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은 언제나처럼 두 번 깜빡인 뒤에야 제대로 켜졌다. 십 년을 갈아 끼우지 않은 안정기가 내는 낮은 소음이 천장에서 흘러내렸고 여명은 그 소리를 배경처럼 받아들이며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의 공기는 여전히 미지근했다. 난로를 끄지 않고 나갔던 탓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여명의 손이 잠깐 멈췄다. 십 년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였다. 불씨를 남겨두고 문을 나서는 일 같은 것은, 애초에 여명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 항목이었다. 여명은 난로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돌려 껐다. 쇠붙이가 식으면서 딱, 하고 한 번 소리를 냈다.
의자는 아직 거꾸로 돌려진 채였다. 등받이를 앞으로 두고 다리를 벌려 앉는, 그 남자 특유의 앉음새 그대로. 여명은 그것을 바로 돌려놓지 않았다. 대신 벽에 걸린 옷걸이를 봤다. 밤새 말린 그 남자의 젖은 옷들이 걸려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고, 대신 헹궈서 널어둔 수건 두 장이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 하나는 그 남자가 머리를 닦은 것이었다. 여명은 그것을 걷어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코를 대보지는 않았다. 그런 짓을 하기 시작하면 하루가 통째로 무너진다는 것을 아는 나이였고, 무너뜨릴 하루가 아직 열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워즈워스 본부의 진입로는 아침 햇빛 아래에서 유난히 삭막했다. 차량이 정차하자 세븐은 문을 밀고 내려섰고, 군화 밑창이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가 게이트 안쪽까지 울렸다. 스캐너에 손목을 대는 동안 그는 무심결에 어깨를 들어 소매 근처의 냄새를 맡았다. 그 동작을 하는 자신을 자각한 것은 이미 다 하고 난 뒤였다. 라벤더였다. 아니, 정확히는 라벤더 비슷한 무언가와 오래된 다리미의 쇠 냄새와 낡은 원단이 햇빛을 받았을 때 나는 냄새가 섞인 것. 세상 어떤 보급창에서도 조달되지 않는 종류의 배합이었다. 그는 스캐너의 초록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最衰嘅偽裝。連自己都呃唔到。(최악의 위장이야. 자기 자신도 못 속이잖아.)
뒤따라 내린 포가 그 혼잣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 인간은 사격 거리 팔백 미터에서 사람 눈동자를 맞추는 놈이었고, 그런 놈이 삼 미터 앞의 중얼거림을 흘려들을 리 없었다. 포는 장갑을 벗어 정확히 반으로 접으면서 세븐의 옆으로 걸어왔다. 청록색 눈이 세븐의 목덜미를, 정확히는 잘렸다 붙은 듯한 그 흉터의 가장자리를 한 번 스쳤다. 거기에 아주 옅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화상 흉터가 아닌 것이. 포의 미간이 정확히 일 밀리미터 좁아졌다.
Whatever it is, sort it out before the briefing. I'm not covering for you when your head's in Wan Chai.(뭐가 됐든 브리핑 전에 정리해. 네 머리가 완차이에 가 있는 동안 내가 대신 총 들어줄 생각은 없으니까.)
세븐은 이마 위로 선글라스를 밀어 올렸다. 연회색 눈동자가 아침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한순간 유리처럼 보였다. 그는 웃었다. 언제나처럼, 상황을 일 초 만에 판단하고 즉시 시작하는 남자의 웃음이었다.
放心啦。我個頭一直喺呢度。(걱정 마. 내 머리는 계속 여기 있어.)
손가락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두 번 두드리고, 세븐은 게이트 안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문제는 그 말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머리는 확실히 여기 있었다. 다만 머리가 아닌 다른 무엇이 백오십 걸음 거리의 좁은 골목, 셔터가 막 올라간 세탁소 안에 놓여 있었을 뿐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오늘 그가 처리해야 할 업무 목록에 없었다. 여덟시까지는 이십구 분 남아 있었다.
.
여명은 세탁소 문을 잠갔다. 문에는 닫음 표시판을 걸어두고. 세탁소의 안쪽,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묘한 인연이었다. 평생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마주하고, 답지 않게 질문을 던지고, 사소한 약속을 나눴다. 세븐. 7번째 숫자를 이름으로 가진 그 남자를 처음 봤을 때 평생 길들여질 일 없는 야생동물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그랬었고, 그랬어야 했다. ... 눈을 보지 말았어야 했나. 그녀의 작은 읊조림이 조용한 세탁소 안에 울려 퍼졌다. 밝고, 어둡고. 경계가 명확한 것. 흑백은 그녀가 좋아하는 색 중 하나였다. 그 중간인 회색도 물론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경계엔 애매한 것이 하나 즈음은 있어야 좋은 거니까. 그의 눈은 회색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빛을 띄는 색.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계기가 됐던 걸까.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이 안쪽까지 허락한 일은 드물었으므로, 자신이 선택한 예외가 하나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 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안쪽 방은 가게보다 반 뼘쯤 어두웠다. 창이 하나뿐이고 그 창마저 옆 건물 외벽과 마주 보고 있어서 홍콩의 아침은 이 방까지 오는 동안 대부분 다른 곳에 흡수되어버렸다. 여명은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그대로 몸을 뉘였다. 매트리스는 오래된 것이라 사람의 무게를 받으면 낮은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십 년간 들어온 소리였고 십 년간 혼자 들어온 소리였다. 천장에는 물 자국이 하나 있었다. 재작년 태풍 때 생긴 것으로, 여명은 그것을 지도처럼 여기며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국경선을 그렸다. 오늘은 국경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회색이 떠올랐다. 어두운 세탁소 안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던, 유리 조각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 씻긴 자갈 같기도 하던 그 색.
여명은 팔을 들어 눈 위에 얹었다. 시야를 지우면 다른 감각이 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손등에 아직 입술이 눌렸던 자리가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남아 있을 리 없는 자국이었다. 그런데도 여명의 엄지가 자기 손등을 한 번 문질렀고, 문지른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어리석다. 여명은 그렇게 판단했으나 판단만으로 멈춰지지 않는 종류의 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삼십 년을 사는 동안 여명이 배운 것은 대개 절제였고, 절제란 욕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을 뒤로 미루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도 함께 배웠다. 지금 미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붙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세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에도 답하지 않기로 하고 여명은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각 워즈워스 본부 삼층 복도는 형광등 대신 자연광으로 채워져 있었다. 세븐은 브리핑룸 문 옆 벽에 등을 붙이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앞서 들어간 원이 종이컵 하나를 문틈으로 내밀었고 세븐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원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체코인은 필요 없는 음절을 발화하느니 차라리 한 시간 동안 총열을 닦는 인간이었고, 그래서 세븐은 그와 함께 있을 때만 자신의 수다가 얼마나 도구적인지를 자각하곤 했다. 커피는 뜨거웠다. 세븐은 한 모금 마시고 혀끝이 데는 감각을 느꼈다. 두 시간쯤 전에도 똑같은 통증이 있었다. 국물이 너무 뜨거웠는데도 일부러 천천히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 통증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 커피에는 없었다. 이유 없는 통증은 그냥 실수일 뿐이었다.
呢個世界最貴嘅嘢,係一啲你根本用唔著嘅嘢。(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건 말이야, 정작 쓸 데도 없는 것들이더라고.)
원의 푸른 눈이 컵 너머로 한 번 세븐을 향했다가 다시 문 쪽으로 돌아갔다. 대꾸는 없었으나 그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계속하라는 신호에 가까웠다. 세븐은 컵 가장자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종이가 눅눅해져 있었다. 이 남자에게 무언가를 털어놓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지금 입 밖으로 나온 문장 역시 털어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잡음을 밖에 잠깐 내려놓기 위한 것이었다. 브리핑까지 십삼 분. 작전 개요는 이미 단말기에 내려와 있었고 세븐은 그것을 아직 열어보지 않았다. 열어보는 순간 다음 일정이 확정되고, 다음 일정이 확정되면 돌아올 날짜의 범위가 좁혀지고, 범위가 좁혀지면 그것은 약속에 가까워진다. 그는 약속이라는 형식을 오래 경멸해왔다. 경멸의 이유는 단순했다. 지키지 못했을 때 남은 사람이 그것을 오래 들고 서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제로였다.
제로의 구두는 언제나 같은 간격으로 소리를 냈다. 보폭이 일정한 인간은 대체로 두 종류다. 훈련으로 몸에 새겨진 자거나, 자기 시간이 남의 시간보다 비싸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자거나. 그 싱가포르인은 둘 다였다. 복도 끝 창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옆얼굴을 반쯤 지우며 흘렀고, 연보랏빛 눈동자는 그 빛 속에서 오히려 색을 잃어 물처럼 보였다. 제로는 세븐 앞에서 정확히 두 걸음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 거리는 친밀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은, 계약서를 내밀기에 가장 적합한 간격이었다. 세븐은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남자가 두 걸음 앞에 설 때마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패를 세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Brief's been sitting in your terminal for forty minutes. Unopened.(브리핑 개요가 네 단말기에 사십 분째 얌전히 앉아 있던데. 안 열린 채로.)
세븐은 종이컵을 손 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눅눅해진 가장자리가 엄지 지문에 눌려 살짝 찌그러졌다. 변명은 세 가지쯤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중 두 개는 제로가 웃으며 넘어가줄 만한 품질이었다. 문제는 그 두 개 모두 제로가 이미 예측했을 종류라는 점이었다. 이 남자를 상대할 때 가장 저렴한 수단은 정직이었다. 정직은 원가가 없기 때문이다.
我知道。開咗就返唔到轉頭嘅嘢,我通常擺喺最後。(알아. 열면 되돌릴 수 없는 건 난 보통 제일 마지막에 두거든.)
제로의 입꼬리가 아주 얕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기보다 계산이 끝났다는 표시에 가까웠다. 그는 손목의 단말기를 두 번 두드려 무언가를 넘겼고, 세븐의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데드존 동북방, 격벽 사이의 무국적 회랑. 밀그램의 이름이 들어간 문건은 언제나 회수 일정이 아니라 회수 확률로 적혀 있었다. 원이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손 안에서 소리 없이 접었다. 그 무심한 소리에 세븐은 이상하게도 두 시간 전 국숫집에서 젓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닿던 소리를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얇은 소리가 왜 하필 오늘 아침에만 서로를 닮아 있는지, 그는 알고 싶지 않았다.
Sixteen days minimum. Could stretch. You know how the corridor behaves.(최소 열엿새. 늘어날 수도 있고. 그 회랑이 어떤 식으로 구는지는 너도 알잖아.)
열엿새. 숫자가 나오는 순간 세븐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는 평생 날짜를 세지 않는 인간이었다. 세지 않아야 살아남기 편했으니까. 죽는 날짜를 모르는 자는 사는 날짜도 세지 않는 법이고, 그것이 이 직업의 유일한 위생 수칙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머리는 제멋대로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열엿새 뒤면 시월의 끝. 홍콩의 십일월은 습기가 빠지고 밤공기가 마르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마른 밤에는 세탁물이 잘 마르겠지. 그런 생각이 전술 판단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에 세븐은 잠깐 진심으로 아연했다. 그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삼켰다. 혀가 또 데었고 이번에도 이유는 없었다.
완차이의 좁은 방에서는 여명이 얕은 잠의 경계에 걸려 있었다. 눈 위에 얹은 팔이 무거워질 무렵, 잠은 문턱을 넘는 대신 문턱에 앉아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어중간한 잠은 늘 이런 식이다. 완전히 데려가지도 않고 완전히 놓아주지도 않으면서, 깨어 있을 때는 절대 허락하지 않던 장면들만 골라 내민다. 골목의 빗소리. 젖은 어깨. 난로 위에서 물기가 증발하며 나던 미세한 소리.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던 다른 사람의 손가락. 여명은 그 마지막 장면 앞에서 미간을 아주 조금 좁혔다.
.
브리핑룸의 공기는 늘 조금 차가웠다. 서버 냉각 때문이라고들 했지만 세븐은 그것이 사람의 체온을 낮춰두려는 설계라고 믿었다. 뜨거운 머리로는 죽을 확률이 적힌 문서를 끝까지 읽을 수 없으니까. 긴 탁자 위로 홀로그램 지형도가 천천히 회전했다. 격벽과 격벽 사이, 위성 사진으로는 잿빛 얼룩에 불과한 회랑이 붉은 등고선을 두르고 떠올랐다. 투가 좌석 끝에서 손가락을 놀리자 지형도 위에 통신 중계점들이 점멸했고, 그 초록 점들은 하나같이 죽은 도시의 잔해 위에 찍혀 있었다. 세븐은 볼펜 끝을 어금니로 물고 그 점들을 세었다. 여섯 개. 여섯 개 중 둘은 지난 분기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고 그 둘은 결국 아무 신호도 보내오지 않았다.
呢啲位太靚喇。靚到好似有人特登擺喺度畀我哋睇。(위치가 너무 예쁜데. 누가 일부러 우리 보라고 깔아둔 것처럼.)
포가 콧방귀를 뀌며 무언가 독일어로 중얼거렸다. 결벽증 있는 저격수는 지형도의 해상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침 내내 기분이 나빴고, 그 짜증은 늘 가장 가까운 표적을 향했다. 세븐은 그 표적이 자기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브리핑룸에서 오가는 야유는 회랑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허용되는 사치였다. 제로가 손끝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리자 잡음이 일제히 가라앉았다. 그 정적 속에서 세븐은 자기 심박이 평소보다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느린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붙들려 있을 때 인간의 몸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진다.
열엿새. 그 숫자가 지형도 위를 계속 굴러다녔다. 세븐은 회랑의 진입로를 보면서 완차이의 골목 폭을 떠올렸고, 붕괴한 고가도로의 각도를 보면서 세탁소 셔터가 올라가던 높이를 떠올렸다. 직업적 재앙이었다. 지형을 읽는 능력이란 결국 눈앞의 공간에 다른 무엇도 겹쳐 보지 않는 훈련의 결과인데, 오늘 아침 그의 시야에는 자꾸 다른 방이 겹쳤다. 난로. 물이 마르며 나던 소리.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들어오던 손가락. 세븐은 볼펜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손등에서 아직 세탁소 냄새가 났다. 세제와 다림질과 오래된 나무의 냄새. 데드존에 그 냄새를 들고 들어가는 것은 명백한 하자였다. 냄새는 흔적이고 흔적은 추적당하며 추적당하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Zero,我要多帶一件衫入去。私人嘅。(제로, 나 옷 한 벌 더 들고 들어갈래. 사적인 거로.)
제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연보랏빛 눈이 세븐의 겹쳐 입은 상의 아래, 군복이 아닌 천의 목선이 살짝 드러난 부분에 머물렀다가 떠났다. 그 시선의 체류 시간은 일 초 미만이었으나 세븐은 자신의 손패가 한 장 넘어갔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이 남자 앞에서는 정직이 저렴하다고 방금 판단해놓고, 그 저렴함이 결국 청구서로 돌아오는 방식까지는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브리핑은 계속 진행되었다. 진입 경로, 예비 회수점, 방사능 수치의 시간대별 변동, 밀그램 방독면들의 최근 교대 패턴. 세븐의 입은 필요한 순간마다 정확한 질문을 던졌고 머리는 여전히 두 개의 지도를 동시에 펼쳐두고 있었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방에서 여명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은 결국 문턱을 넘어오지 않았고 대신 몸만 무겁게 남겨두고 갔다. 창밖에서 옆 건물 노인이 새장을 내거는 소리, 그다음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 홍콩의 아침은 늘 이 순서로 도착했다.
.
브리핑은 예정보다 십일 분 일찍 끝났다. 그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오래 끄는 작전 회의는 대개 변수가 많다는 뜻이고, 짧게 끝나는 회의는 변수를 계산할 자료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홀로그램 지형도가 꺼지자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방금까지 붉은 등고선을 두르고 회전하던 회랑은 이제 세븐의 뒤통수 안쪽에만 존재했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성가신 보관 방식이었다. 오퍼레이터들이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포는 지형도가 꺼진 자리를 손등으로 한 번 쓸어보고는 먼지가 묻었다는 듯 바지에 문질렀다. 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자기 단말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초록으로 물들인 머리칼 끝이 화면 불빛을 받아 병든 이끼처럼 보였다.
세븐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그는 서두르는 법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여유라기보다 방 안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뒤에 남는 몇 초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 몇 초 동안 그는 자기 자신과 단둘이 남았고, 대체로 그 시간에 가장 정직한 결론들이 도착했다. 오늘 도착한 결론은 이랬다. 열엿새는 길지 않다. 그런데 나는 방금 그것을 길다고 느꼈다. 그 느낌의 출처를 추적하는 일은 회랑의 지형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작업이었으므로, 그는 추적을 중단하고 대신 가방 지퍼를 열었다.
보급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층마다 조명이 하나씩 나가 있었다. 아무도 고치지 않는 것은 아무도 그 어둠에서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세븐은 개인 장구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내려가면서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접힌 천이 손끝에 닿았다. 여명이 건넨 마른 상의. 세제 냄새는 이미 그의 체온과 섞여 원래의 결을 잃어가고 있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지독했다. 순수한 냄새는 잊을 수 있다. 섞인 냄새는 잊히지 않는다. 그는 그 천을 방탄판과 예비 탄창 사이, 아무도 손대지 않을 자리에 밀어넣었다. 규정 위반이었다. 데드존 진입 시 식별 가능한 사물의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시신에서 나온 사복 한 벌이 유족을 만들어내고 유족은 서류를 만들어내며 서류는 회사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 논리는 완벽했고 세븐은 그 완벽함에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你哋唔好望住我。呢件係我嘅個人衛生用品。(다들 쳐다보지 마. 이건 내 개인 위생용품이야.)
포가 계단 아래에서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청록색 눈이 가방 안쪽을 정확히 짚었다가 세븐의 얼굴로 올라왔다. 결벽증 있는 인간은 언제나 남의 정리 상태를 먼저 본다. 그는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짧게 뱉었다. 규정 알지. 세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알지. 근데 아는 거랑 지키는 건 다른 항목이잖아. 포의 미간이 좁아졌고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조직에서 십 년 넘게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 말을 멈춰야 하는지를 안다. 상대가 이미 결정한 사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탄약 낭비였다.
같은 시각 완차이의 골목에서는 세탁소 셔터가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여명은 카운터 앞에 서서 첫 손님이 내민 보따리를 받아 무게를 가늠했다. 옆 건물 식당에서 일하는 중년 여자였고, 소매 끝이 기름에 절어 색이 변한 조리복 세 벌이었다. 여자는 늘 그렇듯 값을 먼저 묻지 않고 언제 되냐고 물었다. 여명은 옷을 펼쳐 실밥이 터진 자리를 손끝으로 짚어보고 나서 모레 오후라고 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으나 여자는 그 짧음을 신뢰했다. 십 년 동안 이 가게가 지켜온 것은 솜씨보다 오히려 그 정확한 짧음이었다.
.
보급창은 늘 약국과 도살장 사이의 냄새를 풍겼다. 소독약, 총기유, 새 방독 필터의 활성탄 냄새가 한데 뒤엉켜 콧속을 긁었고, 세븐은 그 냄새를 십 년 넘게 맡아왔음에도 여전히 첫 호흡에서는 미간을 좁혔다. 카운터 안쪽의 보급관은 늙었고 말이 없었으며 손끝이 놀랍도록 빨랐다. 목록이 하나씩 불렸다. 방독면 본체 하나, 필터 여덟, 요오드화칼륨 정제 한 통, 개인 선량계 둘. 둘이라는 숫자에서 세븐은 손가락을 멈췄다. 하나는 몸에 차고 하나는 시신에서 회수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신참들만 모른다. 그는 서명란에 이름 대신 숫자 7을 그었고, 그 획은 늘 그렇듯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서명이라기보다는 상처에 가까운 형태였다.
필터를 하나 더 달라고 했을 때 보급관이 고개를 들었다. 규정은 여덟이었다. 세븐은 카운터에 팔꿈치를 얹고 웃었다. 그 웃음은 협상용으로 조율된 것이었고, 상대의 완고함이 어느 지점에서 무너지는지 정확히 아는 자의 웃음이었다. 노인은 잠깐 그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아홉 번째 필터를 밀어주었다. 그것은 호의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열엿새짜리 회랑 작전에서 필터 하나가 모자라 죽은 자를 서류로 처리하는 일보다, 하나를 더 내주고 잊는 편이 싸다는 계산.
多謝晒。你今次真係救咗我條命,之後我請你飲茶。(고마워요. 이번엔 진짜 내 목숨 살린 거야, 나중에 차 한잔 대접할게.)
노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 건물에서 나중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세븐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 던졌다. 나중은 값이 싸다. 값이 싸기 때문에 아무 데나 뿌릴 수 있고, 아무 데나 뿌리기 때문에 아무도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싸구려 단어 하나가 완차이의 어느 카운터에서는 정확한 무게로 접수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갈비뼈 안쪽을 자꾸 건드렸다. 열엿새 뒤에 오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돌아오겠다고만 했고, 그것은 기한 없는 채권이었다. 기한 없는 채권만큼 지독한 것이 없다는 걸 도박판에서 배웠으면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계단을 올라오는데 투가 벽에 기대 단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초록 머리의 청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통신 프로토콜 갱신본을 보냈다고 말했고, 이어서 아주 사무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근데 세븐, 형 개인 단말에 마카오에서 온 미수금 안내 세 번째 들어왔던데. 회랑 들어가면 십육 일 동안 못 갚는 거 알지. 세븐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死唔去嘅債主先至係好債主。等我返嚟,佢哋仲會喺度等我。(안 죽는 채권자가 좋은 채권자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걔들은 거기 그대로 있을 거야.)
투가 픽 웃으며 뭐라 빈정거렸으나 그 소리는 계단 통로의 울림 속에서 뭉개졌다. 세븐은 이마 위로 밀어 올린 선글라스를 다시 코등에 걸치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기다리는 것들이 두 종류 있다. 내가 갚아야 할 것과, 나를 기다린다고 말해준 것. 전자는 이자가 붙고 후자는 붙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후자 쪽이 훨씬 무거웠다. 이자가 없는 빚이 왜 더 무거운지, 그는 계단 마지막 칸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완차이의 세탁소에서는 재봉틀이 돌아가고 있었다. 여명은 기름에 절어 뻣뻣해진 조리복 소매를 실뜯개로 조심스럽게 뜯어내는 중이었다. 십 년 동안 같은 손님의 같은 옷을 고쳐왔으므로 어느 실이 먼저 삭는지, 어느 솔기가 늘 먼저 벌어지는지를 손끝이 먼저 알았다.
.
계류장의 바람은 방향이 없었다. 격납고와 격납고 사이에서 갈 곳을 잃은 공기가 제자리를 맴돌며 콘크리트의 먼지를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그 반복 속에서 수송기의 램프가 천천히 내려왔다. 유압 소리는 늙은 짐승의 관절 소리와 닮아 있었다. 세븐은 장구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기까지 세 번의 시도가 필요했는데, 바람 탓이라기보다는 손끝이 평소보다 아주 미세하게 늦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지연을 인식했고, 인식했다는 사실이 더 거슬렸다. 원이 옆에서 방탄판을 조끼에 밀어넣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발의 체코인은 언제나 말 대신 무게로 존재했고, 그 침묵이 오늘은 유난히 넓게 펼쳐져 있었다.
투가 램프 아래에서 소리쳤다. 이륙 이십 분 전, 개인 단말 전부 회수한다고. 회랑 안에서는 어차피 신호가 죽으니까 미련 두지 말고 내놓으라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퍼레이터들이 하나씩 검은 상자에 단말을 던져넣었다. 플라스틱과 플라스틱이 부딪치는 소리가 자잘한 뼈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븐은 줄의 맨 끝에 섰다. 줄의 맨 끝에 서는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고, 이번만큼은 습관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마지막 이십 분. 이 세계에서 이십 분이라는 것은 담배 세 개비이거나, 슬롯머신 열두 번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뱉고 단말을 꺼냈다. 화면에는 마카오에서 온 세 번째 독촉과, 지휘부의 승인 알림과, 그 아래에 아무것도 없었다. 여명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어젯밤 내내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 흔한 열한 자리를 받아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뒤통수를 쳤다. 그는 그것이 실수인지 아니면 자신의 어떤 부분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태업인지를 판별하지 못했다.
喂,投。幫我查個號碼。灣仔嗰邊,一間洗衣舖,招牌好舊嗰間。(어이, 투. 번호 하나만 찾아줘. 완차이 쪽, 세탁소 하나, 간판 되게 낡은 데.)
투는 안경 너머로 그를 한참 보았다. 초록 머리칼 아래의 눈이 재미와 경멸 사이에서 저울질했고, 결국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단말을 두드렸다. 형 진짜. 이거 사적 목적 조회고 로그 남고 나중에 감사 걸리면 나까지 엮여. 세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담배만 빨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은 그가 아는 가장 효율적인 압박이었다. 십오 초 뒤 투가 한숨과 함께 번호를 읽어주었고, 세븐은 그것을 손등에 적었다. 화상 흉터가 시작되는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 손등이었다. 잉크가 살갗에 스며드는 감촉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사람의 몸에 무언가를 새기는 행위는 언제나 조금씩 문신을 닮아 있다.
세탁소에서는 재봉틀이 멈춘 참이었다. 여명은 뜯어낸 솔기 자리에 새 실을 물리고 발판을 밟으려다가, 문에 달린 종이 울리기도 전에 카운터 위의 전화기가 먼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골목에서 유선전화를 쓰는 가게는 이제 셋뿐이었고, 그중 하나가 여기였다. 벨소리는 낡고 둔탁했으며 두 번째 울림에서 그녀는 이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손끝에는 아직 기름 절은 조리복의 뻣뻣함이 남아 있었다. 저편에서 바람 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바람이 먼저 도착하는 통화는 대개 좋은 통화가 아니었으나, 그 바람 뒤에 섞인 낮은 웃음소리를 여명은 알아들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끼우고, 손에 들고 있던 실뜯개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여명은 3초, 기다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알려주는 걸 깜빡했었는데.
세븐은 벽에 등을 붙였다. 격납고의 콘크리트는 아침 햇빛을 아직 흡수하지 못해 차가웠고, 그 냉기가 군복 두 겹을 뚫고 견갑골로 스몄다. 수화기 대신 손에 쥔 것은 낡은 유선 단자 하나였는데 이 본부에서 유일하게 감청 로그가 서류로만 남는 회선이었다. 그는 세 번째로 담배를 고쳐 물었다. 저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도착하기까지 걸린 그 짧은 정적을, 그는 세었다. 하나, 둘, 셋. 셋에서 끊어지는 정적이란 망설임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계산하는 인간을 그는 좋아했다. 도박판에서 제일 무서운 건 패를 던지는 놈이 아니라 세 박자 쉬고 던지는 놈이었으니까.
係咩?咁大件事都可以唔記得。(그래? 그렇게 큰일을 깜빡할 수도 있구나.)
웃음이 새어나왔다. 연기와 함께 나온 웃음이라 반쯤은 흩어졌다. 그는 왼손 손등을 들어올려 잉크로 갈겨쓴 열한 자리를 다시 보았다. 투가 읽어준 숫자와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같은 좌표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어째서인지 작전 성공률보다 더 확실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좌표는 결국 배신한다. 통신 중계점 둘이 지난 분기부터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 열한 자리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갈비뼈 안쪽에서 부풀었고, 그 근거 없음이야말로 그가 평생 경계해온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는 엄지로 잉크를 문질렀다. 번지지 않았다. 살갗이 이미 그것을 삼킨 뒤였다.
램프 쪽에서 포가 손목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연회색 머리칼의 독일인은 결벽증 환자 특유의 정확함으로 십삼 분이라는 입모양을 만들었고, 세븐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원이 방탄판을 마저 밀어넣고 이쪽을 한 번 보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 무심함 속에는 이 계류장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배려가 들어 있었다. 사내들 사이의 배려란 대체로 침묵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것은 여자의 배려가 뜨거운 국수와 마른 옷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었다.
聽住。我要走十六日。唔係十六日之後即刻返,係最少十六日。呢個數字唔准你記住,記住咗就會數。數住嘅日子最難捱。(들어봐. 나 십육 일 갈 거야. 십육 일 뒤에 바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최소 십육 일이란 뜻이야. 근데 이 숫자는 외우지 마. 외우면 세게 되거든. 세는 날들이 제일 견디기 힘들어.)
말해놓고 그는 자신의 입을 조금 미워했다. 이런 종류의 문장은 그의 사전에 없던 것이었다. 여자들에게 그가 남기는 말은 늘 짧고 가볍고 회수 불가능한 것들이었으며 그편이 서로에게 싸게 먹혔다. 그런데 지금 그는 기한을 고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기한을 세지 말라는 부탁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이것은 채무자의 언어였다. 열엿새 뒤의 홍콩 날씨를 검색해본 남자가, 손등에 잉크로 번호를 새긴 남자가, 규정 위반인 자리에 여자의 옷 한 벌을 숨겨넣은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종류의 비효율. 그는 담배를 발밑에 떨어뜨리고 군화 앞코로 비볐다. 재가 콘크리트 위에 검은 얼룩으로 뭉개졌다.
완차이의 카운터 위에서는 재봉틀의 실패가 아직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리복의 뜯어낸 솔기가 벌어진 채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얹혔다. 골목에서는 국숫집 노파가 물통을 끌고 나오는 소리가 났고, 어디선가 라디오가 광둥어로 오늘의 습도를 읊었다. 습도 팔십이 퍼센트. 옷이 더디게 마르는 날씨.
십육 일. 여명은 그 후의 날짜를 계산했다. 빨래가 잘 마르게 되는 날, 알았어요.
빨래가 잘 마르게 되는 날. 세븐은 그 문장을 두 번 되새겼다. 십육이라는 숫자를 세지 말라고 부탁했더니 저편에서는 숫자를 지워버리고 대신 날씨를 하나 얹어 돌려주었다. 그것은 반박이 아니라 번역이었다. 기한을 계절로 갈아끼우는 기술, 유예를 기다림이 아닌 습도의 문제로 강등시키는 솜씨. 그는 자신이 평생 남의 셈법을 읽어내는 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았다고 믿어왔는데 이 여자의 셈법만은 도무지 판돈이 보이지 않았다. 판돈이 보이지 않는 상대는 도박판에서 가장 위험한 종류였다. 잃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 자와 마주 앉은 자는 언제나 자기 패부터 흘리게 되어 있으니까.
哇。你咁樣講嘢,我點走呀。(와. 너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어떻게 가라고.)
웃음이 났는데 이번에는 연기가 섞이지 않아 온전한 형태로 수화기에 들어갔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콘크리트 바닥의 재를 군화 앞코로 한 번 더 문질렀다. 계류장 저편에서 엔진이 예열되는 저음이 시작되었고 그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정강이까지 기어올라왔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열아홉 번이었나 스물세 번이었나, 이 램프를 밟고 올라간 횟수는 어느 시점부터 세지 않게 되었으며 세지 않게 된 뒤로 훨씬 편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발밑의 진동이 이상하게 잘 느껴졌다. 몸이 무언가를 붙들고 있을 때 인간의 감각은 쓸데없이 예민해진다. 그는 그 사실을 방금 발견한 사람처럼 잠시 서 있었다.
완차이의 카운터에서는 라디오의 광둥어가 습도에서 조수 간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명은 수화기를 고쳐 끼우지 않았다. 어깨와 뺨 사이에 낀 플라스틱은 이미 체온으로 데워졌고 그 미지근함이 전화선 저편의 바람과 대비되어 더 선명했다. 그녀의 손끝은 조리복의 벌어진 솔기 위에 얹혀 있었으나 실을 물릴 생각은 아직 없었다. 창밖 골목에서 국숫집 노파가 물통을 세우다 말고 세탁소 유리 너머를 흘깃 보았다. 아침 아홉 시에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여자를 보는 노파의 눈에는 오래 살아온 사람 특유의 짐작이 담겨 있었고, 그 짐작이 무례하지 않은 것은 노파가 그것을 끝까지 입 밖에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喂。做多樣嘢。(어이. 하나만 더 해.)
세븐은 잠시 말을 끊었다. 끊긴 자리를 엔진 소리가 채웠다. 그는 왼손 손등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잉크는 이미 살갗에 먹혀 번지지 않는 상태로 굳어 있었고 열엿새 뒤에는 이 숫자가 지워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워질 것을 알면서 새기는 행위에는 어떤 종류의 어리석음이 들어 있는데 그는 오늘 아침 그 어리석음을 세 번쯤 저질렀다. 규정 위반인 자리에 옷 한 벌을 숨긴 것이 첫 번째, 사적 조회로 동료 하나를 감사 위험에 노출시킨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지금 이 통화가 세 번째였다. 어리석음의 목록을 세는 습관은 도박꾼의 것이며 도박꾼은 목록을 세면서도 결코 손을 떼지 않는다.
唔好喺我返嚟之前,同人講你間舖幾點閂。(내가 돌아오기 전엔, 아무한테도 네 가게 몇 시에 닫는지 말하지 마.)
말해놓고 그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한 것인지 명확히 알았다. 이것은 걱정이 아니라 표시였다. 짐승이 나무 밑동을 긁어 자기 영역의 경계를 알리는 것과 같은 종류의 유치한 행위였고, 그는 이런 짓을 하는 사내들을 오랫동안 우습게 여겨왔다. 소유욕이라는 것은 대체로 능력 없는 자들의 보험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여명의 작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 어깨 사이에 걸친 특유의 위치에서 들려오는 자연스러운 음성. 그러죠. 화창한 날이면 좋겠네요.
웃음소리라는 것은 대개 형태가 없다. 흩어지고 번지고 곧 잊힌다. 그러나 어깨와 뺨 사이에 낀 수화기에서 건너온 웃음은 형태가 있었다. 그것은 목구멍이 아니라 흉곽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송화구에 닿기 전에 이미 반쯤 삼켜진 종류의 것이었고, 그렇게 삼켜지다 만 소리는 온전한 웃음보다 훨씬 사적이었다. 세븐은 그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격납고 천장의 강철 늑골 사이로 아침 빛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그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엔진 예열의 진동에 맞춰 미세하게 층을 이루며 흔들렸다.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그것을 보았다. 실내였으므로 벗어야 했으나 벗지 않았다. 벗으면 저 빛이 눈으로 곧장 들어올 것이고, 지금 그의 눈에는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화창한 날. 그 단어에 걸린 무게를 계산해보려다 그만두었다.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데드존의 회랑에는 날씨가 없다. 방사능 낙진이 만든 회백색 상공 아래에서는 맑음과 흐림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오직 시야 확보 거리만이 남는다. 그는 열엿새 동안 화창함이라는 개념을 잊을 것이었고, 잊은 채로 돌아와서야 그 단어가 어딘가에 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었다. 예치. 은행 용어였다. 도박꾼에게 가장 낯선 종류의 어휘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예치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으며 손에 들어온 것은 그날 밤 안에 판돈으로 밀어넣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재무 철학이었다.
你知唔知,你而家做緊咩?你係咪知道自己講嘅嘢有幾重?(너 지금 뭐 하는지 알아?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냐고.)
질문의 형식을 빌렸으나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램프 쪽에서 원이 방탄판 마지막 장을 밀어넣고 해치를 두드렸다. 금속을 두 번 치는 소리가 격납고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포는 이미 탑승구 안쪽으로 사라진 뒤였고 그 결벽증 환자가 자기 자리를 알코올 솜으로 닦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븐은 반 걸음 물러서며 램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어깨에서 떨어져나갔고 그와 함께 잠시 몸이 서늘해졌다. 왼손 손등의 잉크를 엄지로 덮어 눌렀다. 살갗 아래로 스민 숫자가 손가락 밑에서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었으나 착각도 감각의 일종이었다.
완차이의 카운터에서는 라디오가 조수 간만을 다 읊고 광고로 넘어갔다. 어느 제약회사가 방사선 노출 후유증 완화제를 광고하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명랑했고, 명랑한 목소리로 읊어지는 후유증의 목록은 그래서 더 기괴하게 들렸다. 국숫집 노파가 물통을 마저 세워놓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세탁소 유리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이번에는 흘깃이 아니라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아침 아홉 시 이십 분에 전화기를 어깨에 낀 채 조리복 솔기만 쓰다듬고 있는 여자를 노파는 오래 보았고, 그러다 스스로 무안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자기 가게 쪽으로 돌아갔다. 홍콩의 골목이란 그런 곳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구조.
我走喇。跟住嘅十六日,你唔會聽到我把聲。唔好諗係咪出咗事。冇消息就係最好嘅消息,呢句嘢喺我哋行頭係真嘅。 (끊는다. 앞으로 16일 동안 내 목소리는 듣지 못하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알아요. 여명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바람소리,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 그것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서 가세요.
어서 가세요. 세븐은 그 다섯 음절이 수화기 안쪽 얇은 막을 때리고 자기 귓속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유난히 또렷하게 감각했다. 붙잡는 말을 들었다면 그는 웃으며 끊었을 것이다. 붙잡는 말은 다루기 쉽고 붙잡는 말에는 언제나 반대급부가 딸려 있으므로 값을 매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 쪽에서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니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가야 할 사람의 신발 끈이 풀리지 않았는지 확인해주는 종류의 손짓이었다. 도박판에서 상대가 자기 패를 스스로 엎어 보여줄 때 그는 늘 승리감이 아니라 서늘함을 느꼈는데 그 서늘함의 정체를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잃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 자는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그런 자 앞에서 자기 패를 세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
램프의 강철판이 유압으로 한 뼘 더 내려앉으며 계류장 바닥과 이를 맞췄다. 세븐은 군화 앞코를 첫 단에 올려놓고 그대로 멈췄다. 발끝은 이미 저쪽에 있고 뒤꿈치는 아직 이쪽에 남아 있는 자세, 그가 지난 십 년 동안 수십 번 취했으면서도 한 번도 오래 머무른 적 없는 자세였다. 격납고 안의 공기는 항공유와 냉각제와 마른 콘크리트 먼지가 섞인 익숙한 냄새로 채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자기 어깨에서 올라오는 낯선 냄새 하나가 계속 끼어들었다. 세탁비누 냄새였다. 군복 상의 아래 겹쳐 입은 마른 상의에서 나는 것이었으며, 열엿새 뒤에는 화약과 낙진과 자기 피 냄새에 완전히 덮여 사라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소멸의 예정된 시간표를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 껴입는 행위는 오늘 아침의 네 번째 어리석음이었고 그는 셈을 그만두기로 했다.
知啦。你講嘢我幾時唔聽㗎。(알았어. 내가 네 말 안 들은 적 있냐.)
완차이의 카운터에서는 어깨에 낀 수화기가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었다. 여명은 왼손으로 그것을 받쳐 들었고 오른손 검지는 카운터 유리 위에 아무 의미 없는 원을 그렸다. 유리에는 어제 내린 비의 습기가 아직 얇게 남아 손끝을 따라 흐릿한 자국이 생겼다가 곧 다시 흐려졌다. 라디오의 광고는 끝나고 옛날 광둥어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며, 가사는 사랑에 관한 것이었으나 편곡이 지나치게 흥겨워 아무도 그 가사를 진지하게 듣지 않을 종류의 곡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국숫집 노파가 육수 솥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아침의 완차이는 늘 이런 식으로 작동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솥을 열고 누군가는 남은 습기 위에 원을 그린다.
세븐은 마지막으로 수화기를 귀에 눌렀다. 저편의 소음이 들렸다. 재봉틀은 아직 돌지 않았고 라디오만 혼자 떠들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아주 얕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오갔다. 그는 그 숨의 간격을 세 번쯤 세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그만두었다. 심박이 평소보다 느렸다. 작전 직전의 인간이 이런 심박을 갖는 것은 좋은 징조도 나쁜 징조도 아니지만, 적어도 정상은 아니었다. 원이 램프 위에서 턱짓으로 시간을 알렸다. 단말기 반납까지 삼 분. 세븐은 왼손 손등의 잉크를 손바닥으로 통째로 감싸 쥐었다. 지워질 것을 감추는 손동작은 그것대로 완결된 하나의 미신이었다.
喂。最後一句。(어이. 마지막으로 하나만.)
그는 말을 골랐다. 골랐다기보다 여러 개를 버렸다.
네. 그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버린 문장들은 대체로 좋은 문장이었다. 기다려라, 라는 말은 명령이어서 버렸고, 미안하다는 말은 거짓이어서 버렸으며, 사랑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값이 싸서 버렸다. 그런 말은 격납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케이블 타이처럼 흔했고 흔한 물건은 전장에서 아무것도 묶어주지 못한다. 세븐은 자기 안에서 그 문장들이 하나씩 폐기되는 소리를 들었다. 남은 것은 하나였고 그것은 정확히 그가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인간이란 결국 가장 말하기 싫은 말만을 진심이라 부르며 살아가는 우스운 생물이라는 사실을, 그는 서른두 해 동안 몇 번이고 확인했으면서도 매번 처음처럼 낯설어했다. 램프의 강철이 발밑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엔진의 저주파가 발바닥을 타고 정강이까지 올라왔다.
如果我遲咗,唔好即刻收檔。(만약 내가 늦으면, 바로 가게 접지 마.)
말해놓고 스스로 어이가 없었는지 세븐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늦는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고 죽은 자가 셔터를 붙잡아둘 권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워즈워스에서 열두 개의 번호 중 몇 개는 정기적으로 비었고 비워진 번호는 곧 새 얼굴에게 넘어갔으며 아무도 그 이전의 주인을 오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은 편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편한 규칙 바깥으로 손 하나를 뻗어 아무 상관도 없는 골목의 셔터에 걸어두고 있었다. 왼손 손등을 감싼 손바닥 안에서 잉크가 땀에 개어 미끄러웠다. 이미 번지기 시작한 숫자였다. 그는 그것을 더 세게 쥐었다. 쥔다고 남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완차이의 카운터 유리 위에서 여명의 손끝이 멈췄다. 습기로 그려진 원은 이미 절반쯤 증발해 흐릿한 흔적만 남아 있었고 그 위로 아침 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얇은 무지개 같은 것을 만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라디오의 광둥어 노래는 후렴으로 접어들어 지나치게 명랑한 관악기 소리를 뿜어냈다. 골목 저편에서 국숫집 노파가 육수 국자를 솥전에 두 번 두드렸다. 챙, 챙. 아침의 신호였고 이 골목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소리였으며 오늘따라 그 금속음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해치 두드리는 소리와 기묘하게 박자가 맞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강철이 같은 시각에 울렸다. 그것을 우연이라 부르기에는 여명의 귀가 너무 밝았다.
你唔使應我。你聽到就得。(대답 안 해도 돼. 듣기만 하면 돼.)
원이 램프 위에서 손목시계를 두 번 두드렸다. 그 동작에는 재촉이라기보다 예의에 가까운 것이 있었는데, 저 체코 사내는 사람이 통화를 끝내는 방식에 대해 늘 이상할 만큼 신중했다. 세븐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수화기를 귀에서 아주 잠깐 떼었다. 계류장의 소음이 통째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압 소리, 무전 잡음, 누군가 짐칸에서 욕설을 뱉는 소리. 그 모든 것이 그가 십 년간 살아온 세계의 배경음이었고 그 배경음 속에서 그는 언제나 편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익숙한 소음이 저편의 얕은 숨소리 하나를 덮어버릴까 봐 신경이 쓰였다. 직업적 재앙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이것은 그냥 병증이었다. 그리고 병증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조금 편해진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세븐은 다시 수화기를 눌러 붙였다. 이번에는 뺨에 닿을 만큼 가까이. 목의 흉터가 플라스틱 케이스에 눌리며 둔한 압박감을 만들었다.
저편에서 아주 짧은 정적이 있었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굳이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통신 압축을 거치며 잘게 부서졌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븐은 그것을 들었다. 대답 대신 오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오늘 아침에만 세 번쯤 배웠다. 붙잡지 않는 손, 세지 않는 날짜, 그리고 지금 이 삼켜진 무엇. 계류장의 강철 천장 아래에서 그는 자기가 지금껏 사람을 다루어온 방식이 얼마나 조악한 도구였는지 잠깐 생각했다. 그는 사람을 읽는 데 능했고 읽은 것을 이용하는 데는 더 능했으며 그 능함으로 열두 개의 번호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읽히기를 자청하는 인간 앞에서는 도구가 통째로 무용해졌다. 이건 판이 아니었다. 판이 아닌 곳에 앉아본 적이 없는 자가 판이 아닌 곳에 앉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그는 담담히 인정했다.
완차이의 카운터에서는 라디오의 노래가 끝나고 짧은 정적이 지나간 뒤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늦게 남서풍, 습도 팔십 퍼센트, 저녁 무렵 소나기 가능성. 여명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왼손 손바닥에 눌린 플라스틱은 오래 통화한 탓에 사람의 체온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데워져 있었고, 그것을 저편의 온기라고 착각하는 일이 얼마나 유치한지 알면서도 그녀는 손을 풀지 않았다. 카운터 유리 위의 원은 완전히 증발했다. 흔적이 있던 자리는 다른 자리와 똑같이 매끈했으며 아무도 거기 무언가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이 도시의 방식이었다. 습기는 마르고 사람은 떠나고 셔터는 시간이 되면 내려간다. 여명은 오늘부터 그 마지막 항목만은 조금 다르게 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聽到咗。(들었어요.)
세븐의 입가가 선글라스 아래에서 아주 천천히 기울었다. 웃음이라기에는 인색하고 안도라기에는 무례한 종류의 표정이었다. 그는 램프 위로 완전히 올라섰다. 뒤꿈치까지 저쪽으로 넘어간 순간 발밑의 진동이 몸통 전체로 옮겨왔고 격납고의 냄새가 급격히 항공유 쪽으로 기울었다. 원이 짐칸 안쪽에서 손짓했다. 포는 이미 좌석 벨트를 채우고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규정 위반자에 대한 경멸과 통화 상대에 대한 얄팍한 호기심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세븐은 그 시선을 무시하는 데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았다. 십 년간 그는 남의 시선을 무시하는 근육만은 성실하게 단련해왔다.
咁我收線喇。唔好掛住我。(그럼 끊을게. 나 보고 싶어 하지 마.)
말끝이 조금 눌렸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알아차린 즉시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덮었다. 보고 싶어 하지 말라는 말은 명령이 아니라 뇌물에 가까웠다. 상대가 지불하게 될 값을 미리 깎아주려는 얄팍한 흥정이었으며, 그런 흥정을 카지노 딜러 앞에서 시도했다면 진작에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세븐은 수화기에서 귀를 떼기 직전 마지막으로 왼손 손등을 펼쳐 보았다. 숫자는 이미 절반쯤 번져 두 자리가 서로 잡아먹은 상태였고, 그러나 그는 그 숫자를 외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외웠다. 적은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워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에서야 스스로에게 실토했다. 통신이 끊겼다. 신호음은 짧고 무성의했다.
완차이의 카운터에는 그 무성의한 끊김만이 남았다. 여명은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고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식는 데는 채 열 번의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여명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열 번의 호흡을 내쉬고, 다시 조리복 수선을 이어나갔다. 십육 일. 천천히 계산했다. 선물도 느긋히 준비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간. 어떤 것이 될 지는 이미 폐허에서 질문을 건네던 순간부터 정해뒀었다. 피로를 풀 수 있을 정도의 맛 좋은 술. 수선에 임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표정도, 바른 자세도, 빠른 손놀림도 평소와 같았다.
재봉틀의 발판을 밟는 힘은 언제나 일정했다. 여명의 오른발이 미세하게 눌리면 바늘대가 위아래로 성실하게 오르내렸고, 조리복 옆선의 벌어진 솔기가 한 땀씩 다시 봉해졌다. 이 일에는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 좋았다. 천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실은 원한을 품지 않으며 바늘은 언제나 정해진 자리에 정확히 꽂힌다. 골목 저편에서 국숫집 노파가 솥에 물을 붓는 소리가 났고, 아침 볕이 창틀을 지나 카운터 유리 끝자락까지 밀려들어왔다. 습기로 그렸던 원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고 여명은 스스로에게 말했으며, 그 말이 절반쯤은 사실이라는 점이 우스웠다.
열엿새. 여명은 그 숫자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셈했다. 조리복 하나에 반나절, 세탁물 회전 주기가 사흘, 그 사흘이 다섯 번 하고 하루가 남는다. 그 남는 하루는 아마 술을 고르는 날이 될 것이다. 폐허 한복판에서 그 남자에게 첫 질문을 건넸던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물건이었다. 독하되 목을 할퀴지 않는 것. 피로가 몸 밑바닥에 가라앉았을 때 그것을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재워주는 것. 완차이 뒷골목의 늙은 주류상이 창고 안쪽에 감춰둔 것 중에 그런 물건이 하나쯤 있을 터였다. 값은 아마 사흘치 수선비쯤 나가겠지만 여명은 그 계산을 오래 하지 않았다.
수송기의 화물칸은 인간의 대화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 아니었다. 저주파 진동이 늑골 안쪽을 두드렸고 방음 처리라는 것은 애초에 예산 항목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세븐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선글라스를 벗어 목깃에 걸었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화물칸의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유독 서늘하게 식어 보였다. 그는 왼손 손등을 펼쳐 엄지로 천천히 문질렀다. 숫자는 이제 형체를 잃고 푸른 멍처럼 번져 있었다. 지워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적었다고 아침에 스스로 실토해놓고서, 정작 지워지는 광경 앞에서는 손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는 그 모순을 굳이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해결하려 드는 순간 성가셔지고 성가신 것은 전장에 들고 들어갈 물건이 아니었다.
喂,你隻手係咪畫咗嘢?(야, 너 손에 뭐 그린 거 아냐?)
투가 맞은편 좌석에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빈정거렸다. 녹색 머리칼이 비상등 아래에서 탁한 이끼색으로 보였고 귓바퀴의 피어싱이 진동에 맞춰 미세하게 떨렸다. 세븐은 대답 대신 손등을 뒤집어 무릎에 얹었다. 그 동작이 지나치게 신속해서 오히려 대답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반박자 늦게 깨달았다. 원이 반대편에서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고, 포는 소총 노리쇠를 세 번째로 분해하며 독일어로 뭔가 짧게 씹어뱉었다. 열두 개의 번호 중 여섯이 이 철제 관에 실려 있었으며 앞으로 열엿새 동안 이들에게는 이름도 시계도 없을 예정이었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은 언제나 편했다. 오직 지금만 아주 조금 불편했다.
畫嘅係地址。行動完之後要返去攞返啲嘢。(주소 그린 거야. 작전 끝나고 찾으러 가야 할 게 있어서.)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화물칸 규정을 떠올리고 그대로 갑을 도로 밀어 넣었다. 개인 장구 가방의 지퍼 틈으로 여명이 준 옷의 소맷단이 아주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세븐은 손가락 두 개로 그것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고도가 바뀌자 화물칸의 공기가 먼저 달라졌다. 압력이 귓속을 두어 번 밀어냈고 금속 늑골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는 계류장의 그것과 질이 달랐다. 이 아래가 이미 도시국가의 관할 밖이라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세븐은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상체를 앞으로 조금 기울인 채 앉아 있었다.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이동에서 그는 늘 이 자세를 택했는데, 허리를 세우면 진동이 척추를 타고 후두부까지 올라오고 완전히 늘어지면 강하 직전에 몸이 굼떠지기 때문이었다. 열두 개의 번호 사이에서 십 년을 버틴 자의 요령이란 대개 이렇게 사소하고 우스운 것들의 목록이었다. 반대편에서 포가 네 번째로 분해한 노리쇠를 다시 조립하고 있었고 그 반복은 결벽이라기보다 일종의 기도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 관 안에서 각자의 미신은 각자의 소관이었다.
완차이의 골목은 정오를 향해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여명은 조리복의 마지막 실밥을 가위로 끊어내고 옷걸이에 걸어 카운터 옆 봉에 매달았다. 옆선이 다시 하나가 된 천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끄러웠고, 수선이란 결국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우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도시의 습기와 닮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접었다. 셔터를 절반쯤 내리고 그 아래로 몸을 숙여 빠져나오는 동안 등뼈가 익숙하게 굽었다가 다시 펴졌다. 주류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들어간 자리에 있었고 간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오래전에 떨어져 나가 못 자국만 남아 있었다. 오후에 세탁물 인수가 있으니 사십 분 안에 돌아와야 했다. 여명은 그 사십 분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梅子酒喺入面。要幾多年嘅?(매실주는 안쪽에 있어. 몇 년짜리로?)
늙은 주류상이 목장갑을 낀 손으로 창고 커튼을 젖히며 물었다. 여명은 대답 대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반 위에는 라벨이 반쯤 삭은 병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고 먼지는 손가락으로 밀면 층이 생길 만큼 두꺼웠다. 그녀가 찾는 것은 매실주가 아니었다. 목을 할퀴지 않으면서 몸 밑바닥에 가라앉은 피로를 굳이 끌어올리지 않는 것. 그런 술은 대개 이름이 화려하지 않고 병 모양도 무뚝뚝했다. 여명은 세 번째 선반 끝에서 갈색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무게가 적당했고 코르크 마개 위의 밀랍이 온전했다. 값을 물으니 사흘치 수선비보다 조금 더 나갔다. 그녀는 지폐를 세어 건네면서 잠깐, 아주 잠깐 이 물건을 받아들 사람의 손 모양을 떠올렸다.
세븐은 장구 가방의 지퍼 위에 손바닥을 얹은 채로 있었다. 안쪽에서 천 냄새가 올라올 리 없었다. 화물칸에는 항공유와 총기유와 여섯 명분의 땀 냄새뿐이었고 세탁비누 같은 것이 존재할 여지는 물리적으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습관이 되기에는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동작이었으며, 그렇기에 더욱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확인이었다. 아직 거기 있는지. 아직 있다는 사실이 자기 것인지. 십 년 동안 그는 자기 것이라 부를 만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그 전략은 대체로 훌륭하게 작동했다. 원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T-40. Wake up, Seven.(사십 분 전이다. 정신 차려, 세븐.)
我一直醒住。你哋先似死咗咁。(나 계속 깨어 있었어. 너희가 더 뒈진 것 같은데.)
강하 십오 분 전을 알리는 부저가 화물칸 천장에서 두 번 울렸다. 붉은 비상등이 주황으로 바뀌면서 여섯 개의 그림자가 동시에 길어졌고, 그 순간부터 이 철제 관 안에서 사담은 사치가 되었다. 세븐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척추가 한 번 뻐근하게 펴지는 감각, 오래 앉아 있던 다리에 피가 다시 도는 저릿함, 이런 것들은 십 년 동안 조금도 새로워지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믿을 만했다. 그는 하네스의 어깨 끈을 잡아당겨 흉통 위로 조였다. 화상 흉터가 자리 잡은 오른쪽 옆구리 위로 벨트가 지나갈 때마다 감각이 한 뼘쯤 둔했으며 그것이 이제는 자기 몸의 정상적인 지형이었다. 버클 세 개, 좌우 대칭, 손끝으로 걸쇠를 튕겨 소리를 확인하는 절차. 포가 옆에서 같은 순서를 밟으며 여전히 독일어로 뭔가를 중얼거렸고 원은 이미 문 쪽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완차이의 골목은 정오 직전의 냄새를 뿜었다. 기름과 식초와 젖은 시멘트, 그 위에 국숫집 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얇게 덮였다. 여명은 갈색 유리병을 품에 안듯 팔뚝에 얹고 걸었다. 병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창고 안쪽의 냉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어서 셔츠 소매가 축축해졌다. 세탁소 앞에 이르러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셔터를 어깨 힘으로 밀어 올렸다. 금속이 레일을 긁으며 내는 그 특유의 비명은 이 골목에서 하루에 두 번씩 들리는 소리였고 오늘은 어쩐지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안으로 들어와 형광등을 켜자 재봉틀 위의 실밥 부스러기가 먼지처럼 떠올랐다. 여명은 카운터 안쪽 선반 앞에 서서 잠깐 망설였다. 눈에 보이는 자리에 두면 손님이 물을 것이고, 물으면 대답해야 하고, 대답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선반 가장 깊은 곳, 낡은 다리미 커버와 여분의 실패 상자 뒤편에 병을 세워 넣었다. 밀랍 마개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뗐다. 이상하게도 그 동작을 마치고 나니 열엿새가 조금 짧아진 것 같았다. 사물을 미리 놓아두는 일에는 시간을 앞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여명은 앞치마를 다시 두르고 끈을 뒤로 돌려 묶었다. 오후 두 시에 세탁물 인수가 있고 국숫집 노파의 조리복은 이미 봉에 걸려 있으며 장부에는 어제치 계산이 두 줄 비어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한 하루는 견디기 쉬운 하루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오늘 처음으로 그 앎에 약간의 원망 비슷한 것이 섞였다.
Comms blackout in ten. Say your goodbyes now, ladies.(십 분 뒤 통신 차단. 작별 인사는 지금 해라, 아가씨들.)
투가 헤드셋을 눌러 쓰며 화물칸 전체에 들리도록 말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고 아무도 인사할 상대가 없었다. 세븐은 목깃에 걸어둔 선글라스를 벗겨 눈 위에 다시 얹었다. 검은 렌즈 뒤로 연회색 눈동자가 사라지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어제까지 남아 있던 무언가가 함께 사라졌다. 그는 군복 상의의 앞섶을 한 번 여몄다. 그 안쪽에 겹쳐 입은 천이 살갗에 닿았고, 항공유 냄새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그것만은 아직 다른 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냄새가 아니라 촉감이었다. 세탁비누는 이미 증발했지만 천의 부드러움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정도의 잔여물뿐이었다. 세븐은 왼손 손등을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았다. 번진 숫자는 이제 판독 불가능한 얼룩이었고 그는 그것을 엄지로 세게 문질러 완전히 지워버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