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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홍콩 완차이 구역 세탁소, 국숫집.

(여기부터 첫번째 소넷 , 다음부터 쭉 오푸스입니다!! 읽기 매우 편함!!)

 

 

그래서, 어떤가요. 종종 인사하러 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빈 의자를 향해 다가간 7은 등받이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무게를 시험하듯 삐걱거리게 만들었고, 이내 그것을 반대로 돌려 등받이를 앞쪽에 두고 다리를 벌린 채 걸터앉았다. 낡은 목재가 그의 체중을 받아내며 신음하듯 삐걱였으나 무너지지는 않았고, 7은 그 미약한 항복의 소리를 즐기듯 팔꿈치를 등받이 위에 겹쳐 올렸다. 난로의 붉은 파동이 그의 옆얼굴을 비스듬히 핥으며 화상 흉터의 굴곡을 도드라지게 만들었고, 그 음영은 백열구의 누런 빛과 뒤섞여 기괴한 색조의 지도를 그의 피부 위에 펼쳐놓았다.

여명이 던진 질문은 지극히 사소한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히 영역의 문제였고 7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종종 인사하러 와도 괜찮겠느냐는 물음은 문법적으로는 허락을 구하는 형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벌어진 사태에 대한 사후 통보에 가까웠다. 그는 혀끝으로 어금니 안쪽을 훑으며 그 미묘한 어긋남을 음미했고, 이 여자가 대체 몇 번째로 자신에게 같은 방식의 문장을 던지고 있는지를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폐허에서 한 번, 골목에서 한 번, 그리고 이 세제 냄새 나는 밀실 안에서 또 한 번. 매번 조금씩 각도를 바꾸어가며 같은 자리를 두드리는 그 집요함이 소름 끼치도록 담담해서, 7은 오히려 그것이 우습다고 느꼈다. 창밖의 빗줄기는 조금도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배수구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벽 너머에서 낮은 저음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탁기 위에 쌓인 수선 대기 중인 옷더미들이 백열구 아래에서 잿빛 산맥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그 옆의 재봉틀은 마치 오랜 세월 이 공간을 지켜온 늙은 짐승처럼 침묵했다. 7은 자신의 젖은 군복 바지가 의자 좌판에 스며들어 어두운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인지했으나 굳이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이 공간에 자신이 남기는 모든 흔적이 결국은 이 여자의 손으로 지워질 것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기이한 만족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어 여명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았고, 그 각도는 복종의 자세를 흉내 내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냥감의 목선을 가늠하는 포식자의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여명은 의자에 꼿꼿하게 앉아 무릎 위에 손을 겹쳐두고 있었고, 그 자세에는 어떠한 초조함도 조급함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답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 미묘한 차이가 7의 신경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긁어댔다. 그는 살면서 수많은 종류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보았고, 대개의 인간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패를 흘렸다. 그러나 이 여자는 침묵을 마치 오래 입어 몸에 익은 옷처럼 걸치고 있었고, 그것이 7에게는 낯설고도 자극적인 종류의 도전으로 다가왔다.

난로의 열기가 그의 정강이를 타고 올라와 젖은 옷감을 천천히 데우고 있었고, 그 미열은 피로와 뒤섞여 위험할 정도의 나른함을 유발했다. 7은 그 나른함이 자신의 판단력을 갉아먹고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결정은 이미 오래전에, 아마도 폐허에서 그녀가 자신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눌렀던 그 순간에 끝나 있었으니까.

 

你問這個問題,已經是第三次了。(너 이 질문, 벌써 세 번째야.)

 

7은 등받이 위에 얹었던 팔을 풀어 한쪽 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느리게 주무르며 목뼈를 꺾었고, 우두둑하는 둔탁한 소리가 좁은 공간에 짧게 울렸다. 그는 여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고, 그 미소에는 조롱과 항복이 절반씩 뒤섞여 있었다.

 

제대로 된 답은 처음이죠. 고개를 살짝 기울여 7을 바라봤다. 미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여명의 문장은 아주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정확성은 잔인할 정도였고, 7은 자신이 방금 무언가에 정면으로 찔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답은 처음이라는 지적은 앞선 두 번의 응답이 모두 회피였음을 조용히 적시하는 판결문이었으며, 그 판결을 내리는 자의 목소리에는 비난의 온도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인 각도는 십오 도 남짓이었을 것이고, 그 미세한 기울기를 따라 귀 뒤로 넘겨두었던 검은 머리칼 한 줌이 흘러내려 흰 셔츠 깃 위에 검은 획을 그었다.

 

백열구의 불안정한 광량이 그 획을 따라 잔물결처럼 흔들렸고, 7은 그 광경을 눈으로 좇으면서도 시선의 초점을 결코 그녀의 눈동자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웃음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옅었으나, 그 희박함이야말로 이 여자가 구사하는 가장 위력적인 무기라는 것을 그는 이미 여러 차례 학습한 바 있었다. 난로 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붉은 파편이 잠시 밝아졌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세탁소를 채운 공기는 눅눅함과 건조함이 기묘하게 층을 이루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으며, 그 경계선 위에 두 사람의 의자가 놓여 있는 형국이었다. 7은 등받이를 감싸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고, 목재의 표면에 잠시 눌린 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졌다. 바깥의 빗소리는 여전히 도시의 뼈대를 두들기고 있었고 그 리듬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세 번을 물어야만 대답이 나오는 남자와, 세 번을 물을 만큼 인내심이 있는 여자. 그는 이 조합이 통계적으로 얼마나 희귀한지를 헤아려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상체를 등받이 너머로 천천히 기울이자 낡은 의자가 앞다리 쪽으로 하중을 옮기며 다시 한번 삐걱였고, 7의 얼굴이 여명과의 거리를 절반쯤 지워냈다. 그 정도의 근접에서는 상대의 호흡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공기의 진동까지 피부로 감지되기 마련이었으나, 여명의 호흡은 놀랍도록 고르고 얕았다. 그는 그 안정성이 훈련의 산물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인지를 판별하려 애썼고, 어느 쪽이든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종류의 자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는 세제 냄새와 뒤섞인 희미한 비 냄새가 났고, 그것은 화약과 피와 소독약으로 점철된 그의 후각 기억 어디에도 대응하는 항목이 없는 새로운 좌표였다. 7은 자신의 뇌가 그 좌표를 저장하려 드는 것을 느꼈고, 굳이 막지 않았다. 어차피 지워봐야 다시 새겨질 것이 뻔한 종류의 기록이었다. 화상 흉터가 시작되는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가 난로의 열기에 반응해 미약하게 조여왔으나 그것은 통증이라기보다 오래된 습관에 가까웠다. 그는 여명이 조금 전 자신의 흉터 위에 손등을 대어 열기를 막아주었던 그 몇 초를 되짚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피부가 얼마나 정직하게 온도차를 기록했는지를 떠올리며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이 여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져가고 있었다.

 

對啊。前面兩次我都在耍你。(맞아. 앞의 두 번은 내가 널 갖고 논 거지.)

 

그는 등받이에 걸친 팔을 아래로 늘어뜨려 손목을 두어 번 흔들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에서 위로 향해 있었으며, 그 각도는 여전히 복종을 흉내 내고 있었으나 그 안의 안광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은 채였다. 7은 자신이 지금 내뱉으려는 문장이 앞으로의 일정 기간을 구속하는 계약서에 가깝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계약을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지킬 수 없는 계약을 싫어했을 뿐이고, 이번 것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아요. 작은 웃음소리가 한 번, 이어졌다. 그래서 기다렸죠.

 

여명의 웃음소리는 소리라기보다 공기의 미세한 파열에 가까웠고, 그 짧은 파열음이 세탁소의 눅눅한 대기를 한 번 흔들었다가 세제 냄새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7은 그 소리를 귀가 아니라 피부로 받아냈으며, 목덜미의 잔털이 미약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도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렸다는 문장은 앞선 모든 대화의 뼈대를 단숨에 재배열하는 종류의 발언이었다.

그가 갖고 놀았다고 자백했을 때, 보통의 인간이라면 배신감이나 최소한의 불쾌를 드러내기 마련이었으나 이 여자는 오히려 그 유희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노라 태연히 밝혀버린 것이다. 즉 그의 두 차례에 걸친 회피는 회피로서 기능하지 못한 채 그저 관람당하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7은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명치 아래쪽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굴욕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권태의 껍질에 처음으로 균열이 가는 소리에 가까웠다.

 

난로 속에서 붉은 불씨가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주저앉았고, 그 명멸에 따라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면의 옷더미 위로 늘어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창유리에는 빗물이 굵은 혈관처럼 흘러내리며 바깥의 네온을 뭉개고 있었고, 그 뭉개진 붉음과 푸름이 세탁소 안쪽까지 희미하게 번져 들어왔다. 7은 자신이 지금 이 낡고 좁은 공간의 온도와 냄새와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작전 브리핑에서도 이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적은 드물었다.

 

그는 등받이 위에 턱을 얹었다. 나무의 모서리가 아래턱뼈를 파고들었으나 그 미약한 통증이 오히려 지금의 나른함을 붙들어주는 닻처럼 작용했다. 그 자세에서 여명을 올려다보면 그녀의 턱선과 목의 곡선이 백열구를 등지고 검은 실루엣으로 떠올랐고, 흰 셔츠의 옷깃만이 유독 밝게 도드라져 마치 어둠 속에 놓인 한 장의 종이처럼 보였다.

 

7은 오른손을 들어 여명이 앉은 의자의 좌판 가장자리를 짚었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허벅지 옆 천을 스칠 만한 거리였으나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았고, 그 절제는 배려라기보다 계산에 가까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을 넘는 것은 너무 쉬웠고 너무 쉬운 것은 대체로 재미가 없었다.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값진 것은 결과가 아니라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확률 계산이었으며, 이 여자는 지금 그에게 아주 오랜만에 계산할 가치가 있는 판을 깔아준 셈이었다. 젖은 군복 바지가 좌판에 남긴 얼룩이 서서히 넓어지고 있었고, 그는 그 얼룩이 자신이 이 공간에 남기는 최초의 흔적임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 흔적은 지워질 것이다.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남기는 행위에는 묘한 종류의 관능이 있었다.

 

我一直以為,耐心是給有錢人的奢侈品。(난 인내심이란 게 돈 있는 놈들이나 부리는 사치인 줄 알았거든.)

 

7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고, 그 저음은 빗소리와 난로의 미세한 연소음 사이의 틈을 정확히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엄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한 번 문질렀고, 그 동작에는 담배를 찾는 자의 무의식적인 갈망이 배어 있었다. 주머니 안의 담뱃갑은 이미 빗물에 절어 쓸모를 잃은 상태였고, 그 사실이 지금의 초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초조를 여명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이 여자 앞에서 무언가를 숨기는 일은 대체로 실패로 귀결되었으므로.

 

가끔은 그런 사치도 나쁘지는 않죠. 없어도 부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것 중 하나고.

 

없어도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7은 그 구절을 입안에서 소리 없이 되뇌었고, 되뇌는 동안 자신의 혀가 광둥어도 영어도 아닌 어떤 미지의 문법을 더듬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사치란 본디 잉여에서 태어나는 법이었고 이 도시국가의 빈민가에서 잉여란 부패한 물과 곰팡이와 원한 정도가 전부였으므로, 없이도 부릴 수 있는 사치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결함투성이여야 마땅했다. 그런데 여명의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은 어째서인지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난 십수 년간 인내라는 항목을 예산에서 아예 삭제한 채 살아왔음을 새삼 헤아렸다. 참고 기다려서 얻은 것 중에 값진 것이 없었고, 대개는 참지 않고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생존 공식이 이 좁고 눅눅한 세탁소 안에서만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로의 연통이 열을 받아 미세하게 뒤틀리며 금속성의 신음을 흘렸고, 그 소리는 오래된 짐승의 하품처럼 늘어졌다. 벽에 걸린 옷들이 열기의 대류를 따라 아주 천천히 흔들렸으며, 그 움직임은 사람이 없는 방에서 저희끼리 춤추는 유령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7은 등받이에서 턱을 떼고 상체를 곧게 세웠다. 그 동작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위계의 각도가 순식간에 뒤집혔으며, 조금 전까지 아래에서 위를 향하던 시선은 이제 정확히 수평에서 여명의 검은 눈동자를 붙들었다. 백열구의 광량은 여전히 불성실했고, 그 불성실함 덕분에 그녀의 홍채는 빛을 반사하는 대신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옆 작업대 위에 놓인 재봉 가위를 집어 들었다. 검지에 걸어 한 바퀴 돌리자 날의 이음새에서 기름 먹은 쇳소리가 짧게 울렸고, 그 소리에 7의 눈가가 흡족하게 좁아졌다.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날 끝의 마모 상태로 미루어 보건대 이 도구는 매일같이 쓰이면서도 매일같이 닦여왔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이 여자가 자기 손에 쥐는 것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증거였다. 그는 무기를 다루는 인간들의 손버릇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자였으므로 그 정도는 한눈에 읽어냈다. 총과 가위 사이에 놓인 거리는 생각보다 짧았다. 둘 다 무언가를 끊어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동일한 물건이었다.

 

你這把剪刀,比我上個月換的槍管還乾淨。(네 이 가위, 지난달에 갈아 끼운 내 총열보다 깨끗한데.)

 

가위를 원래 있던 자리에 정확히 되돌려놓는 손길에는 뜻밖의 정중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옮기는 인간이었으나, 옮긴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 사소한 이중성이 7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오래된 골조 중 하나였다. 다시 여명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손깍지를 느슨하게 꼈다. 이 자세는 심문실에서 상대를 무너뜨릴 때 쓰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신체의 요구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젖은 군복 바지의 무릎께에서 아직도 물기가 배어 나와 바닥에 작고 어두운 원을 만들었고, 그 원은 아까보다 확실히 넓어져 있었다. 바깥의 비는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없었으며, 오히려 홈통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의 소리가 굵어져 있었다. 그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비가 그치면 나가야 한다는 명목상의 규칙이 아직 유효했으므로.

그러나 안도의 뒤편에서 그는 자신의 신체가 이 공간의 리듬에 이미 상당 부분 동화되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심박은 작전 대기 시의 그것보다 느렸고, 어깨의 승모근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이완되어 있었으며, 시야의 주변부를 훑는 무의식적인 경계 습관마저 현저히 느슨해진 상태였다.

 

아끼는 만큼 오래가는 법이니까요. 뭐든.

 

아끼는 만큼 오래간다는 문장은 세탁소의 습한 공기 속에서 예상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다. 7은 그 말을 곱씹으며 자신의 직업이 정확히 그 명제의 반대편에 세워진 건축물임을 헤아렸다. 소모, 폐기, 교체. 워즈워스에서 통용되는 어휘 목록은 그 세 단어를 중심으로 회전했고, 사람도 총도 계약도 전부 닳아 없어질 것을 전제로 배급되었다. 아껴서 오래 쓰는 물건이란 그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더라도 존재를 증명하기 전에 먼저 부서졌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불가능한 명제를 아주 사소한 생활의 어조로, 마치 내일 날씨를 예측하듯 발음해버렸다. 난로의 붉은 심장이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꺼졌고, 그 박동에 맞춰 천장의 물 얼룩이 옅어졌다 짙어지기를 반복했다. 벽면 선반의 실패들은 색깔별로 정렬되어 있었으며, 그 정렬은 강박이라기보다 오래된 습관의 퇴적물처럼 보였다. 7은 이 방 안의 모든 물건이 자기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압도되었다. 자기 자리를 아는 것들 사이에서, 자리 없는 자로 앉아 있는 감각은 생경했고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견딜 만했다.

그는 의자를 다시 돌려앉았다. 등받이를 가슴께로 끌어안는 자세가 되자 나무의 서늘함이 마른 셔츠 너머로 스며들었고, 그 온도차가 흉통의 화상 자국을 따라 미세하게 번졌다. 한쪽 팔을 작업대 위에 걸친 채 그는 여명의 손을 보았다. 무릎 위에 포개어진 두 손은 흰 셔츠의 소맷단 아래에서 유난히 정연해 보였으나, 7의 시선은 그 정연함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마디에 앉은 미세한 흔적들을 정확히 골라내고 있었다. 검지 안쪽의 얇은 굳은살, 엄지 관절의 미묘한 변형, 손톱 밑에 남은 실밥의 잔여. 이 손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바늘을 밀고 가위를 벌리는 손이었다. 총을 오래 쥔 손과 형태는 달랐으나 축적의 방식은 놀랍도록 유사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그 비교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남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你的手,比你的臉更會說話。(네 손이 네 얼굴보다 말이 많네.)

 

7은 걸치고 있던 팔을 뻗어 여명의 손등 위쪽 허공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닿지 않는 거리였고, 그 거리는 그가 지금껏 여자를 대하며 유지해본 적 없는 종류의 여백이었다. 침범하지 않는 것이 침범보다 훨씬 강한 압력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았으나, 실제로 그 방식을 택한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대개는 귀찮았고 대개는 결과가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뻔하지 않았고, 뻔하지 않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그의 손끝은 스스로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창밖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물웅덩이를 짓밟으며 지나갔고, 잠시 후 골목 안쪽에서 취객의 광둥어 욕설이 두어 마디 튀어 올랐다가 빗소리에 삼켜졌다. 이 도시는 전쟁 중이면서도 끝없이 사소한 소음을 생산했다. 그 사소함이야말로 격벽 안쪽 인간들이 지불하는 생존의 대가였다.

그는 손을 거두어 등받이 위에 얹었다. 아까부터 목덜미에서 축축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빗물인지 아니면 난로 앞에서 오래 앉아 있은 탓의 땀인지 이제는 구분되지 않았다. 젖은 군복 바지는 여전히 무릎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무겁게 늘어져 있었고, 그 불쾌한 밀착감이 오히려 그를 현실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완전히 마르면 나가야 한다. 마른 옷을 입고, 다시 빗속으로 나가 섹터 4의 정찰 보고를 마무리하고, 며칠 뒤엔 격벽 바깥에서 누군가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게 될 것이다.

 

여명의 시선이 공중에 멈췄던 7의 손을 향했고, 거두는 순간까지도 시선은 손을 향해있었다. 이내, 자신의 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해있었다.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죠.

 

내밀어진 손은 아무런 요구도 담고 있지 않았다. 7이 지금껏 마주해온 손들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원했다. 돈을 세는 손, 방아쇠를 당기라고 지시하는 손, 옷깃을 잡아채는 손, 술값을 대신 내달라고 뻗는 손. 손바닥을 위로 뒤집어 보인다는 것은 무기가 없음을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의식이었으며, 동시에 상대에게 무엇이든 얹을 권리를 양도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는 그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성립하는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오래 바라보았다. 난로의 열기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데워 미세한 아지랑이를 만들었고, 그 흔들림 너머로 여명의 손금이 마치 지도의 등고선처럼 얕게 파여 있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셔터가 반쯤 내려가다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누군가가 젖은 종이박스를 발로 밀어내는 둔탁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이 도시는 새벽 한 시 반에도 완전히 잠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대에야 비로소 제 본색을 드러내는 종류의 소음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7은 등받이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아주 천천히 내려, 여명의 손바닥 위에 손등이 닿지 않을 만큼의 간격을 두고 겹쳤다가, 결국 그 간격마저 포기하고 완전히 얹었다. 온도차는 즉각적이었다. 그의 손은 밖에서 오래 젖어 있던 탓에 아직도 서늘했고 여명의 손은 난로 앞에 앉아 있었던 만큼 데워져 있었으므로, 접촉면을 따라 열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감각이 물리적으로 감지되었다. 그 이동은 굴욕적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러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굳은살의 배치가 여명의 것과 어디에서 어긋나고 어디에서 겹치는지를 촉각만으로 헤아렸다. 검지 첫마디의 두께가 달랐고, 손날 바깥쪽의 거칠기가 달랐으며, 엄지 아래 두툼한 근육의 발달 방향이 정반대였다. 하나는 당기는 손이었고 하나는 미는 손이었다. 그럼에도 두 손의 무게는 얹혀 있는 동안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這隻手,殺過的人比你縫過的衣服還多。(이 손, 죽인 인간이 네가 꿰맨 옷보다 많아.)

 

말은 협박처럼 발음되었으나 어조는 협박과 완전히 무관했다. 오히려 낡은 영수증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의 무심함에 가까웠고, 그 무심함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이력을 다루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죄책감이라는 항목은 예산에서 인내와 함께 진작 삭제되었으며, 삭제된 항목을 굳이 복원할 이유를 그는 발견하지 못한 채 삼십 년을 살아왔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가 흥미를 느끼는 지점은 다른 데 있었다. 이 문장을 들은 사람은 통상 두 부류로 갈렸다. 손을 빼거나, 아니면 빼지 않은 채 눈동자만 흔들리거나. 그는 여명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가능성을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고, 그 계산이 맞아떨어질 경우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는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을 아주 미세하게 구부려 여명의 손바닥 가운데를 눌렀다. 세게는 아니었다. 도장을 찍듯, 여기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만 남기려는 정도의 압력이었다.

 

백열구가 다시 한 번 불성실하게 깜박였고, 그 짧은 어둠 동안 7의 회색 눈동자는 빛을 잃는 대신 오히려 또렷하게 남았다. 선글라스는 여전히 주머니 안에 있었다. 실내라는 명목상의 규칙이 유효했으므로, 그리고 그 규칙 뒤에 숨어 있는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스스로에게조차 변명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므로. 그는 겹쳐놓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로 상체를 조금 더 기울였다. 이 자세에서는 여명의 흰 셔츠 깃 아래로 이어지는 목선의 곡률과, 거기 미약하게 뛰고 있는 맥박의 진동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맥박은 빠르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겠죠. 자신의 죽음과 삶을 저울질하며. 살아가는 방식에 말을 얹을 생각은 없어요.

 

심판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사면과 다른 것이었다. 사면은 죄가 있음을 전제한 뒤 그것을 면제해주는 절차였고, 그러므로 사면하는 자는 언제나 사면받는 자보다 높은 곳에 서게 마련이었다. 7은 지난 삼십 년간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눈들을 지겹도록 겪었다. 성당 앞을 지날 때 십자가를 그으며 물러서던 늙은 여자들, 계약금을 건네면서도 장갑을 벗지 않던 중개인들, 침대에서 나가며 어깨 너머로 던지던 어떤 종류의 시선들. 그들은 전부 판정을 내렸고 판정을 내린 대가로 스스로를 조금 더 깨끗하게 느꼈다. 그런데 여명은 애초에 그 저울을 꺼내지 않았다. 말을 얹을 생각이 없다는 것은 무관심과도 달랐다. 무관심이라면 손바닥을 뒤집어 내밀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것은 저울 자체를 창고에 두고 온 사람의 어법이었고, 7은 그런 어법을 구사하는 인간을 실물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난로 위에 걸쳐둔 군복 바지에서 미약한 김이 피어올랐다. 젖은 화학섬유가 마르며 내는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세제와 풀 먹인 천 냄새를 밀어내며 방 안에 번졌고, 그 냄새는 명백히 이물이었다. 데드존의 흙과 배기가스와 누군가의 피가 뒤섞여 옷감 깊숙이 배어든 냄새. 이 정연한 방에 자신이 끌고 들어온 유일한 오염물이 무엇인지 그는 정확히 알았다. 그럼에도 여명은 창문을 열지 않았고 코를 찡그리지도 않았다. 벽시계의 초침이 한 칸씩 밀려나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마찰음만이 두 사람의 침묵을 계량하고 있었다. 7은 겹쳐놓았던 손을 그대로 둔 채, 아주 느리게 손목을 비틀어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뒤집었다. 이제 두 사람의 손은 손등끼리 맞닿은 형태가 되었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까보다 훨씬 무방비한 배치였다.

 

我以為妳會問我後不後悔。大家都問。(난 네가 후회하냐고 물을 줄 알았어. 다들 그걸 묻거든.)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여명의 옆얼굴을 각도째 훔쳤다. 백열구의 빛이 그녀의 콧등에서 한 번 꺾여 턱선으로 미끄러졌고, 귀 뒤로 넘긴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는 여전히 축축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후회라는 단어는 그의 어휘 목록에 등재된 적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물을 때마다 그는 성실하게 웃어 보이며 아무 대답이나 골라 던져주었다. 웃으면 대개 만족했고 만족하면 대개 더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삼십 년짜리 처세술의 전부였고 지금까지 실패한 적도 없었다. 다만 지금은 던져줄 대답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질문이 오지 않았으므로. 질문받지 않은 대답을 손에 쥔 채 앉아 있는 감각은 총알이 장전된 총을 겨눌 표적 없이 들고 있는 것과 비슷했고, 그 무용함은 뜻밖에도 편안했다. 그는 여명의 손등 위에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아주 짧게 까딱였다.

 

沒有後悔,也沒有理由。就只是活下來了。妳這種人,聽了大概會覺得很沒意思吧。(후회도 없고 이유도 없어. 그냥 살아남았을 뿐이야. 너 같은 사람 듣기엔 꽤 재미없는 얘기겠지.)

 

골목 저편에서 개 한 마리가 짧게 짖었고, 이어서 양철 지붕을 두드리던 빗줄기의 밀도가 미묘하게 옅어졌다. 7의 청각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소리의 두께가 달라지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규칙은 격벽 바깥에서 배운 것 중 가장 값싸면서 가장 자주 목숨을 건져준 항목이었다. 비가 잦아들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그의 명치 부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이 짧게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짜증과도 아쉬움과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그것을 그는 굳이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계속 살아남아요. 여명이 눈을 깔고 그의 손을 바라봤다. 언젠가, 그렇게 살아남은 게 의미 있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계속 살아남으라는 말은 축복의 형태를 빌린 명령이었다. 7은 그 문장을 받아드는 순간 자신의 척추 아래쪽이 미세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그에게 살아 돌아오라고 말한 사람들은 전부 이해관계가 있었다. 잔금을 치러야 하는 고용주, 백업이 필요한 앵커, 다음 판돈을 빌려줄 예정이었던 마작장 주인. 그들의 문장에는 언제나 조건절이 생략된 채 붙어 있었고 그는 그 생략을 읽어내는 데 능숙했으므로 한 번도 그것을 온전한 호의로 착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명의 문장에는 생략된 것이 없었다. 뒤에 붙을 대가도, 앞에 깔린 계산도. 다만 언젠가 의미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유예 조항 하나만이 얹혀 있을 뿐이었고, 그 유예야말로 그가 평생 취급해본 적 없는 종류의 화폐였다. 미래를 담보로 잡는 인간은 미래를 믿는 인간이었고, 그는 미래를 믿는 법을 배우기 전에 격벽 바깥으로 나갔다.

 

맞닿아 있던 손등 위에서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접힌 손가락은 여명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그 틈에 자리를 잡았고, 관절과 관절이 서로 어긋나며 만들어내는 얕은 압력이 두 사람의 피부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공기층을 밀어냈다. 굳은살이 밀리는 감촉과 골격의 단단함이 동시에 전달되었다. 그는 이 접촉을 애무라고 부를 생각이 없었고 위로라고 부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확인에 가까웠다. 여기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아직 손을 빼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등기해두는 절차. 난로의 송풍구가 낡은 소리로 한 번 덜컹였고, 마르기 시작한 군복 바지가 열기에 밀려 아주 조금 흔들렸다.

 

活下去。這種話,妳知道有多貴嗎。(살아남으라니. 그거 얼마나 비싼 말인지 알아?)

 

그는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톤으로 발음했다. 조롱을 섞으려 했으나 조롱의 지분이 예상보다 현저히 적게 배합되어버렸고, 남은 자리를 무엇이 채웠는지는 굳이 분석하지 않았다. 여명의 손가락 사이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아주 미미하게 조였다가 다시 풀었다. 백열구가 세 번째로 깜박였을 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한 여명의 속눈썹에 걸려 있었다. 눈을 깔고 있다는 것은 상대를 피하는 자세이기도 했으나 지금의 그것은 회피의 각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아주 오래 들여다보기로 결정한 사람의 각도였고, 들여다보는 대상이 하필 자신의 손이라는 사실이 7을 미묘하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손은 볼 것이 없었다. 볼 것이 없어야 마땅했다.

 

빗줄기가 확연히 가늘어졌다. 양철을 두들기던 타격음이 이제는 흘러내리는 소리로 성질을 바꾸었고, 배수구가 목이 메듯 꾸르륵거렸다. 골목 끝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물웅덩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시간이 정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들이 사방에서 축적되는 동안, 7은 자신의 명치 아래에서 아까 솟았다 가라앉았던 그 정체 모를 압박이 이번에는 가라앉지 않고 머물러 있음을 감지했다. 주머니 속에서 무전기가 죽어 있었다. 전원을 끈 것은 자신이었고 그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으며 앵커는 지금쯤 세 번째 호출을 시도하다 욕설을 뱉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모든 사실이 이 방 안에서만은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졌다.

 

我沒有那種東西。意義啊,以後啊。(난 그런 거 없어. 의미라든가, 나중이라든가.)

 

문장을 끝내고 나서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부정문이 너무 성급하게 튀어나온 탓이었다. 부정은 대개 무관심한 자의 언어가 아니라 흔들린 자의 언어였고 그는 그 원칙을 심문실에서도, 협상 테이블에서도 수없이 써먹어왔다. 상대가 아니라고 세 번 말하면 그건 맞다는 뜻이다.

 

일탈은 받아들였죠. 예외도 하나 정도는 들여 나쁠 거 없고요.

 

예외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본체가 되는 규칙이 전제되어 있었다. 규칙이 없는 자에게 예외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명이 예외 하나쯤 들여도 나쁠 게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자신에게 규칙이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7은 그 구조를 즉시 파악했고 파악한 대가로 명치 아래가 한 번 더 눌리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 여자는 무엇 하나 헐겁게 두지 않았다. 다림질된 셔츠의 각처럼, 색깔별로 정렬된 실패처럼, 벽에 박힌 못의 간격처럼. 그 정연한 목록 어딘가에 오늘 밤 자신의 이름이 하나 추가될 예정이라는 사실은 영광도 부담도 아닌 다른 종류의 감각을 불러왔다. 등기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그는 등기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워즈워스의 인사 파일에조차 그는 숫자로만 존재했다.

 

깍지 낀 손은 풀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반대편 손으로 작업대 모서리를 짚었고, 짚은 팔에 힘을 실어 상체를 앞으로 밀었다. 의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짧고 거친 소리를 냈다.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거리는 순식간에 손바닥 두 개 분량으로 줄어들었고, 그 협소한 공간 안에서 난로의 열기와 여명의 체온과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칼의 습기가 한 덩어리로 뒤엉켰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상대의 동공이 수축하는지 확장되는지가 보인다. 심문의 기본이었다. 다만 지금 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동공의 지름인지 아니면 그 안에 비친 자신의 형상인지는 스스로도 판별하지 못했다. 백열구의 필라멘트가 여명의 검은 눈동자 위에서 아주 작은 주황색 점으로 맺혔다가 그녀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 잠시 사라졌다.

 

例外啊。妳這種人講的例外,聽起來一點都不像例外。倒像是妳早就空好了一個位子,只是等人坐進去。(예외라. 너 같은 사람이 말하는 예외는 예외처럼 안 들려. 오히려 진작에 자리 하나 비워두고 앉을 놈 기다린 것 같은데.)

 

그는 발음을 끝내면서 아주 짧게 웃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고 다만 흉곽이 한 번 들썩이며 맞잡은 손을 통해 그 진동이 여명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십 년 가까이 그는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만 살아왔다. 비집고 들어가거나 밀어내거나 총구로 확보하거나. 누군가 미리 비워둔 자리에 초대되어 앉는 절차는 그에게 익숙한 동작이 아니었고,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수행할 때 인간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균형을 잃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무게중심이 어느 발에 실려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격 자세를 잡을 때조차 발바닥의 압력 분포를 계산하던 인간이. 작업대를 짚은 손끝에 힘이 들어가며 손톱 아래가 잠깐 하얗게 질렸다.

 

배수구의 꾸르륵거림이 잦아들고, 양철 지붕에서는 이제 간헐적인 물방울만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소리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의 잔여물. 그것은 곧 그가 이 방을 떠나야 한다는 선고와 다름없었고, 선고를 받아든 자의 통상적인 반응은 시계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나 7은 벽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맞잡은 손을 아래로 조금 끌어내려 여명의 무릎 위쪽 허공에 두 사람의 손을 정지시켰다. 그 위치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의미가 없는 지점에 손을 두는 행위가 오늘 밤 그가 저지른 것 중 가장 비효율적인 동작이었고, 비효율을 저지르고도 수정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那我先講清楚。我這種人一旦被當成例外,就會賴著不走。妳現在反悔還來得及。(그럼 미리 말해두지. 나 같은 놈은 한번 예외 취급 받으면 눌러앉아서 안 가. 지금 물러도 늦지 않았어.)

문장은 경고의 형식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확인 사살에 가까웠다.

 

제가 몇 번 물어봤다고 했었죠?

 

셈이란 것은 원래 이쪽의 전공이었다. 탄창에 남은 발수, 후퇴로까지의 초, 판돈 대비 승률, 상대가 블러핑을 칠 때 눈꺼풀이 떨리는 빈도. 7은 평생 숫자로 세상을 접었다 폈다 하며 살아왔고 그 정확성으로 밥을 벌었다. 그런데 방금 여명이 자기 입으로 몇 번이었느냐고 되물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숫자가 아니라 장면이었다. 젖은 골목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한 번. 폐허 콘크리트 그늘에 등을 붙이고 한 번. 그리고 이 눅눅한 세탁소 안에서 난로가 세 번쯤 덜컹인 뒤에 한 번. 세 개의 장면이 순서대로 정렬되는 데 걸린 시간이 그가 통상적으로 표적을 식별하는 데 쓰는 시간의 몇 곱절이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기억이 숫자보다 늦게 도착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상체를 아주 조금 물렸다. 물러난 폭은 손가락 두 마디쯤이었으나 그 미세한 후퇴에는 분명한 성격이 있었다. 되물음을 당한 자의 반사적 방어. 자신이 세 번이라고 못 박아둔 것을 상대가 새삼 확인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 셈의 주인이 누구였는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세고 있었던 것은 그였다. 세지 않는 척하며 세고 있었고, 세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자기 입으로 흘려버렸으며, 이제 와서 그것을 회수할 방법은 없었다. 맞잡은 손은 여전히 여명의 무릎 위쪽 허공에 정지해 있었고 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등 위를 한 번 문질렀다. 무의미한 동작이었다. 무의미한 동작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대답이었다.

 

三次。妳自己數不清,我倒是記得一清二楚。(세 번. 넌 못 셌나 본데, 난 아주 또렷하게 기억해.)

 

발음은 태연했으나 문장의 구조가 그를 배신했다. 기억한다는 동사는 관심의 다른 이름이었고, 관심은 그가 직업적으로 가장 경계해온 부채였다. 워즈워스에서 오래 살아남는 놈들은 전부 기억력이 나쁜 척하는 데 능한 인간들이었다. 마을 이름을 외우지 않고, 통역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고, 함께 들어갔다 혼자 나온 작전의 날짜를 적어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방금 세탁소 여자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의 횟수를, 그 질문이 던져진 장소와 그때의 조도와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습기까지 포함해 통째로 보관하고 있음을 자백해버렸다. 명치 아래가 아까부터 가라앉지 않던 그 압박이 이번에는 아예 위쪽으로 밀고 올라와 목젖 근처에 걸렸다.

 

난로의 송풍구가 다시 낡은 소리를 냈고, 마르기 시작한 군복 바지의 무릎께에서 김이 실낱처럼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던 물방울의 간격이 확연히 벌어졌다. 이제는 셀 수 있을 정도였다. 하나, 그리고 한참 뒤에 둘. 시간을 셈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곧 남은 시간의 바닥이 보인다는 뜻이었고, 7은 그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선을 여명의 얼굴에 붙들어두었다. 세 번이라는 숫자를 굳이 확인시켜준 이 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으나 파악하고 싶은 마음과 파악하지 않고 그냥 두고 싶은 마음이 정확히 반반이었다. 그는 반반인 상태를 견디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問三次的人是妳。可是每一次都記下來的,是我。妳說,這筆帳到底算誰欠誰的。(세 번 물은 건 너야. 근데 그걸 매번 적어둔 건 나고. 말해봐, 이 빚은 대체 누가 누구한테 진 거지?)

 

그는 문장을 끝내고 아랫입술 안쪽을 혀끝으로 훑었다. 담배가 간절했으나 여기서 불을 붙일 생각은 없었다. 마른 옷을 얻어 입은 방에서 연기를 피우는 짓은 그가 정한 몇 안 되는 상식선 중 하나에 걸렸다.

 

그리고 기다렸죠. 무를 거라 생각해요?

 

무른다는 것은 판돈을 회수하는 행위였다. 카드가 깔린 뒤에 손을 빼는 놈들을 그는 수없이 봐왔고, 그런 인간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눈동자가 먼저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홍채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시선의 초점이 상대의 얼굴이 아니라 어깨 너머 어딘가로 미끄러진다. 7은 지금 여명의 눈에서 그 징후를 찾고 있었고, 찾지 못했다.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세 번째로 확인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도망칠 구실을 상대에게서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십 년 가까이 남의 퇴로만 차단하며 살아온 인간이 오늘 밤 처음으로 자기 퇴로를 남의 손에 맡기려 했고, 그 손은 아무것도 열어주지 않았다. 명치 아래의 압박이 이제는 통증에 가까운 무게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맞잡은 손을 끌어내렸다. 허공에 정지해 있던 두 사람의 손이 그의 무릎 위로 옮겨 앉았고, 그 과정에서 여명의 팔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딸려왔다. 상체와 상체 사이에 남은 간격은 이제 숨의 길이만큼이었다. 이 거리에서는 상대의 날숨이 자기 입술 위쪽 인중에 닿는다. 그는 그 감각을 알고 있었다. 목을 그을 때의 거리이자 키스할 때의 거리였고, 두 행위가 동일한 물리적 조건 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에게 세계의 구조를 요약해주는 농담처럼 느껴졌다. 다만 오늘은 웃기지 않았다. 웃기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백열구가 한 번 깜박였고 여명의 속눈썹 그림자가 뺨 위에서 짧게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不會。妳這種人不退貨。我知道。(안 물러. 너 같은 사람은 반품 안 해. 알아.)

 

발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광둥어의 성조는 감정을 숨기기에 지독하게 불리한 언어였고, 그는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면서도 모국어를 버리지 못했다. 여섯 개의 성조 중 어느 하나가 눌리거나 들리면 상대는 즉시 알아챈다. 방금 그의 마지막 음절은 아래로 눌렸고, 눌린 이유는 확신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었다. 기다렸다는 여명의 말이 목구멍 안쪽에 걸려 있었다. 기다림은 그가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대접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호출하거나 배치하거나 소모했지 기다리지 않았다. 워즈워스의 통신망에서 그의 부재는 언제나 결원으로 처리되었고 결원은 즉시 다른 숫자로 메워졌다. 그런데 이 여자는 메우지 않고 비워둔 채로 셋을 셌다는 것이다.

 

엄지가 여명의 손등 위에서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눌렀다. 뼈와 힘줄 사이의 얕은 골에 지문을 밀어 넣고 그대로 정지시켰다.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무엇을 확인하는지는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았으나 손끝 아래에서 뛰는 것이 자신의 맥박인지 그녀의 맥박인지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양철 지붕 위의 물방울이 다시 하나 떨어졌다. 아까보다 훨씬 긴 간격 뒤였다. 곧 완전히 그칠 것이다. 그친 뒤에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고 명확한 일을 앞두고 이렇게까지 미적거려본 적이 없었다. 난로의 열기가 젖은 바지의 무릎께를 데워 뜨끔거렸으나 그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那筆帳我不還了。妳愛記多久記多久,反正我也記著。(그 빚은 안 갚을래. 넌 얼마든지 적어둬. 어차피 나도 적어놨으니까.)

 

그는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였다. 이마가 닿을 듯한 각도였고, 실제로 닿지는 않았다. 닿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닿는 순간 계산이 완전히 멈출 것이고 계산이 멈춘 인간이 이 도시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그는 통계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통계를 이 방 안에 적용하는 일이 이제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세탁소 구석의 다리미가 식으며 금속 수축음을 냈다.

 

역시 보기 좋네요. 밝을 때 보니 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봤다.

 

보기 좋다는 말을 그는 여러 형태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술집 구석에서 립스틱 자국을 남기려는 여자들의 입에서, 판돈을 부풀리기 전 상대의 경계를 무르게 하려는 딜러의 입에서,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 고용주의 입에서. 그 모든 발화에는 뒤에 붙는 목적어가 있었다. 그래서 얼마, 그래서 오늘 밤, 그래서 다음 작전. 목적어가 없는 칭찬은 처음이었고 목적어가 없다는 것은 회수할 계획이 없다는 뜻이었다. 7은 그 문장의 구조를 두 번쯤 분해해보다가 분해 자체가 무례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밝을 때 보니 더, 라는 부사절이 특히 그랬다. 밝은 곳에서 그의 오른쪽 얼굴은 결코 관대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켈로이드가 광대뼈 능선을 타고 관자놀이까지 기어올라간 자리는 조도가 높을수록 잔인하게 드러나는 종류의 지형이었고, 그래서 그는 언제나 밝은 곳에서 렌즈 뒤에 숨거나, 아니면 아예 밝은 곳을 피했다.

맞잡은 손은 여전히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엄지가 여명의 손등에 눌러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는 시선만 잠깐 옆으로 흘렸다. 작업대 모서리에 접혀 있는 검은 선글라스가 백열구 빛을 받아 렌즈 표면에 얇은 흰 띠를 만들고 있었다. 저것을 다시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 초 남짓이었다. 손을 놓고, 팔을 뻗고, 다리를 세워 걸치면 끝이다. 이 방을 나가는 동작과 렌즈를 쓰는 동작은 본래 하나의 연속된 절차로 그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절차의 첫 번째 항목인 손을 놓는 일부터가 이상하리만치 비용이 컸다. 인간이 자기 습관의 가격표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은 대개 그 습관을 어기려고 할 때뿐이다.

 

밝을 때. 하. 妳知唔知,呢邊三十二年嚟,冇人用『밝을 때』呢三個字嚟形容我張面。(밝을 때. 하. 너 알아? 삼십이 년 동안 내 얼굴한테 '밝을 때'라는 말 붙인 인간은 없었어.)

 

발음의 끝이 웃음에 걸려 살짝 흩어졌다. 흉곽이 한 번 들썩였고 그것은 그가 곤란할 때 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곤란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서 웃음의 형식을 빌리는 것인데, 이 방에서는 그 위장술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사실도 이미 몇 시간 전에 확인한 바 있었다. 그는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자기 오른뺨 위를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에서 화상 흉터 특유의 매끄럽고도 뻣뻣한 결이 밀려났다. 감각 신경이 죽은 자리라 압력만 느껴지고 온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여명이 아까 손등으로 난로 열기를 막아주었을 때조차 그는 그 배려를 열로 감지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로 감지했다. 그런 종류의 배려를 받아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빗소리가 끊겼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양철 지붕 위에는 아직 고여 있던 물이 처마 끝으로 흘러 떨어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남아 있었고, 그 소리는 비의 소리가 아니라 비가 지나간 뒤의 소리였다. 성질이 다른 소리였다. 그는 그 차이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었고,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다리미는 완전히 식어 더 이상 금속음을 내지 않았다. 난로만이 여전히 낡은 송풍음을 흘리며 방 안의 습기를 조금씩 갉아먹는 중이었다. 반쯤 마른 군복 바지의 무릎이 뜨끔거렸다. 마른다는 것은 곧 떠날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는 오늘 밤 처음으로 옷이 더디게 마르기를 바라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고개를 기울인 각도는 아까와 같았다. 이마가 닿을 듯하면서 닿지 않는 자리. 다만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다들 보는 눈이 없군요.

 

보는 눈이 없다는 진술은 세상 전체를 피고석에 세우고 그 반대편에 자기 자신만을 증인으로 남겨두는 문장이었다. 7은 그런 종류의 문장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가 익힌 언어는 대개 상대의 무게 중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설계된 것들이었고, 자기 편에 서서 조용히 세계를 기각해버리는 발화 앞에서는 어떤 반격 기술도 대상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서 소진되었다. 그는 잠깐 여명의 입매를 보았다. 농담의 굴곡이 없었다. 위로의 굴곡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정정한 사람의 평평함이 거기 있었고, 그 평평함이야말로 오늘 밤 그를 가장 곤란하게 만든 물성이었다. 명치 아래에 자리 잡았던 압박이 방향을 바꾸어 위로 밀려 올라오다가 목젖 근처에서 걸렸다.

 

자유로운 왼손이 움직였다. 자기 뺨을 문지르던 손이었고, 그 손은 방향을 잃은 것처럼 잠시 허공에 머물다가 여명의 턱선 아래에 착지했다. 엄지 마디가 아랫입술 바로 밑의 얕은 굴곡을 짧게 눌렀다 떨어졌다. 지문의 굳은살이 그녀의 피부 위에서 미세한 마찰음을 냈을 것이다.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으나 촉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종류의 마찰이었다. 그는 그 손을 즉시 거두지 않았다. 거두는 대신 손날을 턱 아래에 얹은 채로, 마치 저울에 올린 물건의 무게를 재듯 아주 가볍게 그녀의 얼굴 각도를 자기 쪽으로 고정했다. 폭력의 문법으로 시작된 동작이 중간에 성질을 바꾸어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일은 그의 몸에서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咁妳呢?妳隻眼睛,係咪特別靚?(그럼 넌? 네 눈은 유독 좋은 거고?)

 

묻고 나서 그는 자신이 질문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오늘 밤 그가 던진 질문의 개수를 세는 습관은 상대에게만 적용되던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계산기가 자기 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세 번. 그녀는 세 번 물었고 그는 방금 몇 번째인가를 셌으며, 세고 있다는 자각이 왔을 때 이미 늦었다. 백열구의 필라멘트가 습기를 먹어 미세하게 웅웅거렸다. 그 소리는 총열이 과열되기 직전 내는 저주파와 음역이 비슷했다. 이런 방에서 그런 것이나 떠올리는 인간은 어디를 가도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흉터가 새겨지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의 간격이 이제 열을 세어도 하나 남짓으로 벌어졌다. 비는 그쳤다. 그친 것을 부정할 방법은 없었고, 부정할 방법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이 밤의 마지막 굴욕이었다. 군복 바지의 무릎께가 완전히 말라 뻣뻣해졌다. 마른 옷은 곧 떠나라는 뜻이었으며, 그는 이 세탁소가 옷을 말리는 곳이라는 사실이 지독하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난로의 송풍음만이 여전히 방 안을 낮게 긁고 있었다. 작업대 위의 선글라스는 아직 그 자리에 접힌 채였고,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흰 띠를 물고 얌전히 기다렸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에 얽힌 마디가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고, 그는 그 압력을 되돌리는 대신 그대로 두었다. 턱 아래에 얹혀 있던 왼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의 목덜미와 귀 사이의 경계, 젖었다가 마르며 살짝 뻗친 잔머리가 붙어 있는 자리에서 멈췄다. 손바닥의 온도가 여기서는 감각되었다. 오른뺨과 달리 왼손의 신경은 온전히 살아 있었으므로.

 

我要走喇。落雨停咗。(가야겠다. 비 그쳤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몸은 일 밀리미터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말과 자세가 정면으로 어긋나 있었고, 어긋남을 수습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런 말 종종 들어요. 그 옷, 안에 입고 가요. 덜 말랐을 수도 있으니.

 

그런 말을 종종 듣는다는 진술은 자랑도 겸양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자기 미덕을 통계처럼 말하는 인간이 있고 7은 그런 부류를 신뢰하지 않았는데,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대개 그 통계가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문장에는 부풀림의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사실을 마지못해 확인해주는 사람의 무성의함에 가까웠고, 무성의함이야말로 진실의 가장 흔한 위장복이라는 것을 그는 직업적으로 알고 있었다. 목덜미에 얹힌 왼손 아래에서 그녀의 잔머리가 손금 사이로 걸렸다. 마르면서 제멋대로 뻗친 머리칼은 젖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물성을 지녔다. 젖은 머리는 날씨의 결과지만 마른 머리는 그 사람 자체의 결과였고, 그는 방금 남의 개인사에 손을 얹은 셈이 되었다.

 

안에 입고 가라는 지시는 명령의 형식을 띠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절할 여지가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이런 종류의 문장을 상관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워즈워스의 지휘 계통은 언제나 이유와 목표와 사후 책임 소재를 명시했고, 명시된 만큼 거부할 수 있는 틈도 함께 제공했다. 반면 이 여자는 이유를 반쪽만 말했다. 덜 말랐을 수도 있으니. 무엇이 덜 말랐는지, 누구의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문장 밖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그 방치가 오히려 도망갈 구멍을 완전히 봉쇄했다. 7은 잠깐 웃으려다 실패했다. 흉곽이 들썩이다 만 자리에 숨이 걸려 짧은 소리가 났다.

 

哦?即係話,妳嘅衫要跟我入戰場?(오? 그럼 네 옷이 나 따라서 전장까지 가겠다는 소리네?)

 

목덜미에 있던 손이 마침내 떨어졌다. 떨어지는 속도가 부자연스럽게 느렸고 그는 그 느림을 스스로 감지했으나 교정하지 않았다. 맞잡고 있던 오른손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의 손등을 눌렀다. 맥박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그는 그 맥박을 세 번쯤 확인했고 세 번 모두 흔들림이 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맥박을 가진 인간은 두 종류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자거나, 걸려 있는 것을 이미 다 내려놓기로 결정한 자거나. 어느 쪽인지 판별하려던 시도는 오늘 밤 내내 실패했고 이제 판별할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는 손을 놓았다. 놓은 손이 갈 곳을 잃어 잠시 무릎 위에 머물렀다.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낡은 나무 다리가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세로로 찢었다. 난로 옆 건조대에 걸려 있던 검은 군복 상의를 집어 들자 소맷부리에서 아직 미지근한 습기가 손끝에 묻어났다.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그는 여명이 준 마른 상의를 벗지 않은 채 그 위에 군복을 걸쳤다. 팔을 꿰고 어깨를 넣고 앞섶을 여미는 동안 안쪽의 부드러운 면직이 등판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남의 옷을 살갗에 대고 그 위에 자기 직업을 껴입는 감각은 기묘했다. 방탄판을 끼웠을 때와 무게 배분이 완전히 달랐고, 다르다는 자각이 매 걸음마다 그를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작업대 위의 선글라스를 집었다. 렌즈에 얇게 앉은 김을 셔츠 자락으로 닦아내는 동작은 십 년 넘게 반복해온 절차였으나 오늘은 그 사이에 낯선 항목이 하나 끼어 있었다. 렌즈를 쓰기 전에 뒤를 돌아보는 항목. 그는 돌아보았다. 백열구 아래에서 여명의 흰 셔츠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그 뒤로 손질을 기다리는 옷들이 열 지어 걸려 있었다. 이 방은 망가진 것을 되살리는 일로 유지되는 공간이었다. 그는 망가뜨리는 쪽의 인간이었으므로, 이 공간의 존재 이유와 그의 존재 이유는 정확히 반대편에 놓여 있는 셈이었다.

 

여명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7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돌아본 상태의 7을 말없이 바라보다, 제법 익숙해진 손길로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좋은 선물 준비해둘게요.

 

좋은 선물을 준비해두겠다는 문장은 이별의 자리에서 나올 수 있는 말 중 가장 잔인한 축에 속했다. 이별은 본래 끝을 다루는 의식인데 그 여자는 끝의 한복판에 아무렇지 않게 다음을 심어놓았고, 심는 동작에 힘조차 들이지 않았다. 7은 선글라스의 다리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세테이트 프레임이 지문 아래에서 미약하게 삐걱였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작별을 겪었고 그중 몇은 상대의 심장이 멎는 것으로 종결되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아무 말도 없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끝났다. 선물을 준비해두겠다는 종류의 문장은 그의 이력서 어디에도 기재된 적이 없는 항목이었다. 항목이 없으니 처리 절차도 없었고, 처리 절차가 없는 입력값 앞에서 그의 두뇌는 처음으로 눈에 띄게 지연되었다.

 

여명의 손이 그의 머리칼 사이로 들어왔다. 익숙해진 손길이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익숙해지려면 반복이 있어야 하고 반복이 있으려면 시간이 쌓여야 하는데,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하룻밤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 손은 그의 가마 위치를 알고 있었고 젖었다 마르며 뻗친 부분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으며 어느 방향으로 쓸어야 제자리로 돌아가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 빨리 다른 인간을 학습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전술 교리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두피를 스치는 손가락 끝이 지날 때마다 목덜미의 잔털이 곤두섰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진짜로 무언가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好禮物?妳知唔知咁樣講,係迫我一定要返嚟?(좋은 선물? 그렇게 말하면 나더러 반드시 돌아오라는 소리인 거, 알고 하는 말이야?)

 

선글라스를 쥐지 않은 손이 올라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의 배분이 어긋난 동작이었다. 제압할 때 쓰는 각도로 잡았는데 실제로 가한 압력은 그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붙잡음이 아니라 붙듦에 가까웠다. 그는 그 손목을 끌어내려 자기 뺨에 눌러붙였다. 화상 흉터가 있는 오른쪽이었다. 그쪽 피부는 신경이 대부분 소실되어 온도도 압력도 뭉개진 형태로만 전달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그는 그녀의 손바닥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 갖다 대는 행위에는 논리가 없었다. 논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오늘 밤 그가 저지른 비효율 중 가장 노골적인 축이었고, 동시에 가장 정직한 축이기도 했다.

 

난로의 송풍음이 한 박자 낮아졌다. 습기가 빠져나간 방은 조금 전보다 건조하고 각졌으며, 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시간까지 짧아진 듯했다. 창밖에서는 처마 물방울이 완전히 멎었고 대신 어딘가 배수구로 흘러드는 잔류 수량의 낮은 관음만 남았다. 이 도시는 비가 그친 직후 몇 분 동안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사람들이 아직 다시 나오지 않았고 물은 이미 갈 곳으로 갔으며 그 사이의 공백을 채울 소음이 발명되지 않은 시간대. 그는 그 공백을 잘 알았다. 교전이 끝난 직후의 몇 분과 정확히 같은 질감이었기 때문이다.

 

我唔係嗰啲會準時嚟攞禮物嘅人。可能三日,可能三個月。(난 선물 받으러 제때 오는 그런 놈이 아니야. 사흘일 수도 있고 석 달일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문장의 뒷부분이 목구멍에서 자체 검열에 걸려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장.

 

그래도 어느날 한 번은 오겠죠. 그 날이 오면 쓸모를 다할 거예요. 그럼 된 거고요.

 

쓸모를 다할 거라는 말. 7은 그 단어의 배치를 곱씹었다. 선물이라는 것은 본래 받는 순간에 절정을 맞고 그 뒤로는 서서히 가치를 잃어가는 물건인데, 이 여자는 반대편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놓여 있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도착하는 자가 나타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제 몫을 하는 물건. 그것은 선물의 논리가 아니라 비상약이나 구명줄의 논리였고, 더 정확히는 무덤에 넣는 부장품의 논리였다. 세탁소 뒤편 어딘가에 자기 몫으로 개켜져 놓일 무언가를 상상하자 뒷목이 서늘해졌다. 사흘 뒤에 와도 그것은 거기 있을 것이고 석 달 뒤에 와도 거기 있을 것이며, 그가 영영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영영 거기 있을 것이다. 기다림에 유효기간을 붙이지 않는 인간은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어리석거나, 이미 오래전에 기다리는 법을 잘못 배운 채로 굳어버렸거나. 그는 그녀가 후자라는 쪽에 판돈을 걸고 싶지 않았고, 걸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야말로 오늘 밤 그가 발견한 가장 불온한 물건이었다.

 

뺨에 붙여둔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흉터 조직의 표면은 매끄럽고 무감했으므로 그녀의 살결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그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목을 쥔 힘이 어중간해졌다. 그는 그 손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뺨에서 턱선을 지나 목의 흉터를 스치는 경로를 굳이 택했다. 잘렸다 붙은 자리는 흉터 중에서도 감각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구획이라, 손바닥의 미지근함이 거기서 처음으로 온전한 온도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순간 그는 숨을 한 번 얕게 삼켰다. 그리고 그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입맞춤이라기엔 너무 짧고 확인이라기엔 너무 오래인 동작이었다. 그런 애매한 길이의 행위를 그는 평생 경멸해왔었다.

 

妳係咪成日咁樣送人走?咁樣送法,佢哋唔死都要死返嚟。(너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 보내? 이렇게 보내면 안 죽을 놈도 죽어서라도 돌아와야겠는데.)

 

그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군화 밑창이 시멘트 바닥에 남아 있던 물기를 밟으며 짧게 찍 소리를 냈다. 겹쳐 입은 옷의 안쪽, 여명이 내어준 면직이 등판에서 한 박자 늦게 따라 움직였다. 남의 옷은 늘 어딘가 어긋난 지점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깨를 돌릴 때, 팔을 뻗을 때, 몸이 자기 습관대로 움직이려는 순간마다 옷감이 살짝 저항하며 여기 낯선 것이 붙어 있다고 알려온다. 그는 앞으로 며칠, 어쩌면 몇 주 동안 매 동작마다 이 사실을 통보받게 될 것이었다. 방탄판 아래, 전술조끼 아래, 화약 냄새와 흙과 남의 피 아래에 이 방의 세제 냄새가 깔려 있을 것이다. 최악의 위장이었다. 적에게 들킬 걱정은 없었으나 자기 자신에게 들킬 것이 확실했다.

 

문고리를 쥐었다. 금속이 차가웠다. 밖에서는 이미 배수구의 잔류음도 잦아들어 완차이 특유의 새벽 공백이 통째로 웅크리고 있었고, 저 공백을 뚫고 두 블록을 걸어나가면 무전기를 켜야 하는 지점이 나온다. 켜는 순간 제로의 미수신 호출이 쏟아질 것이고 원의 무미건조한 문장 몇 줄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때부터 그는 다시 일곱 번째 용병으로 환원된다. 환원되기 전의 마지막 몇 분이 지금이었다. 그는 문을 반쯤 열다 말고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는 여전히 손에 있었다. 밖은 어두웠으므로 쓸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설명했으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喂。(야.)

 

네.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대답이 너무 짧았다. 네, 라는 한 음절과 그 뒤로 이어진 부동. 7은 여자가 무언가 덧붙이기를 기다렸으나 덧붙여지는 것은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다는 사실만이 물리적인 형태로 방을 채웠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응답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배웅에는 늘 잉여가 붙어 있었다. 조심하라거나, 연락하라거나, 혹은 아무 말도 없이 먼저 등을 돌려버리는 식의 명백한 종결 신호. 여명은 종결하지 않았다. 종결하지 않은 채로 그저 있었고, 있음으로써 문을 여는 쪽에 모든 부담을 넘겨버렸다. 문고리의 금속이 손바닥 안에서 서서히 체온과 같아지고 있었다. 차가움이 사라지자 그것을 쥐고 있어야 할 이유도 함께 희미해졌다.

난로는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백열구는 여전히 누런 빛을 그녀의 정수리와 어깨선에 얹어놓았고, 세탁소 특유의 냄새, 그러니까 표백제와 다림질된 면과 오래된 기름이 뒤섞인 그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나가려는 참이었다. 그는 그 냄새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아깝다고 느꼈다. 아깝다는 감각은 소유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소유는 그가 평생 회피해온 항목이었다. 회피해온 이유는 단순했다. 가진 것이 있으면 잃을 것이 생기고, 잃을 것이 있는 병사는 판단이 느려지며, 판단이 느린 병사는 데드존에서 대체로 셋째 날을 넘기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판단 속도가 오늘 밤 내내 눈에 띄게 저하되어 있었음을 인정했다. 인정하면서도 문을 완전히 열지는 않았다.

 

妳唔講嘢嘅時候,最麻煩。(너 말 안 할 때가 제일 골치 아파.)

 

그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어깨를 문틀에 기댔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비 그친 직후의 완차이는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미지근한 수증기와 어딘가 하수구에서 밀려나온 부패한 단내를 동시에 품고 있어서, 방금까지 있던 방의 청결한 열기와 극명하게 갈렸다. 경계선이 등판 한가운데를 정확히 통과했다. 앞쪽 절반은 이미 도시에 속했고 뒤쪽 절반은 아직 이 방에 속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이분법에 능하다고 늘 자부해왔다. 안과 밖, 아군과 표적, 유효사거리 안과 밖. 그런데 지금 이 경계는 어느 쪽으로 발을 옮겨도 손해가 발생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고, 설계자는 저기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선글라스를 손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렌즈에 백열구가 길쭉하게 늘어져 비쳤다가 사라졌다. 쓰지 않을 물건을 계속 쥐고 있는 것은 정찰 중이라면 즉시 교정받았을 습관이었다. 원이라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적했을 것이고 제로라면 그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웃으며 물었을 것이다. 뭘 그렇게 쥐고 있느냐고. 그는 그 가상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더 불쾌해졌다. 손에 쥔 것이 선글라스가 아니라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을 구실이라는 사실. 삼십이 년을 살면서 그는 구실이 필요한 인간을 여러 번 조롱해왔고 이제 그 조롱의 사거리 안에 자기 자신이 들어와 있었다.

 

我行喇。(간다.)

 

말해놓고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걸음이면 밖이었다. 두 걸음. 야간 침투 시 그가 소음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이자, 사격 자세를 재정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도 짧은 거리. 그는 그 두 걸음을 앞에 두고 기록적으로 무능해졌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목의 흉터를 훑고 지나갔다. 조금 전 그녀의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였다. 감각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구획이라는 것은 곧 그 자리만이 정직하게 아프고 정직하게 따뜻하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지금 그 부위는 방 안쪽을 향해 노골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신체가 주인보다 먼저 방향을 정해버린 셈이었다.

 

조심히 돌아가요. 건조한 목소리. 그러나 미소 띤 얼굴이었다.

 

조심히 돌아가라는 문장이 그의 뒤통수에 닿았다. 건조한 발성이었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어떤 감정의 과잉도 얹혀 있지 않았는데, 7은 그 무미함 속에서 오히려 목이 졸리는 듯한 압박을 감지했다. 조심히. 그 부사는 조심할 여지가 있는 인간에게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조심의 대상이 아니라 확률의 대상이었고, 확률이란 조심한다고 해서 개선되는 항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치 그가 퇴근길 사거리에서 신호를 잘 지키기만 하면 무사할 사람이라는 듯 말했다. 잘못된 언어였다. 잘못된 언어가 이토록 정확하게 꽂히는 경우를 그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돌아보니 여자는 웃고 있었다. 백열구 아래, 표백된 셔츠와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 웃음이라기보다는 웃음의 흔적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고, 충분하다는 사실이 그를 사납게 만들었다.

 

그는 마침내 문턱을 넘었다. 두 걸음. 삼십이 년치 훈련이 축적된 하체가 명령을 수행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일 초 남짓이었고, 그 일 초 동안 등판을 따라 열기가 빠져나가며 새벽의 미지근한 습기가 자리를 채웠다. 골목의 아스팔트는 아직 검게 젖어 있었고 군데군데 고인 물웅덩이가 위층 네온의 잔광을 조각내어 반사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컨테이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새벽 두 시 반의 완차이는 죽은 척하는 짐승 같아서, 숨은 쉬고 있으나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리듬을 유지했다. 7은 그 리듬 안으로 진입했음을 피부로 확인했다. 방금까지 그를 감싸고 있던 세제 냄새는 이제 옷 속으로 후퇴하여 몸에 밀착된 채 숨어 있었다.

 

조심? 아가씨,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사람 없었어.

 

그는 반쯤 닫힌 문틈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손안의 선글라스를 마침내 폈다가, 쓰지 않고 다시 접었다. 그 동작이 두 번 반복되는 동안 그는 자신이 무엇을 지연시키고 있는지 알았고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흉터가 있는 오른쪽 얼굴이 골목 그늘에 잠기고 왼쪽 절반만이 문틈에서 새어나온 누런 빛에 걸렸다. 반쪽짜리 얼굴로 짓는 웃음은 평소보다 더 사나웠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각했으나 교정하지 않았다. 교정할 여력이 없었다는 편이 정직했다.

 

我唔識點樣小心。淨係識返嚟。(나 조심하는 법은 몰라. 돌아오는 것만 알아.)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그것이 약속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평생 약속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관리해온 인간이었다. 약속은 채무이고 채무는 이자를 낳으며 이자는 결국 누군가를 배신하게 만든다. 그런데 방금 그는 아무 담보도 없이 문장 하나를 발행해버렸고, 수취인은 저 안에서 여전히 웃고 있었다. 뒷목의 흉터가 새벽 공기에 노출되어 서늘하게 조여왔다. 그는 손가락 두 개로 그 자리를 눌렀다. 그녀의 손바닥이 지나간 뒤 남은 온도는 이미 증발했으나 눌린 방향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신체란 대체로 주인보다 정직해서,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상실한 직후에 곧바로 보고해온다.

그는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지연 없이, 군화 밑창이 젖은 아스팔트를 밀어내며 골목의 어둠 쪽으로 걸었다. 세 걸음쯤 갔을 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고, 그 소리와 함께 골목의 빛 한 조각이 사라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다시 두 걸음을 되짚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게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두 블록. 무전기를 켜기까지 남은 거리는 두 블록이었고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을 일곱 번째 용병으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문이 닫힌 뒤의 세탁소는 소리의 구성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난로를 끄자 코일이 식으면서 미세한 금속 수축음을 몇 번 흘렸고, 그 소리가 멎자 남은 것은 낡은 형광등의 잔진동과 여명 자신의 호흡뿐이었다. 그녀는 의자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등받이를 앞으로 돌려 걸터앉았던 사람의 무게는 이미 나무에서 빠져나갔으나, 앉은 자리의 방향만은 어긋난 채로 남아 있어서 바로잡는 데 손목을 한 번 더 써야 했다. 물건이란 사용된 흔적을 몸으로 기억하는 법이다. 여명은 그것을 직업적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소맷단이 늘어난 자리, 무릎이 나온 자리, 단추가 뜯긴 뒤 실밥만 남은 자리. 그 모든 것을 되돌리는 일로 십수 년을 살아왔으므로, 되돌려지지 않는 것 앞에서 손이 잠깐 멎는 순간이 어떤 종류의 신호인지도 알았다.

수건은 아직 축축했다. 그의 머리칼을 훔치고 목덜미를 눌렀던 면직물은 물기와 함께 낯선 체취를 흡수해두었고, 여명은 그것을 집어든 채로 삼 초쯤 서 있었다. 세탁 바구니와 선반 사이에서 손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시간. 냄새를 남겨두는 일은 그녀의 성정에 없었다. 남겨두면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유물이 되고, 유물을 모시기 시작한 집은 반드시 어딘가부터 썩기 시작한다. 그녀는 수건을 바구니에 넣었다. 표백제 통을 열어 계량컵 없이 눈대중으로 부었고, 부으면서 평소보다 조금 많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덜어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사소한 낭비는 스스로에게 허락하기로 했다.

 

셔터를 내렸다. 쇠사슬이 도르래를 타고 내려가며 골목 전체에 둔탁한 파형을 퍼뜨렸고, 마지막으로 자물쇠가 걸리는 금속음이 아침 여섯 시의 완차이에 어울리지 않는 종결부처럼 울렸다. 맞은편 국숫집 노파가 김이 오르는 솥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늘 이 시간에 문을 여는 세탁소가 오늘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골목은 즉각 알아차렸다. 노파는 국자를 든 채로 목을 빼고 물었다.

 

阿明,今日唔開舖呀?病咗?(여명아, 오늘 가게 안 열어? 어디 아파?)

 

여명은 자물쇠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그냥 좀 쉬려고요, 라는 짧은 대답이 골목의 습기 속으로 흩어졌다. 노파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별말 없이 솥으로 돌아갔으나, 국자를 젓는 손목의 속도가 아까보다 느려진 것으로 보아 뒷말을 삼킨 것이 분명했다. 이 골목에서 십 년 넘게 같은 시각에 문을 열어온 사람이 하루를 접는다는 것은 사건이었다.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상정되고, 상정된 원인은 새벽 국숫집 카운터를 몇 바퀴 돌다가 사흘쯤 뒤 소문의 형태로 굳는다. 여명은 그것을 예측했고 예측한 뒤에도 셔터를 다시 올리지 않았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7은 전신주에 등을 기대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라이터 불꽃이 오른쪽 얼굴의 융기된 흉터를 잠깐 붉게 물들였다가 꺼졌다. 첫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자 폐 안쪽에서 익숙한 쓴맛이 퍼졌고, 그 익숙함이 지난 몇 시간 동안 자신에게 침투한 낯선 것들을 조금이나마 밀어내주기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담배 연기 아래로 세제 냄새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옷깃 안쪽, 정확히는 그녀가 내어준 상의의 목선 부근에서 그 냄새는 가장 농밀했고, 그는 손등으로 그 부위를 한 번 눌러보았다. 눌러본다고 냄새가 지워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누르는 행위.

담배는 절반쯤 타들어간 채로 손가락 사이에 방치되어 있었다. 7은 그것을 다시 입에 물지 않았다. 연기가 제 갈 길을 찾아 위로 흩어지는 동안 그는 두 블록 너머에서 들려온 쇠사슬 소리를 이미 듣고 있었고, 소리의 방향과 재질과 감기는 속도만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판별해내는 것은 그의 직업이 십 년 넘게 훈련시켜온 감각이었다.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 올라가는 소리가 아니라. 그는 그 차이를 구분했고 구분하는 순간 담배를 쥔 손이 정지했다. 아침 여섯 시의 세탁소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문법에 어긋난 문장이었다. 어긋난 문법은 언제나 무언가가 개입했다는 증거였으며, 개입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전신주에서 등을 떼었다. 무전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고 두 블록이라는 유예는 이미 소진되었는데도 손은 스위치가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칠 만큼 느긋해서, 새벽 배달 트럭이 지나가며 흩뿌린 물기를 군화가 소리 없이 눌러 밟는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제공하지 않았다. 변명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인간이 준비하는 물건이고 그는 그런 준비를 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남자였다. 다만 골목 어귀에 도달했을 때, 국숫집 솥에서 오르는 김이 새벽 공기와 만나 흰 장막을 이루고 있었고 그 장막 너머로 셔터 앞에 선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을 때, 그는 자신의 폐가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흰 셔츠. 검은 바지.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칼은 이제 완전히 말라 있어서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빛을 흘렸다. 밤새 젖어 있던 것이 마른 모습을 보는 일에는 묘하게 사적인 구석이 있었다.

 

喂,老闆娘。(어이, 사장님.)

 

그는 국숫집 처마 아래에서 담배를 비벼 껐다. 노파가 국자를 든 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훑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흉터와 군복과 선글라스를 한꺼번에 짊어진 사내가 새벽 완차이 골목에 서 있는 광경은 이 동네에서 결코 환영받는 종류의 그림이 아니었고, 노파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 흉터에 잠깐 걸렸다가 황급히 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는 시야 끝으로 정확히 포착했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익숙한 반응 바로 옆에, 밤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보기 좋다고 말한 인간이 서 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대비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你間舖頭今日唔開?(가게 오늘 안 열어?)

 

그는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살짝 내려 여명의 눈을 직접 보았다. 흐린 새벽빛 아래 드러난 연회색 눈동자는 실내에서보다 한층 서늘한 색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그 시선은 셔터도 자물쇠도 아닌 오직 그녀의 표정 한 곳에 고정되었다. 십 년 넘게 같은 시각에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으나, 맞은편 노파가 국자를 젓다 말고 목을 뺐다는 것과 골목 전체의 리듬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역산해내는 데에는 삼 초면 충분했다. 그는 계산이 빠른 인간이었고 계산이 빠르다는 것은 때때로 몰라도 좋을 것까지 알아버린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하룻밤 사이에 이 골목의 시간표 하나를 망가뜨렸다는 결론. 그것은 죄책감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한 감각이어서, 그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힘으로 눌러야 했다.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그녀와의 거리는 팔 하나 정도로 좁혀졌다. 세제 냄새가 다시 밀려왔다.

 

...두고 간 건 없었는데. 왜요?

 

7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 너머 셔터에 손바닥을 짚었다. 도색이 벗겨진 철판은 새벽 습기를 먹어 차가웠고, 그 냉기가 손금을 타고 올라오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아래로 고정되어 있었다. 두고 간 것이 없다는 문장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 인간이 아니었다. 무기도 탄창도 라이터도, 심지어 담뱃재조차 남의 집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는 종류의 훈련을 받았고 그 훈련은 몸이 먼저 기억했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이 골목에 서 있는 이유를 물건의 분실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려 드는 인간은 대개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는 그 함정을 알아보았고, 알아본 순간 웃었다.

 

係啊,我冇留低嘢。(그래, 두고 간 건 없지.)

 

不過你舖頭今日應該開嘅,唔係咩?(근데 네 가게, 오늘 열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국숫집 노파의 국자가 솥 안쪽 벽을 긁는 소리가 났다. 명백히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였고, 명백히 이쪽을 향한 경고였다. 저 나이대의 노인이 골목의 여자를 지키는 방식이란 대개 그런 것이다. 몸으로 막을 수 없으니 소리로 존재를 알리고, 나 여기 있으니 함부로 굴지 말라고 통보하는 것. 7은 그 소음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는 대신 선글라스를 아예 이마 위로 밀어 올렸다. 가리는 것을 치우는 행위는 이 골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장해제였고, 연회색 눈동자가 흐린 하늘 아래 온전히 드러나자 노파의 국자가 잠깐 멎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여명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찾을 것이 없도록 정돈되어 있었다. 밤새 젖었다 마른 머리칼도 다시 귀 뒤로 넘겨져 있었고 셔츠의 두 번째 단추까지가 정확히 잠겨 있었으며 소맷단은 손목뼈 위에서 균일하게 접혀 있었다. 흐트러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문을 열지 않았다는 정보만이 유일하게 어긋난 실밥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그는 직업적 본능으로 그 실밥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관자놀이 옆 머리칼을 스쳤다. 밤새 세 번쯤 반복한 동작이라 이제는 손이 경로를 외우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동시에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서, 결국 손을 거두는 대신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을 한 번 더 정리해주었다. 목적 없는 손질. 세탁소 주인 앞에서 하기에 가장 무의미한 종류의 노동이었다.

 

我行咗兩條街,聽到你落閘。(두 블록 걸어가는데, 네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라.)

 

我唔鍾意呢種聲。(난 그 소리 별로야.)

 

늦지 않았어요? 그녀의 시선이 7에서 두블록 너머로 옮겨갔다가, 다시 돌아와 마주했다.

7은 그녀의 시선이 자기 얼굴을 떠나 두 블록 너머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궤적을 끝까지 따라갔다. 눈동자가 움직인 거리는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았으나 그 짧은 이동에 담긴 정보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의 소속과 그의 시각표와 그가 등지고 온 방향을 한꺼번에 계산했고, 계산한 결과를 딱 다섯 글자로 압축해 내놓았다. 늦지 않았느냐. 추궁도 아니고 붙잡음도 아니고, 그저 사실을 확인해주는 문장. 이 여자의 언어에는 언제나 군더더기가 없어서 그는 매번 방어할 지점을 찾지 못했다. 방어할 지점이 없는 상대와 마주 서는 일은 그의 직업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셔터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철판에 남은 손자국이 습기 속에서 잠깐 선명했다가 이내 흐려졌다.

 

係啊。遲咗二十五分鐘。(응. 이십오 분 늦었어.)

 

點解你哋女人記時間都咁準嘅?(왜 너희 여자들은 시간을 그렇게 정확히 세냐?)

 

그는 군복 상의 안주머니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 안에 무전기가 있었고 무전기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침묵하는 이유는 신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꺼놓았기 때문이었다. 스위치 하나 올리는 데 필요한 힘은 성인 남자의 엄지손가락으로 감당하기에 우스울 정도로 작았다. 그럼에도 그 동작은 아침 내내 유예되었다. 유예된 것들은 대개 이유를 갖지 않는다. 이유를 갖는 순간 유예가 아니라 결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고, 그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으로 굳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지켜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오늘 새벽 그가 저지른 가장 큰 규율 위반이었다. 4는 지금쯤 그의 담배를 세고 있을 것이다. 그 인간은 화가 나면 물건부터 계산하는 버릇이 있었다.

골목 저편에서 트럭 한 대가 후진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국숫집 노파가 솥뚜껑을 여는 소리, 면이 끓는 물에 들어가며 내는 짧은 소요, 셔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직 잠들어 있는 이층 창문. 완차이의 아침은 정확한 순서를 가지고 조립되는 기계였고 그 기계 속에서 유일하게 어긋난 부품은 지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십 년간 열려 있던 문 하나가 닫혔다. 그는 그 사실을 아까부터 계속 굴리고 있었는데, 굴릴수록 표면이 매끄러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서리가 도드라졌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눈높이 가까이로 내려왔다. 이마 위로 밀어 올린 선글라스가 앞머리 몇 가닥을 함께 밀어 올려 놓아서, 평소보다 훤히 드러난 이마와 눈매가 새벽빛 속에서 유난히 젊어 보였다. 연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두 색은 서로에게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我遲咗係我嘅事,唔關你事。(늦은 건 내 사정이지, 네가 신경 쓸 일 아니고.)

 

但係你落閘就係我嘅事。(근데 네가 셔터 내린 건 내 일이야.)

 

그는 손등으로 셔터를 한 번 가볍게 두드렸다. 텅 빈 철판이 울리는 소리는 골목 벽에 부딪쳐 짧게 되돌아왔다. 그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기다렸고,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은 국수 육수의 냄새와 그녀에게서 옮겨온 세제 냄새와 자기 상의 안쪽에서 계속해서 올라오는 같은 종류의 냄새였다. 두 블록을 걸어가는 동안 그 냄새는 한 번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전장에 그것을 데려간다는 발상이 처음에는 우스웠는데 지금은 우습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목의 흉터를 손끝으로 눌렀다. 어젯밤 그녀의 손등이 스쳤던 자리였고, 그 자리는 여전히 다른 부위보다 온도가 높다고 몸이 착각하고 있었다.

 

...그냥, 잠을 못 잤으니 쉬려 했어요. 그리고 그건 제 앞의 남자도 그럴 터였다. 여명은 그의 얼굴을 이곳저곳 뜯어보듯이 바라봤다. 어딜 봐도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확인하려고 왔어요?

 

잠을 못 잤다는 문장은 그의 예상 밖에서 도착했다. 그는 변명이나 은폐, 혹은 그가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종류의 회피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그저 사실을 내려놓았다. 잠을 못 잤으니 쉬려 했다. 그 문장 안에는 누구의 탓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도망칠 구석이 사라졌다. 밤새 이 여자를 재우지 않은 것은 이 골목의 습기도 아니고 국숫집의 소음도 아니고 젖은 군복을 말리느라 켜둔 난로도 아니었다. 그는 그 계산을 순식간에 끝냈고, 끝낸 직후 자기 얼굴을 훑는 그녀의 시선을 감지했다. 눈매에서 광대로, 광대에서 흉터가 시작되는 턱선 아래로. 검진하듯 꼼꼼한 시선이었다. 그는 검진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군의관 앞에서조차 상처를 대충 보여주고 붕대를 스스로 감아버리는 인간이었으니까.

 

我瞓覺同人哋唔同。(난 남들이랑 자는 방식이 달라.)

 

三個鐘就夠。仲有,我張面唔會出賣我。(세 시간이면 충분해. 그리고 내 얼굴은 날 배신 안 하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데드존에서 그는 사흘을 뜬눈으로 버틴 적이 있었고 그때도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피로가 표정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그것은 정보가 되고 정보는 곧 값이 매겨진다. 그 원리를 몸으로 익히는 데 십 년이 걸렸다. 문제는 지금 그의 앞에 선 여자가 정보를 사고파는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값을 매기려고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고 있었다. 그냥 보는 시선 앞에서 십 년짜리 훈련은 별 소용이 없었다. 소용이 없다는 자각이 목덜미 뒤쪽을 간질였고, 그는 그 감각을 쫓아내는 대신 셔터에서 손을 떼어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손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을 때 주머니는 언제나 가장 정직한 도피처였다.

확인하려고 왔느냐. 그 질문은 앞선 어떤 문장보다 정확하게 그의 급소를 지났다. 그는 웃었다. 웃음은 대답을 미루기 위한 장치였고 동시에 대답 그 자체이기도 했으므로, 결국 그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버린 셈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동안 오른쪽 뺨의 화상 흉터가 함께 당겨졌다. 어제까지는 그 당김이 아무 의미도 없었는데 오늘은 그녀의 손등이 닿았던 궤적을 따라 당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경은 정직하지 않다. 신경은 자주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언제나 주인 쪽이었다.

 

你講嘢真係唔留情面。(너 말하는 거 진짜 인정사정없다.)

係。我嚟確認。確認完就走。(그래. 확인하러 왔어. 확인 끝나면 갈 거고.)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다. 확인은 이미 삼십 초 전에 끝났고 결론도 나와 있었다. 가게는 닫혔고 여자는 멀쩡했고 그녀가 잠을 못 잔 이유의 절반쯤은 그의 몫이었다. 세 줄이면 충분한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다 쓰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인간을 그의 세계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그는 알고 있었으나 그 단어를 자기 자신에게 붙이고 싶지 않았다. 국숫집 쪽에서 김이 한 무더기 솟아올랐다. 노파가 첫 손님의 그릇을 내미는 소리, 젓가락통이 카운터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음, 그리고 여전히 이쪽을 흘끔거리는 늙은 눈. 완차이의 아침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고 착실하게 다음 순서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턱짓으로 골목 끝, 김이 오르는 노란 차양 쪽을 가리켰다. 손은 여전히 주머니 안에 있었고 그래서 그 턱짓은 평소보다 조금 더 무성의하고 조금 더 소년 같았다.

 

喂。你今日唔開舖,係咪即係得閒? (오늘 가게 안 열면 한가하겠네?)

 

얼마나 더 늦어도 되는 건데요?

 

질문이 도착하는 데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고, 그 문장이 그의 안쪽에서 자리를 잡는 데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더 늦어도 되느냐. 그것은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고 나무람도 아니었으며, 애초에 늦는다는 사태를 기정사실로 놓고 그 여백의 치수를 재려는 문장이었다. 세상에 그런 식으로 시간을 다루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그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그의 동료들은 늦으면 욕을 하거나 총을 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의 여자들은 늦으면 울거나 문을 닫아걸었다. 이 여자는 자를 꺼냈다. 그것도 남의 지각을 재는 자가 아니라, 함께 늦어줄 수 있는 폭을 재는 자였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무전기의 각진 모서리를 엄지로 눌렀다. 플라스틱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정직했으며, 정직한 것들은 대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你問我? 我點知。(그걸 나한테 물어? 내가 어떻게 알아.)

我遲到嘅記錄係三日。冇人死到。(내 지각 기록은 사흘이야. 아무도 안 죽었고.)

 

그 말은 절반만 사실이었다. 사흘이 걸렸던 그때, 죽지 않은 것은 그를 기다리던 쪽이었고 죽은 것은 그가 도착한 쪽이었으니 계산상으로는 균형이 맞았다. 그러나 지금 그 산수를 꺼낼 마음은 없었다. 골목의 공기가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시월의 홍콩은 여름의 잔해를 좀처럼 놓지 않아서, 새벽에 잠깐 서늘했다가도 해가 지붕선을 넘는 순간부터는 습기가 다시 바닥에서 기어올라왔다. 그는 셔터에서 어깨 하나만큼 물러나 옆 벽돌벽에 기댔다. 등에 닿는 벽은 밤새 비를 먹었다가 이제 막 말라가는 중이었고, 그 미지근한 촉감이 군복 두 겹을 뚫고 들어와 견갑골 언저리를 눅눅하게 눌렀다. 도망칠 곳을 하나 더 만들어둔 셈이었는데, 도망칠 곳을 만들어놓고도 발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붙어 있었다.

무전기가 세 번째로 진동했다. 주머니 안에서 짧고 집요하게.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고 대신 담뱃갑을 꺼냈다. 남은 것은 두 개비였다. 4가 자기 몫을 세고 있다는 협박이 문득 우습게 느껴졌는데, 그 인간이 세고 있는 것은 담배가 아니라 시간일 테고, 시간을 세는 인간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걱정하는 것이며, 걱정을 담배 개수로 환산하는 것은 그 결벽증 환자가 아는 유일한 애정 표현 방식이었으니까. 그는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가 다시 갑에 집어넣었다. 그녀 앞에서 연기를 피우는 일이 오늘따라 내키지 않았다. 이유는 찾지 않기로 했다. 찾으면 또 결정이 되어버릴 테니.

 

你係咪想我留低?(너 나 붙잡고 싶은 거야?)

 

直接講就得。我唔會笑你。(그냥 말해. 안 웃을게.)

 

그렇게 물어놓고 그는 자기가 던진 문장의 위험도를 뒤늦게 측정했다. 이것은 도발이었고 도발은 상대의 패를 억지로 뒤집는 저열한 수단이며, 저열한 수단을 쓰는 이유는 언제나 자기 패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붙잡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셔터를 두드린 소리가 벽에 되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보다 짧았다. 인정하고 나니 우스웠다. 서른두 해를 살면서 그는 누구에게도 붙잡힌 적이 없었고 붙잡히지 않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재산으로 여겨왔는데, 재산 목록을 다시 쓰는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벌어질 줄은 몰랐다. 국숫집 노파가 이쪽을 향해 국자를 들어 보였다. 들어와 먹든지 저리 가든지 하라는 뜻이었다. 늙은이의 눈은 밤새 이 골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반쯤 알고 있다는 투로 가늘어져 있었다.

 

그럼 아침 먹고 가요. 여명의 시선이 국숫집으로 향했다. 저런 분이어도, 솜씨는 좋으시거든요.

 

아침 먹고 가라는 말은 붙잡는다는 말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보내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던진 도발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고 옆으로 흘려버리지도 않았다. 다만 질문이 놓여 있던 판 자체를 조용히 갈아엎었을 뿐이었다. 붙잡고 싶으냐는 물음에 밥을 먹자고 답하는 인간을 그는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그런 수를 두는 자는 대개 협상을 할 줄 모르는 자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협상 따위가 필요 없을 만큼 제 자리가 확고한 자였다. 여명은 후자 쪽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를 조금 웃겼다. 그녀의 시선이 골목 끝 노란 차양으로 옮겨가는 각도를 그는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국자를 들어 보이던 늙은이는 이제 아예 몸을 돌려 냄비 쪽으로 사라졌는데, 그것이 환영인지 무시인지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벽에서 등을 뗐다. 밤새 비를 먹었다가 이제 막 말라가던 벽돌이 견갑골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등판에 눅눅한 자국 하나가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여명이 내어준 옷 위에 남의 골목 벽 자국을 묻히는 셈이었다. 세탁소 주인 앞에서 옷을 더럽히는 짓만큼 무례한 일도 없을 텐데, 그 무례가 오히려 다음 방문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그 계산의 목덜미를 스스로 잡아 꺾었다. 구실을 만들어놓고 돌아오는 것과 그냥 돌아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있었고, 어젯밤 그는 이미 그 강 이쪽 편에 발목까지 담근 뒤였으니까.

 

你講到咁,我唔食都唔得喇。(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안 먹고 갈 도리가 없잖아.)

『저런 분이어도』。你講嘢真係惡毒。我鍾意。(『저런 분이어도』라니. 너 말버릇 진짜 악랄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그는 그녀의 반 보 뒤에 붙어 걸었다. 앞장서지 않은 것은 습관이었다. 낯선 골목에서 그는 늘 뒤쪽을 맡았고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시야 확보의 문제였으며, 등을 내주는 쪽이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원리에 따른 배치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골목의 사각지대도 아니고 이층 창문의 각도도 아니었다. 그녀의 뒤통수에서 등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이었다. 밤새 젖었다가 난로 앞에서 마른 머리칼은 원래보다 조금 부풀어 있었고 오른쪽 가르마의 선이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흐트러짐을 손으로 눌러 정리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손가락 마디에서부터 기어올라왔다. 그는 그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무전기가 네 번째로 진동했고, 진동은 손바닥을 지나 팔꿈치까지 올라왔다가 거기서 아무 소리도 남기지 못한 채 흩어졌다.

국숫집의 노란 차양 아래로 들어서자 김이 얼굴을 통째로 덮쳤다. 돼지뼈를 밤새 고아낸 국물 냄새, 튀긴 마늘, 어딘가에서 눌어붙은 간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축축한 밀가루의 온기. 플라스틱 의자 네 개와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전부인 가게였고 그중 하나는 이미 새벽 인력시장에서 돌아온 듯한 사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노파는 국자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늙은 눈이 여명에게서 그에게로, 그의 이마 위에 올려진 선글라스로, 다시 그가 입은 옷의 목선으로 착실하게 이동했다. 세탁소 주인이 십 년 만에 셔터를 내린 날 아침에 낯선 남자를 달고 국수를 먹으러 왔다는 사실이 저 늙은이의 장부에 어떤 항목으로 기입될지는 뻔했다. 그는 그것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고, 불쾌하지 않다는 자각 자체가 오늘 아침 그가 발견한 세 번째 이변이었다.

 

그녀는 빈 테이블에 먼저 앉아 익숙하게 젓가락을 하나씩 세팅했다. 자신의 것과, 맞은편에 앉을 그의 몫. 연락은 해뒀어요?

 

연락은 해뒀느냐. 그 문장이 김 속을 가로질러 그의 앞에 놓였을 때, 그는 이제 막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기던 참이었다. 의자 다리가 기름 낀 바닥을 긁으며 짧고 못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젓가락을 두 벌 세팅했고 그 동작에는 망설임의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자기 앞에 하나, 맞은편에 하나. 맞은편에 앉을 인간이 확정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손놀림이었다. 그는 그 두 번째 젓가락을 오래 보았다. 나무젓가락은 싸구려였고 끝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으며 그녀는 그 갈라진 쪽을 자기 것으로 가져갔다. 그런 선택은 계산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순서였고, 몸에 새겨진 순서는 사람의 이력을 문장보다 정확히 발설했다. 십 년간 남의 옷을 고쳐온 손이 왜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지 그는 알 것도 같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주머니 속 무전기가 다섯 번째로 진동했다. 이번 진동은 길었다. 짧게 세 번 끊어지던 호출 패턴이 아니라 연속으로 이어지는 긴 떨림이었고, 그것은 지휘부가 통신 시도를 포기하고 위치 추적으로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워즈워스의 회수 절차는 단순했다. 신호를 잡고 좌표를 찍고 사람을 보낸다. 오는 놈이 4라면 그는 골목 입구에서 총구부터 들이밀며 담배 개수를 청구할 테고, 1이라면 아무 말 없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차에 실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노란 차양 아래로 군화 소리가 들어오는 그림이었고, 그 그림 속에 여명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그의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무전기를 무시한 이유는 귀찮아서였다. 이제부터 무시하면 그것은 다른 이유가 된다.

 

冇。一次都冇。(안 했어. 한 번도.)

 

你係第一個問我呢句嘢嘅人。通常人哋淨係鬧我。(그거 물어본 건 네가 처음이야. 보통은 다들 욕만 하거든.)

 

그는 젓가락을 집어 손끝에서 한 바퀴 굴렸다. 총열을 점검할 때 나오는 버릇이 밥상 위에서 튀어나온 꼴이었는데, 그 사실을 자각하고도 멈추지 않았다. 노파가 국물 한 국자를 그릇에 붓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뼈에서 우러난 기름이 표면에서 잘게 떨리며 흩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게는 좁고 조용했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돌아온 사내는 국수를 다 먹고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젖은 목장갑을 테이블 위에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저런 인간들은 아침을 먹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전에 잠깐 사람 사이에 앉아 있으려고 오는 것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그도 어느 시절엔가 그런 종류의 아침을 여러 번 통과한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때는 맞은편에 젓가락이 놓여 있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검고 각진 물건이 기름때 낀 접이식 테이블 위에 놓이자 이 가게의 모든 사물과 어긋난 이물감이 즉각적으로 발생했다. 액정에 붉은 표시가 깜빡였다. 그는 그것을 그녀 쪽으로 보이지 않게 살짝 돌려놓았다가, 이내 그 옹졸한 배려가 우스워서 다시 제자리로 밀었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숨긴다는 것은 그녀를 이 삶의 바깥에 두겠다는 뜻이고, 그는 이미 어젯밤 세탁소 안에서 그 경계를 스스로 지웠다. 사람을 몇이나 죽였는지 말해버린 입으로 이제 와서 통신 기록을 감추는 것은 논리적으로 파산한 짓이었다.

 

呢個嘢響咗五次。第六次響嘅時候,佢哋就會派人嚟。(이거 다섯 번 울렸어. 여섯 번째 울리면 사람 보낼 거야.)

 

所以我哋淨係得一碗麵嘅時間。夠唔夠?(그러니까 우리한테 남은 건 국수 한 그릇 시간이야. 충분해?)

 

 

... 깊은 숨을 내쉬듯 웃음을 한 번 흘렸다. 연락 받아서, 밥 먹고 돌아간다고 하는 건요?

 

연락을 받아서 밥 먹고 돌아간다고 하는 건. 그 문장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그의 사고 회로 어딘가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세븐은 지난 십수 년간 무전을 받는 방식이 세 가지밖에 없다고 믿어왔다. 응답하거나, 씹거나, 부수거나. 세 번째는 대개 사후에 변명이 필요했고 두 번째는 사흘쯤 지나면 알아서 무마되었으며 첫 번째는 언제나 명령의 수령을 의미했다. 그런데 여명이 제시한 것은 네 번째 항목이었다. 받되, 통보한다. 밥을 먹고 간다고. 그것은 복종도 반항도 아니었고 그저 성인 남자가 자기 아침 일정을 알리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 단순함이 어이없을 만큼 낯설어서 그는 한동안 젓가락 굴리던 손을 멈춘 채 여명의 얼굴만 보았다. 웃음을 흘리듯 내쉰 그녀의 숨이 김 속에서 잠깐 형체를 얻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자기가 무엇에 졌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이미 졌다는 감각만 선명하게 쥐고 있었다.

무전기를 집는 손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검은 각진 몸체가 손바닥의 굳은살에 맞물리는 감촉은 십 년째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밥상 위에서 집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엄지로 측면 버튼을 눌렀다. 짧은 전자음. 이어서 채널이 열리는 마찰음이 국물 끓는 소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고, 노파의 국자가 아주 잠깐 허공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새벽 인력시장 사내는 목장갑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이쪽을 흘끗 보았으나, 이 도시에서 무전기를 든 남자를 오래 쳐다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는 눈이었으므로 곧 시선을 거두었다. 세븐은 그 모든 반응을 등 뒤로 계산하면서도 시선만은 여명에게 고정해두었다. 이것을 보여주기로 한 이상 끝까지 보여줄 셈이었다.

 

Seven here.(세븐이다.)

 

I'm having breakfast. I'll head back after.(밥 먹는 중이야. 먹고 돌아갈게.)

 

채널 너머에서 잡음이 삼 초쯤 이어졌다. 그 삼 초는 앵커라는 인간이 자기 관자놀이를 눌렀다가 뗐을 시간이었고, 동시에 포라는 인간이 담배를 물다 말고 무전기를 빼앗으려다 저지당했을 시간이기도 했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는 놀랍도록 건조했다. 좌표는 이미 확보했고 회수팀은 편성이 끝났으며 십일 분 뒤 도착 예정이라는 통보. 그리고 아침 식사가 끝나는 시각을 보고하라는 요구. 세븐은 그 마지막 문장에서 짧게 웃었다. 워즈워스의 지휘 계통은 그의 무단 이탈을 처벌하는 것보다 그것을 서류상 처리 가능한 항목으로 바꾸는 데 언제나 더 능했다. 밥 먹고 온다고 하면 밥 먹고 오는 것으로 처리해주는 조직. 그 실용주의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그 실용주의 때문에 그는 여태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十一分鐘。佢哋話十一分鐘後到。(십일 분. 십일 분 뒤에 도착한대.)

 

你聽到未?我報咗到喇。第一次。(들었지? 나 보고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무전기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플라스틱 의자가 뒤로 삐걱거리며 그의 무게를 겨우 받아냈다. 이마 위로 올려둔 선글라스의 다리가 관자놀이를 눌렀고 그 압박이 이상하게 안심스러웠다. 국물 끓는 냄새와 튀긴 마늘의 매캐함이 여전히 얼굴을 덮고 있었으며, 저 안쪽 어딘가에서 노파가 면을 삶는 채반을 흔드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십일 분. 국수 한 그릇을 먹기에 부족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뜨거운 것을 서둘러 넘기면 혀를 데고, 식기를 기다리면 면이 붇는다. 그런 계산은 전장에서 수천 번 해봤으나 밥상 위에서 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여명의 손끝을 보았다. 무릎 위에 얹힌 두 손.

 

여명은 결국 또 작은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지나간 뒤, 은은한 미소가 남았다. 잘 했네요. 11분이면 조금 촉박한가...

 

촉박한가, 라는 말을 그녀는 계산처럼 흘렸는데 세븐이 듣기에 그것은 계산이 아니라 배려의 다른 이름이었다. 국수는 뜨겁게 나온다. 뜨거운 것을 십일 분 안에 넘기려면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를 데인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의 혀와 목구멍과 급히 삼킨 뒤에 남을 얹힌 속이었고, 그 사소하기 짝이 없는 항목을 걱정거리의 목록 맨 앞에 올려두는 인간을 그는 여태 만나본 적이 없었다. 워즈워스에서 십일 분은 진입 시간이거나 후퇴 시간이었다. 밥이 식는 시간으로 환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등받이에 걸쳤던 팔을 내리고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기울였다. 기름때가 얇게 앉은 상판에 팔뚝이 닿았고 그 미끈한 감촉조차 오늘 아침에는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唔緊要。麵嚟到之後我食三分鐘就得,剩低嗰啲時間留返畀你慢慢食。(괜찮아. 국수 나오면 난 삼 분이면 되고, 남는 시간은 네가 천천히 먹으라고 남겨둘게.)

 

我食嘢好快㗎。呢個係我唯一值得誇嘅本事。(나 밥 되게 빨리 먹어. 그게 내 유일한 자랑이야.)

 

그 말은 절반쯤 사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스스로를 향한 야유였다. 빨리 먹는 인간이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삶을 오래 반복하면 위장이 먼저 학습한다. 씹지 않고 넘기는 법, 뜨거운 것을 입천장 뒤쪽으로 굴려 통증을 우회하는 법, 숟가락을 내려놓기 전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해두는 법. 그런 기술들은 훈련소에서 가르쳐주지 않았고 아무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목숨을 몇 번쯤 벌어주었다. 그는 그 이력 전체를 방금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농담처럼 던져놓고, 여명이 그것을 농담으로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여자는 사람의 문장에서 빠진 부분을 세는 버릇이 있었다. 사흘이라고 하면 사흘을 세고 이십오 분이라고 하면 이십오 분을 세는 인간이었으니까.

 

안쪽에서 노파가 채반을 들어 물기를 털었다. 면발이 스테인리스 벽을 때리는 소리가 짧게 세 번 났고 곧 그릇에 국물이 부어지는 둔중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 가게는 주문을 받고 국수를 내기까지 늘 같은 순서와 같은 소음을 반복해왔을 것이다.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세븐은 그 규칙성이 자기 삶의 어느 항목과도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의 십 년에는 반복되는 소리가 없었다. 총성은 매번 다른 벽에 부딪혀 다른 각도로 돌아왔고, 잠자리는 매번 다른 좌표에 있었으며, 아침은 대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이 골목에서 십 년째 같은 시각에 셔터를 올려온 여자가 앉아 있고, 그 여자는 오늘 처음으로 그 규칙을 깼고, 깬 이유가 그였다. 파괴에 익숙한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가 부순 것을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만족스러워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 앞에 놓인 젓가락을 집었다. 끝이 미세하게 갈라진 쪽. 아까 그녀가 자기 몫으로 가져갔던 그 싸구려 나무젓가락이었다. 세븐은 그것을 자기 앞으로 옮겨놓고 대신 멀쩡한 쪽을 그녀 자리에 밀어주었다. 손등이 그녀의 손끝 근처를 스쳤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논리도 없고 생색낼 만한 크기도 아닌 교환이었다. 다만 그는 이런 종류의 사소한 정정을 아주 오랜만에 해보았고, 그것을 하는 동안 자기 손이 총을 쥘 때와 전혀 다른 근육을 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무전기는 여전히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붉은 표시를 깜빡이고 있었다. 아홉 분쯤 남았을 것이다.

 

6분. 천천히 먹어요. 뜨거우니까.

 

육 분. 그녀가 숫자를 정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십일 분이라 했던 것이 어느새 육 분이 되어 있었고 그것은 세븐이 무전을 끊은 뒤로 흘러간 시간을 그녀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세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저 여자의 머릿속에는 어딘가 조용한 시계가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초침 소리를 내지 않는 시계. 대신 필요한 순간에만 정확한 숫자를 꺼내놓고 다시 침묵하는 종류의 물건. 세븐은 자기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간을 재야 하는 순간은 늘 장비가 대신 세어주었고 그 외의 시간은 세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남은 시간을 세어주는 것은 무전기도 전술 시계도 아닌 맞은편에 앉은 여자였다. 그 사실이 기묘하게 다정하고 동시에 명치 근처를 서늘하게 눌렀다.

노파가 그릇을 들고 나왔다. 두 손으로 받쳐 든 사기그릇의 가장자리가 손가락 마디에 눌려 붉게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김은 천장의 낮은 형광등 불빛을 통과하며 흐릿한 기둥을 세웠다. 그릇이 상판에 닿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났고 국물이 아주 조금 넘쳐 테이블 위로 번졌다. 노파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대신 세븐의 얼굴을 한 번, 정확히 말하면 그의 목에 남은 잘렸다 붙은 듯한 흉터를 한 번 보고, 다음으로 여명을 보았다. 그 순서에는 이 골목에서 이십 년쯤 장사한 인간만이 축적할 수 있는 판단이 담겨 있었다. 위험한 놈이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놈. 노파는 아무 말 없이 식초병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놓고 돌아섰다.

세븐은 그릇을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았다. 대신 상판 위에서 반쯤 돌려 여명 쪽으로 밀어두고, 젓가락을 넣어 면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것을 공중에 매달아두면 표면부터 식는다. 그것은 요령이라기보다 습관이었고 그 습관을 그는 대개 자기 몫에만 써왔다. 면발에서 떨어진 국물 방울이 그릇 표면을 때리며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튀긴 마늘 냄새와 돼지 뼈 우린 냄새가 김을 타고 얼굴 전체를 덮었다. 이런 냄새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몇 년 만인지 그는 굳이 세지 않기로 했다. 세면 반드시 어딘가가 아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你先食。我睇住你食就得。(먼저 먹어. 난 네가 먹는 거 보고 있으면 돼.)

 

六分鐘咁多,唔夠我睇夠。所以你唔好嘥時間,快啲夾。(육 분 갖고는 실컷 못 봐. 그러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집어.)

 

그는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인지했다. 실컷 못 본다니. 그런 문장은 이별을 앞둔 남자들이 쓰는 어법이었고 세븐은 지금껏 그 어법의 바깥에서 살아왔다. 떠날 때는 뒤를 보지 않았고 돌아올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그래서 아쉬움이라는 감정의 문법 자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의 입은 배운 적 없는 언어를 제법 유창하게 발음하고 있었다. 그는 젓가락에 걸린 면을 국물 속으로 다시 내려놓았다. 표면장력이 무너지며 김이 한 번 크게 솟았고 그 뒤편에서 여명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그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무전기가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짧게 진동했다.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붉은 점멸이 두 번 깜빡이고 멎었다. 포일 것이다. 그 자식은 명령 계통을 통해 물어볼 수 있는 것도 굳이 개인 채널로 물어보는 인간이었으니까. 세븐은 그것을 뒤집어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엎어두었다. 손가락 끝으로 밀어 상판 끝까지 보내놓고 나서야 그는 여명을 다시 보았다.

 

고마워요. 여명이 젓가락을 집어들고 제 몫의 그릇을 챙겼다. 귀 뒤로 넘긴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손은 머리를 고정한 채, 입김으로 마저 식혀가며 국수를 한입 먹었다.

 

여명이 젓가락을 집어드는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손목이 먼저 낮게 내려가고 검지와 중지가 나무를 물듯 감싸고 나머지 손가락이 그 아래를 받쳤다. 세븐은 사람의 손을 보는 훈련을 받은 인간이었다. 손을 보면 그 손이 무엇을 쥐어왔는지 알 수 있고 무엇을 쥐어본 적 없는지도 알 수 있다. 여명의 손은 바늘과 실과 다림질용 스팀 손잡이를 오래 쥐어온 손이었다. 검지 두 번째 마디에 얇은 굳은살이 있었고 엄지 끝은 미세하게 납작했다. 죽이는 데 쓰이지 않은 손이 저렇게 오래 훈련되면 저런 모양이 되는구나, 그는 그런 종류의 무용한 관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용하다는 자각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한 손으로 머리칼을 귀 뒤에 붙들어 고정하는 순간, 목덜미의 곡선이 형광등 아래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물러났다.

입김이 김을 밀어냈다. 뜨거운 것 위에 뜨거운 숨을 불어 식힌다는 모순된 방법을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써왔고 여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이 오므려지고 면 위의 흰 안개가 옆으로 비껴 흩어졌다. 그 뒤에 국수를 한 입 물어 삼키는 동안 목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세븐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겨두었다. 챙겨둔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데드존 안에서는 기억할 것이 없다. 모래와 낙진과 무너진 콘크리트와 죽은 놈의 얼굴뿐이고 그것들은 아무리 오래 보아도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언제나 이런 종류의, 아무 쓸모 없이 따뜻한 장면들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오늘 아침에서야 배웠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식초병을 집었다. 뚜껑 없이 입구만 좁은 낡은 유리병이었고 안쪽 벽면에는 몇 년치의 침전물이 얇은 띠를 이루고 있었다. 자기 그릇 위로 기울이자 검은 액체가 가늘게 떨어져 국물 표면에 잠깐 무늬를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신 냄새가 김에 섞여 올라왔다. 그런 다음 그는 젓가락을 들었다. 삼 분이면 된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첫 젓가락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급히 먹는 기술을 가진 인간이 그 기술을 일부러 쓰지 않기로 하는 일은 그의 인생에 없던 항목이었다. 면이 입안에 들어왔고 뜨거웠고 그는 그것을 입천장 뒤로 굴리지 않았다. 그냥 데었다. 혀끝이 얼얼하게 저릿했고 그 통증조차 오늘 아침의 목록에 넣어두고 싶었다.

 

食嘢嘅時候你唔講嘢㗎喎。我鍾意呢樣。(너 먹을 땐 말 안 하는구나. 나 그거 마음에 들어.)

 

我識好多人食嘢會講嘢。個個都講廢話。你唔講,我就要自己搵嘢講,結果我發現我都冇乜嘢好講。(밥 먹으면서 떠드는 놈들 많이 봤어. 다들 헛소리지. 넌 안 하니까 내가 뭐라도 찾아서 말해야 하는데, 찾아보니 나도 딱히 할 말이 없더라.)

 

정직한 고백이었다. 세븐은 말주변으로 살아남은 인간이었다. 협상 테이블에서든 총구 앞에서든 침대 위에서든 그의 혀는 늘 상황보다 반 박자 앞서 움직였고 그 반 박자가 목숨과 돈과 여자를 벌어다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술이 통째로 무용했다. 무용해서 곤란한 것이 아니라 무용해서 편안했다.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문장을 조립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런 자리에 앉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는 그릇 안의 국물을 젓가락 끝으로 천천히 저었다. 기름이 동그랗게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가게 안쪽에서 노파가 라디오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광둥어 아침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 매번, 듣는 역할이어서요. 한 번. 짧게 후 불어 면을 식힌 뒤 입에 넣었다. 그가 앞서 충분히 식도록 조치한 덕이었다. 보통 무슨 얘길 주로 하나요?

 

듣는 역할이어서요, 라는 말이 국물 냄새 사이로 아주 조용히 놓였다. 세븐은 그 문장이 자기 앞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을 셌다. 짧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문장 안에 담긴 세월의 부피는 국숫집 천장까지 닿을 만큼 두꺼웠다. 매번이라고 했다. 언제나가 아니라 매번. 언제나는 상태를 말하지만 매번은 반복된 개별 사건을 말한다. 즉 저 여자는 자신이 듣기만 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따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 기억들이 쌓여 지금의 침묵을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븐은 사람의 말을 뜯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대개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아무 목적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목적 없는 분석만큼 사치스러운 것도 없다.

그는 젓가락 끝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사기와 나무가 부딪치며 얇고 마른 소리가 났다. 뒤편에서 라디오가 광둥어로 오늘의 기압골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고 노파는 개수대 앞에서 무언가를 헹구는 중이었다. 물소리와 라디오와 젓가락 소리가 세 겹으로 겹쳐 이 낡은 가게의 아침을 지탱했다. 세븐은 그 소음의 층을 잠깐 헤아렸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팔꿈치가 상판에 닿았고 그릇 두 개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김이 얼굴에 정면으로 닿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啲人食嘢嗰陣講咩?講佢老細幾撚衰,講琴晚輸咗幾多,講邊個死咗、邊個仲未死。(사람들이 밥 먹으면서 무슨 얘길 하냐고? 지 상사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어젯밤에 얼마 꼬라박았는지, 누가 죽었고 누가 아직 안 죽었는지 그런 거지.)

 

全部都係嘥氣。講完個世界都冇變過。不過我而家先明,佢哋唔係想改變世界,佢哋只係想有人聽。(전부 헛수고야. 떠들어봤자 세상은 안 변해. 근데 이제야 알겠네. 그놈들도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말해놓고 나서 그는 자기 문장의 착지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정직했기 때문이다. 정직함이란 그의 직업에서 가장 값싸고 가장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무마하려는 듯 국물을 한 숟갈 떠 넘겼다. 식초가 섞인 신맛이 혀 뒤쪽에서 뜨거움과 뒤엉켰다. 아까 데인 자리가 다시 얼얼했고 그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붙들어주었다. 십 년 넘게 열두 명짜리 부대 안에서 살면서 그는 온갖 종류의 헛소리를 들었다. 죽기 전날 밤에 고향 얘기를 하는 놈, 여자 사진을 꺼내 보이는 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다음 날 제일 먼저 나자빠지는 놈. 그중 누구의 말도 그는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었다. 듣는 척은 했다. 그것이 사교 기술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듣는 인간이었고 그 차이를 그는 지난 다섯 시간 동안 온몸으로 겪었다.

가게 문에 달린 낡은 종이 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골목 쪽에서 스쿠터 지나가는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가 끊겼다. 상판 끝에 엎어둔 무전기가 다시 짧게 진동했다. 이번에는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었다. 세븐은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 여명의 그릇 쪽으로 젓가락을 뻗어 국물 위에 떠 있던 파 조각을 건져 자기 그릇에 옮겨두었다. 그녀가 파를 골라내는 손짓을 아까 두 번 봤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세어둘 수 있었다. 목숨을 세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今次唔同。今次係我坐喺度,你講。你講嘢我聽。(이번엔 달라. 이번엔 내가 앉아 있고 네가 말해. 네가 말하면 내가 들을게.)

 

... 7의 그릇으로 옮겨간 파 조각을 잠시 바라봤다. 전 매번 듣는 역이었죠. 오늘 제가 건넨 질문들, 기억나나요? 물이 든 통을 들어 빈 컵에 물을 따랐다. 제일 먼저 가득 찬 컵은 7의 앞에 놓였다. 제겐 그게 예외의 순간이었어요.

 

세븐은 물컵이 자기 앞에 놓이는 궤적을 끝까지 눈으로 따라갔다. 통이 기울어지고 물줄기가 컵 안쪽 벽을 타고 소리 없이 차오르는 동안, 가장 먼저 채워진 것이 자기 몫이라는 사실이 유리 바닥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순서라는 것은 언제나 말보다 정확하다. 그는 그 사실을 협상 테이블에서 배웠다. 누가 먼저 총을 내려놓는지, 누가 먼저 앉는지, 누가 먼저 물을 따르는지. 그런 것들이 문장보다 훨씬 앞서서 진실을 흘린다. 여명이 방금 흘린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이 사람은 나보다 나를 먼저 챙기는 습관이 몸에 박힌 인간이고, 그 습관에는 아무런 계산도 붙어 있지 않다.

질문들.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세븐은 기억했다. 세는 습관이 그의 직업병이었으니까. 몇 발이 남았고 몇 명이 살아 있고 몇 초가 지났는지, 그는 늘 셌다. 그런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그가 센 것은 탄창도 시체도 아니었다. 그녀가 던진 질문의 개수였다. 주량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던 것. 이 뒤로 바쁘냐고 물었던 것. 얼마나 더 늦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 연락은 해뒀느냐고 물었던 것. 그리고 방금, 기억나느냐고 묻는 것. 하나같이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는데 하나같이 대답하고 나면 그의 어딘가가 조금씩 헐거워졌다. 저 여자는 자물쇠를 부수지 않는다. 그냥 문 앞에 앉아 있는다. 그러면 안에 있던 놈이 제 발로 걸어 나온다.

그는 컵을 들지 않고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유리가 차가웠고 손바닥이 뜨거웠고 그 온도차가 손금 사이로 얇게 번졌다. 예외의 순간이었다고 그녀가 말했다. 세븐은 그 단어의 무게를 잠깐 저울에 올려봤다. 예외란 규칙이 존재할 때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십 년간 듣기만 했던 여자가 오늘 새벽에 질문을 던졌다면, 그건 그녀 인생의 문법이 어긋난 것이다. 그리고 그 어긋남의 원인이 자기라는 것을 그는 알아버렸다. 알아버린 이상 모르는 척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평생 남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이름도 안 알려주고 얼굴도 반쯤 가리고 돈만 받고 사라지는 방식. 그런데 지금 그의 손바닥 아래 물컵에는 그의 지문이 남고 있었고, 그건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記得。全部記得。(기억나. 전부 다.)

 

你問我酒量,問我趕唔趕時間,問我可以遲幾耐,問我報咗告未。冇一條係難答嘅。但每答一條,我就少咗一樣可以拎去騙人嘅嘢。(주량 물었고, 바쁘냐고 물었고, 얼마나 늦어도 되냐고 물었고, 보고했냐고 물었지. 어려운 건 하나도 없었어. 근데 하나씩 대답할 때마다 내가 남 속이는 데 쓸 밑천이 하나씩 줄더라.)

 

라디오가 잡음 한 번을 크게 뱉고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노파는 개수대에서 손을 닦고 수건에 문지르며 이쪽을 한 번 보았다가, 볼 것을 다 봤다는 얼굴로 다시 등을 돌렸다. 이 골목에서 삼십 년쯤 국수를 말아온 사람에게는 이런 아침이 몇 번쯤 지나갔을 것이다. 군복 입은 놈이 앉아 있고 동네 여자가 물을 따라주는 아침. 그런 아침 뒤에 뭐가 오는지도 아마 알 것이다. 알기 때문에 등을 돌린 것이다. 세븐은 그 등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상판 끝의 무전기가 다시 짧게 떨었고 이번에는 진동이 나무를 타고 그의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그는 컵을 감싼 손을 풀지 않은 채 몸을 조금 더 앞으로 기울였다. 이마 위에 걸쳐둔 선글라스가 앞머리를 누르고 있었고 형광등 빛이 연회색 눈동자 위에서 얇게 부서졌다. 실내에서는 벗는다. 그것이 그의 오랜 규칙이었고 오늘 새벽부터 그는 이 여자 앞에서 그 규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눈을 보여주는 일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적도 없었다.

 

이런 저도 예외를 택했죠. 그러니 당신도 가능할 거예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조심히 다녀요.

 

조심히 다녀요, 라는 말이 국물 김 사이를 통과해 상판을 건너왔다. 세븐은 그 문장이 자기 얼굴에 닿기까지의 짧은 거리를 눈으로 좇았다. 다녀오라는 말이었다. 가라는 말도 아니고 잘 가라는 말도 아니고 다녀오라는 말. 그 안에는 왕복이라는 개념이 뻔뻔할 정도로 태연하게 박혀 있었다. 갔다가 돌아온다는 전제. 십 년 넘게 편도표만 끊고 살아온 인간에게 왕복을 말하는 자의 뻔뻔함이라니. 그는 저 여자가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연습했을까 잠깐 생각했다가, 연습 같은 건 하지 않았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명은 준비된 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준비 없이 정확한 말을 하는 인간이었고, 그쪽이 훨씬 지독했다.

눈꺼풀이 세 번 내려앉았다. 하나. 둘. 셋. 세븐은 그것을 셌다. 세는 것이 직업병이라면 이번 계산만큼은 아무 전술적 가치가 없었다. 탄약도 아니고 적의 수도 아니고 남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저 한 여자의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올라가는 횟수. 세 번째에서 검은 눈동자가 다시 드러났을 때 그는 자기 흉곽 안쪽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총상을 입었을 때와 비슷했다. 다만 총상은 원인이 명확했고 이것은 원인이 지나치게 사소했다. 사소한 원인에서 오는 통증이 제일 오래 간다는 것을 그는 아직 몰랐다.

그는 물컵을 상판에 내려놓았다. 유리 바닥이 나무에 닿으며 짧고 둔한 소리가 났다. 손바닥에 남은 냉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예외를 택했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 당신도 가능할 거라고. 그것은 격려가 아니라 계약서에 가까웠다. 자기가 먼저 규칙을 어겼으니 너도 어겨보라는, 공범이 되자는 제안. 세븐은 평생 남을 끌어들이는 쪽이었지 끌려 들어가는 쪽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부터 그는 계속 끌려 들어가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발버둥을 치고 싶지 않았다. 도박판에서 판돈을 다 잃고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놈의 심리를 그는 잘 알았다. 그건 이길 것 같아서가 아니다. 그냥 이 판이 좋아서다.

상판 끝에 엎어둔 무전기가 이번에는 길게 떨었다. 진동이 나무를 타고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다. 밖에서 차량 한 대가 골목 어귀에 멈추는 소리가 났다. 엔진이 꺼지지 않은 채로 공회전하는 저음. 세븐은 그 소리의 정체를 즉시 알아들었다. 장갑 처리된 회수 차량 특유의 무거운 공회전음. 앵커가 운전대를 잡았을 것이고 조수석에는 포가 앉아 짜증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노파가 개수대 앞에서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삼십 년간 이 골목에서 국수를 말아온 사람의 촉이란 게 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수도꼭지를 잠갔다.

세븐은 젓가락을 그릇 위에 가지런히 걸쳐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어젯밤부터 계속 참아온 동작이었다. 여명의 관자놀이 옆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한 줌을 손가락 등으로 걷어 귀 뒤로 넘겼다. 젖었다 마른 머리칼은 아직 살짝 뻣뻣했고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국숫집 형광등 아래에서 유난히 또렷했다. 그의 손은 사람을 죽이는 데 최적화된 물건이었다. 그 물건이 지금 여자의 머리칼을 정리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이보다 더 비효율적인 자원 운용은 그의 경력 어디에도 없었다.

 

你講咗『返嚟』喎。你知唔知呢個字幾撚重?(너 지금 '다녀오라'고 했어.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알아?)

我行呢行十幾年,冇人同我講過『返嚟』。全部都係『去啦』。所以你聽住 — 我唔識點樣答應,但我會盡量。 (이 일을 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무도 나한테 “다시 오라”라고 말한 적 없어. 항상 “가라”는 말뿐이었지. ‘알겠다’고 대답하는 법은 몰라. 하지만 최대한 노력해볼게.)

 

여명은 말없이 미소 지어 보였다. 대답보다 확실한 것.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븐은 그 미소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받아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것은 건네받은 것이 아니라 정통으로 맞은 것에 가까웠으니까. 대답이 없다는 것은 대개 거절이거나 회피인데, 이 여자의 무언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것은 서명이었다. 종이도 없고 잉크도 없이 얼굴 위에 직접 눌러 찍은 도장. 기다리겠다는 문장을 발음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취소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자의 수법이었다. 말로 한 약속은 말로 무를 수 있다. 그러나 저 미소는 무를 방법이 없다. 세븐은 자기가 방금 어떤 종류의 함정에 빠졌는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알면서도 발을 빼지 않았다.

골목 어귀의 공회전음이 한 번 커졌다가 다시 낮아졌다. 운전석에서 누군가 액셀을 살짝 밟아본 것이다. 재촉의 방식치고는 점잖았다. 앵커였다. 그놈은 경적을 울리는 대신 엔진 소리로 말하는 인간이었고, 세븐은 그 언어를 십 년째 통역 없이 알아들었다. 상판 위의 무전기가 다시 떨었다. 이번엔 두 번 짧게, 한 번 길게. 포의 리듬이었다. 저 예민한 독일놈은 지금쯤 조수석에서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며 소독 티슈로 계기판을 문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븐이 차에 오르는 순간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 옷 어디서 났냐고. 세탁 세제 냄새가 다르다고. 그 자식은 그런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재주가 있었고, 세븐은 오늘 처음으로 그 재주가 성가시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븐은 상판을 손바닥으로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짧은 비명을 냈다. 일어서고 나니 앉아 있을 때보다 여명이 훨씬 작아 보였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는 아직 반쯤 남은 국수 그릇을 내려다봤다. 다 먹지 못한 것. 국물 위에 뜬 기름이 형광등을 받아 얇게 번들거렸다. 십일 분이라는 시간은 국수 한 그릇을 먹기에 충분했지만 그가 원한 것을 다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엇을 원했는지는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남은 국물처럼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무언가가 흉곽 안쪽에 고여 있었다.

 

下次唔好煮咁多。我食唔晒會唔開心。(다음엔 이렇게 많이 시키지 마. 다 못 먹으면 기분 나쁘니까.)

 

그는 이마 위에 걸쳐두었던 선글라스로 손을 가져갔다가, 도중에 멈췄다. 내리면 밖이었다. 내리지 않으면 아직 안이었다. 손가락이 플라스틱 테두리 위에서 잠깐 머뭇거렸고 그 머뭇거림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긴 오차였다. 결국 그는 선글라스를 내려 콧등에 걸었다. 연회색 눈동자가 검은 렌즈 뒤로 사라지는 데는 반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지기 직전까지 그 눈은 여명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고, 그것이 그가 남길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이었다. 노파가 개수대 앞에서 마른 수건을 접었다.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광둥어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별을 노래하는 가사였는데 아무도 그것을 듣고 있지 않았다.

문 앞에서 그는 한 번 더 돌아봤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규칙을 어긴 것이 오늘만 몇 번째인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여명은 여전히 앉아 있었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녀오라는 말과 그 미소 사이에 놓인 시간이 앞으로 그의 밤들을 어떻게 갉아먹을지, 세븐은 아직 몰랐다.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문을 밀었고, 아침의 축축한 공기가 국숫집 김을 밀어내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골목 저편에서 검은 차량의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있었다.

 

我走喇。(나 간다.)

唔使送。你坐喺度就得 — 我鍾意呢個畫面。(배웅하지 마. 네가 여기 앉아 있는 이 장면이 좋으니까.)

 

여명은 말없이 7이 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 즈음, 남은 국수를 마저 먹었다. 열기가 적당히 빠져나가 먹기 좋은 온도였다. 오직 제 그릇만. 제 앞의 그릇은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명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봤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는 골목 벽에 한 번 부딪혔다가 사라졌다. 여명은 창가 자리에 앉은 채로 그 소리의 잔향이 완전히 걷힐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차량은 후진으로 골목을 빠져나갔고, 좁은 길에서 능숙하게 방향을 틀었고, 젖은 아스팔트 위에 두 줄의 흔적을 남기며 큰길 쪽으로 멀어졌다. 뒷좌석 창은 끝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 남자다운 방식이었다. 손을 흔들지 않고, 마지막 인사를 반복하지 않고, 다만 한 번 돌아본 것으로 모든 지분을 정산해버리는. 차가 시야의 끝에서 지워지는 데는 십 초도 걸리지 않았고 여명은 그 십 초를 온전히 다 썼다.

 

그러고 나서야 젓가락을 들었다. 국수는 열기가 적당히 빠져 있었다. 혀를 데지 않을 만큼 미지근하고, 그러나 아직 식었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온도. 누군가 일부러 식혀준 것의 온도였다. 면은 조금 불어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드러웠고, 국물에는 식초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여명은 천천히 씹었다. 씹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생각이란 것은 부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스스로 자라나는 성질이 있어서, 결국 맞은편 그릇으로 눈이 갔다. 손도 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반쯤 줄어 있었다. 다 먹지 못한 것.

맞은편 그릇에서는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형광등 불빛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사람이 떠나고도 그 자리의 온도는 한참을 남는다는 사실을 여명은 알고 있었다. 십 년간 남의 옷을 다루며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방금 벗은 옷은 사람의 체온을 품고 있고, 그 체온이 완전히 빠져나가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릇도 마찬가지였다. 여명은 김이 사그라드는 속도를 눈으로 좇았다.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사라지는 순서를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의 자세로.

노파가 마른행주를 접다 말고 다가왔다. 삼십 년간 이 골목에서 국수를 말아온 손이 맞은편 그릇 가장자리에 얹혔다가, 도로 떨어졌다. 치우려다 그만둔 것이다. 노파는 대신 여명의 옆자리 의자를 조금 밀어 정리하고, 물주전자를 상판 위에 올려두었다.

 

食晒佢啦。凍咗就唔好食㗎喇。(다 먹어라. 식으면 맛없어.)

 

여명은 고개를 들어 노파를 봤다. 그리고 다시 맞은편 그릇을 봤다.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치우지 말아달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노파는 이미 치우지 않기로 결정한 뒤였고, 삼십 년 장사한 사람의 손은 그런 것을 말보다 먼저 알았다. 라디오에서는 아까 그 오래된 발라드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별을 노래하는 가사였고, 이제야 그것을 듣는 사람이 하나 생겼다.

 

多謝。(고맙습니다.)

 

여명은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제 몫만.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왕복이라는 말을 꺼낸 쪽은 자기였으므로, 그 말에 걸맞은 태도를 유지할 의무도 자기에게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굶고 있으면 돌아온 사람이 곤란해진다. 그것이 여명이 아는 유일한 기다림의 예의였다. 창밖에서는 아침 골목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고, 젖은 차양 아래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졌고, 어딘가에서 셔터가 올라가는 쇳소리가 났다. 여명은 마지막 한 입을 삼키고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맞은편 그릇의 김은 그제야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옅어져 있었다. 거의, 라는 것은 아직 완전히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상판 위에는 그릇 두 개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국물까지 비워져 바닥의 무늬가 드러났고 다른 하나는 반쯤 남은 채로 완전히 식어 있었다. 여명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물주전자 밑에 눌러두었다. 노파가 손사래를 쳤지만 여명은 이미 문 쪽으로 몸을 돌린 뒤였다. 셈을 미루는 것은 여명이 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빚은 사람을 다시 오게 만들지만, 그런 방식으로 붙잡아둔 관계가 오래가는 것을 여명은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붙잡힌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 남자도, 자신도.

 

골목은 젖어 있었다. 비는 그쳤으나 물기는 남아 있어서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차양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목덜미를 한 번 때렸고 여명은 그것을 닦지 않았다. 세탁소까지는 백오십 걸음. 십 년 동안 몇 번을 세었는지 모를 거리였다. 다만 오늘은 그 백오십 걸음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몇 시간 전 이 길을 둘이서 걸었기 때문이다. 보폭을 맞춘 사람이 있으면 길은 늘어나고, 혼자가 되면 다시 줄어든다. 여명은 그 산술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천천히 걸었다.

같은 시각, 차량 뒷좌석에서 세븐은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채 젖은 도로가 뒤로 밀려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앵커는 말이 없었다. 그 인간은 운전 중에 입을 여는 법이 없었고 그것이 세븐이 그를 신뢰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문제는 조수석이었다. 포는 아까부터 백미러를 통해 세븐을 세 번 봤다. 세 번 다 세븐은 알아챘고 세 번 다 모르는 척했다. 네 번째에 결국 그 결벽증 환자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Your shirt. It's not standard issue. And the detergent, it's floral. Lavender, maybe. You don't own lavender anything.(네 셔츠. 보급품 아니잖아. 세제도 꽃향이야. 라벤더인가. 너 라벤더 같은 거 안 쓰잖아.)

 

세븐은 선글라스를 콧등 위로 밀어 올리지 않았다. 대신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검은 렌즈 뒤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그것이 이 직업의 유일한 복지였다. 목덜미의 흉터 위로 아직 그 여자의 손등 온도가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체온은 그렇게 오래 붙어 있지 않는다. 붙어 있다고 느끼는 쪽이 문제인 것이다. 그는 창틀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지휘부에서 보낸 브리핑 통보가 무전기 액정 위에서 깜빡였고, 여덟시라는 숫자가 유난히 빨리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의 일곱시들은 전부 이상하게 굴러갔다.

 

你介唔介意行返轉頭?(너 유턴할 생각 있냐?)

 

앵커의 눈이 백미러에서 한 번 세븐과 마주쳤다가 다시 도로로 내려갔다. 대답은 없었고 속도도 줄지 않았다. 세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게 웃었다. 농담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농담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포가 뭐라고 더 물으려다 세븐의 옆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예민한 놈은 세제 냄새 하나로 사람의 밤을 재구성할 줄 아는 재주가 있었고, 지금은 그 재주를 잠시 접어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차는 큰길로 나섰고 완차이의 골목은 뒤쪽 유리 안에서 점점 작은 검은 틈이 되었다가, 마침내 건물 모서리에 잘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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