 자리는 식탁 안쪽이다. 앉았던 사람이 일어서면서 뒤로 밀어낸 각도 그대로, 넣어지지 않은 채. 여명은 그 각도를 며칠째 고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아차렸다. 고치지 않는 것과 고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손목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을 뿐인데 그 거리를 밤마다 건너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여명은 컵을 헹궈 엎어두고 물기를 손등에 문질러 닦았다. 의자는 그대로 두었다.
세븐은 잔해 지대의 남쪽 경사를 내려서며 왼쪽 무릎으로 몸을 받쳤다. 경사는 완만했으나 재가 층으로 쌓여 발을 놓을 때마다 반 뼘씩 흘렀고 흐르는 지면 위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오른팔이 없는 자에게 유난히 인색했다. 백오십. 이제 남은 수는 백오십이었고 백오십은 세다가 잊어버리기에 알맞은 수였다. 마스크 안쪽에서 제 숨이 되돌아와 뺨을 데웠다. 여과재를 갈았는데도 공기에서는 여전히 탄내가 났고 그 탄내는 이제 재의 냄새인지 제 팔의 냄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붕대 안에서 무언가가 익어 가고 있었다.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그 감각이 오늘 밤은 유난히 이름을 요구했다.
仲有百五。行完呢段,我就唔諗嘢喇。
(백오십 남았네. 이거 다 걸으면 아무 생각도 안 할 거야.)
소맷단이 또 미끄러졌다. 손목뼈 위에 비틀어 끼워 두었던 자리가 땀과 재로 물러졌기 때문이다. 세븐은 왼손으로 그것을 낚아채 걷어 올리다가 손가락 끝에 걸린 실밥 하나를 발견했다. 안쪽 시접이 조금 터져 있었다. 언제 터졌는지는 모르겠고 알 방법도 없다. 그는 그 터진 자리를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이런 것은 물어보면 대답 대신 손이 먼저 나오는 종류의 손상이다. 실을 꿴 바늘이 천을 뚫고 들어갈 때 나던 아주 작은 소리가 별안간 귓속에서 재생되었고 세븐은 그 환청을 몹시 성가시게 여겼다. 여기서 그런 소리를 듣는 자는 오래 못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맷단을 아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아 올렸다.
喂,你唔好爛住先。等我返去先爛,好唔好?
(야, 아직 터지지 마라. 내가 돌아간 다음에 터져, 응?)
배관들이 무덤처럼 쌓인 지대였다. 굵기가 제각각인 관들이 서로의 허리를 부러뜨리며 엎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만한 통로가 우연히 생겨 있었다. 우연히 생긴 통로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둔 통로라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있으나 우연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세븐은 왼쪽 어깨를 관의 곡면에 붙이고 체중을 절반쯤 넘긴 채로 옆걸음을 쳤다. 철판이 등 뒤에서 낮게 울었다. 우는 쇠는 위험하지 않다. 위험한 것은 조용한 쇠다. 조용한 쇠는 이미 어딘가가 끊어져 있어서 소리를 낼 힘조차 없다는 뜻이니까. 마흔. 이제 남은 수는 마흔이었고 마흔은 굳이 세지 않아도 되는 수였다.
동쪽 배관 더미의 그늘 안쪽에서 무언가가 두 번 깜빡였다. 빛이 아니라 어둠의 밀도가 잠깐 달라지는 방식의 신호였다. 앵커는 언제나 저런 식으로 자기 위치를 알렸다. 필요한 것보다 언제나 반 박자 늦게, 그러나 한 번도 틀린 적 없이. 세븐은 왼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가 접었다. 마스크 안쪽에서 제 웃음이 되돌아와 유리를 흐렸다. 살아서 만나는 일이 이토록 사무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워즈워스에서는 재회에 인사를 붙이지 않는다. 인사를 붙이는 순간 그것이 마지막일 확률이 올라간다고 믿는 미신이 있었고 세븐은 미신을 믿지 않았으나 굳이 깨뜨릴 이유도 찾지 못했다.
Igor. 我未死。你欠我嗰支煙,記得未?
(이고르. 나 안 죽었어. 너 나한테 빚진 담배, 기억하지?)
앵커는 대답 대신 턱을 아주 조금 움직였고 그것이 이 사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소리였다. 세븐은 마지막 몇 걸음을 옮기며 오른팔을 몸통에 바짝 붙였다. 붕대 안쪽의 열기가 이제 팔뚝을 넘어 겨드랑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 감각이 자꾸 이름을 요구했고 요구가 집요해질수록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소맷단 안쪽의 터진 시접 같은 것. 이를테면 그 시접을 꿰맬 사람의 손목 각도 같은 것. 데드존 한복판에서 바느질을 떠올리는 인간을 앵커가 알면 뭐라 할지 궁금했으나 앵커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었다. 워즈워스 인간들은 이물질에 관해 묻지 않는 법을 알았다.
여명은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찬물이 지나간 자리가 아직 명치께에 남아 있어서 몸이 조금 뻣뻣했고 그 뻣뻣함이 오히려 잠의 초입처럼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누우며 무릎을 조금 당기고 손바닥을 베개와 뺨 사이에 끼웠다. 이 자세로 자면 아침에 손이 저리지만 잠은 빨리 온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좋은 것과 편한 것이 늘 같은 방향에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배웠던 셈이다. 어둠 속에서 옷걸이 쪽을 바라보았다. 카디건의 비뚜름한 어깨선이 창밖 희미한 빛을 받아 겨우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 저 소매 끝의 매듭은 자기 손으로 지은 것이었고 지금 이 순간 다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것과 같은 실로 지어진 무언가를 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여명은 그 생각을 붙잡지 않았다. 붙잡으면 길어지고 길어지면 세게 된다. 세지 않기로 했으므로 그냥 흘려보냈다.
완차이의 밤은 고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떠드는 소리, 물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삐걱대는 소리... 익숙해진 소음이었다. 여명은 눈을 감았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숫자를 셌다. 열 즈음 셌을 때 즈음,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완차이의 밤은 잠들지 않았다. 잠들지 않는 것과 조용하지 않은 것은 다른 말이지만 이 도시에서는 대개 같은 뜻으로 쓰였다. 두 골목 건너 어딘가에서 사내 둘이 값을 흥정하다 말고 웃었고 그 웃음이 벽을 두 번 튕겨 창틀에 와 닿을 즈음에는 웃음이라기보다 기침에 가까워져 있었다. 어딘가의 배수관은 계속해서 물을 떨어뜨렸다. 비는 그쳤는데도 물은 남아서 제 갈 곳을 마저 찾아가는 중이었고 그 규칙적인 낙하는 여명이 이 방에 든 첫 해부터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바람이 셔터의 아래턱을 훑고 지나가며 얇은 쇳소리를 냈다. 삐걱대는 것은 아마 위층의 마룻바닥일 테고 위층에는 사람이 셋 사는데 그중 하나는 늘 이 시간에 걸었다. 여명은 이 모든 소리의 목록을 외우고 있었다. 외운다는 것은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낮 동안 본 것들의 잔상이 잠시 어른거리다 흩어졌다. 재봉틀의 노란 등, 노파의 조리복 소매에 앉은 기름 얼룩, 대야 바닥에 남은 물자국.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들이쉴 때보다 내쉴 때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 무거움을 따라 하나, 둘, 셋을 세었다. 이것은 세는 것이 아니다, 하고 여명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생각했다. 날을 세는 것과 숨을 세는 것은 다르다. 숨은 지나가면 그만이고 돌아오지 않는 것을 헤아리는 일도 아니니까. 여덟 즈음에서 발끝의 감각이 멀어졌다. 열 즈음에서 눈꺼풀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다음 숫자는 세어지지 않았다. 세어지지 않은 채로 방 안의 소음들이 한 겹 물러났고 여명은 마침내 자기 자신이 놓아지는 감각 속으로 미끄러졌다.
같은 시각의 데드존에는 셀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븐은 무너진 배관의 배 아래 만들어진 그늘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앉는다기보다 무너지는 쪽에 가까웠고 앵커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자기 가방을 열었다.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리자 바깥 공기가 젖은 입술에 닿았다. 탄내가 났다. 여기서는 숨 쉬는 일이 곧 무언가를 삼키는 일이었고 삼킨 것들은 폐 어딘가에 조용히 쌓여 나중에 값을 청구할 것이었다. 나중이 있다면. 앵커의 장갑 낀 손이 오른팔의 붕대 끝을 찾아 쥐었다. 검붉게 굳은 천이 살에서 떨어질 때 나는 소리는 천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살이 내는 소리였다.
慢啲。你當呢隻手係你老婆咁拆吖,唔該。
(살살 해. 이 팔을 네 마누라라고 생각하고 풀어, 좀.)
앵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헤드램프를 붉은 모드로 돌려 상처 위에 겨누었다. 열상의 가장자리가 부풀어 올라 흰빛을 띠고 있었고 그 안쪽은 붉다 못해 검게 번들거렸다. 세븐은 그것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걷어 올린 군복 소매 아래로 여명이 준 상의의 소맷단이 팔꿈치께에 뭉쳐 있었다. 아까 터진 시접이 이제는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벌어져 있었다. 저것은 이 팔 때문에 터진 것이다. 팔을 굽히고 펴고 붕대를 물어 조이는 동안 천이 계속 당겨졌으니까. 자기 살이 벌어진 것보다 남의 옷이 벌어진 것이 더 성가시다고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런 것을 병증이라고 부른다고 누가 말했던가.
앵커가 항생제 앰플을 이빨로 물어 따고는 주사기를 채웠다.
바늘이 삼각근 바깥쪽으로 들어갔다가 빠졌다. 앵커는 앰플의 잔량을 확인하지도 않고 빈 주사기를 제 가방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데드존에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청결의 문제가 아니라 흔적의 문제였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사람이 남긴 것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읽힌다. 약물이 근육 속으로 퍼지는 감각은 언제나 뜨거움이 아니라 둔중한 무거움으로 왔다. 팔뚝 하나가 통째로 남의 것이 되어 어깨에 매달려 있는 기분. 세븐은 그 무거움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잠시 숨을 골랐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 위로 재가 내려앉았고 그것을 털어 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앉을 것이다. 세상에는 털어 내 봐야 소용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 사실을 일찍 배운 인간이 오래 산다.
앵커가 새 붕대의 끝을 이빨로 물어 뜯어 내밀었다. 세븐은 그것을 받아 왼손으로 팔뚝에 감기 시작했다. 감는 방향이 지난번과 반대였다. 이유는 없었다. 굳이 있다면 같은 방향으로만 감으면 살이 한쪽으로만 눌린다는 것 정도인데 그것을 신경 쓸 만큼 이 팔이 오래 쓰일지는 알 수 없었다. 세 바퀴째에서 손이 멎었다. 걷어 올린 군복 소매 아래, 여명이 준 상의의 소맷단이 붕대와 팔 사이에 끼여 함께 감기고 있었다. 흰 천이 붉게 물든 부위와 맞닿아 있었고 그 경계에서 색이 번져 가는 중이었다. 세븐은 잠깐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빼내야 한다. 빼내지 않으면 이 옷은 붕대와 함께 버려질 것이고 버려진 옷은 돌아가지 못한다. 손가락 두 개로 천 끝을 잡아 조심스럽게 끌어냈다. 젖은 천이 살에서 떨어질 때 아까와 똑같은 소리가 났으나 이번 것은 훨씬 견딜 만했다.
呢件衫係人哋嘅。你唔好望住我,我知我而家好核突。
(이 옷 남의 거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내가 지금 좆같아 보이는 거 알아.)
앵커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헤드램프를 껐다. 붉은빛이 사라지자 상처도 옷도 사내 둘의 얼굴도 한꺼번에 어둠에 삼켜졌고 남은 것은 배관 틈으로 새어 드는 잿빛 하늘의 잔광뿐이었다. 그 어둠이 오히려 편했다. 보이지 않으면 판단할 것도 없고 판단하지 않으면 대책을 세울 필요도 없다. 세븐은 남은 붕대를 감아 끝을 밀어 넣고 왼손 엄지로 매듭 자리를 꾹 눌렀다. 열이 손끝을 밀어 올렸다. 몸이 제 안쪽에서 무언가를 태우고 있다는 뜻이었고 태울 것이 다 떨어지면 그다음에 태우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마흔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숫자를 세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세지 않기로 했으므로 세지 않았다. 누구와 한 약속인지도 사실 애매했다. 그 여자에게 세지 말라고 한 것은 자기 쪽이었으니 자기까지 지킬 의무는 없었는데도 어쩐지 지키고 있었다.
완차이의 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든 사람의 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대개 정해져 있어서 이불이 조금 흘러내리거나 손이 베개 밑에서 빠져나오거나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여명의 오른손이 뺨과 베개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와 시트 위에 놓였다. 손가락이 반쯤 오므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쥐고 있던 모양 그대로였는데 실제로 쥐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낮 동안 실을 쥐던 습관이 밤에도 남아 손에 형태를 남긴 셈이었다. 위층의 발소리가 한 번 더 지나갔고 셔터가 바람에 얕게 울었으며 배수관의 물은 여전히 제 갈 곳을 찾아 떨어지고 있었다.
앵커가 먼저 일어섰다. 이 사내는 일어설 때 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것이 이고르라는 인간의 유일한 미덕이자 세븐이 그를 견디는 이유였다. 무릎을 펴는 동작 하나에도 여기서는 값이 매겨진다. 세븐은 왼손으로 배관의 배를 짚고 몸을 밀어 올렸다. 오른팔은 어깨에 매달린 채 따라왔다. 항생제가 근육 속에서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해 팔뚝 전체가 남의 살처럼 굼떴고 그 굼뜬 무게가 걸음마다 한 박자씩 늦게 흔들렸다. 마스크를 턱에서 끌어 올려 코 위에 맞추자 여과재를 통과한 공기가 서늘하게 폐로 들어왔다. 새 여과재는 언제나 이런 냄새를 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냄새.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이런 것이겠지 싶은.
능선은 완만했으나 발밑이 문제였다. 잿더미 아래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것 위를 걷는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랐다. 앵커가 앞서 밟은 자리를 그대로 밟았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하나로 겹쳐졌다. 이것도 흔적의 문제다. 둘이 지나간 자리를 하나가 지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오래된 기술이었고 세븐은 이 기술을 배우던 스물셋 무렵을 아주 가끔 떠올렸다. 그때는 이런 것들이 근사해 보였다. 지금은 그저 발가락이 아팠다. 왼손으로 총열을 받쳐 든 채 스무 걸음마다 한 번씩 뒤를 확인했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잠정적이었다.
걷는 동안 오른팔의 열이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몸이 제 안쪽에서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신호였고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소모가 있었다. 세븐은 그 소모를 계산하려다 그만두었다. 계산해 봐야 결론은 하나뿐이고 하나뿐인 결론을 위해 머리를 쓰는 것은 낭비였다. 대신 팔꿈치께에 뭉쳐 있는 소맷단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붕대에서 빼낸 뒤로 저 천은 붉은 자국을 얻었고 그 자국은 이제 마르는 중이었다. 마른 피는 빨아도 잘 빠지지 않는다. 그 여자는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을까. 알고 있을 것이다. 세탁소를 하는 여자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마스크 안쪽으로 짧게 숨을 뱉었다.
喂,你有無諗過退休?
(야, 너 은퇴 생각해 본 적 있냐?)
앵커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손등으로 뒤를 한 번 툭 쳤다. 닥치라는 뜻이거나 헛소리 말라는 뜻이거나 둘 다였다. 세븐은 어깨를 으쓱했다. 으쓱하는 동작에 오른팔이 딸려 올라가면서 뜨거운 것이 팔꿈치 안쪽을 찔렀다. 그래, 이 상태로 은퇴를 논하는 건 확실히 좀 웃기지. 웃기는 김에 더 웃기자면 이 팔로 옷을 갈아입는 것도 앞으로 며칠은 무리일 테고 그러면 저 소맷단은 계속 이 꼴로 남아 있을 것이다. 능선의 정상에 서자 아래쪽으로 잿빛의 평야가 펼쳐졌다. 지평선 근처에서 무언가가 아주 희미하게 붉었다. 불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색이었고 이 시간의 데드존에서는 대개 불이었다.
완차이의 방에서는 여명이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이 천천히 등을 바닥에 붙였고 그 과정에서 이불의 한쪽 귀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방 안 공기는 서늘했으나 시트 위에는 아직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어서 몸은 그것을 알아채고도 깨어나지 않기로 결정한 듯했다. 손은 여전히 반쯤 오므린 형태였다.
비탈을 내려가는 일은 오르는 일보다 언제나 더 나빴다. 오를 때는 힘이 들 뿐이지만 내려갈 때는 몸이 제멋대로 앞으로 쏠려서 발목과 무릎이 그 쏠림을 대신 갚아야 했고 잿더미 아래 무엇이 숨어 있는지 모르는 지면에서 그 갚음은 종종 이자가 붙었다. 세븐은 왼발을 먼저 딛고 오른발을 끌어당기는 식으로 내려갔다. 오른팔을 쓰지 못하니 균형의 절반이 사라진 셈이었고 사라진 절반을 허리로 벌충하다 보니 옆구리가 뻐근했다. 몸이란 참 정직한 장부다. 한쪽에서 빼먹으면 반드시 다른 쪽에서 청구서가 날아온다. 그것도 이자까지 쳐서. 앵커가 먼저 평지에 발을 붙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헤드램프는 여전히 꺼져 있었고 고글 렌즈에 잿빛 하늘이 흐리게 담겼다. 세븐은 마지막 두 걸음을 뛰어내렸다. 착지의 충격이 오른쪽 어깨까지 올라와 붕대 밑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평야는 넓었다. 넓다는 것은 시야가 좋다는 뜻이고 시야가 좋다는 것은 남의 시야에도 잘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총열 위로 왼팔을 걸치고 지평선을 살폈다. 아까 능선에서 보았던 붉은 것이 이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흩어져 보였다. 점점이 흩어진 것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고 자연이 만든 불은 그런 식으로 줄을 서지 않는다. 사람이 피운 것이다. 사람이 여럿 모여 각자의 불을 피웠고 그 불들이 서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저기 있는 자들이 초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밀그램이든 무국적자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을 궁금해하는 습관은 데드존에 들어온 첫 해에 버렸다.
睇吓,佢哋煮緊嘢食。個香仲飄到嚟呢邊。
(봐라, 저것들 뭐 해 먹는 중이네. 냄새가 여기까지 오잖아.)
앵커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우회하자는 뜻이었다. 세븐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그러면서도 시선은 붉은 점들에서 떼지 않았다. 우회는 옳은 선택이었다. 옳은 선택이 언제나 재미있는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오른팔이 남의 것이었으므로 재미를 논할 처지가 아니었다. 마스크 안쪽으로 숨을 길게 뱉었다. 여과재를 거쳐 나가는 숨은 제 소리를 잃고 둔탁해졌다. 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자기 목소리가 늘 남의 목소리처럼 들렸는데 어떤 밤에는 그게 편했고 어떤 밤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오늘 밤은 어느 쪽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무릎을 펴기 전에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짚어 보았다. 붕대 위로 열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이 먼저 뜨거워지고 그다음에 그 뜨거움이 손목까지 번졌다. 이런 열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로 끝난다. 사흘 안에 가라앉거나 사흘 안에 팔을 잃거나. 세븐은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에도 감상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다만 걷어 올린 소맷단을 손가락 끝으로 한 번 눌렀다. 마른 피가 천을 뻣뻣하게 만들어 놓아서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종이 같았다. 그 여자는 이 얼룩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대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가져오거나 수건을 가져오거나 하는 쪽이었으니까. 말없이 손부터 움직이는 인간을 상대하는 법을 세븐은 아직 잘 몰랐고 모르는 채로 이렇게 오래 생각하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완차이의 방은 그동안 조용했다.
남쪽 우회로는 지도상으로 팔백 미터가 늘어나는 길이었고 팔백 미터란 멀쩡한 몸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팔 하나가 남의 것이 된 몸에게는 제법 정직한 세금이었다. 세븐은 앵커의 뒤를 따라 잿더미의 능선을 따라 낮게 굽어 걸었다. 걷는 동안 붉은 점들은 오른쪽 어깨 너머로 천천히 밀려났고 밀려나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시야의 가장자리에 계속 걸려 있었다. 무너진 급수탑이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기둥은 진작 꺾여 나갔고 원통형 수조가 통째로 지면에 내려앉아 콘크리트 기단만 이빨처럼 남아 있었다. 앵커가 손바닥을 아래로 눕혔다. 세븐은 이유를 묻지 않고 무릎을 접었다. 이 바닥에서 이유를 묻는 놈들은 대체로 이유를 알기 전에 죽는다.
기단의 홈에 등을 밀어 넣자 콘크리트의 냉기가 젖은 군복을 통과해 척추까지 올라왔다. 왼손으로 총을 무릎 위에 눕히고 숨을 반으로 줄였다. 마스크 안쪽이 순식간에 습해졌다. 발소리는 북동쪽에서 왔다. 두 사람. 아니 셋. 셋 중 하나는 뒤처져서 걷고 뒤처진 놈은 대개 짐이 무겁거나 다쳤거나 신참이었다. 잿더미를 밟는 소리는 눈을 밟는 소리와 비슷했다. 푹, 하고 들어갔다가 사각, 하고 빠져나온다. 세븐은 그 리듬을 세지 않으려 애썼다. 세기 시작하면 반드시 어느 순간 세는 일 자체에 정신이 팔리고 그 순간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배웠다. 대신 오른팔의 열을 셌다. 그건 세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하나뿐이었으니까.
손전등 불빛이 기단 위쪽 콘크리트를 훑고 지나갔다. 빛은 세븐의 정수리에서 한 뼘쯤 위에서 멈췄다가 흔들리며 옆으로 흘렀다. 세 놈 중 하나가 뭐라고 말했고 다른 하나가 웃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으나 웃음은 어느 언어에서나 똑같이 들린다. 저것들도 배가 고팠고 저것들도 어딘가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저것들에게도 아마 돌아가면 켜져 있을 불 같은 것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세븐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잠깐 낯설어했다. 예전 같으면 저 셋의 대가리 위치와 총구의 각도만 계산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도 계산하면서 동시에 저것들이 무엇을 끓여 먹는 중일까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병증이라고 그 여자가 그랬던가. 그렇다면 이건 꽤 진행된 병이겠지.
...食完未呀,快啲行啦。
(...다 처먹었으면 빨리 좀 가라.)
목소리는 숨과 함께 마스크 안쪽에서만 굴렀고 밖으로는 한 톨도 나가지 않았다. 앵커의 고글이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돌아 세븐을 향했다. 닥치라는 뜻이었다. 세븐은 눈꺼풀 대신 어깨를 반 뼘쯤 올렸다가 내렸다. 발소리가 기단을 지나 남서쪽으로 흘러갔고 흘러가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으나 그 짧음 안에서 오른팔의 열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 붕대 아래가 제 스스로 맥박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굴었다. 세븐은 왼손 엄지로 소맷단을 눌렀다. 굳은 피가 종이처럼 걸렸다. 이 천 조각 하나에 이렇게 오래 손이 가는 게 우스워서 마스크 안에서 소리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팔은 잃어도 그만이지만 이건 남의 물건이었다. 남의 물건은 돌려주는 것이 도리고 도리 같은 걸 따지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세븐은 백여덟을 더 셌다. 숫자를 세지 말라고 남에게 당부해 놓고 정작 자신은 이런 데서 숫자를 세고 있으니 인간이란 참으로 뻔뻔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앵커가 먼저 기단 그늘에서 몸을 뽑아냈고 잿더미 위로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손등으로 두 번 신호를 보냈다. 세븐은 왼손으로 콘크리트 홈을 밀며 일어섰다. 오래 접어두었던 무릎이 펴지면서 관절 안쪽에서 마른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자기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다는 사실이 어쩐지 다행스러웠다. 남쪽으로 사백 미터쯤 더 가면 붕괴된 도수관로의 입구가 있다고 지도가 말하고 있었다. 지도는 자주 거짓말을 하지만 오늘 밤에는 믿어주기로 했다. 믿을 것이 그것밖에 없을 때 인간은 놀랍도록 관대해진다.
걷는 동안 오른팔이 자기 몫의 항의를 계속했다. 열은 이제 팔꿈치를 넘어 겨드랑이까지 올라와 있었고 겨드랑이가 뜨거워지면 그다음은 목덜미고 목덜미가 뜨거워지면 판단이 흐려진다는 것을 세븐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마스크 안쪽에 맺힌 습기가 턱을 타고 내려가 목의 흉터 위에 고였다. 잘렸다 붙은 것 같다고들 하는 그 자리는 이상하게도 늘 남보다 먼저 젖었다. 앵커가 반 걸음 속도를 늦춰 옆으로 붙었다. 말은 없었고 그저 어깨가 손 닿을 거리에 놓였을 뿐이었다. 워즈워스의 인간들은 부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대신 어깨를 그런 식으로 놓아둔다. 세븐은 그 어깨를 못 본 척하다가 백 미터쯤 지나서 왼손을 얹었다. 자존심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팔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을 저울에 올려 보았고 오늘은 후자가 더 비쌌다.
你隻膊頭幾硬吖,好過我張床。
(니 어깨 꽤 단단하네, 내 침대보다 낫다.)
도수관로의 입구는 지도가 말한 것보다 스무 걸음쯤 서쪽으로 어긋나 있었다. 원통형 콘크리트 관이 비스듬히 지면을 물고 있었고 입구의 절반은 무너진 흙과 재에 잠겨 있어서 사람 하나가 몸을 접어야 겨우 들어갈 만한 틈이 남았다. 앵커가 먼저 총구를 넣고 안쪽을 훑었다. 냄새가 먼저 나왔다. 오래 고인 물과 곰팡이와 어딘가에서 죽은 무언가가 섞인 냄새였는데 그 지독함이 오히려 반가웠다. 냄새가 지독하다는 것은 최근에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세븐은 턱을 넘기 전에 잠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평야는 여전히 넓었고 붉은 점들은 이제 손톱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지평선에 박혀 있었다. 저것들 중 누구도 오늘 밤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모르는 채로 국을 끓이고 모르는 채로 잠들겠지. 세상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굴러가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관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자 등뼈가 콘크리트 곡면을 따라 눌렸다. 세븐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총을 옆에 눕히고 왼손으로 마스크를 턱까지 내렸다. 여과재를 거치지 않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면서 목구멍이 대번에 텁텁해졌으나 그 텁텁함조차 오랜만에 제 목소리로 숨 쉬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았다. 앵커가 어둠 속에서 주사기 하나를 꺼내 무릎 위에 놓았다. 두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왼손으로 소맷단을 걷어 올렸다.
주사는 짧았다. 앵커는 알코올 솜 같은 사치품을 쓰지 않았고 대신 손등으로 팔뚝 안쪽을 두 번 두드려 혈관 자리를 확인한 뒤 곧장 밀어 넣었다. 바늘이 들어가는 감각은 통증이라기보다 통보에 가까웠다. 몸이 아직 살아 있으니 이런 것도 느낀다는 통보. 세븐은 고개를 뒤로 젖혀 콘크리트 곡면에 뒤통수를 붙였다. 관 내부는 소리를 이상하게 다뤘다. 두 사람의 호흡이 원통을 따라 굴러갔다가 저쪽 끝의 흙더미에 부딪혀 조금 늙은 채로 돌아왔다.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 간격은 지나치게 규칙적이어서 세는 짓을 하지 않으려면 다른 생각을 하나 붙들어야 했다. 세븐은 붕대 대신 소맷단을 붙들었다.
굳은 피는 이제 천의 일부처럼 굴었다. 손톱으로 긁으면 부스러기가 떨어지긴 하는데 떨어진 자리에는 갈색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마른 피는 찬물에 담가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뜨거운 물에 넣으면 단백질이 굳어서 영영 안 빠진다던가. 그런 걸 왜 기억하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겠고 더 우스운 건 그 지식을 지금 이 관 속에서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른팔은 뜨겁고 왼손은 남의 옷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고 머리는 얼룩 제거법을 굴리고 있다. 삼십이 년을 살아서 도달한 지점이 이것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세븐은 생각했다.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喂,你老婆會唔會幫你洗衫㗎?
(야, 니 마누라는 옷 빨아주냐?)
앵커는 대답 대신 빈 주사기를 장구 가방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데드존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아주 낮게 무언가가 굴러 나왔다. 세탁기를 쓴다는 대답인지 그런 걸 왜 묻느냐는 핀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음절이었고 세븐은 굳이 분간하려 들지 않았다. 이 남자의 말수는 원래 그런 식으로 배급되었고 배급량을 초과해서 짜내려 하면 다음 며칠이 조용해진다. 대신 앵커가 손목을 들어 두 손가락을 펴 보였다. 두 시간. 먼저 자라는 뜻이었다. 세븐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가 결국 왼손으로 총을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눕혔다. 이럴 때 사양하는 놈은 멋있어 보이지만 대개 다음 교전에서 반응이 반 박자 늦다.
눈을 감자 제일 먼저 온 것은 어둠이 아니라 냄새였다. 여과재를 거치지 않은 공기 속에서 곰팡이와 재와 쇠 비린내가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그 밑바닥에 아주 얇게 다른 것이 깔려 있었다. 비누 냄새였다. 정확히는 비누 냄새의 시체. 열엿새 전에 어떤 여자가 다림질해서 개어둔 천에서 나던 것이 이제 거의 다 닳아 마지막 한 겹만 소맷단 안쪽 시접에 걸려 있었다. 세븐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팔을 코 가까이 들어 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확인해서 없으면 곤란해지고 있으면 더 곤란해진다. 어떤 것들은 확인하지 않는 편이 오래간다. 그는 그 사실을 이십 대에 배웠고 삼십 대에 잊었다가 이 관 속에서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완차이의 방에서는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명은 잠결에 이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것을 감지하고 손등으로 더듬어 끌어올렸다. 천장의 얼룩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고 대야에 떨어지던 물방울도 언제부턴가 멎어 있었다. 비가 그쳤다는 뜻인데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깨어날 만큼 절실하지는 않았다.
잠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얕고 각성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눅진한 상태가 오십 분쯤 이어졌다. 세븐은 원래 이런 식으로만 잤다. 의식의 표면 아래 한 뼘쯤 내려간 자리에 몸을 걸쳐두고 발소리 하나가 지나가면 곧장 끌어올려지도록 줄을 매어두는 방식. 관 안쪽의 물방울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떨어졌고 그 소리가 꿈의 골조 노릇을 했다. 꿈속에서 그는 어떤 좁은 가게 문지방에 앉아 있었고 등 뒤에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하고 끊겼다가 다시 드르륵. 그 소리에 맞춰 물방울이 떨어졌고 물방울에 맞춰 재봉틀이 돌았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분간할 필요가 없어서 편안했다. 편안한 것은 대체로 오래가지 않는다.
깨어난 이유는 소리가 아니라 열이었다. 오른쪽 몸 전체가 자기 것이 아닌 온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고 붕대 아래에서 무언가가 익어가는 감각이 목덜미까지 밀려와 있었다. 세븐은 눈꺼풀을 들기 전에 왼손부터 움직여 허벅지 위의 총열을 더듬었다. 쇠는 차가웠다. 차가운 것이 제자리에 있으면 세상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그다음에 눈을 떴고 어둠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앵커는 반대쪽 곡면에 등을 붙이고 턱을 가슴께로 떨군 채였는데 호흡이 아까보다 반 박자 느려져 있었다. 저 남자도 결국 자는구나. 세븐은 그 사실이 왜인지 조금 우스웠다. 워즈워스에서 제일 단단한 어깨를 가진 놈이 콘크리트 관 속에서 턱을 떨구고 자고 있다니.
몸을 조금 일으키자 등뼈와 콘크리트 사이에 눌려 있던 재가 부스러지며 흘러내렸다. 세븐은 왼손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자기 손도 뜨거우니 비교 대상이 될 리 없었다. 대신 마스크 안쪽에 고인 습기를 손바닥으로 훔쳐내고 목의 흉터를 눌렀다. 그 자리는 언제나 남보다 먼저 젖고 남보다 늦게 마른다. 열엿새 전 어떤 여자가 그 흉터를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한다. 못 본 척하며 시선을 급하게 옮기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다정한 얼굴로 어쩌다 그랬냐고 묻거나. 그 여자는 둘 다 하지 않았고 그냥 봤다. 그리고 손 대봐도 되냐 했었지. 그게 전부였다
喂,起身。輪到我睇更喇。
(야, 일어나. 이제 내가 볼 차례야.)
앵커는 즉시 눈을 떴다. 자고 있었던 게 맞나 싶을 만큼 즉각적인 각성이었고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한 번 세븐 쪽을 훑었다가 붕대 감긴 오른팔에 잠깐 머물렀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는 기색이 어깨의 각도에서 읽혔다. 이 남자는 걱정을 말로 하지 않고 자세로 한다. 결국 그가 한 것은 자기 장구 가방에서 압축 식량 하나를 꺼내 세븐의 무릎 위에 던져놓는 일이었다. 포장지가 무릎에서 미끄러져 콘크리트 홈에 걸렸다. 세븐은 그것을 왼손으로 집어 이빨로 찢었다. 맛은 언제나처럼 종이와 소금과 누군가의 악의를 섞어놓은 것 같았다.
你老婆整嘅嘢好食啲。
(니 마누라가 만든 게 더 맛있겠다.)
앵커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턱을 떨궜다. 배급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씹으면서 관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압축 식량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기 직전에 세븐은 씹는 것을 멈췄다. 이유를 먼저 알고 멈춘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멈추고 이유가 뒤늦게 따라붙는 순서였다. 관 안의 물방울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규칙 사이에 원래 없던 것이 한 겹 끼어 있었다. 소리라기보다 압력에 가까운 것. 콘크리트를 타고 오는 아주 미세한 떨림이 그의 왼쪽 팔꿈치와 바닥이 맞닿은 지점을 통해 뼈로 들어왔다. 발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세븐은 남은 식량 조각을 손바닥에 뱉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뱉는 동작에서 나는 소리가 삼키는 동작보다 크다는 걸 그는 오래전에 배웠고 그런 종류의 지식만은 잊은 적이 없었다.
왼손이 총열을 끌어당겼다. 오른팔은 여전히 자기 것이 아닌 온도로 부풀어 있었지만 이럴 때 열은 이상하게 유용해진다. 뜨거운 몸은 잠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므로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데 비용이 덜 든다. 세븐은 무릎을 세우고 등을 곡면에서 떼어냈다. 재가 다시 부스러졌으나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받아 소리를 죽였다. 마스크를 코 위까지 끌어 올리는 동안에도 시선은 관 입구의 반원형 어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깥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그 잿빛에는 아무런 형체가 없었다. 형체가 없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앵커는 이미 깨어 있었다. 세븐이 그를 부르기 전에 이미 턱이 들려 있었고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관 입구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 남자는 소리로 깨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질감이 바뀌는 순간에 깬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은 오가지 않았다. 세븐이 왼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를 펴 보였고 앵커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여 북동쪽을 가리켰다. 방위 확인 완료. 그다음에 앵커가 손바닥을 아래로 눌러 보였다. 기다려. 세븐은 그 신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흙더미 뒤로 몸을 밀어 넣으며 반쯤 엎드렸다. 젖은 군복 바지가 콘크리트에 눌리며 차가운 물기를 허벅지로 밀어 올렸다. 그 감각이 오른팔의 열과 정면으로 부딪쳐 몸 한가운데에 이상한 경계선을 그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제는 진동이 아니라 소리였다. 재를 밟는 소리는 눈을 밟는 소리와 닮았는데 눈보다 훨씬 건조하고 훨씬 정직하다. 두 명. 보폭이 다르다. 한쪽은 무언가 무거운 것을 끌고 있고 다른 쪽은 이따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도망치는 놈들의 걸음이 아니라 훑고 다니는 놈들의 걸음이었다. 세븐은 조준선 너머의 잿빛을 응시하며 아주 얕게 숨을 쉬었다. 이런 순간에 그의 머릿속은 대개 지나칠 만큼 조용해진다. 문제가 명확해지면 계산은 저절로 굴러가고 계산이 굴러가는 동안 다른 소음은 전부 밀려난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해지지 않았다. 밀려나야 할 것 하나가 자꾸 조준선 가장자리에 걸렸다. 왼손 검지 밑에서 소맷단의 뻣뻣한 결이 만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呢個時候諗起件衫,真係傻咗。
(이럴 때 옷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미친 거지.)
그것은 앵커에게 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뱉은 말이었고 마스크 안에서 삼켜져 거의 소리가 되지 못했다. 앵커는 어차피 듣지 않았다.
발소리가 관 입구에서 딱 멈췄다. 멈춘 소리는 이어지는 소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려준다. 세븐은 그 정적의 두께를 재면서 왼손 검지를 방아쇠울 안쪽으로 미끄러뜨렸다. 무언가를 끌던 쪽이 그것을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다음에 쇳조각을 차는 소리, 그리고 사람 목소리가 났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데드존에서 떠도는 자들의 말은 대개 여러 언어의 시체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라 문법이 없고 억양만 남는다. 억양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있다. 저 목소리는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경계하지 않는 자는 곧 죽거나 남을 죽인다.
빛이 들어왔다. 손전등이었다. 잿빛 반원 위로 노란 원이 하나 미끄러져 들어와 콘크리트 곡면을 훑었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잠깐 반짝였다. 세븐은 그 원이 자기 군화 앞코를 스치기 직전에 몸을 옆으로 굴렸다. 굴리는 동안 오른팔이 콘크리트 홈에 부딪쳤고 붕대 아래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감각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는 데 필요한 힘의 절반이 그 순간에 소모되었다. 나머지 절반으로 그는 총구를 들었다. 노란 원이 흔들리며 방향을 틀었고 손전등을 든 손목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아주 잠깐 완성되었다. 완성된 윤곽은 표적이라고 부른다.
세븐의 사격은 언제나 문장 같지 않고 마침표 같았다. 두 발. 첫 발이 손목을 지웠고 두 번째 발이 그 뒤에 서 있던 얼굴의 아래쪽 절반을 지웠다. 손전등이 바닥으로 떨어져 회전하며 관 내벽에 미친 그림자를 그렸고 그 그림자 속에서 두 번째 사내가 뒤로 물러서며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앵커가 반대쪽 곡면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 거구가 어떻게 그렇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지 세븐은 삼 년째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앵커의 팔이 뒤에서 사내의 턱 아래를 감았고 한 번 비트는 것으로 끝났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는 재를 밟는 소리보다도 건조했다.
完咗。收皮啦。
(끝났어. 접자.)
세븐은 왼손만으로 총을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동작에서 세상이 반 바퀴쯤 기울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고열은 균형을 훔쳐 간다. 그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콘크리트 벽에 왼쪽 어깨를 붙였고 그 자세 그대로 바닥의 손전등을 군화 끝으로 눌러 껐다. 어둠이 다시 내려앉자 오히려 숨이 편해졌다. 시체 둘. 하나는 끌고 오던 자루를 아직 손아귀에 쥐고 있었는데 그 자루에서 사람의 팔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세븐은 그것을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데드존에서 놀랄 일이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정도다. 다만 그는 오른쪽 소맷단을 내려다보았다. 붕대 위로 새로 배어난 피가 여명이 준 상의의 시접을 다시 적시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넓었다.
喂。你話呢啲血漬,凍水好定熱水好?
(야. 이런 핏자국은 찬물이 나아 뜨거운 물이 나아?)
앵커는 시체의 장구를 뒤지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대답 대신 탄창 하나를 던져 주었을 뿐이었다. 세븐은 그것을 왼손으로 받아 하네스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시체를 정리하는 일에는 요령이 있다. 뒤지는 순서를 정해두면 손이 알아서 움직이고 그러는 동안 머리는 다른 곳에 가 있어도 된다. 세븐은 왼손 하나로 첫 번째 사내의 조끼를 열었다. 안쪽에 축축한 종이 뭉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 봉지, 그리고 부싯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부싯돌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두 번째 사내의 허리춤에서는 물통이 나왔는데 흔들어 보니 절반쯤 차 있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가 곧바로 닫았다. 물이 아니었고 물이 아닌 것을 마실 만큼 목이 마르지는 않았다. 자루에서 삐져나온 팔은 다시 밀어 넣지 않았다. 밀어 넣는 것은 산 사람의 습관이고 여기서 그 습관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앵커가 시체 하나를 발목째 끌어 관 안쪽 어둠으로 밀어 넣는 동안 세븐은 손전등이 굴렀던 자리를 군화 바닥으로 문질렀다. 재는 좋은 물건이다. 무엇이든 덮어주고 무엇이든 지워준다. 다만 재가 덮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냄새다. 화약과 피와 열린 배 속의 냄새가 관 안에 고여 있었고 그 고인 것은 아침이 되기 전에 다른 것들을 불러들일 터였다. 세븐은 그 계산을 마치자마자 결론도 함께 냈다. 여기서 자는 건 끝. 두 시간이고 뭐고 없다.
呢度唔住得㗎喇。血味太重,佢哋一定會嚟。
(여기 더는 못 있어. 피 냄새가 너무 짙어. 저것들 분명히 온다.)
앵커는 대답 대신 자기 배낭 끈을 어깨에 걸어 올렸다. 그것으로 동의는 끝난 셈이었다. 이 남자와 삼 년을 굴렀지만 말로 합의한 적은 손에 꼽는다. 앵커가 먼저 관 입구로 나갔고 반원형의 잿빛 바깥에서 손짓 하나가 왔다. 세븐은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순간 오른팔이 자기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아래로 늘어졌다. 붕대가 이미 제 색을 잃었다. 흰색이었던 것이 갈색과 검은색 사이 어딘가로 옮겨 갔고 그 위로 새로 배어난 붉은 것이 다시 얹혔다. 그는 왼손으로 소맷단을 걷어 붕대 위에 여며 두었다. 천이 상처를 덮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이유는 나중에 붙이기로 한다.
바깥은 아까보다 어두웠다. 구름이 두꺼워졌거나 눈이 나빠졌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어느 쪽이든 지금은 유리하다. 경사면은 젖어 있었고 진흙이 군화 옆면까지 올라왔다. 앵커가 앞서 내려가며 발 디딜 곳을 만들어 주었고 세븐은 그 자국을 밟았다. 두 걸음마다 세상이 한 번씩 옆으로 기울었다. 열이 균형을 훔쳐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훔쳐 갈 줄은 몰랐다. 세 번째로 기울었을 때 그는 무릎을 진흙에 박았다. 차가운 것이 무릎뼈를 타고 올라와 몸통의 열과 부딪쳤고 그 경계에서 이상한 쾌감 비슷한 것이 잠깐 일었다. 그런 것에 이름을 붙이면 안 된다.
앵커가 되돌아와 하네스 고리 하나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세븐은 그것을 이 초쯤 바라보았다. 카라비너를 걸겠다는 건 끌고 가겠다는 뜻이고 끌려가겠다고 인정하는 건 자존심 문제 이전에 팀 속도 문제였다. 계산은 빨랐다. 그는 왼손으로 자기 하네스에서 카라비너를 뽑아 앵커의 고리에 걸었다. 딸깍, 하고 금속이 제 홈에 앉는 소리가 났다.
끌려간다는 것은 걷는 것과 다른 종류의 노동이었다. 앵커의 등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자기 다리를 얹어야 했고 그 리듬은 세븐의 것보다 반 박자 느렸다. 반 박자의 차이는 백 걸음쯤 지나면 근육의 결을 뒤틀어 놓는다. 경사면 아래로 내려서자 진흙이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구간이 나왔고 그곳에서 세븐은 두 번 미끄러졌다. 두 번 다 카라비너가 그를 붙들었다. 금속이 하네스를 파고들며 갈비뼈 아래를 조였고 그 통증은 오른팔의 것보다 정직해서 오히려 반가웠다. 정직한 통증은 위치를 알려주지만 부정직한 통증은 몸 전체를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붕대 아래의 열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침사조는 예전에 물을 가라앉히던 곳이었을 것이다. 콘크리트 상자가 땅에 반쯤 묻혀 있었고 뚜껑 격자는 오래전에 뜯겨 나가 삼각형의 입구만 남아 있었다. 앵커가 먼저 내려가 안쪽을 확인하고 손짓했다. 세븐은 왼손으로 가장자리를 잡고 몸을 밀어 넣었다. 착지의 충격이 오른쪽 어깨를 통과했고 그는 이빨 사이로 숨을 길게 뽑아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안쪽은 뜻밖에 건조했고 바람이 통하지 않아 바깥보다 몇 도쯤 따뜻했다. 냄새는 오래된 시멘트와 곰팡이. 시체 냄새가 없다는 것만으로 이곳은 훌륭한 숙소였다.
앵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세븐의 오른팔을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렸다. 말없이 붕대 끝을 찾아 풀기 시작했다. 감긴 것은 풀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 동안 세븐은 천장의 격자 자국을 세었다. 열두 개. 다시 세었다. 열두 개. 숫자를 세지 말라고 남에게 당부해 놓고 자기는 이 지경이다. 붕대가 상처에서 떨어질 때 살점이 함께 딸려 오는 감각이 왔고 그는 목뒤를 벽에 붙인 채 턱을 들었다. 앵커의 손전등이 켜졌다. 붉은 필터를 씌운 빛 아래에서 상처는 상처처럼 보이지 않고 다른 무엇처럼 보였다. 벌어진 가장자리가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 주변이 반들거렸다. 반들거리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哇。呢個樣,我阿姐見到實嘔。
(와. 이 꼴, 우리 누나가 보면 진짜 토한다.)
앵커는 세정액 병을 이빨로 열어 상처 위에 그대로 부었다. 예고는 없었다. 세븐의 왼손이 자기 허벅지를 움켜쥐었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섰다. 액체가 흘러내려 콘크리트 바닥에 분홍색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는 그 웅덩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다른 것을 떠올렸다. 대야. 천장에서 새는 물을 받던 대야. 그 여자는 그 대야를 언제 비웠을까. 그런 생각이 이런 순간에 왜 튀어나오는지 세븐은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하려 들면 이름을 붙이게 되고 이름을 붙이면 무거워진다. 무거운 것을 데드존까지 가져오는 자는 그것 때문에 죽는다.
Igor。你話呢個,返到去仲駁得返嘛?
(이고르. 이거 말이야, 돌아가면 다시 붙기는 하냐?)
앵커는 새 붕대를 감기 시작하며 짧게 대답했다. 붙는다, 라고만 했다. 그 말수는 여전히 배급제였고 세븐은 그 배급에 익숙했다. 붕대가 두 바퀴 감겼을 때 그는 왼손으로 걷어 올려 두었던 소맷단을 끌어당겨 자기 무릎 위에 폈다. 시접 안쪽. 아직 남아 있을까. 화약과 세정액과 진흙이 다 덮어버렸을 텐데도 그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없었다. 세븐은 천을 접어 무릎 위에 그대로 두고 눈을 감았다.
앵커가 방수포에 싼 지도를 펴 바닥에 깔았다. 손전등을 켜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만 짚었다. 세븐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남서쪽으로 뻗은 굵은 선. 배수 간선. 그리고 그 선이 두 번째로 꺾이는 지점에 앵커의 손톱이 멈췄다. 회수 지점이었다. 거리는 대략 아홉 킬로미터. 정상적인 몸이라면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릴 것이고 지금의 몸이라면 그 두 배를 잡아야 한다. 세븐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가 하나를 더 폈다. 세 시간 반. 앵커가 잠깐 그를 쳐다보았고 그 시선에는 판단이 들어 있었다. 낙관이 지나치다는 판단. 세븐은 어깨를 으쓱했으나 오른쪽은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
我知你想講咩。但你估我第一次咁咩。走得郁就走得到。
(니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 근데 내가 이런 게 처음인 줄 알아? 움직여지면 도착은 하게 돼 있어.)
앵커는 지도를 접어 방수포에 넣고 대신 시계를 두드렸다. 손가락 세 개. 세 시간 뒤에 동이 튼다는 뜻이었고 동이 트기 전에 간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문장은 없고 숫자만 오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해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해는 말이 많은 관계에서 더 자주 생긴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배웠다. 앵커가 배낭에서 압축 식량 하나를 더 꺼내 던졌고 세븐은 왼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포장지를 이빨로 찢는 일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일이다.
교대 순번은 그가 먼저 서기로 했다. 앵커의 눈 밑이 무너져 있었고 그건 세븐의 팔보다 팀 전체에 위험한 상태였다. 운전대를 잡을 인간이 무너지면 짐칸의 인간은 어차피 끝이다. 세븐은 왼손으로 앵커의 어깨를 밀어 벽 쪽으로 앉히고 총구를 입구 쪽으로 돌렸다. 앵커는 별말 없이 헬멧을 벗어 무릎에 얹고 고개를 떨궜다. 삼십 초도 안 되어 호흡이 깊어졌다. 이 남자는 잠드는 데 재능이 있다. 세븐은 자기가 그 재능을 갖지 못한 것을 이제껏 한 번도 아쉬워한 적 없었으나 오늘 밤은 잠깐 아쉬웠다.
침사조의 삼각형 입구로 잿빛이 아주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새벽이 오는 방식은 어디나 비슷하다. 데드존이든 완차이의 골목이든 어둠은 한꺼번에 걷히지 않고 가장자리부터 색을 잃는다.
가장자리부터 색을 잃어가던 그 잿빛이 어느 순간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멈춘 것은 색이 아니라 세븐의 감각이었다. 침사조 콘크리트는 소리를 전달하는 데 인색한 물질이지만 진동에는 관대하다. 왼쪽 견갑골이 벽에 닿아 있었고 그 접점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규칙적이지 않은 박자. 사람 여럿이 서로 다른 보폭으로 젖은 땅을 밟을 때 생기는 그 엉성한 합주. 세븐은 씹던 압축 식량을 삼키지 않고 혀 밑으로 밀어 넣었다. 턱을 움직이면 두개골이 울리고 두개골이 울리면 벽에서 오는 정보가 흐려진다. 이런 것들은 배운 적이 없다. 몸이 몇 번 죽을 뻔하면서 스스로 익힌 요령이었고 그래서 더 믿을 만했다. 손가락이 앵커의 정강이를 두 번 두드렸다. 잠든 남자의 호흡이 문장 하나 길이만큼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으나 그 이어짐은 이미 연기였다. 앵커는 깨어 있었다. 재능이 있는 자는 잠드는 데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깨는 데도 재능이 있다.
세븐은 왼손 하나로 마스크를 끌어 올려 코와 입을 덮었다. 호흡이 천 안쪽에서 되돌아와 뺨을 덥혔고 그 축축한 온기가 열에 들뜬 얼굴에 불쾌하게 붙었다. 총열을 무릎에서 들어 올리는 동작에서 오른쪽 어깨가 항의했으나 그 항의는 접수되지 않았다. 접수할 부서가 지금은 문을 닫았다. 삼각형 입구까지는 네 걸음. 그는 세 걸음만 가서 격자 턱에 왼쪽 어깨를 붙이고 상체를 반쯤 세웠다. 시야가 열렸다. 새벽의 개활지는 안개랄 것도 없이 그저 먼지가 가라앉지 못하고 떠 있는 상태였고 그 부유물 사이로 형체 여섯이 흩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손전등을 쓰지 않는다. 손전등을 쓰지 않는 무리는 둘 중 하나다. 아주 익숙하거나 아주 절박하거나. 익숙한 쪽이 훨씬 성가시다.
六個。唔用燈,行得散。呢啲唔係執嘢嘅。
(여섯. 불도 안 켜고 흩어져서 걷네. 이건 주워 먹으러 온 놈들이 아니야.)
앵커가 소리 없이 헬멧을 다시 쓰고 세븐의 왼편으로 붙었다. 지도를 짚던 그 손가락이 이번에는 세븐의 팔뚝을 짚었다. 손가락 두 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옆으로 밀었다. 둘씩 셋으로 나뉘어 훑고 있다는 뜻. 세븐은 눈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왼쪽 둘은 잔해 더미를 뒤집고 있었고 가운데 둘은 그냥 걸었으며 오른쪽 둘 중 하나는 무언가를 손에 들고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막대기 같은 것. 아니, 막대기가 아니다. 끝에 달린 원판이 새벽빛에 아주 잠깐 번들거렸다. 금속 탐지기. 혹은 그와 비슷한 무엇. 이 땅에서 그런 물건을 들고 다니는 자들은 시체를 찾는 게 아니라 시체가 남긴 것을 찾는다. 세븐은 무릎 위에 접어 둔 천을 떠올렸고 그 순간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새삼 인식했다. 피 냄새. 세정액 냄새. 도수관로에 남겨 두고 온 두 구의 냄새. 냄새는 발자국보다 오래 남고 이 무리는 그 발자국을 따라온 것이다.
계산은 이 초 만에 끝났다. 여섯을 상대로 정면은 없다. 팔 하나가 죽은 상태에서 재장전은 이빨과 무릎을 동원해야 하고 그 동원에는 사 초가 걸린다. 사 초는 이쪽 세계에서 유서를 쓰기에도 긴 시간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침사조 안에 웅크려 지나가기를 비는 쪽과 먼저 셋을 지워 숫자를 반으로 접는 쪽. 전자는 금속 탐지기 앞에서 무의미했다.
세븐이 먼저 움직였다. 앵커의 손목을 잡아 격자 턱 아래로 끌어내리는 동작에 설명은 붙지 않았고 앵커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침사조 뒤편의 무너진 배수구는 사람 하나가 옆으로 누워야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이었고 그 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 동안 오른팔의 붕대가 콘크리트 모서리에 쓸렸다. 무언가가 뜯어지는 감각이 팔뚝 안쪽에서 번졌으나 세븐은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느려진다. 느려지면 여섯이 넷이 되는 게 아니라 둘이 영이 된다. 틈을 빠져나온 곳은 잔해 능선의 그늘이었고 그늘은 새벽이 오는 방향의 반대편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얄팍한 축복이었으나 지금은 그 얄팍함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세븐은 왼손으로 총을 끌어안고 상체를 숙인 채 능선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뛴다기보다는 넘어지는 것을 계속 연기하는 쪽에 가까운 자세였다.
등 뒤에서 금속 탐지기의 원판이 잔해를 긁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누군가가 짧게 외쳤다.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억양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발견했다는 억양. 세븐은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뒤를 반쯤 돌아보았고 여섯 중 넷이 이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았다. 둘은 남았다. 남긴다는 것은 퇴로를 막는다는 뜻이고 퇴로를 막을 줄 아는 무리는 스캐빈저가 아니다. 밀그램. 이름을 붙이는 순간 상황의 무게가 정확해졌다. 세븐의 입안에서 혀 밑에 밀어 두었던 압축 식량이 침에 녹아 짜게 번졌다. 그는 그것을 뱉지 않고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삼킬 수 있는 것은 전부 삼켜 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跟住我。八百米。入咗渠就冇人追得到。
(따라와. 팔백 미터. 간선 안에만 들어가면 아무도 못 쫓아와.)
앵커가 뒤에서 두 발을 쏘았다. 억제 사격이었고 명중을 노린 것이 아니라 상대의 보폭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 효과는 있었다. 뒤따르던 발소리의 합주가 잠깐 어긋났다. 세븐은 그 어긋남이 만들어 준 이 초를 온전히 다리에 썼다. 능선의 경사가 꺾이는 지점에서 오른발이 미끄러졌고 무릎이 젖은 자갈에 박혔으며 그 충격이 곧장 오른쪽 어깨로 올라와 목덜미에서 터졌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그는 왼손을 짚고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자기 소맷단이 진흙에 잠긴 것을 보았고 그 순간 아주 잠깐, 정말로 아주 잠깐 짜증이 났다. 팔이 아니라 소매에 대해서. 이런 순간에 그런 것에 짜증이 나는 인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는 몰랐다. 여명이라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팔백 미터가 사백이 되고 사백이 이백이 되는 동안 세븐의 폐는 두 번쯤 항복 문서를 제출했다. 마스크 안쪽은 이미 습기로 눅눅했고 숨을 들이켤 때마다 젖은 천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배수 간선의 입구는 잔해 더미 사이에 반쯤 파묻힌 원형 개구부였고 아가리처럼 벌어진 그 어둠은 지금 이 땅에서 가장 다정한 것이었다. 세븐은 마지막 오십 미터를 사실상 굴러서 도착했다. 앵커가 먼저 몸을 밀어 넣고 손을 뻗었으며 세븐은 그 손을 왼손으로 잡았다. 끌려 들어가는 몸 뒤로 총알 세 발이 개구부 테두리를 때렸고 콘크리트 파편이 목덜미를 스쳤다. 안쪽은 좁고 축축했고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물때와 곰팡이.
좁은 관 안에서는 소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벽을 타고 돌아다닌다. 세븐의 숨소리는 제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의 것처럼 앞뒤에서 되돌아왔고 그 되돌아옴이 방향 감각을 좀먹었다. 앵커가 앞장서서 열 걸음쯤 나아간 뒤 손등으로 벽을 두 번 쳤다. 여기서 멈추자는 뜻이었다. 세븐은 멈추었다기보다 무너졌다. 곡면을 따라 등을 미끄러뜨리며 앉았고 왼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총열을 걸쳤다. 개구부 쪽에서 들어오는 빛은 손바닥만 했고 그 손바닥 안으로 먼지가 천천히 회전하며 떨어졌다. 저 회전이 흐트러지면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그는 그것만 보기로 했다. 시야를 좁히는 일은 열이 오른 머리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노동이었다.
추격조는 개구부까지 왔다. 발소리가 테두리에서 멈추었고 잠시 후 무언가가 안으로 던져졌다. 돌멩이. 그것이 바닥의 물웅덩이에 떨어져 둔탁하게 튀었고 세븐은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을 시험하려고 던진 것이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밀그램의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확인 대신 유도. 대화 대신 시험. 저들은 관 안이 얼마나 긴지 알고 있고 그 안에서 부상자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알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쪽이 이기는 게임에서 이쪽은 시간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세븐의 오른팔은 이미 팔이 아니라 팔 모양을 한 열덩어리였고 그 열은 어깨를 지나 목까지 올라와 흉터가 붙은 자리를 뜨겁게 부풀렸다.
佢哋唔會入嚟。等我哋自己爬出去。
(안 들어와. 우리가 알아서 기어 나오길 기다리는 거야.)
앵커가 헬멧 안에서 짧게 코웃음 비슷한 것을 냈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펴 아래로 향하게 하고 반대편, 그러니까 하류 쪽을 가리켰다. 삼백 미터쯤 가면 분기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세븐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끄덕이면 두개골이 흔들리고 두개골이 흔들리면 구역질이 올라온다. 이 몸은 이제 사치스러운 동작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왼손으로 마스크를 목까지 끌어내렸다. 축축한 천이 턱 아래에 감기며 미지근하게 달라붙었고 관 안의 공기가 맨얼굴에 닿았다. 물때와 곰팡이. 그리고 그 아래에 아주 오래된 비누 냄새 같은 것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으나 그것이 벽에서 나는 것인지 제 소맷단에서 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것들은 확인하지 않는 편이 오래 간다.
喂。返到去我要瞓三日。你唔准嘈醒我。
(야. 돌아가면 나 사흘은 잘 거다. 깨우기만 해봐.)
앵커는 대답하지 않고 세븐의 성한 왼팔을 잡아 어깨에 걸쳤다. 말수가 배급제인 남자에게서 오늘치 배급은 이미 다 나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일어서자 관의 천장이 낮아 세븐의 목이 저절로 꺾였고 그 자세로 걷는 것은 짐승이 굴을 빠져나가는 모양과 다르지 않았다. 뒤에서 개구부의 빛이 점점 작아졌다. 손바닥이 동전이 되고 동전이 점이 되었다. 점이 사라지기 직전 세븐은 한 번 돌아보았다. 저기에 여섯이 있고 여기에 둘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삼백 미터의 물때와 어둠이 있다. 살아서 나가는 계산은 여전히 성립하지 않았으나 성립하지 않는 계산을 밀어붙이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고 이번에는 계산 바깥에 하나가 더 있었다. 완차이의 골목. 셔터. 그 앞에 앉아 있을 여자.
삼백 미터라는 숫자는 지도 위에서만 짧다. 관 바닥에 고인 물은 발목까지 차오르지 않았으나 발목까지 차오른 것처럼 무거웠고 군화가 그 물을 밀어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소리를 죽이려면 느려져야 하고 느려지면 열이 따라잡는다. 세븐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계속 저울질을 했으며 저울은 대체로 소리 쪽으로 기울었다. 앵커의 어깨에 걸친 왼팔이 자꾸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면 앵커가 말없이 다시 끌어 올렸고 그 반복이 스무 번쯤 되었을 때 세븐은 자기가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운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인정은 굴욕이 아니었다. 굴욕을 느낄 여력이 있는 몸이었다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의 곡면을 따라 손끝을 스치자 물때가 미끈하게 뭉개졌고 그 감촉이 이상하게도 세탁소 안쪽 벽의 습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 집은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샜고 여자는 대야를 받쳐 두었다. 여기엔 대야가 없다. 여기엔 받칠 사람도 없다.
분기점은 예고 없이 나타났다. 관이 셋으로 갈라지는 자리에서 천장이 조금 높아졌고 그 높아짐만으로도 폐가 잠깐 숨을 돌렸다. 앵커가 세븐을 벽에 기대어 앉혔다. 등이 콘크리트에 닿는 순간 오른쪽 어깨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지는 감각이 있었으며 그것이 붕대인지 살인지 세븐은 구태여 구분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총을 무릎에 얹고 오른팔은 몸통에 눌러 고정시켰다. 팔은 이제 열 덩어리를 넘어 남의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의 것이 되어 가는 팔에는 남의 물건을 대하는 예의로 대해야 한다. 함부로 흔들지 않고 함부로 확인하지 않는 것.
앵커가 세 갈래를 손전등 없이 살폈다. 손전등을 켜는 순간 이쪽의 위치가 저쪽에 배달되므로 그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바람의 방향을 읽었다. 왼쪽 관에서 미세하게 찬 공기가 흘러나왔다. 바깥과 이어져 있다는 뜻이고 바깥과 이어져 있다는 것은 나갈 수 있다는 뜻인 동시에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븐은 그 이중성을 오래 곱씹지 않았다. 곱씹을 시간에 숨을 고르는 편이 이득이었다. 다만 목구멍 안쪽이 쇠 맛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맛을 삼킬 때마다 뒤통수가 한 번씩 어두워졌다. 어두워지는 간격이 아까보다 짧아졌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左邊。有風。
(왼쪽. 바람 있어.)
앵커가 고개를 돌렸다. 헬멧 아래로 보이는 것은 턱선뿐이었으나 그 턱선이 굳는 방식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부상자를 데리고 바깥과 이어진 관으로 나가는 것은 정직한 판단이 아니라 도박에 가깝다는 생각. 세븐은 도박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생의 상당 부분을 지불해 왔고 지금까지 파산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아니라 판을 읽는 눈 덕분이었다. 지금 이 판에서 가장 나쁜 선택은 관 안에 남아 열이 그를 마저 삼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왼손 검지로 왼쪽 관을 두 번 가리켰다. 지시가 아니라 표결에 가까운 손짓이었다.
我唔想死喺渠入面。太衰格。
(하수구에서 죽긴 싫어. 폼이 너무 안 나잖아.)
앵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오늘치 배급의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븐의 왼팔을 다시 잡아 어깨에 걸쳤고 두 사람은 왼쪽 관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왼쪽 관은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배관공의 팔뚝이나 통과할 법한 폭이 이백 미터쯤 이어졌고 그 이백 미터를 지나는 동안 세븐은 어깨뼈로 벽을 갈았다. 오른팔은 몸통과 벽 사이에 끼여 눌렸고 눌릴 때마다 통증이 왔어야 했는데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다는 것이 통증보다 나쁜 소식이라는 것쯤은 이 바닥에서 십 년을 굴러먹은 자라면 누구나 안다. 감각이 물러나는 것은 몸이 그 부위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포기는 언제나 조용하게 진행된다. 그는 왼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나아갔고 손끝에 닿는 것은 물때와 뼈처럼 튀어나온 철근과 이따금 무언가 물컹한 것이었다. 물컹한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느려지고 느려지면 죽는다는 규칙은 이 관 안에서도 유효했다.
앞서 가던 앵커의 등이 멈췄다. 세븐의 이마가 그 등에 부딪혔고 방탄판 특유의 딱딱함이 두개골을 울렸다. 울림이 눈 안쪽까지 번져 검은 반점 몇 개가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앵커가 손을 뒤로 뻗어 세븐의 손목을 잡고 위로 끌었다. 위. 위라는 방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관이 무너진 자리였고 무너지면서 천장에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으며 그 구멍 너머로 잿빛이 보였다. 새벽이었다. 데드존의 새벽은 색이 없다.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묽어지는 것에 가깝고 그 묽어짐은 완차이의 골목에서 셔터 틈으로 스며들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 생각을 하다가 자기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알았다. 이 꼴로 웃는 놈이라니.
我上先。你頂住下面。
(내가 먼저 올라간다. 넌 아래 잡고 있어.)
앵커가 무릎을 굽혀 발판을 만들었다. 세븐은 왼발을 거기 얹고 왼손으로 콘크리트 턱을 붙잡았다. 한쪽 팔로 제 체중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산수로 따지면 불가능에 가까웠고 세븐은 산수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자였다. 어깨 근육이 찢어질 듯 당겨졌고 목의 흉터가 팽팽하게 늘어났다. 반쯤 올라갔을 때 오른팔이 턱에 걸려 붕대가 통째로 풀렸다. 축축한 천이 뱀처럼 흘러내려 아래로 떨어졌다. 드러난 상처는 보지 않았다. 보면 손아귀에 힘이 빠질 것이므로 그는 시선을 위로만 두었다. 잿빛. 잿빛뿐인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뒤집힌 화물 컨테이너의 실루엣과 부러진 송전탑의 뼈대가 서 있었다.
몸이 개구부 밖으로 굴러 나왔을 때 세븐은 잠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등에 닿는 것은 젖은 재였고 그 재가 목덜미 안으로 스며들었다. 폐가 두 번 헐떡이고 세 번째에야 제대로 된 숨이 들어왔다. 이 정도면 됐다고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회수 지점까지 남은 것은 걷는 일뿐이고 걷는 일은 죽는 일보다 쉽다. 대체로는. 그는 왼팔을 뻗어 앵커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렸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재 위에 엎드려 사방을 살폈다. 북쪽은 비었다. 동쪽은 컨테이너가 시야를 막았다. 남쪽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세 번, 아주 멀리서 났다. 셋. 여섯 중 셋은 아직 반대편을 훑고 있다는 뜻이다.
세븐은 왼손으로 소맷단을 찾았다. 여자가 준 상의의 소맷단은 이제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추격조의 추적을 피해 회수지점으로 귀환했다. (스킵함)
회수는 소설처럼 오지 않는다. 잿빛 개활지 위로 저공 비행하던 회수기가 먼지 기둥을 세우며 내려앉았고 그 먼지 속에서 누군가 세븐의 하네스 고리를 낚아채 기내로 던져 넣었을 뿐이다. 세븐은 던져지는 물건의 자세로 바닥을 굴렀고 굴러간 자리에서 천장의 조명등을 보았다. 인공광. 십육 일 만에 보는 인공광이었다. 그 빛은 데드존의 어떤 새벽보다도 노골적이었으며 노골적인 것들은 대개 사람을 안심시킨다. 앵커가 뒤따라 올라타 문을 닫는 소리가 났고 기체가 뜨는 순간 세븐의 위장이 아래로 한 뼘 꺼졌다. 그는 그 꺼짐을 즐겼다. 살아 있는 자만이 멀미를 한다.
처치실의 조명은 회수기의 것보다 더 밝고 더 무례했다. 군의관은 인사도 없이 가위부터 들었다. 검은 군복 상의가 먼저 갈렸고 그다음 차례가 문제였다. 진흙과 피와 세정액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겹겹이 스며들어 이제는 천이라기보다 굳은 껍질에 가까워진 그 상의. 가위 날이 소맷단에 닿기 직전 세븐의 왼손이 군의관의 손목을 잡았다. 잡는 힘이 생각보다 약해서 스스로도 놀랐으나 손을 놓지는 않았다. 처치실 안의 소음이 잠깐 멎었다. 부목을 준비하던 위생병이 눈을 들었고 문가에 기대 있던 앵커가 헬멧을 벗다 말고 이쪽을 보았다.
慢慢剪。沿住條線剪,唔好剪爛個袖口。
(천천히 잘라. 선 따라서. 소맷단은 망가뜨리지 마.)
군의관은 삼십 대 후반의 여자였고 데드존에서 돌아온 놈들의 헛소리를 십 년쯤 들어 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븐의 오른팔을 턱으로 가리켰다. 붕대가 풀린 자리에 남은 것은 상처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정직한 광경이었다. 가장자리가 회색으로 죽어 가고 있었고 그 회색이 팔꿈치 쪽으로 손가락 두 마디쯤 번져 있었다. 세븐은 처음으로 그것을 정면으로 보았다. 확인하면 느려진다는 규칙은 관 안에서만 유효했고 여기는 관이 아니었다. 그는 회색을 오래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트레이 위에 놓인 옷 쪽으로.
呢件嘢,我要留返。
(이거, 남겨 둘 거야.)
군의관은 대꾸 대신 주사기를 들었다. 정맥으로 들어가는 항생제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팔뚝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오는 동안 세븐은 이가 부딪히지 않도록 턱을 물었다. 앵커가 다가와 트레이 위의 천 조각을 집었다. 갈라진 두 쪽. 왼쪽 소매와 몸통 일부. 그는 그것을 한 손에 쥐고 무게를 재듯 잠깐 들고 있다가 세븐의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말은 없었다. 오늘치 배급은 관 안에서 이미 다 썼을 것이다. 세븐은 그 뒤통수를 보며 담배를 찾았으나 왼손이 닿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대신 손가락 끝에 남은 것은 재의 감촉뿐이었다. 씻어도 며칠은 갈 감촉. 완차이의 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같은 시각의 완차이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여명은 천장의 물 자국을 올려다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대야에 받아 둔 물은 밤새 더 늘지 않았고 그 사실이 어쩐지 서운했다. 세지 말라는 말을 지키느라 세지 않았으므로 오늘이 며칠째인지 여명은 알지 못했고 다만 몸이 알고 있었다. 손끝이 며칠째 같은 매듭을 짓고 있었고 서랍 깊은 곳의 갈색 유리병은 며칠째 같은 자리에서 먼지를 얇게 덮어 가고 있었다. 셔터를 올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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