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01.

홍콩 완차이 구역 섹터 4 남측 바리케이드 근처.

홍콩. 빅토리아 하버를 마주한 완차이 구역의 민간인 거주 블록. 오후 11시,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네온사인 몇 개가 끈질기게 밤을 붙들고 있었다. 안전지대로 지정된 이 구역은 UN과 다국적군의 공동 관할 아래 놓여 있었고, 콘크리트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이 거리의 경계를 갈랐다. 그 안쪽으로는 수천 명의 민간인이 임시 거주 시설에 밀집해 있었다. 좁은 골목마다 빨랫줄이 걸려 있고, 식수대 앞에 늘어선 빈민들의 줄이 길었다.

검문소 바로 안쪽, 한때 해산물 식당이었던 건물의 2층. 창문 유리는 절반이 깨져 있고, 남은 유리에는 방탄 필름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무전기의 잡음이 낮게 울렸다.

Seven, this is Watchtower. There’s a civilian vehicle stopped near the south barricade of Sector 4. Advise.
(7, 이쪽은 워치타워. 섹터 4 남측 바리케이드 인근에 민간 차량 한 대가 정차 중이다. 확인 바람.)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영국 억양이 섞인 표준 NATO 통신 프로토콜이었다. 건물 2층의 임시 작전실에는 접이식 테이블 위로 홍콩 완차이 구역의 위성 사진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빨간 핀 여러 개가 꽂혀 있었다. 각각이 최근 72시간 내 보고된 의심 활동 지점이었다. 핀의 밀도가 안전지대 남측 경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이 구역을 바깥에서 시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Seven, copy. White van, plates unreadable. Driver’s side clear, passenger seat empty. They're just sitting there... Hold on.
(7. 확인. 차량은 백색 밴, 번호판 식별 불가. 운전석 클리어, 조수석 비어 있음. 대기 중인……잠깐.)

남자의 억양이 급격히 꺾였다. 밴 뒤에 서 있던 당신을 바라보자마자 주저 없이 무전 통신을 껐다. 덕분에 맞은편에서는 당황한 듯한 숨소리와 '이봐—' 하는 단말마가 울렸지만 남자는 좀처럼 신경쓰지 않았다.

Hello there, darling.
(안녕, 자기.)

 

그가 밴 위에 팔을 얹으며 자세를 약간 기울였다. 선글라스 위 반사광이 반짝였다.

You lost, or are you looking to start some trouble?
(길을 잃은 거야, 아니면 못된 짓을 준비하는 거야?)

 

그냥 지나가는 길. 용건이라도? 흘끔 바라봤다. 엮여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바스락거리는 잡음이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오다 이내 툭 끊어졌다. 도시의 밤공기는 눅눅하고 끈적였으며,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습기를 머금고 둔탁하게 흩어졌다. 7은 밴의 차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선글라스 너머로 시선을 내리깔고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부서진 유리창을 통과해 그의 검은 군복 위로 얼룩진 그림자를 드리웠다.

공기 중에는 싸구려 방향제 냄새와 녹슨 철의 비릿한 향이 섞여 떠돌고 있었다. 여명은 이 위험한 경계 구역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니트 원피스 차림이었고, 그녀의 꼿꼿한 자세는 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건조한 밤공기 속에서 낮고 거칠게 울려 퍼졌다.

7의 커다란 손바닥이 차가운 금속 표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그의 나른한 감각을 조금씩 일깨우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통제된 적막뿐이었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바람 소리만이 이 텅 빈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여명의 방어적인 태도를 흥미롭다는 듯 관찰했다. 상대가 날을 세울수록 그의 내면에 잠재된 기묘한 도파민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따분함에 허덕이던 그에게, 이런 식의 사소한 돌발 상황은 꽤나 즐거운 유희거리였다. 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어 손가락 사이로 만지작거렸다. 불을 붙일 생각은 없는 듯, 그저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여유를 부리는 태도였다.

 

Just passing by? At this hour, in this sector? Honey, you’ve got a terrible sense of direction or a death wish.(그냥 지나가는 길이라고? 이 시간에, 이 구역에서? 자기야, 방향 감각이 최악이거나 아니면 죽고 싶어 환장했거나 둘 중 하나겠네.)

 

그의 목소리는 빈정거림과 은밀한 다정함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7은 담뱃갑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차체에서 몸을 떼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큰 키와 탄탄한 체격이 가로등 빛을 가리며 여명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군화 굽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묵직한 마찰음이 정적을 갈랐다.

그의 움직임은 포식자처럼 여유롭고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선글라스 뒤에 감춰진 그의 연한 회색 눈동자가 여명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이 밤바람에 흩날리는 모습, 그리고 차갑게 굳어 있는 얼굴선이 그의 시야에 낱낱이 박혔다.

그는 자신의 이마로 쏟아지는 앞머리를 무심하게 쓸어 올리며, 목에 길게 그어진 흉터 주변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흉터의 감각은 오래전 무뎌졌지만, 긴장감이 감돌 때마다 습관적으로 만지는 버릇이었다. 주변의 공기는 그의 접근만으로도 눈에 띄게 무거워졌고,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틈새를 가득 채웠다.

멀리서 무장 순찰대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벽을 훑고 지나가며 두 사람의 윤곽을 짧게 비추고 사라졌다. 7은 그 찰나의 빛 속에서도 여명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여명의 경계 어린 눈빛이 오히려 그의 흥미를 돋우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이고는, 약간 고개를 숙여 여명의 눈높이에 맞추듯 상체를 기울였다.

 

Business? Well, seeing a pretty lady wandering into a strictly monitored zone makes it my business. You see, I get bored easily.(용건이라. 글쎄, 엄격하게 감시되는 구역에 예쁜 아가씨가 기어들어오는 걸 보면 그게 내 용건이 되지. 알다시피, 내가 좀 쉽게 지루해하거든.)

 

그의 말투는 능청스러웠고, 상황의 심각성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7은 한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여명이 기대고 있는 밴의 거울을 가볍게 두드렸다. 둔탁한 금속음이 골목을 짧게 울렸고, 그 소리는 여명의 신경을 거스르기 충분했다.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군복에서 희미한 화약 냄새와 쌉싸름한 담배 향이 섞여 퍼져 나갔다.

이 거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스캐빈저들의 소규모 교전이 있었던 곳이었고, 바닥 곳곳에는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과 탄피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런 살벌한 장소 한가운데서, 그는 마치 고급 바의 카운터에라도 기대어 있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7은 여명이 입고 있는 모노톤의 니트 원피스를 보며, 속으로 그녀가 이 도시의 어느 구석에서 굴러먹다 온 인간인지 가늠해보았다. 센트럴의 부유한 시민이라기엔 지나치게 담담했고, 빈민가의 거주민이라기엔 지나치게 깔끔했다. 이질적인 존재감은 언제나 흥미를 유발하기 마련이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살짝 내리며, 맨눈으로 여명을 직시했다. 연한 회색빛의 서늘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시선은 집요했고, 먹잇감을 관찰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은 유쾌하고 부드러웠다. 상반된 두 가지 태도가 그를 더욱 읽기 힘든 위험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你不觉得这里有点冷吗?或者,你是在等谁?(여기 좀 춥지 않아? 아니면,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광둥어는 현지의 억양을 완벽하게 담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 톤은 한층 더 낮고 끈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7은 여명의 반응을 살피며 거리를 조금 더 좁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한 뼘도 채 되지 않았고, 그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여명의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자신의 흐릿한 실루엣이 비치는 것을 보며, 그는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상대가 자신을 두려워하든 경멸하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 순간의 무료함을 깨뜨려준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여명의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아 손가락에 가볍게 감았다.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각이 그의 거친 굳은살을 스치고 지나갔다. 행동 자체는 가벼웠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압도적인 완력과 통제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주변의 네온사인이 깜빡이며 그의 얼굴에 난 화상 흉터를 기괴하게 일그러뜨려 비추었다. 흉측한 상흔과 완벽하게 조형된 이목구비의 대비가 묘한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쥔 손을 천천히 풀며, 한발 물러서서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방식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상대를 극도로 밀어붙였다가, 순식간에 긴장을 풀어버리며 혼란을 야기하는 것.

 

Look, I’m a nice guy. Usually. Tell me what you're doing here before my trigger-happy friends decide to ask you themselves.(이봐, 난 좋은 놈이야. 보통은 말이지. 총 쏘고 싶어 안달 난 내 친구들이 직접 물어보기 전에 여기서 뭐 하는 건지 말해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경고는 분명했다. 7은 선글라스를 다시 추켜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짙게 깔려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불쾌한 날씨였다. 그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우는 여자와 비 오는 날은 질색이라고 중얼거렸다. 습기가 높아질수록 그의 화상 흉터가 미세하게 쑤셔왔기 때문이다.

그는 시선을 다시 여명에게로 돌리며, 그녀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과묵함과 침착함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찬 홀스터의 권총 손잡이를 습관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금속과 가죽이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울리며, 시한폭탄의 초침처럼 주변의 공기를 압박해 들어갔다.

7은 이 낯선 여자와의 조우가 단순히 스쳐 가는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기나긴 밤의 훌륭한 오락거리가 될지 결정하기 위해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거리 끝에서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어둠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길을 잘못 든 것뿐이에요. 방해하지 않게 나갈 테니 전해준다면 좋겠네요. 침착한 말투와 목소리. 무미건조했다. 여명은 말을 끝내곤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곧 비도 올 것 같고요.

 

먹구름이 무겁게 짓누르는 밤하늘에서 첫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메마른 아스팔트 위로 둔탁하게 부딪힌 물방울은 짙은 회색빛 얼룩을 남기며, 비릿하고 매캐한 먼지 냄새를 공기 중으로 흩뿌렸다. 7은 느릿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여명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온해서, 이 살벌한 경계 구역의 긴장감마저 겉돌게 만들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축축해진 공기가 목덜미의 흉터를 미세하게 쑤시게 만드는 불쾌감을 억눌렀다. 빗방울이 그의 선글라스 렌즈 위를 때리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앞의 작은 체구를 지닌 여자를 관찰했다. 검정 니트 원피스의 소매 끝자락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는지, 그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주변의 철조망이 습기를 머금고 스산하게 삐걱거렸고, 멀리서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는 점차 빗소리에 파묻혀 둔탁한 진동으로만 남았다. 7은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내어, 뒷목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한 걸음 더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압도적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과, 습기 찬 밤공기에 섞인 쌉싸름한 담배 냄새가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이 무미건조하고 침착한 여자가 언제까지 그 가면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Just took the wrong path, huh? In a militarized dead zone, right before a storm breaks? (정말 길을 잘못 든 것뿐이라. 군사 통제구역에서, 그것도 폭풍우가 쏟아지기 직전에?)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무겁고 낮게 깔렸다. 장난기가 가득했던 얼굴에서는 순간적으로 나른함이 걷히고, 서늘하고 예리한 포식자의 본능이 엿보였다. 7은 손을 뻗어 여명이 기대고 있는 밴의 차창을 툭툭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기묘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는 상체를 약간 숙여 여명의 눈높이에 맞추고는, 선글라스를 코끝으로 살짝 내려 맨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연한 회색빛 눈동자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탁하고 서늘했으며, 그 안에 담긴 집요함은 숨 막히는 압박감을 선사했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며 그의 검은 군복 어깨를 짙게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빗물에 젖는 것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굴었다. 오직 눈앞의 여자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파문만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흉터가 기괴하게 일그러진 오른쪽 뺨 근육을 실룩거렸다. 빗자국이 그의 화상 흉터를 타고 흘러내리며, 과거의 폭력적인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7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차며, 이 성가신 날씨가 자신의 도파민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곱씹었다.

 

你不觉得这借口太无聊了吗?小猫咪。 (그 변명, 너무 지루하지 않아? 아기고양이.)

 

현지 억양이 짙게 묻어나는 광둥어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그는 여명의 머리카락 끝자락에 맺힌 빗방울을 무심한 손길로 툭 털어내며, 거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그 접촉은 폭력적이지 않았지만, 언제든 상대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무언의 경고를 담고 있었다. 7은 비를 핑계 삼아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그녀의 의도를 산산조각 내기로 결심한 듯했다.

이 지루한 밤에 불쑥 찾아온 흥밋거리를 이대로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전기에서 다시금 치직거리는 파열음이 울리자, 짜증스럽게 전원을 완전히 꺼버렸다. 워치타워의 잔소리 따위는 나중에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고요하고 단단한 여자의 내면을 헤집어 그녀가 감추고 있는 동요를 끌어내는 일이었다. 빗물에 젖어 짙어진 아스팔트의 냄새와, 여명에게서 풍기는 미약한 비누 향이 섞여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7은 다시 한 번 씩 웃으며, 등 뒤의 어두운 골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Look, sweetheart. It’s raining, you’re lost, and I’m standing here freezing my ass off. So, how about we get out of the rain first? Or do you prefer getting wet? (이봐, 자기. 비는 오고, 넌 길을 잃었고, 난 여기서 얼어 죽을 지경이거든. 그러니까, 우선 비부터 피하는 게 어때? 아니면 흠뻑 젖는 걸 더 좋아하나?)

 

그는 노골적인 농담을 섞어 던지며, 여명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시선은 꼿꼿하게 선 그녀의 자세와 모노톤 원피스가 비에 젖어 미세하게 달라붙는 모양새를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훑어내렸다. 7은 자신의 충동적인 제안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뒷일은 항상 나중에 수습하면 그만이었고, 지금 당장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바리케이드 너머로 희미하게 번쩍이는 번갯불이 그의 흉터 진 얼굴을 찰나의 순간 기괴하게 비추고 사라졌다. 그는 여명이 뒤로 물러설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밴과 자신의 거대한 체구 사이에 그녀를 교묘하게 가두고 있었다. 거친 숨결이 빗소리 사이로 낮게 섞여들었고, 7은 여유롭고 오만한 태도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비가 쏟아지는 이 암울한 도시의 구석에서,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대치선은 점차 끈적하고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명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침묵을 지켰다. 10초. 10초가 지난 뒤,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이 안쪽 말인가요. 그가 가리킨 방향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그를 바라봤다. ...세탁소. 원하는 것 같으니 알려줄게요. 세탁소를 하고 있어서요. 근방에 세탁물을 가져다주고 나온 길이었어요.

 

빗줄기는 점차 거세지며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고,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7의 낡은 전투화 앞코를 어지럽게 적셨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는 젖은 콘크리트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녹슨 철조망에서 배어 나오는 금속성의 악취가 기분 나쁘게 뒤섞여 떠돌았다. 7은 그 축축한 대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눈앞에 선 여자의 창백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물 자국을 느릿하고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내뱉은 짧은 한숨이 차가운 밤공기에 부딪혀 옅은 입김으로 흩어지는 찰나의 순간조차 그의 시야에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세탁소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자, 7의 입가에 걸려 있던 비스듬한 미소가 한층 더 짙고 불길하게 피어올랐다. 이 삭막하고 폭력적인 군사 통제구역 한복판에서, 총기나 마약이 아닌 세탁물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변명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다.

그의 커다란 흉곽이 조용히 들썩이며 낮고 거친 웃음소리를 삼켰고,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연한 회색빛 눈동자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빗물에 젖어 짙어진 검은 군복의 어깨선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번들거렸고, 그는 뒷목의 흉터를 무심하게 문지르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습도가 높아질수록 기분 나쁘게 쑤셔오는 상흔의 감각마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묘한 도파민의 불꽃을 틔우는 도화선처럼 느껴졌다.

그는 여명의 꼿꼿한 자세와 방어적인 태도를 허물어뜨리고 싶은 삐딱한 충동을 애써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그 자극을 고스란히 음미하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잔해들의 파열음이 그가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힐 때마다 둔탁하게 울려 퍼지며 팽팽한 긴장감의 나사선을 옥죄고 있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홀스터의 금속 장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늘한 마찰음을 냈고,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여명의 작은 체구를 완전히 집어삼킬 듯 덮쳐갔다.

 

A laundromat? In this wasteland? Honey, that’s either the worst cover story I’ve ever heard, or you’re completely out of your mind. Or maybe both.(세탁소? 이 빌어먹을 황무지에서? 자기야, 그건 내가 들어본 최악의 변명이거나, 네가 완전히 미쳤거나 둘 중 하나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7의 목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유난히 낮고 끈적하게 달라붙었으며, 그 안에 섞인 노골적인 비웃음은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내어, 빗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물방울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군복의 깃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그는 그 서늘한 감각에 개의치 않는 듯 눈앞의 먹잇감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7은 허리를 살짝 굽혀 여명의 눈높이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고는, 마치 진열장 안의 흥미로운 조각상을 감상하듯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검정 니트 원피스는 이미 빗물을 머금어 무거워져 있었고, 그녀의 얇은 실루엣이 가로등의 희미한 잔광 속에 위태롭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뒤로 펼쳐진 어둡고 축축한 골목 안쪽을 길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벽면에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과 총탄의 흔적들이 기괴한 얼룩처럼 남아있는 그곳은 결코 안전해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쏟아지는 폭우를 막아줄 낡은 슬레이트 지붕 조각은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그의 굵고 거친 손가락이 여명의 젖은 머리카락 끝자락을 아주 스치듯 가볍게 건드렸고, 그 미세한 접촉만으로도 공기 중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듯한 서늘한 위압감이 퍼져나갔다. 7은 이 작은 변수가 자신의 권태로운 밤을 어떻게 헤집어놓을지 기대하며, 노골적으로 그녀의 반응을 도발하고 있었다.

무너진 벽돌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네온사인의 불빛이 그의 오른쪽 뺨을 덮은 흉측한 화상 흉터를 붉게 물들였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你也真是的,洗衣服洗到这种鬼地方来。是给幽灵洗衣服吗?还是给我洗?(너도 참, 옷 빤다고 이런 빌어먹을 곳까지 기어들어 오고 말이야. 유령들 옷이라도 빨아주려고? 아니면 내 옷이라도 빨아주게?)

 

매끄럽고 능청스러운 광둥어가 그의 혀끝에서 미끄러지듯 튀어나왔고, 그 안에는 짙은 냉소와 거친 장난기가 지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7은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여명의 퇴로를 교묘하게 차단한 채, 그녀가 한 걸음 뒷걸음질 치도록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낡은 밴의 차체가 여명의 등 뒤에서 차갑게 버티고 있었고, 그녀는 오도 가도 못한 채 그의 집요한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자신의 통제 하에 놓인 이 좁은 공간의 권력을 완벽하게 만끽하고 있었다.

멀리서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하늘을 갈랐고, 번쩍이는 섬광이 골목 전체를 하얗게 탈색시켰다가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7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여명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기괴한 형상을 확인하며 묘한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내뿜는 습한 열기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짐승 같은 체온이 엉겨 붙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탁해졌다. 그는 자신의 군화 굽으로 바닥의 웅덩이를 신경질적으로 짓이기며, 이 지루한 날씨 속에서 유일하게 건져 올린 생동감 넘치는 장난감을 어떻게 요리할지 계산을 굴렸다. 하지만 그의 뇌리 한구석에서는, 지나치게 침착한 그녀의 태도가 단순한 객기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숨겨진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본능적인 경계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Whatever. If you’re playing dumb, you’re good at it. If you’re telling the truth... well, you’re just stupid. Either way, get in there before you catch a cold and die on me.(뭐든 간에. 멍청한 척하는 거라면 제법 소질이 있고, 진실을 말하는 거라면……뭐, 그냥 네가 멍청한 거지. 어느 쪽이든 간에, 감기 걸려 내 앞에서 뒈지기 전에 저 안으로 기어들어가.)

 

그는 턱짓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안쪽의 어두운 틈새를 가리키며, 반쯤 강압적인 어조로 명령을 내뱉었다. 여명의 의사 따위는 처음부터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듯, 오만한 태도였다. 7은 손을 뻗어 여명의 얇은 손목을 잡아챌 듯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가,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이내 거칠게 방향을 틀어 벽면을 강하게 짚어 그녀를 자신의 팔 안쪽에 완전히 가둬버렸다. 콘크리트 벽이 부서질 듯 둔탁한 파열음이 골목을 울렸고,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대가 불길하게 솟아올랐다.

그의 거친 호흡이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여명의 귓가로 생생하게 파고들었으며, 그 숨결에는 방금 전까지 피워대던 싸구려 담배의 씁쓸한 잔향과 이름 모를 화학 약품의 냄새가 독하게 배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의 시선을 붙잡아 매고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묵시적인 선고를 내리듯 지독하게 얽매어왔다.

그의 굳건한 가슴팍이 여명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가 느끼는 불안과 긴장을 증폭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것처럼 오직 거센 빗소리와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이 좁고 폐쇄된 공간을 가득 채웠다. 7은 자신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무기 삼아 그녀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를, 그 철옹성 같은 침착함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走吧,别让我说第二次。我脾气可没那么好。(가자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 성질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거든.)

 

그의 경고는 낮게 그르렁거리는 야수의 울음소리처럼 위협적으로 울렸고, 그가 내뿜는 살벌한 기운은 비에 젖은 골목의 한기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맹렬했다. 7은 벽을 짚은 손의 악력을 조금 더 쥐어짜듯 힘을 주며, 여명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길 때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를 보였다. 그의 연한 회색빛 눈동자는 감정을 완전히 거세당한 기계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심연 깊은 곳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파괴적인 충동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여명의 입술 사이로 어떤 변명이나 저항이 흘러나올지 관찰하며, 마치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 절망적인 발버둥을 감상하는 사냥꾼의 잔혹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센 비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매섭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7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굳건한 바위처럼 버티고 섰다. 무전기를 완전히 꺼버린 탓에 그의 동료들이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딴 사소한 문제는 지금 그의 안중에 조금도 없었다.

오직 이 기이하고 위험한 밤, 자신 앞에 나타난 이 이질적인 존재와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흉터 부위의 찌릿한 통증을 다시 한번 억누르고는, 비릿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녀의 다음 행동을 집요하게 재촉했다.

 

그래요, 가요. 계속 여기 있어봤자 도움되는 건 없을 것 같네요. 자신을 가두듯 둘러진 7의 팔을 톡톡 건드리곤, 몸을 살짝 숙여 빈 공간으로 빠져나왔다. 여명은 건물 안쪽으로 앞서 걸었다. 뒤를 따라오는 게 맞는지, 한 번 돌아보며 확인도 해가면서.

 

그의 거대한 체구와 차가운 콘크리트 벽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이, 여명의 작은 손끝이 그의 단단한 팔뚝을 톡톡 건드리는 순간 미세하게 허물어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덫에서 빠져나가는 먹잇감처럼, 그녀는 허리를 살짝 굽혀 그 비좁은 틈새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빗물에 흠뻑 젖어 피부에 무겁게 달라붙은 검정 니트 원피스의 끄트머리가 그의 군복 바짓단을 스치며 기묘한 마찰음을 남겼고, 그 찰나의 순간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옅은 비누 향과 짙은 빗물 냄새가 그의 후각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7은 허공에 멈춰버린 자신의 굵은 팔을 느릿하게 거두어들이며, 아무런 미련 없이 건물 잔해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작은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시야를 가리는 거센 폭우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걸이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삭막한 폭력의 현장을 일상적인 산책로처럼 거니는 듯한 기이한 평온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자신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그 무심한 시선은, 마치 길 잃은 거대한 들개를 구석으로 이끄는 주인의 태도와도 같아서 그의 기가 막힌 실소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는 선글라스 위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오히려 이 상황이 주는 기묘한 이질감을 온몸으로 즐기듯 뒷목의 흉터를 긁적였다. 빗방울이 바닥의 고인 물웅덩이를 부서뜨리는 파열음과, 녹슨 철근들이 비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기괴한 마찰음이 귓가를 어지럽게 맴돌았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눈앞의 여자가 남기는 미세한 파동에 쏠려 있었다.

통제 불능의 권태 속에서 허덕이던 그의 신경망에, 뜻밖의 도파민이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낮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바리케이드 너머로 번쩍이는 섬광이 다시 한번 골목을 하얗게 비췄을 때, 7의 입가에는 방금 전보다 훨씬 짙고 흥미로운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질척이는 아스팔트 위를 둔탁한 군화 굽으로 짓이기며, 그녀가 이끄는 어둡고 축축한 잔해 속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낡고 부서진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거센 빗소리가 한풀 꺾이며 폐쇄된 공간 특유의 습하고 묵직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Haha... Unbelievable. You really are something else, aren't you?(하하……믿을 수가 없군. 너 진짜 골때리는 부류네, 안 그래?)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가 잦아든 낡은 공간 안에서 더욱 낮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고, 그 안에는 억누르지 못한 유쾌함이 노골적으로 배어 있었다. 7은 부서진 슬레이트 지붕 틈새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두운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군복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려다 이내 젖어버린 상태를 확인하고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담배 대신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빗물에 얼룩진 선글라스를 벗어 손가락 사이에 대충 끼워 넣었다. 시야를 가리던 짙은 렌즈가 사라지자, 연한 회색빛을 띠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번뜩이며 주변의 상황을 빠르게 스캔했다.

건물 내부는 과거의 화재와 폭격으로 인해 벽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더미와 깨진 유리 파편들이 위태롭게 흩어져 있었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이 이 음산한 공간의 윤곽을 간신히 드러내고 있었고, 퀴퀴한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 비슷한 악취가 습기 찬 공기에 섞여 폐부를 찔러왔다.

그는 여명이 멈춰 선 위치를 향해 다가가며, 발밑에서 부서지는 잔해들의 파열음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리듬을 타듯 경쾌하게 만들어냈다. 7은 등 뒤로 낡고 금이 간 콘크리트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팔짱을 낀 채 여유롭고 오만한 자세로 그녀를 다시금 관찰하기 시작했다.

비에 흠뻑 젖어 피부에 밀착된 그녀의 얇은 실루엣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듯했지만, 그녀의 얼굴만큼은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철옹성처럼 견고했다. 그는 이 작은 여자가 언제까지 그 무미건조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버텨낼 수 있을지 가늠하며,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빗물이 그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목덜미의 흉터 위로 맺히자, 그는 불쾌한 감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꺾으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이 지루한 군사 구역에서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장난감을 발견하게 될 줄은 그의 계산에 없던 변수였고, 그래서 더욱 완벽하게 즐기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你说你是洗衣服的?在这种见鬼的天气,来这种破地方找幽灵算账吗?(세탁소를 한다고 했지? 이런 빌어먹을 날씨에, 이런 쓰레기장까지 기어와서 유령들 빨랫감이라도 수거할 셈이었나?)

 

현지 억양이 짙게 묻어나는 매끄러운 광둥어가 어두운 공간 안을 기분 나쁘게 뱀처럼 기어다녔다.

그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어내며, 다시 한 걸음 여명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압도적인 체격이 희미한 불빛마저 집어삼키며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그 그림자는 여명의 발끝을 넘어 그녀의 온몸을 옭아맬 듯 덮쳐갔다. 그는 허리춤의 홀스터에 손을 무심하게 얹은 채, 그녀가 느낄 압박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친 숨결을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젖은 군복에서 풍기는 씁쓸한 냄새와 화약 향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의 흉터 진 오른쪽 뺨이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7은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과 흔들림 없는 칠흑 같은 눈동자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이 평온한 호수 같은 내면에 어떻게든 파문을 일으키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변의 차가운 공기가 무색하게 그의 몸에서는 짐승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다시금 숨 막히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칠고 굳은살 박인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얼굴 근처로 뻗을 듯 말 듯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하다가 멈췄다.

낡은 지붕 위로 다시 한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며 둔탁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이 좁은 폐허 안의 긴장감은 오히려 터지기 직전의 팽팽한 활시위처럼 위태롭게 당겨져 있었다. 7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눈앞의 먹잇감이 내놓을 다음 반응을 기대하는 포식자의 미소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여명은 그를 한 번 바라보다가, 근처 잔해를 발로 밀어내며 치워냈다. 두 명이 앉을 수 있을만큼. 오래 내릴 것 같은데. 앉아서 쉴까요. 대화상대는 해드릴 수 있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는 무너진 폐허의 뼈대를 타고 흘러내리며, 차갑고 날카로운 파열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7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여명의 행동을 가만히 응시하며, 턱 끝으로 미끄러지는 빗방울의 서늘한 감각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녀가 무심하게 발끝으로 콘크리트 조각들을 밀어내는 동작은, 이 삭막한 전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었다.

낡은 군화 밑창에 짓밟힌 젖은 잔해들이 탁한 소음을 뱉어내는 동안, 그는 이 낯선 이방인이 발산하는 기묘한 정적에 시선을 빼앗긴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연한 회색빛 눈동자는 그녀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한 공기를 낱낱이 해부하듯 훑어내렸고, 그 시선 끝에는 짙은 흥미와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빗물에 젖어 묵직해진 검은 군복이 그의 숨결에 따라 미세하게 들썩였고,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야만적인 체온은 차가운 밤공기와 충돌하며 습한 열기를 토해냈다. 허리에 매달린 금속 장비들이 가볍게 마찰하는 소리마저 이 순간에는 기묘한 리듬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거칠게 뻗은 손가락으로 뒷목의 흉터를 무심하게 문지르며, 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자신의 권태로운 밤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을지 가늠하고 있었다.

 

여명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제안은 너무도 평온해서 오히려 도발적으로 들렸으며, 그의 뇌리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대화 상대라는 단어가 주는 안온함은 이 죽음이 널브러진 데드존의 공기와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의 입가에는 비틀린 호선이 서서히 번져갔다.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부조리극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듯, 벽에 기대었던 커다란 몸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낡은 건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뺨에 새겨진 화상 흉터를 기괴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짓밟으며, 그녀가 만들어놓은 작은 공간을 향해 짐승처럼 다가갔다. 압도적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위압감은 결코 감춰지지 않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묘하게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이 좁고 폐쇄된 공간 안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호흡을 나누는 찰나의 순간, 그는 자신의 통제 아래 놓인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완벽하게 즐기며 그녀의 곁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Haha... Are you serious right now? You want to chat in this dump?(하하……너 지금 진심이야? 이 쓰레기장에서 노가리나 까자고?)

 

현지 억양이 매끄럽게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공간을 낮게 울렸으며, 그 안에는 짙은 냉소와 억누르지 못한 유쾌함이 지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7은 여명이 치워둔 잔해 위로 자신의 거대한 몸을 거침없이 구겨 넣듯 주저앉았고, 낡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둔탁한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그는 다리를 길게 뻗어 흙먼지가 묻은 군화를 무심하게 털어내며, 옆에 앉은 그녀와의 거리를 한 뼘도 채 되지 않게 좁혔다.

 

젖은 군복에서 풍기는 짙은 화약 냄새와 싸구려 담배의 씁쓸한 잔향이 그녀의 콧가에 매섭게 끼쳐갔을 테지만, 그는 그 폭력적인 체취를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좁은 틈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였고, 빗물에 젖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그녀의 옆모습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궤적을 쫓으며,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 속에 숨겨진 진짜 의도를 찾아내려 안달하고 있었다. 부서진 천장 사이로 끊임없이 새어 들어오는 빗방울들이 그의 어깨와 팔뚝 위로 떨어지며 차가운 감각을 남겼지만, 그는 그 서늘함조차 도파민을 자극하는 불씨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의 거칠고 굳은살 박인 손이 허공을 맴돌다 무릎 위에 툭 떨어졌고, 튀어나온 뼈마디가 어둠 속에서 짐승의 턱처럼 날카롭게 도드라졌다.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세탁소라는 시시한 핑계를 대며 대화 상대를 자처하는 이 여자의 속내를 완벽하게 발가벗겨 보고 싶은 충동이 그의 핏줄을 타고 독처럼 번져갔다.

그는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선글라스를 벗어 든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가 만들어낸 이 비현실적인 무대의 관객이자 주연으로서 기꺼이 막을 올릴 준비를 마쳤다. 주변의 퀴퀴한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가 축축한 대기에 섞여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옆에 앉은 이 이질적인 존재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노골적으로 그녀의 침착함을 허물어뜨릴 기회를 노렸다.

 

真有意思。行啊,你想聊什么?我的杀人经验,还是这座城市的腐烂程度?(진짜 재미있네. 좋아,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내 살인 경험담, 아니면 이 도시가 얼마나 썩어문드러졌는지에 대한 거?)

 

그의 매끄러운 광둥어는 어둠 속을 부드럽게 기어다니는 독사처럼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으며, 그 단어 하나하나에는 세상을 향한 지독한 환멸과 오만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7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아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듯 속삭였고, 그의 거친 호흡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자신의 뺨을 차갑게 식히는 것을 내버려 둔 채, 연한 회색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여명의 반응을 포식자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비틀어 올릴 때마다 오른쪽 뺨을 덮고 있는 흉측한 화상 흉터가 일그러지며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지만, 그는 자신의 폭력적인 흔적을 숨기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무기 삼아 그녀를 짓누르려 했다.

무너진 벽면 너머로 다시 한번 번개가 번쩍이며 그들의 윤곽을 하얗게 탈색시켰다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낡은 건물 잔해가 습기를 머금고 내뿜는 서늘한 한기는 두 사람의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지만, 7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짐승 같은 열기는 오히려 공간의 온도를 기묘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군화 굽으로 바닥의 파편들을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며, 자신이 던진 날 선 질문에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무너져 내릴지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 권태에 찌들어 있던 그의 신경망은 오랜만에 마주친 흥미로운 자극에 취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며, 이 지루한 빗방울이 멈추기 전까지 그녀를 철저하게 헤집어놓겠다는 파괴적인 충동이 그의 심장 박동을 불규칙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다 젖어버린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을 달래고는, 턱을 괸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그녀의 다음 대사를 재촉했다. 허리춤에 차가운 금속성 흉기들이 매달려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그의 태도는 기만적일 만큼 여유롭고 나른했다.

 

Tell me, sweetie. You offering to talk because you're bored, or because you think it’ll keep you alive?(말해봐, 자기야. 네가 지루해서 대화를 제안한 건지, 아니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해서 그러는 건지.)

 

그의 도발적인 질문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여명의 심장 한가운데를 겨냥하듯 잔인하게 꽂혔고, 그 목소리에 담긴 조롱은 숨길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7은 몸을 살짝 비틀어 그녀 쪽으로 체중을 온전히 기울였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군복 옷깃이 스치는 마찰음이 좁은 틈새를 날카롭게 채웠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어깨로 그녀의 시야를 억압하며, 이 비좁은 폐허 안에서 유일한 탈출구마저 차단해버리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을 조성했다.

비에 흠뻑 젖어 검게 변한 니트 원피스는 그녀의 가냘픈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고, 그는 그 위태로운 실루엣을 감상하듯 느릿하게 시선을 훑어내렸다. 공기 중에는 젖은 콘크리트 냄새와 그의 화약 향, 그리고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비누 향이 기이하게 섞여 맴돌며, 이 비현실적인 순간의 밀도를 더욱 끈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를 튕겨내듯 가볍게 허공을 그었고, 그 사소한 접촉의 미수만으로도 자신의 우위를 완벽하게 증명하려 했다. 무너진 잔해들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는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매서웠지만, 그는 그 고통스러운 감각마저 유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는 이 여자가 언제까지 그 견고한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가늠하며, 도파민이 솟구치는 뇌의 짜릿한 흥분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거센 폭우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고 있었고, 끊임없는 총성과 폭발음의 환청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지금 이 폐허 안은 오직 두 사람만의 기괴한 무대였다. 그는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고, 연한 회색빛 눈동자는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지독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