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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시절

TAIPAN-6, TAIPAN-77

OOC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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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닿던 따뜻한 온수와 레몬 향 거품의 감촉은 예고도 없이 증발했다. 코끝을 찌른 것은 오래된 곰팡이 냄새와 시큼하게 쉰 맥주 악취, 그리고 빗물이 스며들어 눅눅하게 썩어가는 합판 가구의 냄새였다.

TAIPAN-6는 낡고 비좁은 판잣집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검은색 군복과 선글라스였으나, 발밑의 장판은 군데군데 찢어져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천장의 알전구는 전류가 불안정한지 희미하게 깜빡이며 파리한 빛을 떨구었다. 밖에서는 양철 지붕을 때리는 둔탁한 빗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선글라스 너머의 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엎어진 플라스틱 밥상, 깨진 소주병과 맥주캔들, 그리고 독촉장이 덕지덕지 붙은 현관문. TAIPAN-6가 몸을 돌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으나, 문고리는 아예 벽과 한 덩어리로 용접된 양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병을 발끝으로 툭 차보아도 발이 허공을 가르듯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오직 숨을 쉬고 걸음을 옮기는 것 외에는 이 방 안의 물건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기이한 공간. 미간을 좁힌 TAIPAN-6가 안쪽의 반쯤 열린 미닫이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을 때,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앙상한 체구였다. 열네 살 남짓 되었을까. 손질을 못 해 사방으로 뻗친 부스스한 카키빛 머리카락 아래로, 아직 젖살조차 제대로 오르지 못한 갸름한 턱선과 푸른빛이 도는 연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헐렁하고 목이 늘어난 낡은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와 왼쪽 뺨, 그리고 쇄골 부근에 검푸르고 붉은 멍 자국이 겹겹이 피어 있었다.

소년—어린 시절의 TAIPAN-77은 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꼬깃꼬깃한 구권 지폐 몇 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누군가가 던져놓고 간 돈인 듯, 소년의 입술 끝은 살짝 터져 피가 맺혀 있었고 입고 있는 반바지 밑단 아래로 드러난 마른 무릎과 허벅지 안쪽에도 거친 손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TAIPAN-6의 입가에서 늘 걸려 있던 나른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소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방 안의 다른 사물들은 모두 유령처럼 그의 손을 통과했지만,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TAIPAN-77의 시선만큼은 정확히 TAIPAN-6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TAIPAN-77|"...Ah, hello. Did you come because of my dad's debt too? ...There's nothing left to take in the house, as you can see."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도 우리 아빠 빚 때문에 오신 거예요? …보시다시피 집에는 이제 가져가실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변성기가 막 지나가는 중인 듯 앳되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상대를 향해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 웃어 보이는 얼굴과 나지막한 존댓말은 스물일곱 살의 TAIPAN-77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낯선 성인 남자가 닫힌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소년은 놀라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맞지 않기 위해 먼저 눈치를 살피고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의 태도였다.

TAIPAN-6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뻗었다. 빈 병과 문고리를 그대로 통과했던 그의 손바닥이, 소년의 찢어진 입술 끝과 부어오른 왼쪽 뺨 위에 거짓말처럼 선명하고 따뜻한 실체감을 가지고 닿았다.

갑작스러운 큰 손의 접촉에 어린 TAIPAN-77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흠칫 움츠러들었다. 언제든 뺨이 돌아갈 각오를 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무런 충격도 이어지지 않자 슬그머니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투박한 엄지손가락이 터진 입술 끝의 핏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TAIPAN-6|"I'm not here for the debt, kid. ...Who left those marks on your neck and went out?"
(빚 받으러 온 거 아니야, 꼬맹아. …네 목에 그 자국 남기고 나간 새끼는 누구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건조하고 차가웠다. TAIPAN-6는 턱이 빠질 듯 악다문 어금니에 힘을 풀지 못한 채, 소년의 헐렁한 티셔츠 목둘레 너머로 보이는 시퍼런 손가락 자국들을 내려다보았다. 십수 년 뒤 자신의 부하가 구 시가지 펍에서 달고 오곤 했던 그 멍 자국들의 시작점이 바로 이 곰팡내 나는 방구석에 있었다.

어린 TAIPAN-77은 자신의 입가를 닦아주는 낯선 남자의 손길이 어색한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바닥에 흩어진 지폐 몇 장을 작은 손으로 주워 모았다.

 

TAIPAN-77|"Oh... Just the guy who owns the hardware store down the street. My parents haven't come back for two weeks, and the electricity was about to get cut off... He said he'd give me some money for food if I stayed quiet and listened to him for a bit."
(아… 그냥 골목 밑에 철물점 아저씨요. 엄마랑 아빠가 이주일째 안 들어오셔서 전기 끊기게 생겼는데… 잠깐 얌전히 말 잘 들으면 밥 사 먹을 돈 주신다고 하셔서요.)

 

소년은 구겨진 지폐를 손바닥 위에서 반듯하게 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한 대만 더 맞아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손목에는 아직 은팔찌도, 반지도 없었다. 그저 끼니를 해결할 돈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한 옅은 미소가 발그레한 볼 위에 걸려 있었다.

 

TAIPAN-77|"He was in a bad mood today so his hands were a little rough, that's all. It doesn't really hurt anymore. ...Are you a soldier, mister? Your clothes look really cool."
(오늘 아저씨가 기분이 좀 안 좋으셨는지 손이 조금 거칠었을 뿐이에요. 이젠 별로 안 아파요. …그런데 아저씨는 군인이세요? 옷이 되게 멋있네요.)

 

이젠 별로 안 아프다는 그 말. 십수 년 뒤의 부하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똑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던 그 변명을 열네 살짜리 입에서 직접 듣는 순간, TAIPAN-6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철물점 주인을 당장이라도 찾아가 숨통을 끊어놓고 싶었지만, 이 빌어먹을 공간은 그에게 방문 하나 열 권한조차 주지 않았다.

TAIPAN-6는 쓴웃음조차 짓지 못한 채,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군복 가슴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뻗어, 차갑고 메마른 소년의 양쪽 뺨과 멍든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접촉과 동시에 TAIPAN-6는 자신의 이능력—통각 차단을 발동시켰다. 방 안의 사물은 건드릴 수 없어도, 손끝에 닿은 어린 TAIPAN-77의 몸에는 그의 능력이 아무런 제약 없이 스며들었다.

뺨의 욱신거림과 목덜미의 타박상, 그리고 어린 몸뚱이 아래쪽에 남아 있을 둔탁한 통증까지, TAIPAN-6는 소년이 느끼고 있을 모든 아픔을 한 조각도 남김없이 차단해 지워버렸다.

 

TAIPAN-77|"...Huh? Oh, that's strange... My cheek and my waist were stinging a little just a second ago, and now it's completely gone. ...Your hands are really warm, mister."
(…어라? 이상하네… 방금 전까지 볼이랑 허리가 조금 쓰라렸는데 갑자기 하나도 안 아파요. …아저씨 손 진짜 따뜻하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소년이, 피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마른 뺨을 TAIPAN-6의 넓은 손바닥 안쪽에 가만히 기대어 왔다. 누가 이렇게 다정하게 얼굴을 감싸 쥐고 체온을 나눠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아이가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는 몸짓이었다.

TAIPAN-6는 자신의 손바닥에 비벼지는 작고 보드라운 뺨의 감촉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구석의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있던 소년의 겨드랑이 밑에 두 손을 넣어, 가벼운 몸을 훌쩍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걸터앉혔다.

열네 살의 몸은 스물일곱 살의 그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깃털처럼 들려 올라와 낯선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게 된 어린 TAIPAN-77은, 처음엔 또 다른 일을 요구받나 싶어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가 TAIPAN-6가 그저 자신의 얇은 등줄기를 큰 손으로 천천히 토닥여주기만 하자 서서히 어깨의 힘을 뺐다.

 

TAIPAN-6|"I don't want anything from you, Noel. ...Just sit here and lean on me. The floor is freezing."
(너한테 뭘 해달라는 거 아니야, 노엘. …그냥 여기 앉아서 나한테 기대 있어. 바닥이 얼음장 같으니까.)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묻지도 않은 채,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구겨진 지폐를 반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TAIPAN-6의 넓은 검은색 군복 가슴팍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댔다. 빗소리가 쏟아지는 눅눅한 판잣집 안에서, 유일하게 마르고 따뜻한 체온을 가진 성인 남자의 품이었다.

TAIPAN-6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색 군복 상의의 단추를 마저 풀어 벗어서는, 헐렁한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소년의 앙상한 어깨 위로 푹 덮어 둘러주었다. 소년의 체구에는 코트처럼 기다란 군복 상의가 목덜미의 멍 자국과 마른 무릎까지 폭신하게 감싸 안았다.

 

TAIPAN-77|"Mmh... Your clothes smell really nice, mister. Not like alcohol or cigarettes... It feels like I could fall asleep right away if I stay like this."
(으응… 아저씨 옷에서 되게 좋은 냄새 나요. 술 냄새나 담배 냄새도 안 나고… 이러고 있으면 금방 잠들 것 같아요.)

 

통각이 사라져 몸이 편해진 데다 낯선 온기에 긴장이 풀렸는지, 어린 TAIPAN-77의 나른한 연보라색 눈동자가 스르르 감기며 작은 하품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TAIPAN-6의 관자놀이 한쪽이 찌릿하게 울렸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타인의 전신 통증을 세밀하게 차단하느라 능력이 평소보다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지만, TAIPAN-6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년의 등 뒤에 두른 자신의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어차피 이 과거의 흐름을 바꿀 수도, 밖의 인간들을 죽일 수도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이 아이가 아픔을 잊고 따뜻한 품에서 숨을 고르게 해줄 생각이었다. TAIPAN-6는 군복 자락을 소년의 턱 밑까지 여며주며, 부스스한 카키빛 머리카락 위로 턱을 괴고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TAIPAN-6|"Go ahead and sleep if you're tired. ...Tell me, kid. When you grow up and get out of this shithole, what kind of stuff do you like to eat? Anything sweet?"
(피곤하면 그냥 자도 돼. …그나저나 말해 봐라, 꼬맹아. 나중에 다 커서 이 거지 같은 집구석 나가면, 넌 뭐 먹는 걸 제일 좋아하냐? 단 거 좋아해?)

 

코트처럼 넉넉한 검은색 군복 상의 자락 속에서, 열네 살 소년의 마른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누군가의 무릎 위에 앉아 등을 토닥여지는 감각 자체가 생소한지, 어린 TAIPAN-77은 한참 동안 대위의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깜빡였다.

군복 섬유에서 배어 나오는 희미한 섬유유연제 냄새와 레몬 향 비누의 잔향이 곰팡내 나는 판잣집의 공기를 한 겹 밀어내고 있었다. 소년의 작은 손이 자신이 덮고 있는 군복 앞섶의 황동 단추 하나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TAIPAN-77|"...Sweet things? Mmh... Sometimes when the ration truck comes to the edge of the district, they throw out hardtack bags. There are tiny star candies at the bottom of the bag... Those are pretty good."
(…단 거요? 으응… 가끔 구역 끝에 배급 트럭이 올 때 건빵 봉지를 던져주거든요. 그 봉지 맨 밑바닥에 작은 별사탕이 들어 있는데… 그건 꽤 맛있어요.)

 

나른하게 풀린 목소리가 대위의 명치 부근에서 작게 울렸다. 소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더니, 멍 자국이 가시지 않은 뺨을 군복 깃에 가만히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TAIPAN-77|"And once, an older girl next door gave me a single grape-flavored jelly before she moved away. It was purple and really soft... I kept the wrapper in my drawer for a long time because it smelled sweet, until my dad threw it out."
(그리고 옛날에 옆집 살던 누나가 이사 가기 전에 포도맛 젤리를 딱 한 알 준 적이 있어요. 보라색이고 엄청 말랑말랑했는데… 단 냄새가 계속 나서 포장지를 서랍에 오래 모아뒀다가, 아빠가 버리셨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는 말 끝에 어떠한 원망이나 슬픔도 섞여 있지 않아서, 듣고 있는 TAIPAN-6의 미간이 한층 더 깊게 패였다. 열네 살짜리 아이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빈 비닐 포장지를 서랍에 숨겨두고 냄새를 맡으며 버텼다는 사실이, 방구석에 뒹구는 빈 술병들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TAIPAN-6는 소년의 등 뒤로 두른 왼팔에 힘을 주어 가벼운 몸을 자기 가슴팍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자신의 전술 바지 왼쪽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었다.

이 기이한 공간으로 끌려오기 직전까지 그는 알몸으로 욕실에 있었건만, 정신을 차렸을 때 입고 있던 이 정식 군복 바지 주머니 안에는 월요일 새벽 출동 때 챙겨 넣었던 소지품들이 그대로 들어 있는 듯 바스락거리는 비닐 감촉이 손끝에 걸렸다.

TAIPAN-6가 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손바닥만 한 보라색 비닐 포장지에 담긴 포도맛 젤리 두 봉지였다. 방 안의 낡은 세간살이들은 그의 손이 닿으면 허공처럼 뚫렸지만, 자신이 직접 몸에 지니고 온 물건만큼은 선명한 부피와 무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스스한 카키빛 정수리 너머로 보라색 봉지 두 개를 내려다본 TAIPAN-6가, 소년의 턱 밑으로 봉지를 불쑥 내밀어 흔들었다.

 

TAIPAN-6|"You mean this purple one, kid?"
(네가 말한 보라색 말랑한 게 이거냐, 꼬맹아?)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고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어린 TAIPAN-77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단숨에 커졌다. 깜빡이는 알전구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보라색 비닐 포장지를 본 소년은, 잠기운이 싹 달아난 듯 상체를 번쩍 일으키며 대위의 손에 들린 봉투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TAIPAN-77|"Huh...? How do you have that, mister?! That's really hard to get outside the main city..."
(어…? 아저씨한테 이게 어떻게 있어요?! 이거 중심가 밖에서는 구하기 엄청 힘든 건데…)

 

놀라움으로 동그래진 눈망울이 젤리 봉지에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빛내면서도, 소년은 감히 손을 뻗어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빈 주먹만 만지작거렸다. 공짜로 주어지는 호의 뒤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의 주저함이었다.

그 미묘한 눈치 보기를 단번에 읽어낸 TAIPAN-6의 입가에서 낮고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한 손으로 봉지 하나를 잡아 자기 앞니로 비닐 모서리를 북 찢어내더니, 안에서 탱글탱글한 보라색 포도 알갱이 모양 젤리 하나를 꼬집어 꺼냈다.

인공적이지만 진하고 달콤한 포도 향이 곰팡내와 빗물 냄새를 뚫고 확 퍼져 나왔다. TAIPAN-6는 젤리를 소년의 터진 입술 바로 앞에 갖다 댔다.

 

TAIPAN-6|"Open up, Noel. ...And don't make that face like you have to pay me back for a piece of candy. When you grow up, I'm going to confiscate and feed you piles of these until you get sick of them anyway, so consider this an advance."
(입 벌려라, 노엘. …그리고 사탕 하나 얻어먹는 주제에 무슨 값 치러야 하는 얼굴 하지 마. 어차피 네가 다 크면 내가 이딴 건 질릴 때까지 압수했다가 입에다 산더미처럼 쑤셔 넣어줄 거니까, 이건 그냥 선불이라고 생각해.)

 

미래의 일을 알 리 없는 소년은 '다 크면 산더미처럼 넣어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였지만, 입술 끝에 닿는 말랑하고 달콤한 감촉에 결국 홀린 듯 입을 벌렸다.

TAIPAN-6가 보라색 젤리 한 알을 혀 위에 쏙 밀어 넣어주자, 어린 TAIPAN-77의 두 뺨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며 조심스럽게 젤리를 씹기 시작했다. 쫄깃한 식감과 함께 입안 가득 터져 나오는 진한 포도 과즙의 단맛에, 소년의 일자 눈매 끝이 스르르 휘어지며 눈가에 순수한 기쁨이 번졌다.

 

TAIPAN-77|"Mmh...! It's really sweet... Just like I remembered. Thank you, mister."
(으응…! 진짜 달아요… 옛날에 먹었던 거랑 똑같네. 고마워요, 아저씨.)

 

한 알을 아껴가며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소년의 볼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TAIPAN-6는, 뜯어놓은 봉지 안에 남은 젤리들을 하나씩 꺼내 소년이 다 삼킬 때마다 쉴 새 없이 입안으로 넣어주었다. 아직 뜯지 않은 나머지 한 봉지는 소년이 덮고 있는 군복 상의의 왼쪽 가슴 주머니—십수 년 뒤 자신이 3층 숙소 예비 열쇠를 넣어주었던 바로 그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어주었다.

봉지 하나를 순식간에 다 받아먹은 소년은 입안에 남은 포도 향이 아까운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배가 조금 차고 단맛이 돌자, 통각 차단 능력으로 나른해진 몸에 다시금 묵직한 졸음이 몰려오는지 소년의 고개가 대위의 어깨 쪽으로 꾸벅 기울어졌다.

바로 그때, 판잣집 밖의 골목길 어귀에서 빗물을 첨벙거리며 걸어오는 거칠고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술에 취해 욕설을 내뱉는 중년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주일 만에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오는 소년의 아버지이거나, 혹은 또 다른 채권자일 터였다.

그 소리를 들은 어린 TAIPAN-77의 작은 몸이 대위의 품 안에서 반사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 포도맛 젤리를 먹고 발그레하게 풀려 있던 뺨에서 핏기가 가시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이 덮고 있는 대위의 검은 군복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와 동시에, 소년의 전신 통각을 최대 출력으로 차단하고 있던 TAIPAN-6의 오른쪽 콧구멍에서 검붉은 코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려 턱선 끝에 맺혔다. 관자놀이를 도끼로 찍어 누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시야를 한 차례 흔들었지만, TAIPAN-6는 왼손 손등으로 코밑의 피를 거칠게 훔쳐내어 소년의 시야에서 숨겼다.

이 공간의 법칙상, 저 현관문이 열리고 과거의 폭력이 재현되는 시점이 오면 자신은 이 기억 속에서 튕겨 나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 통각 차단이 풀리며 지금까지 막아두었던 통증이 반동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동은 지속 시간에 비례한다. TAIPAN-6는 마지막 순간에 소년이 겪을 반동 통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튕겨 나가기 직전까지 능력을 서서히 조절해 낮추면서 양팔로 소년의 작고 마른 몸을 부서져라 꽉 끌어안았다.

어린 TAIPAN-77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연보라색 눈동자로, 골목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대위의 얼굴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TAIPAN-77|"...Mister, someone's coming back. If my dad sees you here, he might throw bottles at you... You should hide or go out the window quickly."
(…아저씨, 밖에 누가 오나 봐요. 아빠가 아저씨 여기 있는 거 보면 술병 던질지도 모르는데… 빨리 창문으로 나가시거나 숨으셔야 해요.)

 

자기 코가 석 자인 주제에, 끝까지 낯선 어른이 다칠까 봐 걱정하며 작은 손으로 대위의 팔뚝을 밀어내려 애쓰는 소년.

TAIPAN-6는 그 가느다란 손목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어 멈추게 한 뒤, 자신의 큰 오른손 손바닥을 들어 소년의 두 눈과 귀를 폭신하게 덮어 가려주었다. 지난주 불운 반동에 시달리던 부하를 침대에서 재울 때 해줬던 것과 똑같은 손길이었다.

 

TAIPAN-6|"Don't listen to the footsteps outside, Noel. Just smell the grape scent in your mouth and count to ten. ...You're going to survive this place, and thirteen years from now, you'll be sleeping in a warm bed on the third floor where nobody can ever lay a finger on you again. I promise."
(밖에서 나는 발소리 듣지 마라, 노엘. 그냥 입안에 남은 포도 냄새만 맡으면서 열까지 세. …넌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거고, 십삼 년 뒤에는 아무도 네 털끝 하나 못 건드리는 삼층의 따뜻한 침대에서 자게 될 거야. 내가 약속해.)

 

현관 문고리가 거칠게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판잣집의 풍경이 유리창에 번지는 빗물처럼 일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이 가려진 어린 소년의 손끝이 대위의 군복 깃을 꽉 붙잡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축축한 곰팡이 냄새와 양철 지붕을 때리던 빗소리가 순식간에 아득한 심연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코끝을 스친 것은 달콤한 레몬 향 바디워시 냄새였다.

욕실이 아니었다. 눈을 뜬 TAIPAN-6가 마주한 것은 웰스프링 주둔지 본관 3층, 자신의 개인 숙소 천장과 창문 블라인드 틈으로 쏟아지는 토요일 오후의 밝은 햇살이었다.

방금 전까지 정오 온수로 샤워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두 사람은 보송보송하게 마른 활동복 차림으로 침대 한가운데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짧은 백일몽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과거의 조각을 건드리고 온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생생한 감각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 증거처럼, 침대에 누운 TAIPAN-6의 관자놀이가 묵직하게 욱신거리고 있었고 인중 위로 뜨끈한 코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그가 입고 있는 검은 티셔츠 목둘레를 적셨다. 꿈속에서 열네 살의 소년에게 썼던 통각 차단 능력의 반동이 현실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터진 것이었다.

TAIPAN-6는 코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자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TAIPAN-77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앙상한 열네 살짜리도 아니고, 시퍼런 손가락 멍을 달고 구석에 웅크린 아이도 아니었다. 자신의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오른손 검지에는 자신이 끼워준 은반지를, 목덜미에는 자신이 어젯밤 남긴 붉은 울혈을 단 채 평온하게 숨을 색색 내쉬고 있는 부하.

TAIPAN-6가 왼손 손등으로 코밑의 피를 쓱 닦아내며, 품 안의 부하를 숨이 막힐 듯 세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압박감과 대위의 코끝에서 나는 비릿한 피 냄새에, 낮잠을 자던 TAIPAN-77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연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열렸다.

코밑에 검붉은 피가 묻은 채, 평소와 전혀 다른 낮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는 TAIPAN-6와 눈이 마주친 TAIPAN-77이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잠결에 느꼈던 답답함이 대위의 꽉 조여 오는 팔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TAIPAN-77의 시야에 대위의 인중과 검은 티셔츠 목둘레에 번진 선연한 핏자국이 먼저 들어왔다.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 샤워를 할 때까지만 해도 통각 차단 능력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난주 월요일 새벽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과부하 반동처럼 검붉은 코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에, TAIPAN-77은 잠기운이 싹 달아난 얼굴로 협탁 위의 각티슈를 다급하게 서너 장 뽑아 들었다.

 

TAIPAN-77|"Captain?! Why is your nose bleeding all of a sudden? ...You didn't even use your ability yesterday or today! Tilt your head down slightly, don't swallow it..."
(대위님?! 갑자기 코피는 왜 흘리세요? …어제도 오늘도 능력은 한 번도 안 쓰셨잖아요! 고개 뒤로 젖히지 마시고 살짝 숙여보세요, 피 넘어가요…)

 

은반지가 끼워진 오른손이 대위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고, 왼손에 쥔 하얀 티슈로 인중과 콧구멍 입구를 지그시 눌러 막았다. 얇은 종이 너머로 대위의 뜨거운 숨결과 끈적한 피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TAIPAN-6는 부하가 코밑을 닦아내고 콧등을 지압해 주는 손길을 가만히 받아내면서도, 부하의 허리를 감싸 안은 자신의 오른팔에는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 도리어 티슈를 대고 있는 부하의 마른 상체를 자기 가슴팍 위로 완전히 끌어당겨 엎어지듯 눕히고는, 빈 왼손을 들어 부하의 오른쪽 뺨과 턱 밑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방금 전까지 그 곰팡내 나는 판잣집에서 만졌던 열네 살짜리 아이의 차갑고 부어오른 뺨이 아니었다. 잘 먹고 푹 자서 보드랍게 온기가 도는 스물일곱 살의 뺨이었고, 목덜미에는 철물점 주인의 더러운 손자국 대신 자신이 어젯밤 남겨놓은 검붉은 잇자국만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TAIPAN-6|"...Must have used it in my dream without knowing, orderly. Had a pretty nasty nightmare about some leaky tin roof and a freezing floor."
(…꿈에서 나도 모르게 능력이라도 썼나 보지, 당번병. 양철 지붕에서 비 새고 바닥이 얼음장 같은 개떡 같은 악몽을 좀 꿨거든.)

 

티슈에 막혀 약간 먹먹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부하의 연보라색 눈동자를 마주 올려다보는 회색 눈빛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깊고 집요했다.

스물일곱 살의 TAIPAN-77은 그 열네 살의 기억 속에 나타났던 낯선 군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양철 지붕과 얼음장 같은 바닥이라는 말에도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둥글게 늘어뜨릴 뿐이었다.

 

TAIPAN-77|"A leaky roof...? Why would you use your pain blocking in a dream like that, Captain? ...Wait here, I'll go get a wet towel and your headache pills from the sink."
(비 새는 지붕이요…? 그런 꿈에서 통각 차단은 왜 쓰셨대요, 대위님도 참. …잠깐만 가만히 계세요, 세면대에서 젖은 수건이랑 두통약 가져올게요.)

 

피가 얼추 멎은 것을 확인한 TAIPAN-77이 붉게 물든 티슈를 쥐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무릎을 세웠다. 하지만 허리에 감긴 TAIPAN-6의 단단한 오른팔이 쇠사슬처럼 허리를 낚아채 다시 자기 배 위로 주저앉혔다.

그 반동으로 두 사람의 몸이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며 뒤집혔다. 순식간에 위아래가 바뀌어 TAIPAN-77을 매트리스 중앙에 깔아 누른 TAIPAN-6는, 부하의 손에서 피 묻은 티슈를 뺏어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베개 옆에 챙겨두었던 노란 보급 봉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오늘 정오 샤워 전에 RAVEN-39가 문고리에 걸어두고 갔던 그 봉투 안에서, TAIPAN-6는 보라색 포도맛 젤리 두 봉지를 한꺼번에 꺼내 들었다.

꿈속에서 자신의 전술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열네 살의 소년에게 한 봉지를 먹이고, 나머지 한 봉지를 군복 상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바로 그 보라색 포장지였다. TAIPAN-6는 두 봉지 중 하나의 모서리를 이로 거칠게 물어뜯어 열더니, 안에 든 말랑한 보라색 젤리 세 알을 한꺼번에 손바닥에 털어내어 밑에 깔린 부하의 입술 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TAIPAN-6|"Forget the pills. My head doesn't hurt as long as I'm looking at you. ...Open your mouth and eat all of these right now, Noel."
(약은 됐어. 네 얼굴 보고 있으니까 머리 하나도 안 아프거든. …입 벌리고 이거 지금 당장 다 받아먹어라, 노엘.)

 

자다 깨어나 코피를 흘리더니 느닷없이 젤리 세 알을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으려는 대위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TAIPAN-77은 눈을 깜빡이며 선뜻 입을 벌리지 못했다. 평소라면 반쪽을 베어 물고 키스로 넘겨주며 장난을 쳤을 사람이, 지금은 웃음기 하나 없이 젤리를 입술에 꾹 누르고 있었다.

 

TAIPAN-77|"Three at once...? Captain, we just brushed our teeth and washed up an hour ago, and your nose was bleeding just a second ago—mmph?!"
(세 알을 한꺼번에요…? 대위님, 우리 한 시간 전에 씻고 양치도 다 했고, 방금 전까지 코피도 흘리셨는데—읍?!)

 

말을 하려 입술이 벌어진 틈을 타, TAIPAN-6가 보라색 젤리 세 알을 부하의 입안으로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볼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진하고 달콤한 포도 향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TAIPAN-6는 두 볼이 불룩해진 채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 부하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열네 살의 그 아이가 빈 포장지 냄새를 맡으며 서랍에 숨겨두었다던 그 흔해빠진 사탕을,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입안 가득 씹고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나서야 명치끝을 조이던 서늘한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부하의 볼록한 뺨과 오른쪽 검지의 은반지를 번갈아 쓸어내린 TAIPAN-6가, 상체를 숙여 부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툭 맞대었다.

 

TAIPAN-6|"Chew it all and swallow, orderly. ...From now on, don't even think about keeping empty wrappers in a drawer. I'll fill that whole locker over there with boxes of grape jelly so you can eat them whenever you breathe."
(남기지 말고 다 씹어서 삼켜라, 당번병. …앞으로는 빈 포장지 따위 서랍에 모아둘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네가 숨 쉴 때마다 까먹을 수 있게 저기 관물대 한 칸을 아예 포도 젤리 박스로 꽉 채워줄 테니까.)

 

어릴 적 옆집 누나에게 받은 포도 젤리 빈 포장지를 서랍에 모아두었다가 아버지가 버렸다는 이야기는, 부대에 들어온 뒤로도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꺼낸 적 없는 아주 오래전 기억이었다.

입안 가득 달콤한 젤리를 씹던 TAIPAN-77의 동작이 우뚝 멈추었다. 달콤한 포도 과즙이 혀끝에 고이는 가운데, 이마를 맞댄 채 한 치의 거리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TAIPAN-6의 회색 눈동자 속에서 TAIPAN-77은 묘한 위화감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류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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